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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30 03:12
ㄱㅇ에 나온 ‘염병, 이쁘면 이쁘다고 미리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사람 당황스럽게끔’ 차용. 슈슈는 아직 영어 잘 못하고 노어 하는 건 아무도 모른다는 설정.

 

시니어는 이미 보고 받은 적 있는 서류를 형식적으로 뒤적이며, 클라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암살 시도를 주도한 장본인, 작전은 실패했지만 스파이의 발 빠른 대처로 연합군은 간신히 그를 손에 넣었다. 보호를 빌미로 구금하듯 끌려온 그는 모순적이지만 조국을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와 기밀을 털어놓고 협조해야만 했다. 스스로 썩은 곳을 도려냈어야 하는데. 실패한 작전의 대가는 죽음이 아닌 삶의 비참함이었다. 결국 적국의 손을 빌려 무너뜨린 조국을 마주한 클라우스는 처분만을 기다렸다. 이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들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연합군은 무슨 생각인지 미국 망명을 지시했다. 이제 독일이 패전했으니 조국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당연하게도 묵살되었다.


대령은 우리와 한배를 탔습니다. 독일로 돌아간다면 잔존 세력들이 가만두지 않겠지요. 이번 승리에 대령의 기여가 있었던 만큼 우리도 그에 합당한 처우를 보장할 겁니다. 미국은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서라면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설령, 적국 출신이라도 말이죠.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조국에서 끝을 맺고 싶었으나 그들은 안정보장을 빌미로 평생 감시당하며 살 것을 명했다. 전쟁이 일상인 이승에서 죽음은 오히려 자비롭다. 내 죄가 깊으니 하늘도 평온함은 허락하지 않으실 테지. 함께 지내며 적응을 도와줄 고위급 간부가 며칠 뒤 도착할 거라는 통보를 끝으로 클라우스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문이 열리고 안내를 따라 방으로 들어선 클라우스는 익히 보아온 통역사와 장군 사이로 금발의 사내를 보았다. 저자인가. 시니어는 차를 마시며 들어오는 발소리에 넌지시 눈길을 주었다. 보초병 뒤로 가려졌던 인물이 드러나 오롯이 눈에 담긴 순간, 그는 잠시나마 당혹스러웠다. 젠장, 예쁘면 예쁘다고... 곁에서 일어나 맞이하는 기척을 뒤늦게 알아챈 시니어는 정신을 차리고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일어나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톰 카잔스키입니다.


잠시 후 같은 쪽 손이 올라왔다. 클라우스 슈타우펜베르크입니다. 세 개뿐인 손가락을 보고서야 시니어는 자신이 오른손을 내밀었음을 깨달았다. 멍청하긴! 그가 상이군인이며 오른손을 모두 잃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버린 그의 존재가 탓이라면 탓일까. 답지 않은 실수에 멋쩍게 손을 갈무리하자 곁에 있던 통역사가 말을 전했다. 손이 이래서 실례했습니다. 
 

장군이 자리에 앉기를 권하면서 분위기가 전환되고 간단한 소개와 망명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지만 시니어는 좀처럼 집중하기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이해했습니다. 어색한 영어로 짧게 답하는 목소리가 아쉬워 방금 전 이름을 소개하던 목소리는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모든 소리가 멈추었다. 시니어는 태연하게 설명은 이쯤하고 일어나자며 자리를 정리했고 장군과 인사를 나눈 뒤 잠시 전화를 빌려 저택에 연락했다. 집사에게 부탁할 사항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 알프레드 제발 좀 도와줘요.
 

통역사와 군인을 태운 경호차량은 의전차량을 은밀하게 둘러싸고 움직였다. 가장 안쪽, 보호를 받으며 움직이는 차안에는 시니어와 클라우스, 운전사, 경호원이 동승했다. 시니어의 최측근은 영어 외에 모두 러시아어에 능통했는데 오래전 그의 가문이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 함께 건너온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인 패트릑이 가문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책임지기 위해 남을 사람과 떠날 사람을 나누어 데리고 왔는데 절반이 넘는 이들이 함께 했다고 한다. 미국에 자리를 잡고 시니어가 가주자리를 물려받을 동안 식솔들 또한 점점 늘어나고 미국문화를 따르며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저택 안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단연 노어였기에 다들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다. 시니어는 차창 밖을 바라보는 클라우스를 가만히 살피다가 차가 저택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자 앞자리에 대고 노어로 조용히 말했다. 강가로 둘러 갑시다.

 
저택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저택 근처로 흐르는 강가를 따라 한 바퀴 돌아가자는 말이었다. 오랜 시간 곁에서 시니어를 모신 이들에게 그 길은 매우 익숙했다. 그들의 상사가 생각이 많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자주 가던 길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반문한 것은 그새 뭔가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겼는지 확인하는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아닙니다. 그저 시간이 조금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긴장할 필요 없다는 듯 살짝 미소 지으며 말을 마친 시니어는 슬그머니 다시 곁을 살폈으나 클라우스는 여전히 차창 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차량은 강가를 천천히 돌며 윤슬과 바람에 부서지는 물결, 초록과 붉은 나무들, 이름 모를 꽃들을 스쳐지나갔다. 이 길은 익숙하다고 무심히 지나버리기엔 아까울 만큼 풍경이 빼어난 곳이었다. 마음이 무거울 때 자주 오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지만 이유까지 말한 적은 없으니 모를 터였다. 시니어는 첫 만남에서 범한 실수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싶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길엔 달리 볼거리도 없거니와 집사에게 부탁한 것을 준비하려면 시간을 벌어야했으니 이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비록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저택으로 가는 길이 마음에 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저택으로 들어서자 따라붙었던 경호차량이 서서히 빠지고 한 대만 남아 뒤를 쫓았다. 넓은 정원을 지나 본채 앞에서 내린 시니어는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집사를 비롯한 저택사람들을 클라우스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모두 어딘가 잔뜩 들뜨고 기대에 찬 얼굴이어서 왠지 환영받고 있다는 기분을 주었다. 안내받은 방 또한 예상과 달리 햇볕이 잘 들고 환하여 그의 처지에 맞지 않게 과분하였다. 골방 하나 없는 대단한 집이라 개중 가장 허름한 방을 내어준 게 이 정도라 할지라도 질 좋은 가구와 정성들여 관리한 장식들을 보니 조금씩 의구심이 들었다. 낯선 방을 서성이다 안락의자에 앉았다가 왼쪽 팔걸이에 담요가 걸린 것을 시작으로 하나 둘 물건의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빗과 수건, 펜과 종이, 책 등 몇 가지 없는 살림들이 모두 왼편에 놓여 있었다. 옷장 안의 잠옷과 여분의 옷가지 또한 왼손으로 집기 편하게 정리돼 있었다. 자연스레 처음 악수를 청했던 시니어가 떠올랐다. 모욕을 주려던 게 아니었나?

 
똑똑-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말에 식당으로 향하는데 저택사람들의 분주함 속에서도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께서 시간 안에 맞추어야 한다고 하셔서 얼마나 서둘렀는지 몰라. 얼마나 귀하신 분이기에 그러시는 걸까. 평소에도 엄숙한 분위기는 아닌지 허물없이 조잘거리던 어린 일손들이 클라우스를 발견하자 급히 입단속을 했다. 작은 단서들이 모일수록 클라우스의 마음이 일렁였다.

 
시니어가 음식이 입에 맞기를 바란다고 말하자 통역사가 전달했다. 모든 음식은 신선하고 질이 좋았으며 한손으로 먹을 수 있도록 잘게 손질돼 있었다.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지만 클라우스는 마음이 무거워져 많이 먹을 수는 없었다. 조용히 식사가 끝나고 잠시 후 디저트로 독일식 자두파이, 쯔베치게쿠헨이 나왔다. 모양도 맛도 조금 달랐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고향 음식에 클라우스는 눈물을 꾹 누르고 파이를 모두 먹었다.

 
통역사는 떠나기 전 꼭 알아두거나 지켜야 사항이 있다면 전달하겠다고 했으나 시니어는 잠시 고민하다가 없다고 답했다. 통역사를 배웅하고 남겨진 둘의 눈이 마주치자 시니어는 산책이라도 하겠냐며, 혹시 알아듣지 못할까 봐 정원을 가리켰다. 클라우스는 가볍게 끄덕이며 시니어를 따라 걸었다. 정원은 멀리서 볼 때도 아름다웠지만 가까이 다가가야만 보이는 작은 꽃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걷기 좋게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 한참을 걷자 호수가 나왔다. 실로 호화로운 감옥이 아닐 수 없었다. 의자에 가서 앉는 시니어를 따라 클라우스도 자리를 잡고 따스한 햇볕 아래 눈을 감았다. 이런 곳이라면 갇혀 산다는 표현도 당치않을 테니 끝 모를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슈파우펜베르크 대령. 긴장한 음색으로 시니어가 클라우스를 불렀다. 그는 종이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약간 어눌하지만 독일어였기에 곧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대의 조국과는 다르겠지만 여기도 아름다운 곳이 많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곳에서 편안하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클라우스는 시니어의 담담한 고백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노어로 답했다.
카잔스키 제독. 이곳은 내 조국만큼이나 아름답고 편안합니다. 그래서 더 괴롭습니다.

 

 

아이스매브

시니어는 첫 만남에 반했는데 얼어서 실수했고, 앞으로 슈슈랑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었음.
슈슈는 앞으로 남은 삶이 지옥 같을 거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벌주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살려고 했음. 근데 막상 와보니까 시니어가 자길 진심으로 배려하고 생각해주는 게 느껴져서 되레 죄책감 느끼고 이렇게 잘 지내도 되는 건지 괴로워하다가 둘이 결국 사랑에 빠지는 걸 쓰고 싶었으나 능력부족으로 여기서 마무리ㅜㅜ
2022.11.30 03:35
ㅇㅇ
모바일
아..ㅠㅠ 고용인들한테 가구나 소품배치 해놓고 레시피알아보라고 했을거 생각하니 ㅠㅠ 지금처럼 스마트폰뚝딱도 아니고 다 어디서 분주하게 알아뵜을거아냐 온 저택이 슈슈를 환영해
[Code: e5d3]
2022.11.30 06:02
ㅇㅇ
모바일
하 진짜 좋다 시니어 마음도 너무 따스하고 슈슈 너무 안쓰럽고ㅜㅜㅜ 잘 살면 좋겠다 센세 어나더ㅜㅜㅜㅜㅜ
[Code: f63b]
2022.11.30 06:42
ㅇㅇ
모바일
ㅠㅠㅠㅠㅠ 넘 좋아 저택으로 가는 길을 비롯해서 자기가 준비한 것들이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시니어 마음이 넘 간질거린다 ㅠㅠㅠ둘이 이쁜 사랑해라..
[Code: a4cb]
2022.11.30 08:3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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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가 준비해둔 편안함이 슈슈의 죄악감을 자극하는게 존나 찌통이고 더듬더듬 독어로 잘 지내라고 말해주는 시니어랑 노어로 조국만큼 여기도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슈슈...ㅠㅠㅠㅠㅠㅠㅠ여기가 슈슈의 새로운 조국이 된다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
[Code: 80bd]
2022.12.01 01:30
ㅇㅇ
모바일
하아아ㅜㅜㅜㅜㅜㅜ센세의 풍경묘사가 나붕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것같아서 너무좋아요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Code: e667]
2022.12.01 13:22
ㅇㅇ
모바일
크으으으으으
[Code: c2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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