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우-."

맨 앞에서 뛰고 있는 수겸이 내뱉는 긴 숨은 언뜻 보면 호흡이 달려서 하는 심호흡처럼 보였지만, 바로 뒤에서 뛰는 현준은 그게 땅이 꺼져라 쉬는 한숨임을 쉽게 알아차렸다.

인터하이에서 패배한 그 날부터였으니 거의 한 달 째 매일같이, 하루종일 반복되는 근심 가득한 한숨의 무게는 수겸 본인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고, 누구도 나누어 들어 줄 수 없는 것이기에 현준은 그저 아무 것도 못 보고 못 들은 척 묵묵히 함께 뛰어 주기만 했다.
지금까지 그랬듯 언젠가 때가 되면 다 말해 줄 테니 그 전까지는 다그치지도 눈치주지도 말자고 다시 한 번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바라본 등은, 언제나처럼 자신들을 감싸고 지켜 주던 높고 단단한 장벽이 아니라 한 줌에 쥐면 파사삭 부서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운 가랑잎이었다.




"..자, 그럼 다들 한눈팔 생각 말고 바로 들어가라. 이상, 해산!"

기가 꺾여 잔뜩 풀이 죽었던지 아니면 제 성에 못 이겨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대는 부원들을 다독이고 달래 귀가시킨 뒤 자신도 집에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집어들려던 수겸은 손에 힘이 빠진 것도 아니건만 천근만근처럼 느껴지는 손 안의 무게에 쓴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3년 내내 들고 다니느라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새겨진 더플백을 손끝으로 쓸어 본다.

승리의 짜릿함도, 패배의 아픔도, 하나씩 되새김질하는 수겸의 등 뒤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현준이냐. 먼저 가라고-."
"김수겸 군, 아니, 김수겸 감독."
"아, 서, 선생님?"

고문 선생님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수겸이 펄쩍 뛰듯 일어나 뒤로 돌자, 선생님이 허허 웃으며 수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잠시 시간 좀 내 주시게, 김 감독님."

저런 식으로 부른다는 건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교사와 학생 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무자로서 책임자이자 최고결정권자에게 하는 보고라는 뜻이다.
숨이 턱 막히는 걸 숨기고 싱긋 웃어 보인다.

"그러시죠. 무슨 일이십니까."

하지만 잠시 뒤 들은 얘기는 수겸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거두어 가기에 충분했다.

"폐부, 요?"
"그래, 이미 결정난 사항이네."
"어째서죠? 아니 왜... 갑자기 이런...."

고문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어 담배를 한 대 꺼내 문 다음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다가 수겸을 흘끗 보고는 라이터를 도로 주머니에 넣은 뒤 생담배를 깊이 들이마셨다.

"전임 감독이 그만 두고 김 감독이 반 강제로 그 자리를 떠맡기까지 공백이 6개월 정도였지. 과연 학교에서 농구부를 유지할 마음이 있었다면 장장 반 년을 감독 없이 학생들끼리 뛰게 뒀을 것 같나?"

그랬다.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더 참혹했다.
2학년에 올라오자마자 감독은 더 이상 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독의 개인적인 사정이라 일러 두었지만 학교 안을 떠도는 스산한 공기를 읽지 못할 멍청이는 아무도 없었다.

위험하다.
최대한 외면하고 연습에만 매진하려 했지만 불안감에 갈팡질팡하는 부원들을 잡아일으키고 등을 떠밀어 하나로 만든 건 수겸이었다.

"걱정한다고 해결될 거라면 저부터 걱정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 도움도 안 되잖아요. 그럴 거면 그냥 다 잊고 우승에만 집착하자고요."

단호한 수겸의 리드에 부원들은 하나 둘 정신을 차렸고, 그 해 인터하이에서도 막판에 아쉽게 해남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꽤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바로 직후 감독은 사직서를 냈고, 상양의 감독은 공석이 되고 말았다.
3학년들은 줄줄이 은퇴하고, 1학년과 2학년 부원들 중에서도 퇴부서를 낸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임시 주장 자리를 떠맡게 된 수겸은 일단 퇴부서를 보류해 둔 뒤 어떻게든 농구부를 유지하려 온갖 방법을 다 짜냈고, 그 마지막으로 꺼내든 카드가 바로 선수 겸 감독이란, 어찌보면 수겸에겐 독이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내버려 두면 흐지부지 해산할 줄 알았는데 그 때 김 감독이 나타났더란 말이야. 학교 측에선 처음엔 코웃음을 쳤어. 자네는 모르겠지만 그래 어디 얼마나 하나 보자 하고 내기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네. 그런데... 너무나도 잘 해 줬지. 오늘 여기까지 상양의 투혼을 말 그대로 불태우면서. 그런데 이젠 그것도 끝이로구만."

잘근잘근 필터가 씹힌 담배가 고문 선생님의 손 안에서 바스라졌다.

"또 똑같이 감독 없는 팀이 될 걸세. 학교는 아무런 손도 쓰지 않을 거고. 어디, 김 감독이 한 번 대답해 봐. 김 감독이 상양을 떠나면 과연 누가 그 자릴 맡아 팀을 이끌 수 있을 것 같은가? 후임으로 삼을 부원이 있나?"

없다.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로 없다.
그리고 사실은 이런 짐 따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도 않다.
피를 토하고 뼈를 갈아 가며 약물에 의존해 정신력으로만 간신히 버티던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또다른 누군가에게 버티라며 종용하는 건 너무 가혹한 짓이다.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만 피가 나게 깨물어대는 수겸을 본 고문 선생님이 헛헛하게 웃으며 수겸의 등을 쓸었다.

"책망하는 게 아니야. 책임지란 것도 아닐세. 김 감독은 오히려 놀라우리만치 열심히 해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어 왔지. 어찌보면 김수겸이란 사람이 상양의 마지막이란 게 상양에겐 영광인지도 몰라. 그러니 너무 부담갖거나 놀라지 말라고 미리 귀띔해두는 걸세."

그럼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길 기도하지.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구만.

꿈을 꾸는 걸까.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머지 끔찍한 악몽 속에서 헤매이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 악몽이 지독한 현실임을 깨달은 건.

"김수겸, 너 여기서 뭐 해?"
"어.. 어, 어어..? 어? 어어, 현준아..."
"다들 빨리 집에 가라더니 정작 넌 한밤중까지 학교에서 뭐 하고 있었는데? 컨디션 안 좋아서 쉬다 가려고 남아 있었어? 그럴 거면 차라리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하지."

다정하게 손을 맞잡아오는 손길에, 걱정스레 이마를 짚어 보는 온기에, 아, 이게 정말 현실이구나 하고 뼈아프게 각성하고 만다.

"....응. 좀 피곤해서 깜빡 졸았었나 봐. 걱정하게 해서 미안."
"집에 가자."
"응, 가야지."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휘청이는 수겸을 받아안은 현준이 잠시 수겸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팔을 뻗어 가방째 수겸을 덥석 안아들었다.

"가자."
"힘이 남아 도냐. 이거 낮에 경기 설렁설렁 뛰었구만."
"너 지금 낯빛이 귀신 저리가라야."
"달빛 받아서 그런 거지."

수겸은 괜히 투덜대면서도 현준의 어깨에 떨구듯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보니 오늘도 어김없이 드라이어를 손에 든 현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와. 머리 말리게."

어릴 적부터 손에 감기는 감촉이 부드러워서 기분 좋다며 제 머리 만지는 걸 좋아하더니만 어느 순간부터는 드라이 담당이 되어 버린 현준의 부름에 수겸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너 솔직히 말해. 개나 고양이 키우는 느낌으로 나 만나는 거지?"
"네가 개나 고양이처럼 예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의식 과잉이다. 멧돼지나 버팔로, 반달곰, 뉴트리아, 이런 거면 모를까."
"자기 입으로 나 예뻐서 데리고 산댔으면서 또 그런다."

됐고, 이리 와.

코웃음을 치며 수겸을 당겨 거울 앞에 세운 현준이 드라이어를 켜서 수겸의 젖은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엉킨 머리를 빗기 위해 손가락이 머리칼 새로 들어와 부드럽게 쓸어내릴 때마다 수겸의 어깨가 작게 움츠러든다.
머리를 말릴 때마다 보여주는 버릇같은 행동에 현준이 피식 웃었다.

"그 간지럼은 언제쯤 안 탈래? 슬슬 익숙해질 때 됐잖아."
"그렇게 만지는데 어떻게 익숙해져."
"내가 어떻게 만지는데."
"닿을락 말락, 느릿하게 천천히."
"예뻐서 그래. 오래 만지고 싶어서. 넌 네 머리칼 쭉 싫어했지만 난 좋아하거든."

확실히 곱상한 외모가 예전부터 컴플렉스였다.
그래서 더 앞뒤 안 재고 날뛰는 성격을 갖게 됐는지도 모른다.
결이 가늘고 색소가 옅은 밝은 갈색빛 머리카락도 수겸이 본인의 외형적 특징 중 지극히 싫어하는 것의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다행이다.

"...이젠 좋아졌어, 나도."

덕분에 안 들키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으니.

"왜. 애초에 옅은 머리색 덕에 최근 새치 확 늘어난 거 티 안 나서?"
".....알았어??"

태연한 대꾸에 거울 속 수겸의 눈이 확 커지는 걸 본 현준이 머리칼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넣더니 뒤로 쓸어넘겨 귀 언저리의 안쪽 머리칼을 드러내 보였다.

"얼마나 머리를 썼으면 이 부근이 난리더라. 그렇다고 남들이 눈치챌 정도는 아니니 신경쓰지 말고. 너 농구부 일만으로도 이미 감당 못 할 지경인데 이것까지 신경썼다간 조만간 진짜 염색이라고 의심받을지도 몰라."
"넌 어떻게 알았는데."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있으면 안 되지."

다 됐다.

잘 마른 머리칼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듯 빗어 주는 손길을 따라 수겸이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젖히며 손을 뻗어 현준의 뒷목을 감싸쥐어 당겼다.
부드럽고 느릿하게 이어진 키스의 끝은 침대 속이었다.
그동안 참아뒀던 잠을 불러오듯 머리며 등을 쓰다듬는 현준의 손이 수겸의 손에 잡혀 움직임을 멈추었다.
현준의 가슴 언저리에 이마를 대고 얼굴을 감추고 있던 수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 왔다.

"...내 말 좀 들어 줄래."
"얼마든지."

후우우-.

다시 한 번 뱉어진 긴 한숨은 지금까지 들었던 것보다 아주 조금은 가벼워져 있었다.




수겸이가 눈 딱 감고 상양을 과거에 묻은 채 대학에서 스스로를 위한 농구를 이어가건
결국 상양을 버리지 못한 채 양다리 생활을 시작하건
뭘 택해도 마음의 짐은 청산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짐을 덜어 줄 사람 하나는 건졌으니 좀 덜 힘들겠지

#슬램덩크
현준수겸 하나후지
2023.05.26 06:20
ㅇㅇ
모바일
수겸아ㅠㅠㅠㅠㅠ
[Code: b509]
2023.05.26 11:32
ㅇㅇ
모바일
아 상양 개놈들아 왜 농구부를 없애 누구 맘대로
[Code: 908c]
2023.05.27 16:18
ㅇㅇ
모바일
수겸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이고 하 내 아픈손가락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d3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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