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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10:58
ㅅㅅㅊㅈㅇ ㄴㅈㅈㅇ ㅋㅂㅈㅇ




숨이 버겁다.
이명이 인다.
혀 위를 구르는 미적지근한 이온음료가 마치 땡볕에 달구어진 모래알처럼 꺼끌대며 목으로 넘어간다.
목 안쪽이 따끔대는 기분나쁜 감각에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순간 들려온 심드렁한 목소리.

"후반전도 교체 없이 이대로 간다."
"아.. 하, 하지만!"
"뭐, 김수겸 빼자고? 너희들도 눈이 있으면 봤을 텐데. 전반전 동안 쟤 혼자 몇 점을 넣었는지. 상대는 풍전이다.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아니, 다섯 손가락에도 충분히 들 팀이라고. 그런 팀 상대로 간신히 이기고 있는 이런 순간에..."

무어라 말을 더 하려던 코치는 이내 남은 말을 꿀꺽 삼키고는 텅 빈 벤치 쪽, 원래대로였다면 감독이 앉아 있었을 자리를 한 번 흘끔 쳐다본 뒤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대로 해라.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어디 한 번 너희들 좋을 대로 해 봐. 김수겸, 후반전 빠질 테냐?"

느닷없이 넘겨진 폭탄에 수겸은 순간 숨을 멈추고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채 코트를 밟아보지조차 못한 선배들의 시선이 아프게 꽂힌다.
하지만...

"...뛸 수 있습니다."

못본척 눈을 질끈 감고 내뱉은 대답 끝으로 조롱에 가까운 휘파람 소리가 겹쳐온다.
전광판의 숫자가 빠르게 움직인다.
이제 곧, 후반전을 알리는 신호음이-.

"어이, 캡틴. 눈 뜨고 자냐?"
"어? 아, 아니 그게, 그냥 잠깐 좀... 죄송합니다."

순식간에 현실에 주저앉혀진 수겸이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가로젓자, 방금 전 핀잔을 준 3학년 선배가 작게 혀를 차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퇴부신청서. 오늘만 두 장째다.

"올 여름도 해남에 발목 잡혀 끝났으니 나도 슬슬 내 살 길은 찾아봐야지. 알다시피 레귤러들이야 작년부터 이미 스카우팅 확정 상태였고, 졸업과 동시에 아예 이걸로 농구랑 연 끊을 녀석들이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겠지만, 우리처럼 어중간한 사람들은 지금같은 때가 제일 골치아프거든."

어수선한 체육관 안을 확인하듯 돌아본 선배의 시선이 곧 수겸에게 돌아와 박힌다.

"보통 인터하이 직후에 스카웃 제의가 최고조로 폭발하는데. 응?"

그런데 왜 올해는 아무 연락도 없는 걸까?

서늘한 추궁에 수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
"네에, 네에, 아무렴 새 주장님께서 알아서 자~알 하고 계시겠죠. 한갓 부원 나부랭이가 뭘 알겠습니까. 이건 제 뇌물이니 받고 잘 좀 봐 주시지요."

선배가 떠넘기듯 던지고 간 차가운 캔커피의 물기가 식은땀처럼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신다.
아무 말 없이 커피 캔과 눈싸움만 하던 수겸이 곧 신경질적인 손길로 풀톱을 긁어 뜯어낸 캔커피를 단숨에 털어넣었다.
채 아물지 않은 관자놀이의 꿰맨 상처가 심장 박동에 맞춰 욱신대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곧 카페인 알러지에 의한 두드러기가 올라올 것을 상상하자 등골을 따라 소름이 끼치는 기분에, 수겸은 들고 있던 캔을 구겨쥐며 이마를 짚었다.





처음 이상함을 감지한 건 일 년 전 이맘때인 1학년 여름이었다.
해남에 근소차로 석패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3학년의 은퇴식을 포함한 농구부 내 조직 개편으로 모두들 어수선하던 시점.
주장 자리를 물려받기로 되어 있던 2학년 선배의 부름에 고개를 내민 부실엔 감독님과 코치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자, 그럼 다들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해 볼까. 우선은 윈터컵 참가 여부에 대한 의견부터 듣고 싶은데."
"윈터컵 자체는 매년 참가했으니... 3학년 중 잔류를 선택할 인원이 있는지 파악하는 게 더 먼저가 아닐까요."
"올해는 이미 거의 대부분 진로가 정해진 상태라, 남은 3학년은 그리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뿐입니다. 그러니 2학년 위주로 체제를 새로 구축한 뒤에..."

예상치 못했던 운영회의가, 그것도 꽤 심도 깊은 수준으로 진행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수겸이 당황해서 진땀을 흘리며 두 눈만 껌벅대기 시작한 걸 발견한 선배가 작게 코웃음을 치며 테이블 아래로 수겸의 발을 툭툭 찼다.

"익숙해져야 할 거야, '캡틴'."

당시에는 그냥 질투심 많은 선배의 유치한 견제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그 속을 알고 보니 사안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3학년은 거의 전원 은퇴에, 2학년도 레귤러는 조만간 모조리 타 학교로 스카우트 성 전학을 갈 예정이라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스카우트의 가능성이 충분함에도 1학년이란 이유로 내부 정보를 듣지 못해 아직도 진로가 불분명한 건 수겸 뿐이었고, 그런 이유로 위에서는 내심 자신들이 떠난 뒤를 책임져 줄 다음 번 주장 타겟으로 수겸을 노리고 있다는 것까지.

- 그게 다 어른들의 사정이란 거 아니겠어.

자신은 딱히 농구에 미련이 없어 상양에 남기로 했지만 넌 아닐 테니 얼른 거취를 정하는 게 좋을 거란 선배의 시니컬한 말에 수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제 손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좋을까, 나..."

불현듯 현준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부 상황에 대한 함구령이 내려졌으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지만, 만의 하나 현준에게 이 상황을 털어놓는다면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지.

-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귓가에서 웃음 섞인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해서, 가만히 두 손을 들어 소리를 잡으려는 듯 귀를 감싸 보았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힘내라고 등을 밀어 준다면,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손 안에서 점점 커진 귀울음이 전신을 무겁게 뒤덮어 간다.





상양의 체제 개편은 다른 학교들보다 반 년 정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윈터컵이 끝난 직후부터 3학년으로 진급하는 선배들은 진로 등의 이유로 전원 부활동에서 실질적으로 발을 빼 버렸고, 이제 갓 2학년 진급을 앞둔 부주장 수겸이 주장 대리로 팀을 이끌게 되며 자연스레 넘쳐나는 잡무를 떠안은 현준에게까지 부주장 대리란 감투가 돌아갔다.
몆 개월 전부터 코트를 찾는 빈도수가 눈에 띄게 줄어가던 감독은 인터하이 직전부터는 아예 얼굴조차 볼 수 없었고, 어느 사이엔가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코치도 드문드문 생존신고 수준으로 고개를 내밀기나 하면 다행인 일상들.
하지만 치졸하고 더럽더라도 농구부 존속을 위해서는 저 '어른'들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이번 한 번만 더 이름만이라도 빌려주십사 찾아가 고개숙이는 게 어느 순간 자연스러워지고 말았다.

- 난 발 뺄 테니, 알아서 잘들 해 봐라.

형식적인 완장은 시합 뒤에 물려주겠지만 책임은 지금부터 전부 네 것이라고, 인터하이 예선전 첫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선배의 말은 지금까지 들어 온 그 어떤 것보다도 차갑고 무거웠다.

"하.. 하핫!"

그래서, 웃었다.
웃기라도 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웃어 버렸다.





눈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점멸하는 느낌에 퍼뜩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사이엔가 현준의 얼굴이 코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적당히 하고 들어가자고. 열한 시 5분 전이야. 너 아까 전부터 내 말에 '알았어'만 열네 번째 반복하고 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벌써 그렇게 됐나? 미안, 몰랐어."

기다리는 동안 그 날의 복습에 내일 치 예습까지 마친 건지 늘어놓은 노트며 교과서를 책가방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는 현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겸은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의 서류 더미들을 한데 모아 쑤셔박은 더플백을 어깨에 대충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몰아닥친 현기증에 비틀대며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팔을 홱 나꿔채 품으로 당겨 안는 익숙한 손길.

투둑, 투둑, 투둑, 투욱, 투둑, 투욱, 툭, 툭, 툭, 툭.

편두통마냥 심장 뛰는 속도에 맞춰 욱신대던 관자놀이 부근의 통증이 이마 너머로 느껴지는 엇박자의 고동에 천천히 녹아들어간다.
폐가 터지기 직전까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 수겸은 곧 현준의 가슴팍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씨익 웃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다리에 쥐가 나서. 잡아 줘서 고맙다."
"괜찮겠어? 눈이 새빨간데."
"괜찮지 그럼. 짐 다 챙겼으면 가자."

부실 문을 잠그고 신발을 고쳐 신는 수겸의 뒤에서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준은 제게로 다가온 수겸을 향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내밀었다.

"가방 줘."
"이미 내 두 배는 들고 있으면서 뭘 또 달래. 됐다."
"이리 내. 들어다 줄 테니까."
"어허, 괜찮다니까 자꾸 그런다. 성현준 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들어나 가시지요."
"하아...."

영 마뜩찮은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수겸의 웃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현준은 결국 힘으로 빼앗듯이 수겸의 가방을 나꿔채 메고는 빈 손으로 수겸의 팔뚝을 잡아채 당겼다.

"자, 됐지? 가자."

여기까지 오면 더 이상 이길 방법이 없다.
수겸은 결국 질질 끌리듯 발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살짝 쳐들었다.
현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구름낀 밤하늘이 꼭 답답한 제 마음처럼 보여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응, 그래. 가자. 갈 테니 이거 놔."
"아니. 우리 집으로 갈 거다."
"...왜 또, 윽!"

불만을 제기하려는 순간 부축하듯 팔뚝을 잡고 있던 손아귀에 무자비하게 힘이 들어갔다.
반 걸음 늦게 걷고 있던 수겸을 제 옆으로 당겨 세운 현준이 여전히 앞만 본 채 걸으며 작게 혀를 찼다.

"카페인 알러지로 또 밤 샐 거 아니면 와서 약 먹고 자라고.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없던 알러지가 생겨서 이 고생이야."

본래 커피나 음료를 딱히 좋아하지 않아 거의 입에도 대지 않고 살았던 탓일까, 최근 몇 개월 동안 진하게 내린 커피를 마치 물처럼 마셔댄 결과가 저거였다.
말려도 듣지 않던 수겸이 결국 알러지 반응을 처음 보였을 때는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화가 난 현준에게 지겹도록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같은 일이 반복되자 이번에도 수겸에게 져 준 현준은 화를 내는 대신 수겸의 컨디션을 체크하며 약을 챙겨 주는 쪽을 택했고, 오늘도 같은 마음인 모양이다.

수겸은 입술을 꾹 깨물곤 말없이 현준을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슬램덩크 상양
약 현준수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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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11:08
ㅇㅇ
모바일
대작의 시작에서 찰칵!! 마음이 짠해지다가도 빛나는 상양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좋다 감사해 센세
[Code: 7c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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