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83204677
view 13582
2024.02.05 18:08



재생다운로드IMG_0808.GIF

헤일리는 막 걸어다니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친했던 친구가 열일곱 되던 해 생일에 우울증으로 자살해 버린 케케묵은 사건 땜에 십 년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곁에 있어 주지 못 했다는 죄책감에 잠겨서 수년째 익사 중이었을 듯

학생 때부터 운동만 줄창 해 왔던 탓에 졸업하자마자 육군 입대했다가 분노 조절 문제로 쓰레기 같았던 병장 반쯤 죽여 놔서 쫓겨난 후 겨우겨우 입에 풀칠만 하며 살고 있는데

우연히 지인의 지인 통해서 경호원 일 제안 받음 얼마 전에 도저히 못 해 먹겠다고 튄 놈이 있는데 걔가 팽개친 일 맡으면 된다고 페이도 많이 받을 수 있다길래 아묻따 오케이 했을 듯 언제까지 손가락만 빨며 살 수는 없으니까

튄 놈이 맡았던 고객이 좀 특별한 케이스라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교육 기간도 없이 냅다 실전 투입됐겠지 가는 길에 대충 들은 바로는 경호 대상은 여자고 고용주는 여자 남편이라네

그 남편이 고위직 간부인 데다 출장이 잦은데 와이프 혼자 둘 수 없어서 사설 경호원으로 고용한 거라고 했음 숙식도 제공한다는데 딱히 장점인 것 같진 않음 말이 사설 경호원이지 가정부나 다름없는 거 아니냐고 경호원이 필요한 건 아니지 않냐 물으니 내내 브리핑 해 주던 상사가 한숨 푹 쉬면서 자기들도 첨엔 다 그렇게 생각했대 그래서 여자 맡았다가 그만둔 애들 많다고 함 좀 버틴 애들은 길어야 3주 정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라 자살 시도 몇 번 해서 매시간 꽁무니 쫓아다녀야 하고 이전 경호원 폭행한 전적도 있던 탓에 신입인 네가 맡게 된 것 같다며 주절주절 얘기해 주는데 헤일리는 자살이라는 단어에 꽂혀 뒷말은 못 듣고 불현듯 떠오른 죽은 친구 생각에 바짝 얼어붙어 있었을 것 같음

진작 얘기해 줬음 여기까지 올 일 없었는데 돌아가기엔 넘 늦었고... 엄마한테 개쩌는 일자리 구했으니 걱정 좀 그만해라 질러 놓고 내빼면 쪽팔릴 것 같으니까 어쩔 수 없다 맘 굳게 먹고 걍 받아들여 보기로 함

시내에서부터 세 시간 넘게 달려 간 곳은 푸른 들판과 늙은 나무만 널린 허허벌판이었고 까만 정장 빼입은 덩치 둘 있는 대문 지나 3분쯤 더 들어가고 나서야 마침내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대저택에 다다름

헤일리 키보다 몇 배는 큰 현관 앞에도 정장 덩치 둘이 또 있더라고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이렇게까지 삼엄한 건지 생각하던 중 열리는 문 안쪽으로 발 들이자마자 보이는 나선형 계단 위 살색 실루엣 따라 고개 돌리는데

 

미친 사람 맞네. 

재생다운로드8888.gif

 

헤일리가 여자 처음 마주하자마자 든 생각이었음 느릿느릿 내려오던 여자는 방금까지 울다 온 나온 것처럼 창백한 얼굴에 화장은 다 번져 있고 옷도 입다 만 건지 속옷 차림이었을 듯 마지막 계단 밟기 직전 줄곧 그 아래에 서 있던 가정부가 여자 어깨에 셔츠 얹어 줌 가정부도 상사도 이런 건 이미 익숙한 듯 당황한 기색 하나 없어 보인다 여자 역시 태연하게 벌어진 셔츠 앞 여미며 쇼파로 성큼성큼 가 다리 꼬고 앉음

 

"신입이 넘쳐나나 봐요."

 

비아냥대도 상사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전에 오던 친구는 못 견디겠다며 도망갔다고 덤덤하게 전해 준 후 자기 뒤에 있던 헤일리 앞으로 세워 놓고 이 친구는 믿을 만하다고 덧붙임 만난 지 하루도 안 됐으면서 말야 여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제대로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음 자기 할 일 마친 상사는 말 없이 헤일리 어깨 몇 번 토닥여 준 후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신다 어차피 오래 볼 사이는 못 될 테니까

뒷마당에 드넓은 호수가 펼쳐진 채광 끝내주는 집에 살면서 미쳐 버릴 일이 뭐가 있을까 헤아려 보려다 금방 그만둠 자꾸 친구가 죽기로 마음먹었던 열일곱 번째 생일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헤일리. 맞죠."

"말씀하세요."

"감시 놀이 재미없을걸."

"감시하러 온 거 아닙니다."

"아니긴."

"......."

"오늘은 목 매달 곳 찾을 기운 없으니까 긴장 풀어요."

 

여자는 죽기 며칠 전에 본 헤일리의 친구와 닮아 있었을 것 같음 태생부터 불행을 타고난 사람처럼 언제든 무너져 내려도 이상할 것 없어 보였고 유약해 보이는 겉만큼이나 얄팍한 속 뿌리까지 물렁대고 있었으며 매사에 예민하게 반응하다 시름에 겨울 때면 제멋대로 나도는 것도

매사에 무감하게 반응하던 헤일리와는 서로 떨어져 도는 행성 같았음 그럼에도 십수 년 전 자살 사건 후유증을 또 겪고 싶진 않았으니 온종일 온 신경을 여자 쪽으로 곤두세우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혼자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계획 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여자는 모든 타인을 불신했고 무슨 말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는 데다 생기 잃고 초점 없는 눈 안에는 한참 전부터 쌓아 올린 증오가 덕지덕지 어려 있었음 거리 좁히려고 들면 어떻게든 비틀어서 피해 버리길래 대충 파악하고 나서는 입 다물고 주변만 얼쩡거렸지 열 걸음 뒤에서 이 여자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 눈에만 담음 정말로 얼쩡거리기만 함 너무 가깝게 붙지 아니하되 아른아른 겉도는 기척 땜에 충분히 거슬리게끔

재생다운로드dsg-2.gif

 

"자기 좀 짜증 나는 스타일이구나."

 

두 걸음 좁혀졌을 때 여자가 못 참고 속내 비치자 헤일리는 왠지 모를 요상한 희열감까지 느꼈을 듯 둘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아주 살짝 느슨해지는 순간이었음 그렇다고 여자가 곁을 내준 건 아니고 하루 중 단 몇 시간 동안은 정신병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거

그 외의 시간들에서의 여자는 걍 여전히 미쳐 있음 툭하면 물건 집어던져서 깨부수고 식사하다 대뜸 포크 모양이 휘어졌다며 뺙뺙 소리 지르고 말 못 배운 애들마냥 엉엉 울다 제풀에 지쳐 기절하기까지 한다 이런 행동은 남편과 통화한 날 더 심해지곤 했음

집 안 고용인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여자는 나이 많은 남편에게 팔려 오다시피 결혼한 거였고 처음부터 이상했던 건 아니래 예민하긴 했지만 늘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음 근데 그 남편이 가족 포함한 다른 사람들 만나지 못 하게 하고 집 밖은 구경만 할 수 있도록 궁전 같은 감옥에 감금해 놓은 거라고... 여자가 도망가면 잡아 오고 숨으면 찾아내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손바닥 안으로 되돌려 놨다네 결혼한 날부터 지금까지 쭉 그런 삶을 살았대 나날이 피폐해지던 여자는 5년 전에 유산하고 나서 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놔 버렸다고 함 영양가 없는 소문인 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사실이었을 것 같음 남편이랑 통화할 때마다 새하얗게 질리던 이유가 있었구나

전말을 대강 들은 후에는 여자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음 모든 행동이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서도 어느 정도는 눈 감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여자의 남편은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금요일에 주방 전화기로 전화를 걸었음 정해진 시간대는 없었지만 주로 저녁 식사 마칠 무렵에 벨소리 울림

근데 이번 주는 화요일 아침에 한 번 금요일 오후에 한 번 걸어서 여자 머릿속 다 헤집어 놓더니 밤에 한 번 더 울려 대네 덕분에 히스테릭한 증상은 여느 때보다 더 심했지 헤일리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듯 자꾸 매가리 없는 주먹을 휘둘러 대니까

그만하라고 이러다 다친다고 좋게 타이르려다 마구잡이로 뻗친 손에 뺨 얻어맞음 남한테 진짜 오랜만에 맞아 봤고 이게 썩 아프진 않은데 속이 새까맣게 탈 정도로 열받았을 것 같음 치료가 덜 된 분노 조절 문제가 남아 있었거든

헤일리는 손에 닿는 아무 물건이나 던지려는 여자 팔목 낚아채고 한껏 오른 분노 땜에 가빠진 숨 천천히 고르며 애써 진정하려고 시선부터 맞춤 

 

"내려놔요, 그거."

"너부터 놔."

 

이 집에 오기 전에 상사가 일하면서 무력 써야 할 때도 있을 거라고 말해 준 게 문득 떠오름 이런 것 때문이었네 입술 깍 깨문 헤일리한테 붙잡힌 팔 쌀쌀맞게 뿌리친 여자는 자기 막으려는 애 때리고 밀치고 꺼지라고 너같은 거 필요없다고 소리침

 

"진짜 꺼져 줘요?"

 

헤일리는 그냥 우뚝 선 채로 밀리지도 않고 가슴팍 퍽퍽 맞으면서 진짜로 가 버릴까 생각했겠지 지금 가면 더 이상 이런 꼴 당하진 않을 텐데 이 정신 나간 여자야 죽어 버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니까 순간 감정으로 등돌리려던 찰나에 십수 년 전 케케묵은 사건 속 친구가 보낸 미안하다는 마지막 메시지와 그 애가 죽은 시점보다 어려 보이던 영정 사진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을 맺었던 열일곱 번째 생일날 기억까지 물밀듯 밀려든다

그래서 차마 떠나지 못 하고 앞에 서서 울고불며 꼭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듯한 여자 확 당겨 끌어안고 그만해요 괜찮아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여러 번 반복했을 것 같음 이 여자는 벗어나겠다고 헤일리 어깨 깨물어 가며 발버둥치다 이내 품 안에서 녹아든 것처럼 힘 쭉 빠져서 그대로 주저앉음 헤일리도 따라 앉으면서 여자 몸 감싼 팔에 힘 풀어 감 그렇게 틈 없이 붙어 앉아서 여자는 몇 시간 동안이나 헤일리 붙들고 펑펑 울었을 듯

재생다운로드16e8b64b0fd2862401a8b0fcfb3724c6.gif

 

용케 잘 달래서 방으로 올려 보내고 지친 몸뚱이 누이니 맞은 게 아프진 않았는데 종일 긴장한 탓인지 몸 곳곳이 쑤셔서 한참 뒤척이다 잠드려고 할 때쯤 헤일리 업무용 폰이 우웅 울림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쓰는 거라 급할 때 아니면 잘 울리지도 않아서 뭔 일인가 벌떡 일어나 화면 확인함

 

앤 씨가 침실로 올라오시래용. ☠️☠️☠️ - 오전 4:02

 

또래 가정부 중 한 명이 보낸 메시지였음 여자가 이렇게 늦게까지 깨어 있던 적은 없었는데 이 시간엔 보통 수면제에 취해 있었거든 급한 맘에 옷도 못 갈아입고 목 다 늘어진 잠옷 차림으로 호다닥 단숨에 침실 앞까지 오긴 했으나 늘 바깥에 서 있기만 했지 안쪽은 구경도 못 해 봤음 이 꼬라지로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머뭇거리는데 닫힌 문 너머에서 여자 목소리가 작게 들림

 

"숨소리 다 들려요."

 

묵는 방이 지하에 있으니 냅다 뛰어온 사람은 숨이 찰 수밖에 없다 뺨 긁적이고 두 번 노크한 후 문 열어 보면 불 꺼진 커다란 방 안에서 여자 혼자 덩그러니 커다란 침대 끝에 앉아 있음

 

"내가 깨웠어요?"

"아닙니다."

"미안. 잠이 안 와서."

"괜찮아요."

"그렇게 입으니까 귀엽다. 그 나이대 애들 같고."

"......."

"나 잠들 때까지 있어 줘요."

 

여자는 얘가 거절이라도 할까 걱정 한가득 달린 얼굴 걸어 두고 묻는데 마다할 수가 있나 까라면 까야지 멀뚱멀뚱 서 있던 헤일리가 대답 없이 고개 끄덕이니 고마워 중얼거리듯 속삭이고 침대로 가 누움 

헤일리는 먼발치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여자 누워 있는 침대에 시선 고정해 둠 비싼 의자라서 그런가 내내 지내던 방 침대보다 편안한 기분 들고 긴장 쭉 풀리면서 슬슬 눈꺼풀 무겁게 내려앉음 잠 깨려고 도리질 쳐 보고 뺨도 쳐 보는데 도무지 달아나질 않는다 억지로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딱 5분만 눈 붙이고 있으려는데

 

"헤일리."

 

눈 감은 지 30초나 지났을까 꿈에서 들리는 것처럼 작게 부르는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눈 번쩍 뜸 바로 자세 고쳐 앉고 부르셨냐고 대답하며 눈으로는 더듬더듬 음성 들린 쪽 좇으니 누운 채 상체만 일으킨 여자가 

 

"피곤하면 이리 와서 누워요."

"아뇨. 그러면 안 되는...."

"내 말은 다 들어줘야 하잖아, 자기는."

재생다운로드IMG_0807.GIF

 

그걸 무기로 쓰는 건 반칙 아닌가 근데 여자 말이 딱히 틀린 것 같진 않음 자기는 돈 받고 고용된 입장이니까 땅 꺼져라 한숨 푹 내쉰 헤일리는 넷이 누워도 충분해 보이는 침대로 성큼 다가가던 중에도 이래도 되나 싶긴 함 산전수전 다 겪고 잘리면 억울할 것 같았거든 점점 가까워지자 여자는 그런 헤일리 맘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걱정 말라는 말만 하고

침대 바로 옆까지 가서도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여자랑 조금 떨어져 누워 보니 푹신해서 몸 푹 파묻히는 게 빽빽 울던 신생아도 곧바로 기절할 것 같은 편안함이었음 그럼에도 몸 굳어서 뚝딱이는 건 여전하다 5분 전엔 쫓아내려 애써도 쏟아지던 잠이 왜 작정하고 몸 눕혀 주니까 싹 가시는 건지

두 뼘쯤 거리 둔 여자는 헤일리 쪽으로 몸 돌려서 천장 보고 누운 애 옆얼굴 가만가만 보고 있음 시선이 좀 부담스럽게 느껴져서 마른 침 꼴깍 삼키고 말이라도 걸어 볼까 하던 참에 여자가 대뜸 손 뻗어서 헤일리 뺨 살살 쓰다듬어 줌 아까 이 여자한테 맞았던 그 뺨을 말야

헤일리가 고개만 돌려서 시선 맞췄을 땐 여자 시선은 조금 아래 가 있었는데 아마 후줄근하게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드러난 작은 멍자국 보고 있었겠지 이것도 여자가 깨무는 바람에 생긴 거고... 이제서야 미안한 맘 드는지 또 울상이 되어서는 멍자국 주변도 아프지 않게 살살 쓰다듬어 주신다

 

"미안해."

"알아요."

 

마침내 헤일리도 여자 향해 몸 돌려 누워서 둘 사이 약간의 거리만 두고 마주본 채로 말 없이 닿은 시선 서로 받아 주다 곧 먼저 눈 감은 헤일리 입꼬리에 소리 죽여 짧게 입맞추는 여자

어떤 반응 보여야 할지 몰랐던 헤일리가 뒤늦게 눈 떴을 때 여자는 이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을 듯

종종 한 침대에서 달게 잔 후 여자는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전보다는 훨씬 밝아진 얼굴이었을 것 같음 웃으니까 예쁘더라고 증상 도질 때면 숨 천천히 몰아쉬며 헤일리를 바라보곤 했음 그것도 안 먹히면 남몰래 손잡아 주는 방법으로 가라앉힘 가정부고 정장 덩치고 달라진 여자 모습에 기뻐하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함 당연한 반응이었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묻는 사람은 없었겠지

헌데 이 상황을 여자 남편한테 보고한 사람은 있었음 어쩐지 밖에서만 나돌던 인간이 이번 출장 마쳤다고 오늘 안에 집 도착한다네 목소리만 들어 본 늙다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긴 했어도 꼭 만나 보고 싶단 뜻은 아니었지만 암튼 이 일방적인 통보로 여자 곁엔 다시 그늘이 짐 

남편은 동료들한테 들었던 것보다 열 살은 더 늙어 보였고 집에 오자마자 헤일리부터 찾았음 궁금했었다면서 헤일리 덕분에 와이프가 기분 전환을 좀 한 것 같대 그러더니 비서처럼 보이는 남자한테 손짓하자 남자도 기다렸다는 듯 웬 두툼한 봉투랑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명품 가방을 가져다 줌 노인네는 노인네다

위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여자는 창백한 낯으로 불안한 기색 못 떨치고 있었음 고개 들어 여자 상태 확인한 건 헤일리가 유일했고 그에 보답하듯 애써 웃어 줌

헤일리 시선 따라 남편이 덩달아 고개 들자 여자는 곧장 웃음 거두고 방으로 들어가 버림 남편이 헛웃음 지음서 애 손 붙잡고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내 줬으니 한 일주일 정도 쉬다 오라고 앞서 준 것보다는 덜 두툼한 봉투 하나 더 쥐어 주면 헤일리는 이 놈이랑 단둘이 남겨질 여자 걱정에 첨엔 거절했을 것 같음

재생다운로드81b355bbac4f94b2d376c3c0639077f2.gif
 

근데 듣던 대로 강압적이던 여자 남편은 거절하는 헤일리 손 빼지 못 할 정도로 꽉 붙잡고 부탁하는 거 아니라고 기회 줬을 때 다녀오는 게 좋을 거다 협박하는 투로 부추김 내일 아침 일찍 떠나래 돌아올 때도 아침 일찍 돌아오고

정수리부터 등골까지 쎄한 기운 확 도는데 돈 많은 고용주 말씀에 대들 용기는 없었음 결국 봉투 받아들고 여자가 서 있었던 자리만 하염없이 올려다봄

 

글케 헤일리는 고용주가 붙여 준 기사 차 타고 본가로 떠남 엄마랑 동생한테 생색 잔뜩 내며 용돈 주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늦잠도 자고 지난 한 달 간 미뤄 둔 거 다 하고 갈 생각이었음

휴가 이틀째에는 간만에 시내 구경 나왔으니 친구들 불러 놀던 중 헤일리 폰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옴 저장 안 된 건 잘 안 받아서 당연히 무시했지 좀 울리다 끊기는가 싶더니 곧 똑같은 번호가 또 뜸 친구가 받아 보라고 하길래 통화 버튼 누르고 별말 없이 듣고만 있었는데 건너편에서

 

- 헤일리.......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얘 이름만 되뇌는데 더 듣지 않아도 그 여자라는 건 알 수 있었음

 

앤?

- 미안한데...... 지금 와 주면 안 돼?

저기, 지금은 좀 곤란한...

- 내 말은 다 들어주기로 했잖아.

저 휴가 중이에요. 아시잖아요. 시간도 늦었고요. 휴가 끝나는 대로 갈...

- 어디야?

...... 친구들이랑 있어요.

- 친구들이 나보다 더 중요해?

그런 거 아니에요.

재생다운로드dsg-1.gif
 

- 나 죽어도 신경 안 쓸 거지, 이제. 

애니.

- 죽어 버릴 거야. 자기는 평생 후회나 하면서 살아. 꼭.

애니, 진정하고...

 

여보세요? 애타게 불러도 통화 종료음만 반복됨 더는 후회만 하며 살고 싶진 않은데... 친구 부고 접했을 때처럼 숨이 턱 막히고 시야까지 뿌옇게 흐려지던 헤일리는 등 뒤로 어디 가냐고 묻는 친구들 버려 두고 택시부터 잡음 늦지 않게 도착한 택시 안에서 내내 혼잣말로 욕하다 꽉 쥔 주먹으로 허벅지 내려치기도 함 기사가 괜찮냐고 물어도 대답할 여유가 없다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서 닦아도 닦아도 마르질 않을 것 같음

소매 흠뻑 젖은 채로 대문 앞 도달했을 때 정장 덩치 둘이 택시 막아 섰는데 지체할 시간 없으니 잔돈도 안 받고 내려서 문 좀 열어 달라고 소리치자 헤일리인 거 보고 스르륵 움직이는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비집고 들어가 집까지 쭉 달림 여자가 죽지 않았길 바라면서

휴가 간 거 아니었냐고 묻는 현관 앞의 또 다른 정장 덩치 말에 대답 않고 문 다 열리기 전에 발부터 내민 집 안은 이것저것 부서지고 깨진 것들로 개판이 돼서 가정부들이 치우고 있는 중이었음 다들 사색이 돼 있더라고

불안한 맘 커져서 숨 고를 새 없이 바로 여자 침실로 올라감 남편이고 뭐고 있든지 말든지 문 벌컥 열면 역시나 이 방도 난장판이었겠지 모든 게 무너져 내린 방 안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던 여자는 방금까지 울고 있었던 것처럼 창백한 얼굴에 화장은 다 번져 있고 엉망이 된 옷은 어깨 아래로 흐트러짐 생기 잃어 초점 없는 눈 안에는 다시 쌓아 올린 증오가 덕지덕지 어려 있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손에는 핏물로 얼룩진 깨진 거울 조각 쥐고 있었을 듯 느릿느릿 돌아서서 헤일리랑 시선 맞추던 여자 얼굴 위에는 안도감이 비치면서도 손에 든 건 자기 목에 가져다 대고

재생다운로드6666.gif

 

"왜 그냥 가 버렸어?"

"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에요. 그만해요, 제발."

"널 받아 주는 게 아니었는데."

"......."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하지?"

"안 했음 여기까지 안 왔어요."

"책임지기 싫어서 온 거잖아. 자기도 다른 애들이랑 똑같아.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내가 이기적이라고요?"

"......."

재생다운로드IMG_0809.GIF

 

헤일리는 친구의 우울이 옮아 스스로 좀먹는 데 애쓰느라 얼 빠진 채 다녀야했던 열여섯의 겨울이 버겁게 느껴졌을 때쯤 그 친구를 딱 한 번 외면한 적 있었음 이후 얼마 안 가 친구가 자살해 버린 거였고 뒤에서는 헤일리가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는 말이 돌기도 함 어떻게 그런 친구를 외면할 수 있냐고 극복해 보려고도 해 봤지만 잘 안 풀리고 고여 버려서 응어리처럼 남아 있는데 여자가 버튼을 눌러 버린 거겠지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음 속에서부터 끓는 감정이 넘쳐흘러서 핏발 선 눈 치켜뜨고 여자한테 바짝 다가가서는 날카로운 조각 들고 있는 팔목부터 움켜쥠

 

"내가 당신 하나 책임지겠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파. 놔. 놓으라고!"

"이기적인 건 당신이에요. 알아요? 죽어도 모르겠죠."

 

여자가 힘 못 이기고 거울 조각 떨어뜨리면 어깨 붙잡아다 벽에 확 밀쳐서 다리 사이 교차되며 틈 없이 붙게 됨 헤일리나 여자나 같은 크기의 분노가 걸려 있는 얼굴로 서로 노려보면서 거친 숨만 내쉬고 있을 듯 때리고 할퀴고 악질러도 도무지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 곧 무력감에 빠지겠지

얘 품 안에 갇혀 있으면 언제나 증오는 가라앉고 좌절감만 남음 문득 올려다보면 헤일리 뺨 위에 손톱에 긁인 상처 벌겋게 부어올라 있음 내가 다 잘못했다고 이제 그만하자고 애원해도 오늘은 좀처럼 놔 주질 않음 헤일리가 진정하질 못 했으니까

옷깃 부여잡고 눈물 다 묻혀 가며 파고드니 솟구치는 감정 땜에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 들린다 다시 한 번 올려다봤을 땐 눈 심지가 좀 꺼진 채였음 그래서 여자는 팔 뻗어서 헤일리 어깨 끌어안고 얇게 베인 상처 위로 짧게 입맞춘 후 여전히 색색대는 숨 뱉는 입술 위에도 입맞춰 줌

 

"난 이제 너 없으면 안 돼......."

 

진심만 가득 담은 말 흘리자마자 헤일리는 방금 떨어진 입술 위로 자기 입술 맞댐 여자 허리 감싸 안아 들고 침대에 눕혀서 옷 벗기는데 손이 하도 거칠어서 찢어지기도 했을 것 같음 

입술 떼고 서서 숨 헐떡이며 헤일리 손길 찾는 여자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옷 속에 숨겨 놨던 허벅지 안쪽 자해 흉터 보게 됨 크진 않지만 깊게 베어진 게 열 개는 족히 넘어 보이더라고 헤일리가 손 뻗어 매만지면 여자는 움찔움찔하면서도 눈 안에 고여 있는 눈물 속절없이 흘림 얘는 그저 침대 끝에 걸쳐진 여자 다리 사이에 앉아 흉터들 하나하나 입술로 세어 보겠지

마지막 것까지 키스해 준 후 헤일리는 쭉 올라와서 여자 뺨 위 눈물 땜에 들러붙은 머리카락 조심조심 정리해 주고 번진 눈물 자국도 손으로 다 닦아 줌 눈썹부터 쇄골까지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리며 여자 눈코입 눈에 담다가 상체 기울여 살짝 벌어진 입술에 쪽 소리나게 입맞춤 

재생다운로드101010.gif
 

"나 버리지 마."

재생다운로드31422cbdb63868634cb0319b85a94e8f.gif
 

"그럴 일 없어요."

 

엉켜 붙은 채 두 입술 포개지고 헤일리 손이 여자 다리 사이로 다시 내려갔을 때 닫혀 있던 침실 문 열리는 소리 들림 소음 따라 고개 돌리면 그 시선 끝에 헤일리 향해 총구 겨누고 있는 여자 남편이 서 있을 듯






투봊 헤별이 앤여신

2024.02.05 18:22
ㅇㅇ
모바일
센세... 숨 제대로 못 쉬겠어... 너무 좋다....
[Code: f78e]
2024.02.05 18:41
ㅇㅇ
모바일
말이안나오네 너무좋다
[Code: 0e99]
2024.02.05 18:45
ㅇㅇ
모바일
이 집 잘하네
[Code: a18d]
2024.02.05 18:53
ㅇㅇ
모바일
오미친 갓작이 여기에
[Code: d09d]
2024.02.05 19:04
ㅇㅇ
모바일
마스터피스
[Code: 3acf]
2024.02.05 19:04
ㅇㅇ
모바일
와 존나... 존나 말이 안나와요 선생님
[Code: f310]
2024.02.05 19:11
ㅇㅇ
모바일
이런 누추한 곳에 이런 갓작이? 친구 잃은 트라우마 버튼 눌려서 택시에서 소매 흠뻑 젖을 때까지 우는 헤별이나 고작 스물몇 파랗게 어린 경호원 여자애한테 매달려서 너 없으면 안된다는 앤여신이나 아 표현이 너무 아름다워서 뒤질거같아요 어나더 제발 어나더 줄 때까지 숨참음 흡
[Code: f310]
2024.02.05 19:07
ㅇㅇ
모바일
하........ 숨도 안 쉬고 읽음 ㅁㅊ다
[Code: 5749]
2024.02.05 19:11
ㅇㅇ
모바일
센세 넷1플에서 부르는데? 드라마 찍자고???
[Code: eddb]
2024.02.05 19:13
ㅇㅇ
모바일
센세 계좌
[Code: e598]
2024.02.05 19:40
ㅇㅇ
모바일
미쳤다
[Code: c2af]
2024.02.05 20:04
ㅇㅇ
모바일


[Code: 791f]
2024.02.05 20:07
ㅇㅇ
모바일
와 미쳤다 제목부터 홀려서 들어왔는데 마지막까지 홀려서 읽었어요 헤일리와 앤여신이 드디어 서로 이어지려는 찰나였는데 아오 이 눈치없는 남편 새끼ㅜㅜㅜㅜ 꺼지라고ㅜㅜㅜㅜㅜ 우울증으로 자살한 친구 때문에 오랜 시간 우울에 빠져있던 헤일리가 앤여신을 만나면서 친구를 겹쳐보고... 서서히 다가가고 가까워지고... 모든 과정들이 눈물나게 아름답고 슬픈데 이 관계의 끝이ㅜㅜㅜㅜㅜ 헤일리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ㅜㅜㅜㅜ 둘이 보란듯이 잘 살란 말야ㅜㅜㅜㅜ
[Code: 5515]
2024.02.05 20:38
ㅇㅇ
모바일
센세를 할리우드로... 센세를 억나더월드로....
[Code: 1be1]
2024.02.05 21:35
ㅇㅇ
모바일
금발앤여신 미쳤다....
[Code: d28b]
2024.02.05 21:43
ㅇㅇ
모바일
미친 마스터피스
[Code: 9d31]
2024.02.05 21:49
ㅇㅇ
마이깟..
[Code: 2979]
2024.02.05 22:24
ㅇㅇ
모바일
하...센세 어나더가 없으면 윗붕들은 다 죽소
[Code: 16e8]
2024.02.06 00:33
ㅇㅇ
모바일
이 센세를 헐리우드로
[Code: 906d]
2024.02.06 01:05
ㅇㅇ
모바일
센세.. 영원히 함께해..
[Code: 97be]
2024.02.06 02:06
ㅇㅇ
모바일
아니;;;;; 이거; 빨리 ;; 영화로 만들어야 될거 같은데;;;;;
[Code: 33fc]
2024.02.07 00:37
ㅇㅇ
모바일
센세 헐리우드 가자…센세를 헐리우드로 보내드리자…
[Code: 0934]
2024.02.20 04:05
ㅇㅇ
모바일
와 진짜 생각도 못했던 조합이고 둘 다 큰 관심 없는데 이거 이후로 ㅈㄴ 관심 생김..... 진짜 어캄 당장 다음편 안 보면 죽을듯
[Code: c845]
2024.03.18 01:31
ㅇㅇ
모바일
센세...이 새벽에 붕키 숨고 안쉬고 다 읽느라 죽는 줄 알았어...어나더 있는거지? 다음편 나올때까지 숨참는다???
[Code: 5e4d]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
성인글은 제외된 검색 결과입니다.
글쓰기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