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기억잃고업보쌓는행맨



21.
행맨과의 약속으로 나갈 채비를 하던 집으로 들이닥친 건 프리츠였다.


"어디 나가?"

"어? 프리츠. 어떻게.....!"

"너 내가 문단속 잘 하랬지."


초인종 소리는커녕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한 밥이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에 프리츠는 문이 열려 있어서 그냥 들어왔다고 답했다. 밥이 허둥대며 프리츠의 등 뒤로 문을 흘끔 바라보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오늘 나간 적도 없어서."

"그럼 뭐야. 걸쇠가 헐거워졌나? 열려있길래 그냥 들어왔는데. 잠금장치 새로 달아야겠네."


아무래도 겪은 게 있어 이런 보안에 예민한 밥인지라 표정이 굳은 채 풀어지지 않았다. 금세 그 기운을 읽어낸 프리츠는 순간 아차했다. 모르는 척 잠금장치나 갈아줄 걸. 괜히 얘기 했다. 이미 꺼낸 말을 주워 담을 수가 없어서 손끝을 쥐어뜯으며 잔뜩 힘이 들어간 밥의 어깨에 손을 올려 두드렸다.

"막내야 숨 쉬어. 그냥 네가 까먹은 걸 수도 있잖아. 이따 나가면서 내가 한 번 확인 해볼게. 정말 고장 난 거면 고치기 전 까지 우리 집에 와서 있어도 되고.“


밥은 잠시 울상이 되었다가 제가 다시 확인해보겠다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프리츠는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걸 볼 때면 밥에게 행맨이 필요하다는 게 티가 났다. 이런 식으로 든 자리 난 자리 확인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마음이 조금 진정 됐는지 다시 나갈 준비를 하는 밥을 살피다가 천천히 어디가냐는 물음을 던졌다.



"아, 나 행맨이랑 약속이 있어서."

".....행맨이랑?"

"응. 내가 말 안했나. 종종 불러서 만나거든. 기억 되찾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의외로 기억 되찾을 노력은 하나보네."



밥은 그 말엔 그냥 웃어보였다. 프리츠가 뭐가 맘에 안 드는 듯 계속 생각하다가 밥을 흘긋 보고는 물었다.


"넌 괜찮아?"


나간 김에 필요한 식료품을 사오려고 체크하던 밥이 찬장을 열다말고 프리츠의 물음에 시선을 잠시 마주쳤다가 피했다. 그리고 아닌 척 고개를 돌리고는 답했다.


"나? 뭐 안 괜찮을 건 뭐 있겠어."


프리츠는 대답만 듣고 바로 생각했다. '안 괜찮구만.' 하긴 밥은 제가 묻는다고 괜찮지 않다 말할 사람도 아니었다. 저렇게 둘이 자주 보는 게 과연 독이 될지 아닐지 가늠하던 프리츠는 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애도 아니고 나이도 먹을 만치 먹은 성인 둘이니 알아서 잘하겠지 싶다가도 그 ‘행맨’과 제 소중한 ‘막내’라고 생각하니 신경이 아예 꺼지지 않았다.

그래도 기억을 잃고 그 지랄을 하던 행맨도 다시 밥을 꼬박꼬박 불러내는 걸 보면 결국 둘은 인연은 인연인 모양이었다. 초반에 세러신가에서 보낸 걸 알면서도 홧김에 내밀었던 이혼서류가 밥의 손에 있는 걸 알게 되면 아마 행맨은 기억을 되찾고 길길이 날뛸 것이었다. 저와 한 약속도 있으니 누구보다 이혼 서류가 무겁게 느껴질 사람은 행맨일테니까 말이다. 그 서류를 밥이 아직도 가지고 있으려나. 프리츠는 사고가 있고 시간이 좀 흐르자 도통 속을 내보이지 않는 밥이어서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언제 나가?"

"이제 나가려구."

"가자. 가는 길에 태워다 줄게."

"어, 나 장도 봐야하는데-“

“끝나고 전화해. 어차피 밖에 있을 거야.”

"진짜 괜찮은데....."

"와 이제 행맨이랑 다시 만난다고 엉아와의 데이트를 마다하겠다 이거냐. 막내야? 나 배에서 내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프리츠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짐짓 성난 표정을 지어보이자 곤란한 표정으로 눈썹을 축 늘어뜨리던 밥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기다리게 하면 그렇잖아. 아, 혹시 오늘 약속 있어?"

"어. 오마하랑 하버드랑 예일 온대서. 너도 가자."

"아, 뭐야 왜 나한텐 말도 없이."

"걔네가 언제 말하고 오는 거 봤냐. 갑자기 하버드랑 예일 온다 길래 혹시나 해서 오마하도 근처냐고 했더니 그렇다 길래 부른 거야."


밥이 납득이 간다는 듯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안경을 치켜 올렸다. 복좌기 파트너 아니랄까봐 하버드와 예일은 곧잘 붙어 다녔는데 거기에 오마하나 프리츠가 껴서 종종 놀러 다니곤 했다. 넷이 성격은 비슷하진 않은데 공통점이라면 계획이 없고 즉흥적이라는 거였다. 즉흥적이라고 하면 조금 다듬은 표현이고 충동적이라는 게 더 걸맞긴 했지만 말이다. 밥은 지난 번 저 모임에 헤일로까지 합류해 꼈을 때 모습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루스터나 행맨이랑 지내면서 기 빨리는 경험은 많이 했지만 이쪽은 다른 유형의 기 빨림이었다. 게다가 회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이쪽을 만났을 때가 더 컸다. 



“나는 그냥 집에 있을래. 재밌게 놀고 와.”

“왜. 인사라도 하러 가지.”

“오늘은 뭔가 기분이 그렇네. 다음에.”

“그래도 연락해. 어차피 저녁에 볼 거라서. 그 전에는 나도 밖에서 일 좀 보고 있을 거니까. 뭐, 행맨이랑 저녁까지 있을 거 아니라면.”


그 말을 하면서 프리츠가 슬쩍 윙크를 하자 소파 쪽에 키를 집으러 그 곁을 지나던 밥이 그의 어깨를 퍽 치고 지나갔다. 키득키득 웃은 프리츠는 부부끼리 뭐 저녁도 먹고 그럴 수 있지 하며 놀리자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은 밥이 진짜 이럴 거냐면서 눈을 굴렸다.



“근데 걔는 그럼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본가도 나온 것 같다던데.”

“몰라. 본가에서 나왔대?”

“어. 그렇다던데. 갈 데도 없는 놈이 관사부터 확인했을 텐데. 자기 집 주소는 확인 안 했나?”

“......알았으면 집으로 왔겠지. 됐어. 나가자. 다 챙겼어.”



힘없는 목소리에 프리츠가 뭔가 이상해서 미간을 구기고 현관으로 향하던 몸을 틀어 밥을 막고 섰다. 검지를 펼쳐 밥의 얼굴 앞에 들어 보이고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뱉었다. 


“.......밥. 너 설마, 걔랑 종종 만난다면서 너희 둘이 결혼한 사이라는 건 얘기 안 했어?”

“........”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프리츠는 그대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럼 행맨도 모르는 거냐고 묻는 말에 밥은 고개를 까닥했다. 아마 모르겠지 않겠냐는 제스쳐였다. 한 마디 하려던 프리츠는 입을 꾹 다물고는 밥의 얼굴을 살폈다. 잔소리를 할까하다가 저도 생각이 있어 말하지 않은 거겠지 싶어 그만뒀다. 





*




날이 좋아 야외테라스에 나와 앉은 행맨의 곁에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차에 타서 그 광경을 목도한 프리츠와 밥은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메뉴라도 묻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여자 역시 손님 같았다. 행맨이 답지 않게 젠틀한 미소를 흘리며 답해주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여자 쪽에서 먼저 번호라도 물어본 모양이었다. 프리츠는 핸들에 손을 올리고 헛웃음을 뱉었다.


“얼씨구.”

“.......”

기가 차다는 듯한 프리츠와 달리 밥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행맨이 대충 거절을 한 건지 여자가 아쉬운 얼굴로 돌아서는 게 보였다. 그에 밥은 벨트를 풀고 내릴 준비를 했다. 프리츠는 그걸 흘끗 보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 콧잔등을 긁었다. 그리고 밥이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따라 내렸다.



“이제 가. 빌리. 고마워.”


행맨을 등지고 차 앞에 선 밥이 손을 내저으며 프리츠를 쫓아냈다. 팔짱을 끼고 그걸 가만히 보던 프리츠는 밥에게 손가락을 돌리며 뒤돌아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이해가 안 가는지 안경을 고쳐 쓴 밥이 자신의 모습을 위 아래로 훑었다. 왜? 하는 입모양과 함께 그의 말대로 한 바퀴를 돌고나자 가까이 다가온 프리츠가 대뜸 셔츠를 죽 잡아당겨 몸에 붙도록 만들었다.



“으억. 왜 이래. 갑자기-”

“아깐 몰랐는데 바람 부니까 옷이 나부끼다 못해 펄럭인다, 펄럭여. 너 나 항모에 있는 동안 뭘 먹긴 한 거냐? 너 내가 그렇게-”


잔소리가 시작될 것 같자 붙들린 셔츠를 털어낸 밥이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프리츠의 말을 막았다.


“내가 알아서 잘 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 이제 가. 진짜.”



알아서 한다는 사람이 기억 잃은 상대에게 결혼 사실도 말 안 해주냐고 대꾸하려던 프리츠는 이쪽을 발견했는지 아까부터 시선이 꽂힌 행맨을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거리가 살짝 있긴 했지만 얘기하면 충분히 들릴 수도 있는 거리였다. 밥에게 경고하듯이 눈을 한 번 마주친 프리츠는 고개를 돌려 행맨에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행맨.”

“프리츠.”


행맨 역시 고개만 살짝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밥은 그런 행맨을 흘끔 보고는 프리츠에게 빨리 차에 타라며 종용했다. 



“이따 데리러 올 테니까 연락해.”

“알았으니까. 얼른 가.”


프리츠가 차에 올라타는 것까지 보고나서야 뒤돌아서 행맨이 앉은 자리로 향하는 밥이었다. 나름 오랜만에 보는 거여서 반가움과 어색함 사이에서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밥은 이쪽으로 앉으라며 의자를 내어주는 행맨에 웃으면서 자리했다. 살짝 스치면서 풍기는 향이 너무나도 익숙한 향기였다. 행맨이 좋아하는 향수. 자신의 방에도 같은 제품이 놓여있었지만 이상하게 그냥 뿌리는 것과 행맨이 뿌린 후에 향이 묘하게 달랐다. 그가 기억을 잃은 초반엔 그 마저도 아쉬워 그냥 향수를 뿌려놓아 행맨이 있는 것처럼 위안 받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제가 알던 행맨의 향 그대로여서 기분이 좋았다. 익숙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행맨을 끌어안고 싶을 정도였다.



“오랜만인 것 같네.”

“......그러게.”



미소를 머금은 밥과 달리 행맨은 프리츠를 본 순간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제가 손이라도 닿을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프리츠와는 스킨쉽도 자연스러웠고 긴밀해 보였다. 게다가 데려다주고 이따가 데리러 온다고? 프리츠랑 대체 무슨 사인데 저러나 싶었다. 잘 생각해보면 제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도 프리츠였고 절 보자마자 베이비 없이 괜찮겠냐고 물어본 것도 프리츠였다. 그럼 당연히 프리츠 역시 자신과 밥의 결혼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더 저 보란 듯이 그런 걸까. 


「내가 그랬잖아. 다 좋은데, 혹여나 필요 없어지면 제자리에 곱게 돌려놓으라고. 그거 하나 부탁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



순간 프리츠가 했던 말들이 저를 스쳐 지났다. 제가 저 말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애초에 필요한 적 없었던 것 아니냐고 했던가. 눈앞이 지끈거리는 기분에 행맨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썹 뼈를 쓸었다. 이래서 어른들이 침묵이 금이라고 했던 건가. 결혼까지 했으면서 저런 말이나 내뱉고 다녔다니. 정신 나간 제이크 세러신. 



“행맨. 괜찮아? 안색이 안 좋은 것 같네.”

“......아냐.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단순히 연애가 아닌 결혼까지 한 사이라는 걸 알고 나니 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는 행맨이었다. 그래도 저를 보는 시선에 걱정이 가득 담긴 게 느껴져 뭔가 낯설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여전히 기억을 잃기 전 자신이 질투가 나긴 했지만 결혼까지 해서 옆에 붙들어 두었다니 기억만 되찾으면 온전히 제 것일 것이었다. 그걸 상상하니 묘하게 만족감이 치밀었다. 과거의 실수는 얼른 만회해버리면 되었다. 행맨은 제가 했던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을 기억 저 편으로 밀어버리고 밥에게 메뉴판을 들이 밀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너 뭐 먹을래. 얼른 골라. 난 프리츠한테 애 밥도 안 먹이고 다녔나는 소리 듣고 싶진 않다.”

“엇......아까 그거 들었어?”

“안 들렸어도 딱 보면 알 것 같은데.”



행맨이 메뉴를 보던 눈을 슬쩍 돌려 밥의 품이 잔뜩 남는 셔츠를 훑었다. 살이 좀 빠지긴 했지만 그렇게 티가 많이 나나 싶어 제 몸을 내려다보던 밥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평소라면 현역 군인인 너네랑 전역한 민간인인 제가 같겠냐고 툴툴 거렸겠지만 행맨의 사고 이후로 예민해져 식사를 거른 것은 맞아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행맨은 전에 만났을 때도 곧장 제 식습관을 알아차렸다. 마치 탑건에서처럼 말이다. 


관찰력이 좋은 걸까. 밥은 wso는 저인데 어쩐지 그 몫을 빼앗긴 것 같아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리고 행맨의 옷차림새를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메뉴판을 붙들고 슬쩍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내렸다. 메뉴를 골랐는지 이걸로 하겠다며 메뉴판을 내려놓던 행맨이 그런 밥을 보고 살짝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아냐. 그냥. 아, 본가 나왔다며. 요즘 어디서 지내?"

"일찍도 물어본다."

"어? 미안. 이번에 들었어."


놀라면서 곧장 미안한 얼굴로 변하는 밥에 행맨은 손에 쥐고 돌리던 핸드폰을 말없이 몇 번 더 굴렸다.

본가에서 나와 임시숙소에 머무르고 있는 행맨이었다. 임시숙소라고 하기에도 우스운 게 제 기억 속에는 자신이 관사 외에 얻어두고 사용하던 집이어서 자연히 발걸음이 향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집에는 제 여동생이 있었다. 원래도 살갑지 않은 사이여서 여기서 뭐하냐고 물었건만 네가 기억을 잃기 전 자신에게 준거니까 빚 받으러 온 것 마냥 굴지 말라고 했다. 내가 너한테 이 집을 줬다고?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몇 번이고 물었지만 동생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받아주는 걸 감사하게 여겨. 너를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은데 밥 생각해서 참는 거야."

그때는 얘도 로버트 플로이드 타령이네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동생이 하지 못한 말에 자신과 밥의 결혼 사실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갈 곳이 없는 걸 봐서는 우리가 같이 살았던 것 같더라."


행맨은 밥을 떠보듯이 집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고 밥은 그 말에 곧장 행동을 멈췄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던 밥이 애꿎은 메뉴판 귀퉁이만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물끄러미 바라보던 행맨은 굳이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아 별 것 아닌 것처럼 주제를 돌리려 했다. 주문부터 해야겠다싶어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르려는데, 고개를 떨구고 있던 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진작 말해줬어야 했는데."

"뭘?"

"우리가 같이 산다고 하면 네가 싫어할까 봐 말 못했어."

행맨은 그 말과 함께 둥그런 안경 뒤로 마주쳐오는 시선에 잠시 입을 닫았다. 그리고 빤히 그 시선과 마주했다. 무언가를 더 읽으려는 듯 눈동자를 굴렸지만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갑자기 밀려오는 탈력감에 깊은 숨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밥은 끝까지 제게 결혼 사실을 밝히지 않을 셈이었다. 혹시 아직 말을 용기가 생기지 않은 건가 싶었지만 행맨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밥은 자신과의 결혼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다.





*






"그래서 밀리랑 같이 지내는 거야?"

"어. 뭐 어쩌겠어. 걔도 불만은 많은 것 같던데 널 생각해서 봐준다고 하더라."

"하하하. 짜증 많이 나있겠네. 고생이다."

"내가 고생이지. 집 놔두고 나와서."



식사를 하며 이어가던 대화에 은근하게 다시 집 이야기를 꺼내자 밥이 그저 미소만 지었다. 행맨은 다 먹은 접시를 옆으로 밀고 팔짱을 껴서 테이블에 올리고는 밥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밥.”

“어?”

“넌 이러다가 내가 기억을 못 찾으면 어떡할 거야?”



행맨은 밥이 이 질문에 당황하거나 잠시 멈칫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밥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왜인지 모르게 그 무심하고 건조한 대답에 열이 솟구치는 행맨이었다. 제 의견만 중요한 건가? 자신이 헤어지자고하면 미련 없이 헤어지겠다는 뜻인가? 결혼까지 했으면서 이렇게 쉽게 대답한다고? 욱하는 마음에 다물고 있던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행맨은 가만히 포크를 움직이는 밥을 보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넌 내가 뭐라고 하든 그냥 따를 거야?”

“......뭐, 어쩔 수 없지. 기억도 없는 너한테 강요할 순 없잖아.”

“하, 왜 못해? 할 수도 있지. 너랑 나는-”



그리고 끝내 뒤에 이어질 말을 얼버무리자 밥이 그걸 느꼈는지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내가, 행맨한테?”



밥의 말은 그냥 자신을 칭한 게 아니라 그 ‘행맨’한테 억지로 뭘 강요하라고 하는 거냐고 묻는 투였다. 그게 뭐가 어떻냐고 말하려다가 눈이 마주쳤다. 네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지 않냐는 표정으로 웃는 밥에게 아무런 말도 되돌려주지 못했다. 지난 몇 달간의 자신의 태도만 봐도 제멋대로 해온 세월이 있어 더 우길 수도 없었다. 못마땅한 기분에 볼을 부풀리면서 앞으로 뺐던 몸을 뒤로 다시 물려 의자에 기대앉았다. 


얼마간 둘 다 말이 없어 아직 식사 중인 밥의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그 사이를 맴돌았다. 행맨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주먹을 쥐었다. 안 보는 척 행맨의 움직임을 훑고 있던 밥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데. 행맨.”

“그래서 계속 이렇게 따로 살자고?”

“......”

“......”

“.......넌 기억이 없는데 나랑 같은 집에 살고 싶어?”




행맨의 대답은 당연히 ‘YES’였다. 그러나 밥의 반응이 제가 당연하게 아니라고 할 것이라는 걸 베이스로 깔고 있어서 괜히 심통이 났다. 저번에 살짝 고민했던 질문의 답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밥은 자신이 막돼먹게 구는 걸 보고 기억 좀 잃었다고 이혼 서류를 내던질 망나니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제게 결혼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행맨은 비릿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럼 설마 제가 기억을 되찾지 못하면 끝까지 말 안하고 절 보내주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싶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태도로 봐서는 그게 가장 그럴싸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어쩐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제 행동들이 너무나 미안했지만, 기억을 잃었어도 자신은 세러신이었다. 손 안에 들어온 걸 쉬이 놔줄리 없었다. 


‘벗어나려 한다면 다시 확실하게 잡아줘야지.’




“같이 못살 건 또 뭐야. 5년이나 만났다며. 거의 부부 아냐?”



부부란 말에 밥이 몸을 움찔했다. 그 미세함을 놓치지 않은 행맨이 미간을 살짝 찡긋하며 고개를 까닥였다. 밥은 잠시 고민하는듯 하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기억이 없으니까 갑자기 나랑 살면 불편하겠지. 가족인 동생이랑 사는 것도 불편하다면서. 난 생판 남이잖아.”


밥의 대답에 또 울컥 치미는 행맨이었지만 조용히 눌러 넣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군인한테 남이랑 생활하는 게 불편하지 않겠냐고 묻는다니, 그 비좁은 항모 객실에서도 남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건 자신뿐만 아니라 밥 역시도 그랬다. 


“장난해? 나 해군이야.”

“.......”

“항모에서의 생활이 어떤지 누구보다 네가 잘 알잖아.”


밥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둘의 접시가 모두 빈 것을 봤는지 종업원이 다가와 접시를 치우며 더 필요한 것은 없냐고 물었다. 행맨은 커피 한 잔과 밥의 몫으로 아이스크림을 요청했다. 멋대로 시킨 아이스크림에 밥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신도 커피를 마실 거라고 하는 걸 그대로 묵살했다. 


“아이스크림이나 먹어. 괜히 커피 마시고 속 버리지 말고.”

“행맨.”

“그렇게 무섭게 불러도 안 돼.”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 진짜 괜찮아. 이렇게까지 애쓸 필요 없다는 얘기야.”

“뭐?”

“그러니까 굳이 나랑 다시 살지 않아도 돼. 그럼 네가 정말 불편할 거야. 만나고 싶은 사람 있어도 못 만나고........그럴 거 아냐.”



처음 들었을 때도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두 번째 들으니까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얘는 대체 뭐가 문제야? 라는 생각이 먼저 치밀었다. 자신은 기억이 안 나는데도 그가 신경 쓰여서 인생이 송두리째 뒤집혀가도록 노력하고 매달리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같이 노력하지는 못할망정 사람 속 뒤집는 소리만 하며 저를 내치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밥은 정말 자신이 떠나기를 바라는 걸까. 어떻게 단 1그램도 욕심내지 않을까 이해 안 되는 의문이 들었다.

결국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것이 무색하게 행맨의 얼굴은 완전하게 구겨졌다. 새어나오려는 열을 꾹꾹 눌러 담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리고 마주한 밥에게 말했다.



“너 진짜 한결 같아서 이제 화낼 힘도 없다. 넌 내가 그까짓 기억 되찾아서 내 속 편하자고 여기 와 있는 줄 알아?”

“.......”

“너 진짜 나랑 5년 만난 거 맞아? 어떻게 이렇게 나를 몰라. 나 한가한 사람 아냐. 밥.”

“.......알아.”

“알아? 그럼 이것도 알아? 나 너 때문에 여기 와있는 거고, 매번 너 부른 거야. 빌어먹을 잃어버린 기억 따위가 아니라 네가 신경 쓰여서라고. 알겠어?”

“......”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네가 나서서 숙제 안 내줘도 돼. 이미 충분하니까.”

“.......”

“네가 매번 이런 소리해서 진짜 짜증나고 답답한데 내칠 수가 없다. 시발.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네가 이런 사람인 걸 알고도 좋아한 거냐?”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에 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행맨은 그런 밥에게 더 뭐라 하지 못하고 혼자 화를 삭히려는 듯 씨근덕거렸다. 이대로 행맨이 또 일어설 거라고 생각한 밥이 어설프게 아이스크림의 숟가락을 쥐고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행맨은 밥의 예상과 달리 일어서지 않았고 더 이상 화를 내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눈치를 살피는데 한 손으로 눈썹 뼈를 매만지던 행맨이 밥에게 말했다.


“됐어. 그렇게 쳐다봐도 오늘은 안 갈 거니까 어서 마저 먹어. 그리고 마지막에 한 말은 사과할게. 화가 나서 말이 좀 막 나온 거야."

"......괜찮아."

"근데 너도 그렇게 얘기하지 마. 앞으로. 내가 진짜 열 받은 건 네가 나한테 욕심 내는 게 단 1그램도 없다는 것 때문이니까.”

“.......”

“너 나랑 5년을 만났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기억 잃은 걸 핑계로 널 버리고 가지 못하게 꽉 붙들어야 하는 게 정상 아냐? 보통 연인은 그러잖아.”

“......”

“하, 참 미치겠네. 혹시 널 만나면서 내가 널 불안하게 했어? 지난 5년 동안.”

“......아니.”

“그런데 대체 왜 그러는데? 이 행맨을 가졌으면 너도 좀 자신감을 가져야하는 거 아니냐고.”

“행맨.”

“왜.”

“......내가 그러길 바라?”

“당연한 거 아냐?”



행맨의 대답을 들은 밥은 뭔가 생각하듯 고민이 많아진 얼굴이 되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저 생각을 고쳐 줘야할 지 모르겠는 느낌에 행맨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괜히 타는 속에 시켜둔 커피를 들이키는데 밥의 시선이 제 얼굴로 꽂혀 들어왔다. 아이스크림의 표면을 살살 긁어 입에 넣고는 빤히 쳐다보는 것에 무슨 일인가 싶어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연유를 물을 새도 없이 코끝부터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밥이었다. 끝까지 마주한 시선은 떨어트리지 않은 채였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던 행맨은 뒤이어 들려온 밥의 말에 입을 꾹 닫았다.



“......보고 싶어. 제이크.”




그건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기억을 잃기 전 행맨에게 하는 말이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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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맨밥 파월풀먼
2023.04.17 13:35
ㅇㅇ
띠발 마지막 존나 눈물난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일단 빨리 집부터 합치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5a85]
2023.04.17 13:53
ㅇㅇ
아니 미친 잠깐만요 이거 둘이 다시 동거할 거라는 암시 아니냐 ㅠㅠㅠㅠㅠㅠㅠ 행맨이 지금 자기랑 같이 살았던 집 들어가려고 수작질 거는 거 같은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0c28]
2023.04.17 13:54
ㅇㅇ
밥이 과거의 제이크 그리워한다고 말하는 것도 너무 찌통이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밥은 아직도 행맨과 제이크를 분리해서 보는 거 같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0c28]
2023.04.17 14:36
ㅇㅇ
제이크 너 임마 빨리 둘이 같이 사는 집으로 들어가서 이혼서류 찢어버리라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b3ae]
2023.04.17 16:03
ㅇㅇ
모바일
와 마지막 로버트 말에 심장 다 뜯겼다.......
[Code: 77fb]
2023.04.17 16:38
ㅇㅇ
모바일
행맨 그래도 밥이 여전히 자기 그리워하는 건 직접적으로 알게 되었네 비록 기억을 잃기 전 과거의 자신이지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f2da]
2023.04.17 23:59
ㅇㅇ
모바일
행쪽아 일단 동거부터 다시하면서 밥 부둥부둥 달래줘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혼서류도 다 찢어버려ㅠㅠㅠㅠㅠㅠㅠ
[Code: fa00]
2023.04.18 10:39
ㅇㅇ
“......보고 싶어. 제이크.” << 와 이거 진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e57f]
2023.04.18 10:39
ㅇㅇ
밥 진짜 얼마나 참고 있었을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e57f]
2023.04.18 12:59
ㅇㅇ
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감정이 점점 고조되다가 보고싶어 제이크로 터져나오는거 미쳤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c18b]
2023.04.18 13:00
ㅇㅇ
행맨 프리츠랑 밥 존나 째려보고 있었구나 질투하는건 너무 맛있고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밥이 말하지 않으니까 집얘기 부부얘기하면서 오히려 기억 잃은 행맨이 밥한테 둘이 결혼한거 말하게 하려고 하고 내가 너를 왜 불러내서 만나고 있겠냐고 계속 자기마음 알아달라고 꼬셔내는거 봐 진짜 너무 좋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b745]
2023.04.18 13:02
ㅇㅇ
여전히 기억을 잃기 전 자신이 질투가 나긴 했지만 결혼까지 해서 옆에 붙들어 두었다니 기억만 되찾으면 온전히 제 것일 것이었다. 그걸 상상하니 묘하게 만족감이 치밀었다. 과거의 실수는 얼른 만회해버리면 되었다.

이거 진짜 행맨다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과거의 자기한테마저도 질투를 하지만 어차피 밥은 온전히 제꺼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한 실수는 만회해버리면 된다곸ㅋㅋㅋㅋ 아니 근데 그 과거 실수때문에 밥은 "우리가 같이 산다고 하면 네가 싫어할까 봐 말 못했어."하고 제이크에 대한 욕심1도 못내고 있잖아 결혼사실도 숨기려고 하고 있자나!!! 일단 당장 동거부터 다시 갈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b745]
2023.04.21 00:36
ㅇㅇ
모바일
ㅎㅇㅎㅇㅎㅇㅎㅇㅎㅇㅎㅇㅎㅇ 센세 제발 빨리 어나더 줘 어나더 생각하면 보고싶어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나붕 죽쏘
[Code: cec3]
2023.06.08 13:22
ㅇㅇ
"근데 너도 그렇게 얘기하지 마. 앞으로. 내가 진짜 열 받은 건 네가 나한테 욕심 내는 게 단 1그램도 없다는 것 때문이니까.”
“......보고 싶어. 제이크.”
다시봐도 넘 슬퍼.... 행맨쉑 기억은 없어도 마음이 끌리는대로 하는거면 좀 다정하게 해주라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d320]
2023.08.18 08:03
ㅇㅇ
모바일
ㅠㅠㅠㅠㅠㅠㅠㅜ
[Code: d6c7]
2023.08.25 00:26
ㅇㅇ
모바일
가슴이 찢어진다 ㅠㅜㅜㅜㅜㅜㅠㅠㅠㅠㅠㅠ제이크 언제 기억찾냐ㅜㅜㅜㅜㅜㅜㅜ
[Code: ef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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