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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사, 레너드 맥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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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즈는 하이포를 내려놓고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음. 오늘 하루 동안만 대체 혈청을 몇 개나 만들고 주사했는지.

강화인간들의 헌혈 덕분에 이번 사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으로 보였음. 와킨은 성심껏 자기 피를 내놓았고, 뒤이어 냉동에서 깨어난 네 명의 강화인간들도 마찬가지였음. 본즈는 그들에게 칸의 명령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이 감사하면서도 신기할 지경이었음.

 - 치프, 환자들의 상태는 모두 안정되었습니다.

 - 다들 수고했어. 난 좀만 쉴게.

본즈는 장갑을 벗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복도를 지나 6인용 게스트 쿼터로 향했음. 헌혈을 마친 강화인간들이 칸과 함께 수용되어 있는 방이었음.

 - 이봐, 다들 괜찮아? 덕분에 살았...

문을 열던 본즈는 우두커니 멈춰섰음.

칸의 크루들을 해동시킬 때부터, 본즈는 더 이상 자신이 칸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음. 이제까지는 엔티호 전체에서 칸과 실질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본즈뿐이었으니까. 본즈는 칸과 매일 함께 지내고, 밥을 먹고, 한 침대에서 잠드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 사실이 행복했고 뿌듯했음. 하지만 이제 칸의 "진짜" 가족들이 등장한 이상 본즈의 지위는 특별한 것이 될 수 없겠지.

그렇게 각오했는데도, 칸이 와킨의 품에 안겨 잠든 모습을 보자, 가슴 속의 무언가가 깨지는 기분이 들었음.

가족들을 되찾은 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음. 와킨은 칸을 소중히 자기 가슴에 안고, 그 곁에는 다른 강화인간 남자가 칸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 한 강화인간 여성은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칸의 발치를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음. 그런 식으로 다섯 명이 옹기종기 칸을 둘러싸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본즈의 가슴을 찌른 것은 방 전체에 감도는 편안한 분위기였음. 이렇게 붙어 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가족같은 분위기.

 - 어, 왔나. 의사?

와킨은 본즈가 온 것을 보자 고개를 들며 인사했음. 본즈는 표정 관리를 하려 했지만, 멈출 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음.

 - 너... 혹시 칸이랑 사귀냐?

그 순간, 강화인간들 전원이 미쳤냐는 얼굴로 응답했음. 와킨은 특히 황당해했음.

 - 의사, 내게는 아내와 아들이 있다.

 - 어... 그래?

 - 칸께서는 나와 아내의 혼인 주례를 서 주셨고, 내 아들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 대체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칸에 대한 내 충정은 순수하다.

그랬구나. 왠지 무안해져서 본즈는 헛기침을 했음.

 - 어쨌든, 다들 헌혈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환자들은 모두 무사히 회복될 거야.

 - 다행이로군, 의사.

 - 사실 난 너희들이 정말로 피를 내줄까 걱정했거든. 너희들 입장에서는, 300년만에 깨어나서 생판 처음 보는 의사가 갑자기 부탁하는 건데...

본즈가 덧붙이자, 와킨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음.

 - 바로 그 점 때문이다, 의사.

 - 뭐?

 - 네놈은 우리에게 피를 내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이제까지 의사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우리의 동의 따위 없이 침대에 결박하고 피를 뽑았지.

강화인간들은 이제까지 경험한 의사들이 모두 그들을 환자가 아닌 실험체나 연구대상으로 대했다는 사실을 설명했음.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본즈는 칸에게서 처음 피를 뽑았던 때를 떠올렸음. 본즈가 팔을 내밀라고 부탁하자, 복잡한 표정으로 팔을 내밀던 칸의 모습. 그것이 칸에게는 의사가 평범한 환자처럼 말을 걸어준 첫 경험이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본즈는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이 몹시 부끄러워졌음. 칸의 혈청을 가져가고 싶다는 욕심에, 모지리인 칸에게 거짓말을 해가며 엔티호에 데려온 것, 그 뒤에 피를 잔뜩 뽑아서 비축했던 것이 떠올랐음.

 - 저기... 모두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칸이 어쩌다 저렇게 됐는지에 대해서.

 - 그래. 대체 저분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 사실은 모두 너희들 때문이었어. 칸은 너희들을 되찾으려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러다가 그만...

본즈는 칸이 23세기에 깨어난 이후의 일들을 설명했음. 마커스 제독과, 벤젠스호, 그리고 엔티호에 얽힌 이야기들. 혹시라도 그들이 분노해서 폭력 사태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순화시켜서 말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음. 강화인간들은 모두 두뇌가 비상했고, 본즈가 무언가를 숨기거나 얼버무리려고 하면 금세 알아채고 추궁했음. 결국 본즈는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공개할 수밖에 없었음.

 - 그 마커스라는 놈이 이미 죽었다는 것이 몹시 유감이군. 내가 직접 사지를 찢어 죽였어야 했는데.

카티라는 이름의 흑발 강화인간 여성이 눈빛을 이글거리며 분개하자, 와킨이 이를 빠드득 갈며 동조했음. 본즈는 그들이 칸의 "새 주인님"인 자신에게도 같은 반응을 보일까봐 두려웠지만 이야기를 계속해야만 했음.

 - ...그래서, 결국 이렇게 너희들을 깨우게 된 거야.

모든 이야기를 마친 본즈는 긴장하며 좌중을 둘러보았음.

 - 미안해. 그러니까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양심있는 의사가 아냐. 칸이 내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다 하는 건,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 말을 잘 들으면 너희들을 풀어줄 거라고 생각해서...

 - 이봐, 의사.

와킨이 심드렁하게 끼어들었음.

 - 내 주군은 내가 잘 안다. 칸께서는 자존심이 높으시고, 자신을 모욕한 자를 가만두지 않으신다. 그런데 그분이 처음 의식을 되찾았을 때,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이었나?

 - 어...?

칸이 치료제 덕분에 처음으로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일.

그것은 바로 본즈에게 키스하는 것이었음. 두 눈으로 본즈를 똑바로 바라보고, 이름을 부르고, 입맞추는 것.

그 사실을 깨달은 본즈의 얼굴이 벌개졌음.

 - 칸이... 날 좋아하는구나.

 - 그걸 이제야 알았나, 의사?

와킨이 킥킥거리자 본즈의 얼굴이 더 뜨거워졌음.

 - 너희들은, 괜찮은 거야? 칸이 날 좋아한다는 게?

그 말에 와킨은 매우 씁쓸한 얼굴이 되었음.

 - 칸께서는 평생 우리를 위해서만 사셨다. 의사, 네놈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고 했지만, 300년 전의 전쟁 때도 언제나 그랬다. 우리를 지키는 일만 생각하느라 자신의 행복을 생각지 않으셨단 말이다.

와킨은 자기 품에서 잠든 칸을 안쓰럽게 내려다보았음.

 - 그런데 그분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내린 명령이라는 것이... "레너드를 놔줘. 난 레너드가 조아" 라는 것이었다. 내가 어찌 감히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있었겠나.

본즈의 가슴이 따스해졌음. 칸의 크루들이 깨어났으니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칸에게 특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음. 심지어 칸의 크루들조차 본즈가 칸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었음. 본즈는 신이 나고 들뜨기 시작했음.

 - 저기, 칸 말이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는 얘기 했었지?

본즈의 치료제 개발이 오래 걸리는 가장 큰 이유는 자료 부족이었음. 지구인이나 다른 외계인들에 대해서는 수천 년간 축적된 의학 자료들이 있었지만, 강화인간 의학에 대해서는 책도 논문도 없고 모든 것을 본즈 혼자 연구해야 했음. 사실 강화인간의 신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전문가는 칸 본인이겠지만, 바로 그 칸이 모지리라서 치료가 필요했으니,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상황이었음.

 - ...그러니까, 강화인간인 너희들이 날 도와주면 훨씬 더 빨리 치료제를 완성할 수 있을 거야.

그들은 즉시 흥미를 보였음.

 - 그 치료제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나?

 - 그래, 지금 내 방으로 가자.

하지만 그들이 일어서려는 순간, 잠든 칸이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크루들을 온몸으로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음.

 - 안돼. 안돼. 가지 마. 다시는 나만 두고 가지 마...

애처롭게 칭얼대는 칸을 내려다보는 본즈의 표정이 측은해졌음. 오랜 고생 끝에 간신히 가족들을 되찾은 칸은, 잠시라도 떨어지면 또 영영 헤어질까봐 불안해하고 있었음.

 - 그냥 내 방에 있는 것들을 여기로 전부 가져올게.

본즈는 얼마 후 패드와 함께 산더미 같은 시약들을 주렁주렁 싸들고 나타났음.

그렇게, 한 명의 인간과 다섯 명의 강화인간들로 구성된 긴급 의학 포럼이 개최되었음. 본즈는 그들에게 자신이 사용한 약의 성분과 배합, 작동 기전 등등을 설명했음. 300년에 걸친 의학의 발전을 따라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강화인간은 모두 기본적으로 천재들이었기에 이해가 빨랐음. 그들은 본즈의 치료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지적하기도 하면서 열띤 토론에 들어갔음.

그 때 통신기가 울렸음.

 - 닥터 맥코이, 긴급 호출입니다.

스팍의 목소리였음. 무슨 일이지? 본즈는 치료제에 몰두해 있는 강화인간들을 내버려 두고 브릿지로 달렸음.



임시 함장 스팍이 건조하게 선언했음.

 - 안도리안 사절단이 어디 있는지 발견했습니다.

안도리안 사절단으로 가장하고 탑승한 이들은 사실 오리온 침입자들이었으니까. "진짜" 안도리안 사절단의 행방을 찾아낸 것이었음. 그들은 인근 행성에 있는 기지에 붙잡혀 있었고, 오리온들의 철통같은 감시를 받고 있었음. 그들을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음.

 - 빔업시키는 것은 쉴드에 막혀서 불가능합니다. 구출대를 빔다운시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 쉴드가 커버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데? 설마 행성 전체는 아닐 거 아냐?

스캐너로 샅샅이 탐색한 끝에, 엔티호는 그 행성에서 쉴드로 커버되지 않은 사각 지대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음. 그 지점으로 구출대가 빔다운된 후, 어떻게든 안도리안들을 구출해서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오면, 엔티호로 빔업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으로 보였음. 문제는 그게 말이 쉽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는 점이었음.

 - 오리온들이 저 사각 지대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저희가 그 지점으로 빔다운될 거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그 곳에 공격을 퍼부을 것이 분명합니다.

 - 그리고 면적이 너무 좁단 말이오! 빔다운시킬 수 있는 건 겨우 네다섯 명이 한계일 거요. 어떻게 그 인원으로 저 많은 오리온들을 당해내려고?

술루와 스코티의 지적에, 본즈가 대뜸 입을 열었음.

 - 하지만 우린 지금 비밀병기가 있잖아.

 - 네?

 - 오리온들이 감히 예상조차 못하고, 네다섯 명으로도 대규모 전투를 치를 수 있는, 괴물같은 놈들이 우리 함선에 타고 있잖아. 강화인간들 말이야.

잠시 침묵이 감돌았음. 크로노스에서 칸이 혼자서 클링온 부대를 전멸시킨 사건은 지금도 엔티호에 괴담처럼 구전되고 있었음. 만약 칸 같은 괴물이 여러 명씩 투입된다면? 저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안도리안들을 구출해오는 것도 가능해 보였음.

 - 하지만, 그놈들이 배신이라도 한다면...?

 - 배신 안 할 거야. 칸이 지금 우리편이잖아. 강화인간들은 칸에게 충성하니까, 칸의 명령이라면 따를 거야.

 - 닥터 맥코이, 하지만 지금 그 칸이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상태가 아닙니까?

 - 걱정 고맙군. 하지만 나는 괜찮다.

느닷없이 들려온 칸의 낮은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확 쏠렸음. 칸이 좌우에 크루들을 거느린 채 당당하게 서 있었음. 본즈는 놀라며 벌떡 일어났음.

 - 칸?! 어떻게 벌써...?

아까 전까지만 해도 모지리였는데? 이렇게 빨리 정상으로 되돌아올 리가 없는데? 그 순간 뒤에서 와킨이 씨익 웃으며 하이포를 흔들었음.

 - 의사, 네놈의 치료제를 조금 개량해 봤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최소한 약효가 발생할 때까지의 시간은 줄이는 데 성공했지.

결국 칸과 크루들을 구출 임무에 투입하자는 제안이 승인되었음. 바로 조금 전에 강화인간들의 헌혈 덕분에 무수한 사람들을 구해냈고, 그렇게 목숨을 빚진 사람들 중에는 지금 드러누워 있는 커크 함장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더 이상 강화인간들을 마냥 적대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음.

최종적으로 꾸려진 구출대는 다섯 명이었음. 칸 본인, 칸의 크루들 세 명, 그리고 본즈. 굳이 본즈가 포함된 이유는, 구출대 전원을 강화인간만으로 채우자니 불안해서 최소한 엔티호 크루를 한 명이라도 넣어야 한다는 의견 때문이었음. 그리고 엔티호에서 강화인간들이 그나마 호의를 갖고 협력하는 인간은 본즈뿐이었음.

 - 그럼 출발하지, 레너드.

곧 서로의 몸이 하얀 빛으로 감싸이기 시작했음.

그들은 행성 지표면에 내려섰음. 역시나 오리온들은 엔티호 측에서 그 지점으로 침투해올 거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고, 빔다운되자마자 즉시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음. 강화인간들은 순식간에 진열을 갖추더니 능숙하게 대응에 들어갔음.

(세상에나...)

본즈는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전투씬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음. 강화인간은 한 명만 있어도 부대 하나에 필적하는데, 강화인간 네 명이 동시에, 그것도 칸의 명령에 따라 한몸처럼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폭풍이나 해일 같은 자연재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음. 네 사람의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서로 이어지면서도, 그 동작 하나하나가 번개가 내리치듯 파워풀했음.

더 기막힌 것은 칸의 명령이 이행되는 방식이었음. 본즈 자신도 백병전 경험이 있어서 긴급한 명령 하달에 익숙했지만, 칸과 그 크루들은 서로 마음을 읽는 초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확하고 신속했음. 칸의 작은 휘파람과 제스처, 심지어 눈짓으로 슬쩍 바라보는 것까지도 크루들은 즉시 캐치하고 실행에 옮겼음. 평생 손발을 맞추며 생사를 같이한 전우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음.

(저런 놈들이 수십 명, 수백 명씩 함께한다면...)

본즈는 칸이 어떻게 300년 전에 지구를 정복했는지 실감이 가기 시작했음. 천재적 리더인 칸과 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크루들, 그리고 저 가공할 전투력. 그걸 눈앞에서 직접 보고 있자니, 300년 전 조상들에게는 저놈들이 사람보다는 신처럼 느껴졌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음.

그들은 순식간에 오리온들의 방어를 뚫고, 기지 내에 붙잡혀 있던 안도리안들에게 도착했음. 본즈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안도리안 대사에게 인사를 건넸음.

 - 대사님, 저는 엔터프라이즈의 닥터 레너드 맥코이입니다. 대사님과 일행분들을 구출하러 파견되었습니다.

그 순간 요란하게 경보가 울렸음. 방어선이 뚫리고 포로들이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음. 이제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갈 차례였음.

돌아가는 길에서도 칸과 크루들은 놀라운 무용을 발휘하며 추격을 뿌리쳤음. 본즈는 이미 봤던 풍경이라 그나마 괜찮았지만, 안도리안 대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음. 안도리안들은 무예를 숭상하는 호전적인 종족이었기에, 강화인간 같은 전사들을 만난다는 것은 굉장한 쇼크였음.

 - 엔터프라이즈에는 이런 전사들이 있었단 말이오?

 - 어, 그게 설명하자면 좀 긴데요.

 - 어느 행성 출신의 무슨 종족이오? 행성연방에 이런 전투종족이 있었는데도 우리가 이제까지 몰랐다니!

 - 사실은 행성연방에 가입된 종족이 아니라...

그 순간, 와킨의 "칸!!!" 이라는 비명이 울렸음. 칸이 전투 도중에 갑자기 털퍼덕 주저앉은 것이었음.

 - 레, 레너, 레너드... 아파여...

약효가 풀려버린 것이었음. 모지리가 된 칸은 무방비로 두들겨맞았고, 강화인간 세 명이 동시에 칸을 구하러 황급히 자리를 이탈하면서 진형이 완전히 무너졌음. 그 순간 오리온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음.

 - 안 돼!!!

본즈는 빗발치는 페이저 광선을 보면서 절규했음. 만약 칸과 크루들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즉사했겠지만, 그들은 강화인간이었기에 너덜너덜해진 채로도 모두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음. 와킨은 만신창이로 휘청거리면서도 칸을 번쩍 들어 짊어지고는 가던 길을 재촉했음.

 -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저기다!

마침내 빔업 지점이 저 멀리 보였음. 그들이 마지막으로 달리려는 순간,

 - 으아아악!!!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대규모 전투의 여파로 기지 자체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었음. 극한에 몰린 오리온들은 더욱 난폭해졌고, 본즈 일행을 길동무로 데려가겠다는 각오로 밀려들었음. 과연 부상당한 세 강화인간들이, 지금 전투불능 상태인 칸에, 비전투원인 안도리안들까지 전부 보호하며 탈출할 수 있을까. 와킨은 길게 탄식하며, 짊어지고 있던 칸을 본즈에게 넘겨주었음.

 - 당장 칸을 모시고 이곳을 떠나라, 의사.

 - 뭐? 그럼 너희들은 어쩌고?

 - 우리는 저놈들을 막겠다. 어서!

칸이 안돼, 안돼, 하면서 발버둥치기 시작했음. 이번만은 본즈도 칸과 같은 의견이었음.

 - 야이 미친놈들아, 너희가 희생하면 칸은 어떡하라고?

 - 떠나라. 지금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 칸은 너희들을 잃고 저렇게 망가진 거란 말이야! 이번에 너희가 죽으면, 칸은 진짜로 영영 극복하지 못할 거라고!

본즈는 자기가 힘으로는 전혀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멱살을 잡아끌었음. 칸은 흐득흐득 울음을 터뜨렸음. 와킨은 본즈의 두 팔에 칸을 안겨주었음.

 - 의사, 부디 칸을 잘 부탁한다. 네놈이라면 그분을...

그 말이 끝나기도 전, 갑자기 그들 모두를 새하얀 빛이 감쌌음.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웃는 얼굴이 등장했음.

 - 짐?!

 - 본즈! 칸! 무사해서 다행이야!

커크가 활짝 웃었음. 본즈는 믿기지 않아서 주변을 둘러보았음. 이곳은 엔티호. 안도리안들이 주저앉아 있었고, 칸은 여전히 울고 있었고, 강화인간들은 조금 전의 자세 그대로 굳어져 있었음.

커크가 뒤늦게 설명했음. 기지 자체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쉴드도 함께 무너져서, 원래의 빔업 지점 이외의 다른 장소들도 빔업이 가능해졌다고. 때맞추어 스팍이 그 사실을 스캐너로 발견했고, 마침 메디베이에서 복귀한 커크 함장의 지휘에 따라 빔업이 진행되었던 것이었음.

 - 칸, 칸, 이제 괜찮아. 모두 살았어. 괜찮아.

본즈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칸을 감싸안고 토닥였음. 와킨과 크루들도 다가왔음.

 - 칸, 무사하십니... 커헉!!

칸이 와킨을 향해 힘차게 어퍼컷을 날렸음. 칸이 자기 크루를 공격하는 것은 처음 봐서 모두 벙쪄 있는데, 칸은 다시 흐엉흐엉 울기 시작했음.

 - 다, 다시는 그러지 마ㅠㅠ 날 두고 가지 마...

 - 네, 용서하십시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n일 후.

행성연방의 n차 외교 회담에서는, 예정에 없었던 청문회가 열렸음. 본즈는 정복 차림으로 침착하게 단상에 올랐음.

 - 닥터 레너드 맥코이입니다. 강화인간과 그 혈청에 대한 공개 질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사태에서 강화인간 혈청이 발휘한 효과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음. 그 혈청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고, 그들 중 상당수가 각 행성들의 고위 외교관들이었음. 오래 전에 커크를 살려냈을 때는 주변 사람들만 입을 다무는 것으로 어떻게든 숨기는 데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이미 우주 전체로 소문이 퍼져버린 상태였음.

그러나 강화인간들이 어딘가로 끌려가서 죽도록 피를 뽑히는 결과는 발생하지 않았음. 칸과 크루들에게 목숨을 빚진 각국의 고관들이 그렇게 놔두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연회장에서 생지옥이 펼쳐졌을 때 칸이 영웅처럼 등장해 모두를 구해주었던 것을 잊지 않았음. 특히 납치당했다가 직접적으로 구출된 안도리안들이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였음. 그 전사들이 찾아와 우리를 구출했고, 마지막 순간에 서로를 위해 희생하려던 모습까지 보았다면서.

그렇게, 각국의 사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본즈는 공개적으로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음. 본즈의 이야기 속에는 스타플릿에 엄청난 치부가 되는 사실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본즈 자신에게도 경력상 오점이 되는 내용들이 많았지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음.

 - ...칸 누니엔 싱의 동족들은 현재 72명만 생존해 있습니다. 그들 중 다섯 명만이 풀려났으며 나머지는 여전히 냉동된 채 스타플릿 본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현재까지 행성연방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모지리인 칸은 주변을 둘러보며 떠밀리듯 단상에 올라왔음. 본즈가 다독이자, 칸은 간신히 한 마디를 짜냈음.

 - 내 크루들이 보고 시퍼여.

반향은 엄청났음. 무수한 행성들에서 스타플릿에 대한 항의와 비난이 쏟아졌고, 행성연방에 가입 여부나 조약 체결을 타진하고 있던 외계 행성들이 갑자기 결정을 재고하기 시작했음. 스타플릿은 부랴부랴 강화인간들을 행성연방의 새로운 시민으로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칸을 불러서 협상을 진행해야만 했음. 모지리니까 잘 달래주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 협상 자리에, 칸은 모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차갑고 거만한 모습으로 위풍당당하게 출석해서 제독들의 뒷목을 잡게 했음.

결국 완성된 조약은 대략 이와 같았음.

1. 스타플릿은 칸 누니엔 싱의 모든 범죄를 사면한다.
2. 스타플릿은 냉동된 강화인간들을 전원 해동시킨다.
3. 그 대가로, 칸 누니엔 싱은 스타플릿을 상대로 제기할 수 있는 모든 형사고발과 손해배상을 포기한다.

이와 같이 그들의 과거는 수습되었음.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는 대략 아래와 같은 조약이 체결되었음.

1. 스타플릿은 강화인간들이 살 수 있는 행성을 배정하고, 정착을 위한 모든 물자를 제공한다.
2. 그 대가로, 강화인간들은 스타플릿에 정기적으로 일정량의 혈액을 제공한다.

말하자면, 스타플릿이 그들에게 살 곳과 물자를 내어주는 대신에, 강화인간들은 피로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었음. 대단히 기묘한 교역이지만, 강화인간 혈청이 막강한 희소 자원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음. 앞으로 그 혈청을 장기적으로 대량 공급받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살려낼 수 있을 테니까.

여기다 칸은 고집을 부려서 한 가지 조항을 더 끼워넣었음.

3. 강화인간들의 혈액을 채취하는 업무는 닥터 레너드 맥코이가 수행한다.

앞으로 칸과 크루들의 피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을 오직 본즈에게만 독점적으로 수여한다는 것이었음. 스타플릿 측에서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며 펄펄 뛰었지만, 칸은 본즈 이외의 다른 의사에게는 절대로 우리 피를 뽑게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음. 결국 그 조항도 통과되었고, 이로써 스타플릿은 본즈를 쫓아낼 수도, 징계할 수도 없이 앞으로도 의료장교로 써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음.

 - 날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본즈는 완성된 조약 문서를 읽으며 황당해했지만, 모지리인 칸은 헤헤 웃기만 했음.

 - 레너드는 내 의사야. 내 크루들의 의사야.

그렇게 본즈는, 칸의 의사이자 강화인간들 전체의 의사가 되었음.



화창한 날. 본즈는 익숙한 자세로 의료가방을 들고 행성 지표면에 내려섰음.

 - 여어, 의사.

텃밭에서 호미질을 하던 와킨과 몇몇 강화인간들이 인사를 건네자, 본즈도 손을 흔들었음. 날씨는 맑았고, 공기에서는 상쾌한 바람과 흙 냄새가 났음.

강화인간들이 이 행성에 정착한 지 몇 달째, 본즈는 여전히 엔티호에서 CMO로 일하면서 이 행성에 수시로 방문하고 있었음. 공식적인 이유는 "스타플릿 의료장교로서 강화인간 혈청을 채취하기 위해서" 였고, 실제로 그 임무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지만, 본즈의 마음속 진짜 이유는 칸을 만나러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음. 본즈가 찾아올 때마다 굳이 칸의 방에서 하룻밤씩 자고 가는데 그때마다 둘이서 뭘 하는지 모를 리가.

 - 칸은?

 - 개울가에 계시다. 햇볕이 드는 물가를 좋아하셔서.

본즈가 가방들을 내려놓고 부리나케 그쪽으로 달려가는 것에, 강화인간들 모두 절레절레 미소를 지었음.

울창하게 우거진 수풀 너머로, 개울에서 서툴게 물장구를 치는 칸의 새하얀 알몸이 보였음. 본즈의 입이 자기도 모르게 헤벌쭉 벌어지면서 걸음이 더 빨라졌음. 강화인간 청력으로 본즈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칸이 고개를 홱 돌리자 싱그러운 미소가 피어났음.

 - 레너드!

 - 칸, 나 왔어.

칸이 첨벙거리며 물 밖으로 달려나오고, 본즈는 물을 향해 뛰어가면서, 두 사람은 가장자리에서 서로 만났음.

본즈와 입술이 맞닿는 순간, 갑자기 칸의 눈빛이 달라지면서, 억센 팔로 본즈를 휘감더니 깊고 농염하게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음. 물가에 서서 칸의 뱀처럼 희고 늘씬한 몸을 끌어안고 키스하니 마치 인어와 사랑을 나누는 것 같았음. 본즈는 그 촉감과 분위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음. 조금 전까지 모지리였던 칸이 이젠 아니라는 걸.

 - 이봐, 진부하지 않아? 하필 나랑 키스하는 순간 제정신이 돌아온다는 게.

그러면서도 본즈는 좋아서 헐헐 웃었음. 칸은 젖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말리기 시작했음.

 - 놀랄 일도 아니지 않은가, 레너드. 내게 가장 좋은 치료제는 애정이라고 그대도 말했으면서.

그것이 본즈가 칸의 의사로서 내렸던 처방이었음. 마침내 냉동에서 깨어난 크루들 전원이, 모지리가 된 칸을 보고 충격을 받고 슬퍼했을 때, 본즈는 말했음. 칸은 너희들을 잃고 무너진 거야. 너희가 보살펴 줘야 해. 함께 있어주고 사랑해 줘야 해. 강화인간들은 한때는 그들 중에서 가장 강하고 우월한 지배자였던 칸이 이제는 그들의 보살핌이 필요한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했음.

그와 동시에 본즈는 강화인간들의 아낌없는 조언을 받으며 치료제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음. 본즈의 최신 치료제를 정기적으로 투여받고,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던 크루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면서, 칸은 빠르게 호전되어 갔음. 이제는 하루 중에서 모지리인 시간보다 아닌 시간이 오히려 더 길어졌을 정도로. 언젠가는 완전히 돌아오겠지. 본즈는 뿌듯한 마음으로 생각했음.

칸은 옷을 걸치며 고갯짓으로 마을 쪽을 가리켰음.

 - 그럼 일하러 갈까, 레너드.

 - 그래. 후딱 끝내고 다른 거 하자.

본즈와 칸이 함께 마을로 돌아오자, 크루들은 귀찮아하면서도 익숙한 동작으로 채혈 준비를 시작했음. 

 - 자, 알지? 다들 줄 서서 팔 걷어봐.

본즈의 "일"이란 강화인간들 73명의 피를 조금씩 뽑는 것이었음. 칸부터 시작해서 한 명 한 명 순서대로. 칸은 언제나 가장 먼저 팔을 내밀었는데, 그것은 의사라는 종족을 믿지 못하던 다른 크루들에게 "칸께서 신뢰하신 의사" 라고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보증이었음.

지금도 칸은 자연스럽게 한쪽 팔을 걷어 내밀었음. 본즈는 그 동작에 담긴 신뢰의 무게를 알고 있기에, 감사와 애정을 담아 두 손으로 받아들었음.

 - 걱정 마, 안 아프게 해줄게.

난 너의 의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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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베니칸 칼어빵본즈 존해리슨텀 베니텀 본즈존 본즈칸

* 와킨의 아내와 아들은 소설판에 나오는 설정임. 소설판에 따르면 자식이 없는 칸은 와킨의 아들을 후계자로 키움.
2024.03.01 11: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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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센세ㅠㅠㅠㅠㅠㅠㅠ 아름답다.....아름다워요.......
안 아프게 해줄게. 나는 너의 의사니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휘력이 딸려서 소리밖에 못지르겠다
진짜 최고야 센세.....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수가있지.....사실 칸도 본즈를 좋아하고있었다니......그리고 질투하는 본즈까지....... 강화인간들 무사히 살게되어서 다행이다......ㅠㅠㅠㅠㅠ
[Code: 3b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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