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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4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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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皇弟) 오왕 대니 래두서가 시집가는 날에는 눈이 왔다. 아무리 꽃샘추위가 매섭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5월이 다 되어 가는 4월 늦녘인데 눈이라니.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인 오왕의 친모, 선황의 총비였던 귀비가 자식의 혼례에 한을 품은 것이 분명하다고 사람들은 남몰래 수군거렸다. 태후가 어린 오왕을 북부의 야만인에게 팔아 치우듯 시집 보내니, 귀비가 어찌 한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잘 살아야 한다."


  어린 대니의 하얀 얼굴은 꽁꽁 두른 모피 망토 때문에 더욱 새하얗게 돋보였다. 황제는 아직 한참 아기인 이복 동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그렇게 당부했다. 잘 살아야 한다.

  태후는 귀비 살아 생전에는 내내 그녀를 질투했었다. 그럴 만도 하지. 태후께는 차갑기만 하시던 선황이 귀비에게는 상냥하고 다정했으니. 귀비가 죽고 선황마저 붕어한 뒤에는 그 미움과 질투가 오왕에게로 모조리 옮아가서, 어린 오왕도 태후의 등쌀에 눈칫밥만 먹었다. 그리고 이 어린 것은 오늘, 북부로 시집을 간다.

  거대한 제국은 전부 다섯으로 나뉘어 있었다.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중앙, 네필림들이 사는 동부, 월록들이 거주하는 남부, 웨어울프의 땅인 서부. 그리고 북부는 뱀파이어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오왕이 시집가는 것은 바로 그 북부를 지배하는 젊은 영주였다.


  "잘 살겠습니다."


  대니가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제국 황실의 오메가들이 시집갈 때 입는 연녹색의 예복이 대니에게 잘 어울렸다. 눈물과 눈(雪)으로 물기 가득한 혼례에서 처연해야 할 신부인 대니만 유난히 싱그러웠다. 아직 어려서 제 처지를 모르는지, 아니면 심지가 단단해 각오를 굳히고 가는지.


  "형님 폐하도 강녕하십시오."


  북부의 뱀파이어라니. 제국 황실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제국은 네필림과 다운월더들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 그러나 그렇다 해도 네필림과 다운월더 사이에 차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황족들은 모두 네필림이며 황족과 피를 섞는 것도 모두 동부의 네필림 귀족들 뿐이다. 아무리 후궁의 자식이라고 할 지언정 황족이 다운월더와 혼례한 일은 제국 황실의 역사를 이 잡듯이 뒤져도 없었다.

  그러므로 오왕 대니가 뱀파이어와 혼인하는 것은 사실상 유배나 다름 없다고, 사람들은 태후의 귀를 피해 남몰래 속삭였다. 귀비를 미워한 태후가 오왕마저 제 눈 앞에서 치우려 내치는 것이라고.

  그런데 어린 오왕은 제 처지를 비관할 줄 모르고 혼자서만 씩씩했다. 아이고, 저 세상 물정 모르는 것. 아니야, 아니야. 정적인 태후께 흠 잡히기 싫어 그러는 것이지. 사람들이 오왕을 두고 뭐라고 제멋대로 떠들든, 오왕의 신세가 안타깝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 그러마."


  너도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한다. 북부는 춥다고 하니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먹을 것도 잘 챙겨 먹어야 하고, 잠도 제대로 챙겨 자야 하느니라. 아직 너는 어리고 어려 키가 자랄 날이 한참 남았으니. 어린 아이는 잘 자야 키가 쑥쑥 크는 법이다. 부황께서도 키가 크셨고 나도 장신이니 너도 잘 클 것이다. 잘 커야지, 우리 오왕.......

  어린 동생을 등 떠밀려 야만인에게 시집 보내야 하는 황제의 얼굴에도 시름이 깊었다.


  "예쁜 아이를 낳고, 낭군과 오순도순 잘 살아야 한다.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한다, 응? 아프지 말고, 설령 아프더라도 혼자 앓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거라."


  오메가가 아이를 낳다 숨지는 일이 빈번한 때였다. 이 어린 것이 북부의 야만인에게로 시집 가 어떤 고초를 겪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황제(皇弟)가 시집 왔다고 떠받들어주면 다행이련만. 그러나 북부의 야만인이 괜히 야만인이라고 불리겠는가. 뱀파이어는 피를 빨아 연명하는 자들, 그런 자들에게 어디 법이 있고 도덕이 있겠는가. 이 어린 것의 피마저 빨려 덤비지는 말아야 할 텐데.


  "괜찮습니다. 괜찮을 것입니다."


  오왕은 씩씩하고 귀여우니까, 거기서도 귀여움 받고 잘 지낼 것입니다.
  대니가 명랑하게 말했다. 황제, 알렉은 그 대책 없는 자신감에 그만 풋 웃었다. 아이고, 귀여워라. 그래, 대니는 비록 태후의 눈칫밥은 먹으며 자랐어도, 제 말마따나 귀엽고 씩씩해서 주변의 귀여움을 받았다. 알렉도 이 어린 것을 귀여워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대니이니, 북부로 가서도 잘 지내리라. 그렇게 믿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대니를 떠나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 도착하면 꼭 편지해라."


  응? 무사히 도착했다고, 아프지 않다고, 사람들이 잘 대해 준다고, 꼭 이 형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 응, 알겠느냐?
  황제의 거듭된 당부를 뒤로 하고, 대니를 태운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반은 황제의 근위대, 나머지 절반은 북부의 영주가 신부를 호위하러 보낸 북부의 병사들이었다. 털로 테두리가 둘러진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얼굴이 창백하고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자들. 

  그나마도 근위대는 채 일주일을 못 가 행렬에서 빠졌다. 황제의 직할령이 끝나고 북부의 영지가 시작되면서, 북부의 군대가 대니의 호위를 도맡기 시작한 것이다. 대니는 굳게 닫힌 마차의 창문 틈새로 흘끔흘끔 눈 덮인 나뭇가지며, 말 위에 오른 뱀파이어들의 표정 없는 얼굴을 훔쳐 보았다.


  "멈춰라!"


  밖에서 큰 소리가 나며, 멈추라는 호령이 들렸다. 대니는 마차 창문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 보았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말이 우는 소리 따위로 밖이 소란스러웠다. 중앙을 떠나 북부로 오는 동안 내내 봐서 비교적 익숙해졌던 얼굴 틈새로 낯선 얼굴들이 있다. 누구지? 대니는 갸웃거렸다. 북부의 영주가 신부를 맞이하러 사람을 보내왔나?


  "직접 오셨습니까?"
  "귀한 몸이니까."


  누군가 묻는 소리와 그에 대해 짧게 답하는 소리도 연달아 들었다. 두 목소리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그리고 마차를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 대니는 얼른 창문을 닫고 무릎 위에 양손을 모았다.

  그리고 문이 거칠게 열렸다. 대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제멋대로 문을 연 무뢰한을 바라보았다. 무뢰한은 다른 사람들처럼 모자를 쓰고, 검은 모피로 깃을 두른 옷을 입고 있었다. 모자 아래 얼굴은 다른 뱀파이어들처럼 창백하지만, 동시에 말간 느낌이 있었다. 길고 단정한 눈매 아래 서늘한 검은 눈동자는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두웠다.


  "네가 오왕인가?"
  "그렇소. 그러는 그대는 누구시오?"


  대니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꼭 맞잡았다. 누구긴 누구야, 대니의 낭군이 될 자겠지.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대니는 눈치도 없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대니는 황제의 아우, 선황의 막내 아들, 오왕이었다. 비록 태후의 미움을 사 쫓겨나는 처지일 지언정, 대니는 오왕이고 황족이었다. 선황의 친자였다. 그리고 황족은 제국 어디를 가든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무뢰한은 대니의 말에 대답 없이 대니를 물끄러미 보더니 피식 웃었다.


  "송구합니다. 북부 출신의 야만스러운 자인지라 감히 오왕 전하께 무례를 범했나이다. 신의 성은 웡, 이름은 폴. 미천하지만 북부의 주인되는 자이외다."


  목소리에 조롱이 가득했다. 대니는 남몰래 입술을 꾹 물었다.


  "오왕 전하께서 도착하셨다기에 직접 모시러 왔소이다."


  왜, 비천한 몸이라 꺼려지시오? 남자가 낄낄 웃었다. 어차피 너도 그 비천한 몸과 결혼해야 할 처지에 뭐 그렇게 잘난 척 유세냐는 야유였다. 대니는 눈을 깜박거렸다. 태후의 구박을 받으며 자라, 비웃음 당하는 것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또 막상 면전에서 조롱당하는 것은 다른 느낌으로 서글펐다.


  "북부는 중앙과는 퍽 다른 곳이외다, 오왕 전하."


  눈물을 참으려 고개를 수그렸던 대니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비아냥거리던 남자가, 거짓말처럼 따뜻한 눈을 하고 대니를 보고 있었다. 웃지 않았지만, 다정했다.


  "북부에 적응하시려면 시간이 좀 걸리실 거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대니는 괜히 오기가 치밀어 대꾸했다. 놀리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다정하게 대해주면 넘어 올 줄 아나 보지. 나를 그렇게 우롱하는 게야. 대니는 눈에 힘을 주었다. 황제이신 형님은 대니가 그렇게 눈에 힘을 주어 뜰 때마다 어이쿠, 짐짓 놀라는 척 하며 웃고는 했었다.

  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니를 내려다 보았다. 가소롭다는 듯이,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겠다는 듯이. 그러나 그는 곧 표정을 바꾸어 웃음을 터뜨렸다.


  "근성이 보기 좋소."


  그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을 잡으라는 뜻인가? 대니가 머뭇거리자, 그가 손가락 끝을 까닥였다. 얼른 잡으라는 듯이. 대니는 주저하며 손을 내밀어 폴의 손을 잡았다. 크고 단단하고 결이 거친 손이 대니의 손을 꽉 움켜 잡았다. 의외로 안정감이 있다고 대니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도 잠시, 폴은 힘을 주어 대니의 손을 끌어 당겼다. 어어, 하는 사이에 대니는 폴에게 끌려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폴은 그대로 대니를 이끌어 검은 말 위에 태웠다. 엄청난 힘이었다. 아무리 오메가이고 덜 자랐다고는 하나, 그래도 대니는 제법 무게가 나가는 편인데도, 마치 깃털 다루듯이 대니를 다뤘다.


  "뭐하시는 거요!"
  "이대로 성으로 갈 거요."


  대니의 뒤에 올라앉은 폴이 말의 배를 걷어 찼다. 대니는 당황하며 말고삐를 덥썩 움켜 쥐었다. 말이 말 그대로 쏜 살처럼 앞으로 뛰어 나간다. 대니는 어깨를 움츠려 말 등에 바짝 붙어 앉았다. 폴은 대니의 뒤에서부터 팔을 뻗어 말고삐를 쥐고,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 폴의 뒤로 그의 병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니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눈 쌓인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태후의 사람을 참 많이도 달고 오셨소."


  폴이 나지막이 말했다. 대니는 입술만 꾹 깨물었다. 태후가 대니를 어떻게든 처리하려 사람을 붙였다는 것은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근위대가 호위 병력에서 빠지면서 태후의 사람들도 별 수 없이 물러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들은 내 병사들이 알아서 처리할 거요."


  그리고 데리고 오신 시종들도 황도로 돌려 보내야 겠소. 내 성을 어지럽힐 작정을 하고 오는 자들을 그대로 들일 수는 없소이다. 폴이 계속해서 말했다. 대니는 고개만 끄덕였다. 폴의 말은 옳았다. 그리고 그 편이 대니에게도 더 안전하기도 했다. 조정과 황실의 실권을 쥐고 있는 태후가 붙인 시종들이다. 대니를 진정으로 위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를 보아 대니를 해치려 할 터. 폴의 안하무인인 태도가 대니에 대한 배려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성에 도착하는 대로 혼례식을 치를 거요. 황제(皇弟)께 어울리는 화려한 식은 아니라 죄송하지만."
  "......괜찮습니다."


  대니는 침과 함께 무거운 눈물을 삼켰다. 내 팔자 참 기구하기도 하여라. 일생에 다 하나뿐일 혼례인데, 북부의 야만인과 마치 팔려가듯이, 급하게 해치우는 혼례라니. 그러나 숨 붙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처지였다.


  "......."


  그런 대니의 기색을 눈치 챘는지, 처음에는 있는대로 얄밉게 굴던 사내가 도통 말이 없었다. 대니도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말이 없는 편이 대니에게도 편했기 때문이다. 성에 도착해서 혼례를 치르고 혼자가 되면, 혼자가 되면, 그 때는 울어야지. 대니가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형님께서 이르시기를, 비록 어린 나이에 치르는 혼례이나 관례를 치르기 전까지는 합방을 하지 않게 하기로 폴과 이미 합의를 보았노라고 하셨다. 그러니 오늘 밤은 안심하고 혼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넓고 휑한 침상에 홀로 올라 앉아, 두꺼운 이불로 숨소리를 죽이고 울어야지. 아무도 듣지 못하게. 귀가 밝은 뱀파이어들이라면 그마저 모조리 들을 지 모르지만.













섀헌 말렉매그알렉 해슘맷닫 폴대니
2020.09.04 02: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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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설리
[Code: bb4c]
2020.09.04 02:3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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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무례하긴 했지만 대니 구해주려고 그런거구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대니 혼자 남으면 그때 울겠다는거ㅠㅠㅠㅜ불쌍한 대니ㅠㅠㅠㅠㅠㅠㅠ센세 사랑해요ㅠㅠㅠㅠㅠ
[Code: bb4c]
2020.09.04 07:14
ㅇㅇ
혼자가 되면 울겠다는 대니 찌통ㅠㅠㅠㅠㅠㅠㅠㅠ귀여움받는 대니를 떠나보내야해서 마음 잡으려는 알렉도 찌통이고 조롱과 다정함을 담았지만 대니의 기색에 입 다무는 폴도 센세 표현이 너무ㅠㅠㅠㅠㅠㅠㅠㅠ좋아서ㅠㅠㅠㅠㅠㅠㅠ자꾸 눈물이 흘러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d9f6]
2020.09.04 09: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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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너무 커엽고 기특하고 사랑받을수밖에 없다 알렉이 대니 염려하는것도 백분 이해가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폴이 무심한듯 무례한듯 대니 신경쓰고 챙겨주는것도 존나좋아
[Code: c283]
2020.09.04 11:2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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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생각처럼 대니가 마냥 철없고 편안하게 살아온거 아닌데ㅠㅠㅠ 정략결혼 너무 좋다 오해랑 서먹함ㅌㅌㅌㅌㅌㅌ 근데 또 둘이 얼른 마음 터놓았으면
[Code: 2d00]
2020.09.04 17: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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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 분위기 너무조타 ㅠㅠㅠㅠㅠㅜㅜㅠㅠㅠ 대니 귀여운데 안쓰럽고 폴은 다정한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좋다 ㅠㅠㅠㅠ
[Code: aec2]
2020.09.07 02: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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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대니ㅠㅠㅠㅠㅠ 분위기봐ㅠㅠㅠㅠ너무좋다ㅠㅠㅠ센세ㅠㅠㅠ어나더ㅠㅠㅠㅠ
[Code: 3b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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