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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5 10:45
곱게 졸업하진 못했을거야...




"뭐야."

분명 출석번호순으로 호명해 나누어 주던 졸업장이 자신만 건너뛰어간 상황에 수겸은 멍청하니 주위만 둘러보았다.
결국 마지막까지도 수겸의 졸업장은 없었다.

"저, 선생님. 전..."

수겸이 손을 들고 질문하자, 교단 앞에 서 있던 담임이 난처하게 웃었다.

"네 건 이사장실로 직접 와서 받아가라신다. 어딘지 알지?"
"알기야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이사장실까지 불려가야 할 이슈가 뭐가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어 더 불안하다.
복도 유리창을 거울 삼아 교복 타이를 바로 맨 뒤 들어간 이사장실엔 이사장님 외에도 이사단들이며 교장, 교감, 고문 선생님들까지 죄 모여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수겸 군, 아니, 김수겸 감독."

불안하다.

"정식 경기에서 마지막까지 해남에게 못 이겨 봤지."

징계위원회라도 여시려나?
졸업식 날인데, 떠나는 졸업생 붙잡고?
그래, 내가 잘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쥐잡듯 잡을 일인가.
억울한데 할 말은 또 입이 열 개라도 없어 입만 꾹 다물고 서 있는데, 이어지는 말의 방향이 예상과 달랐다.

"아쉽겠어. 한 번은 이기고 떠나야 앙금이 안 남지 않을까?"
"아쉽긴 합니다만, 이젠 더이상 기회가..."
"그래서 어떻게, 설욕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 볼 생각은 있나?"

순간 덥석 물 뻔 했다가 재빨리 정신을 차린 수겸이 최대한 정중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제의를 또 하시려고요. 분명 지난 회의 때 새 감독 선임 안건 충분히 설명드렸는데요. 인수인계도 아직 시작조차 못 했고, 새로 누가 오는지도 모르는 것부터 해결 좀 해 주십시오."

급한 불이 뭔지도 모르는 영감들 때문에 왜 내 속이 타들어가야 되는지 참.
제발 좀 벗어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던 수겸의 눈앞에 파일 한 권이 내밀어졌다.

"생활, 기록부요?"

아니 저 영감님네들 여기 모여서 남의 생활기록부 돌려보고 있었던 거였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에 사생활 침해 아니야?
맨 앞장에 1학년 때의 제 사진이 떡하니 붙은 서류를 팔락팔락 넘기는 수겸에게 이사장이 말을 건넸다.

"감독 김수겸의 성적은 괜찮았지만, 자네도 지금 보다시피 학생 김수겸의 평가는 좀..."
"...매우 안 좋았죠."

체육 외의 과목엔 전혀 흥미가 없음.
학업 부진의 기미가 있으나 보충수업마저 참가하지 않음.
수업 태도가 불량하고 수업 중 다른 생각을 자주 함.
지각 및 수업 불참율이 매우 높아 유급의 가능성이 농후함.
무단결석 뒤 사유서를 사후 제출하는 빈도가 매우 높음.
교사의 지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변화할 생각이 없음.

3년간 자신을 담당했던 담임들의 피눈물이 담긴 호소문을 보니 가슴이 뜨끔하다.
3년 동안 주구장창 써서 냈던 반성문과 사유서, 학부모 면담 기록들만 대체 몇십 장은 넘는지 아예 그것들만 따로 빼서 다른 서류철에 묶여 있었다.

그나마 농구는 잘 해서 팀 성적은 잘 냈고, 감독 일도 무리 없이 수행했으니 내버려 두신 거지, 저거마저 못했거든 정말 딱 문제아로 찍혀서 강제전학을 당했건 정학처분을 당했건 뭐라도 징계를 받았을 학생답지 않은 생활이었다.

살짜기 죄책감이 느껴질 즈음.

"그 뭐냐, 나머지 공부 한다는 생각으로 일 년 유급해 볼 생각 있나?"
"네???"
"일 년 동안은 수업 좀 착실히 들으며 기초학력 정도는 좀 쌓고, 겸사겸사 저번에 고사했던 건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란 거지."

아니 저인간들이 지금 사람 발목을 가지가지로 잡아대네.
그런데 내가 보기에도 성적이며 출결율이 유급 감이긴 하다.

정말 귀신같이 딱 유급이나 낙제 직전의 보더라인에 매년 간신히 맞춘 학업성취도평가 하며 출결일수의 숫자는 죄다 위험을 나타내는 빨간색 일색이다.

"저 이미 대학 결정된 거 아시지 않습니까."
"거 대학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학교는 도망 안 가네."
"이사장님, 선생님, 제발 좀..."

저 좀 살려주세요. 놔달라고요.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아.

결국 거의 감금된 상태로 남은 인수인계를 위해 최소 앞으로 일 년은 학교에 찾아와 인수인계회의에 참석하겠다는 각서에 지장을 찍고 사인하고 나서야 받아낸 졸업장을 들고 수겸은 간신히 이사장실에서 도망쳐나왔다.

"이게 무슨 난리래.."

진이 다 빠져 사진이고 뭐고 그냥 집에 가 잠이나 자고 싶었다.
고작 이 종이 한 장이 뭐라고 이렇게 무거운지 알 수가 없다.

그 난리통을 겪고 돌아와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수겸을 깨운 건 요란한 전화벨 소리였다.

"어어, 이정환."
- 꽃다발 주러 갔더니 너희 부원들이 죄다 너 실종됐다고 찾고 있더라. 어떻게 된 거야?
"이사장실에 감금돼서 졸업장 담보로 잡힌 채 협박당했지. 월급 챙겨준다 회유해도 안 먹히니까 이번엔 뭐라시는지 아냐? 저 성적표 들고 어디 나가 사회생활 할 자신 있냐면서 그냥 유급해서 3학년 한 번 더 다니라시더라."
- 푸하핫!! 그래서 기념사진도 안 찍고 도망쳐 나온 거냐?
"더 있다간 덜미잡힐 핑계 또 만들어내서 잡아들이실 것 같길래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바로 와 버렸지."

늘어져라 하품을 하는 수겸의 귀에 낄낄대는 정환의 웃음소리가 파고든다.

- 그래, 네 성적이 좀 어디다 내놔도 부끄럽긴 하지. 성현준이는 대체 너같은 애랑 지금까지 어떻게 같이 다녔는지 알 수가 없다.
"걔도 은근 오지랖에 철면피야. 덕분에 도움 많이 받는다."
- 아침에 등교시켜, 저녁에 하교시켜, 주말에 연습 도와줘, 때 되면 끼니 챙겨, 저 정도면 너 그냥 쟤랑 결혼해 살아라.
"그럴까 생각한 게 벌써 십 년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어릴 때야 농담으로 너 나한테 시집와라 했었지만, 최근 몇 년은 진짜 나 얘 없으면 남은 생을 인간같이 살 수는 있을까 진지하게 걱정하는 중이었다.

- 와.. 저거 자기 하나 살자고 멀쩡한 사람 인생 망치려고 하는 거 봐라. 걔가 뭐가 빠진다고 너같은 하자투성이를 좋아라 떠맡냐. 만약 진짜 네가 성현준 낚아채 간다면 내가 도시락 싸들고 말리러 다니건 내가 먼저 공개프로포즈를 하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는다.
"하... 저것도 친구라고."
- 그냥 이참에 큰맘먹고 학교에서 원하는 대로 시원하게 유급하지 그래? 성현준 좀 놔 줘라 이젠. 걔도 대학 생활은 맘편하게 하자.

남은 정말로 지옥문을 열고 들어갔다 온 기분인데, 내내 깐족대며 비웃는 걸 듣고 있으니 종일 참았던 화가 확 치민다.

"안되겠다. 넌 말로는 안 되고 늘 한 대 맞아야 정신차렸지. 공 들고 나와!!"
- 나가라면 못 나갈 것 같냐? 그래, 나간다!!

전화를 끊고 나간 코트엔 이미 어둠이 내려 있었지만,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면 그 동안 몸에 익힌 감각들로 어느 정도 플레이는 할 수 있었다.
이젠 정말 앞도 보이지 않겠다 싶도록 사위가 저문 한밤중.
수겸이 드리블하던 공이 정환의 손톱에 걸려 어둠 속으로 데구르르 굴러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도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뛰었는지 땀 범벅인 몸에서 뜨끈한 열기가 올라온다.

"다리 풀렸다. 좀 앉았다 가자."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 들르지. 탈수 왔나 바닥이 빙빙 돈다."

적당이란 걸 모르는 둘이 만나면 항상 끝은 이랬다.
숨을 고르며 등을 대고 앉아 있는 정환과 수겸의 눈에 불빛 하나가 흔들리며 다가오는 것이 들어왔다.

"열두 시가 넘었는데 집에 안 들어오고 여기서 뭐 했냐 또. 너희들 덕분에 내 전화기에 오늘도 불 나는 줄 알았어. 둘이 합쳐 거의 오륙십 통을 받느라 도통 공부가 돼야지. 자."

정환이 건네받은 포카리 페트병을 따서 숨도 안 쉬고 들이키는 사이, 현준이 한숨을 쉬며 차갑게 얼려 온 수건을 수겸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얜 그렇다 치고 이정환 너 찾는데 왜 너희 어머니에게서 나한테 연락이 수십 통 오는데?"
"나가기 전 김수겸이랑 전화하는 거 들으셨나보지."
"그러니까 내 번호를 왜 알려 드리냐고... 너희 어머니 심지어 내 이름도 모르시던데? 박형중이 누구야 대체. 누구 마음대로 남의 이름에 성까지 싹 바꿔 놓냐 넌."
"어머니 전화기에 네 번호 이름으로 저장해 놓으면 못 찾으실 거라 다른 걸로 저장했다. '김수겸 탐지견'."
"이게 이젠 하다하다 못해 사람을 개로 탈바꿈을 시키네. 그러다 조만간 현준이한테 물린다."

정환의 손에서 포카리를 빼앗아 든 수겸이 남은 것을 탈탈 털어 마신 뒤 쓰레기통을 향해 빈 페트병을 던지는 동안, 휴대폰 라이트를 켜고 어둠 속으로 굴러간 공을 찾아온 현준이 정환과 수겸의 등을 떠밀었다.

"가라 좀. 둘 다 알아서들 시간 되면 집에 들어가. 매번 내가 온 동네 찾아다니게 하지 말고. 지겹다.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아, 안 그래도 아까 그 얘기 나왔다. 너 그냥 이참에 나랑 결혼할래?"
"그 좋은 머리로 손익계산 잘 해 봐라. 평생노예권을 획득하느냐, 이 개미지옥에서 탈출하느냐. 김수겸보단 내가 낫지."
"아, 둘 다 저리 가버려. 다 싫어, 다."

정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손을 홰홰 젓는 현준의 짜증섞인 반응에 정환과 수겸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며 어두운 길을 나란히 걸어갔다.



#슬램덩크
2023.05.15 11:11
ㅇㅇ
상양 이사장 및 기타등등 죽이러 갈 파티원 모집 (1/n)
[Code: 9b19]
2023.05.15 11:13
ㅇㅇ
진짜 수겸이한테 세상이 너무한 거 아니냐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도 수겸이한테 정환이라는 좋은 친구와 현준이라는 좋은 남편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수겸이 이제 대학 가서 행복농구길만 걸어라!!!!!
[Code: 9b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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