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잃고업보쌓는행맨



26.

그날 이후, 제이크와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지만 큰 진전은 없었다. 밥이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과 함께 대화를 끊어냈기 때문이다. 행맨은 답답해 죽으려고 하면서도 제가 하는 말이어서 꾹 참는 것 같았다. 기억을 잃고 조금 어려진 행맨은 제 기억보다 무모하고 거칠었지만 제가 알던 행맨과 같이 저를 배려했다. 이런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밥은 어딘가 기분이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왜 보자고 한 거야. 행맨이랑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제 앞에서 얼음이 든 커피의 빨대를 휘휘 젓던 프리츠가 이미 흐물해진 빨대를 대충 내던지고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밥은 잠시를 참지 못하고 곧장 본론으로 파고드는 프리츠의 말에 슬며시 웃었다. 장포대의 길을 걷겠다던 그는 돌연 제대를 선언했다. 탑건 멤버들이 모두 놀랐지만 밥은 그마저도 정말 프리츠다운 선택이라 생각했다. 



"빌리. 하늘이 그립지는 않겠어?"

"......하늘이 왜 그립냐? 어차피 제대하고 민항사 가면 또 지긋지긋하게 볼 거."


페덱스를 간다는 둥 어쩐다는 둥 말이 많던 프리츠는 잘 나가는 항공사의 기장으로 선발된 참이었다. 군용기를 모는 것과 차이가 분명히 있을 거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태도에 밥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냐며 입술을 이죽인 프리츠는 빨대가 이게 뭐냐며 성을 내더니 여즉 웃음을 띄고 있는 밥을 흘끗거렸다.


"그런 건 왜 물어봐. 너야말로 하늘이 그립냐? 전혀 미련 없다더니."

"......그랬지."

"........"

"근데 요즘은 조금 그리운 것 같기도 하고."



같이 살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프리츠는 복잡함이 가득한 밥의 얼굴을 보다가 못마땅하게 볼 안쪽으로 혀를 넣어 굴렸다. 둘 사이의 문제이니 제가 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나서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았다. 


"무슨 일 있냐?"

"......우리 결혼한 거 행맨이 알더라. 말 안 해줬는데."



프리츠가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행맨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놀라운 거라면 오히려 밥이 같이 살면서도 끝까지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밥은 프리츠의 반응에 라떼가 든 잔을 만지작 거리다가 내려놓고 물었다.




"......그때 나한테 왜 이혼 서류를 준 거야?"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프리츠의 눈이 밥에게로 향했다.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던 안경 너머의 동그란 눈이 어느새 많이 성장한 것처럼 보였다. 행맨이 기억을 잃고 난 직후에 제게 와서 울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할까 말까 조금 망설이던 프리츠는 자세를 고쳐 앉고는 입을 열었다.



"행맨이랑 약속한 게 있어."

"......뭘?"

"이혼 서류."

"무슨 소리야?"




밥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찌푸렸다. 프리츠는 테이블에 올려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내려치며 과거의 행맨과의 일을 떠올렸다. 언젠가 말해줘야 할 날이 올 거라고는 느꼈지만 이런 식으로 밥에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너 결혼한다고 하고 나서 행맨이 날 찾아왔어."

"......"

"만약 네가 이혼한다면.......그걸로 걔와 관련된 건 모두 끝나."

"......뭐?"

"계약서에 써있어. 걔랑 이혼하고 나면 걔는 물론이고 세러신과 관련된 사람 그 누구도 너와 연락할 수 없어. 해서도 안 되고."

"........"

"그리고 행맨 이름으로 된 신탁이 다 네 앞으로 돌아갈 거야."



프리츠의 마지막 말에 밥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두통이 오는 것도 같았다. 저에게 말도 없이 본인이 떠난 이후의 삶 마저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어이 없으면서도 한 편으론 속이 상했다.


"제이크가 시켰어.....? 자기가 떠나게 되면  그렇게 해달라고?"

"무슨 생각인지 아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냐."

"내가 생각하는 게 뭔데?"



따지듯 묻는 밥의 말에 프리츠가 검지를 들어 중재시켰다. 그에 더 이상 말을 않고 숨을 깊게 들이 쉬었다가 내뱉은 밥이 어디 들어나 보자는 얼굴로 프리츠를 바라봤다. 전반 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작고 얇은 입술 덕에 기분이 틀어지면 대번에 쉬이 넘어가지 않을 고집 센 인상으로 바뀌는 얼굴이었다. 프리츠는 저를 향한 얼굴을 꼼꼼히 훑다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쓸어 내렸다.



"하, 내가 살다살다 제이크 세러신이 안타까워질 줄이야."

"뭐라고?"

"넌 겁이 너무 많아. 밥."

"......"

".......걔가 왜 그걸 썼을 것 같아. 혹여나 널 떠나고 싶어질 본인을 붙잡아 두려고?"

"......."

"아니면, 뭐 네가 질렸을 때 너한테 보상하려고 그랬을까?"

"......"

"시발. 그건 그냥 유서나 다름 없는 거였어. 밥. 본인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네 곁에 없게 될 경우, 제 가족들이 널 괴롭힐까봐 세운 보호막 같은 거라고."



밥의 동공이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차마 프리츠와 마주하지 못한 시선은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너한테 이혼서류 준 이유가 뭐냐고? 별 뜻 없었어. 행맨 때문에 존나 열 받았고 넌 걔 때문에 개같이 힘들어하고 있었으니까."

"......"

"화풀이 같은 거였지. 어차피 네가 그걸 선택할 일은 없을테니까. 나중에 기억이 돌아온 행맨이 보고 기함이나 하면 좋겠다. 뭐 그런 마음. 근데 내가 잘못 생각했네."


프리츠의 말에 내려가 있던 밥의 시선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일렁이는 눈빛에 약간의 물기가 서린 것도 같았다.


"......네가 이렇게 겁 먹고 도망칠 생각이 가득한 줄 알았다면 절대 안 줬을 거야."

"프리츠. 난-"

"됐고. 밥. 넌 지금 땅에 있다는 걸 기억해. 네 앞자리에 탄 사람에게 모든 걸 알려줘야 할 의무도 없고, 모든 경우의 수를 확인하며 살 필요도 없어. 네가 해야할 건 그냥 단순하게 스스로 감정에만 집중하면 된다고."



열리려던 입이 단호한 음성에 도로 감겨 들었다. 밥은 생각이 많아졌는지 그 뒤로 말이 없었다. 프리츠가 내려놓았던 유리잔을 집어들자 표면에 맺혔던 물방울만이 떨어져 내렸다.






*





행맨은 시간 좀 내어달라는 밥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다시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기 떄문이었다. 정말로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밀어내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부엌 식탁에 앉아 행맨을 맞이한 밥의 표정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행맨은 몇 달 전 자신의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던 말간 얼굴과 지금의 얼굴 사이에서 많은 간극을 느꼈다. 저 변화를 제가 만든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변화를 만든 것을 좋아해야 할 지 말아야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왔어?"

"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응. 무슨 일 없지?"



전혀 없다는 의미로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 보이자 밥도 마주 웃었다. 그리고 행맨이 건너편의 의자를 빼어 앉자 손에 깔고 있던 봉투를 조심스럽게 행맨쪽으로 밀어줬다. 



"이게 뭐야?"

"......열어봐."



미심쩍은 표정의 행맨이 봉투에게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개봉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서류 뭉치를 보고 대번에 표정이 굳었다.



"......이게 뭐야?"

"네가 나한테 준 거야."

"뭐?"



서류 뭉치는 행맨과 밥의 이혼 서류가 담긴 봉투였다. 그 언젠가 밥이 남긴 서명까지 그대로 적혀 있었다. 이대로 제출하기만 하면 완벽하기 그지 없었다. 행맨의 밥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어 설명을 바라는 대신 이마를 짚었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면 돼? 밥."

"......."




밥은 누구보다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 않냐는 얼굴로 행맨을 바라봤다. 제이크는 가슴께 어딘가가 옥죄어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어쩌다가 밥의 손에 들어가게 됐을까. 제가 줬다는 말도 이해되지 않았다. 결혼한 사실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혼 서류를 제가 내밀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자신의 집안. 제 집안에서 저 모르게 건네준 것이 틀림 없었다. 이대로 밥이 서명하고 둘이 멀어지면 기억을 잃은 제가 밥을 찾을 리 없었을 테니까. 


제이크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의 끝자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제가 기억을 잃은 틈을 타 집안에서 저를 휘두르려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불쾌했고 자칫하면 밥을 모르는 사이에 놓칠 수 있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발끈하며 성을 내려던 것을 눌러삼킨 행맨은 차분하게 밥을 바라봤다.





"너 나랑 이혼 못 해."

"......."

"내가 아직 기억 못 찾아서 이러는 거야? 그래서 그래?"

"그런 거 아냐."

"그럼 이유가 뭔데? 기억도 없는 나랑 굳이 이혼까지 해야 할 다른 이유가 있어…? 아니면, 혹시…. 다른 사람 생겼어?"


답지 않게 한껏 불안한 행맨의 목소리가 로버트의 곁을 맴돌았다. 항상 확신에 차 있던 남자가 저로 인해 이렇게까지 자신 없음을 내비치는 것이 새로워 로버트는 조소했다. 이렇게 또 한 번 제이크의 애정을 확인하고 마는 것이었다. 기억을 잃은 데다 자신을 잊어버리고 아니, 잊은 것도 모자라 자신과의 관계에 혐오를 내비치기도 했던 남자가 다시 제게 애정을 갈구하고 제 말 한 마디에 휘둘리고 있다니. 로버트는 사랑 앞에서도 비행 스타일처럼 두려움 없이 강직하기 그지없는 제이크가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와 반대로 저는, 저는 어떤가.


"제이크. 내가 너 말고 누굴 만나."

"그럼 이유가 뭔데. 그런 이유 말고 기억도 온전하지 않은 배우자랑 이혼하자고 할 이유가 뭐가 있어?"

"......."

"베이비......"


이제는 다 죽어가는 얼굴로 애원하는 행맨이어서 로버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기억을 잃어서 헤어지자는 거 아냐. 제이크."

"......"

"네가 기억을 잃었어도 전처럼 날 사랑해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아."


로버트의 말을 들은 제이크의 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찌푸려졌다. 행맨은 당장이라도 밥이 말한 '전처럼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다'는 발언을 수정해주고 싶었지만 말을 끊고 싶지 않아 참아내고 있었다. 그런 제이크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눈을 감은 로버트의 눈꺼풀이 미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 여전히 널 사랑해. 제이크."

"......근데?"

"......근데, 흠, 내가-"



무언가를 참듯이 삼켜내는 로버트의 말에 긴 침묵이 뒤따라 붙었다. 제이크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저 뒤엣말을 듣지 않고 방 안을 나서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 일인지 이유를 듣고 나면 로버트를 회유할 수 있는 이유가 줄어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제이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로버트는 천천히, 그러나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너랑 있으면 나로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아."





*





"우리 베이비는......"

"........"

"생각보다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네."



폭탄같은 발언과 함께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은 로버트의 눈이 생각보다 단호해서 제이크는 되려 본인이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서서히 관계를 되돌리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던 것이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날 줄이야. 그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시간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제이크."

"일단, 못 들은 걸로 할게."

"......"

"내가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나 너한테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잖아."

"제이크. 제발-"

"아니? 베이비. 아니, 밥. 로버트 플로이드."



갑자기 매섭게 내려꽂히는 풀네임에 로버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행맨은 화를 참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원망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다 내뱉기에는 자신도 정리가 되지 않는지 이마를 짚으며 밥과 거리를 뒀다.



"나 때문에 힘든 시간 보낸 거? 나도 알아. 지금도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도."

"......"

"근데 적어도 날 밀어내려거든. 내가 기억을 되찾고 나서 해."

"......."

"나야 그냥 네가 스쳐 지나는 사람이었구나 생각할 수 있다지만, 너랑 함께한 기억을 가진 걔는 어떡할 건데?"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는 행맨의 말에 밥은 고개를 돌렸다. 밥도 알았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말이며, 그를 아프게 했을지. 또 얼마나 이기적으로 들렸을지 말이다. 그런 밥의 태도를 읽었는지 행맨의 갈라진 턱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튀어나왔다. 그리곤 터트리듯 내뱉었다.



"네가 그렇게 죽어라고 나랑 다른 사람이라고 나누던 그 '행맨'은, 기억을 되찾기만하면 곧장 너를 찾을 텐데!"

"........"

"그때의 나한텐 너, 뭐라고 할래?"

"......."

"어?! 뭐라고 할 거냐고. 네 스스로의 존재성도 흔들리게 만들 정도의 사람이라며!"

"......."

"그런 사람이면.......적어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하잖아. 아니야?"




이제는 숫제 애원의 색을 띤 어조였다. 밥은 끝까지 대답하지 못했다. 또다시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의자에서 일어난 밥은 행맨으로부터 몸을 돌리고 먼저 방으로 돌아가 보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제이크의 성격상 손목이라도 붙잡거나 저를 부를 법도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무언가 불안한 기분에 뒤를 돈 밥과 동시에 뒤이어 들려온 것은 누가 들어도 큰 소음이었다.



"제이크!!!!!"


밥이 뛰어듦과 동시에 정신을 잃은 제이크의 몸이 바닥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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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넘 오랜만에 와서 산으로 간다
근데 행맨밥 와꾸가 개연성이니까 뭐 어떻게든 되겟찌.....ㅎㅎ.....
원래 오기 전에 앞편 몇몇을 수정하려 했는데 도저히 짬이 안 나서 그냥 옴.....
2023.12.14 00:52
ㅇㅇ
모바일
센세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ㅡㅡㅜㅜㅡ
[Code: 88e9]
2023.12.14 00:52
ㅇㅇ
모바일
너무너무재ㅣ밌어요 다시는미국가지마 센세
[Code: 88e9]
2023.12.24 20:03
ㅇㅇ
모바일
센세 ㅜㅜ 내가 지하실 따뜻하게해놨어 ㅜ
[Code: 27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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