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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3 23:41
근데 이제 왕감자집착로맨스릴러(?)를 곁들인... 

대략 5만과편/견, 브ri저/튼 st 배경으로 생각해주면 될듯하나 고증없음ㅈㅇ
안 맞는 부분이 있다면 너른 양해 부탁해요우...

ㄴㅈㅈㅇ



I.



  윌헬미나 조운 "미나" 하포드. 


  하포드 후작가의 외동딸인 그녀는 작년까지만 해도 더닝엄 공작부인이라 불리었으나, 일곱 살 연상의 남편 더닝엄 공작이 죽자 작위를 내려놓고 친정 하포드 가로 돌아오면서 처녀 시절의 이름을 되찾았다. 
  실제로 그녀의 본명에는 몇 개의 미들네임이 더 있지만,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그녀 자신조차도 딱히 관심이 없었다. 혼인 증명서와 가계도에나 적혀 있을 뜻만 거창한 단어들의 나열은 그녀에게는 의미 없이 덧씌워진 또 다른 틀일 뿐이었다.
  티타임보다 독서를 좋아하고, 몽상을 즐기는 꿈 많은 소녀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빌리"라 지었다. 비록 일기장 속 친구처럼, 그 이름을 불러줄 다른 이는 이제껏 없었지만 그녀는 언젠가 이 이름으로 온 세계를 누비는 대담한 상상을 했다. 그 속에서 그녀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적어도 첫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난' 외동딸을 데뷔탕트에 성공적으로 올린 후작 부부는, 들어온 혼담을 고르고 골라 더닝엄 공작가의 장남을 딸의 부군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더닝엄의 장남은 신분은 구혼자들 중 제일 높을지언정 사생활은 그리 떳떳하지 못했다. 장남임에도 결혼을 몇 년째 차일피일 미루던 그는 더닝엄 공작의 눈을 피해 극장의 여배우와 남몰래 관계를 맺어오던 것이 발각됐다. 연인은 공작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 어느 부유한 상인의 아내가 되었지만 추문은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게다가 도를 넘은 그의 거만한 성격마저도 이미 소문이 자자해 다른 공작가에서는 그를 딸들의 배필로 맺어주기를 은연중에 꺼렸다. 
  아내와 갑작스레 사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의 문제까지 터지며 골치를 썩히던 더닝엄 공작은, 그해의 데뷔탕트에서 가장 주목받은 하포드 후작가의 외동딸 "미나"를 맏며느릿감으로 점찍었다. 후작가는 그가 처한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사돈감이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정략결혼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윌헬미나 하포드는 열 여섯이 되던 해 봄, 딱 세 번 만난 남자의 손을 잡고 대주교의 앞에서 평생을 약속하는 혼인의 서약을 했다.

  실연의 아픔을 달래보기라도 하려는 듯, 어린 아내의 아름다움에 빠진 더닝엄 공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맹목적인 애정공세를 했다. 순진했던 "빌리"는 자신에겐 조금 버거웠던 애정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하면 된다고, 그러면 평생동안 행복할 거라고 배웠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후계자가 될 손주가 태어나면 장남에게 작위를 물려주겠다는 더닝엄 공작의 선언도 방탕한 공자를 붙잡아놓는 데 꽤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두 사람은 성격부터 가치관까지 어느 것 하나 맞지 않았다. 정숙한 부부로서 믿음과 존중을 바탕으로 사랑을 쌓아나가기를 바랬던 아내와 달리, 남편에게 결혼이란 아버지의 분노와 계승권 박탈을 피해 울며 겨자먹기로 택한 차악일 뿐이었다. 모양이 맞지 않는 톱니바퀴가 헛돌다 이가 빠지듯, 더닝엄 공작이 병으로 쓰러지고서는 결혼이라는 모래성도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바랐던 아이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고, 공작의 병환으로 작위가 승계될 것이 뚜렷해지자 공자는 슬슬 눈을 돌렸다. 남편의 요구로 잠자리를 가지려던 하포드가 그의 나신에서 명백한 외도의 흔적을 발견한 밤, 두 사람은 크게 싸운 후 곧바로 침실을 따로 쓰기 시작했다. 부부관계 역시 그날로 끝이었다. 아버지 공작이 세상을 떠나고 마침내 작위를 이어받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남편의 의무를 저버린 채 본격적으로 바깥을 나돌며 혼외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제는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더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정부는 물론이요 하룻밤 불만 끄는 사이까지 더하면 염문의 대상은 그 수조차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그러기를 몇 년, 껍데기만 남아있던 결혼 생활은 고작 스물 한 살에 남편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여러 정부들 중 동시에 혼외자를 임신했다는 두 사람을 두고 저울질을 하다 싸움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은 상상임신, 다른 사람은 거짓 주장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죽은 더닝엄 공작은 그야말로 웃음거리가 되었다. 부끄러운 최후를 맞은 건 공작이었으나, 사고사로 얼버무려진 남편의 죽음 이면에서 세간의 무례한 입방아를 받아내는 것은 오롯이 공작부인의 몫이 되었다. 더구나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적법한 후계자를 생산해내지 못한 그녀에게 있어 공작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위태로웠던 발밑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았다. 

  작위는 죽은 공작의 아우인 차남에게로 넘어갔다. 공작저의 새 주인이 된 차남 부부 역시 공작부인보다 연상이었기에 그녀로서는 손아랫사람으로 대하기도 어려웠다. 후작가 출신에다 저들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하포드를 존중하는 척 은근히 낮잡아 보던 이들이었다. 공작부인이 상복을 입고 의무적인 애도 기간을 거치는 동안, 유산과 상속의 정리는 모두 차남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와 함께 공작가 내에서 그녀의 위치도 더 이상 공작부인이 아닌, '선대 공작의 미망인'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벼락을 맞듯 공작위를 달게 된 차남은 적어도 겉으로는 형수를 존중했으나 새 공작부인은 달랐다. 그녀가 공작저에 들어와 처음 한 일은 본채에서 하포드의 짐을 모두 빼내어 별채로 옮기는 것이었다. 애도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 공작부인은 상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저택에 딸린 것이라면 먼지 한 톨까지 제 것으로 만들려는 탐욕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불 보듯 뻔했다. 하포드의 입에서 '공작가를 떠나겠다', 그 한 마디를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죽은 공작이 호색한이었다면, 차남 부부는 나란히 도박에 빠져 있었다. 벌써 꽤 많은 재산이 새 공작의 손을 거쳐보기도 전에 채권자들에게로 넘어갔다. 평소 그들의 인품으로 미루어 보아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짐작했지만, 실제로 마주하고 나니 퍽 우스웠다. 애초에 이쪽은 욕심도 내지 않은 것을, 빼앗기지 않겠다며 저들끼리 이를 악물고 틀어쥐는 꼴이란.
  설 자리가 없는 곳에 불편을 감수하며 집착할 성정도 아니었던 하포드는, 애도기간의 마지막 날 공작가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각서에 주저 없이 서명했다. 별채로 돌아간 그녀는 자신의 시종들과 함께 짐을 쌌다. 친정에서부터 가져온 것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챙기지 않았더니 공작부인의 이삿짐이라기엔 단출했다. 후작가에서부터 그녀를 따라 온 이들은 주인을 따라 떠날 채비를 했다. 
  그로부터 사흘째 되던 날의 어스름한 새벽, 공작저에는 하포드 후작가에서 보낸 마차 두 대와 짐마차가 당도했다. 이른 시간부터 사용인들이 모여 안주인이 떠나는 길에 등불을 밝혔다. 안하무인이었던 바깥주인과는 달리 선하고 현명한 부인을 모시며 정들었던 이들이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녀는 그런 그들을 향해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작별을 고하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공작령의 철문을 뒤로 하자, 하포드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 비좁은 마차 안이 공작령의 그 어느 곳보다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후련함도 잠시뿐이었다. 말머리는 하포드 후작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차의 창문 밖으로 동이 터올랐으나, "빌리"의 삶은 또다시 저물어가고 있었다. 
강 위에 놓인 다리를 지나며, 하포드는 말이 갑자기 날뛰는 상상을 했다. 마차의 고리가 끊어지고, 바퀴가 빠지며, 모두가 무사하지만 그녀가 탄 마차만이 저 아래로 굴러 떨어져 강의 밑바닥에 처박히는 상상을.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을 겨우 벗어난 그녀의 앞에,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깊은 숲이 기다리고 있었다.


*


  가문의 자부심이었던 딸이 한순간에 사교계에서 물어뜯기는 가십거리로 '전락'하자, 후작은 한탄하고 후작부인은 분노했다. 그들은 이제 막 상복과 베일을 벗은 딸에게 다시 드레스를 입히고 장신구를 채워 화가 앞에 앉혔다. 혼담을 넣기 위해서는 초상화가 다시 필요했다. 하포드의 첫 혼담이 오갈 때 공작가에 보냈던 초상화는, 나라에서 손꼽히는 초상화가에게 의뢰해 거금을 들여 완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문에서 보냈던 것임에도 공작저를 떠나면서 가지고 나올 수 없었다. 초상화의 모델이 하포드일 뿐, 엄연히 공작가의 재산이라는 이유였다.

  초혼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공을 들인 재혼은 생각만큼 수월하게 풀리지 않았다. 후작 가문의 외동딸이면서 사별한 남편이 공작임에도 그러했다. 남편의 문란함은 곧 아내의 결함으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세간에 유명했던 호색한의 부인이었던 "윌헬미나 하포드"는 재혼시장에서도 썩 '매력적인' 구혼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들어온 혼담들은 후작 부부가 기대했던 '격이 맞는' 가문이 아닌, 멀리 백작가나 자작가, '심지어' 남작 가문—후작부인은 감히 졸부 따위가 주제를 모르고 후작 가문을 모욕한다며 폭발했다—에서 온 것이었다.
  남편을 잃은 딸이 아직 상실의 아픔에 젖어있다는 그럴듯한 핑계로 그 '쭉정이'들을 전부 거절하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반 년이 흘러 있었다. 남은 것은 말년에 늙고 병든 몸을 돌보아 줄 젊은 후처를 원하는 노귀족들에게서 온 구혼장이었다. 결국 후작이 그 중 하나를 수락할 뜻을 내비친 날, 빌리 하포드는 살면서 처음으로 전에 없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아무리 제가 못나고 부끄러운 딸이라 해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실 수가 있어요?"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어중간한 미망인으로 사는 것보다 나은 길이니까!"

  "하, 저를 위해서라고요? 천만에요! 대단하신 후작가의 명예와 후작 부부의 체면을 위해서겠죠!"

  "윌헬미나 하포드!"

  "늙은이의 눈요깃거리가 되어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겠어요!"


  짝-. 거친 파열음과 함께 가녀린 고개가 꺾이듯 돌아갔다. 그 순간 그 곳에 있던 다른 이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후작부인이 낀 반지에 긁힌 뺨에 생채기가 나, 붉어진 볼을 타고 한 줄기의 피가 흘렀다. 하포드는 얼얼한 통증이 느껴지는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묻어나오는 붉은 자욱이 보이자 부릅뜬 눈이 총기를 잃고 풀렸다. 그녀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가씨! 유모와 시녀들이 울먹이며 달려와 무너지는 하포드의 몸을 부축했다. 후작은 아내의 행동에 놀라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후작부인은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것도 잠시, 곧 차가운 눈빛으로 딸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입을 열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평민이었다면 어떻게든 스스로 살아낼 수 있겠지."

  "..."

  "하지만 귀족으로 자란 네가 지금 당장 나가서 평민의 삶을 산다면, 넌 겨우 반나절도 견디지 못할 거다."

  "...부인,"

  "네가 먹고, 입고, 꾸미고, 손에 쥐었다 놓는 모든 것이 네 신분에서 나오는 거야. 그걸 어떻게든 지키는 게 네가 사는 길이란 걸 명심해라!"


  후작부인은 매정히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딸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후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아내의 뒤를 따랐다. 시녀들이 하포드의 몸을 일으켜 카우치에 앉혔다. 깨끗한 면포를 가져와 적셔서 눈물과 엉긴 피를 조심히 닦아내고, 떨리는 몸에 담요를 둘렀다. 후작의 전갈을 받고 온 가문의 주치의가 제법 크게 난 얼굴의 상처를 치료하는 중에도, 그녀의 표정에는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그저 텅 빈 눈으로 방문과 바닥, 그 사이 어딘가에 시선을 던져둘 뿐이었다. 감정을 털어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 날 이후, 후작부인의 명령으로 하포드의 곁에는 언제 어디서나 시녀가 따라붙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켰다. 얼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며 흉 없이 아물었지만, 마음은 너덜너덜해진 채 그대로 자물쇠가 달린 상자 속에 감춰졌다.


*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후작은 딸의 재혼상대를 찾고자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렸다. 손바닥 크기 정도의 작은 초상화를 동봉한 "윌헬미나 하포드"의 구혼장은, 후작이 가진 인맥을 총동원한 끝에 유럽 각지의 지체 높은 귀족가문에 보내졌다.
  그리고 마침내 카잔스키 가문의 인장이 찍힌 서신이 후작저에 도착한 날, 후작 부부는 응접실에 딸을 앉혀놓고 그녀의 새 남편으로 점찍은 카잔스키 공작에 대해 통보하듯 늘어놓았다.


  "토마 이바노비치 카잔스키 공작, 나이는 서른여섯이고, 십여 년 전에 첫 부인과 사별했다더구나."

  "방계로 러시아 황실과도 혈연이 가까운 가문이다. 이제까지의 혼담과는 감히 비교조차 무례한 수준이지."

  "이건 다시 없을 기회야, 미나. 우리 가문의 위신과 네 신분을 되찾을 단 한 번의 기회."

  "공작도 재혼이고 하니,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멀리서 온 어린 부인을 함부로 내치지는 않을 게다."


  물론 하포드의 귀에는 그 무엇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선택할 수 없는 건 귀담아들을 필요도 없으니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스치듯 흘려보내고, 후작 부부의 뜻대로 고분고분하게 고개만 끄덕이면 그만이었다.


*


  상대가 정해지니 결혼 준비는 순조로웠다. 서로 두 번째 결혼인데다, 믿을 만한 지인으로부터 카잔스키 공작이 검소하고 허례허식을 지양하는 성품이라는 말을 전해들은 후작 부부는 전과 달리 힘을 빼고, 꼭 필요한 부분에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도록 모든 것들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가문끼리 정식으로 교환하는 약혼 상대의 초상화였다. 하포드는 이제껏 초상화를 위해 입은 옷차림 중 가장 수수한 차림으로 화가 앞에 앉았다. 자연스럽고 검소한 분위기를 주되 초라해보이지 않도록, 후작부인의 까다로운 주문을 화가는 능숙한 솜씨로 그려냈다. 완성된 초상화 속 하포드의 표정 역시 그에 맞춰 은은하면서도 한결 편안한 미소였다. 


  "저는 새 초상화도 물론 좋지만, 두고 오신 전의 초상화가 너무 아까워요. 귀한 그림을 그런 누추한 곳에 둬야 하다니!"

  "말 조심하거라, 호넷."


  어린 시녀 아이 하나가 철없이 투덜대다 유모에게 꾸중을 듣는 걸 보며, 하포드는 생각에 잠겼다. 비단 드레스를 입고 몸 곳곳에는 온갖 보석을 빠짐없이 두른 채, 수풀을 배경으로 고운 미소를 짓고 있던 소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낯선 상황 속에서도 행복만을 꿈꾸었던 어린 날의 자신을 담았던 그림을 떠올렸다. 공작저의 회랑 가운데 한껏 자신만만한 공작의 초상화 옆, 금빛 액자를 두르고 박제처럼 걸려 있던 모습까지도.
  그 모든 것들이 마치 공작저에서 그녀의 위치를 상기시키는 것만 같아,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불쾌하기만 했었다. 당연히 그림이 제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누군가 그 저택에서의 지옥같았던 나날을 제 인생에서 지워주는 대가로 그 그림을 요구한다면, 얼마든지 던져줄 수 있었다.


  "됐어. 유화라 불에 잘 탈 테니, 땔감으로나 쓰라지."


  그렇잖아도 거긴 항상 춥고 흐리잖아. 하포드의 뼈 있는 농담에, 유모는 그녀가 안쓰러워 작은 한숨만 내쉬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 쯤 지나 카잔스키 공작가의 사람이 공작의 초상화를 가지고 하포드 후작가의 저택을 찾았다. 공작이 후작 부부와 약혼자에게 각각 한 통씩 보내는 서신과 함께였다. 후작 부부에게 보낸 편지는 한 달 후, 공작이 사업 관계로 런던에 올 계획이니 그에 맞춰 약혼자와 그녀의 양친을 만나기 위해 후작저를 방문하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공작의 비서는 그의 주인이 이 나라에 한 달 정도 머무를 예정이라고 덧붙이며, 그 동안 후작저의 손님방에서 공작과 그의 사용인 두어 명이 머무를 수 있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정중한 요청의 형태를 띤 요구였다. 편지를 읽어내려갈수록 후작 부부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그들은 곧바로 공작의 비서에게 화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와 가족이 될 분이신걸요."

  "머무르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정성껏 준비하겠습니다."

  "뭐 하고 있는 거니, 미나? 어서 열어서 읽어보지 않고?"

  "...나중에요. 혼자서 차분히 읽고 싶어서요."


  손에 든 편지를 구겨지지 않게 들고 있는 하포드에게서는 몸에 밴 예의와 기품이 느껴졌으나, 그녀의 담담한 눈빛에 이 상황에 대한 기대나 관심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런 하포드를 지켜보던 공작의 비서의 얼굴에는 특유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잠깐 스쳤다. 그는 제 뒤에 선 짐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짐꾼은 후작가에서 준비해 놓은 받침대 위에 자신이 들고 있던 공작의 초상화를 포장된 그대로 올렸다.


  "마침 모두 계신 자리이니, 공작 각하의 초상화를 정식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윽고 그가 포장을 풀어내리자, 군대의 정복 차림을 한 카잔스키 공작의 초상화가 드러났다. 

  하포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단지 덧칠된 물감 덩어리인데도 단숨에 그녀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잿빛의 눈동자였다.


  검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잘 벼려진 칼날 같은 서늘한 눈매와 도톰한 입술 옆 칼끝을 닮은 입꼬리.


  나의 두 번째 남편이 될 남자.


  당신이 나를 이 곳에서 꺼내어 가져가겠다면,
  부디 한시빨리 나에게 싫증이 나 버려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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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ts 크오 시니어하포드ts 시포드ts
2024.03.13 23:5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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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나더없으면 저 죽어요진짜 센세........!!!!!!!!!!!
[Code: 5196]
2024.03.13 23:5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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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포드ts는 왤케 시대물이 잘어울리는지 ㅠㅠㅠㅠㅠㅠ 과연 카잔스키 공작이 하포드를 수렁에서 꺼내줄것인지 저 오늘 잠 못자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5196]
2024.03.14 00:0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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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의 서막에서 센세를 뵙습니다 ㅌㅌㅌㅌㅌㅌㅌㅌ와와 센세 이게 뭐야 이런 작품을 공짜로 봐도 되는걸까? 읽는 내내 영화처럼 장면이 펼쳐지는 느낌이야 하포드의 고고하고 순수한 내면이 작위가 아까울 정도로 천박한 첫번째 결혼으로 상처가 난게 마음 아프다
[Code: c64b]
2024.03.14 00:0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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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를 이 곳에서 꺼내어 가져가겠다면,
부디 한시빨리 나에게 싫증이 나 버려주기를...이런 마음으로 두번째 남편을 기다리는 하포드라니 찌통인데 ㅈㄴ 맛있어 센세 길에 떨어진 1 들고 왔어요 잘 벼려진 칼날같은 눈빛의 카잔스키와 하포드의 첫만남이 너무 기대된다 ㅠㅠㅠㅠㅠㅠ
[Code: c64b]
2024.03.14 00: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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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의 시작이네요 센세!!!!!!!!
[Code: 9033]
2024.03.14 00:1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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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포드 분위기 진짜 죽여준다 씨발 너무 좋아....
[Code: 9880]
2024.03.14 00: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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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ㅊ 대작의 시작📸📸📸📸📸📸📸📸📸📸📸📸📸📸📸
[Code: 1498]
2024.03.14 00: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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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어린 하포드의 앞에 나타날 서늘하고 날카로운 카잔스키 공작 벌써부터 너무 맛도리라서 침이 안 멈추는 바람에 방금 꿉팡에서 턱받이 10개셋트 샀어 센세
[Code: afe0]
2024.03.14 01:0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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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아아악 리젠시의 시포드라니 이런 존맛이…!!
[Code: f589]
2024.03.14 13: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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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이다 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 미쳤어요
[Code: 90b2]
2024.03.14 13: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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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리젠시물이면 돌아버리는데 어케알고
[Code: 90b2]
2024.03.14 17: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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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 ㅑ...... 미친 대작의 시작에서 대문호 센세를 뵙사옵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미쳤다 진짜ㅠㅠㅠㅠ
[Code: e81e]
2024.03.15 18:0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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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1이 붙어있어 ㅜㅜㅜㅜ 너무 행복해
왕감자 집착 너무나 좋구요
[Code: 56e7]
2024.03.19 15:0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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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언제오세요 저 목빠질것가타요.....
[Code: 6ee2]
2024.03.25 11: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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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어.....나......더..............
[Code: cf7e]
2024.04.02 04:00
ㅇㅇ
시포드 색창 돌고 있어요
필력 미쳤다
[Code: 9a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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