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잃고업보쌓는행맨



23.


기억을 잃었다는 말과 함께 연락이 두절된 상관이 전화를 걸어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B 대위는 당연히 제 상관이 기억을 되찾거나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라도 떠올라 연락이 온줄 알았다. 사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었다. 그러나 제 상관은 항상 그랬지만 남들과는 달랐다.



“중령님?!”

-여어. B 대위. 야, 너 대위 됐더라? 나 중령 달 동안 너 뭐했냐. 놀았냐?


결혼하고 사람 된 줄 알았던 제 상관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톤으로 던져오는 얄미운 말들에 B 대위는 받자마자 한숨이 터지려는 것을 참아야만 했다. 느낌이 보아하니 기억이 돌아온 게 아니라 뭔가 제게 시키거나 필요한 것이 있어 연락한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렇지.’


예상했던 전개에 B 대위가 한숨을 쉬는 사이 행맨은 딱히 대답이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지 곧장 용건을 꺼내왔다. 용건도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B 대위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이마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지금 중령님 댁 주소를 저보고 불러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어. 너 알잖아.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건 맞지만.......아니 중령님 집 주소를 제가 왜 찾아드려야 합니까? 미스터 플로이드도 계시지 말입니다?”

-.......걔가 왜 미스터 플로이드야. 나랑 결혼했다며. 미스터 세러신이지.


B 대위는 그게 우리 사이에 협의된 호칭이라는 것을 짚어줘야 하나 싶었으나 그만 두었다. 역시 들어보니 제 상관은 여전히 기억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한 달쯤 지났을 때 밥과 통화했을 때를 떠올린 B 대위였다. 궁금한 게 있다고 하니 연락을 할지도 모른다고 대신하여 말을 전하던 목소리에는 온갖 수심과 걱정이 가득했었다. 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제 상관의 목소리만 들어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 상관은 로버트 플로이드란 사람조차 까먹은 것이었다. 이 부분조차 충분히 경악할만한 얘기였는데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집 주소를 알려달라는 거 보니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았다. 세상에나. B 대위는 제 상관이 기억을 되찾게 되면 벌일 히스테리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집 주소는 개인정보지 말입니다. 그리고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 보니 미스터 플..세러신씨가 안 알려준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지 말입니다.”

-야. 내 집 주소가 내 개인정본데 내가 알려달라는 게 뭐가 어때서? 빨리 내놔. 어차피 네가 안 알려줘도 다 알아내게 되어 있어.

“.......”

-왜?

“중령님 이러는 거 볼 때마다 비질란테 출신인거 깨닫지 말입니다.”

-뭐 임마.

“행동 하나하나가 진짜 인간 비질란테 그 자체시지 말입니다.”

-오늘 할 일이 없나 B 대위? 연병장 함 뛸까?

“아니지 말입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미스터 세러신한테는 제가 말해드린 거라고 하시지 말지 말입니다.”

-안 해, 이 새끼야. 너도 네가 말했다고 하지 마라.



그게 정말 용건이었는지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B 대위는 전화가 끊기자마자 문자로 보내라는 메시지를 받고 입술을 댓발 내밀고는 주소를 써내려 갔다. 이게 정말 맞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는 게 군대 아니겠는가. 속으로 밥에 대한 사죄를 전하고 작성 완료한 주소를 미련 없이 제 상관에게로 전송하였다.






*






밥은 제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무뢰배와 대치중이었다. 그 무뢰배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집이지 어떻게 '네'집이냐고 했지만 말이다.

보스턴 백을 두어개 들고 와서 당당하게 소파에 자리 잡은 행맨은 팔짱까지 끼고 앉아서 밥을 바라봤다. 밥은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지금 나한테 '우리' 집 주소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거야. 밥?"

"......."



한결같은 대응에 밥은 더 이상 대꾸하기를 포기했다. 보나마나 B 대위나 누군가를 시켜 알아낸 것이 분명했다. 알아내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건 전혀 예상 못한 부분이었다. 이혼서류를 들고 오거나 너랑 결혼을 했다니 말이 되냐며 헤어지자고 깽판을 치는 행맨의 모습은 상상했었지만 같이 살자고 짐을 싸들고 들어오는 행맨? 정말 예상 밖이었다. 

정말 뭐라도 알고 저러는 걸까. 

밥은 아닌 척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행맨의 모습에 눈을 감았다. 마음이 심란했다. 가장 최근 행맨을 만난 이후 밥은 행맨을 묘하게 피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그랬다. 기억을 잃기 전과 똑같이 자신에게 '행맨을 가졌으니 자신감을 좀 가져'라고 말하는 걸 보고 참고 있던 설움이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그가 기억을 되찾거나 정말로 이 관계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뱉었던 ‘보고 싶다’는 말에는 정말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안경 너머로 시선을 유지하다 금세 걷어 들인 밥은 한숨을 내쉬었다.



“행맨.”

“제이크.”

“뭐?”

“제이크라고. 내 이름. 네가 자꾸 날 ‘네가 아는 행맨’이랑 구분 짓는 것 같아서. 잊었나본데, 내가 행맨이고 내 이름도 제이크 세러신이거든.”



자신이 애써 그어놓은 선을 한 번에 무너트리는 말에 밥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행맨은 그런 밥을 보며 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맹수 앞에 선 힘없는 초식 동물이라도 된 기분이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더 이상 대꾸할 기력을 잃은 밥은 손을 뻗어 문을 가리켰다.


“내가 안 된다고 해도 너라면 결국 네가 원하는 대로 하고 말테니까.”

“잘 아네.”

“.......저 방 쓰면 돼.”



밥이 가리킨 방문을 본 행맨은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러고는 밥의 앞에 와서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 룸메이트.”


밥은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다가 눈앞이 잠시 점멸하는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행맨이 기억을 되찾는 것보다 제가 먼저 이 집을 뛰쳐나가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기어코 행맨이 집으로 들어와서 같이 살기 시작했다는 밥의 말에 피닉스는 유선 상으로 있는 대로 욕설을 내뱉었다. 한참 내뱉던 욕설의 끝에는 당연하게도 밥에 대한 걱정이 뒤따라 왔다. 정말 괜찮겠냐는 말에 밥은 손에서 있는 대로 돌려대던 펜을 내려놓고 작게 응 하며 긍정을 표했다.



-.......나는 정말 이제 걔를 모르겠다.

“.......”

-휴. 그래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 밥. 알겠지? 아니면 루스터한테라도.

“......응. 그럴게.”

-밥.

“어?”

-.......아니다. 



피닉스는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냐고 물으려던 말을 삼켜냈다. 맨날 행맨을 욕하던 피닉스였지만 그건 단순히 제 파트너를 잃어서 성질이 나서 그런 것이었지 진심으로 둘이 헤어지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서로가 있을 때 가장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둘이기에 아는 사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었다. 이 혼란이 얼른 잠잠해졌으면 좋겠는데 딱히 손을 쓸 방도는 없어서 괜히 주변인만 애가 탔다. 뭐라고 말을 덧붙여야 하나 단어를 고르던 피닉스를 눈치 챘는지 밥이 먼저 웃으며 답했다.



“이런 걸 보면 행맨이 나한테 베이비라고 부른 게 영향력이 크긴 했나봐.”

-어?

“너네 다 나를 진짜 내가 ‘베이비’라도 된 것처럼 대하잖아. 내가 서른도 넘은 건장한 남성에 너희랑 똑같이 대위도 달았었고 제대하자마자 국방 연구소랑 민간 기업의 스카웃을 수도 없이 받을 만큼 끝내주는 재원이라는 건 알고 있는 거지?”



밥 답지 않게 으스대는 말투까지 더해진 말이었다. 피닉스는 그 언젠가 밥에게서 느꼈던 단단함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하긴 밥은 항상 그랬다. 주변에서 워낙 유난이어서 몰랐지만 저희 중 가장 단단하고 우직한 상태로 냉철한 판단을 내렸던 것은 항상 밥이었다. 루스터는 아직도 술을 마시면 밥을 향해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매버릭은 끝난 거라고 말할 수 있냐고 따져대곤 했다. 피닉스는 그 말에 한 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게. 생각지도 못했는데 행맨 자식, 염불처럼 외더니 은근 효과가 있었나봐.

“아무래도 걔 말투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요즘 보니까 기억 잃기 전에는 더 하더라고. 원래 저렇게 재수 없었어?”

-......말도 마라. 내가 늘 그랬잖아. 네가 사람 만든 거라고.

“그런 말 많이 듣긴 했는데, 저 정도인줄은 몰랐지.......”



사실 걱정해야 할 건 밥이 아니라 행맨 쪽일지도 몰랐다. 기억을 잃고 밥을 한 순간에 내칠 것처럼 굴더니 금세 또 돌아와 어떻게든 얽히고 싶어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행맨은 기억을 찾고 나면 자신이 했던 짓에 목이 매일 거고 기억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간다고 해도 과거의 자신과 싸우느라 목이 매일 것이었다.



“근데 나 궁금한 게 있어. 피닉스.”

-어. 뭔데.

“......행맨이랑 내가 만약 미라클 미션 때 만난 게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뭐?

“그냥......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미라클 미션 때 말고 다른데서 행맨을 만났어도 걔가 나랑 이런 사이가 됐을까 싶어서. 처음 만났을 때 행맨이 재수 없긴 했지만 날 엄청 싫어한다거나 내가 남자인 것에 거부감은 없었던 것 같은데.......”

-........

“지금 행맨을 보면.......음. 다른 데서 봤으면 절대 이런 사이는 못 됐겠다 싶어서. 거부감도 엄청 심한 것 같고. 그래서 그냥......그때 시기가 잘 맞았던 게 아닐까. 싶더라고.”


피닉스는 뭔가 아찔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턱과 어깨 사이에 끼고 있던 전화기를 바로 들었다.


-밥. 아니 로버트. 나 잘 이해가 안 돼서. 시기가 잘 맞았다는 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굳이 내가 아니어도.......미라클 미션 때쯤 행맨이 철들고 누군가를 만나 자리 잡고 싶을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서. 내가 운 좋게 걔의 그 시기에 끼어들 게 된 거지.”


그 누가 자리 잡고 싶은 시기가 됐다고 안 만나던 남자를 만나고, 죽어라고 안 바뀌던 성질머리를 바꾸고 군에다가 커밍아웃까지 하겠냐고 따지고 싶은 피닉스였지만 밥의 질문이 꽤나 진지한 무게를 담고 있어서 삭혔다. 그리고 집무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온 후임이 바쁘냐는 제스쳐를 보내와 이마를 짚은 피닉스였다.



-로버트. 내가 지금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이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자. 

“아, 응.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미안.”

-그런 건 아니고. 암튼. 다음에 다시 얘기해.

“알았어. 끊을게.”




피닉스는 종료버튼을 누르며 후임에게 들어와도 좋다는 사인을 내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행맨에게 처음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졌다.


'기억 잃은 건 안 됐지만 돌아올 거면 빨리 돌아오는 게 좋을 거다. 행맨.'


지금 당장 돌아온다 해도 그가 걸을 고생길이 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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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옥 넘모 오랜만;;;
짧은데 글이 너무 안 써져서ㅠㅠ 이러다 계속 못 올 것 같아가지고 이거라도 들고옴...ㅎ
진도 빨리 나간다 해놓고 개구라같네...ㅎ 아님 다음은 빨리 돌아오도록 해보겠음...ㅈㅅ




행맨밥 파워풀먼
2023.05.22 22:59
ㅇㅇ
크으으 이래야 행맨이지.. 주소 받자마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집으로 들어왔구나 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91ae]
2023.05.22 22:59
ㅇㅇ
이제 진짜 업보청산 제대로 가보자고 ㅠㅠㅠㅠㅠㅠㅠㅠ 둘이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면 조금씩 달라질 거라고 믿는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91ae]
2023.05.22 23:29
ㅇㅇ
모바일
“내가 안 된다고 해도 너라면 결국 네가 원하는 대로 하고 말테니까.”

“잘 아네.”


미쳐
[Code: 7558]
2023.05.22 23:46
ㅇㅇ
모바일
센세 오셔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d892]
2023.05.22 23:47
ㅇㅇ
모바일
미라클 미션 아니였으면 이런 사이가 될수 없었을거라고 생각하는 밥 너무 이해되고ㅠㅠㅠㅠㅠㅠ 기억 잃고 첫만남?때 밥 상처주던거 생각나네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d892]
2023.05.22 23:49
ㅇㅇ
행맨 결국은 쳐들어왔구나...업보를 너무 산처럼 쌓아놔서 밥하테 진짜 잘해야해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ef6f]
2023.06.08 13:33
ㅇㅇ
“내가 안 된다고 해도 너라면 결국 네가 원하는 대로 하고 말테니까.”

“잘 아네.”
상황이 길어지고 둘 사이에 수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밥이 계속 온갖 생각하게 되는게 이해가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d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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