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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6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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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살아남은 건 아닐까. 하면 안 되지만 할 수밖에 없는 생각이 머리를 파고든다. 부모님은, 형들은, 누나는 그리고 할리나는... 폴란드는 결국 점령당한 상태다. 그런 판국에 가족들의 상황을 상상하자니 좋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결국 고통받고 있을까 아니야 어쩌면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온갖 부정적인 가정들로 상념에 빠져들때마다 불현듯 그의 목소리가 나를 깨운다.

당신은 그래도 살아있을지 모른다고 희망을 가질 수나 있지.

눈 앞에서 동료를 모두 잃고 혼자만 살아남은 기분은 어떨까. 살아있을지 모른다고 희망하기엔 너무나도 처참한 모습들을 두고, 그저 나 혼자 미안하다고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처지는 얼마나 비참하고 서글플까. 노먼은 전역 후 전장을 떠나왔음에도 항상 자신이 도망쳐왔다고 말했다. 마치 탈영한듯이 말하기에 전역한 것 아니었냐고 물으니,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탈영같은 전역이라고 말장난을 했다. 한 번은 그러다 술에 취해 자신도 함께 죽었어야 했다고 자책할때도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딴 소리 하지말라고 고함을 질러버렸다. 그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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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와 함께 있을때면 자연스럽게 옛날 얘기를 꺼내게 되었다. 입대 전 평범한 학창시절과 군에 처음 배정받아 방아쇠도 제대로 못 당기던, 지나칠 정도로 풋내기 애송이와 그 애송이를 떠맡게 된 고참군인들이 개고생했던 그따위 이야기들(그래도 억지로 방아쇠 당기게 한 건 너무했네). 어디도 옛날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주로 가족들과 행복했던 시간들, 드디어 파리에 자리잡아 엔지니어 일에다 틈틈이 작곡도 했다던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다보면 순간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히죽 웃어 심장이 간지럼을 타는 듯 했다.

하지만 으레 작금의 전황에 대해서도 얘기가 나오며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내가 있을땐 연합군이 밀리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떠나온 지금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어렵다. 가끔 들리는 라디오 방송으로 보아 다행히 연합군이 우세한 것 같았으나 폴란드에 대한 얘기가 자세히 나오진 않았다.
그때도 때마침 나오는 라디오방송에 집중하던 어디의 표정은 방송이 끝나자 금방이라도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것처럼 음울해졌다. 그리고는 얼굴을 파묻고 나도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고 읊조리길래 순간 욱해서 당신은 그래도 살아있을지 모른다고, 희망을 품을수나 있지 않냐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난 눈앞에서 모두 뒈져버렸는데 당신은 최소한 그렇지는 않잖냐고, 그렇게 죽고싶으면 같이 가줄테니까 둘다 확 죽어버리자고 막말을 했더랬지. 그랬더니 놀라서는 안그래도 슬픈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서 마음이 아파 나가버렸다.
줄담배를 피우고 돌아오니 집에 불은 꺼져있고, 어디의 방에 가보니 책상에 엎드려있는데 그 옆엔 술병에다 웬 하얀 약까지 보여 대번 그를 붙잡아선 흔들고 따귀를 쳤다. 그랬더니 다행히 깨어나선 이게 무슨 짓이냐고 성을 내는데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내가 그렇게 나간 후 마음은 심란하고, 일을 하려해도 의욕도 안 들어 잠이라도 자려고 했댄다. 그런데 잠이 안 와 술에다 수면제라도 타서 먹으려고 했더니(미쳤어요?!)술이 생각보다 독해서 수면제를 먹기도 전에 잠들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얼굴을 짚고 한숨을 쉬는데 그게 또 마음이 쓰였는지 눈치를 봤다. 그리고는... 그리고는 미안하다며 안겨왔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먹이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듣는데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느순간 입을 맞췄고, 그도 날 더 껴안으며 한참을 그렇게 숨을 나눴다.

그래놓고 술에 꼴아 똑같은 소리를 하니 그도 열이 받았겠지.
나한텐 그따위로 말해놓고 자기도 죽었어야 했다고 주정을 부리는 걸 보면 얼마나 엿같고 정이 떨어지겠어. 솔직히 나보다 연장자에 그 난리통에서 살아남은 어엿한 생존자지만 어디까지나 민간인이라고 만만히 보고 있던 것도 사실이라, 그가 그렇게 화를 냈을때 그 옛날 하사님께 혼날 때 다음으로 무서웠다. 그래놓고 그렇게 자책한다고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진 않는다, 기껏 너 하나라도 살아나가라고 희생한 하사님한테 죄송하지도 않냐 같은 말을 하면서 본인도 상처받는 표정이라 안타까웠다. 당신은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친 게 아닌데 왜 울어. 도망친 건 나인데 당신이 그런 것처럼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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