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잃고업보쌓는행맨




25.

몇 시간 전의 대화로 인해 집 안 곳곳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은 뒤였다. 밥이 사라진 곳에 가만히 앉아 말들을 곱씹던 행맨은 그 뒤로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제가 눈을 뜬 이후로 밥이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을 떠올렸다.

도무지 밥의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과 결혼까지 한 상태이면서도 제게 일언반구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 관계에 대해 알고 싶다는 물음에도 관계보다 '기억을 잃은 자신'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마치 네가 알 수 있는 건 거기까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행맨은 종종 그게 거슬렸는데 밥이 아까 내뱉은 말들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로버트 플로이드는 단순히 지금의 저와 5년 간의 기억을 가진 자신을 구분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을 언제든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제이크 세러신과 그렇지 않을 제이크 세러신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 ......하, 참나. 5년이나 만났다면서, 세러신을 이렇게 모르나."



제이크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에 이마를 손등으로 짚었다. 제가 기억을 찾지 못한다면 언제든 놓아줄 생각만 가득한 주제에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을 땐, 또 본인을 떠나 갈까 봐 전전긍긍해 한다니. 이렇게 모순적일 수가 없었다.

제가 기억을 잃었건 잃지 않았건 지금 본인을 사랑하고 곁에 있고 싶어한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아까 뭐라고 했더라. 같은 사람이면 안 된다고 했던가. 밥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구분 짓고 있겠지만 사실상 틀린 말이었다. 아무리 구분 지어봐도 그가 아는 행맨이 자신이었고 자신이 그 행맨이었다.

기억은 못하지만 밥과의 만남이 어쨌든 간에 초반부터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 뿐만이랴, 아예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에 제이크는 제 오른팔을 걸 수도 있었다. 당연했다. 자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밥이 생각한 것과 달리 제가 로버트 플로이드를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결과는 똑같을 것이었다.


기억의 유무는 그렇게 큰 영향이 없었다.



"......."


생각을 모두 정리한 행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처럼 밥이 또 나올 때까지 기다릴까 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온갖 최악을 상상하며 자신을 밀어내기 전에 다시 인지 시켜줘야 했다. 겁난다고 온갖 핑계를 대며 도망쳐봐도 그 끝엔 항상 제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





세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벌컥 열린 문에 팀원에게 전달할 메일을 작성하던 밥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당연하게도 눈에 들어온 얼굴은 행맨이었다. 그 순간 밥의 낯이 당혹과 낭패로 물들기 시작했다.

들어가자마자 입을 떼려던 행맨은 잠시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방에만 들어오지 말라고 하면서 여기서 꼼짝 않고 머무르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문고리를 잡은 채로 서있던 행맨은 방을 다 훑자마자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꼈다.





"행맨. 들어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그렇게 벌컥 들어오면...!"

"기다렸으면, 안에 들여 보내주기는 하고?"

"......."


이미 제가 할 답변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얘기하는 태도가 분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어서 밥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행맨은 대꾸가 없어진 자신의 태도를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피식 웃고는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같이 살았다는데, 내 흔적은 커녕 사람 흔적도 없어서 이게 정말 두 사람이.....아니지, 연인이 살던 집이 맞나 했는데........"

"......"

"......이유가 다 여기 있었네."


밥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반은 물론이고 허리춤까지 오는 서랍장 위에도 가득 올려진 액자들에는 행맨과 밥의 사진들이 가득했다.

바닥에 늘어진 큰 상자들에는 행맨이 쓰던 물품들이 들어있는지 한쪽 상자에는 'Jake'라고 쓰여있었고 한쪽에는 'Hangman'이라고 쓰여 있었다. 행맨은 그걸 보자마자 사적인 물품과 일할 때 제 물품들이 나뉘어 들어가 있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급하게 치우는 와중에도 세세하게 나눠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묘한 의문점이 피어올랐다.

'과연 이게 내가 갑자기 집에 쳐들어올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치우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기억을 영영 잃고 돌아오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치운 것일까'



책장 위에 올려진 밥의 독사진을 바라보던 행맨은 묘하게 후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추론에 닿았다. 묘하게 익숙한 사진. 뒤에 보이는 배경이 눈에 익었다. 그리고 행맨은 빠르게 떠올렸다. 밥이 제게 주고 간 제 사진. 루스터가 찍어준 거라고 했던가. 그 사진을 붙여둔다면 묘하게 이어져 보일 것 같은 사진이었다. 그래서 웃고 있던 것이었을까. 제이크는 밥이 왜 이 사진을 주고 간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말 좀 해봐. 밥."

"......."


그러나 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기억에 전혀 없지만 웃고 있는 사진 속 제 얼굴들을 바라보던 행맨은 복잡한 마음에 시선을 밥에게로 돌렸다.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을 책상 삼아 썼는지 한쪽에 서류가 잔뜩 올려져 있었다. 랩탑을 무릎 위에 올려둔 채로 행맨을 바라보던 밥은 마주쳐오는 시선에 눈을 피했다.



"이 방은 참 네 마음 같다. 로버트."

"......"

"날 떠나보낼 준비는 있는 대로 다 해놓고는 절대 놓아줄 수 없어서 추억은 꽉 붙들고 있는 게 말이야."

"......그런 거 아냐."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부정에 행맨은 가볍게 손을 펼쳐서 주변을 가리키고는 어깨를 까닥였다.


"그럼 이게 다 뭔데?"



설명을 해보라는 듯 구는 태도에 또 다시 밥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피곤한 듯 안경을 벗어 눈가를 누르며 행맨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일 해야 하니까 이만 나가주면 좋겠어."

"아니. 내가 왜 들어왔는지 아직 얘기 안 했잖아."



행맨의 거절에 밥에게서 미약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할까 고민하던 행맨은 방을 계속 둘러보다 드레스룸에 멈추었다. 제 것으로 추정되는 옷이 걸린 앞 쪽에 커다란 액자가 뒤로 돌려져 있었다. 마치 누가 보면 안 될 것을 숨기듯 가려두었지만 차마 버리거나 처박아둘 수 없어 놓아두었다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짚이는 바가 있던 제이크가 그 앞으로 다가서자 아닌 척 신경을 이 쪽에 쏟고 있던 밥이 벌떡 일어섰다.


그에 제이크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밥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하는 우리의 관계. 결혼. 부부 사이. 3년 전의 그 날.


행맨은 웃으면서 밥을 가로 막고 뒷걸음을 쳐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액자를 들어 제 앞에 세웠다. 밥이 안절부절 못하는 걸 보면서 액자를 잡은 손으로 프레임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행맨의 태도를 보면서 이번엔 밥이 눈치를 챘다. 제가 아무리 숨기고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다. 평소의 행맨처럼. 밥은 어딘가 허무한 기분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밥을 보던 행맨은 액자를 흘끔 내려다 보고는 밥이 볼 수 있도록 돌렸다.






"말해봐. 밥. 네가 나한테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조차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뭔지."

"......."

"미스터 로버트 세러신."


밥의 한숨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






늘어진 침묵의 장막을 걷은 건 제이크였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 도무지 열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행맨은 저 고집 때문에 제가 없는 밥의 생활이 어땠을지 궁금했다. 지금이야 비행을 그만두었지만 부대에 있을 땐 더더욱 그랬다.

파일럿들은 하나 같이 에고가 엄청난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밥의 저 꺾이지 않는 기세와 고집을 건드리고 싶은 자들이 분명 존재했을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너는 다 받아줬을까. 나도 그러다가 너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닐까. 너한테 모진 말을 뱉은 적 없다 했으니 그건 아니려나? 우린 대체 어땠갈래 내가 기억을 못한다는 이유로 날 놓아주려 하는 걸까.'


속이 타는 질문들은 뒤로 묻어둔 채 제이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보였다.



"너한테 질릴 일 없어."

".......뭐?"

"아까 네가 말한 거 말야. 걱정하는 게 그런 거라면 그럴 일 없다고."

"......"

"내가 기억을 되찾던 간에, 아니던 간에."

"......"

"그러니까 그게 네가 지금 날 밀어내는 이유라면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할 거야."



제이크는 대답을 듣지 않고 제 손에 들려있던 액자를 잘 보이는 곳에 내려두었다. 예상대로 사진은 결혼식날 정복을 차려 입은 둘의 사진이었다. 기억나진 않지만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이마를 맞댄 얼굴에서 행맨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행맨."

"왜?"

"5년 간의 기억도 없는, 나와의 첫 만남이나 일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네가- 정말 기억을 잃기 전 너와 동일한 사람이고 똑같은 마음으로 날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해......?"



행맨은 밥의 물음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했다. 무슨 의미냐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자 입술을 살짝 깨물었던 밥이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알았어. 아직 일하는 중이어서 이따가 일 끝나고 다시 얘기하도록 해."


미묘한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은 행맨이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벗어나야 했다.














행맨이 문을 닫고 사라진 곳을 바라보면서 밥은 생각이 많아졌다. 언제나처럼 확신에 가득차고 당당한 세러신.

기억을 잃자마자 제게 모진 말이나 쏟아냈던 건 전부 잊은 건지 자신감 넘치게 기억의 여부와 상관 없이 저와의 영원을 약속한다. 그게 행맨의 성격인 것도 알고 본인이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지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언젠가 프리츠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행맨의 기억이 돌아온다 한들 상황이 예전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냐고 했었다. 걔가 했던 모든 말을 없던 것처럼 살 수 있겠냐고.




그때 제가 뭐라고 했더라.




밥의 시선이 랩탑 위 깜빡이던 커서를 따라 헤매다가 풀어졌다.

땅으로 내려오고 처음으로, 모든 것이 명료하기만 하던 하늘이 그리웠다.










-
너무 오랜만이네;;;
두 달 넘어가길래 부랴부랴 끊어서 가져옴. 짧다;ㅂ;

안 써지는 곳 꾸역꾸역 넘긴 거라 어색한 부분 있을 수 있음 ㅈㅇ....ㅠㅠ

아니 근데 파월풀먼 좆목했으면 투샷내놔......
2024.01.31 22:07
ㅇㅇ
모바일
센세 무순 너무 재밌어 사랑해
[Code: e5f6]
2024.01.31 22:07
ㅇㅇ
모바일
감히 감상평 남기고 싶은데 센세의 갓글에 개미똥이라도 묻힐까 무서워서... 그저 주접만이라도 남길게 사랑해 센세
[Code: e5f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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