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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2 18:15

 

 

 

 

 

 

그런데 법정물(?)이라는 탈을 뒤집어썼을 뿐 클리셰 범벅인 드라마물도 BGSD...

알오버스
알못ㅈㅇ

ㄴㅈ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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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스 준비는 잘 되어가나?”

 

 

사무실에 앉아 존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데, 로펌의 대표 브루스가 들어와서 열려있는 사무실 문을 똑똑 두드리며 존을 부른다. 존은 모니터에서 눈을 때고 좁혔던 미간을 풀며 살짝 웃었다.

 

 

누가 하는 일인데요.”

역시 내가 제일 아끼는 피고용인다워.... ..... 상대편 변호사가 누군진 들었어?”

아뇨, 하지만 걱정되시는 건 아니죠?”

 

 

브루스는 존의 책상 앞에 서서 그를 평온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존은 저 평온한 표정이 사실 보이는 대로 평온한 게 아닐 수 있음을 잘 알아 손에 깍지를 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브루스는 존의 대찬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알아서 나쁠 건 없겠지? 크리스 파인이야.”

 

 

 

존은 순간 표정관리를 못하고 눈가를 실룩였다. 예상치 못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존은 찰나 당황했으나 다시 여유만만한 미소를 띠고 어깨를 으쓱였다. “되도 않는 검사 노릇하던 한량이 이젠 개업까지 했나 봐요?”

 

 

아니, 다른 로펌에 입사했대. 그 양반이 정의의 편에 서서 법을 수호할 인물은 아니긴 했지, 안 그래?‘

가진 거라곤 돈과 얼굴과 바닥 치는 모럴뿐인 인간인데 변호사 노릇이 딱이긴 하네요.”

그거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인가? 나를 포함해서?”

 

 

브루스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눈썹을 치켜 올리자 존이 부정 않고 생글생글 웃는다. 브루스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는 커피나 한 잔 하지, 하며 존을 불러낸다. 존은 그다지 내키지만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브루스를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그 인간이 검사 노릇 할 때는 자주 마주쳤었지?”

 

 

 

브루스는 의뭉스런 표정으로 컵에 커피를 따르며 존을 슬쩍 바라보았다. 능구렁이 같으니, 존은 컵을 받아들며 브루스를 치켜뜬 눈으로 마주 봐주었다. 브루스는 제 컵에도 커피를 따르고 계속 존에게 뭔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는 것에 대해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오랜만에 만나는 거겠네?”

생각은 안 해봤는데 그렇겠네요.”

워낙 요란했었으니.”

그 인간이야 가십덩어리 그 자체죠.”
“.....”

브루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결국 참다못한 존이 브루스를 똑바로 쏘아보며 짐짓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브루스는 방어적인 자세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존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내 말은, 이 모든 게 이번 변호에 영향을 안 미쳤으면 좋겠다는 소리야.”

브루스, 사장님, 제가 언제 제 사생활로 제 일에 지장을 준 적이 있었나요?”

 

 

 

존이 그린우드 로펌에서 일한 지 벌써 7년째다. 브루스와 존은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 이상으로 친밀한 사이였고, 그래, 서로를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이었다. 브루스는 그간의 존의 활약을 모두 지켜보았고, 존이 얼마나 뛰어난 변호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존의 말이 맞았다. 존은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로서 항상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만사에 임했고 그것은 그의 7년간의 뛰어난 근속태도가 보장하는 바였다. 그런데, 그런 만큼, 브루스는 존이 딱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더- 그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 적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마저도 존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그의 다른 면을 보인 것이었지만, 공교롭게도 브루스는 그 두 번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두 번의 경우 다, 크리스 파인과 관련된 것이었기에 지금 브루스의 회색빛 눈에 염려가 담긴 것이었다.

 

 

 

 

하지만 존은 브루스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새까만 두 눈은 신 맛이 폴폴 나는 싸구려 원두로 내린 커피에 붙박여있었는데, 그가 정말 커피를 이다지도 흥미롭게 지켜보는지, 아니면 그의 지나간 시간들을 잠시 돌이켜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부탁하신 자료 여기 있어요.”

고마워, 안톤. 퇴근 해야지?”

어떻게 존이 일하는데 제가 퇴근을 해요.”

그러지 마. 금요일이잖아!”

존이야말로 퇴근해야 하잖아요!”

나도 정리만 하고 바로 갈 거야.”

 

 

 

보조인 안톤과의 실랑이 끝에, 결국 안톤을 먼저 보낸 존은 어둑해진 밖과 시계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눈을 슥슥 비비며 기지개를 폈다. 안 그래도 들어가야할 때가 되긴 되었다. 안톤이 가져다준 자료를 제가 보기 편한 대로 분류해 포스트잇을 붙여두고 파일철에 집어넣은 존이 짐을 챙기며 일어난다. 그러다 무심결에 핸드폰을 확인한 그는 아까는 없었던 메시지가 와있던 것을 발견했다. 모르는 번호의 메시지였다.

 


 

 

 

 

[ 오랜만이야. ]





 

 

 

 

수트케이스를 든 손을 아래로 턱 늘어뜨리고, 존이 단 다섯 글자로 된 메시지를 한참을 바라본다. 저장도 되어있지 않고, 기억에도 없는 번호지만, 어쩐지 존은 발신인을 알 것만 같았다.

뒤이어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 잘 지냈어? 번호가 안 바뀌었어야 할 텐데. ]

 

 

 

존은 입을 꾹 다물고는 핸드폰 화면을 껐다. 같은 케이스를 맡은 상대방 변호사에게 사적인 연락을 취하다니, 존은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새끼는 뻔뻔하고 규칙이나 법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안하무인이야. 존나 지멋대로인 새끼. 지 맘대로 해도 되는 줄 아는 새끼...
존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불 꺼진 공용공간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되어있던 검은 아우디 suv에 올라탄 존이 조수석에 스마트키와 수트케이스와 핸드폰을 차례로 툭 던져놓는다. 그리고는 핸들을 잡은 채, 시동을 걸려다 잠시 멈추고 한숨을 푸 내쉰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핸들에 이마를 대고 한숨을 한 번 더 내쉬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아까 메시지가 왔던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존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한참을 노려보았다. 계속 진동이 울려 결국 수트케이스 위에서 미끄러져 내린 핸드폰을, 존은 결국 뒤집어 놓았다. 이윽고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는 그의 표정은 반쯤 화가 나있기도 하고, 반쯤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깃들어있기도 했다.

 

 

 

 

 

 

 

검은 아우디가 끼익대는 소리를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색이 짙은 금발머리를 한 남자가 결국 수신 처리되지 않은 핸드폰 화면을 끈다. 어둑어둑한 지하에서도 그의 두 눈이 새파랗게 빛나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참을 흰색 포르쉐에 기대어 서 있다가, 천천히 차에 올라타 이어 아우디처럼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존이 무시한 그 메시지 이후로, 같은 번호에서 다른 메시지가 더 오거나 혹은 전화가 걸려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존은 필사적으로 냉정해지려고 노력했고, 더더욱 재판 준비에 매달렸다. 웬만하면 싫은 소리를 안 하는 안톤이 작게 투덜댈 정도였으니 할 말 다 한 셈이었다(“, 아마 상대편 변호사는 법정 안에서 스트립쇼라도 해야 할 거예요, 이번 재판에서 존을 이기려면요.” 지나가던 브루스가 그 말을 듣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가, 그저 다물고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존은 정말 여러모로 이번 재판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워낙 패배를 싫어하는 그의 타고난 성격도 물론 컸지만, 상대방이 크리스 파인인 이상 존은 이를 더 악물어야 했다. 잘난 집안 출신의 잘난 얼굴의 남자가 검사 노릇 때려치우고 평범한 로펌에 입사했다는 것만으로도 업계에선 제법 술렁일만한 가십거리였다. 거대 로펌을 세우고도 남을 만한 자본이 있는 집안의 아들인데 일개 꼬마 변호사(정말 초짜는 물론 아니지만, 어쨌든 변호사로서는 신참내기니까)가 되었다니! 하지만 그런 주제에 여전히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건 변하지 않아서 대단한 연예인 급만큼은 아니어도 이미 그는 흥미로운 소문의 정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존은 그딴 부류의 소문을 딱 질색했다.

 

 

케이스의 흥미로운 정도나 변호인들의 입담이 주목을 받는 것은 존 또한 즐기는 바였다- 변호사라면 승소를 위해선 모든 상황들을 제게 유리하도록 언론이든 여론이든 주무를 배짱도 필요한 바였으니까. 하지만 존이 저런 스캔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 이제 법정에 가야할 시간이에요.”

 

 

 

안톤이 사무실로 들어오며 존을 부른다. 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수트케이스를 들었다.

 

 

오늘도 이겨버리고 와요, !”

 

 

 

안톤은 밝은 목소리로 격려하며 그에게 테이크아웃 잔을 내밀었고 존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럴 생각이야, 안톤.”

 

 

 

 

 

 

 

 

 

 

 

-

 

 

 

 

 

 

 

 

 

안녕하세요, 캐롤, 그리고 민디.”

오셨어요, .”

 

 

의뢰인인 캐롤과 민디에게 존이 인사를 건넨다. 캐롤은 싱글맘으로, 정자은행 ‘RPD메드를 통해 아들 에릭을 출산했다. 그러나 출산 후 에릭 성장을 통해 알게 된 사실로, 에릭에게는 선천적인 난치성질환이 있었다. 유전질환을 앓고 있는 에릭은 7세가 되었을 때 해당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는 현재까지는 치료법이 없는데다가 거의 풀타임케어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캐롤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뀔 수밖에 없었다.

캐롤은 직장에 다니며 각종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평범한 미국 여성이었고, 에릭의 치료에 들어가는 돈과 캐롤이 직장에 다니는 동안 에릭을 돌봐줄 간병인을 고용하는 데에 필요한 돈의 액수는 캐롤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캐롤은 직장을 세 군데나 다녀야 했고, 그녀의 인생은 도무지 정상적이고 평범한 루틴이라고 볼 수 없을만큼 망가졌다. 그래서 그녀의 동생인 민디가 RPD메드를 고소하기 위해 캐롤을 설득해 존을 찾아왔던 것이다.

캐롤은 그녀의 아들을 세상 무엇보다도 사랑했고, 에릭에게 최고 그리고 최선의 삶을 선사해주고 싶을 뿐이라고 정자은행을 고소하는 걸 다소 꺼렸었다. 하지만 존은 에릭이 어떤 하자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캐롤이 원하는 대로 에릭을 위해서, 그리고 또 캐롤을 위해서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며 만일 우리가 승소한다면 캐롤은 아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캐롤에게 차분히 말했다. 결국 캐롤은 민디와 존에게 설득을 당했고, 존이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이다.

 

 

 

크리스 파인은, 그렇다면 물론, RPD메드를 대변했다. 당연히 정자은행 쪽은 이번 케이스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열심히 피력하려 들 것이다. 이를 위해 존은 해당 질환에 관한 유전자 검사와 관련 법률들, 증거, 그리고 많은 것들을 수집하며 또 준비했다. 크리스를 검사로서는, 존은 잘 알고 있었지만 변호사로서의 크리스에 대해서는 존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니 더욱 존은 만반의 준비를 했어야 하는 것이다.

 

 

 

에릭은 잘 있어요?”

, 오늘 나오기 전에 봤을 땐 숨도 한결 쉬기 편해보였고... 뭐 그날그날 다르니까요..”

 

 

 

피곤에 절어 헬쓱한 캐롤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존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문질렀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존이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의 고객들에게는 유했으며, 또한 캐롤의 케이스는 실제로도 안타까웠기 때문에 존은 그녀를 친절히 에스코트하며 법정 안으로 인도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존은 저도 모르게 사방을 살폈다. 곧 재판이 시작되니 상대편 변호사와 의뢰인이 보일 때도 되었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존이 답지 않게 긴장한 스스로에게 코웃음을 쳤다. 일은 일이야, 존 초. 크리스 파인이 아니라 상대편 변호사일 뿐이라고 여겨야 한다고. 승소하면 되잖아, 평소에 하던 것처럼.

 

 

 

혹시나 하고 안을 보았지만, 그곳에도 크리스는 없었다. RPD메드측의 대표만 자리에 앉아 심기불편한 표정으로 존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대한 화답으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준 존이 자리에 앉아 서로를 격려하는 캐롤과 민디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대기가 잠시간 조용해지는 게 느껴졌다. 존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저 등장만으로도 주목을 받는 사람이 누구일지 안 봐도 뻔했다.. 일부러 존은 가져온 증거자료들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석조 바닥 위를 걷는 구두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소리는 존의 옆에 멈춰 서서 머물렀다. 존은 제 옆얼굴과 뒤통수에 내리꽂히는 시선을 애써 모르는 척 했다. 다행이, 바로 판사가 법정에 들어섰고, 결국 그 구두소리의 주인- 크리스 파인은 피고인석에 가 앉았다.

 

 

 

 

 

 

 

 

-

 

 

 

 

 

 

“14년 전, 에릭 엘더맨이 태어났습니다. 바로 저의 의뢰인 캐롤 엘더맨이 RPD메드에서 취한 정자를 사용해서요. 하지만 피고 측의 과실로 인해서 에릭 앨더맨의 어머니, 캐롤은 에릭의 선천적 유전 질환으로 인한 엄청난 의료비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이에--”

 

 

 

존이 자리에서 일어나 판사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는 단 한 번도 피고인 측에, 그러니까, 크리스를 향해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피고의 과실을 언급할 때는 그들을 검지로 지적하듯 가리키며 과실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캐롤과 민디는 서로 손을 꼭 붙잡고 존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존이 채 말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피고인의 변호사가 요란하게 의자 끄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RPD메드를 대표하며, 존경하는 재판장님께 약식판결을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말이 끊긴 존이 기가 차서 입을 꾹 다물고 판사를 노려본다. ‘정말요, 로즈필드 판사님?’ 하는 오진 눈빛에 판사가 어쩌겠냐는 얼굴로 존을 바라본다.

크리스가 끼어들어 화가 난 것이니, 크리스를 향해 예의 그 빡친 표정을 지어볼 법도 한데, 이 와중에도 크리스 쪽을 향해 눈 한 번 안 돌리던 존이었다. 존의 짐작이기는 했지만, 크리스는 존의 성질을 초장부터 긁으려고 작정하는 것만 같았다. 검사노릇을 할 때도 그랬다. 아니, 사적으로도 그랬지. 저 잘생긴 한량은 사람을 감정적으로 빡치게 하는 데엔 엄청난 일가견이 있는 인간이었다. 

 

 

 

원고는 소송 사유를 과실이라고 했습니다크리스는 존이 과실이라는 단어에 힘을 준 것을 거의 똑같이 흉내내며 말했다. 하지만 재판장님, 이는 사실 과실이 아니라 결함이 있는 생명에 대한 소송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원고더러 장애가 있는 아들을 낳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죠.”

 

 

 

뭐라고? 이 개새끼가!

결국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오른 존이 고갤 휙 돌려 크리스를 노려본다. 크리스는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예의바른 척을 해가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민법 43.6조는 이런 재판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뇨, 이건 결함 있는 생명에 대한 소송이 아닙니다! 원고는 그저 아들의 치료비를 청구하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결국 똑같은 얘기죠.”

 

 

 

이번엔 존이 크리스의 말이 끝나기 전 끼어들어 크리스의 말을 정정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개의치 않고 주장을 펼쳤고, 그는 이어 판사의 동의를 구하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며 두 팔을 벌리고 판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어, 드디어 존과 눈을 마주쳤다. 존은 지금 손에 총이 들려 있다면 저 가증스러운 양 손바닥에 총알을 하나씩 박아 넣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크리스는 다시 얌전히 손을 모으고 판사를 기다렸다.

 

 

 

“.....미안하지만, 파인씨에게 동의합니다. 안타까운 일이나 소송을 기각하도록..”

잠시만요! 그럼 저희는 소송 사유를 변경하겠습니다.”

 

 

존의 발언에 크리스를 포함한 모두가 놀라고 의아한 얼굴로 존을 바라본다. 존은 그 짧은 순간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이 케이스를 적어도 소송이 이뤄질 수는 있게 하려고 애를 썼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캐롤과 에릭을 위해서도 안 될 일이며, 다소 사적인 이유로도 존은 재빨리 해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RPD메드는 완벽한 상품을 판다고 광고했습니다. 그러나 에릭의 질병은 선천적인 것이었고, 만약 RPD메드에서 정자를 기증받을 때 해당 질병에 관한 유전자검사만 시행했다면 이와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고가 정자를 구매했을 당시, RPD메드는 해당 유전자 검사가 존재하는지 몰랐습니다. 동종업계에서도 거의 20%에 달하는 비율만이 해당 검사를 도입했었습니다.”

재판장님, 그건 재판이 진행되고 배심원단이 판단 할 문제입니다. 그리하여, 소송사유를 제조물 책임을 묻는 것으로 바꾸겠습니다.”

 

 

 

그 찰나에 기지를 발휘한 존이 입꼬리를 씩 끌어당겨 웃으면서 판사를 바라본다. 캐롤과 민디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존을 계속 바라보았다. 크리스는 표정을 구기며 말도 안 된다는 듯 존의 말에 반박했지만, 존은 크리스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명백히 닥쳐라는 사인을 보냈고, 존은 이어 변경된 소송사유를 말했다.

 

 

 

“‘제조물 책임을 묻는다구요?”

. RPD메드는 자신들이 주장하던 바와는 다르게 불량상품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존의 입에서 불량상품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캐롤이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든다. 하지만 민디가 언니의 손을 꼭 붙잡고 다독였고, 캐롤은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울음을 참으며 존을 노려보았다. 존은 애써 캐롤의 시선을 모른척했다. 어쨌든 소송까지 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불량상품이라... 흥미롭네요. 하지만 재판장님, 제조물 책임사건의 공소시효는 상품 수취 후 2년에 불과합니다. 에릭 엘더맨의 나이는 14살이므로, 그의 어머니가 12년은 늦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겠네요. 소송기각을 요청합니다.”

 

 

 

대놓고 존의 의견에 대해 이죽이던 크리스가 이번에도 존의 주장에서 허점을 짚어내고 슬쩍 비꼰다. 그러나 존은 물러설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다.

 

 

 

그렇게 나온다면 원고를 어머니 캐롤이 아닌 아들 에릭 엘더맨으로 변경하겠습니다. 병으로 인해 참석이 어려울 에릭 앨더맨의 위임장을 받아올 것이며, 저는 소송 후견인이 되겠습니다.”

“.......”

공소시효는 18세부터 적용되니 아직 14살인 에릭은 이번 소송을 진행할 의뢰인이 되기에 충분할 것 같네요.”

 

 

 

이번엔 크리스가 존을 노려보았다. 존은 크리스를 향해 뻔뻔하게 비웃는 듯한 미소를 보내며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판사는 둘의 기싸움에 벌써 질린다는 얼굴을 잠시 보이더니, 내일부터 재판을 시작하겠노라며 소송사유를 받아들이고 판사봉을 내리쳤다.

 

 

 

 

 

 

 

 

 

 

-

 

 

 

 

 

이건 말도 안 돼요, 난 인정할 수 없어--”

캐롤, 진정해! 이건 그냥 이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민디의 말이 맞아요, 캐롤, 저도, 그 누구도 에릭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소송을 진행하려면 적당한 사유가 필요했을 뿐이에요.”

당신은 내 아들을 고장 난 믹서기쯤으로 취급했다구요!!”

 

 

 

캐롤이 눈가를 붉히며 존에게 악을 쓴다. 민디는 그런 캐롤을 달래느라 애를 썼고, 존 또한 캐롤을 진정시키기 위해 침착한 목소리로 계속 설명했다.

 

 

 

이 모든 건 하나의 전략에 불과해요, 캐롤. 법이라는 게 때로는 이렇게 무심하죠.. 인간미라곤 없는 것처럼요.... 당신과 에릭의 마음을 다치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최선을 다할게요, 캐롤. 이제야 우리는 승소할 가능성이 있어요.”

캐롤, 내 말 들어. 존은 유능한 변호사야, 우리가 잘 모르는 어떤 게 있을 거야... , 약속해줘요. 꼭 승소해서 캐롤이 에릭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요.”

진심으로 최선을 다할게요. 준비를 더 하고, 또 할게요. 캐롤, 오늘은 그만 들어가고 푹 쉬어요. 내일도 참석해야 하니까요.”

 

 

 

결국 캐롤은 훌쩍이며 민디에게 기댄 채 존을 바라보았다. 존의 까만 눈에 어느 비열함이나 악독한 면 없이 진지하게 캐롤의 케이스를 아끼는 것이 보여, 결국 캐롤도 한숨을 쉬고는 민디의 다독임을 받으며 법원을 나섰다. 피로해진 존이 눈을 감고 눈꺼풀 위를 문지르는데, 익숙한 구두소리가 들려왔다. 존이 불쾌한 표정으로 뒤를 돌자, 그의 앞에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존을 내려다보고 있는 푸른 눈의 잘생긴 상대편 변호사가 서있었다.

 

 

 

존 초.”

그렇게 부르지 마.”

싫어. 얘기 좀 해.”

“난 할 말 없어!”

 

 

존이 버럭 성을 내며 크리스를 쏘아본다. 크리스는 그러나 표정변화 없이 존에게 차분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짙은 남색의 투버튼 수트를 입고 더 짙은 색 타이를 맨 크리스는 존이 화가 치밀어오르는 이 와중에도 잘났다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로 훤칠했다.

 

 

 

오랜만이지?”

재판에 관한 얘길 할 게 아니라면 난 그만 가봐야겠어.”

“..... 재판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만 날 본다면, 좋아. 요한, ‘제조물 책임이라니. 그런 수를 선택할 줄은 몰랐어.”

멋대로 판단하지 마. 승소를 위한 전략일 뿐이야. 누구의 생명도 나는 절대로, 그렇게 보지 않아.”

 

 

 

존의 발언에 크리스의 얼굴이 굳는다. 존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어서 내일 있을 재판 준비도 마저 해야 했고, --- 크리스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도덕심과 인간의 도리에 대해 내게 마더테레사보다 큰 가르침을 줄 게 아니면 이만 실례할게."

요한!!”

 

 

 

가까스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존이 크리스를 제치고 자릴 뜨려는데, 그 팔을 낚아챈 크리스가 어딘가 모르게 애절한 목소리로, 여간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모르고 부르지도 않는 존의 미들네임이자 한국이름을 부른다. 존은 그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려했지만, 저도 모르게 멈추고 말았다. 제 팔뚝을 강하게 쥐고 있는 크리스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가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그 태그호이어는 존이 크리스에게 그의 생일날 선물해준 시계였다... 아주 오래 전에.

 

 

 

요한, 제발.”

 

 

 

저를 붙잡는 손의 악력은 어느새 약해져있었지만, 저를 부르는 목소리의 호소력에 결국 존이 멈춰 서서 크리스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이 잘생긴 어린 왕자의 말에는 언제나 힘이 있었다- 존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힘이.

 

 

 

날 그렇게 매몰찬 눈으로 바라보지 마.”

 

 

 

크리스의 깊고 파란 눈이 마치 바닷물이 넘실대는 것처럼 일렁였다. 존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설을 지껄이며 결국 또 다시 저 푸른 눈에 함락되고 만 자신의 감정을 저주했다. 그런 경험은 5년 전에 통렬히 겪은 것으로도 충분한데 말이다.


















보고 싶은 장면  1도 안 나왔는데 분량조절 대실패.....
케이스 내용은 모 미드를 참고했음
일부러 정확한 병명 등은 기재하지 않았음. 내가 감히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무순에 넣는답시고 상상해보고 끄적거리는 게 죄송해서... 


여튼 클리셰가 범벅일 똥무순이다

이 뒤는..언젠가는...나오겠지...




팡존

2020.08.02 (18:22:04) 신고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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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센세 너무 재밌어 제발 억나더 내줘
[Code: 1891]
2020.08.02 (18:28:36) 신고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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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생 님 아 잠깐 범벅일 이라는 거슨 어나더가 있다는 뜻이죠????? 언젠가라는 건 나올수도 있다는 뜻 맞죠???? 할렐루야
[Code: 2c53]
2020.08.02 (18:30:26) 신고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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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시발 개쩐다 대작의 시작 팡존 5년 전에 무슨 일 있었는데!!!! 요한이 또 함락됐다니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어 나 더
[Code: 2c53]
2020.08.02 (19:02:34) 신고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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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나 똥 없어서 못먹어 알지??? 이게 똥무순이라니 요즘은 대작을 반어적으로 똥무순이라고 하나보지??? ㅜㅜㅜㅜㅜ
[Code: ef69]
2020.08.02 (19:16:27) 신고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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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좋아하는게 분량조절실패야 크아아아아 둘이 뭐야 뭐야 과거에 무슨 일인데 ㅁㅊㅠㅠㅠㅠ 팡존 엘리트엘리트 수트물 너무 좋아ㅜㅜ내센세 필력 무슨 일이야ㄷㄷㄷ
[Code: 4271]
2020.08.02 (22:01:40) 신고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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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사랑합니다 선생님교수님하나님
[Code: a544]
2020.08.03 (00:23:53) 신고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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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던거야ㅠㅜㅜㅜㅜㅜ
[Code: 5fd8]
2020.08.03 (00:41:32) 신고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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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어나더 쓰고있는거 다 알아 아직 보고싶은거 안나왔으면 나올때까지 써야지 센세가 후련하지ㅠㅠㅠㅠㅠ 허엉 어나더 ㅠㅠㅠㅠ
[Code: e145]
2020.08.05 (05:37:10) 신고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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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흗미친 내가 무순을 보는건지 존나 미련철철넘치는 미드를 보는건지 잠시헷갈렸어요... 센세의 필력따문이겠죠? 잠시나마 뉴ㅡ욕 로이어들의 삶을 들여다본기분입니다..
[Code: 29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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