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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높은 하늘에 영특한 천사가 있었어.

그런데 이 천사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만물을 굽어살펴야 하는 존재임에도 유독 인간을 혐오했는데, 청정한 천사의 눈에는 그들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족속으로만 보였던 것이지. 작은 일에도 매달리면서 서로를 헐뜯어대지 않나. 원한이라는 것에 인생을 통째로 얽매이지를 않나. 창조주의 보살핌 아래 때묻지 않고 순수하게 자란 천사는 이 모든 일의 원흉,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

반면 창조주는 이런 천사가 부덕하다 보고 그를 거대한 뱀으로 만들어 하늘 아래로 추방했어. 창조주의 깊은 생각으로는 하계의 삶을 배워오라는 의미였지만, 오만한 천사는 정반대로 창조주께 분노했어. 양피지 위로 한 방울 똑 떨어진 잉크가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가듯 뼛속 깊이 타락했지.

하늘에서 추방당한 천사가 가장 먼저 배운 감정은 분노였어. 분노로 휩싸인 천사는 곧 파괴를 일삼는 흉폭한 괴물로 변모했어. 사랑과 자비를 모르고 분노와 혐오만을 몸에 익힌 천사는 그저 마수와 다름없었지. 무차별하게 부수고 빼앗고 죽이는 것에도 끝내 질린 천사는 따분한 마음에 마족들을 규합하여 마왕으로 올라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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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다크 로드 바우어, 오합지졸 마족들의 영광스러운 첫 수장이었어.

마왕으로 군림한 지 수년이 흐르고 어느 날, 바우어는 길거리에서 기이한 나무 한 그루를 만났어. 그것은 본래 평범한 나무였지만, 긴 세월 인간들에게 신목이라고 받들어지다 보니 마음이 깃들어버린 요목이었지. 다시 말해 나무 정령으로, 바우어는 나무 앞에서 간단히 예를 올리는 인간 무리를 보고 놀라. 

이상하게도 조금 부러우면서, 조금 탐이 났고, 끝에서는 매우 성가셨어.

심통 난 바우어가 수작을 부려서 인간들을 모두 쫓아내자, 정령이 슬며시 말을 걸어왔어. 

- 어라, 한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는데요. 혹 대왕께서도 궁금하신지요?

그날 이후 바우어는 이 괴상한 정령을 굳이 찾아보러 가는 일이 많아졌어. 단지, 이야기 한 번을 듣기 위해서 말이야. 

썩어도 한 번 준치는 영원한 준치인 법, 힘이 흘러넘치는 바우어에게 영향받아 정령은 곧 나무의 틀에서 벗어나 다른 마족들처럼 팔다리를 갖게 되었어. 한때 신목 자신이자 모든 것이었던 상수리나무, 그 아래 더러운 수렁에서 기어나온 여인에게 바우어는 허니란 이름을 주었어. 

이리하여 두 존재는 가족으로 거듭나는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안타깝게도.

타락한 천사는 포용할 줄 몰랐고, 무구한 정령은 미워할 줄 몰랐어. 

백 년 가까이 의남매처럼 동고동락한 마족들의 왕과 나무 정령은 어느 날 인간에 대한 견해 차이로 크게 다투어, 결국에는 갈라섰지. 갈라섰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누군가 일방적으로 내쫓긴 것이나 다름없었어. 그리고 그날 밤, 갈 곳 잃고 정처 없이 헤매던 허니는 바우어의 반대파에게 붙잡혀 그대로 끌려가 살해당했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갈가리 찢겨 죽었지, 그녀의 옛 몸이었던 신목도 당연 불태워졌고.

절망한 바우어는 잿더미가 된 허니의 혼이 흩어지기 전, 남은 것을 어렵사리 끌어모아 어느 부유한 임부의 태에 잉태시켰어. 이로써 임부는 쌍생아를 해산할 거야. 한때 누군가 살려주자고 말했던 패배자들은 이제 모두 죽여버리고 없어. 역시 살려주지 말았어야 했어. 결국에는 보복으로 돌아왔지. 인간 마족 할 것 없이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지독해. 지독하게 원한만을 기억하고 은혜 따위 제 편의 좋게 잊을 뿐.

그러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하나 지켜내지 못한 천사는 피투성이 두 손으로 하늘에게 기도했어.

- 하늘이시여, 제 사랑하는 누이가 다음 생에는 부디…….


*


허니 비, 일찍이 양친을 모두 여읜 그녀는 마음을 나누는 가족이라곤 동생 범블 비 하나뿐이야. 올해 열일곱이 된 허니는 겉보기에는 정숙하고 아주 참한 후작 영애야. 스물이 되면 가문을 떠나 살고 싶지만, 숙부에게 의존적인 동생 꼴을 보아하니 먼 것 같아. 오늘은 늘 그래왔듯이 숙부의 면을 치켜세워주기 위해 사냥 대회에 동석한 날이야. 요 며칠 새 연달아 꾼 악몽으로 마음이 뒤숭숭했던 허니는 홀로 멀리까지 나아갔어.

어차피 훤히 아는 숲이야, 길을 잃을 염려 따윈 없지만.

방심하던 허니의 심장으로 하고 날아든 건, 시퍼런 독화살이었어.

‘어― 어, 어째서?’

허니는 비틀대며 황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지나가는 이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어. 감히 반격 불가능한 빈틈없는 한 수였지. 그러나 지면 판을 엎고 다시 둘 수 있는 체스와 달리, 인생에서 둘 수 있는 목숨이란 말은 오직 태어나면서 주어진 하나뿐.

심장을 정확히 파고 든 화살을 뽑지도 못하고 그대로 움켜쥔 소녀는 죽음을 직감하고는 두 눈을 그저 지그시 감았어. 조그만 몸이 순식간에 양지에서 어둠으로 추락했어.


*


화살을 맞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 허니가 다시 깨어났을 때, 눈앞에 펼쳐진 건 놀랍게도 지옥의 입구가 아닌 밤의 숲이었어. 허니는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아직 살아 있었던 거야. 그런데 어쩐지 가슴께가 시큰거려 손을 얹어보니 느껴져야 할 것이 느껴지지 않아.

박혔던 화살뿐만이 아니라 심장 고동, 그것까지도.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허니는 텅 빈 몸을 가까스로 일으키며 생각해. 몸 사정이 어찌 됐든 밤의 숲은 낮과 달리 시시각각으로 변해 위험해. ‘돌아가자. 돌아가야 해결된다.’ 일단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려던 찰나.

“너, 그 성치 않은 몸으로 어딜 가려 하느냐.”

고작 열 걸음, 열 걸음 앞에 사람이 아닌 무언가 있어.

한밤중의 어스름한 달빛 아래, 자욱하게 끼어 있는 안개 너머 누군가 천 년 묵은 고목처럼 장엄하게 서 있어. 그에 맞서 두 발로 바닥을 디디고 서 있을 뿐인데 분위기에 압도당해. 새카만 천이 거대한 몸을 꼼꼼하게도 감싸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뚫고 나오는 억겁의 살기가 도저히 감추어지지 않아. 그의 방향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섬뜩하게 와 닿아.

무엇보다 손아귀에 쥐고 있는 새빨간 핏덩이, 달빛을 받아 더욱 선명히 소름끼치게 보이는 둥근 고깃덩어리.

허니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어.

저것은 내 심장.’

자신의 심장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허니는, 이내 평정심을 잃고 창백하게 실색하여 풀썩 쓰러져.

미동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괴한은 영애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힘이 다 빠져 늘어진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그의 손안에 있던 심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어. 주인에게 돌려준 건 아니야. 그러나 언젠가 돌려줄 것이지. 누이가 잃어버린 물건은 항상, 늘 이 오라비가 칼산과 불바다를 건너서라도 되찾아왔으니까.

“찢겨 죽어, 불타 죽어…… 이제 하다 하다 암살까지 당해.”

시뻘겋게 물든 괴한의 눈은 마치 미치광이 같아. 어쩌면 그는 이미 오래전 미쳤는지도 몰라. 저벅저벅, 아주 먼 옛날 천명을 등진 뱀이 거대한 몸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안개처럼 녹아들어.

이 날, 대회 중 실종되었던 비 가문의 영애가 하룻밤 만에 무사히 돌아왔대.


*


허니는 어제 일을 똑똑하게 기억해. 그렇지만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어. 누구도 믿지 못할 끔찍한 괴담이잖아. 의원? 그야 거절했어. 왼쪽 가슴이 쥐 죽은 듯 매우 고요했으니까. 지금 그녀의 몸에는 심장이 없었어. 사냥 대회 중 홀로 실종된 것도 모자라 괴물이 되어 돌아오다니. 이 집안에서 쫓겨나는 걸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 온몸의 피가 바싹 말라. 

허니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초조하게 사방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가장 중요한 암살당했던 일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비로소 덜컥 멈춰 섰어. 평소 누군가에게 원한 살 만한 일을 저지른 적은 맹세코 없어. 영애는 자신의 주제와 한계를 명확히 알았어. 그런 제가 죽어 봤자 아무에게도 득 될 일이 없다는 것까지.

그러니까 왜? 왜 영애는 어젯밤 죽어야 했을까.

범인 말고는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에 허니는 우울하게 침상 위로 엎어졌어. 스스로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조차 되지 않아, 자신에게 독화살을 쏜 범인은 상상마저 불허해. 열일곱 소녀는 수마를 핑계 삼아 또다시 잠에 들었어. 긴긴 꿈만이 유일한 도피처였으니까.


*


꿈속에서는, 악몽을 꿨던 지난 며칠을 제외하고는 항상 대왕이라는 사람이 곁에 있어 주었어. 어째서 하필 대왕이냐고? 이유는 단순, 허니가 그를 언제나 대왕이라고 높여 불렀기 때문이야.

“대왕, 오랜만이네요.”

나흘 만에 보는 대왕의 얼굴은 어쩐지 반가워. 사실 얼굴이라도 할 건 없는 게, 대왕은 늘 가면을 쓰고 있었어.

“……그래.”

어린아이를 겁주려는 듯 흉악하게 일그러진 뱀 가면을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왕은 소녀에게 너무 아름다워. 그는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품이라는 게 있어.

대왕과의 첫 만남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현실이 아니라 단순히 꿈이라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을 무렵, 허니가 아주 어렸을 적이야. 당시를 회상해보면 대왕도 우연히 이 꿈속으로 흘러들어온 것 같아. 당황한 그는 이 광활한 꿈속에서 무작정 허니를 피해 다니다, 어느 날 홀로 무언가 깨달았는지 도망가기를 포기하고는 담담히 받아들였지.

그때, 허니는 본능적으로 그를 대왕이라고 호칭했어.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는 게 당시의 감상이야.

그는 대왕이라는 부름에 한참 멍하니 멈춰 서 있었어. 어린 소녀가 바지 자락을 자꾸 끌어 당기자 나직이 ‘그래’ 하고는 답해 주었지. 대왕은 허니가 하든 어떤 이야기든지 항상 묵묵히 들어 주었어. 양친을 모두 일찍이 여의고 이 휘황찬란한 후작가에서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던 허니는 본능적으로 꿈속의 귀인에게 꼭 매달렸어. 

믿고 의지해야 할 숙부는 앳된 질녀를 거추장스러운 천덕꾸러기로, 쌍둥이 동생은 제 아들의 후계자 자리를 빼앗아갈지도 모르는 적으로서 경계했어. 그 애는 워낙 멍청해 아직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지만.

허니가 흔치 않게 멍한 눈으로 과거의 일을 더듬고 있자,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대왕이 거리를 좁혀와. 

“안색이 나빠졌구나. 볼도, 그새 패였어.” 그렇게 말하며 허니의 앞에 선 대왕은 어째서인지 슬퍼 보여.

대왕에게서 그런 느낌을 난생 처음 받아보는 허니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바라봐. 그런데 아무리 가면을 썼다고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가까이 온 건 처음이어서, 몇 번 올려보다가 금방 아래로 고개를 내려버려.

반면 대왕은 개의치 않고 이어 말해. “많이 아픈가?”

…….

당연히 아팠지.

허니는 몸도 마음도 모든 게 지쳐 지독하게도 몹시 아팠어. 하지만 이 사람에게 아프다 말해도 나아지는 건 없었어. 아픈 건 계속, 혼자서 아팠으니까. 허니가 열두 살이 되었을 쯤 대왕에게 후작가의 이야기를 그만 둔 이유이기도 해. 늘 힘든 이야기밖에 없어 털어놓기가 민망해졌어. 비참해졌어.

어느새 열일곱 소녀의 눈에 눈물이 어렸어. 지난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어.

“아파요, 아픈데. 아파도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대왕이 고쳐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 고쳐주실 수도 없잖아요.”

허니는 끝내 오랜 시간 외면해온 진실을 토해내.

“당신은 늘 제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환영이니까. 이 대화도 저만이 기억하겠죠.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니까.”

흉악하게 일그러진 뱀 가면이 조금 흔들린 것 같아. 그러나 허니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불쌍하게 훌쩍훌쩍 울기 시작해.

뱀 가면을 쓴 귀인은 영애의 뺨에 자신이 손이 닿지 않도록 망토를 바싹 끌어쥐고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하나하나 닦아주기 시작해. 진이 빠진 영애는 무거운 고개를 귀인에게 순순히 맡겨. 그는 확실히 이상적으로 믿음직스러운 상대였어. 아, 너무나도 이상적으로.

“너, 정말 그리도 내가 네 앞에 나타났으면 좋겠느냐?”
“그래요. 대왕이 진짜 대왕이 아니더라도, 그냥……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요. 멀리서라도 괜찮으니까.”
“후회할 텐데.”

허니는 꿈속에서도 거절당하는 현실에 눈물이 또 울컥 솟아. 그의 손을 내팽개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 “나타나지도 않을 거면서 뭐를 후회한다는 거예요? 거짓말쟁이, 말만이라도 좋게 해주면 대체 어디가 덧나냐고요.”

환영이라는 걸 밝혔으니 이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라. 눈물이 마르면 다시 울고 계속 운 끝에 꿈에서 깼어. 대왕은 정말 마지막까지 답을 주지 않고 눈물만 닦아 주었어. 그러므로 환영이고, 거짓이며, 허구였지. 허니는 그 뒤로 며칠이고 며칠이고 좁은 방에 스스로를 철저히 가두었어.


*


사흘 뒤, 어려서부터 자진해 군에 들어가 변방에 있던 바우어 공작가의 차남이 드디어 황성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어. 바우어 공작가는 흔치 않게 큰 잔치를 열어 그 초대장은 골방 속의 한 영애에게도 툭 떨어졌어. 허니 비, 그녀의 이름이었지. 가기 싫었고, 가 봤자 괜한 눈치만 볼 게 명백했지만 허니는 곧 분주하게 준비를 시작했어. 만약 자신의 멍청한 동생 범블이 혼자 간다면 어떤 실수를 저지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벌써 끔찍했지.

‘제이미 캠벨 바우어라…….’

영애는 시녀를 불러서 눈에 띄지 않는, 그렇다 해서 격식을 낮추지도 않는 적당한 옷을 차려입으며 초대장에 적혀 있던 그의 이름을 우물우물 곱씹었어.


*





제캠바너붕붕
2024.03.08 16: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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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학의 시작에서 센세를 뵙습니다ㅠㅠㅠㅠㅠㅠ
[Code: 3692]
2024.03.08 17: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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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숨 막히듯 읽었어요 센세ㅜㅜㅜ 천재만재세요 센세ㅜㅜㅜㅜ
[Code: af85]
2024.03.08 21: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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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센세 돌아왔구나
[Code: af65]
2024.03.09 04:0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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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제캠바 너붕붕이라니 미쳐
[Code: 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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