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77233702
view 1218
2023.12.19 23:03




 

02. 매버릭

 

 

 

 

그의 삶은 하늘에 있다. 지평선조차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하늘위에선 그를 붙들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발치에 들러붙는 질척한 미련도, 세상에 홀로 남았다는 다소 미련한 원망마저도. 모두 내려놓고 그저 하늘과 자신, 그 뿐이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다. 따라서 젊은 날의 매버릭이 그 일탈을, 짧은 자유와 평화를. 엔진의 구동음과 허공을 가르는 전투기의 파공음을 사랑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뒷자리에 구스를 태우고 하늘을 누비며 시야 한가득 들이찬 푸른빛을 마주할 때, 그는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어떤 전율을 느끼곤 했다.

 

 

 

난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거야.

 

 

 

그렇게 하늘은 그의 집이 되었다. 삶이 되었고, 세상이 되었다. 적군의 위협도, 사고의 위험성도 그에게는 아무 장애가 되지 못했다. 설령 죽더라도 하늘 위에서 죽는 거니까. 그것조차 마음에 들었다. 죽음조차 하늘 위라는 것이.

 

 

 

그는 지상에 있을 때도 종종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텅 빈 집의 문 앞에서, 어머니의 무덤가 앞에서, 구스의 뒤편에 서 있을 때조차.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할 때, 그는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만은 그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그의 머리 위에 존재했다. 지상의 혼잡함과는 완전히 유리된 장소에서, 그저 고고히 흘러가기만 할 뿐이다.

 

 

 

그의 세계는 언제나 불변했다. 매버릭은 그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

 

 

 

 

 

구스와의 첫 만남은 빈말로나마 좋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더러운 뒷골목, 가로등마저 깨진 밤의 거리 위에서 그들은 처음 만났다. 시비가 붙어 멱살이 잡히고, 이죽거리는 그의 얼굴 앞에 솥뚜껑만한 주먹이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아마 그 주먹에 맞았으면 최소 몇 주 동안은 한 쪽 뺨에 큼지막한 멍을 달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구스가 타이밍 좋게 그들 사이를 말리지 않았다면 높은 확률로 매버릭은 구정물이 고인 쓰레기더미 사이로 던져졌을 것이다.

 

 

 

이봐, 괜찮아?’

 

 

 

남자를 내쫓고 술에 취해 고꾸라지는 몸을 떠받치며 구스는 물었다. 다정하고 안온한 그 품에 기대어 매버릭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머리가 팽팽 돌아 제대로 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걸을 수 있겠어? 집까지 데려다줄게.’

필요 없어.’

 

 

 

불퉁하게 답한 매버릭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서기 위해 노력했다. 세상이 물에 탄 듯 흐리게만 보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자 당연한 수순으로 속이 뒤집혔다. 벽을 부여잡고 헛구역질을 하는 그에게 구스가 다가왔다. 그는 등을 두드려주며 묵묵히 매버릭의 곁을 지켰다.

 

 

 

겨우 구역질이 멈췄을 땐, 더는 서 있을 힘조차 없어 담벼락에 등을 기대곤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무더운 여름의 밤바람이 고약한 주정뱅이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매버릭은 별조차 보이지 않는 새카만 하늘을 노려봤다.

 

 

 

그 무렵, 매버릭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그가 느끼기엔 그랬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현실에 대한 기대도 모두 처참히 꺾인 지 오래였다. 미망인이 된 어머니는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다 끝내 어린 그를 두고 떠나버렸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잃은 그는 각종 보호시설과 위탁가정을 전전했다. 학교는 지루했고 그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지겨웠다. 어느 정도 큰 매버릭이 매일 밤, 술집과 뒷골목을 전전하기 시작한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을 하는 일도 부기지수였다. 그는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 지 모른 채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생각 없이 사는 삶은 얼마나 편하던지. 그는 낮의 고민을 모두 털어버린 채 밤거리를 내키는 대로 부유하는 유령이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이 모두 원망스럽다가도, 그런 세상 속에 홀로 내던져진 그 자신의 존재가 우스웠다.

 

 

 

애달픈 자기연민만이 텅 빈 속을 헛헛하게 태웠다. 매버릭은 때때로 자신의 삶이 꽁지만 남고 모두 타버린 성냥 끄트머리 같다고 자조했다. 모든 게 지루했다. 모든 게 엿 같았고.

 

 

 

말없이 쓰레기더미 사이에 구겨 앉은 그의 곁에 구스 또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는 구정물이 고인 그 더러운 길바닥에 앉아 한참을 말없이 그의 곁에 있었다.

 

 

 

넌 왜 안가?’

 

 

 

참다못한 매버릭의 질문에도 그는 딱 붙인 엉덩이를 떼지 앉곤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레 대답했다.

 

 

 

그냥. 이곳이 좋아서.’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누가 구정물이 고인 쓰레기더미 사이를 좋아하겠는가. 냄새가 코를 찌르고 바지가 축축이 젖어 가는데. 그럼에도 구스는 그의 곁을 지켰다. 그의 대답에 당황한 매버릭이 말이 없자 그는 한참 후에 덧붙이듯 이어 말했다.

 

 

 

내 이름은 닉이야. 닉 브래드쇼.’

안 물어봤어.’

 

 

 

뾰족하게 나간 대답에도 구스는 딱히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주섬주섬 꺼내더니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줬다.

 

 

 

예쁘지? 내 여자 친구야.’

안 물어봤어.’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매버릭의 대답에도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전의 적막을 내쫓으려는 듯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나이, 취미, 여자친구에게 할 프로포즈 계획..밤의 적막을 채운 그의 목소리가 마냥 싫지만은 않아 매버릭은 불퉁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자신을 닉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매버릭과 같은 연배의, 같은 학교를 재학하는 동급생이었다. 그러고보니 이름을 들어본 것도 같다. 공부를 꽤 잘하고, 성격도 모나지 않아 학교 내에선 평판이 좋았다. 어느모로 보나 이곳에 죽치고 앉아 있을 유형은 아니었다. 혹시 내가 불쌍해 보이나? 일순 스친 생각이 꽤 그럴듯해서 매버릭은 미간 사이에 깊이 주름을 새기며 옆을 홱 돌아봤다.

 

 

 

구스는 뾰족한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는지도 모른 채, 귓가를 붉게 물들이며 여자 친구 자랑이 한창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 시선이, 그 밝은 얼굴이.

 

 

 

차마 자신을 동정하는 사람의 것이라곤 볼 수 없어서.

 

 

 

매버릭은 냅다 욕부터 박으려던 입술을 가까스로 멈추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관찰했다. 귓가에 쉴 새 없이 조잘되는 구스는 대체 언제쯤 그만둘 생각인지 모를 캐롤의 A부터 Z까지를 찬양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자식은 여자친구를 자랑하기 위해 제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굉장히 신빙성 높은 생각이 떠올랐다.

 

 

 

얼른 자리 잡아서 결혼하고 싶어.’

 

 

 

이 미친 자식은 대체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을 붙잡고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매버릭은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혼이니, 사랑이니. 그런 주제는 쥐약이었다.

 

 

 

결국 그 엿 같은 사랑이 자신을 이 세상에 목적 하나 없이 부유하게 만든 원인과도 같아서, 도저히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어디가?’

신경 꺼.’

 

 

 

최대한 차갑게 말하며 등을 돌려 걸으려는데, 옷자락이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매버릭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곤 아래를 내려다보자 약간 머쓱한 표정의 구스가 자신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이제 와서 이런 말하긴 좀 뭐한데..’

‘....’

‘...길을 잃었거든? 지하철까지 데려다주면 정말 고맙겠는데..하하..’

 

 

 

정말이지, 좋게 볼래야 좋게 볼 수 없는 첫 만남이었다.

 

 

 

 

 

-

 

 

 

 

 

구스와의 만남은 그 밤이 마지막이길 바랬지만, 삶이란 언제나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만은 않는 법이다. 그들은 학교의 교장실 앞에서, 간혹 매버릭이 얼굴도장이나 찍는 교실 안에서, 땡땡이를 치기 위해 지나가는 복도 한복판에서 마주쳤다. 그때마다 매버릭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외면했지만, 구스는 뭐가 그렇게 반가운지 그의 머리 꽁지 한 올이라도 보일라 치면 저 멀리서 !!’라고 소리치며 달려오곤 했다.

 

 

 

얼굴 한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성큼 다가오는 그 멍청한 녀석을,

그를 피해 달아나는 매버릭을 죽을힘을 다해 쫓아오는 그 바보 같은 녀석이,

 

 

 

더는 싫지가 않아서.

사실은 벅차오르게 반가워서,

 

 

 

 

 

-

 

 

 

 

 

우리가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를 따라 하늘을 날겠다며 RIO가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그 밤 만나지 않았더라면.

 

 

 

 

 

-

 

 

 

 

 

구스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때론 사고를 치고, 말썽도 부렸지만 기본적으로 그에게는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아직 구체적이진 않지만 어찌됐건 그에게는 확고부동한 목표가 있었기에 그는 최선을 다해 학생의 본분을 지키려 노력했다. 캐롤과 결혼하고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해 가정을 이루는 것. 남들이 보면 비웃을지도 모르는 소박하고 평범한 소망이 구스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좋으나 싫으나 구스의 곁에 있으면서 매버릭도 자연스럽게 미래를 상정하게 되었다. 새까만 도화지마냥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미래가 이상하게 그의 곁에 서면 자연스럽게 상상이 됐다. 구스의 프로포즈를 돕고, 그의 결혼식에서 박수를 치고, 일이 끝난 어느 날에는 함께 맥주 한 잔을 기울이는.

 

 

 

그것이 가능하려면 뭐든 먹고 살만한 직업이 있어야 한다. 녀석의 곁에서 도움이 되는 친구가 되고 싶었지 말썽을 일으키는 철부지가 되고 싶진 않았다. 매버릭은 그때부터 반쯤 놓았던 공부를 시작했다. 늦은 감은 있었지만 다행히 아주 멍청하진 않아서 학급 진도는 금방 따라잡았다. 그는 이해도가 빨랐고 암기력도 상당해서 공부가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무엇이 되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 끝에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하늘 위에서 무책임하게 죽어버린, 한때 그를 너른 품 한가득 끌어안던 단단한 체구의 사내를. 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은 하늘에서 죽어야만 했나. 오늘은 데이트가 있다며 캐롤과 함께 개구지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구스를 배웅하며 불현 듯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생각해야만 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거친 가죽 자켓의 촉감, 단단하고 너른 품 한가득 맡아지던 바깥바람, 뜨거운 체온 따위가 매버릭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전부였다. 목소리를, 하다못해 얼굴마저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떤 추억도 공유되지 못한 사내에 대해 남은 것은 그저 의문뿐이었다.

 

 

 

그에 반해 어머니는 어느 정도 기억이 났다. 여윈 뺨, 눈물이 말라붙은 창백한 얼굴, 텅 빈 동공. 산발이 되어 버린 머리카락들.. 슬픔이 그녀의 목숨을 앗았다.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다.

 

 

 

저 하늘에 대체 무엇이 있기에.

 

 

 

매버릭은 학교를 빠져나가다 말고 우뚝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랗고 높다란 하늘이, 그의 머리 위에 바다처럼 쏟아져 내렸다.

 

 

 

 

 

-

 

 

 

 

 

파일럿이 될 거야. 매버릭은 말했다. 정말 뜬금없는 고백이었지만, 구스는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하기만 할뿐, 여타 다른 말은 없었다. 그 한마디만 툭 던져버리고 제 갈길 가는 그의 뒤를 졸졸 따르며 구스는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럼 나는 네 뒤를 봐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네.’

?’

나는 너랑 같이 갈 거야.’

애냐? 따라오게.’

 

 

 

툴툴거리는 그의 귀 끝이 홧홧하게 붉었다. 구스는 개구지게 웃으며 매버릭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넌 존나 훌륭한 파일럿이 될 테니까. 네 뒤편에 앉아 하늘을 나는 것도 끝내줄 거 같거든!’

 

 

 

 

 

-

 

 

 

 

 

여러 해가 지나 그들은 끝내 파일럿과 RIO가 되었다. 유수와 같이 흐르는 시간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구스는 끝내 캐롤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그 프로포즈 준비 기간 내내 매버릭은 그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짜기도 했고, 그의 예행연습 파트너가 되기도 했다. 결혼식 때는 구스의 베스트맨이 되어 그들을 축하했고, 캐롤의 임신 소식에 함께 방방 뛰며 호들갑을 떨었으며, 아이가 태어난 날에는 구스를 대신에 머리가 쥐어뜯기기도 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셨고, 육아에 지친 캐롤과 데이트를 하라고 등을 떠밀곤 베이비시터를 자처하기도 했다. 할로윈이 되면 함께 사탕을 받으러 돌아다녔고, 밤중에 캐롤의 눈을 피해 브래들리와 함께 초코 케이크를 나눠먹기도 했다.

 

 

 

매버릭이 바라던 모든 행복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는 행복했다.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

 

 

 

 

 

언젠가 물은 적이 있다. 왜 내 곁을 떠나지 않았어? 왜 그 더러운 골목에 앉아 주정뱅이가 정신을 차리도록 기다렸어? 길이야 다른 사람에게 물었으면 됐잖아. 구스는 웃으며 농담조로 말하곤 했다.

 

 

 

네가 더럽게 잘생겨서.

 

 

 

때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냥. 심심해서.

 

 

 

그리고 매버릭은 그 모든 대답이 거짓말이란 걸 알았다.

 

 

 

 

 

-

 

 

 

 

 

사실 너는 그날의 나를 홀로 둘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구스는 끝까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기에 그는 가끔 빈 허공에 질문을 던진다. 답을 받을 수 없는 질문은 메아리가 되어 다시 그에게로 되돌아온다. 그 끔찍한 침묵은, 아마 그가 눈을 감는 그 날까지 채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매버릭은 아직도 그날의 일을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제트기류에 휘말린 기체가 곤두박질치며 조종이 불가능해지고 엔진이 모두 꺼지던 그 끔찍한 순간을. 구스가 다급한 음성으로 매버릭에게 자신 또한 핸들에 손이 닿지 않는다고 말하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를. 그 순간 자신을 압도하는 거대한 공포와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아득함을.

 

 

 

하늘에서 죽어도 좋을 대상은 자신이었다. 구스가 아니라.

 

 

 

그는 이곳에서 죽어선 안됐다. 적어도 이런 식의 개죽음은 구스에게 어울리는 죽음이 아니었다. 캐롤이, 그의 어린 아들이 지상에 남아 있었다. 살아야 했다. 살아야만 했다.

 

 

 

매버릭은 하얗게 졸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절박하게 외쳤다. 탈출하라고, 당장 여기서 탈출하라고. 그 목소리에 구스는 이를 악물고 손을 뻗어 비상탈출 핸들을 잡아당긴다. 캐노피가 분리되는 그 찰나의 순간, 매버릭은 때 이른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적어도 구스는 오늘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죽진 않겠구나.

 

 

 

죽음이란, 언제나 생각지도 않은 방식으로 다가와 삶을 빼앗아 간다는 것을.

그때의 매버릭은 몰랐었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구스는 낙하산에 매달려 축 늘어진 채 미동조차 없었다. 매버릭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아본다. 구스! 구스! ! 정신 차려!

 

 

 

그들은 짙푸른 바다에 빠졌다. 매버릭은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 늘어진 구스를 구하기 위해 낙하산을 조종해 그들 사이의 간격을 좁혔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낙하산 줄을 최대한 빨리 잘라낸 후, 그를 향해 헤엄쳐 나아간다.

 

 

 

제발, 제발. 신이시여. 닉만은 살려주세요. 절 대신 데려가도 좋으니 구스만은 살려주세요.

 

 

 

뺨을 타고 흐른 건 바닷물이었을까, 그 자신의 눈물이었을까. 짭조름한 물들이 입가에 흘러들어오고 너울 치는 파도에 발목이 잡혀 시간은 느리게, 혹은 빠르게 흘러간다. 이윽고 구스가 빠진 자리에 도착하자 매버릭은 바다 아래 가라앉는 그의 몸을 필사적으로 붙든다.

 

 

 

구스! 정신 차려!’

 

 

 

미동 없는 그의 몸을 붙들고 뒤집었을 때, 매버릭은 직감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구스를 부둥켜안고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스..가지 마..죽지 마..제발..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다 내 잘못이야....제발..’

 

 

 

널 살릴 수만 있다면, 저 하늘마저 버릴 수 있는데.

 

 

 

매버릭은 흐느끼며 때론 애원을, 때론 사죄를 입에 담았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가 울거나 화를 낼 때면 언제나 그의 곁을 지켜주며 그의 편을 들어주던 유일한 친구. 장난을 치거나 사고를 칠 때면 한숨을 쉬면서도 항상 함께 어울려주던 그의 짓궂은 친구가 더는 말이 없다. 그는 그저 눈을 감고 창백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누워있을 뿐이다.

 

 

 

구스..’

 

 

 

매버릭은 구스를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모든 일에도 여전히 무심히 흘러가는, 그가 사랑했던 그의 하늘을.

 

 

 

구스의 삶마저 삼켜버린 그 무시무시한 괴물을.

 

 

 

 

 

-

 

 

 

 

 

놓아주세요. 그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대위님.

 

 

 

구조요원의 필사적인 외침에 그때까지 힘주어 잡고 있던 구스의 몸을 놓았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

 

 

 

 

 

Talk to me goose.

 

 

 

 

 

-

 

 

 

 

 

아직 어린 그의 아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관을 향해 서 있었다. 캐롤은 눈물로 온통 젖은 얼굴로 브래들리의 한쪽 어깨를 잡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화창한 날씨였다. 찬란한 태양이 구스가 덮은 관의 뚜껑을 반짝이는 보석처럼 수놓았다. 매버릭은 캐롤의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았다. 짙은 그림자가 그의 발치에 고여 있었다.

 

 

 

저 관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은 구스가 아닌데. 내가 저기 있었어야 했는데.

 

 

 

어떤 현실감도,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구스가 저 관짝을 박차고 나와 사실은 모든 게 장난이었다고, 많이 놀랐냐고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이 이토록 생생한데. 그 웃음기 담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데. 모든 게 그저 꿈만 같았다. 지독한 악몽이라면 그저 죽어 깨어나기만 하면 될 텐데. 무더운 날씨임에도 손끝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숨을 모조리 앗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숨이 멎길 바랐다. 그를 따라가고 싶은 욕망을 참기가 어려웠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버티던 그의 손끝으로 무언가가 닿았다. 말캉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매버릭의 손끝을 부여잡았다. 숙인 고개를 옆으로 틀자, 불안에 잠식된 어린 얼굴이 보였다. 입술을 꾹 물곤, 불긋한 눈가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막만한 손을 가진 아이가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최선을 다해 매버릭을 부여잡고 있었다.

 

 

 

내내 부유하던 정신이 그제야 제대로 깨어났다. 꿈만 같던 몽롱함은 사라지고 현실이 그의 앞에 묵직이 내려앉았다.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눈물에 짓눌려 현실을 버티고 있는 아이가.

 

 

 

‘....’

‘...Mav. Don't go.’

 

 

 

아이가 무얼 알고 하는 소릴까. 관이 천천히 땅 속으로 가라앉는다. 모두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모두가 아래를 향할 때 아이만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매버릭을 올려다본다. 슬픔과 불안에 잠긴 두 눈을 마주보며 매버릭은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삼킨다. 미안하다고, 나 때문이라고. 그 말을 할 자격이 자신에겐 없었다. 대신 그는 제 손 끝에 겨우 닿은 아이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데일 정도로 뜨거운 체온이 생생히 느껴졌다.

 

 

 

‘...아무데도 안 갈 거야.’

 

 

 

울음에 먹힌 목소리는 그러나 아이에게 확신까지 주진 못했는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매버릭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난 절대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그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는지 아이의 고개가 이제는 흙이 덮이고 있는 검은 관으로 향한다.

 

 

 

내가 잘 지킬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만은 반드시 지킬게. 약속해, 구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7월의 끝자락에서, 매버릭은 다짐과도 같은 약속을 되뇌어본다. 그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사명이었다.

 

 

 

 

 

-

 

 

 

 

 

어떤 슬픔은 흘러가지 못한 채 가슴에 그저 고여만 있다. 시간이 흐르면 슬픔 또한 옅어진다고, 모두가 그렇게 말했는데. 매버릭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여전히 그는 가슴이 뜯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제 삶이 통째로 도려나간 것처럼 무얼 해도 텅 빈 가슴은 채워지지 않았다. 삶의 모든 의미를 잃은 채 그는 하늘 위를 부유했다. 이대로 너를 따라 간다면, 그렇다면 이 고통은 끝나지 않을까. 하늘을 비행할 때마다 드는 순간적인 충동에 몸을 맡기지 않은 것은,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존재했던,

 

 

 

! 또 냉장고에 음식이 하나도 없어?!’

 

 

 

네가 있었기에.

 

 

 

 

 

-

 

 

 

 

 

아이는 구스와 닮은 듯 하면서도 닮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구스보다 더 깐깐했고 구스보다 더 잔소리가 심했다. 텅 빈 냉장고를 채워놓으며 쉬지 않고 떠드는 걸 보면 구스의 유전자가 확실히 그 속에 담겨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가 조금만 놀리면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팩 토라지는 건 구스를 닮지 않았다. 구스는 그의 그 어떤 말에도 눈썹 하나 까닥 안했다. 자신이 했으면 모를까.

 

 

 

! 듣고 있어? 아무리 맵이라도 이건 심하잖아!’

으응. 괜찮아, 괜찮아.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다 알고 있어.’

그런 바보 같은 변명으로 상황을 피하려 들지 마! 맵은 어른이잖아!’

맞아. 나는 어른이지. 그러니까 괜찮아.’

 

 

 

매버릭은 길쭉한 소파에 자신의 나른한 몸을 뉘이며 되는대로 지껄였다. 허리까지 올랑말랑한 꼬마 브래들리는 나름대로 화가 났다는 표시로 두 손을 허리에 갖다 대곤 야물딱진 표정을 지었다.

 

 

 

이건 너무한 거야! 아무리 맵이라도 너무했어!’

 

 

 

소리치며 조막막한 엄지 손가락으로 매버릭의 책상 비슷한 것을 가르키는 아이의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분기탱천한 그 목소리에 흘끔 책상 위를 본 매버릭은 온갖 잡동사니와 먹다 남은 피자 조각, 텅 빈 과자 봉지 따위가 뒤섞여 책상이라기 보단 쓰레기통에 한없이 가까운 몰골에 침음을 삼켰다.

 

 

 

그래도 나름 쓰레기 따로, 잡동사니 따로, 중요한 물건 따로 분류는 해 두었는데..속으로 투덜거린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브래들리가 화내는 것도 이해가 간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 나름 열심히 그 고사리 같은 손을 움직여 청소를 해놓고 갔는데 다시 왔을 때 이전보다 엉망이 되어 있다면 누구든 화가 날 테니까..

 

 

 

전날 밤, 오래간만에 한껏 들이마신 술의 여파로 아직까지 숙취가 남은 매버릭이 지끈거리는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꾹 지압하며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포동포동한 양 뺨이 파르르 떨리는 꼴이 제법 귀여워, 매버릭은 귓가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아이의 질책에도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웃어?!’

하하, 그치만, 네가 너무 귀여운걸!’

 

 

 

말하며 아이를 잡아끌어 제 위에 눕힌 매버릭이 브래들리의 얼굴을 부여잡고 얼굴 여기저기에 버드키스를 날렸다. 말랑한 양 뺨과 이마를 부지불식간에 빼앗긴 브래들리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익었다.

 

 

 

이거 놔! 이 바보야!’

 

 

 

버둥거리며 벗어나려는 작은 몸을 한껏 끌어안고, 매버릭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싫어. 평생 이러고 있을 거야. 그 진중함이라곤 손톱 끄트머리도 없는 목소리에 아이가 다시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바보! 진짜 진짜 싫어!’

진짜? 너무하네. 삼촌은 브래들리를 하늘만큼 땅만큼 좋아하는데. 안되겠다. 삼촌 다시 좋아질 때까지 오늘은 계-속 이러고 있어야겠다.’

 

 

 

꼭 끌어안은 손에 힘이 풀릴 생각이 없자 씩씩거리며 버둥거리던 브래들리의 움직임도 점점 멎어갔다. 이윽고 잠시 바르작거리던 아이가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쉬며 침묵했다.

 

 

 

작고, 따뜻하고, 포근하고, 어느 정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아이를 끌어안고 있으려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던 매버릭이 까무룩 잠에 들려고 할 때, 품에 있던 아이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맵은..청소도 못하고, 빨래도 못하고, 심지어 요리도 못하잖아. 그러다가 미이라 되면 어뜨케? ..쫄쫄 굶다가 아프면 어뜨케? 그래서 화낸 거야. 사실 안 싫어해..’

 

‘....’

맵 가지마. 어디 가면 안 돼..’

 

 

 

아이는 칭얼거리며 매버릭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묵직한 체온에, 매버릭은 일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익숙한 죄책감이 가슴을 아프게 죄어들어 갔다. 울컥 치솟는 감정의 편린이 그의 목구멍을 콱 틀어막았다.

 

 

 

브래들리는 간혹 매버릭에게 가지 말라고 애달프게 애원하곤 했다. 그를 부여잡는 손길은 솜털처럼 가볍고 연약했지만 그를 붙들 충분한 닻이 되기는 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브래들리의 등을 쓸어내리며 매버릭은 어떻게는 평정을 가장했다. 언제나처럼 장난스런 어조로 그는 브래들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럼 우리 브래들리가 나중에 커서 삼촌이랑 같이 살면 되겠네?‘

?’

그래서 삼촌한테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요리도 해주고. 삼촌 미이라 안 되게.’

그때까지 어디 안가?’

 

 

 

매버릭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으며 칭얼대던 아이가 매버릭의 말에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매버릭은 매끄럽게 미소 지으며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 계속 같이 있을게. 우리 꼬마가 싫다고 할 때까지.’

나 안 싫어! 계속 같이 있을래!’

 

 

 

아이가 잔뜩 신난 얼굴로 자진해서 매버릭을 꽉 안았다. 품 안에 묵직하게 들어오는 그 기분 좋은 무게감에 내내 무겁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걸 느끼며,

 

 

 

매버릭 또한 웃으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

 

 

 

 

 

모든 나날을 기억한다. 너의 10. 너의 12. 너의 15. 너의 17살의 모습을. 허리까지 겨우 오던 네가 점점 커가며 가슴 아래로, 어깨 언저리로 성큼 커가는 모습을. 말갛게 웃는 환한 얼굴과 심통이 잔뜩 들이찬 삐진 얼굴을. 캐롤 몰래 살짝 빠져나왔다며 개구지게 웃는 모습과 거짓말을 할 때면 팔짱을 끼는 버릇을. 손안에 들이차던 조막만한 손이 어떻게 커 가는지, 변성기가 지난 너의 목소리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넌 내 기쁨이었어. 내 유일한 삶의 이유였고.

 

 

 

나의 구원이었어.

 

 

 

 

 

-

 

 

 

 

 

깨질 듯한 두통에 절로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가물가물한 시야 사이로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매버릭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멀지 않은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니까..사고가 있었다. 그 자신의 사고는 아니었지만 빠르게 추락하는 기체 속 동료를 깨우기 위해 지상을 향해 속력을 높였고, 제때 상승하지 못해 기체를 포기하고 탈출을 감행했다. 빙글빙글 원을 돌며 떨어지는 동안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섬뜩한 불안과 함께 정신을 잃었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살았구나. 그 짤막한 깨달음이 어쩌면 아쉬움과도 닮아 있어 그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괜찮아졌다 생각했는데 충동은 스스로도 모르는 새 파도처럼 밀려와 발치를 적시기 일쑤였다. 괜찮아. 나에겐 아직 브래들리가 있잖아. 구스를 쏙 빼닮은, 그 사랑스러운 아이가..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매버릭은 애써 뜬 눈꺼풀을 다시 감아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뒀다. 어둠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아이의 얼굴이 막을 새도 없이 떠올랐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비슷한 날이었다. 매버릭은 아이에게 아쉬움의 시간을 덜어주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복귀소식을 늦게 알려줬다. 사실 아이를 위해서라기보단 그를 위해서인 것 같기도 했다. 아닌 척, 괜찮은 척 하지만 그가 떠날 적마다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껏 울상을 짓는 그 표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떠나는 내내 걸음을 멈추고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드는 그 눈빛을 조금이나마 덜 보고 싶어서. 어른이지만 비겁한 그는 아이를 위해서라는 어설픈 변명을 들먹이며 스스로를 속였다.

 

 

 

그 날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갑작스런 복귀명령은 매버릭 또한 예상하지 못했지만 아이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괜찮은 척, 대수롭지 않게 그를 보내줄 거라 생각했다. 차 안에서 툴툴거리며 창문 밖을 내다보는 아이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이변이 생긴 건 아이가 차에서 내려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때였다. 허리를 수그려 차 안을 살피는 아이가 입을 달싹이다가 망설이듯 덧붙였다.

 

 

 

꼭 무사히 다녀와야 해.’

 

 

 

초가을이었다. 해질녘의 붉은 노을이 푸른 하늘을 집어삼켜 세상이 마치 불길에 휩싸이듯 보였다. 물감이 번진 듯 세상의 색에 물든 아이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애정과 그리움, 불안과 슬픔에 잠식되어 있었다. 눈가가 붉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 얼굴에 매버릭의 심장이 불안하게 술렁였다. 어떻게든 그 표정을 지우고 싶어서 그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말을 했다.

 

 

 

. 다녀올게.’

 

 

 

매버릭의 그 단순하고 확정적이지만 결코 약속할 수 없었던 작별인사에 불안에 물든 표정이 서서히 사그라 들었다. 한결 안심한 아이는 고요하고 잠잠한 눈빛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 될 뻔했다. 매버릭은 다시 눈을 뜨며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가 다녀온다는 단순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는 것에는 나름의 여러 가지 합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개중 가장 비중이 큰 이유는 그가 그 말을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였고, 군인이었다. 단순한 훈련만으로도 사망이나 부상을 당할 위험이 꽤 높은. 하늘 위를 마하의 속도로 가로지르고 미사일을 탑재한 전투기를 모는. 그래서 매버릭은 부대에 복귀하기 전 의식적으로라도 그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내거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싫었다. 끝내 제 유품을 손에 쥐게 될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해지고 싶진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주구장창 천장을 노려보는 그의 귓가에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힐끔 옆을 돌아보니 캐롤이 지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괜찮아? 몸은 좀 어때?’

머리가 좀 아픈 것만 빼면 쌩쌩하지.’

말은 잘해. 너 이번에 정말 큰일날뻔 했던 거 알아?’

미안..’

 

 

 

캐롤이 짐짓 엄한 소리로 말하며 침대 옆에 놓인 방문객용 의자에 앉았다. 피로하고 지친 사람 특유의 우울한 기색이 캐롤의 몸 주위를 맴돌았다. 살살 눈을 굴러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매버릭이 바싹 마른 입술을 열어 말했다.

 

 

 

네가 누워야 할 것 같은데.’

말도 마. 네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랬다고.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어. 이러다 심장마비 걸릴 것 같아.’

미안..’

 

 

 

결국 같은 말로 대화를 끝낸 매버릭이 더는 입을 열지 말아야겠다는 나름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캐롤이 덧붙이듯 말했다.

 

 

 

브래들리도 왔어.’

어디?’

 

 

 

아직 힘이 들어오지 않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 하자 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눌러 침대에 눕힌 캐롤이 불퉁한 목소리로 답했다.

 

 

 

너 꼴도 보기 싫대.’

‘...?’

졸업식도 안 오고, 선물도 안 사오고, 심지어 다치기까지 해서. 나중에 멀쩡해지면 만나겠대. 지금 네 꼴 보면 화만날거 같다고.’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매버릭은 잠시 시무룩하게 캐롤의 얼굴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많이 화났어?’

누구? ? 브래들리?’

둘 다..’

 

 

 

그 처연하다면 처연하고 애달프다면 애달픈 표정에 그때까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가가 끝내 허물어진 건 캐롤의 잘못이 아니었다. 누구든 매버릭을 오래 본 사람들은 그랬다. 그는 미워할 수 없는 사내였고, 오래도록 화를 낼 수 없게끔 만드는 사내였다.

 

 

 

나는 좀 풀렸고, 브래들리는 네가 멀쩡해지면 풀릴 거고.’

빨리 나아야겠네..’

그래. 빨리 나아. 넌 환자복이랑 안 어울려.’

 

 

 

캐롤의 농담에 그제야 얼굴이 조금 풀린 매버릭이 슬쩍 미소 지었다. 잠시의 평화로운 정적이 둘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캐롤은 피로한 안색을 애써 지우며 이불보를 움켜쥔 매버릭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걱정하게 만들지 좀 마.’

미안해.’

사과는 그쯤이면 됐어. 정 미안하면 나중에 내 부탁 하나 들어주던가.’

 

 

 

장난스레 덧붙인 말에 매버릭의 번듯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부탁? 읊조린 그 목소리에 망설임을 읽은 캐롤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들어주기 싫어?’

아니. 그건 아니고..이상한 것만 시키지 마.’

 

 

 

결국 고개를 끄덕인 매버릭이 허겁지겁 덧붙인 당부에도 캐롤은 짓궂게 웃기만 했을 뿐이다. 그 웃는 모습을 보며 매버릭은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브래들리도 왔다면 좋았을 텐데. 눈길이 자연스레 병실 문을 향했지만 꽉 닫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컸을까? 많이 화났을까? 불안하게 술렁이는 감정을 억누르며 매버릭은 다시 캐롤에게 시선을 돌렸다. 허전한 손끝이 움찔 거렸다. 누군가 이 손을 부여잡고 온기를 채워졌던 것만 같았는데..매버릭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자꾸만 닫힌 문을 쳐다본다.

 

 

 

괜찮을 것이다. 어찌됐건, 그는 돌아왔으니.

 

 

 

 

 

-

 

 

 

 

 

너는 언제나 내가 금방이라도 널 떠나버릴 것처럼 불안해했지만,

나는 언제나 네가 있는 장소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어.

 

 

 

왜냐하면 나는 널,

 

언제나 너만을.

 

 

 

 

 

-

 

 

 

 

 

시간이 지나 아이가 커가면서 변한 건 외견만은 아니었다. 아이는 점점 또래보다 더 조숙해져 갔고, 성숙해져 갔다. 아이가 아이답지 않게 깊은 눈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매버릭은 심장이 난도질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역시 자신으로는 모자란 걸까? 기실 그는 아버지를 가져본 적 없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아버지의 역할 같은 건 잘 몰랐다.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아마 많이 부족했던 거겠지. 매버릭은 초조한 심정으로 제 주위를 둘러보며 자녀를 가진 동료들을 꼽아봤다. 그러는 와중 걸린 게 아이스맨, 톰 카잔스킨이었다. 매버릭은 틈만 나면 그에게 전화해 브래들리의 또래보다 조숙한 반응을 어떻게 처리해 버려야 하는지를 묻고, 묻고 또 물었다. 심지어 새벽까지 전화를 해대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례한 행동에도 톰은 화를 내긴커녕 그를 살살 달래며 말했다.

 

 

 

미첼. 그 앤 그냥 그게 성격인거야. 물론 아버지의 부재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버지를 잃은 모든 사람들이 또래보다 조숙하거나 성숙해지는 건 아니야. 너도 그걸 알고 있잖아. 불안해하지 마. 브래들리는 그저 남들보다 착하고 어른스러운 것일 뿐이니까.’

 

 

 

매버릭은 톰의 말을 듣고 말 그대로 부아가 치밀어 화를 내듯 전화를 끊어 버렸다. 물론 이게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성인이 할 법한 짓이 아니란 건 안다. 망할 화풀이라는 것도 알고. 하지만 매버릭은 일생 감정에 휘둘리며 제멋대로 살아왔다. 이제와 행동양식이 손바닥 뒤집듯 바뀔 리는 없지 않은가? 타인에게서의 조언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깨달은 매버릭은 그때부터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꿨다. 그는 일부러 더욱 크게 장난을 걸고, 철부지마냥 여기저기 사고를 쳐댔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친구에게 하듯 어깨동무를 하고, 초크를 걸고, 때론 별 거 아닌 일에 심통을 부리며 마치 그 자신이 격변의 사춘기를 다시 한 번 맞아들인 듯이 굴었다. 캐롤은 이마를 짚으며 그를 외면했고, 오직 브래들리만이 철없는 삼촌의 뒤치다꺼리를 묵묵히 수행했다. 그리고 오늘, 매버릭은 그 결과를 한 손에 붙들곤 두 눈을 부릅떴다.

 

 

 

[. 양말은 뒤집어서 놓지 말라고 했잖아. 흰 옷은 책상 옆 바구니에. 다른 건 그냥 아무데나 던져 놓으면 내가 알아서 치울게. 약장이랑 훈장 첫 번째 서랍에 있는 거 알고 있지? 순서는 내가 외웠으니까 행사 나가거나 복식 갖춰 입어야 하는 날 있으면 잊지 말고 꼭 말해줘야 해. 내가 그 전날에 순서대로 맞춰 놓을 테니까. 유통기한 지난 우유랑 곰팡이 핀 피자는 내가 버렸어. 고지서는 두 번째 서랍에 넣어놨고 일단 급한 건 내 돈을 떼웠으니까 나중에 기억나면 줘.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메모 남겨놔. 도착하면 연락 줘.

 

- 브래들리-

 

P.S. 더운데 무스탕 입고 돌아다니지 마. 또 저번처럼 더위 먹어서 헥헥 거려도 안 도와줄거야.]

 

 

 

‘....’

 

 

 

...이건 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매버릭은 장장 7개월간의 파병 끝에 돌아온 자신의 집과도 같은 격납고에서, 줄줄이 늘어놓은 브래들리의 애정 어린 메모조각을 부여잡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급작스레 몰아닥친 혼란스러움에 속절없이 빠져들어 살짝 넋이 나간채로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아버지 없이 자란 그라지만 이게 지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란 것 정도는 알았다. 누가 봐도 아이가 어른을 챙기는 모양새지 않은가? 그가 유도한 방향과 정반대로 치닫는 상황에 덜컥 겁이 난 매버릭이 자연스럽게 아이스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무슨 일인지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는 그의 뒤로 묵직한 발걸음이 내려앉았다.

 

 

 

.’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어딘가 낯선, 하지만 또 어딘가는 익숙한 그 목소리에 매버릭은 홀린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컸다. 어깨는 더 널찍하게 벌어졌고. 이제는 얼추 자신과 눈높이가 맞았다. 귓가에 울리는 연결음이 끝내 끊어지고, 브래들리는 앳된 사내의 모형을 갖춘 채 매버릭에게 성큼 다가왔다. 부드럽게 웃는 그 미소가 구스와도 캐롤과도 닮지 않았다. 그건 그냥 브래들리였다. 그가 사랑한 작고 사랑스런 꼬마.

 

 

 

왔어?’

‘....’

나 키 많이 컸지? 맵이 없는 동안 성장판이 엄청 아프더니 하루아침에 자라더라고..엄마도 아직까지 좀 낯설어 하긴 해.’

‘....’

‘...안 배고파? 이럴 줄 알았으면 음식이라도 가져오는 건데.’

 

 

 

브래들리가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매버릭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귓가가 홧홧하게 붉어진 모습이 매버릭의 시야에 잡혔다. 푸른 핏줄이 돋은 손등과 팔뚝이 브래들리가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렸다.

 

 

 

..?’

...’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매버릭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시야가 같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는 걸 애써 외면하며 그는 브래들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 아닌 줄 알았어..깜짝 놀랐잖아, kid!'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구석진 곳까지 와.’

 

 

 

정말로 놀랐다. 한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여서. 아마 계속 뛰는 이 심장은 그래서일 테지. 매버릭이 애써 어색함을 떨쳐내며 성큼 다가온 브래들리의 몸을 반갑게 껴안았다. 한 품 가득 들이찬 뜨거운 체온이 가슴팍에서 느껴졌다. 어째선지 발갛게 상기되는 제 얼굴을 느끼며 매버릭은 브래들리의 어깨를 손에 잡은 채 몸을 떼어놓곤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 맵도 잘 지냈나 보네.’

나야 뭐, 여전하지!’

 

 

 

과장되게 웃으며 등을 두드리는 매버릭의 모습에 브래들리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그 큼직한, 이제는 이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큰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 , 여기 먼지 붙었어. 그 눈에 한가득 담긴 애정에 매버릭의 몸이 일순 굳었다. 넘칠 것처럼 찰랑이는 따스한 눈빛이 한낮의 햇볕처럼 그를 샅샅이 살펴본다.

 

 

 

, 다친 곳은 없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매버릭은 새하얗게 굳은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다정한 얼굴을. 그 부드러운 미소와 따스한 애정을. 벅찬 행복과 숨길 수 없는 갈망을.

 

 

 

짐 가방은 침대 아래 둬. 내가 나중에 와서 정리해 줄게.’

 

 

 

.

 

 

 

오늘은 우리 집 가서 저녁먹자.’

 

 

 

왜 몰랐을까.

 

 

 

 

 

-

 

 

 

 

 

오늘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겨우 브래들리를 내쫓은 매버릭이 잔뜩 지친 얼굴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사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서 있을 힘도 없었다는 게 맞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서부터 아주 먼 과거에서까지의 모든 나날을 돌이켜 봤다.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 그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눈가를 쎄게 짓누르며 이를 악물고 과거를 파헤쳤다. 자신의 잘못을,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전시하여 난도질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건 브래들리의 잘못이 아냐. 이건 모두 내 잘못이야.

 

 

 

차라리 모든 잘못을 본인에게 돌리는 게 나았다. 아니, 그게 맞았다. 그의 잘못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브래들리 또한 휩쓸린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바로잡으면 된다.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온몸이, 이 빌어먹을 상황이 감당하기 어려워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생각을, 생각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눈물만 나오려고 한다. 누구에게라도 의지하고 싶은데, 기어코 생각해내는 건 브래들리다.

 

 

 

발치 아래로, 구겨진 메모조각이 나풀거리며 떨어진다. 동시에 떨어진 눈물방울들이 그 옆을 수놓는다.

 

 

 

9월의 어느 날이었다.

 

 

 

 

 

-

 

 

 

 

 

우리, 대화 좀 해.’

 

 

 

핸드폰 너머, 먹먹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캐롤의 잔뜩 지치고 피로한 음색에 그때까지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던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운다. 요 며칠간 제대로 자지 못해 잔뜩 쉰 목소리가 가까스로 흘러나온다.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그 심각한 어조에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손에서 땀이 솟구친다. 설마, 혹시. 알았을까? 퍼뜩 든 생각에 그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 입 안을 짓씹는다. 도망칠 수 없다. 적어도 캐롤만큼은, 알아야 한다.

 

 

 

그래. 알았어. ...내가 갈까?’

아니. 나 지금 도착했어.’

도착했다고?’

 

 

 

의문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격납고의 문이 듣기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며 열린다. 매버릭은 고개를 돌려 격납고 안으로 들어서는 캐롤의 모습을 살펴본다. 퀭한 눈과 피로한 안색이 짙게 내린 얼굴에서 그 옛날, 구스의 마지막 모습이 겹쳐진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거칠게 박동했다. 매버릭은 마른 침을 삼키며 가까스로 일어났다. 눈앞이 핑 돌만큼 강력한 현기증이 들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캐롤을 직시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죄인을 단죄하러 오는 재판장 같았고,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마른 잎사귀처럼 보이기도 해서.

 

 

 

..’

‘....’

 

 

 

그는 말없이 눈물만을 뚝뚝 떨어뜨렸다.

 

 

 

 

 

-

 

 

 

 

 

병명조차 생소한, 그 생소함만큼이나 희귀한 병에 걸렸다고 했다. 치료를 감행해도 남은 날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남은 일생 병원에 묶여 재미없게 보내기는 싫었다고. 아직 브래들리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눈치가 빠른 아이니 곧 알아차릴 거라고. 캐롤은 매버릭의 두 손을 부여잡고 담담히 고백했다.

 

 

 

아마도 내가 구스를 좀 더 빨리 보러가고 싶었나봐.’

 

 

 

고백의 끝에서 캐롤은 짐짓 밝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를 하는 내내 매버릭은 고개를 수그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물만이.

 

하염없이 흐를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정말 미안한 부탁을 하나 할까 해.’

‘....’

브래들리는. 그이를 쏙 빼닮은 그 애는.’

‘....’

널 따라서 파일럿이 될 생각인 것 같아.’

 

 

 

놀란 매버릭이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 캐롤은 서글픈 미소를 얼굴에 띄우곤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매버릭의 손을 부여잡고 그녀는 잔잔히 말을 이었다.

 

 

 

그 앨 말려줄 수 있어?’

‘....’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나는. 그 애만큼은..’

 

 

 

그때까지 평온했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며 그녀의 눈에서도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매버릭에게 말했다.

 

 

 

안전하게, 적어도 이 대지에 발붙이며..살았으면 좋겠어.’

‘....내가,’

‘....’

내가 꼭 그렇게 만들게. 그렇게 하게 할게.’

 

 

 

엉망이 된 얼굴로 매버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입에 담으며 최선을 다해 캐롤을 안심시켰다. 슬픔으로 얼룩진 그 얼굴을 말끄라미 바라보던 캐롤이 서글피 웃었다.

 

 

 

네가 그럴 거라는 걸 알아.’

캐롤, 나도, 나도 할 말이 있어.’

 

 

 

말할 생각이 없었다. 말할 자신도 없었고. 그럴 염치도 없었다. 하지만 어떤 충동이, 가슴에서부터 솟구친 용암과도 같은 충동이.

 

 

 

그 애가 나를 사랑해.’

 

 

 

끝내 입을 열게 만들어서.

 

 

 

..나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미안해..’

 

 

 

매버릭은 캐롤의 두 손을 부여잡은 채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

 

 

 

 

 

그저 널 떠나면 그만인 일을,

 

하지만 다시는 널 보지 못 한다는 게 너무, 너무 무서워서.

 

내 모든 미래에 네가 없다는 걸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서.

 

널 도저히 잃을 수 없는 이기적인 나라서.

 

 

 

 

 

-

 

 

 

 

 

, 매브.’

 

 

 

캐롤은 매버릭의 양 뺨을 잡고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맞추며,

 

 

 

알고 있었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

그 애의 시선 끝엔 언제나 너만이 있었는데.’

 

 

 

 

 

-

 

 

 

 

 

한낮의 햇볕과도 같은 온도를 품은 눈. 차마 모른 척 할 수도 없을 만큼 설레고 벅차는 표정을 지은 채 언제나 그녀의 곁을 맴돌던,

 

 

 

구스와.

 

언제나 그 시선 끝에 머물던 그녀가.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고, 빛바래지 않고, 작은 조약돌처럼 반짝이며 눈부시게 빛나는 그 아름다운, 모든 사랑의 기억들을.

 

 

 

그 기억과 꼭 닮은 그의 아들이 하는 행동들을.

 

도저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

그 아이를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하고, 거절하고 싶지 않으면 받아주는 거야.’

 

 

 

얼굴이 잡힌 매버릭이 캐롤의 말에 주춤 뒤로 물러섰다. 두려움에 잠식된 표정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캐롤이 이내 말을 이었다.

 

 

 

세상의 시선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말고.’

‘....’

이 세상에 너희 둘만 남았고, 아무도 너흴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 왜 화를 내지 않아?’

 

 

 

잘못된 건 자신이었는데. 모든 잘못은 제게 있는데. 혼란스러워 하는 그를 바라보며 캐롤은 다정히도 웃었다.

 

 

 

어떻게 화를 내겠어.’

 

 

 

그 모든 시간 동안 언제나 그 아이와 함께하려 노력했던 너를.

언제나 그 아이에게 돌아 와준 너를.

 

내가 아는데.

 

 

 

 

 

-

 

 

 

 

 

캐롤이 떠나고, 밤의 어둠이 격납고 안까지 들어왔을 때, 매버릭은 결정했다.

 

 

 

비겁하고 겁이 많은, 철없고 한없이 얕기만 한 어른은,

끝내, 도망치기로.




----



루버릭 루스터매브

2023.12.19 23:20
ㅇㅇ
모바일
ㅋㅋㅋㅋㅋ....아놔.... 피트 매버릭 미첼씨 일단 여기서보세요 지금 브래들리를 두고 대체 무슨짓을 하려고 지금....... 아니 근데 매버릭이 왜 그렇게 루스터를 목숨보다 더 사랑하면서도 피하려고 했는지 지금 사수생된지 2년만에 다시 느끼고잇음........ 센세 대체 정체가 뭐야...... 토니스콧옹이 살아돌아온줄 알았잖아.......
[Code: 1997]
2023.12.19 23:20
ㅇㅇ
모바일
ㅠㅠㅠㅠㅠㅠㅠ시박 센세 사랑해 북맠하고 두고두고 읽어야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1997]
2023.12.19 23:44
ㅇㅇ
모바일
와 센세 사랑해 나 지금 심장 뛰어서 일단 선댓부터 달고 진정 좀 시키고 올게 크리스마스 선물 미리 받은 기분이야 지금 ㅠㅠㅠㅠ
[Code: 5728]
2023.12.20 01:04
ㅇㅇ
모바일
이건 정말 문학이야 센세 구스와 매버릭은 언제 어디서 만나서 어떻게 친해진걸까? 그게 늘 궁금했는데 내센세가 이렇게 알려주셔서 정말 행복해 ㅠㅠㅠㅠㅠ구스는 매버릭을 차마 혼자 둘 수 없어서 쓰레기더미 진창 위에 앉아서 캐롤에 대한 열렬한 사랑고백을 그렇게 했던거였어 매버릭에게 구스는 캐롤은 그리고 브래들리는 신이 그에게 주지 않았던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존재들이었고 그래서 매버릭은 하늘에서 죽어버리지 않고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거였어 ㅠㅠㅠㅠㅠㅠ
[Code: 55ac]
2023.12.20 01:08
ㅇㅇ
모바일
브래들리가 자신을 보는 눈빛에서 사랑을 느낀 순간 매버릭이 겁먹고 절망하며 죄책감을 가지는게 너무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서 너무 마음 아프다 ㅠㅠㅠㅠㅠ하지만 여리고 작은 손으로 까치발 들며 매브의 손을 붙잡고 가지말라고 울먹이던 어린 브래들리에게 약속했잖아 절대 널 떠나지 않을거라고 그 약손을 저버리고 도망치면 브래들리는 어쩌냐고 매브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55ac]
2023.12.20 01:11
ㅇㅇ
모바일
센세 이건 진짜 탑건 원작같다 영화에서는 생략된 서사와 감정들이 생생하게 펼쳐져서 다시 탑건을 처음 보고 루버릭에게 빠져들었던 그 순간의 감정이 다시 파도처럼 밀려들었어 나 막 심장이 두근거려 센세 사랑해 ㅠㅠㅠㅠ
[Code: 55ac]
2023.12.20 02:23
ㅇㅇ
모바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맵도 알았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bdc7]
2023.12.20 06:59
ㅇㅇ
모바일
그 애가 나를 사랑해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눈물나ㅠㅠㅠㅠ
[Code: b615]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
성인글은 제외된 검색 결과입니다.
글쓰기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