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현준수겸 하나후지




항상 최선을 다했다 생각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좀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언젠가부터 주 2~3회씩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정신과 전문의에게마저 판에 박힌 말만 하고 있다.
괜찮아요. 저 괜찮습니다.
스스로에게 제일 들려주고 싶고, 들려줘야 할 말.

난 괜찮다.
아직 괜찮다.
다 괜찮다.

수면제, 신경안정제, 진통제에 위장약 등등.
별다를 것 없던 처방전을 들고 들어간 약국의 대기석에 앉아 있던 수겸의 등 뒤에서 문이 열리더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너 아파?"

마치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을 본 것만 같은 현준의 말에 수겸은 반사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 거 아니다."

안 그래도 자신의 표정을 읽는 것에 익숙한 현준이기에 더더욱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김수겸 님."

타이밍 좋게 이름이 불린 순간 후다닥 튀어나간 수겸은 약에 대한 설명을 하는 약사의 말을 가로막으며 봉투를 가방에 쑤셔넣었다.
혹시라도 저 의심 많은 친구가 약의 성분을 찾아보기라도 했다간 앞일이 골치아플 테니까.

"뭔데?"
"별 거 아니다."

쿨링파스와 테이핑 용품 등을 카운터에 내려놓는 현준의 물음에 수겸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잠시 표정을 찡그린 채 그런 수겸을 내려다보던 현준도 곧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었던 일이 있었던가.
현준과 나란히 걷는 걸 스트레스로 느꼈던 건 처음이다.
수겸은 아까부터 자기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길만 걷고 있었고, 현준의 시선은 그런 수겸의 옆모습에 꽂혀 있었다.

"...다 왔네."

어느새 도착한 집 앞.
탈출구처럼 보이는 대문을 부여쥔 수겸의 손등 위에 현준이 손을 포갰다.

"받아라."

건네받은 건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의 작은 약병이었다.
라벨조차 없는 약병에 수겸이 눈을 껌벅이자, 현준은 피곤한 미소를 띠었다.

"애들이 나한테 화내더라. 너 고생하는데 난 옆에서 뭐 하냐고. 그거 비타민이야. 밥도 제대로 잘 못 먹지? 사실 잘 먹고 잘 쉬는 게 최고인데."

짧게 숨을 토한 현준은 몸을 숙여 수겸을 최대한 가득 품 안에 그러안았다.

"....그거라도 먹자. 그리고 나한테 넘길 수 있는 일은 나 줘. 나 말고라도 다른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건 전부 나눠 주고."
"줄 수 있는 일이 어디 있냐."

여전히 딱딱하기만 한 대답에 현준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럼 짜증이라도 내라. 소리치고, 울고, 욕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해. 나한테는 할 수 있잖아. 내가 다 받아 줄게."

마치 모든 상황을 간파한 것만 같은 현준의 말에 수겸은 순간 숨을 삼켰다.

들키면 안 돼.
나만 아프면 되는 거.

"그런 거 없는데. 넘겨짚지 마라."

싱긋 웃은 수겸의 얼굴을 빤히 보던 현준도 결국 웃고야 말았다.
커다란 손이 수겸의 두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쥐었다.
곧 입술이 닿고..

언제나 나누던 가벼운 굿바이 키스가 아니라 조금 더 깊은 접촉에 당황한 수겸이 현준의 손목을 쥐었지만, 키스는 오히려 더 깊어져 갔다.
집 앞의, 누가 볼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놓고 저지르는 아찔한 스킨십에 머릿속 퓨즈가 나갈 즈음에야 겨우 수겸의 입술을 놓아 준 현준은 아쉽다는 것처럼 계속 작게 입을 맞췄다.

"잘 자라."
"으응..."

한숨 섞인 인사 뒤로도 한동안 자신을 놓아 주지 않던 현준의 손아귀를 뿌리치듯 떨쳐낸 수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서는 아까 전 처방받은 약을 입 안에 털어넣고 물도 없이 삼켜 버렸다.

그리고 사람이 들어갔음에도 불이 켜질 기색이라곤 전혀 없는 수겸의 방 창문이 보이는 곳 아래 한동안 현준이 붙박힌 듯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수겸은 알지 못했다.





있는 대로의 증상을 말하지 않는데 상태가 호전될 리 없다.
정확한 수치를 내지 못할 마음의 병일수록 더 심할 편차에, 속내를 드러내는 걸 거부하는 환자의 궁합은 그야말로 최악이나 마찬가지다.

"괜찮은데요. 좋습니다."

어디까지나 환자의 말에 집중해야 하는 의사마저 이대론 안 된다 포기선언을 내리고 말았다.

- 자꾸 거짓말만 하실 거면 저희도 도울 방법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털어놓던지 아니면 병원 측의 치료 거부를 받아들이란 말에 수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할 말이 없는데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진짜 괜찮은데, 왜들 저럴까.
그냥 좀 피곤하고, 좀 못 자고, 좀 예민한데, 그걸 혼자 삭일 뿐인걸.
그게 뭐 대수라고.

중얼거리며 바닥을 보고 길을 걷는데 익숙한 신발이 눈 안에 들어온다.

"어?"

하교하고도 몇 시간이 지났을 텐데 여전히 교복 차림에 가방을 멘 현준을 본 수겸이 어리둥절해 하고 서 있자, 길게 한숨을 쉰 현준이 수겸의 손목을 잡았다.

"들어가자."
"어, 어어?"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 불 꺼진 집을 제집처럼 자연스럽게 들어온 현준은 아직도 얼이 나간 수겸을 소파에 앉혀 두곤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삐익, 하는 소리 뒤로 곧 수겸이 좋아하는 향긋한 향을 풍기는 머그를 들고 온 현준은 수겸의 손에 컵을 쥐어 주곤 그 발치에 앉았다.

"왜 말 안 해."

올려다보며 묻는 자신의 말에 가볍게 숨을 삼킨 수겸을 확인한 현준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존심 상해? 아니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어? 너도 네 맘 이해 안 되고 그러냐? 왜 아픈지도 모르고? 그냥 다 모르겠어? 몰라서 그렇게 아프니?"

몰라.
두 글자짜리 정답에 말문이 막힌다.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이 상황이 뭔지. 내가 무엇에 치이고 무엇에 지쳤는지.
뭐가 필요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아니, 사실은 이게 아프고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평범한 일상인데, 아무 일도 아닌데, 왜 자꾸 몸이 고장나는지 답답하다.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던 현준이 가만히 손을 뻗어 수겸의 뺨을 감싸쥐었다.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또 어루만지고.
이미 산산이 금이 간 걸 간신히 이어붙여 둔 유리 세공품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피부 위로 아로새겨지고, 그 느낌이 뼛속까지, 심장까지 파고든 순간.

"나, 아파."

까스러진 목소리가 터졌다.

"왜 이러지? 아파. 힘들다. 못 견디겠어."
"그래."
"난 분명 숨을 쉬었는데... 폐엔 산소가 안 들어간 것처럼 답답하다."
"그렇구나."
"어쩌지? 이거 뭐야? 나 왜 아파? 나을 수 있어?"

이제서야 폭포수처럼 흐르는 질문들과 함께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농구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데..."

잠시 숨을 삼킨 수겸은, 이젠 너무 익숙해져 벗어나기조차 어려운 보여주기 식 미소를 띠었다.

"이대로라면 싫어질 것 같다. 농구가."

그냥 다 버리고 싶다는, 언젠가부터 머릿속에 침투한 이 생각이 의식을 지배하게 되는 순간 정말 미련없이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무섭다.

"수겸아."

한참 그 말을 듣고 있던 현준이 수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계속 아팠구나. 지금도 아프구나. 몰라서 미안했다.
사과하듯 무릎을 토닥이던 현준은 여전히 수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농구는 너 사랑할 거야."
"뭐, 어?"
"네가 싫어해도 농구는 너 사랑한다니까. 너 안 놔 줘. 네가 도망가면 농구가 알아서 따라온다고. 그러니까 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바닥에 앉아 있던 현준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일어나 수겸을 감싸안았다.
귓가에 두근대는 심장 고동 소리를 듣는 순간 어째서인지 살짝 고였던 눈물이 오열로 변해 간다.

"큭, 흐읍.."
"네가 아무리 못된 짓 해도 너희 부모님이 널 끝까지 사랑하시듯이 농구도 너랑 못 헤어질 테니까, 너는 너 하고 싶은 말 하고 너 가고 싶은 길 가면 된다. 끌려갈 필요 없어. 네가 이끌고 가는 거니까."

크게 흔들리는 수겸의 어깨를 안고 등을 토닥이던 현준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심호흡을 하고서는 수겸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대신에... 나쁜 선택은 안 된다. 너 따라가는 사람들 생각해서라도 그러진 마라."
".....너는."

눈물을 삼키며 던진 질문에 현준은 편안히 웃으며 대답했다.

"나 여기 있잖아. 조금 늦긴 했는데 혹시 그것 때문에 화 났어? 아니면 너 마음 정리 좀 하고 난 다음에 올 걸 그랬나? 나갈까? 나가서 조금 이따 다시 와?"

장난이라도 치는 듯 가벼운 말투로 대답하는 동안에도 현준의 손은 내내 수겸의 등을 쓸고 있었다.
고일 대로 고여 썩어들어가던 짐들을 털어내 주는 듯한 손길을 따라 눈물길이 깊게 패여 간다.





"간식 내기 걸고 연습게임 한 판 할까? 나랑 준섭이 나눠서 팀장 하고. 어디로 붙을래?"

말을 꺼내자마자 우르르 수겸의 쪽으로 모이는 부원들을 본 준섭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의사 표현을 했다.

"저기... 밸런스 패치부터가 엉망인데요..."
"나머지 주전들 다 너 가져라. 그리고 참고로 이긴 쪽이 쏘는 거니까 알아서 잘들 붙어야 할 거다."
"에에엑? 왜 이긴 쪽이??"
"이기고 돈 써야 기분 좋게 사지. 아무튼 그렇게 할 테니 지금이라도 바꿀 사람은 응원팀 바꿔!"

수겸의 호령에 금방 웅성대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부원들을 헤치고 다가온 현준이 수겸의 옆에 섰다.

"이쪽 팀 센터 자리는 아직 공석인가?"
"저리 가라니까 왜 또 여기 붙으려고."

벌레 털어내듯 어깨 부근을 탁탁 털며 질색하는 수겸의 손목을 잡은 현준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너 따라다닌댔잖아. 끝까지."

분명 평범한 말임에도 갑자기 고요해진 주위를 둘러본 수겸은 한동안 없던 편두통이 도지는 느낌에 머리를 두들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널티 추가. 우리 팀은 얘랑 나 두 명만 뛴다. 됐지?"

2대 5의 싸움이라지만 그 2가 교내 최고를 넘어서 현내에서 손꼽는 에이스여서야 이게 과연 밸런스 패치가 된 걸까.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승리냐, 지갑이냐.

고민에 잠긴 부원들을 향한 수겸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자, 우왕좌왕 할 시간 없으니 얼른 선택해라! 다섯, 넷, 셋, 둘, 하나. 끝!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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