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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 23:34
한조각 샹버기로 현대 au물이 보고 싶다 1부 끝: https://hygall.com/582307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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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나 십여 년이 지난 후에도 버기는 그 근방에 머물렀고 여전히 무기력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이 밀려오고 빠져나가듯 그 자리에 관성적으로 머무르고 있었기에 새로운 삶을 향한 다짐은 곧 물거품으로 되곤 했다.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 서른을 넘어서도 번번한 직업 하나 갖지 못한 까닭이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텅 빈 그의 인생이 윤곽을 드러낸 계기는 오래전에 잊힌 종이접기였다.

 

놀랍게도 버기의 입학을 허가했던 대학은 한 군데가 아니었다. 추가 합격 통지를 받은 곳이 세 곳이었고, 장학금을 일부 내건 곳도 있었다. 형편없는 성적에도 불구하고, 입학 심사 위원회는 지원서에 담긴 그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그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고 싶어 했고, 버기로서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 따윈 없었다. 그러나 사 년을 꼬박 채우기엔 그는 이미 학업에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그는 그 자신조차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했다. 무엇보다도 샹크스의 권유로 오게 된 대학은 목표를 이루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버기가 대학을 중퇴한 것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뒤였다. 주변의 기대를 거스르는 데 성공한 그는 돌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홀로서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물론 지금까지 그에게 이런 의식은 없었기에, 레일리로부터 온전한 독립을 추구한다는 점을 내세워야만 했다.

 

기대를 배신하는 것으로 시작된 홀로서기란 준비되지 않은 모험이었다. 이는 방황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는 보도 한가운데 늘어선 택시들 속에서 경찰과 시비가 붙는 한편, 퀴퀴한 냄새로 오염된 거리에서 눈을 붙이곤 했다. 남쪽에 있는 환락의 도시에 발을 들인 것도 그즈음이었다. 어둠이 내려 활기를 띤 조명, 화려한 물줄기를 쏘아올리는 노래분수, 거대한 관람차, 매머드 상아로 조각한 장식품, 세계 각지의 명소로 꾸며진 공원. 정교하게 설계된 도시는 환상을 파는 대가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버기에게 남은 거라곤 다음 도시로 건너갈 수 있는 돈이 전부였다.

 

입구 쪽 간판의 노란 등이 깜빡였다. 보물 상자 모양의 네온사인 옆에 해적의 형상이 보였고, 하단에 <인생은 단 한 번뿐>이란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입구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삶은 끝없는 항해, 숨겨진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죠! 오랜 기다림으로 가득한 저녁나절, 그보다 낭만적인 것이 또 있을까요.' 

 

보물, 여정, 낭만. 그것은 일종의 암시였다. 음악 소리가 잦아들었고, 버기는 수중에 남은 돈으로 무엇을 할지 결심했다. 그는 이곳에서 끝을 볼 작정이었다.

 

하마터면 승패 조작을 통한 사기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증인 두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문제는 이다음부터였다. 뒤뜰 오두막을 뛰쳐나왔을 때처럼 그에겐 구체적 계획이 없었다. 달리 살아갈 방도가 생기기 전까지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여겨졌고, 그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환락가에서의 하루는 이제껏 경험했던 삶과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지평선 위를 달리는 시계태엽처럼 기이했다. 버기는 웃음소리로 떠들썩한 지옥 한복판에서 며칠을 보냈고, 처음에는 혼란하여 즐거워해야 할지 아닐지 알 수 없었다. 떼로 벌이는 난장판에 끼어들다 재수 없게 뺨을 맞는 한편 성난 군중의 발에 채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폭언도 이어졌다. 그래도 발밑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면 그만이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눈물을 흘리며 녹슨 목소리로 애원하면 되었다. 함부로 악쓰다 밤새 추위에 떨며 얻은 교훈이었다. 비굴한 교훈은 그렇게, 저항할 새도 없이 서서히 몸에 익어갔다.

 

두 증인과의 인연도 계속되었다. 어느 날 버기는 휴게실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마주쳤다. 그들은 자신들을 캐버디와 모디라고 소개하며 건너편 술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두 사람은 월세를 분담하고자 방을 공유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버기의 거처를 물었는데, 모처럼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던 버기는 말을 맺기도 전에 단숨에 승낙했다. 

 

이사 당일, 소나기가 들이닥쳤다. 빗소리와 더불어 바람 소리가 유난히 맹렬했다. 일기 예보에 따르면 곧 그칠 거라던 모디의 말은 좀처럼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러기엔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이 금방이라도 건물 안에 휘몰아칠 것 같았다.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콧물이 흘러나왔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열도 났다. 상황이 긴박해질수록 증상 또한 심해졌는데, 수압을 견디지 못해 튀어 오르는 맨홀 뚜껑처럼 불현듯 빨간 머리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그가 너무도 가까이 와 있다고 느꼈고, 그 생생함이 버기를 들뜨게 했다. 어찌나 흥분되던지, 버기는 폭력을 가하고 싶어졌다. 기억에 구멍이 뚫릴 때까지 무한히 훼손할 수 있길 바랐다.

 

십 분도 안 되어 날이 개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폭우가 지나간 자리는 참혹했고, 화사한 햇볕이 내리쬔 바닥에 그림자가 세워졌다. 쓰레기로 뒤덮인 거리에서 버기는 그림자를 업고 달려갔다. 누가 볼세라 있는 힘껏 달려갔다.

 



 

1


 

서른 살이 되던 날, 버기는 홀로 침대에 누운 채 잡지를 넘기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느지막이 일어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생일을 맞아 가족과 함께 즐기라는 의미에서 특별 휴가도 받았지만,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동료들과 술을 마시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 이상은 무언가 할 생각이 없었다. 고향을 떠난 후, 그는 매해 같은 방식으로 생일을 자축했다.

 

어렸을 때, 버기는 층층이 높게 쌓아 올린 케이크를 좋아했다. 알록달록한 과자로 장식하고, 반짝이는 금가루까지 뿌려진다면 금상첨화였다. 그가 정한 높이의 기준은 샹크스의 생일 케이크였는데, 무더위에 크림이 녹아 무너질 수 있다는 충고에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한여름의 생일파티는 바람이 선선해진 저녁이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면 버기는 고깔모자를 쓰고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면 케이크를 든 로저가 샹크스를 앞세워 초인종을 누르게 했다. 그는 연달아 다섯 번 눌렀다. 버기가 “시끄러워!”라고 톡 쏘아붙여도 사람들은 내내 싱글벙글했다. 소시지를 굽던 크로커스가 말했다. “생일이잖니, 버기. 오늘만큼은 최고로 즐거워야 한다고.” 파티는 한 번도 정시에 시작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버기는 지각한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레일리가 초 대신 가느다란 폭죽을 꽂아주었다. “준비됐니, 버기?” 한번 불붙은 폭죽은 혜성처럼 긴 꼬리를 남기며 금세 타들어 갔고, 소원을 빌 시간은 결코 넉넉지 않았다. 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꽃이 사그라들면 무슨 소원을 빌었느냐고 샹크스가 물어볼 것이었다. 인심 쓰듯 자신의 소원과 교환하자고 할지도 몰랐다. 이에 대해 버기는 준비해 둔 답이 있었다. 그는 케이크 안쪽에 블루베리가 듬성듬성 박혀 있으니 능력껏 골라 먹으라고 할 참이었다. 울상이 된 얼굴 앞에서도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였다.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으로, 평생 그만의 비밀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버기가 서른 번째 생일을 맞던 날이었다. 세월이 흘러 비밀스러운 소원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득해질 무렵, 그것은 말소리도, 침묵도, 그 어느 것도 아닌 형태로 그를 찾아왔다.

 

첫 징조는 빨간 머리의 소식이었다. 비록 지면을 통해서였지만, 버기는 돌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두개골이 갈라져 코가 깨진 사람처럼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반 페이지 분량의 기사는 어느 구호단체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정치적 이념에 상관없이, 환자가 있다면 어디든 가고자 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짤막한 후원 광고로 마무리되었다. 빨간 머리가 나온 사진은 단 한 장으로, 아이들에게 에워싸인 그는 제법 행복해 보였다.

 

버기는 사진 속 남자를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그는 망령에 들린 사람처럼, 탁자 위 주방 가위로 기사를 오리기 시작했다. 사진은 생일 기념 다트판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얼굴이 훼손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자마자, 그는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한 마디로,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서랍장에 사진을 쑤셔 넣은 다음, 그는 자리를 박차고 집을 뛰쳐나왔다. 

 

팔 월의 나무그늘은 짙고 무거웠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푸른 그늘을 정처 없이 떠돌다 발길이 향한 곳은 시내 한복판의 자연사 박물관이었다. 개관 150주년을 기념하여 고대 해양생물 특별전이 진행 중이라는 현수막이 건물 외벽에 걸려 있었다. 박물관 입구는 네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어딜 가나 사람들로 붐볐다. 계단을 오른 버기는 정문에 걸린 현수막 앞에 멈추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혹시 특별전을 보러 오신 건가요?” 나이 든 경호원이 그를 불렀다. 지나가던 길이었다고 대꾸하려 했으나 정작 버기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엉뚱한 말이었다. “...얼마를 주면 되는지.” 

 

“입장료는 필요 없습니다. 올해 150주년을 맞아 무료로 진행 중이거든요.” 낯선 이가 대답했다. 

 

버기는 전시 주제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며 변명이라도 늘어놓고 싶었다. 해양생물에 대한 지식이라곤 어릴 적 샹크스가 제멋대로 읽어준 내용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흐릿해져 담을 쌓고 산 지 오래였다. 즉 버기의 의지와 무관한 셈이다. 하필 경호원과 눈을 마주치지만 않았어도! 

 

하지만 더 이상 뒷걸음칠 길이 없었다. 경호원은 버기를 직접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브로슈어를 한 부 쥐여주고는, 헤어지기 직전 경호원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데 공룡만 한 게 없죠. 홀로 오는 분들이 대개 그렇거든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돌이켜보면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는 우연의 일치를 무심결에 지나치지 못했고, 뜻하지 않게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상황을 모면하고자 한 행동이었지만, 결국 그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가령 대학에서의 첫 두 달은 꿈을 이루기 위한 과감한 결정으로 둔갑했고, 그 덕에 <형편없는 빨간 코>는 <대담한 고학력자>로 탈바꿈했다. 이에 대해 소수가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주변인들은 다그쳤다. “대학까지 붙은 그가 정말로 몰랐을 것 같아? 유명한 사람 중에 대학 졸업자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버기는 새로이 얻은 평판을 고치려 들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반응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당연하지! 내가 못 할 게 뭐가 있어?” 다만 대학은 그의 뜻을 이루기에 지나치게 협소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과장을 보태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얼떨결에 내뱉은 해양생물의 이름은 잊힌 꿈의 가능성에 발동을 걸었고, 동료 한 명이 곧장 박물관의 존재에 대해 일러 주었다. 


Basilosaurus.jpg
 

건물 안에 들어서자, 공중에 걸린 거대한 골격이 그를 맞이했다. 뼈대 중심에 자리 잡은 척추는 긴 꼬리로 이어졌고,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뛰어들 것 같은 자세는 위압감을 더해 주었다. 그 아래를 거닐며 크기에 압도당하는 한편, 버기는 뼈대 사이의 공간에 시선을 빼앗겼다. 면이라곤 하나 없고, 이어진 뼈는 각각의 생김새를 달리하며, 형태도 색깔도 없이 선만 남은 공간. 이렇듯 시간이 멈춘 공간은 상상으로 채워야만 했다. 그러므로 흔적에 종의 이름을 붙여본들 개체 그 자체는 무명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손가락의 지문처럼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비늘이 얼마나 빠르게 자라고 표면의 점이 얼마나 촘촘한지는 오직 동시대를 산 다른 개체만이 알았다. 

 

단 이조차도 대멸종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온 세상이 자기 것인 것처럼 대지를 뛰어다니고 바다를 넘나들던 시절이 끝나면 운명의 갈림길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종의 역사로 영원히 박제되거나,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지워지거나, 또는 우연의 일치로 몸을 숨겨 살아남거나. 그렇지만 <굴 파기>라는 보잘것없는 능력이 대멸종의 시대를 맞아 제대로 빛을 발하리라곤 아마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대멸종을 앞두고 일부 개체는 수면 아래로 도망쳤다. 일순간의 선택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아가미가 생긴 그들은 폐로 호흡하는 법을 잊고 말았다. 다시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다 눈에 띄지 않으니 살아 있어도 영영 잊힌 꼴이 되었다. 이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물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 자유롭게 뛰놀던 흔적을 지상에 남긴다는 것, 전혀 없었던 것처럼 모든 종류의 공간에서 잊힌다는 것. 이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비참하고 어느 것이 덜한지, 버기는 문득 이해해 보려 애썼다. 빨간 머리의 소식에 이은 두 번째 징조였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2


 

자연사 박물관에 다녀온 후, 버기는 다시 종이접기를 시작했다.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었다. 상한 마음도 밀려드는 향수를 거스르지 못했고, 일그러진 기억이 심장을 옥죌 때마다 상상은 현실에서 한 발짝씩 떨어져 갔다. 그는 세상에 없는 것들을 만들고자 했다. 기다란 몸통이 인상적인 공룡부터 불사조, 유니콘, 세이렌에 이르기까지 전부 각양각색이었고, 종이 특성상 쉽게 손상될 수도 있었기에 그는 완성작을 사진으로 남겨두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에 올리게 된 계기도 보존이 목적이었다. 낡아빠진 저장 공간을 믿느니 이름을 팔아 가상으로 부여된 공간이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그가 처음 인터넷에 몇 가지를 올렸을 때 그런 상태였다. 모든 것이 비공개로 남았더라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인과 사진을 공유하려던 그는 실수로 공개 대상을 전체로 설정해 놓았고, 며칠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소비될 수 있었으나 우연히 누군가의 이목을 끌게 된 점이 문제였다. 캐버디가 도용의 의혹을 제기한 시점에선 이미 손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도 버기는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누군가 그의 흉내를 내며 사진을 도용한 것으로 모자라 소소하게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의감에 심취하여 윤리적인 면을 내세우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의 주머니가 두둑해진다는 생각에 버기는 불쾌해졌다. 모든 건 철저히 그의 몫이어야 했다.

 

바로 그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돈벌이 수단으로써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따라서 불평불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무료로 제공되는 서비스를 사용하여 종이를 접는 영상을 송출하기 시작했다. 이따금 잡담도 곁들였다. 어찌 됐든, 그곳에서는 버기가 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인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그를 일방적으로 따르는 무리가 생겨났다. 영문 모를 칭송과 후원은 덤이었고,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는 이들과 제 일처럼 싸워주기까지 했다. 이제는 도용한 누군가가 고맙기까지 했다.

 

초반에는 하얀 장갑을 낀 손만 등장했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면 자막을 추가하면 될 일이었고, 평면이 입체적으로 변하는 구간은 확대해서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댓글로 얼굴을 보여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유를 묻자, 맨손을 보여주지 않아서,라고 대꾸했다. 그러면서 절대로 평범하지 않을 것 같아서,라고 덧붙였다.

 

참으로 별난 요청이었다. 그리고 버기는 그 요청에 성실하게 응답했다. 물론 맨얼굴을 온전히 드러낼 생각은 없었기에, 그는 모자를 쓰고 눈과 입을 가린 채 등장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웃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웃겨서라고 했다. 그중 한 명이 물었다. ‘그 코, 설마 붙인 거예요?’ 또다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진짜 같아서요.’

 

그날 저녁, 버기는 거울 앞에 앉았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꼼짝 않고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하얗게 화장한 얼굴 위로 커다란 빨간 코가 유독 돋보였고, 그것은 마치 이물질을 보는 듯했다. 그의 것이 아니기만을 누구보다도 바라지만, 명백히 그의 것이라고 거울이 말해주었다. 잠시 후, 그는 눈 밑에 검은 눈물 한 방울을 그려넣었다. 그러곤 즉시 휴지로 닦아내었다.

 

엉망이 되어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그래도 이편이 훨씬 나았다. 온갖 기행을 벌이면서도 고상한 척 웃음을 참느니, 늘 명랑하고 유쾌한 편이 더 나았다. 그러기 위해선 불쑥 고개를 드는 내면의 소리는 지워져야 했고, 이왕 지워진다면 가급적 상쇄하는 편이 좋았다. 이를테면 입술을 벌겋게, 눈은 어둡게 변해간다면, 눈썹 위로 반짝이는 푸른색을 덧바르는 식이었다. 그는 타협점을 찾았고, 과장된 태도에 못을 박았다.

 

놀랍게도 버기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특유의 우스운 광대 분장은 종이접기 실력에 대한 논쟁을 가열시켰고, 그의 영상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자연스레 그를 거품에 비유하는 이도 늘어났지만, 생각보다는 끔찍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이 천성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가끔 짙은 어둠에 뒤덮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고, 허공에 매달린 뼈대가 되어 산산조각날 것 같았지만, 이튿날이면 거짓말처럼 사라지곤 했다.

 

이와 더불어 보석에 대한 버기의 관심도 높아졌다. 그는 빛의 여운에 이끌린 나머지, 가장 확실한 물리적 형태로 수집하고자 했다. 그 무렵, 그가 보석 경매장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불과 하루 전에 해고 통지를 받은 유명 경매사, 통칭 악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었다.






샹버기
한조각

버기 캐를 보면 외적으로는 정신 없을 정도로 날뛰는 반면,  등잔 밑이 어둡다고 어두운 부분도 내면 어딘가에 어린 시절의 열망과 더불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쪼록 여기까지 읽어준 붕붕이들 항상 고마워.
2024.02.26 00: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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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센세 컴백 실화냐; 시발 미쳤다 당장 보고 온다 ㅅㄹㅅㄹ
[Code: 37e9]
2024.02.26 01: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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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오셨다! 2부는 제목이 재회하는 샹버기니까 언젠가 만나긴 하겠네요ㅠ 그나저나 악어가 경매사였을줄이야...센세 글은 항상 분위기가 참 좋아요 센세가 다시 돌아와서 기쁘다ㅠㅠㅠ
[Code: 01ad]
2024.02.26 02: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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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내원피스
[Code: 7c02]
2024.02.26 15: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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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ㅇ이거다 내 원피스...
[Code: 80b0]
2024.02.26 02: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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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사랑해...
[Code: 7c02]
2024.02.26 02:2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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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웡히 은혜로운 글써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7c02]
2024.02.26 07:3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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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색창을 돌고 싶더라니 센세가 와있었어 ㅠㅠㅠ 분위기 여전히 개쩔죠?? 미쳤죠?? 센세 너무 고마워 ㅠㅠㅠㅠ
[Code: ef8a]
2024.03.10 21:1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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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건조하고 팽팽한거 넘 좋다
[Code: 5855]
2024.04.14 21:24
ㅇㅇ
이거 진짜 공짜로 봐도 되는 글이냐고ㅠㅠㅠㅠ버기가 종이접기 다시 시작하는 부분 좋아요
[Code: f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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