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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5 15:16
ㅡ 말해 뭐해.

앞에서 신이 나서는 방금 전 다른 학교 여학생이 제게 주려다 말고 바닥에 내던지고 간 핑크색 봉투를 주워들어 대신 열어 보는 친구인지 웬수인지 모를 자를 만났을 때, 얼굴에 깜빡 속아 실체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짧은 안목을 탓한 정환이 수겸의 손에서 봉투를 빼앗아 들고 쫙쫙 찢었다.

ㅡ 안 읽어? 예쁘던데.
ㅡ 산통 다 깨 놓은 자식의 입에서 나올 말이냐 그게.

딱 좋은 타이밍에 자기야! 하고 부르며 뛰어와선 정환의 팔에 매달리는 수겸의 모습에서 1차 충격을 받은 여학생은,

ㅡ 자기 딱 걸렸다. 올해만 다섯 명 째지? 왜, 이제 난 지겹니? 언제는 예뻐서 좋다더니.
ㅡ 아니, 내가 언제...?
ㅡ 아니면 왜, 자 보니 안 맞아? 잘 땐 넋 놓고 있었잖아.

이 정도쯤에서 뒤돌아서 도망쳤던 것 같다.
그리고 입만 뻐끔대던 정환의 등을 툭툭 치던 수겸은 태연히 목 언저리를 주무르며 피식 웃었다.

ㅡ 너 어제 버스에서 나한테 기대서 실컷 자 놓곤 일어나서는 뭐 어째? 영 어깨 높이가 안 맞아서 목이 결리셔요? 나도 오는 내내 어깨 무거워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럴 거면 앞으론 창문에 머리박고 자라.
ㅡ 넌 좀.. 국어를 쓸 때 주어랑 수식어랑 어순을 제대로 써라...
ㅡ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좀.
ㅡ 하아... 내가 왜 네 자기가 되는데....
ㅡ 네가 내 새끼가 될 순 없잖냐.
ㅡ 네 자기는 어디다 갖다 팔아먹고!!

정환의 외침에 수겸이 길 건너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한 박자 늦게 도착한 현준이 건널목 앞에 서 있었다.
손에 든 두꺼운 단어장으로 시야를 차단한 채, 귀엔 언젠가부터 애용하기 시작한 노이즈캔슬링 헤드폰까지 뒤집어쓴 꼴이 온몸으로 '지금의 사태에 대하여 난 아무 잘못이 없다'고 변명하는 중이다.

ㅡ 쟨 오늘은 또 뭐 듣는대.
ㅡ 몰라. 가서 직접 들어 보던가.

정말 모른다는 수겸의 표정에 정환이 씩씩대며 다가가선 건널목 중간쯤에서 현준의 헤드폰을 확 잡아채 벗겼다.

ㅡ 넌 좀 애가 뭔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는지 눈으로 보건 귀로 듣건 손으로 잡건 하나는 하라고! 저렇게 방목하지 말고!
ㅡ 나도 그걸 못 하니 그냥 외면하려고 발버둥치는 거 안 보이냐.

헤드폰 너머로 희미한 목탁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오늘은 뭔 불경이라도 듣고 있던 모양이다.
지지난 번엔 마음이 고요해지는 ASMR, 지난 번엔 명상음악 모음집이더니, 이젠 하다못해 종교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은 건가.
얘도 김수겸 덕에 여러 모로 마음의 치유가 필요한 환자인 모양이라 정환은 헤드폰을 현준에게 돌려주곤 길을 건너와 수겸의 앞에 서서 수겸의 손에 현준의 옷자락을 쥐어 주었다.

ㅡ 야, 네 여보 여기 대령했으니 이젠 나 좀 그만 괴롭혀.
ㅡ 쟤는 반응이 없어서 재미없어. 요즘 뭘 하는지 평정심이 아주 부처님이셔요. 거기다 쟨 진짜 내 여보 맞는데 그 소리 듣는다고 너같이 타격받고 펄쩍 뛸 일도 없고.

이 맑은 눈의 광인을 누가 말리리.
저 예쁜 눈을 곱게 치켜뜨고 자신을 빤히 보는 수겸에겐 차마 화풀이를 더이상 하지 못한 정환은 연대책임이란 기분으로 앞서 가던 현준의 등짝을 주먹으로 퍽 내리쳤다.

ㅡ 억! 아, 뭐야?
ㅡ 쟬 쳤다간 후환이 두려우니, 너라도, 대신, 맞으라고!!

세상과 철저히 차단된 자기만의 세계에 홀로 평온히 있었다는 사실로 갑자기 매를 벌게 된 현준은 영문도 모른 채 몇 대를 더 얻어맞고서야 겨우 정환에게서 풀려났다.




그리고 그 망한 연애를 끝내 준 시작은.

ㅡ 여보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호칭으로 사람의 복장을 터뜨려 가며 진짜 배우자라도 되는 양 친근하게 등에 매달려오는 수겸을 빤히 보던 준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환을 바라보았다.

ㅡ 선배, 결혼하셨구나아.

아, 또냐.
그나마 좀 좋은 분위기로 썸이 진행되나 싶었는데 저자식은 남 잘 되는 꼴을 왜 못 보지.
아니, 그냥 매번 해남에 지다 보니 그 분이 쌓이고 쌓여서 내가 잘 되는 꼴이 보기 싫은 건가.
자긴 연애를 지겹게 하다 못해 결혼까지 했으니 거기에서만은 죽어도 이기겠다는 거야 뭐야.

이해할 수 없는 미친자의 행동을 잘못 건드렸다간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으니 일단은 수겸을 보내고 변명을 하건 대처를 하건 해야겠다 생각한 정환이 분명 시야 내의 어딘가에 있을 현준을 찾아내려는데, 준섭이 생긋 웃으며 정환의 어깨를 감싸안고 있는 수겸의 손등 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ㅡ 골대 밑에 수비진 있으면 3점슛 안 들어가나요. 뒤로 물러서서 들어갈 때까지 넣는 거지.
ㅡ 준섭아..?
ㅡ 저 그거 잘 해요. 끈기있게, 꾸준하게, 포기 안 하고 마지막까지 점수 내서 역전승하기.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표정인 준섭의 눈이 누군가와 닮아 있다.
그래, 지금 등 뒤에 매달려 있는, 익히 잘 아는 인간과.

광인의 적수는 역시 광인밖에 없는 것인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정환은 준섭을 먼저 보낸 뒤 아직도 등에 매달려 있는 수겸의 손을 강제로 뜯어냈다.

ㅡ 네 남편한테나 업어달래. 나한테 매달리지 말고.
ㅡ 걔는 내가 어디 올라가 서기 전엔 손이 안 닿아.
ㅡ 허리 굽혀 달래라. 설마 안 해 주겠니.
ㅡ 손엔 책 들었지, 귀엔 헤드폰 썼지, 자기 공부 한다고 봐주지도 않고 대꾸도 안 해 주는 거 무슨 재미로 업혀 가냐.

제 남편 알기를 뭣같이 아는 수겸의 푸념에 정환은 드디어 저 멀리에서 수겸의 몫까지 두 개의 더플백을 멘 채 터덜터덜 다가오는 현준을 처량하다는 듯 쳐다보고, 듣지도 못할 질문을 던졌다.

ㅡ 넌 쟤랑 왜 사니?
ㅡ ...뭐? 나한테 한 말이야? 뭐가 들려야지.

오늘도 역시 헤드폰에선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하는 불경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났을까.

학교 근처 카페에서 주문한 커피 두 잔을 기다리던 수겸을 향해 어느 정도 안면을 익힌 아르바이트생이 말을 걸었다.

ㅡ 같이 오시던 분이 요즘 잘 안 보이시던데. 싸우셨어요?
ㅡ 네? 아닌데요. 그냥 좀 바빠서요.
ㅡ 흐음.... 네에...

석연치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밀어진 커피 두 잔을 받아들고 나와서 한 잔을 도서관에 처박힌 현준에게 배달한 뒤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른 집 근처 마트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ㅡ 부부싸움 했어요? 그 키 큰 학생이 학생 남편 맞지?
ㅡ 아뇨. 시험 기간이라 남아서 공부해요.
ㅡ 그래....

이런 일이 쭉 반복되던 중 집 근처 편의점에서 결정적 제보가 들어왔다.

ㅡ 저기, 두 분 이혼하셨어요?
ㅡ 네? 아닌데요.
ㅡ 어머 그럼... 이게 무슨 일이래...

야식을 사러 나갈 때 자주 마주치는 야간조 아르바이트생이 카운터를 토독토독 치다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ㅡ 남편분 바람피우시나 보던데.
ㅡ 네? 그게 무슨..

아르바이트생은 말없이 노트북을 조작하더니 화면을 돌렸다.
약 두 시간 정도 전의 시간이 적힌 폐쇄회로 녹화 장면.
카운터 앞에 선 현준이 캔커피를 한 개 올려놓고 동전을 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엔.

ㅡ 신준섭?

폐쇄회로라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바짝 붙은 태도 하며 다정하게 속삭이는 모습이 확실히 양다리 아니면 바람 현장으로 오해할 만 하다.
잠시 그러다 준섭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서야 현준이 인기척을 느낀 듯 헤드폰을 벗고 뭐라 대꾸하더니 준섭이 내민 주스를 카운터 위에 올린 커피 옆에 두곤 동전 대신 지폐를 꺼내 내민 다음 거스름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는 주스를 집어 준섭에게 건넸다.
별 생각 없이 제 것도 사 달란 말에 자기가 형이랍시고 대신 내 준 모양이다.

그렇게 되짚어 가며 목격자 아닌 목격자들에게 들은 정황은 다 비슷했다.
여보나 자기야 등의 다정한 호칭으로 부르며 뒤에서 다가온 준섭이 현준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서서 오늘 저녁 메뉴 뭐예요? 오늘도 늦게 들어갈 거죠? 형 남편은 형이 이러는 거 알아요? 등의 오해의 소지가 다분할 말을 조곤조곤 건네다 옷자락을 당기건 어깨를 건드리건 해서 그제서야 준섭의 존재를 알아차린 현준이 대꾸를 하는 방식인데, 그 대화가 또 묘하게 앞뒤가 맞아들어갔다.

남편 단속 좀 잘 해라, 아직 어린데 왜 그러고 사냐 등 불쌍하다는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집에 돌아온 수겸은 최근들어 동네에서 자길 보는 사람들 시선이 이상하게 싸늘해졌다며, 어젠 집에 들어오다 과일 좀 사러 들른 가게에서 그딴 식으로 살지 말란 소리까지 들었는데 대체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겠단 소릴 하며 사과를 깎아 제 입에 넣어 주던 현준의 모습을 떠올렸다.

ㅡ 남편 이미지 더 엉망 되기 전에 적당히 할까.

이 정도로 받아칠 애면 앞으로도 이정환 단속은 잘 하고 살겠네, 하고 피식피식 웃은 수겸은 왠지 외동딸 시집보내는 아버지 맘이 이런 거구나 하곤 현준을 데리러 가기 위해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오늘도 밤길에 혼자 오게 내버려 뒀다간 오해 단단히 산 동네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 등짝을 맞건 따귀를 맞건 할 분위기던데, 거기까진 두고 못 봐 주지.

ㅡ 아 참, 나가기 전에...

후다닥 도로 집 안으로 돌아들어온 수겸은 책상 위에서 이어폰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 다시 신발을 신었다.
앞으론 눈 한 쪽, 귀 한 쪽씩은 열고, 손 하나는 제가 꼭 잡고 다닐 수 있게 비워놓으라 해야겠다 혼자 생각하면서.



#슬램덩크 마키진 정환준섭 하나후지 현준수겸
2023.05.15 15:24
ㅇㅇ
모바일
아 너무 재밌어ㅠㅠㅠㅠㅠ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광인엔 광인으로
[Code: 437e]
2023.05.15 16:08
ㅇㅇ
아 맑눈광 끼리의 대결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너무 재밌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와중에 준섭이 수겸이한테 정환이 애인으로 합격 받았냐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c4a5]
2023.05.15 20:37
ㅇㅇ
모바일
아 불경 듣는 현준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맑눈광 미인들 호락호락하지 않네
[Code: 3c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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