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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8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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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 션웨이쿤룬 웨이란 주일룡백우




따사로운 햇볕이 세상을 밝히고 꽃내음을 담아 향기로운 봄바람이 은은하게 불어오니, 그 아래의 곤륜산 또한 형형색색의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 봄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천지의 꽃향기가 모두 제 것인 듯 무수한 꽃들이 고운 꽃잎을 활짝 펼치며 아름다움을 뽐냈다. 뒤이어 겨울잠에 들었던 나무들이 저마다 눈을 털어 생기 넘치는 이파리를 빛냈고, 바닥에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이 녹아내리면서 푸르른 잔디와 들꽃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추위가 어느 정도 가실 때쯤, 곤륜산의 이들도 부지런히 봄의 첫 시작을 맞이했다. 새들이 맑고 또랑또랑하게 지저귀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울음소리가 곤륜산 곳곳에 울려 퍼졌다. 호랑이의 우렁찬 포효에 덩치 작은 아이들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 숨어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모두가 종에 상관없이 인사를 나누며 기분 좋게 목을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 봄을 맞이한 곤륜산은 빠르게 제 주인에게도 소식을 알렸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햇살에 눈을 뜬 쿤룬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 숨결에 꽃향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하룻밤 사이에 봄이 왔나……."


졸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는 노랫가락처럼 방 안을 지나 곤륜산 전체에 퍼져나갔다. 코끝에 진하게 스미는 꽃향기, 따스한 바람을 맞으며 춤추는 나뭇가지, 얼었던 몸을 깨뜨리고 힘차게 흐르는 강물, 기대에 차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까지……. 무엇하나 과하지 않고 마냥 달가우니 정말로 봄이 온 모양이었다.


"봄이 좋긴 하지."


이불에 파묻혀 나른함을 즐기려고 하면, 어림없다는 듯 어디선가 나비들이 들어와 머리맡을 맴돌았다.


"알겠다, 알겠어. 일어나면 되지 않니."


낮게 웃은 쿤룬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


성화에 못 이겨 몸을 씻고 옷을 차려입은 쿤룬이 마침내 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삼삼오오 모인 아이들이 마당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쿤룬은 들떠서 자신을 반기는 이들에게 부드러이 웃어주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와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가장 푸른 잔디와 가장 색이 고운 들꽃이 피어나 일대를 뒤덮었다. 요족과 화족이 예를 갖췄고, 각 부족의 수장들은 앞으로 나와 절을 올렸다. 꽃들마저 뽐내길 멈추고 향기를 감추니, 쿤룬은 그들을 더없이 사랑스럽게 보며 일어나라 손짓했다.


"너희도 참. 매년 맞는 봄인데 어찌 매년 이리 유난스러울까."

"당신 덕에 우리가 무사히 존재할 수 있고, 당신 덕에 항상 새로운 삶을 맞이하니 당연하지요."


가장 먼저 인사를 올린 이는 뱀족의 수장이었다. 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쿤룬이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무 예를 차리면 이 아비가 서운하단다."

"일어나자마자 애들을 놀리다니, 아버지가 글러 먹었네."


짐짓 서운한 시늉을 하는 쿤룬에 다들 당황하려는 찰나, 낭랑한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나무 그늘 밑에 앉아있던 검고 토실한 고양이가 쿤룬의 발치에 다가왔다.


"다칭, 너는 좀 더 예를 차려야 할 것 같은데."


허리를 숙여 검은 고양이의 턱을 간질인 쿤룬이 한결 느슨해진 말투로 말했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여태 곤륜산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다칭이라 불린 검은 고양이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 쿤룬의 어깨에 올라탔다. 다른 이들은 그런 다칭을 보며 웃을 뿐, 결코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았다. 다칭은 쿤룬의 태초부터 함께한 묘족이니 그런 사사로운 감정은 무의미했다. 오히려 곤륜산의 아이라면 누구든 그를 믿고 따랐다.


"그보다, 쿤룬. 이번 봄은 조금 이른 거 아니야? 다른 곳은 이제야 싹을 틔우고 있다고."


저를 쿡쿡 찌르는 쿤룬의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깨물던 다칭이 문득 물었다. 곤륜산은 주인의 느긋한 성정을 닮아 언제나 적절한 시기에 여유롭게 봄을 불러들였다. 그런데 이번 해는 단순히 이른 정도가 아니라 누구보다 먼저 봄을 알린 것이었다.


"어차피 곧 만천하가 봄으로 뒤덮일 텐데, 늦고 빠른 것이 뭐가 중요하겠어."


쿤룬은 어깨를 으쓱이며 적당히 답했다. 이번 봄이 이른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쿤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쿤룬은 마음 흐르는 대로 살아가길 좋아했고, 봄을 보다 빨리 불러들인 것 역시 마음이 그렇게 흘러서였다. 그러니 왜 그랬느냐 물어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너처럼 게으른 놈이 갑자기 부지런 떠니까 묻는 거잖아."


다칭이 앞발로 쿤룬의 얼굴을 꾹꾹 누르며 추궁했다. 한평생 쿤룬의 옆을 지킨 그로서는 천하 태평한 친우의 이례적인 행보가 퍽 의심스러운 눈치였다. 얼굴 바로 옆에 닿는 다칭의 미심쩍은 시선에 쿤룬은 키득거리며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포근한 바람이 유려한 손짓을 따라 흘러 쿤룬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아무렴 어떠냐. 중요한 건 새 생명이 싹트는 계절이 다시―"


능청스레 말을 잇던 쿤룬이 별안간 입을 다물고 눈을 크게 떴다. 다칭을 비롯한 몇몇 이들도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곤륜산에 예기치 않은 손님이 찾아온 탓이었다. 두 명…… 아니 셋인가? 저 아래, 기척을 빈틈없이 숨긴 자들이 곤륜산 입구에 발을 들였다. 그들 중 두 명은 온 것만큼이나 빠르고 은밀하게 자취를 감췄고, 오직 하나의 생명만이 고른 숨을 내쉬며 제 존재를 알렸다.


"인사도 없이 가다니, 꽤 바쁜 모양이지?"


쿤룬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뒤이어 눈 깜빡할 사이에 곤륜산 입구로 내려온 그가 성큼 걸음을 뗐다. 입구 바로 앞에 놓인 아주 작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보따리인가? 누가 선물을 두고 갔나? 이상하다, 서신을 받은 기억은 없는데. 뭔지 몰라도 참 작군.


"이게 무슨……."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주 작은 무언가에 다다른 순간, 쿤룬은 당황한 나머지 그만 말문이 턱 막혔다.


"세상에……."


그의 어깨에 올라탄 다칭이 아연한 탄식을 내뱉었다. 아주 작은 무언가는 보따리 따위가 아니었다. 남루한 포대기에 싸여 곤히 잠든 갓난아기였다. 감히 곤륜산에 이렇게나 어린 생명을 유기하다니. 더군다나 아이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그들의 것이었다. 어떤 미친 자식이 이런 간 부은 짓을 저질렀지? 죽고 싶어 환장했나? 죽을 용기가 없어서 남의 손을 빌리려다가 돌아버린 걸까?

다칭이 이 갓난아기를 버리고 간 자들의 정체와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동안, 쿤룬은 조용히 아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덧 혼란이 가시고 차분해진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속내를 감추는 것에 도가 텄으니 당연한가 싶다가도, 묘하게 여느 때와 분위기가 달랐다.


"쿤룬, 왜 그래?"


그 미세한 차이를 눈치챈 다칭이 의아해서 물었다. 그러자 쿤룬은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더니,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이를 안아 들었다. 작디작은 몸은 겨울 공기처럼 서늘했다. 새하얀 피부와 짙은 눈썹, 촘촘하고 풍성한 속눈썹을 보아하니 다 자라면 대단한 미인이 될 듯싶었다.

아이를 안고 또 한참 침묵하던 쿤룬이 입을 열었다.


"어서 돌아가자. 봄이라 해도 갓난아기에게는 아직 날이 찰 거야."

"쿤룬!"


쿤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칭이 버럭 소리쳤다. 굴러떨어지듯 바닥에 내려온 검은 고양이가 경악해서 쿤룬을 쏘아봤다. 쿤룬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 다칭을 물끄러미 마주 봤다.


"진심이야? 그 아이가 누군지 알면서 데려가겠다고?"


다칭은 어찌나 황당한지, 거의 다그치듯 물었다.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잖아."


어깨를 으쓱인 쿤룬이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상황을 뻔히 아는 녀석이 지나치게 태평하니, 기어코 다칭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야! 너 진짜 미쳤냐? 황룡 성격을 몰라서 이래? 괜히 엮였다가 화를 입으면 어쩌려고!"


다칭은 제가 말하고도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곤륜산 안에서 누가 그들의 대화를 엿듣겠냐마는, 주제가 주제인지라 신경이 곤두섰다.

곤륜산에 덩그러니 버려진 아이는 다름 아닌 황룡이었다. 예로부터 황룡은 용족 중 가장 권위적이고 호전적이며, 동족을 끔찍이 아끼기로 유명했다. 단 한 명의 황룡일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의 핏줄을 무턱대고 들이겠다니……. 자칫 일이 꼬였다가는 그 뒷감당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잠시 맡아주는 것뿐인데 무슨 걱정이 그리 많아? 황룡족 수장에게 잘 설명하면 돼."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쿤룬은 여전히 평온한 낯으로 헛소리를 해댔다. 몸을 파르르 떤 다칭이 치밀어오르는 욕지거리를 가까스로 삼켰다. 황룡족 수장한테 잘 설명한다고? 그 불같은 황룡이 참 잘도 들어주겠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너한테 책임을 묻고 곤륜산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꼭 그런다는 법은 없잖아?"

"너 대체 갑자기 왜 이렇게 천치처럼 구는 거야? 석 달 전에 새끼 황룡을 납치하려고 했던 여우 일가가 깡그리 몰살당한 건 벌써 까먹었냐?"


다칭은 쿤룬이 제가 모르는 사이에 벼락이라도 처맞았나 의심했다. 그 정도로 지금의 쿤룬은 이상했다. 항상 제 속 보듯 쉽게 알 수 있던 녀석이 생판 모르는 남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다칭, 진정해. 네 걱정은 알지만, 아이를 외면하는 게 더 큰 화를 부르지 않을까?"


쭈그려 앉은 쿤룬이 다칭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득했다.


"이미 이 아이가 곤륜산에 버려진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차라리 한시 빨리 상황을 정리하는 게 낫지, 성급하게 발을 빼다가 일이 커질지도 몰라."


다칭은 당장 따지려는 듯 씩씩거렸으나,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대로 모른 척했다가 아이가 죽기라도 하면 정말 끝이었다. 그렇다고 덥석 마음을 바꾸려니 불안하긴 매한가지였다. 다행히 황룡족 수장은 평소 쿤룬을 존경하고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이 수상한 상황을 그냥 넘어갈지는……. 갓 태어난 황룡이 하필 곤륜산에 버려진 것이다. 곤륜산은 쿤룬 그 자체와 다름없으니, 작정하고 숨기면 제아무리 황룡이라도 흔적 없이 감춰버리는 없는 신묘한 산이었다. 우리 말을 믿어줄까? 검은 고양이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앞발로 바닥을 긁었다.


"걱정하지 말래도. 상태만 확인하고 바로 황룡족 땅에 데려다줄 거야."


쿤룬은 흙을 파헤치는 다칭의 앞발을 감싸 쥐고 조곤조곤 말했다. 길지 않은 갈등 끝에, 다칭은 뜻을 굽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받아들인 검은 고양이가 다시 쿤룬의 어깨에 올라탔다. 설핏 웃은 쿤룬이 몸을 일으켰다.


"웃지 마, 이 사고뭉치야."


다칭이 머리로 쿤룬의 얼굴을 밀어대며 투덜거렸다. 웃음을 터뜨린 쿤룬이 보드라운 털에 제 뺨을 비볐다.


"고마워, 다칭."


진심을 가득 담은 인사가 돌아오면, 다칭은 한숨과 함께 남은 화를 전부 털어버렸다. 그래,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자. 어느 정신 나간 놈이 황룡을 납치하고 유기했는지 모르겠으나, 무사히 돌려보내면 괜찮으리라. 부디 이 아이가 사라진 지 얼마 안 됐기를 바라야지. 작게 혀를 찬 다칭이 아이를 내려봤다. 쿤룬의 품에 안겨 고른 숨을 내쉬는 하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모른 척하기에 죄책감이 들긴 했다.

 
∞ ∞ ∞


"그 아이는 제가 버렸습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아이를 안아 든 쿤룬과 그의 옆에 선 다칭이 할 말을 잃고 황룡족 수장을 바라봤다. 아이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곧장 황룡족 땅에 방문했건만, 돌아오는 대답이 저거였다.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으나, 황룡족의 수장 류선은 더 설명하지 않고 차를 마실 뿐이었다. 이목구비가 짙어 수려한 얼굴은 어찌나 서늘한지, 마치 서릿발이 날리는 것 같았다. 황룡이 동족을 버렸다고? 어째서? 죄인을 벌할 때면 모를까, 이 갓난아기를 왜 수장이 직접 나서서 버렸단 말인가.


"자초지종을 듣고 싶소만."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쿤룬이 말문을 텄다.


"곤륜군께서 관여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러자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대화를 거부했다. 쿤룬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그리 말하면 안 되지요, 류 수장. 다른 이도 아니고 황룡족의 수장인 그대가 내 산에 갓난아기를 두고 간 거요. 당연히 내가 관여할 일이지."


쿤룬의 눈이 단호한 빛을 띠었다. 타고나길 모든 생명을 어여쁘게 여기는 그로서는 이 문제를 두루뭉술하게 넘길 생각이 없었다.


"설마 이런 짓을 벌여놓고 입 다물 작정은 아니리라 믿소."


엄한 목소리가 경고했다. 그럼에도 류선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할 말을 고르듯 턱을 매만졌다. 미간을 살며시 좁힌 쿤룬이 류선을 살펴봤다. 거만한 몸짓과 달리, 막상 퀭한 눈은 보는 사람마저 무력해질 정도로 메마르고 공허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최 짐작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그리듯 하염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류선이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 아이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힘을 타고났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비롯해 수많은 동족을 동사시키고, 일대에 혹한을 몰고 왔지요. 그 피해가 이제 겨우 회복되고 있는 참입니다."

"해서 내게 맡긴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곤륜군께서는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지 않습니까. 사나운 들짐승조차 당신의 손길이 닿으면 한없이 온순해져 머리를 숙이니, 당신이라면 그 아이를 잘 보살펴주시리라 믿습니다."


류선은 쿤룬에게 안긴 아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동족은커녕 철저한 남을 대하는 듯했다. 아니, 남보다 못한 취급이었다. 들짐승이라니. 노골적인 비유에 쿤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가 아는 황룡은 동족을 자신의 목숨과 같이 여기는 종족이었는데, 다 옛말이 돼버렸군. 한때 그대들의 자부심이었던 것이 이제 빛바랜 명성에 불과하다니 참으로 안타깝소."


쿤룬은 거르거나 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지극히 건조한 투로 말했다.


"곤륜군께서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류선이 으르렁거렸다.


"내 말이 지나치다 한들, 감히 곤륜에 갓 태어난 어린 생명을 버리고 도망친 그대만 할까."


그러나 단단히 화난 쿤룬 역시 물러나지 않고 매섭게 받아쳤다. 다칭은 행여라도 싸움이 벌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며 쿤룬의 곁에 바싹 붙었다. 날카로운 두 시선이 한 치의 양보 없이 맞붙었다.


"말씀대로 우리는 동족을 끔찍이 아낍니다. 그렇기에 그 아이를 버리는 거예요."


주먹을 세게 틀어쥔 류선이 분노를 억누르느라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쿤룬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인상을 구겼다.


"어불성설이군. 이 아이 역시 그대의 동족이잖소."

"그 녀석을 나와 동족이라 하지 마십시오!"


삽시간에 얼굴을 험상하게 일그러뜨린 류선이 노성을 내질렀다. 분노로 거칠어진 목소리가 하늘과 땅을 찢을 듯 쩌렁쩌렁 울렸다.


"그 아이는 태어남과 동시에 어미를 죽였습니다! 그 아이의 어미가 배 속에 아이를 품은 내내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가던 것을 아십니까? 그 아이의 어미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았던 것은요? 자신의 생명이 꺼져가는데도 아이의 탄생을 포기하지 못했던 그 아이의 어미를 당신이 아느냔 말입니다!"


류선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맹렬히 소리쳤다. 핏발선 눈에 분노가 넘실거렸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나, 쿤룬은 돌연 류선이 처절하게 울부짖는다고 느꼈다.


"저 녀석이 나와 같은 동족이라고? 그게 내게 얼마나 수치스럽고 한 맺히는 사실인지 당신은 평생 모를 겁니다!"


격분에 차 쏟아지는 말을 들을수록 쿤룬의 노기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이 아이가 그대의 아이로군."


마침내, 쿤룬은 측은한 눈빛으로 류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헛숨을 삼킨 류선이 입을 꾹 다물었다. 급하게 말아쥐는 주먹이 형편없이 떨렸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창백한 얼굴 위로 드러났다. 붉게 젖은 두 눈에 말로는 다 설명하지 못할 서글픔이 스몄다.


"곤륜군……."


한참 뒤, 류선이 지친 목소리를 냈다.


"저는 그 아이를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제 몸에도 용의 피가 흐르니 동족을 죽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어미를 죽인 녀석을…… 제 하나뿐인 사랑을 앗아간 녀석을 곁에 둘 만큼 아량이 넓지 않아요."

"……."

"지금 당장 그 작은 녀석의 목을 졸라 내 손으로 숨을 거두고 싶단 말입니다."


류선의 텅 빈 목소리가 아스라이 흩어졌다. 지금까지의 원망 중 가장 잔인한 말이지만, 쿤룬은 더는 류선을 나무라지 못했다.


"부디 돌아가 주십시오……. 염치없다는 것은 알지만, 도저히 그 아이를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실의에 잠긴 축객령이었다. 쿤룬은 눈꺼풀을 내려 품에 안은 아이를 봤다. 일련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말간 얼굴로 얌전히 잠든 채였다. 복잡한 마음으로 아이를 보다가, 일순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쿤룬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어떤 말도 와닿지 않겠지만……."

"……."

"그대가 아무리 애써도 혈연을 끊어낼 수는 없을 거요."


류선은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쿤룬 역시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 ∞ ∞


달이 밝은 밤, 쿤룬은 아이를 품에 안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느긋한 걸음으로 곤륜산 정상에 오르니, 가운데에 우뚝 선 거대한 나무가 그를 반겼다. 먼 옛날 곤륜산에 최초로 심어져 곤륜목이란 이름을 얻은 나무로, 천하의 산천초목에 뿌리가 닿아있는 신성한 존재였다.


"모처럼 이른 봄인데, 경황이 없어 이제야 찾아오는구나."


곤륜목에 털썩 기대앉은 쿤룬이 인사했다. 곤륜목은 화답하듯 가지를 흔들었다. 나뭇잎끼리 부드럽게 스치는 소리가 소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동안 그 소리에 취해 있던 쿤룬이 시선을 내려 작은 아이를 눈에 담았다. 달빛에 비친 얼굴이 아침에 본 것보다 더욱 하얗게 빛났다. 확실히, 류선을 빼닮은 생김새였다.


"이리 고운 녀석이 어쩌다가 그런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을까……."


안타까움을 담은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아직 밤은 쌀쌀했지만 그보다 아이의 몸이 훨씬 더 차가웠다. 어머니가 청룡이었다고 하니, 그의 특성을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류선은 이 사소한 사실마저 끔찍하고 절망스러웠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쩐지 목이 메었다.


"아가, 걱정하지 말렴. 내가 너를 사랑해 줄 테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 쿤룬이 아이의 뺨을 조심히 어루만졌다. 제가 거두기로 했으니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부을 것이다. 네 운명은 너의 죄가 아니었고, 부모의 사랑을 못 받는다고 해서 네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도록, 어느 때에도 사랑을 의심하지 않도록 온 사랑을 퍼부을 테다.


"네가 사랑에 굶주릴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하마."


쿤룬은 동그란 이마를 쓰다듬으며 꼭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뒤이어 무심코 손을 거두자, 내내 감겨 있던 아이의 눈이 반짝 뜨였다. 맑은 눈동자에 하늘을 수놓은 별 무리가 고스란히 담겨 은은하게 빛났다. 커다란 눈동자에 비치는 밤하늘의 절경을 홀린 듯 들여다보던 쿤룬이 고개를 들었다.

곤륜산을 시작으로 높고 큰 산봉우리가 끝없이 이어져 있음이요, 드넓은 하늘 아래에 모든 산천초목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있으니, 이는 앞으로 곤륜산에서 자랄 아이의 삶 그 자체였다. 너 또한 훗날 누구보다 높고 뛰어난 사람으로 거듭날 테고, 너 또한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천지의 모든 곳에 맞닿을 테니…….

아름다운 경치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쿤룬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아이의 큼직한 눈동자는 여전히 밤하늘의 황홀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신비로운 감정이 저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이름은 웨이가 좋겠구나……."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쏟아졌다.


"높고 크다는 뜻이란다. 그리고 성은…… 네 눈이 밤하늘의 별을 담은 호수 같으니 션을 쓰면 좋겠어."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고 낯설었다. 쿤룬은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아이와 이마를 맞댔다.


"오늘부터 너는 션웨이다. 어떠냐, 마음에 드니?"


코끝을 가볍게 비비며 묻자, 아이는 마치 알아들은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이의 작은 손이 쿤룬의 얼굴을 감쌌다. 그 별것 아닌 몸짓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쿤룬은 뱃속을 휘젓는 충족감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가슴 속에서 뜨겁게 일렁이는 소유욕이 낯설기 그지없었으나 이상하게도 기꺼웠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쿤룬은 이 작은 아이를 본 순간 느꼈던 감각을 잊지 못했다. 바닥에 구멍이 뚫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몸이 거세게 요동쳤고, 아이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시야에서 벗어났다. 천불이 일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대지 한가운데에 놓인 듯 불안하다가도 무릉도원에 다다른 것처럼 몽환적이고 평온하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심장이 세게 옥죄이지만 몸은 마치 원래의 자리를 찾은 듯 편안했다. 이대로 세상이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편,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겨 나아가고 싶었다.

끝을 모르는 모순에 휩쓸려 무작정 아이를 품에 안은 동시에, 등허리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한차례의 격렬한 전율이 일었다. 쿤룬에게 있어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으나, 그때는 태연한 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서늘함이 가득한 아이를 안고 있음에도 온몸이 불에 덴 듯 뜨겁게 달아올랐고, 제멋대로 요동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척박한 땅을 오랫동안 헤매다가 한 방울의 물을 맛본 듯 참을 수 없는 갈증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의심할 여지 없는 각인이었다.


"태곳적부터 살아온 내게 각인이라니. 참으로 맹랑하기도 하지."


설핏 미소 지은 쿤룬이 속삭였다. 아이는 연신 웃음을 매달고 쿤룬을 바라봤다. 아이의 눈에 오롯이 자신만이 담겨있으니, 쿤룬은 엄습하는 애정과 탐욕에 몸을 잘게 떨었다. 내가 무언가를 이토록 욕심낸 적이 있던가. 곤륜산에서 억겁을 살며 다양한 이들을 만났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쿤룬에게 모든 생명은 똑같이 어여쁘고 안타까웠다. 요컨대, 피조물을 바라보는 조물주의 마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너만은 다른 걸까. 종종 다른 이들에게 각인과 운명의 짝에 대한 예찬을 듣기는 했지만, 그저 말로써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남의 이야기였던 것이 제 일이 된 순간의 짜릿함이란. 다시는 느끼지 못할, 그러나 결코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이 작고 여린 아이를 한평생 제 곁에 붙잡아두고 싶은 어두운 욕망이 저 아래에서부터 머리를 들이밀었다.

사실, 류선을 만나면 아이를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청할 작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할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아이가 제게 온 것이었다. 아이를 안고 곤륜산으로 돌아온 그때, 안타까움과 슬픔을 짓누르고 기쁨과 환희가 차올랐다. 아이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밑도 끝도 없이 치고 올라오는 이기심에 죄스러웠지만, 그럼에도 희열을 억누르지 못했다.


"벌써 이렇게나 욕심이 흘러넘치니 어쩌면 좋을까."


애정과 곤혹이 뒤엉긴 목소리가 그대로 가라앉았다. 동그란 눈을 깜빡인 아이가 쿤룬을 달래듯 그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쿤룬이 제 손가락보다 작은 아이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션웨이, 내 샤오웨이……."


쿤룬은 아이의 이름을 나직하게 입안에 굴렸다. 아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방긋 웃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자신이 선물한 이름을 받아 온전히 품에 들어왔으니, 쿤룬은 비로소 자신이 완벽해졌음을 느꼈다. 스스로조차 몰랐던 빈자리가 억겁의 시간 끝에 드디어 채워진 것이었다. 이 아찔한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자각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그의 가슴에서 끓어올랐다.









내용이랑 등장인물들 설정이나 관계 등등 좀 다듬고 싶어서 자기만족용으로 ㅅㅈㅈㅇ한다아아아아아아앜!!!!!!!! 션웨이 성이 잠기다 가라앉다 무겁다 침울하다 진흙 이런 뜻만 있어서ㅋㅋㅋㅋㅋㅋㅠㅠㅠ 이걸 어케 설정하지 하다가 호수 뜻도 있는 거 보고 냉큼 끼워맞춤ㅎ;;;

 
2024.01.28 23:29
ㅇㅇ
모바일
센세??? 센세!!!!!!!!!!!!!!! 꺄아아ㅡ으아아아으악
[Code: c57c]
2024.01.28 23:31
ㅇㅇ
모바일
내가 주기적으로 복습하는데 어? 어 익숙한 제목이 있어서 꿈인줄 알았는데 어? 내가 감히 센세의 재업에 첫댓이라니
[Code: c57c]
2024.01.28 23:39
ㅇㅇ
모바일
션웨이 이름 지어주는 장면ㅠㅠㅠㅠㅠㅠㅠ 너무 좋다ㅠㅠㅠ 션웨이랑 잘 어울려ㅠㅠㅠㅠ 센세가 앞으로 어떻게 얘기를 풀어줄지 너무 설레고 기대돼서 나 잠 못자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센세 내가 또 기다릴게ㅠㅠㅠ 사랑해 센세ㅠㅠㅠㅠ
[Code: c57c]
2024.01.29 01:01
ㅇㅇ
모바일
꺄아아아 자기전에 들어와봤다가 눈튀어나옴 ㅁㅊㅁㅊ 이거 꿈 아니지??? 내 센세가 재업으로 돌아오시다니!!!!!!!!!!!!
[Code: a16b]
2024.01.29 01:01
ㅇㅇ
모바일
세상에 심장떨린다ㅠㅠㅠㅠㅠㅠ 존좋ㅠㅠㅠㅠㅠ 센세 와줘서 고마워 사랑해ㅠㅠㅠㅠㅠ
[Code: a1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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