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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4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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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는 처음 타봐요!”
 

혹시라도 돌아가는 동안 아이들이 두 사람의 연애사에 관련된 질문(“엄마와 어떻게 만났어요?” “엄마가 왜 좋아요?” “누가 먼저 고백했어요?”)을 할까 긴장했던 오비완은 어깨에 힘을 풀었다.
 

천만다행으로 아이들의 관심은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 바로 차였다. 레아와 루크는 가죽 시트를 만지작거리다가 뒷좌석의 버튼을 정신없이 눌러대길 반복했다. 조수석에 앉은 아나킨 역시 마찬가지였다. 쌍둥이처럼 이것저것 만지지는 않아도 눈을 빛내며 실내를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다.
 

차에 집중한 세 명의 스카이워커를 흘긋 바라본 오비완이 한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퀸란이 추천한 차를 사길 정말 잘했다. 집과 학교를 오가는 것뿐인데 왜 굳이 좋은 차를 사냐며 내키지 않아 했던 그는 오랜 친구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차에 대한 지식이 조금만 풍부했다면 잔뜩 신난 아이들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오비완이 자신의 차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퀸란이 ‘안전하고, 튼튼하고, 빨라. 그래, 마지막 건 네게 필요 없겠지. 아무튼 이걸로 사.’라고 한 게 전부였다. 배기량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정보 같은 건 모조리 잊어버렸다. 어쩌면 아나킨이 나보다 이 차에 대해 잘 알지도. 오비완이 속으로 한숨을 폭 쉬거나 말거나, 차는 유연하고 매끄럽게 골목길 사이사이를 빠져나갔다.



 

도착한 스카이워커의 쿼터는 소박하고 따뜻했다. ‘가족’의 집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 속에서 네 명의 스카이워커는 단정한 옷을 입고 서로를 보듬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모조 벽난로 위에는 네 개의 크리스마스 양말이 걸려 있었고, 가구들은 낡았지만 반질반질 윤이 났다. 벽 이곳저곳에 걸린 사진이며 서랍장 위에 올라간 소품 하나하나까지 섬세한 손길이 닿은 티가 났다. 사랑의 온기가 넘쳐흘렀다.
 

잽싸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간 세 스카이워커와 다르게 오비완은 현관에 서서 머뭇거렸다.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가족의 집에 들어갈 때마다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에 휩싸이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심했다. 거짓말쟁이. 양심이 손가락질을 할 때마다 심장 부근이 욱신거렸다. 신발을 벗지 못하고 입술만 깨무는데 맨 뒤에 서 있던 아나킨이 고개를 돌렸다.
 

“안 들어오고 뭐 해요?”

“아….”

“…혹시 슬리퍼 같은 거 필요해요? 그런 고상한 건 없는데.”
 

아나킨이 눈썹을 찌푸리며 제 발을 빤히 바라봤다. 까만 양말만 신은 발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머물렀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을 바라보던 오비완이 허둥지둥 고개를 젓고 안으로 들어섰다. 새하얀 양말을 신은 단정한 발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나킨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 오비완이 다급히 손을 저었다. 슬리퍼가 없으면 다른 사람 집에 들어서지도 못하는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오해 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아니에요. 슈미… 생각을 한 것뿐이에요.”
 

스카이워커들은 그가 괜한 자학에 빠질 시간을 주지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오비완은 저녁 식사 준비에 동참했다. 쌍둥이가 제 키만 한 식탁 위에 씩씩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올려놓고, 발꿈치를 들어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면 아나킨이 능숙하게 음식을 받아 오븐에 데우고 크리스마스 식탁보 위에 접시를 올려놨다. 금세 집 안에 맛있는 냄새가 가득 찼다. 남는 앞치마를 맨 오비완도 옆에서 일을 도왔다. 아이들도 먹을 수 있도록 알코올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게 만든 뱅쇼를 데우고 꿀을 넣는데, 루크가 오비완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아저씨, 엄마처럼 말해도 괜찮아요.”

“엄마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루크와 시선을 맞춘 오비완이 되물었다.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한 그에게 레아가 또박또박 말했다.
 

“반말해도 된다고요. 아저씨는 우리보다 나이도 훨씬 많잖아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루크가 수줍게 웃었고 머뭇거리던 레아가 손가락을 비비 꼬며 말했다.
 

“대신 우리도 아저씨를 오비라고 불러도 돼요?”

“오비?”
 

오비완이 멈칫했다. 오비라니. 콰이곤이 허리를 숙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어린 시절에도 듣지 못한 애칭이었다. 지금의 내가 듣기엔 너무… 주책인 것 아닐까…. 그가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레아가 투정 부리듯 오비완의 손을 잡아당겼고 루크 역시 울상을 지었다.
 

“아나킨은 애니고, 루크는 루크고, 레아는 레안데!”

“세 글자는 너무 길어요!”
 

직감이 다시 속삭였다. ‘이 애들을 이길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니까.’ 간절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두 쌍의 눈 앞에서 오비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렇게 부르렴. 그럼 다시 한번 인사할게, 레아, 루크. 잘 부탁해.”

“나도, 오비!”

“오비!”
 

쌍둥이가 답싹 오비완에게 달려들었다. 품 한가득 아이들을 받아 든 채 오비완은 정말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이 안긴 곳에서부터 시작된 온기가 온몸을 데우고 심장을 간지럽혔다.
 

“애니도 오비라고 불러!”
 

오비완의 어깨에서 고개를 불쑥 내민 루크의 말에 으깬 감자를 오븐에서 꺼내던 아나킨이 코웃음을 쳤다.
 

“전 교수님이라고 부를게요.”

“사실 자기도 오비라고 부르고 싶으면서.”

“오비한테 화낸 것 때문에 머쓱해서 저러는 거예요.”

“레아! 루크!”
 

다 들리도록 속닥거리던 쌍둥이가 다시 오비완의 품속으로 숨었다.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린 아나킨에게 혀를 쏙 내미는 레아를 본 오비완이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식사는 훌륭했다. 카페의 디저트와 음료가 하나도 빠짐없이 맛있는 데서 예상은 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쌍둥이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도 요리가 얼마나 맛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오비완은 껍질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닭가슴살을 작게 잘라 루크에게 먹였고, 아나킨은 냅킨을 들어 오렌지 소스가 잔뜩 묻은 레아의 입가를 닦아줬다.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당근을 먹여보려던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식탁 건너편에서 고개를 젓는 아나킨을 보아하니 그건 슈미만이 가능한 일인 모양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당연한 수순처럼 케이크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 반짝거리는 딸기가 빼곡히 올라간 케이크를 바라보며 쌍둥이가 탄성을 내질렀다. 아나킨이 칼을 들어 케이크를 자르기 직전에 루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잠깐만!”
 

쪼르르 벽난로 쪽으로 달려갔던 루크가 빨간색 양말을 들고 달려왔다.
 

“이거 오비 줄게요.”
 

조그마한 손에 들린 양말이 불쑥 눈앞에 다가왔다. 눈송이와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자수가 정성스럽게 놓인 양말에는 또렷하게 ‘루크’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산타가 선물을 넣어줄 수 있도록 크리스마스 이브에 머리맡에 걸어두는 양말이었다.
 

“루크! 정말… 고마워.”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산타의 선물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오비완 역시 그런 시절을 지나왔고, 보육원에 새로 들어온 아이들이 산타의 진실을 깨닫고 실망하는 과정까지 전부 지켜봤으니까. 조용히 내리깔린 오비완의 속눈썹이 가파르게 팔랑거렸다. 그가 루크의 손을 살며시 감쌌다.
 

“하지만 이건 네 거잖니. 난 괜찮아.”
 

그러나 루크는 씩씩했다.
 

“아니에요. 산타 할아버지는 제가 여기 살고 있다는 걸 알고 계세요. 하지만 오비는 우리 집에 처음 왔으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집을 헷갈릴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줄게요. 저는 레아랑 같이 쓰면 돼요.”
 

어느샌가 ‘레아’라는 이름이 쓰인 초록색 양말을 손에 쥔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비완은 가만히 양말을 바라봤다. 손수 털실로 짠 듯한 양말이 보드랍게 손에 감겼다. 양말의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오비완은 힘겹게 숨을 삼켰다. 이건 그가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크리스마스 양말이었다. ‘산타의 진실을 깨닫고 실망한 아이들’에는 어린 오비완도 포함됐으니까. 일찌감치 현실을 깨달은 오비완은 많은, 아주 많은 것을 체념하며 자랐다.
 

이제 남부러운 것 없는 위치에 섰어도 삼십 대 중반의 교수 오비완 케노비에게 크리스마스용 양말을 선물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반나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이 가족은 그에게 너무 많은 걸 주고 있었다. 오비완이 아무리 애를 써도 갚을 방법이 없는 것들까지. 흔들리는 청회색 눈이 아이들의 손에 꼭 쥐어진 양말을 바라봤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지만 힘겹게 침을 삼키고 꽉 막힌 목에서 억지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고마워. 이런 크리스마스 선물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구나.”
 

진실이었다. 그리고 오비완 케노비가 눈을 감는 날까지 그의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일 것이다.
 

쌍둥이가 색종이 위에 오비라는 글자를 쓰고 양말 위에 테이프로 붙여 벽난로에 걸어놓는 동안, 오비완은 눈물을 참기 위해 고개를 연신 천장으로 들어올렸다. 아나킨은 그런 오비완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양말을 도로 걸어놓은 쌍둥이가 케이크 앞으로 돌아왔을 때, 오비완이 몸을 돌렸다.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나킨?”

“…케이크 먼저 먹고 있어.”

“응!”
 

고개를 끄덕인 쌍둥이가 앞다투어 포크를 들었다. 오비완은 미리 점찍어놨던 곳의 문을 열었다. 화장실이었다. 한 발짝 뒤에 서있던 아나킨은 왼쪽 눈썹을 들어올렸지만 별다른 말 없이 오비완을 따라 화장실에 들어왔다. 케이크에 집중한 아이들을 확인한 오비완이 화장실 문을 꼭 잠그고 낮게 속삭였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있나요? 혹시 오늘 일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겼을까 걱정돼서요.”
 

선물이 카페에 외롭게 남겨져 있거나 슈미가 퇴근길에 사 올 예정이었으면 어떡하지? 초조하게 아나킨의 입술만 바라보던 오비완에게 안도의 한숨을 쉬게 만드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에 잘 있어요.”
 

포스여, 감사합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오비완이 기도하듯 속삭였다. 하마터면 최악의 크리스마스이브가 될 뻔했다. 어머니를 잃을 뻔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저 천사들에게 산타마저 빼앗을 수는 없었다.
 

“…혹시 근처에 문을 연 장난감 가게가 있을까요?”
 

당연하지만 오비완은 아무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 차에 선물이 있긴 했지만 콰이곤에게 줄 책과 위스키였다. 둘 다 아이들에게 줄 만한 선물은 아니었다. 빈손이라고 그를 탓할 사람은 없었지만, 오비완도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적어도 그가 받은 마음의 십분의 일이라도 되갚고 싶었다. 아나킨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엄마가 내가 두 개씩 준비했으니까.”

“그래도….”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오비완은 불현듯 아나킨과의 간격이 너무 좁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신경 쓰는 데 급급해 지금까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각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이 멈췄다.
 

반 발짝이라도 가까이 다가갔다간 그대로 몸이 맞닿을 것 같았다. 사실 지금도 몸이 겹치지 않았을 뿐이지 지나치게 가까웠다. 침실은 너무 사적인 공간이라 화장실을 택했지만, 이곳은 다 큰 성인 남성 두 명이 나란히 들어서기엔 지나치게 비좁았다. 평상시의 차분하고 이성적인 오비완 케노비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만한 공간이었다.
 

창백한 조명 아래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나킨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든 오비완은 새삼스럽게 아나킨이 정말 잘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를 위협하듯 어둡게 가라앉은 눈을 하지 않은 아나킨은 정말로, 아니,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야?
 

황급히 눈을 내리깐 오비완은 아나킨을 올려다보지도,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 채 주먹만 꾹 움켜쥐었다. 자신의 숨결이 아나킨의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가다듬는 호흡 속에서 아나킨의 몸에서 나는 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시원한 남성용 스킨과 엔진 오일 냄새가 섞인… 오비완은 고장난 것처럼 덜컹거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 안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는 기분이었다.
 

“다음에 사다 줘요.”
 

오비완이 사과의 말을 하기도 전에 무심한 목소리가 툭 던져졌다. 사고를 정지한 뇌와 잠시 사투한 끝에 말에 내포된 의미를 파악한 오비완이 눈을 크게 떴다. 아나킨은 지금 당연하다는 듯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레아는 요즘 ‘프린세스 레아’ 시리즈에 빠져 있어요. 자기랑 이름이 똑같아서 더 좋다나. 루크는 ‘제다이 요다’를 좋아하고요. 광선검이나 인형을 사다 주면 좋아할 거예요.”

“…고마워요, 아나킨.”
 

잠시 오비완을 내려다보던 아나킨은 대답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나 오비완은 느낄 수 있었다. 아나킨은 자신을 스카이워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희미한 기쁨의 파도가 지나가자마자 묵직한 죄책감이 몰려 들어왔다. 조금 전의 부끄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대로 질식할 것만 같은 양심의 가책만 남았다. 아, 어떡하면 좋나요, 포스여….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 된 오비완은 세면대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차가운 물로 세수하고 나갔을 때 루크와 레아는 입에 생크림을 잔뜩 묻힌 채 마지막 남은 딸기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포크 두 개 사이에 치열한 딸기 공방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다름 아닌 아나킨이었다. 루크와 레아가 서로 투닥거리는데 정신이 팔린 사이 콱, 포크가 맹수처럼 딸기를 낚아챘다.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있던 아나킨의 포크가 번개처럼 딸기를 찍었다.
 

“애니!!!”
 

딸기가 아나킨의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쌍둥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모아 경악했다. 씩 웃으며 테이블을 벗어난 아나킨은 제게 달려드는 쌍둥이를 가볍게 붙잡아 양 옆구리에 끼더니 좁은 거실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스카이워커의 포드가 선두를 달립니다! 아, 레아 스카이워커와 루크 스카이워커가 치열하게 우승을 다투는군요!”
 

아나킨은 포드 레이싱의 유명 아나운서를 흉내 내며 레아와 루크를 번갈아 앞뒤로 흔들었다. 마지막 딸기는 깨끗하게 잊어버린 쌍둥이가 팔다리를 바동거리며 기쁨에 겨운 비명을 질렀다.
 

“더 빠르게, 애니!”

“내가 1등 할래!”
 

오비완은 웃고 말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고, 그가 한 거짓말이 떠오를 때마다 심장이 가시가 가득한 바닥을 구르는 기분이었지만 이 사랑스러운 가족을 앞에 두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 가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비!”
 

오비완을 발견한 루크가 짧고 통통한 팔을 쭉 뻗었다. 레아와 아나킨의 시선도 그에게 쏟아졌다.
 

“안아주세요!”
 

오비완이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세 명의 스카이워커에게 다가가자, 아나킨은 기꺼이 루크를 넘겨주었다. “애니보다 빠르게!” 꺄르륵 웃은 루크가 팔다리를 바동거렸다. “어림도 없지! 애니, 루크랑 오비보다 빨라야 해!” 레아가 아나킨이 팔꿈치를 붙잡고 흔들었다.
 

“명령대로 하죠, 공주님!”
 

레아를 꼭 붙든 아나킨이 순식간에 오비완을 앞질러 나갔다. “안돼! 오비, 달려요!” 오비완은 루크를 안은 채 아나킨의 뒤를 쫓았다.
 

쌍둥이를 한 명씩 붙든 오비완과 아나킨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인간 포드 레이싱을 벌였다. 하지만 좁은 거실을 무대로 한 레이싱은 오래가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책상에 앉아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긴 30대 후반의 정치학 교수는 젊고 힘이 넘치는 청년을 감당하지 못했다.
 

추월하고, 코스를 이탈하고, 레아와 루크가 서로를 붙잡는 반칙을 저지르고, 몸을 부딪치며 누가 1등이고 2등인지 모를 지경으로 구불구불 코스를 돌던 중 오비완이 먼저 바닥을 나뒹굴었다.
 

“오비랑 루크가 졌어! 벌칙! 벌칙!”
 

오비완이 품 안에 안전하게 안긴 루크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기도 전에 레아가 두 사람을 손가락질했다. 아나킨이 놓아주자마자 날듯이 달려온 레아는 온 힘을 다해 오비완의 옆구리와 루크의 등을 간지럽혔다. 오비완이 헐떡거리며 몸을 뒤틀고 루크가 높은 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사이 아나킨이 합류했다.
 

“항복!”
 

레아는 오비완의 항복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간지럽히고 간지럽혀지며 카펫 위를 구르던 네 사람은 오비완의 옆구리가 찢어질 것 같이 아파오기 시작했을 즈음에야 멈췄다.
 

“제발, 레아!”
 

일방적으로 간지럽혀지기만 하던 오비완이 제발을 외치며 뒤로 눕자, 남은 세 사람도 차례대로 바닥에 뒤엉켜 쓰러졌다. 나란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거친 숨소리만 사방에 가득했다.
 

“우리가… 이겼다!”
 

레아와 아나킨이 짝 하이 파이브를 했다. 온몸이 새빨개진 채 이마에 땀까지 맺힌 오비완과 다르게 세 명의 스카이워커는 호흡이 가빠진 것을 빼고는 억울할 만큼 멀쩡해 보였다. 루크가 다음엔 이기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레아가 달려들고 신난 쌍둥이가 바닥을 구르는데, 문득 오비완의 머릿속에 아래층이란 단어가 스쳤다.
 

“아, 아래층… 소리가….”
 

맙소사. 지금까지 아무도 벨을 누르지 않은 게 용했다. 무시무시한 층간소음을 유발했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오비완이 반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데 옆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나킨이었다. 픽 웃은 그는 곧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층간소음 걱정하는 거예요? 누가 교수님 아니랄까 봐.”

“층간소음은… 심각한… 문제예요….”
 

명료하게 말을 잇는 아나킨과 다르게 오비완의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정말… 심각할 수 있어요… 여러분에게… 안 좋은 마음이라도… 먹으면.”
 

힘겹게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며 간신히 문장을 끝마친 그에게 아나킨이 얄밉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래층엔 아무도 안 사니까. 이 낡은 건물에 사는 건 세 집뿐인데, 한 집은 우리고, 다른 두 집은 크리스마스 연휴에 여기 없을 거랬어요.”
 

우리도 그 정도 생각은 있다고요. 씩 웃는 아나킨의 대답에 오비완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잔뜩 화난 이웃들에게, 사과해야 할 일은 없으니, 다행이네요.”

“그래요? 난 코러산트 대학 정치학 교수님의 협상 실력을 보고 싶었는데.”
 

끊이지 않는 짓궂은 놀림에 오비완이 허탈하게 웃었다.
 

“내 혀가 얼마나 녹슬었는지 이미 보지 않았어요?”
 

오늘 무엇 하나 순탄하게 흘러간 게 없었다. 최초의 거짓말부터 시작해 해일처럼 몰려온 모든 일이 그를 깊은 바다로 밀어 넣었다. 발이 닿는 얕은 물가에 서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든지 제 발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순식간이었다. 불가항력적인 파도에 쓸려간 오비완은 잠겨 죽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요?”
 

짧은 대답과 함께 아나킨이 몸을 일으켰다. 그래요? 묘한 어감에 오비완이 아나킨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이미 등을 돌린 채로 일어나 있었다.
 

“자, 레아, 루크. 이제 양치해야지.”
 

쌍둥이를 차례대로 안아 일으키는 아나킨을 도우려 일어나면서도 맑은 청회색 눈은 아나킨의 뒤통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요? 무슨 뜻일까. 머릿속에서 조금 전 그 말이 다시 울려 퍼졌다.



 

*



 

경찰은 슈미를 공격한 터스켄 깡패들을 꼭 잡아넣겠다고 약속했다. 터스켄 때문에 불안정해진 치안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고, 보안과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경찰청장의 공식 발표가 바로 이번 주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범인 검거를 허술하게 할 리가 없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오비완은 코러산트의 공권력을 믿었다.
 

슈미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며 의사는 무사히 회복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남은 건 슈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즉 지금 스카이워커들과 오비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엄마를 걱정하며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는 건 아이들에게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아나킨과 오비완은 시선을 교환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화하면 필연적으로 슈미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몸으로 쌍둥이의 정신이 쏙 빠지도록 놀아주었다. 사실대로 서술하자면 체력이 다한 오비완은 진작에 나가떨어지고 아나킨이 쌍둥이를 전폭적으로 책임졌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어쨌거나 오비완은 최선을 다했다.
 

잔뜩 놀다 지쳐 잠든 루크와 레아는 그야말로 두 명의 아기 천사 같았다. 젖살이 통통한 뺨을 살며시 어루만진 오비완의 얼굴에 햇살 같은 미소가 서렸다. 쌍둥이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준 아나킨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루크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오비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온갖 소란과 웃음을 책임지던 아이들이 잠들자, 고요가 찾아왔다. 아나킨은 여전히 말없이 오비완을 바라보고 있었고, 오비완은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아나킨.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자고 가도 돼요.”

“그건 실례죠.”
 

오비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진짜 약혼자라면 기꺼이 스카이워커의 쿼터에 하룻밤 묵으며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을 것이다. 집을 청소해 주고 내일 아침에 맛있는 식사를 차려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는 가짜였다. 비록 아이들이 속고 있더라도 오비완마저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됐다.
 

쌍둥이라면 어떻게든 고집을 부리며 오비완을 떠나지 못하도록 막았겠지만, 레아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못지않게 고집이 센’ 아나킨은 빈말로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오비완이 뜻을 꺾지 않으리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혹은 진심으로 자고 가길 바라는 게 아닐 수도 있었고. 아나킨이 그를 달갑지 않아 한대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맑은 청회색 눈이 씁쓸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오비완의 짐작이 틀렸다는 사실은 금세 밝혀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치고 구두를 신는 동안, 쌍둥이가 잠든 침실 문간에 비스듬히 서서 오비완을 지켜보던 아나킨이 불쑥 입을 연 것이다.
 

“데려다줄게요.”

데려다주겠다고요?”
 

내가 잘못 들었나? 자기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오비완이 되물었다. 아나킨은 내가 뭐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했냐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밤이 늦었잖아요.”
 

맙소사. 이 어린 청년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난 십 대 소녀가 아니에요, 아나킨.”

“밤길은 누구에게나 위험해요.”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죠.”

“난 코러산트에 온 이후 쭉 여기 살았어요. 교수님보다 이 거리를 잘 알아요.”
 

오비완의 말을 무시한 아나킨이 패딩을 꺼냈다. 구두를 신다 말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오비완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보폭이 크고 걸음이 빨랐다.
 

“주차장까지 데려다줄게요.”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태도가 병원에서의 레아를 떠올리게 했다. 스카이워커의 앞에만 서면 자꾸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 같은 기분에 오비완이 난처하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 주변에 차를 댈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던 탓에 멀찌감치 떨어진 공영 주차장까지 걸어가야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래봤자 이십 분이나 걸릴까, 성인 남성을 데려다주겠다고 나서기에는 애매한 거리였다. 온갖 크리스마스 장식이 번쩍이며 도시의 밤을 밝히고 있는 탓에 그렇게 어둡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쌍둥이만 집에 두는 게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오비완은 집 열쇠를 챙기는 아나킨을 차분히 바라봤다.

아나킨의 말처럼 밤길은 누구에게나 위험하고, 위협은 예상치 못하게 닥쳐오는 법이었다. 아나킨은 오늘 거리에서 어머니를 잃을 뻔했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어머니를 지키고 쌍둥이 동생들을 돌봐야 했을 그가 또래보다 과잉 보호적으로 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비록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삼십 대 후반의 남자까지 보호하려고 들 줄은 몰랐지만….
 

나도 아나킨의 바운더리에 한 발이나마 걸쳤다는 의미일까. 다시금 죄책감으로 무거워지려는 마음을 애써 무시한 오비완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알겠어요, 아나킨. 고마워요.”



 

으슥한 새벽, 거리의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어느 집에서 들려오는지 모를 캐롤 소리와 끝나지 않은 크리스마스 파티의 흥겨운 소란이 잔잔하게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나킨은 시린 겨울 하늘 위로 입김을 뿜으며 캐롤을 흥얼거렸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거리를 걸었다. 부지런한 드로이드 덕에 눈은 깨끗하게 치워져 인도와 차도 사이에 잿빛으로 두껍게 쌓여 있었으나, 얇은 눈이 그새 내려앉아 걸을 때마다 신발이 철퍽거렸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바닥을 보며 걷던 오비완은 아나킨이 눈이 희게 쌓인 가장자리만 골라 걷는다는 걸 눈치챘다.
 

‘타투인은 사막 행성이에요. 뜨겁고 황량한 곳이죠.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밭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을 좋아하나 봐요.’ 언젠가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보며 슈미가 했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아이들’이 의미하는 건 루크와 레아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나킨의 투박하고 단단한 부츠가 눈을 밟을 때마다 사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나킨이 지나간 뒤로 길게 남은 흰 발자국을 보며 오비완은 생각에 잠겼다. 내일 눈이 남아 있는 공원에 아이들을 데려다주는 건 어떨까. 흰 눈밭에서 강아지처럼 뛰놀 스카이워커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기분이 들떴다.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 수 있도록 안 쓰는 목도리나 모자 같은 걸 가져다주는 것도 괜찮겠다. 고전적으로 당근이나 나뭇가지는 어떨까.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눈 집게도….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오비완이 미끄러진 건 순식간이었다. 눈이 투명하게 언 곳을 잘못 밟은 그가 뒤로 크게 넘어지며 바닥에 머리부터 박기 직전, 튀어 나온 손이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감쌌다.
 

“오비완!”
 

쌍둥이만큼이나 커진 눈이 오비완의 코앞에 와있었다. 그러나 뭔가를 의식하기도 전에 오비완은 허리를 부여잡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깜짝 놀란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윽….”

“괜찮아요?”
 

비틀거리는 그를 단단한 팔이 부축했다. 안정적으로 버티고 선 아나킨에게 매달려 끙끙거리던 오비완의 발이 다시금 미끄러졌다. “악!” “오비완!” 다행히도 이번엔 아나킨이 훨씬 더 빨랐다. 조금 전 간신히 오비완의 허리를 붙들었던 큰 손이 그를 번쩍 안아 들었고, 단숨에 위로 끌어올려진 오비완은 보도블록 대신 아나킨의 어깨에 코를 박았다.
 

헐떡거리며 아나킨의 패딩을 꼭 쥔 오비완은 공중에 붕 뜬 발을 애처롭게 허우적거렸다. 오비완을 들어 올린 자세 그대로 몸을 돌린 아나킨은 발을 내밀어 바닥이 미끄럽지 않은지 확인한 후에야 그를 바닥에 내려줬다. 바동거리던 발이 단단한 지면에 닿는 순간 비로소 오비완의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맙소사….”

“진짜 괜찮아요?!”

“덕분에 무사해요…. 고마워요, 아나킨.”
 

아나킨의 그림 같은 눈썹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허리를 움켜쥐고 끙끙거리는 오비완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오비완이 놀란 근육을 진정시키려 허리를 가볍게 주무르는 동안 아나킨은 그를 단단히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힘이 세네요.”
 

오비완이 머쓱함과 감탄을 담아 속삭였다. 아나킨은 180이 넘는 성인 남성이 레아나 루크 정도의 몸무게 밖에 나가지 않는 것처럼 들어올렸다. 볼썽사납게 미끄러지며 허둥거리는 오비완을 안정적으로 안아 들고는 조금도 밀려나거나 주춤거리지 않았다.
 

“날마다 무거워지는 어린애 둘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 저절로 이렇게 돼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아나킨에게 몸을 기댄 오비완이 헛웃음을 지었다.
 

“저라면 일주일도 못 가서 앓아누웠을 거예요.”

“교수님이야 뭐, 펜보다 무거운 걸 들어보신 적이 없을 테니까.”
 

미간을 살짝 좁힌 오비완이 아나킨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장난스럽게 왼쪽 눈썹을 찡그린 아나킨에게선 조금도 빈정거리는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기 넘치는 악동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섯 시간 동안 함께 있었는데, 이 2분 동안 더 다양한 표정을 본 거 알아요? 토끼처럼 놀라고 겁먹은 거, 부끄러워하는 거, 짜증 내는 거.”

“…짜증 낸 적 없어요. 그리고 전 여러분의 보호자잖아요, 아나킨. 어른스럽게 행동해야겠죠.”
 

토끼?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당황스러움을 무시하고 볼멘소리로 대답한 오비완이 다시 폭 한숨을 쉬었다. 더 나은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오비완 케노비? 연장자답게 엄격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킥킥거리는 아나킨을 마주하니 자꾸 입매가 허물어졌다. 강의 중에는 그렇게 잘 되던 표정 관리에 연신 실패하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세우는데 허리에 둔한 통증이 일었다. 웃음기가 서려 있던 오비완의 눈이 축 처지는 걸 본 아나킨의 입가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걸을 수 있겠어요?”

“당연하죠, 괜찮아요. 그냥 근육이 놀랐나 봐요.”

“…안쪽으로 가세요.”
 

아나킨은 오비완을 인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차도로 미끄러지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진심인가? 오비완은 대답 없이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도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나킨은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았다.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었고 허리를 감싼 팔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가락이 옆구리를 단단히 쥐자 오비완의 몸이 움찔 튀었다. 두껍지 않은 코트 위로 허리를 파고드는 손가락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몸이 경직됐다.
 

아나킨에게 어떤 불순한 의도도 없다는 건 알지만, 하지만… 스스럼 없이 만질 만한 부위는 아니었다. 연인도 아닌 사이에는 더더욱. 오비완이 머쓱하게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나킨, 걱정해 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

“안 돼요.”
 

아나킨은 오비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오비완은 뚝 잘린 말을 잇는 대신 제 허리에 감긴 아나킨의 손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푸른 눈이 오비완을 따라갔다.
 

“…혼자서도 걸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아.”
 

짧은 탄성을 터뜨린 아나킨이 허리에서 손을 뗐다. 작게 ‘미안해요’라고 중얼거렸지만, 오비완의 허리 주변에서 완전히 손을 떼진 않았다. 오비완이 넘어지면 언제라도 잡아둘 수 있도록 어정쩡한 공간을 사이에 둔 채 허공에 붕 떠 있었다.
 

오비완은 이런 걸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아직 첫 키스조차 해본 적 없던 풋풋한 어린 시절의 첫 데이트 상대가 딱 이랬다. 키만 멀대같이 클 뿐 숙맥이었던 상대는 손을 잡아도 될지 한참을 고민하며 식은땀이 밴 주먹만 쥐었다 폈다. 어색하게 손등만 스치던 체온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바보짓을 저지른 자신을 과잉보호하는 아나킨도, 이 순간 하필이면 그 기억을 떠올린 자신도, 모든 게 너무나 얼토당토않고 황당했다. 그리고 뭐가 문제냐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어린 청년이 너무 귀여워서… 오비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뻣뻣하게 굳은 아나킨이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지만, 오비완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가 간신히 웃음을 멈춘 건 아나킨이 입을 불퉁하게 내밀고, 한참이나 웃은 제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난 후였다. 이렇게 소리 내어 웃은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물론 조금 전 쌍둥이와 함께 있을 때도 실컷 웃었지만, 오늘을 제외하면 마지막으로 이렇게 웃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고마워요.”
 

쉬지 않고 웃느라 눈물이 고인 푸른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물끄러미 오비완을 바라보던 아나킨이 홱 시선을 피했다. 정면만 바라보는 날카로운 턱선 위로 잘생긴 광대뼈가(그렇다, 놀랍게도 아나킨은 광대뼈마저 잘생겼다)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던 오비완의 눈에 빨갛게 언 아나킨의 귀가 들어왔다. 타투인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그가 이런 추위에 익숙할 리가 없었다. 목도리를 풀어 줄까, 그건 너무 과한가, 고민하던 오비완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가 다시 넘어질까봐 허리 부근에 손을 올리고 걷는 아나킨 옆에서 도대체 어떤 행동이 과할 수 있을까.
 

“아나킨.”
 

목에 맨 목도리를 풀어 내밀자 아나킨이 미간을 좁혔다.
 

“얼굴이 빨개요.”

“…이건 추워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 괜찮아요, 교수님 하세요.”

“전 많이 안 추워요.”

“교수님은 지금 코트 입고 있잖아요. 전 패딩 입었고요.”

“하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코러산트에서 자랐고, 당신은 타투인에서 지내다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죠.”
 

받으라는 듯 다시 목도리를 내미는 손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아나킨이 푹 한숨을 쉬더니 몸을 숙였다. 당연하다는 듯 등과 어깨를 구부리더니 목을 수그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오비완이 멈칫했다. 습관일까? 슈미가 항상 목도리를 매어줬던 걸까.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인 아나킨의 곱슬곱슬한 뒷머리를 바라보던 오비완이 천천히 목도리를 그의 목에 둘렀다.
 

“고개 좀 들어줄래요?”
 

도톰한 장갑을 낀 손이 느릿하게 목도리를 매어주는 동안, 아나킨은 아무 말 없이 오비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나킨의 습관 중엔 말없이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도 있는 모양이었다. 푸른 눈이 이마부터 눈썹뼈, 코와 뺨을 따라 턱선까지 찬찬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시선을 마주하기가 힘들어서 오비완은 아나킨의 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목도리를 보기 좋게 묶는 데만 집중했다. 스스로 목도리를 매는 것과 타인에게 매어주는 건 제법 달라서 몇 번이나 헛손질해야 했다.
 

“됐다.”
 

마침내 목도리를 예쁘게 매는 데 성공한 오비완이 흐뭇하게 웃었다. 단정하게 다듬은 수염 아래로 빙긋 올라간 입술을 빤히 바라보던 아나킨은 다시 시선을 내려 제 목에 둘둘 감긴 목도리를 바라봤다. 흐뭇해하는 게 이해될 만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나킨은 다시 오비완의 허리 뒤에 어정쩡하게 손을 올리고는 몸을 돌렸다.



 





* 당연하지만? 아직 성애까지는 멀고 먼... 하지만 찬찬히 호감을 쌓아가는 중ㅋㅋㅋ 읽어줘서 고마워!

아나오비 헤이든유안

2024.02.14 22:46
ㅇㅇ
모바일
심장 녹는다ㅠㅠㅠㅠㅠ너무 좋아ㅠㅠㅠㅠㅠㅠ센세 진짜 최고야
[Code: 8bf1]
2024.02.14 23:28
ㅇㅇ
하 존나 재밌어 센세ㅠㅠㅠㅠㅠㅠ 내 심장도 간질간질하다.. 두근거려 아나킨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존나 궁금해ㅠㅠㅠㅠㅠㅠㅠ 데이트 같은데 아니라니 믿을 수 없다
[Code: 981b]
2024.02.14 23:52
ㅇㅇ
모바일
아아 ㅠㅠㅠ 보자마자 악 비명지르면서 개같이 들어옴 ㅠㅠㅠ너무 좋아 진짜 최고야... ㅠㅠㅠㅠ
[Code: 66c3]
2024.02.15 00:00
ㅇㅇ
모바일
세상에세상에
[Code: 0b25]
2024.02.15 00:01
ㅇㅇ
모바일
씨발!!!!!!!!!!!!!!! 개좋아서 책상뿌쎴음!!!!!!!!!!!!!!!!!!!!!!!!!!!!
[Code: ad63]
2024.02.15 09:39
ㅇㅇ
모바일
하 너무 구ㅏ여워 ㅠㅠㅠㅠㅠ 데이트다 데이트 ㅠㅠㅠㅠ 아나킨은 ㅁ진짜 뭔생각하고있을깤ㅋㅋㅋ 넘 커엽 ㅠㅠㅠ
[Code: 223b]
2024.03.28 07:25
ㅇㅇ
정말 어떻게 이 스카이워커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세 글자는 너무 길다고 곧바로 오비완의 별명을 만들어주는 루크랑 레아랑 자기 크리스마스 양말을 오비완에게 양보하는 루크 정말 사랑스럽다 ㅠㅠㅠ 인간 포드 레이싱 장면도 너무 좋아 ㅠㅠ 진짜 넷이서 엎치랑 뒤치락 하는게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어 ㅠㅠㅠㅠ 그리고 스카이워커가 이렇게 친절하고 따스하게 대해주니까..... 거짓말을 해버렸다는 오비완의 죄책감이 나한테도 느껴지는거 같았어 ㅠㅠ 양심의 가책이 자꾸 마음속 한 구석을 쿡쿡 찌르지만 스카이워커의 집이 너무 따스해서 자꾸 나도 미소를 짓게 되네 ㅋㅋㅋ
[Code: 8475]
2024.03.28 07:28
ㅇㅇ
아나킨이랑 오비완이 서서히 알게모르게 가까워지는 것도 간질간질하게 보기 좋다 ㅋㅋ 아나킨의 마음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다 큰 어른을 데려다주겠다고 나서고 도로가 텅 비었지만 오비완을 인도 안쪽에서 걷도록 만드는 걸 보면 뭔가 신경쓰여서 자기 나름대로 뭔가 해보려는 거겠지? 그리고 오비완은 정말 유죄다. 혀가 얼마나 녹슬었는지 봤다고 물어보는거.... 그리고 추위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고 생각해서 아나킨 목에 직접 목도리 둘러주는거..... 이렇게 해놓고 나중에 아나킨이 고백했다고 당황하거나 자기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진짜 유죄임
[Code: 8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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