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이 불러다놓고 책읽어달라거나 노래 불러달란거면 좋겠다.
어릴 때부터 버릇 들어서 나이 먹고 난 지금도 쭉 그러는 거.
바쁠땐 전화로 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집으로 호출하건 자기가 찾아가건 해서 리얼사운드로 들으며 안겨서 잠드는 거지.




#슬램덩크 현준수겸 하나후지




요 며칠 신경을 누가 칼로 박박 긁어대는 것 같다.

몇 달간 잠을 못 자니 두통과 피로로 밥은 커녕 물조차 잘 넘기질 못해 집에서도 매일 먹은 걸 모조리 토하는 게 일이라 학교에선 그냥 내처 굶고 마니, 답지 않게 빈혈이 왔다며 몇 달 전 쓰러져 실려간 병원에서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오늘도 제발 입원하고 가라는 걸 꾸역꾸역 링거만 몇 개 맞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길은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라 돈 깨질 각오 좀 하고 아예 병원 앞까지 콜택시를 불렀다.

"죽을 것 같다..."

혼자 있는 공간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을 나직하게 읊어 본다.

약한 소린 용납할 수 없다.
자신만 보는 부원들의 시선을 떠올리면 내일의, 모레의, 내년의, 십 년 뒤의 체력과 정신력을 긁어모아서라도 일어나 뛰어야 한다.

"환자분, 지금 영양불균형이 심각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극단적으로 경고해 드릴까요? 지금 환자분 건강 상태면 당장 심장이 움직임을 딱 멈춰도 의료진들 중 누구도 안 이상하다 할 거예요!"

최후의 경고처럼 내뱉는 의사의 말을 곁에서 듣던, 보호자 대신으로 수겸을 지키고 있던 같은 병원 의사인 현준의 아버지마저 오늘은 한숨을 쉬었다.

"의료인으로서의 직업윤리가 있으니 끝까지 입은 다물겠다만, 너 안 된다. 감독직 사임하자."
"싫습니다. 안 돼요."
"수겸아-."
"학교에서 감독 안 구해 준답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패배했다고요. 저라도 책임 안 지면 우리 애들 어떻게 뛰는데요. 농구 좋다고 생고생 해 가며 겨우 상양 온 애들인데, 주장인 저까지 애들 버리면 쟤들은 어떻게 하는데요."
"너는 어떻게 하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시선을 떨군 수겸의 발 앞에 결국 현준의 아버지가 무릎을 꿇는다.

"수겸아, 내가 무릎 꿇고 빌 테니 제발 그만 해라. 너 피 토해 가며 말라 죽어가는 꼴 더는 못 보겠다. 요즘 너 때문에 내가 안 마시던 술을, 의사란 게 그놈의 질색하던 술을 매일 밤마다 마신다. 아버지 좀 살려 줄래?"
"...죄송합니다."

택시 뒷좌석에 실려 늘어진 채 학교로 향하던 수겸은 심호흡을 하며 이성을 찾았다.

학교 교문 앞에서 교복 매무새를 고치고, 고통에 몸부림치느라 흐트러졌을 머리를 가다듬은 뒤, 보이지 않을 허벅지며 팔뚝을 몇 번 세게 내리쳐 정신을 그러모으고 체육관 문을 열었다.

"다들, 연습 잘 하고 있었나! 어디 실력 좀 볼까? 팀 나눠서 연습시합 하자!"

의식을 잃고 쓰러졌었다는 말과는 달리 활기찬 모습에 부원들 모두는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딱 한 사람만은 그러지 못한 채 초점이 조금씩 흔들리는 수겸의 눈동자를 체크했다.

연습이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 시간, 느닷없이 현준이 수겸의 어깨를 잡아챘다.

"감독, 면담. 단독으로."
"말 짧네. 그래. 들어가지."

부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안에서 걸어잠근 현준이 수문장마냥 문에 등을 대고 기대어 서서는 팔짱을 끼었다.
면담 신청을 했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자신을 관찰하듯 노려보는 시선에 수겸이 실소를 터뜨린다.

"감독과 선수로서야, 주장과 부주장으로서야, 아니면 팀 멤버로서야."
"인간 대 인간으로. 네 가장 오래된 친구로. 너 평생 책임지기로 약속한 사람으로. 네 가족 자격으로."
"우와, 무섭네, 성현준이. 말 해."

똑같이 팔짱을 낀 채 그 앞에 마주서 턱끝을 치켜들자, 현준이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야?"
"뭐가."
"너 약 털어넣는 거 봤다. 뒤져서 미안하지만 네 방 휴지통에서 빈 약통도 몇 개 찾아냈고. 내가 너보다는 약에 대해 잘 알아. 그거.. 멀쩡한데 조금 아픈 사람이 먹는 약 아니었다. 이미 심각 상태에 들어선 사람한테나 처방하는 걸 네가 왜 먹는데?"
"먹을 만 하니 먹겠지이..."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먹을 만 한 상황인지 묻잖아."

끈질긴 도돌이표에 매번 지는 건 역시나 수겸이다.
현준은 져 주고 싶으니까 내내 제 말에 져 주는 거지, 본인이 이긴다 한 번 마음 굳게 먹으면 끝까지 물고늘어질 성미란 걸 평생 겪어 봐서 잘 아는 수겸은 오늘도 일찌감치 백기를 들었다.

"힘들어서. 나 바쁜 거 알잖냐."
"얼마나 힘든데."

잠시 말을 멈춘 수겸이 피식 웃는다.

"이대로 10초뒤 고꾸라져 이 자리에서 죽어도 안 이상할 정도?"
"너는 왜..! 네가 그러면 내가 뭐가 되는데!"

드물게 짜증을 내며 탄식을 뱉은 현준이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네, 어머님. 접니다. 죄송한데 수겸이랑 제 짐 좀 대충 싸 주세요. 오늘부터는 저희 둘 다 저희 집 가서 살게요. 아뇨, 지금까지 모자라기는 커녕 충분히 잘 해 주셨는데, 수겸이 건강 관리 해 주긴 아무래도 저희 집이 조금 더 환경이 나을 것 같아서요. 네, 네. 저희 어머니께는 제가 지금 연락드릴 테니 아마 어머니가 차 몰고 짐 가지러 가실 겁니다. 더 필요한 거 생기면 제가 가서 따로 챙겨 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두 번째 통화.

"엄마? 퇴근하셨죠? 어, 수겸이네 가면 어머니가 짐 챙겨 둔 거 있을 테니 그것 좀 부탁해요. 아니, 우리 이제 우리 집에서 살 거야. 얘 24시간 옆에 붙어 감시하게. 아, 내가 무슨 의처증이야? 애가 아파 죽어가니까 그러지. 어, 응, 어. 아, 현관에 비상금 좀 꺼내두고 가요. 애 데리고 택시 타고 갈 거니까. 아, 알았어, 알았다니까. 잔소리를 듣건 두들겨 맞건 집에 가서 다 할 테니 끊어요."

세 번째.

"아빠, 집에 가서 나랑 얘기 좀 할까요. 나 김수겸한테 다 들었다. 어떻게 아빠가 나한테 이래요? 친아빠 맞아? 아이고, 됐네요. 아, 됐다고오-! 일단 가서 봅시다 아버님. 우리 오늘 마주앉아 할 말과 들을 말이 참 많을 거예요. 기대하시죠."

순식간에 상황 정리를 마친 현준이 수겸을 쳐다보았다.

"너 퇴근. 잠시 여기서 쉬어라. 애들 정리는 내가 끝마치고 올 테니 잠깐 멍이라도 때리고 있어."
"내가 멍 때릴 여유가 어디 있냐."
"시끄럽습니다, 감독님. 쉬라면 쉬어."

져 줄 생각이라곤 손톱만치도 없어 보이는 모습의 현준이 밖으로 나가며 문을 쾅 닫는 걸 지켜보던 수겸이 부실 캐비넷 서랍 구석에 숨겨 둔 약통을 꺼내 진통제를 덜어냈다.
이거라도 먹어야 몰아닥친 두통이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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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현준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표정은 언뜻 웃는 것처럼도 보였지만 사실 저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모습이란 걸 아는 수겸은 그저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내키지 않지만 식탁 앞에 앉을 때까지.
수겸의 손으론 아무 것도 안 시키겠다는 것처럼 수발을 드는 현준이 불편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은 하지 말라 소릴 하는 것조차 무섭기에 현준의 성미가 풀릴 때까진 이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물 넘어가? 한 번 끓여 식혔다. 목 좀 축이고 뭐 먹어. 너 내시경 보니 속 엉망이라고 하시더라. 하도 토해서 위에 식도에 죄다 출혈 있다고. 식도파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아까 엄마가 죽 해 두고 가셨다. 오늘은 토하지 마. 좀 참아 봐. 이따 아빠 오실 때 네 약 대신 타 오신다는 것 같았어."
"귀찮게 뭘."
"너 정상으로 만드는 게 우선이다. 그거 좀 하는 게 대수야. 너 우리 가족이잖아. 아무도 너 챙기는 거 안 귀찮아 해."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마신 물은 평소처럼 마시자마자 역류하지 않고 뱃속을 따뜻하게 덥혀 주었다.
보통 때였다면 쳐다보는 순간 입을 막고 화장실로 뛰쳐들어갔을 멀건 흰죽마저 현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어찌저찌 두어 숟가락 넘긴 즈음 현준의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어이구 우리 아들, 오랜만이네? 보고 싶었다. 한 번 안아 볼까? 어머, 왜 이렇게 몸이 축났대... 얘, 넌 옆에서 뭐 했니?"

따뜻하게 안아 주시는 어머니의 손길에 절로 편안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식탁에서 방까지의 몇 걸음조차 제 발로 걷는 게 허락되지 못했다.

"넌 우리 집 있는 동안 바닥에 발 댈 생각 마라. 머슴 뒀다 뭐 하니? 실컷 부려먹으렴. 뒷정리는 쟤가 할 테니 넌 자라. 응?"

어머니 말에 설거지를 하다 말고 부리나케 온 현준이 수겸을 덥석 안아들고 방으로 옮겼다.
침대에 수겸을 눕힌 뒤 현준은 부엌으로 돌아가는 대신 수겸의 가슴을 토닥거리며 곁을 지키고 계속 말을 걸었다.

내일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엄마가 해 주신다더라.
다음에 병원 갈 때는 나랑 같이 가는 거다. 아빠 멱살을 잡아서라도 네 진료 예약 스케줄 다 알아낼 거야.
학교에서도, 농구부에서도, 일상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있으면 제발 바로바로 얘기해. 나 눈치없는 바보 만들지 말아라.

"말 되에게 많네에... 그만하고 나 책이나 좀 읽어 주라아... 올해 들어 교과서를 펼쳐 본 적이 없는 것 같다아...."
"시험 범위 읽어 줄게 그럼."

수학 공식이 자장가처럼 들린다.
가슴을 토닥이는 느릿한 박자에 심장 박동과 숨소리가 조금씩 맞춰져 간다.
수면제를 그렇게 먹어도 또렷하게 뜨여 있기만 하던 눈꺼풀의 움직임이 서서히 멈추고, 감긴다.

정말 오랜만에 꿈조차 꾸지 않고 잠이 든 밤이었다.
2023.05.01 02:43
ㅇㅇ
모바일
수겸이 너무 안쓰러워 ㅠㅠㅠㅠㅠ 현준이 없었으면 어쩔뻔했냐... 현준이가 수겸이 아껴줘 ㅠㅠㅠㅠ
[Code: 7528]
2023.05.01 04:51
ㅇㅇ
모바일
이 둘은 다시 태어나도 부부일 듯
[Code: 87e7]
2023.05.01 13:39
ㅇㅇ
모바일
현준이가 수겸이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말밖에는... 스트레스 받아서 몸 축나는 수겸이 안쓰러운데ㅠㅠ 그거 다 케어해주는 든든한 현준이 최고다
[Code: 12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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