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가 이렇게까지 안심할 건 아닌 게
왜 인테리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집에 십자가만 하나 덩그러니 붙어있는지 왜 동전만한 거울이 붙어있는지 러스트는 대체 그걸로 뭘 보는지 하나도 모름
이 사람 속이 생각보다 엄청 썩어있다는 걸 아주 모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잘 아는 것도 아니라서 종종 상식밖의 이야기나 행동을 할 때마다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왜 혼자 있는 게 당연한 게 된 건지 이만큼 가까워지고 나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는데
그래도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투성이라
전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황량한 그 집 벽에 붙은 코딱지만한 동전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어떻게든 화장을 해보려고 애를 쓰고 있음
원래 화장 잘 하지도 않지만 오랜만의 비번이고, 모처럼 동네를 벗어나기로 한 날이라 유통기한이 다 지나가는 립스틱을 꺼내들었는데
가방에 손거울 버젓이 있으면서 꼭 그 거울을 고집하려는 이유는 뭐 어떻게든 알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아무튼 립스틱은 다 삐져나왔고...
뒤에서 이미 진작에 나갈 준비 다 마친 채로 끙끙대는 거 보고 있던 러스트는 훌쩍 다가와서 엄지손가락으로 번진 립스틱을 닦아줬다
말랑한 살이 서늘한 손에 꾸욱 눌리며 밀려나는데 좋고 부끄러워서 닦아주는 내내 눈도 못 마주치고 살짝 떨었음
경력자다 이거야?? 뭘 이렇게 물 흐르듯이...!
순하게 얼굴 맡겨놓고 막상 멀어지고 나니까 자기만 엄청 떠는 것 같아서 좀 분하긴 함
차 타고 근교 식당에 나와서 밥 먹는데 이거 데이트 맞겠지 그렇겠지
근데 데이트라기에는 대화가 영
쉬는 날에 보통 뭐해요?
안 쉬어
... 안 쉬는 동안 뭐하는데
아는 걸 되짚어보고, 무의미한 것들에 목매다는 인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인생을 즐긴답시고 깔깔대는 걸 보던가... 책을 읽거나 하지
...... 나는 집에서 영화 보고, 책도 읽어요 술도 마시고 청소도 하고
안 쉬고 안 자는 인간한테 뭘 물어보면 다 대답이 저런 식인데 이게 솔직해서 좋은 건지 뭔지
“생각보다요, 생각보다 안 그런 것도 많아요. 이렇게 사람들이랑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고, 산책하는 것도 좋고요. 너무 혼자 있으면 좀 그렇잖아요. 내 말은, 마음을 좀 열어보라는 거지...”
“가치라는 건 상대적인 거지.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아. 굳이 원하지 않는 일에 품을 들일만큼 한가로운 성격이 못 되지. 난 혼자가 익숙하고, 그건 네 생각만큼 비참하지 않아.“
굳이 같이 있는 이 자리에서 혼자가 좋다, 같은 소리나 해대는 이 운둔형외톨이괴짜가 재수없고 좀 짜증남
할 말이 없기도 하고 저런 답변이 또 나온다면 데이트고 뭐고 집에 가고 싶을 것 같아서 입 다물고 감튀나 퍽퍽 쑤셔댔다
못 보던 옷이네
회사에 이런 옷 입고 갈 일이 없으니까요 (데이트 한다고 새로 샀다)
치마 불편해하는 줄 알았는데
불편한데 그냥 입었어요 왜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어서
저 새끼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아무래도 데이트라고 일주일 전부터 달력에 동그라미 쳐놓고 전날까지도 옷 고르느라 설레발 친 시간은 확실히 무의미했던 것 같다
이젠 짜증도 안나고 눈물까지 날 것 같아서 고개 푹 숙이고 있었을 듯 분위기 다 망쳤고 거봐 이거 사귀는 거 아니고 그냥 한 번 잔 거였는데 내가 오버한 거였잖아 아침 일찍부터 제모도 하고 별 짓 다했는데
포크질이 점점 느려져서 케첩 대신 눈물 찍어먹게 생겼음
“꼭두새벽부터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남의 집에 와서, 안 입던 옷을 입고 안하던 화장을 하고… 몇 없는 비번날에 이 멀리까지 나와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멕시칸 푸드를 먹고 있는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모를 수가 없지.“
굳이 안 그래도 다 안다는 뜻이야, 비
실컷 기분 잡치게 해놓고 한다는 말이 저랬으니 더 화낼 수도 없었을 듯... 결국 타코는 먹다말고 차에 타서는 근처 호숫가를 좀 걸었고 무신론자라면서 십자가는 왜 달고 있는지 물었다가 데이트 중에는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음
이런 소리를 듣고도 아직 정이 안 떨어진 거 보니 많이 좋아하나보지
이리저리 휘둘리며 눈물 콸콸이던 애가 무덤덤무채색인간 만나더니 얼굴이 활짝 피었다며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람이랑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 붙여놨더니 그게 어떻게 잘 합이 맞았는지 전보다 애송이 티 덜 난다고 칭찬 아닌 칭찬까지 받았음
형사랑은 정말 안 맞는다고, 매일 가슴 속에 사표를 가지고 다니던 두부는 파트너 잘 만나서 취조실에서 용의자 겁도 줄만큼 컸을 듯
요즘은 러스트랑 같이 안 들어가고 혼자 들어가기도 하는데 옆에서 보고 배운 게 있어 그런지 차분하게 곧잘 함
이제 울보도 아니고 쫄보도 아니지만 여전히 한 사람 앞에서는 홍시만큼 무르겠지
믿는만큼 울고 겁 많고 온갖 연약한 부분은 다 보여줬는데 나중에 그 믿음직한 남자가 지겨워죽겠다는 얼굴로 인생에서 뚝 떨어져 나가던 날에는 의외로 먼저 헤어지자고 했을 듯
딱히 놀라지도 않고 붙잡지도 않던 러스트는 ‘거 봐, 너도 못 버틸 거라고 했잖아’ 하는 얼굴로 순순히 떠났고
두부가 삶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며 점점 깎여나가다 결국 경찰 관두고 도망치듯이 떠난 시골의 낡아빠진 술집에서 십칠년만에 재회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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