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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9 22:52






01. 루스터

 

 

 

 

 

 

 

그의 삶은 하늘에 있다. 유수와 같이 흐르는 세월도, 이젠 고통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는 추억도 모두 그에게서 하늘을 앗아 가진 못했다. 하늘을 형상화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일 거야. 루스터는 다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캐롤은 루스터가 해군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녀가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어 어린 그를 키운 것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바람은 어찌 보면 타당한 것이었다. 눈물짓는 어머니를 다독이며 죄송하다고 속삭이던 루스터는 그러나 그녀의 바람대로 자신의 뜻을 꺽진 않았다. 해사입학 원서를 처음으로 넣은 그 해, 루스터는 아버지의 무덤가에 꽃다발을 올려다두며 누구에게 하는지 그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사과를 입에 담았다.

 

 

 

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

 

 

 

네 번째 입학 원서가 반려당한 그 날, 매버릭은 눈을 내리깔며 그렇게 말했었다. 무슨 준비가 필요한데요? 날카롭게 나오는 말들은 그의 진심을 숨긴 채 원망과 책망만을 담았다. 내게 하늘을 보여준 건 당신이잖아요! 하늘 위의 삶을 꿈꾸도록 만든 건 당신이라고요! 소리치는 루스터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안개처럼 흐렸다.

 

 

 

다른 길도 있어, 브래들리. 네 결심이 설 때까지..우린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피트!’

나는..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부탁이니 다른 길을 찾아. 다른, 뭐든 안전하고 안정적인..’

 

 

 

그의 말끝이 흔들린다. 종국엔 잘게 떨기까지 하는 그의 양어깨를 붙잡곤 루스터는 애원했다. 제발, 제발. 제발요. 이렇게 빌게요. 간절하기까지 한 그 목소리에 매버릭의 눈가가 붉어진다. 긴 속눈썹에 아롱진 눈물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낙화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의 얼굴을 보자 목구멍이 무언가에 꽉 틀어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루스터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당신 곁에 있게 해줘요.

 

 

 

그렇기에 마지막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이 그에게 어떤 닻이 될지 알아서. 그의 하늘마저 빼앗고 싶진 않아서. 루스터는 나오지 않는 말 대신 길게 한숨을 쉬곤 몸을 떨어뜨렸다. 물기어린 올리브 색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루스터는 애써 외면하곤 하고 싶은 말 대신 해야만 하는 말을 했다. 그 말 한마디가 매버릭의 가슴에도, 자신의 심장에도 비수가 될 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우린 꽤 오래 못 보겠네요.’

 

 

 

 

 

-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 딱 기분 좋을 만큼 몸에 내리쬐는 햇볕과 바람에 흩날리는 잎사귀들이 파도소리처럼 들려오는 날. 캐롤을 대신해 그 날 하루 어린 자신을 돌보러 와준 매버릭은 함께 소풍을 가자고 제안했다. 학교는 안가도 되는 거예요? 묻는 그를 내려다보는 녹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오늘은 패스. 캐롤에겐 비밀이야?

 

 

 

그건 작은 일탈이었다. 언제나 챗바퀴처럼 도는 평범한 일상에서 튕겨져 나온 유일한 날. 루스터는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세우곤 입술에 가져다 되며 쉿 소리를 낸다. 여린 얼굴에 배꽃같은 웃음이 내려앉는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 뺨이 사랑스럽게 익어갔다. 매버릭 또한 마주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거친 손길이 싫지만은 않아 루스터는 맑게 웃었다.

 

 

 

늘 타던 오토바이 대신 자동차를 끌고 온 그는 서툴게 자신을 뒷자석에 앉히곤 운전대를 잡았다. 평소 그의 운전 스타일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지금의 매버릭을 마주한다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는 느리게 운전했다. 심지어 그 뒤를 따르던 어떤 차는 경고의 의미로 클락션까지 울려 댔으나 그는 결코 액셀을 밟지 않았다. 마치 그곳에 액셀이라곤 없는 것처럼.

 

 

 

평소의 배가 걸려 도착한 곳은 작게 둔덕진 언덕이었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뿌리내린 푸른 들판은 지형의 특성상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했다. 덕분에 시야가 탁 트여 하늘이 폭포처럼 그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어린 루스터는 그곳에 발을 딛자마자 그 장소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우와..’

끝내주지?’

 

 

 

작게 입을 벌린 그를 내려다보며 매버릭은 미소 지었다. 평소의 자신만만한 웃음이나 장난스러운 웃음과는 다른, 어딘가 어른스러운 미소였다.

 

 

 

가끔 이곳에 와. 경치도 좋고, 사람도 별로 없어서.’

사람이 없는 게 좋은 거예요?’

경우에 따라선.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조용한 장소가 필요하거든. 그렇다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건 또 싫고.’

 

 

 

말하며 매버릭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록 눈이 시야 가득 푸른 하늘을 담았다. 그 반짝이는 눈 한가득 담긴 애정이 오롯이 위로만 향해져 있었다. 루스터는 매버릭을 따라 고개를 한껏 치켜들곤 푸른 장막 같은 하늘을 눈에 담았다. 막막하고 거대한 세계가 그들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다.

 

 

 

하늘이 엄청 커요! 바다처럼 커다래요!’

 

 

 

루스터는 흥분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며 두 팔을 위로 번쩍 치켜 올렸다. 까치발까지 들어 올리며 하늘위로 손을 뻗었지만 손에 쥐이는 거라곤 공기를 가르는 바람뿐이었다. 실망한 그가 시무룩한 얼굴로 손을 내리자 매버릭이 그를 품에 안아들곤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어때? 좀 가까워진 것 같아?’

아뇨. 엄청 멀어요..’

나중에. 우리 꼬맹이가 이 삼촌만큼 크면 또 모르지?’

 

 

 

매버릭은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그를 달랬다. 이후 나올 말이 루스터의 삶을 하늘에 매어 놓을 줄도 모른 채.

 

 

 

하늘이 너의 품에 안길지도.’

 

 

 

 

 

-

 

 

 

 

 

루스터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게 맞았다. 그는 끝내 파일럿이 되었다. 대위가 되었고, 탑건을 졸업했다. 캐롤의 눈물과 매버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미래를 움켜잡았다.

 

 

 

언젠간 만날 당신은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축하를 할까? 원망을 할까? 물음은 언제나 혀 밑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굴러다녔다. 그러나 루스터는 숱한 밤, 그 끝도 없이 펼쳐진 낮의 시간들을 인내했다. 물음이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그는 제 감정 또한 범람할 것임을 알았다.

 

 

 

그리움일까. 원망일까. 그저 분노일 뿐일까. 10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할까? 루스터는 인내했고 매버릭은 기다렸다. 어쩌면 루스터처럼 매버릭 또한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 발길이 이끄는 대로 익숙한 대문 앞까지 걸음 했다가 끝내 몸을 돌려버렸을 지도 모른다. 용기가 없었을 수도,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는지도, 그도 아니면 정제되지 않은 제 감정을 모조리 토해낼까 두려워서였는지도 모른다.

 

 

 

불빛이 꺼진 창문 옆을 한참 서성이다가 끝내 돌아왔을 때, 루스터는 애써 외면하던 자신의 감정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은 참 멍청하기도 해서, 끝내 그 사람을 영영 떠나보내야지만 제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다. 루스터는 안타깝게도 그에 속했다. 그게 그의 비극이었고 보다 큰 절망이었다.

 

 

 

캐롤의 눈물에도 파일럿이 되고 싶었던 이유. 매버릭의 반대에도 반드시 탑건에 입학해야만 했던 이유. 4년의 시간을 허송세월로 날려 보냈음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

 

 

 

..”

 

 

 

차라리 몰랐더라면.

 

 

 

 

 

-

 

 

 

 

 

그래서 10년 만에 만난 당신이 나를 불렀을 때, 내 심장이 금방이라도 멎을 것처럼 뛰었다는 것을. 당신의 부름에 뒤돌지 않기 위해 죄 없는 제 입술을 얼마나 물어뜯었는지를. 1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그 장난스런 어조에 떨리는 손끝을 어떻게 감추었는지를.

 

 

 

당신은 알까?

 

 

 

 

 

-

 

 

 

 

 

헤이, 브래들리!’

! 이게 무슨 꼴이에요. 얼마나 마신 거예요?’

 

 

 

크게 비틀거리는 매버릭의 몸을 부여잡은 루스터는 가진 애를 다 써가며 겨우 그를 소파 위에 눕혔다. 성장기의 몸은 아직 한참 자라는 중이라서 어른의 무게를 감당하긴 버거웠기에 발이 꼬여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매버릭의 몸을 붙잡고 침대까지 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매버릭이 즐겨 입는 무스탕을 겨우 벗겨낸 루스터가 짐짓 화난 어조로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내게 빚진 거예요.’

으응...그래그래, 우리 귀여운 꼬마. 삼촌이 용돈 줄까?’

됐고. 술 냄새 나니까 입 다물고 잠이나 자요.’

 

 

 

구박에도 매버릭은 실실 웃으며 몸을 옆으로 뉘였다. 루스터는 매버릭의 발치에 주저앉아 심란한 얼굴로 그의 잘생긴 얼굴을 샅샅이 살펴봤다. 캐롤도 그렇고 매버릭도 그렇고 이맘때쯤이 되면 늘 이렇게 엉망이 된다. 그나마 캐롤은 어떻게든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라지만 매버릭은 철이 덜 들었는지 항상 이 꼴로 자신을 찾곤 했다.

 

 

 

우리 꼬맹이..언제 이렇게 컸어?’

한참 전부터 이렇게 컸거든요..’

이상하다..원래는 좀 더 작았는데..’

 

 

 

술주정뱅이가 누운 채로 손을 뻗어 제 눈높이만큼 키를 잰다. 이정도? 아니다, 이 정도? 점점 팔이 내려가는 꼴을 보던 루스터는 끝내 부아가 치밀어 성난 손길로 팔딱이는 그 팔을 힘주어 소파 위로 내린다. 헛소리 말고 얼른 잠이나 자요. 뿌루퉁한 그 목소리에 매버릭이 작게 웃더니 손을 뻗어 루스터의 몸을 끌어당긴다.

 

 

 

으악!’

우리 꼬마, 사랑스런 귀염둥이.’

, 하지 마요!’

 

 

 

질색하는 그의 기색에도 매버릭은 손에서 힘을 뺄 생각이 전혀 없는지 점점 더 강한 힘으로 루스터의 몸을 붙들어 맨다. 버둥거리는 루스터가 힘이 빠져 얌전해지자 그제야 손에서 힘을 뺀 매버릭이 그의 뺨에 키스하며 조용히 속삭인다.

 

 

 

네가 크는 모습을 그 녀석도 봤어야 했는데..’

‘....’

‘...미안해..’

‘....’

 

 

 

하지만 매브, 그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잖아요. 루스터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품에서 올려다본 매버릭의 얼굴이 온통 젖어 있어서. 물기에 잠긴 그 고요한 목소리에 그 자신 또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울컥 솟구치는 울음을 삼킨 채 그는 약간 훌쩍이며 매버릭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고약한 술주정뱅이의 품은 빈말로라도 안락하거나 잠이 들만큼 푹신하지도 않았지만.

 

 

 

딱 알맞을 정도로 따뜻하기는 했다.

 

 

 

 

 

-

 

 

 

 

 

때때로 루스터는 매버릭이 바람결에 하늘 위로 날아가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의 손을 가능한 모든 힘을 다해 붙들곤 했다. 까치발을 들어 겨우 잡은 그 손끝은 이상할 정도로 차가워 무서워했던 기억이 난다. 훌쩍이는 소리에 하늘을 보던 고개를 땅으로 돌린 매버릭이 그제야 울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달래줄 때까지. 루스터는 언제나 온 힘으로 그를 붙들어 맸다.

 

 

 

아직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 밖에 없었으므로.

 

 

 

 

 

-

 

 

 

 

 

루스터.”

“....”

루스터!”

“....”

브래들리 브래드쇼!”

“sir."

 

 

 

첫 수업이 끝나고 락커룸에서 옷을 전부 갈아입고 나왔을 때, 가장 마지막까지 푸시업을 했던 탓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곤 자신밖에 없었다. 텅 빈 복도를 걸으며 방금 전의 비행을 복기하는 그의 뒤로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붙들어 세웠다. 낮의 대화는 까마득히 잊었는지, 그도 아니면 그 정도 무시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지, 매버릭이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말씀하십시오, sir."

“damn it. 브래들리. 존칭은 집어치워.”

 

 

 

그제야 루스터는 정면을 바라보던 시선을 아래로 내려 어느 새 제 코앞까지 다가온 매버릭을 바라보았다. 10년이란 세월은 그를 비껴간 것인지, 그도 아니면 제 눈에 벗겨지지 않는 콩깍지가 단단히 씌인 것인지, 그는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부러 그를 제대로 보지 않았던 루스터는 아무도 그들을 주시하지 않는 이 시간을 마음껏 이용해 매버릭의 모든 모습을 샅샅이 살폈다. 혹시 살이 내리지 않았는지, 10년 동안 크게 다친 곳은 없는지-.

 

 

 

루스터.”

“....”

 

 

 

주홍빛 노을이 창문을 투과해 매버릭의 옆얼굴을 덮었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고꾸라지는 시간, 그들은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 위에 서서 서로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물기 어린 올리브 색 눈동자가 루스터를 똑바로 바라보았을 때, 루스터는 제 마음에 응어리진 검고 탁한 감정이 흐물흐물 녹아 사라지는 걸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루스터는 이 철없고 장난기 많은 자신의 삼촌에게 언제나 약했으니까.

 

 

 

그동안...잘 지냈어?”

“....”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큰 거 같다..”

“....”

 

 

 

사실은 반가웠고, 눈물 나도록 그리웠다. 워록 중령이 피트의 콜사인을 부르기 전부터. 그 익숙한 발걸음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루스터는 그 빌어먹을 정도로 따뜻한 품에 폭삭 안겨 사실은 보고 싶었다고, 왜 그동안 연락 한 번 없었냐고 투정부리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이제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매버릭을 품에 끌어안고 그 익숙한 향을,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선 안 되었다.

 

 

 

난 잘 지냈어. 혹시 궁금할까봐.”

 

 

 

아무 말도 없는 루스터의 눈치를 흘긋 살피며 매버릭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큰 사고를 쳐 제독들에게 불려가 문책을 당할 때도 흔들리지 않던 목소리와 눈동자가 루스터의 무뚝뚝한 반응에 속절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고이는 눈물 어린 올리브 색 눈동자를 더는 마주할 자신이 없어진 루스터는 매버릭의 뒷켠을 노려보며 끝내 모질게 이 지지부진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말씀 끝나셨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루스터.”

 

 

 

그를 뒤에 남겨놓고 돌아섰다. 늪지를 헤집어 걷듯 무거운 다리를 겨우 옮기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10. 10년이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원망은 안개처럼 흩어진지 오래였고 그저 그리움만이 독처럼 쌓여 그를 좀먹어갔다. 그럼에도 돌아가지 못했다. 돌아갈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날부터, 루스터에게는 그의 곁에 있을 자격을 잃었다.

 

 

 

 

 

-

 

 

 

 

 

루스터는 종종 매버릭의 격납고에 들러 시간을 보내곤 했다. 철없는 삼촌은 자신의 모든 월급을 바이크와 자동차에 탕진했는지 있으나마나한 냉장고는 텅 빈 채 때이른 겨울을 홀로 나고 있었다. 가엽게 굶주리고 있는 냉장고를 채울 겸, 홀로 있고 싶은 시간이 생기면 루스터는 음식을 싸들곤 매버릭의 격납고로 향했다.

 

 

 

때로 매버릭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를 반겼지만, 대부분의 경우 격납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매버릭이 장기휴가를 받거나 무언가 사고를 크게 쳐서 비행금지 명령을 받았을 때에야 쓰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텅 빈 격납고가 루스터를 맞았다.

 

 

 

어휴..’

 

 

 

그새 또 신형 자동차를 장만했는지 못 보던 게 하나 더 생겼다. 루스터는 바리바리 싸들고온 음식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하며 대강 눈대중으로 격납고를 훑었다. 여전히 텅 비어 있고, 여전히 기름 쩐내가 사방에서 진동한다.

 

 

 

‘....’

 

 

 

평소 루스터는 냉장고를 정리한 후 매버릭이 낮잠을 자곤 하는 매트리스에 누워 사색하기를 즐겼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저 신형 자동차는..그가 다니고 있는 하이스쿨의 소위 잘나가는무리 중 한 명이 끌고 다니는 거였다. 딱히 자신의 차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크흠..’

 

 

 

한 번 보기만 하자. 살짝 보고 얼른 나오자. 루스터는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매버릭이 늘 온갖 키를 보관하는 상자를 열어 반짝이는 새 열쇠를 집어 들었다. 운전할 것도 아니고, 그냥 살짝 보고 오는 건데 뭘. 가벼운 마음으로 자동차를 연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제 선택에 아무런 후회도 없었다. 사실 매버릭에게 부탁하면 흔쾌히 들어주었겠지만 본래 이맘때의 청소년들이란 충동적인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청소년기의 루스터는, 그 망할 선택을 했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를 쓰다듬으며 실없이 웃곤 꽤 긴 시간을 그 망할 차 안에서 보냈다. 얼마나 몰두했는지 격납고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와우, 여기가 네 집이야?’

, 그런 셈이지. 쉴 때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내니까.’

 

 

 

그래서 두 남녀의 대화소리를 들었을 때, 루스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몸을 숙이는 멍청한 행동을 해 버렸다. 차라리 당당하게 고개라도 들고 있었으면 좀 혼나고 말 일이었는데. 이후의 일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걸 생각하면, 그는 모든 일을 되돌려 아무것도 모르는 오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샤워?’

좀 급한데..’

그렇다고 그냥 해? 찝찝하지 않아?’

헤이, 너무 뭐라 하진 말라고. 너 때문이잖아.’

 

 

 

대체..무슨 대화를 하는 거지? 루스터는 제 등 뒤로 식은땀이 죽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최대한 귀를 기울였다. 두 남녀가 속삭이는 목소리. 그 중 한 목소리는 낯이 익다 못해 지겨울 만큼 익숙한 목소리였다. 피트 미첼. 매버릭의 목소리다.

 

 

 

하하, 간지러워.’

그렇게 웃으니까 더 예쁘다.’

 

 

 

애인인가?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속삭이며 여자의 뺨에 소리 나도록 키스하는 매버릭의 모습은 루스터조차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다. 여태 알던 사람의 낯선 면모를 처음으로 발견한 청소년기의 루스터가 호기심에 그들 모습을 몰래 훔쳐보게 된 것은.

 

 

 

진짜 샤워 안 해도 돼?’

하고 왔어. 그보다 콘돔은 당연히 있겠지?’

당연하지.’

 

 

 

두 남녀가 매트리스에 누워 서로의 옷을 벗기고 정신없이 키스하는 모습이 시야에 얼핏 잡혔다. 사실 여자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매버릭의 등만 보였지만, 그것만으로 두 사람이 이제부터 무얼 할 건지 모를 만큼 순수하진 않았기에 루스터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이라도 나갈까? 망설임은 길었고 결심은 짧았다. 루스터는 그냥 조용히 고개를 숙여 매버릭의 벗은 등만 뚫어져라 노려봤다. 지금 나간다면 산통 다 깼다며 한 달은 잔심부름을 시킬 것이다. 평소라면 그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당분간은 곤란하다.

 

 

 

‘....’

 

 

 

매버릭의 벗은 모습이야 가끔 봤지만 이렇게 집중해서 보는 건 처음이다. 루스터는 목울대를 움직여 입 속에 고이는 침을 삼켜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하며 정사에 몰두했다. 귓가에 파고드는 여자의 신음소리와 매버릭의 신음소리.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듯 움직이는 등허리의 근육들.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와 몰아쉬는 숨소리. 말할 때마다 들려오는 살짝 긁힌 낮은 목소리.

 

 

 

모두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다. 루스터는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귓가를 괜히 매만지며 운전대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매버릭의 귀에 들릴까봐 두려워진 탓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곤 허리를 수그려 침착하게 숫자를 세었다. 하체에 뜨끈한 열이 올라오는 걸 애써 외면하며 긴 후회를 짓씹었다.

 

 

 

제발 빨리 끝내요, .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루스터는 매일 밤 찝찝한 얼굴로 속옷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날의 일이 꽤 충격적이긴 했나 보다. 좀 이상한 건 그의 꿈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매버릭의 상대 여자가 아닌, 매버릭이 나온다는 건데..

 

 

 

, 별일이야 있겠어?’

 

 

 

본 게 매버릭뿐이니 그렇겠지. 루스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다.

 

 

 

 

 

-

 

 

 

 

 

때때로 루스터는 궁금해지곤 한다. 그 날, 그 밤에 자신이 그곳에 없었어도,

 

 

 

당신을 사랑했을까?

 

 

 

루스터는 질문과 동시에 그 답을 알았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

 

 

 

 

 

사랑하면 안 돼. 사랑하면 안 돼. 사랑하면 안 돼.

 

 

 

이 마음을 멈출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텐데.

 

 

 

 

 

-

 

 

 

 

 

10년만에 재회한 그들의 만남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볼 순 없었다. 그러나 이 재회는 사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공적인 영역에 속했으므로 루스터는 자신의 복잡한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이 상황에 서서히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임무는 어찌 보면 단순했다. 전투기를 몰고 저공비행으로 적진에 침투 후 폭탄을 투여, 230초 이내에 작전을 수행 후 그곳을 빠져나간다. 이 단순한 한 문장을 위해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다. 매버릭이 말한 한계를 깨부수기 위해 온 몸이 짓눌리는 중력을 고스란히 견뎠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매버릭이 정한 230초의 시간 안에 작전을 완벽하게 수행할 순 없었다. 지형도 지형이거니와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파일럿으로써의 자긍심이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들도 있었다. 실패의 이유를 캐묻는 매버릭의 눈빛은 평소 그의 모습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다.

 

 

 

루스터는 인정받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도 매버릭에게서. 그가 아닌 다른 자들의 인정은 필요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 시간이 촉박해 도달하지 못한다면 시간이 오버되더라도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대로 실행했다. 덕분에 그들 중 유일하게 목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버릭에겐 그 또한 하나의 실패에 불과했나 보다. 매섭게 질책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이제는 사라졌다 생각했던 원망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본래 하려던 말보다 더 삐딱하게 대답한 그는 종국엔 그의 말에 반박하는 매버릭의 대답에 상처 받을 수밖에 없었다.

 

 

 

충격에 물든 올리브 색 눈동자가 어떠한 감정의 색에 덮씌워진다.

 

 

 

왜 당신이 상처받은 표정을 해요? 날 상처 입힌 건 당신이잖아요.

 

 

 

물음은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잠시의 침묵 후 그들은 서로를 외면했다. 얇은 눈꺼풀이 그들의 눈을 덮었기에 그들은 끝내 장님이 되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 감정을 필사적으로 숨겼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너무 크게 울렸다. 때마침 행맨이 시비를 걸지 않았으면 루스터는 아마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끝내 제 감정을 토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의 일은 엉망진창이었다. 죽은 아버지를 들먹이며 시비를 거는 행맨의 멱살을 잡고, 동기들이 모두 달려들어 그들을 말렸다. 그들 사이에 끼어든 매버릭이 필사적으로 싸움을 말렸다. 일견 간절해 보이는 그 모습에 힘껏 말아 쥔 주먹에서 힘이 풀렸다.

 

 

 

분노했고, 그보다 더 안도했다. 루스터는 밀려오는 혐오감에 진저리를 치며 건물을 빠져나갔다. 이래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정도와 도의보다 우선시되는 당신을 향한 제 감정이.

 

 

 

때때로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힘들어서.

 

 

 

루스터!”

 

 

 

화가 날 정도로 익숙한 목소리가 또다시 그를 붙들어 맨다. 루스터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버릭이 다급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잠깐만! 잠깐 이야기 좀,”

씨발! 제발 그만 좀!”

 

 

 

성큼 가까워지는 그의 몸이 제동이 걸린 자동차처럼 급하게 멈춰진다. 루스터는 제 표정이 어떤지, 어떤 꼬락서니기에 매버릭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리는지, 그 찰나의 시간 또다시 그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제 처지가 우습고 진절머리가 나서.

 

 

 

제발 이야기 좀 그만해요, 우리.”

 

 

 

눈앞이 흐려진다. 어젯밤부터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만 기어이 빗방울이 한 두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매버릭의 얼굴이 물에 담긴 것처럼 흐릿하게 보여 루스터는 눈을 깜빡였다. 눈썹에 고인 물방울들이 떨어지며 매버릭의 모습이 선명하게 맺혔다가 이내 다시 흐려졌다. 매버릭은 멈춰선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잠시의 침묵이 그들 사이를 먹먹하게 채우다가 이내 흩어진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

“....나중에. 너 괜찮아지면. 네가 이야기 하고 싶어지면.”

“....”

그때 이야기하자.”

 

 

 

일방적인 대화 후 매버릭은 잠시 그의 앞에 서 있더니 이내 돌아서 떠나간다. 이토록 쉬운 일이다.

 

 

 

떠나가는 것이란.

 

 

 

 

 

-

 

 

 

 

 

헤이, 브래들리. 교문 앞에 저 사람 너 아는 사람이야?’

 

 

 

백팩을 매며 하교를 준비하는 루스터의 앞에 조지아가 길게 늘어뜨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귀에 꽂으며 친근하게 묻는다. 문제는, 브래들리로써는 조지아가 갑자기 자신에게 친한 척을 하는 이유를 영 모르겠다는데에 있다. 그녀는 이 학교 내에서 소위 잘나가는 무리의 중심에 있는 인기 있는 사람이다. 물론 여태껏 브래들리는 단 한마디도 섞어 보지 못했었고.

 

 

 

누구 말하는 거야?’

검은 머리카락에 무스탕 입고 포르쉐 끌고 온 남자. 자신이 매버릭이라고, 네 삼촌이라고 하던데?’

.’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거지?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창밖을 살펴보니 일단의 무리가 그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에워싼 모양이 보인다. 저건 또 뭐야. 황당한 마음도 잠시, 혹시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걱정된 루스터가 최대한 빨리 교실 밖을 나서려 하자 조지아 또한 그의 뒤를 졸졸 따르며 쉴 틈 없이 말을 건다.

 

 

 

이름이 매버릭이야? 이름치곤 이상한데?’

그건 그 인간 별명이야. 하도 사고를 많이 쳐서..’

진짜 네 삼촌이야? 결혼반지는 없던데, 아직 싱글?’

‘..그건 알아서 뭐하게.’

 

 

 

연락도 없이 온 그가 내심 반가워 들뜬 기분이 삽시간에 가라앉는다. 묘하게 달라진 루스터의 태도에 조지아가 양 손을 들어 올리며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변명한다.

 

 

 

네 삼촌 진짜 멋있다..우리 친척 중엔 저렇게 핫한 삼촌 없거든. 전부 배불뚝이, 아니면 다 늙어서 쭈글쭈글해.’

하하..’

 

 

 

대강 맞장구치며 들어주려니 고역이다. 자연스레 빨라진 걸음은 금세 교문 앞까지 도달했다. 매버릭을 중심으로 빙 둘러싼 무리를 겨우 헤치며 그에게 다가가자 매버릭이 반갑게 손을 들며 루스터를 부른다.

 

 

 

브래들리!’

! 여긴 웬일이에요?’

, 브래들리! 진짜 네 삼촌 맞아? 왜 저런 삼촌 있다고 진즉에 말 안 해줬어!’

이름이 진짜 매버릭이에요?’

나이는 어떻게 돼요?’

싱글이에요?’

어디서 살아요? 이상형은 어떻게 돼요?’

여자친구 있어요?’

 

 

 

이제 보니 빙 둘러싼 무리는 전부 여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의 질문이 영 기분 나쁘지만은 않은지 매버릭이 실실 웃으며 손만 흔들고 있었다. 노코멘트! 장난스런 목소리가 그들 머리 위로 통통 날아든다. 브래들리가 겨우 매버릭의 곁에 다가가자 그가 과장된 몸짓으로 조수석 문을 열어준다. 뿌루퉁한 표정으로 백팩을 가슴에 안고 조수석에 앉은 조카가 귀여웠는지 이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입꼬리가 숫제 귀까지 걸릴 태세다.

 

 

 

그럼 이만 가볼게~. 공부 열심히 하고!’

또 오실 거죠?’

봐서~’

 

 

 

하여간 저 느물거리는 태도라니! 콜사인을 매버릭이 아닌 바람둥이로 지었어야 했는데! 루스터는 삽시간에 똥물을 온몸에 뒤집어 쓴 사람처럼 인상을 팍 찡그리곤 정면을 노려보았다. 부글부글 끓는 속이 금방이라도 화산처럼 분출될 것만 같아 애써 꾹꾹 눌러 참으면서. 이윽고 매버릭이 운전석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꼬맹아. 너 얼굴이 왜 그래? 열 나?’

‘....’

 

 

 

화를 엄청 내야지. 대체 내가 왜 화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짜증도 잔뜩 부릴 거야. 매버릭이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 생각했던 말들은 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린 순간, 흐물흐물 녹아 사라졌다. 단단하고 시원한 손길 아래서 헤실헤실 풀린 표정의 루스터가 눈을 감았다.

 

 

 

안 되겠다. 마트에 들러서 약 좀 사자.’

나 열 안나..’

얼굴은 새빨간데? , 알겠다. 이 삼촌이 너무 멋있어서 새삼 반했구나?’

, 뭔 헛소리야! 갑자기 징그럽게!’

하하하! 우리 꼬맹이가 기어코 삼촌이랑 결혼하려고 그러나 보네~’

내가 왜 삼촌이랑 결혼해!’

 

 

 

기어코 다시 새빨게진 얼굴로 분을 터뜨리는 루스터를 보며 매버릭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우리 꼬마, 기억 못하니 섭섭하네. 다 크면 이 삼촌이랑 결혼하겠다며? 장난스레 덧붙인 그 말 한마디에 끝내 루스터는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변했지만 다행히 그 모습은 보지 못했는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그새 마음이 변한거야? 남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믿을 게 못 돼.’

 

 

 

심지어 고개까지 절레절레 젓는다. 루스터는 뭐라 반박하려다 이게 저 고약한 성질의 남자가 심심할 때마다 저를 놀리기 위해 하는 말 중 하나이며, 오늘은 그 주제가 결혼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쳐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어라? 반응이 없으시네요, 신사님?’

‘...왜 왔는데.’

캐롤이 너 좀 이모집에 데려다 주라고 해서. 오늘 급하게 출장갈 일이 생겼는데 나도 오늘 부대로 귀환할 예정이거든.’

 

 

 

더는 장난에 어울려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추궁하자 매버릭 또한 더는 이을 생각이 없는지 순순히 답을 들려준다. 루스터가 화들짝 놀라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휴가 끝났어? 벌써? 아닌데..아직 한참 남았잖아.’

긴급 콜이야. 나라의 국세를 받아먹는 입장에선 나라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단다. 꼬맹아.’

장난 그만치고! 언제 돌아와?’

나도 몰라.’

! 장난 그만 치라니까!’

진짜야.’

 

 

 

교차로에서 빨간 불로 신호등이 변하자 매버릭은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옆을 돌아봤다. 어느새 성큼 큰 그의 조카가 미간에 주름을 한가득 잡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루스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할 일이 생길 때마다, 루스터가 속상한 일이 생길 때마다, 긴 파병을 떠나기 이전에, 그는 꼭 저렇게 평소와는 다른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갑자기 온 콜이라 나도 잘 모르겠어. 휴가 나온 사람까지 불러들였으니 꽤 큰 일 아닐까 싶긴 한데..’

‘...위험한 거야?’

 

 

 

초조하고 불안하다. 루스터는 떨리는 손끝을 감싸며 매버릭을 바라봤다. 금세 초록불로 바뀐 신호에 그의 눈길이 자신에게서 떨어져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매버릭은 알아차렸을 테니까. 바뀌는 건 없겠지만 아마 굉장히 미안해하며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보았을 거다. 루스터는 매버릭의 많은 모습을 좋아했지만 결코 좋아할 수 없는 표정 또한 있는 법이다.

 

 

 

괜찮아. 이 삼촌은 슈퍼맨이거든.”

퍽이나.”

어휴. 옛날에는 우리 귀여운 꼬맹이가 발치에 매달려서 삼쫀~삼쫀~가지뭬~’ 했던게 엊그제 같은데.’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분위기를 풀어보려 최선을 다하는 그의 말에도 루스터는 힘없이 대꾸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이 풀려 더는 자세는 꼿꼿이 세울 수가 없었다. 이번에 가면 언제쯤 오지? 지난번에는 5개월이었고 지지난번에는 2년이었고..지지난번에는 8개월이었고..

 

 

 

브래들리.’

‘....’

 

 

 

어느 새 목적지에 도착한 매버릭이 길가에 차를 정차한 후 루스터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울적해진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루스터는 차마 매버릭의 부름에 마주하지 못하고 최대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만 바라봤다. 평소와 같은 이별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술렁거린다. 심지어 눈물까지 찔끔 맺혔다. 미쳤나? 어렸을 때도 이러진 않았는데..

 

 

 

최대한 빨리 오도록 해볼게. 너 졸업식은 가야하니까.’

‘....’

미안해, 꼬맹아. 화 풀어. ? 대신 올 때 선물 사올게.’

‘...이상한 거 사지마..’

 

 

 

진짜. 정말 이상할 정도로 싫다. 매버릭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게 싫다. 그를 떠나보내야 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싫다. 매버릭은 그냥 우리랑 같이 함께 있는걸로는 부족한 걸까? , 굳이, 하늘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루스터는 제 진심을 꾹꾹 눌러 참았다. 나오지 못한 바람은 가슴에 담겨 찰랑거렸다. 넘실대는 그 마음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루스터는 애써 웃었다.

 

 

 

브래들리~. 삼촌 얼굴 좀 봐줘. 이 잘생긴 얼굴을 보면 마음이 좀 풀리지 않을까?’

하나도 안 풀리거든. 졸업 전엔 진짜 올 수 있는 거 맞아?’

 

 

 

하지만 그에게서 하늘을 빼앗으면,

 

 

 

그럼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나를 미워하진 않을까?

 

 

 

노력해 볼게.’

사고 치지 말고 지내. 잘 다녀오고.’

‘yes, sir!'

 

 

 

그게 무서워 루스터는 언제나 제 입을 닫았다. 제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그 애정이 사라지지 않길 바라서, 그게 사라진다는 가정만 해도 세상에 홀로 남은 것처럼 무서워서. 루스터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깊게 한숨을 집어삼켰다. 평소처럼. 언제나처럼.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차 문을 닫고 허리를 수그려 그는 나오지 못한 소망대신 그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소망을 처음으로 입에 담아 본다. 장난스레 웃던 매버릭은 루스터의 말에 잠시 얼굴을 굳혔다.

 

 

 

초가을이었다. 어느새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는 시간, 붉어진 대기가 세상을 수놓았다. 가을의 단풍잎처럼 물든 세상을 방패삼아 그는 붉어진 눈가를 숨겼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도 싶었다.

 

 

 

. 다녀올게.’

 

 

 

매버릭은 고요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애 처음 들어보는 진중한 목소리로 그에게 약속했다. 어린 그의 마음을 속속히 들여다보는 초록 눈이 발광하는 붉은 빛을 담아 화염처럼 타올랐다. 그는 살아있었다. 우습게도 지금에서야 실감이 났다.

 

 

 

매버릭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떠나갔다.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루스터는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완전히 삼켜지고, 하늘의 색조가 검게 잠식될 때까지.

 

 

 

 

 

-

 

 

 

 

 

그 해, 매버릭은 돌아오지 못했다. 다시 돌아오는 가을, 또 한 번의 가을이 지날 때까지. 졸업식이 끝나고 루스터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정하고, 아득하며,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지 않는 하늘.

 

 

 

이토록 광활한, 하늘.

 

 

 

 

 

-

 

 

 

 

당신이 머물 수 없다면.

 

 

 

내가 따라갈까.

 

 

 

 

 

-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 핏줄이 터진 눈으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머리까지 지끈거리기 시작하자 당장이라도 되돌아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자 밥과 피닉스가 그에게 다가온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야 절실하다만 본래 세상사는 자기 마음 가는대로 살아갈 순 없는 법이다.

 

 

 

너 꼴이 왜 그래?”

괜찮아?”

 

 

 

루스터는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한숨이 목구멍 너머에서 자꾸만 터져 나왔다. 어제 매버릭에게 되는대로 소리친 이후론 온통 후회스런 마음뿐이다.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한 꼴에 심란하고 착잡하기 짝이 없다.

 

 

 

안 좋아 보여..”

 

 

 

밥이 걱정스레 중얼대며 루스터의 뒤에 앉는다. 피닉스 또한 루스터의 옆 책상에 한자리 차지하고선 뒤돌아보는 행맨에게 눈을 부라렸다. 오늘은 시비 걸지 마라. 무언의 속삭임이 욕과 함께 들려오는 듯해 행맨은 귀를 후벼 파며 부러 휘파람 부는 시늉을 한다.

 

 

 

괜찮아. 잠을 못자서 그래.”

 

 

 

이게 다 누구 덕이더라? 피닉스가 다 들으라는 듯 크게 혼잣말을 한다. 치켜뜬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며 올라간다. 오늘도 또 시비 걸기만 해봐. 이번엔 나도 안 참아. 형형한 눈빛으로 행맨을 주시하는 피닉스의 모습이 가히 누구 하나 요절낼 것만 같아 코요테가 행맨의 옆구리를 툭툭 친다.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다행히 오늘은 시비 걸 마음이 안 드는지 행맨은 그대로 몸을 돌려 정면을 바라본다. 아직 매버릭은 도착하지 않았다. 곧 강의 시작시간이 다가오는데 올 기미조차 없다. 루스터는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나 어제의 그 일 때문에 상처 받아서 교관일을 그만두는 건...

 

 

 

제군들!”

 

 

 

땅굴을 파고들어가는 생각은 그러나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날아가 버린다. 어제의 소요는 그새 잊었는지 들어오는 얼굴이 오늘따라 맑고 밝다. 루스터는 뭔가 오싹한 기분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런 얼굴일 때는 꼭 사고 한 두개는 쳤는데..

 

 

 

교재는 넣어두고 따라와!”

대령님. ..옷차림이..”

, 맞아! 오늘은 땀 뺄 거니까 가볍고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환복 하도록!”

 

 

 

해맑게 웃는 그의 옷차림은 평소 입는 복식이 아닌, 휴양지에 놀러갈 법한 옷이다. 다들 입이 떡 벌어진 가운데 유일하게 제정신을 붙든 밥이 조심스레 묻는다.

 

 

 

저희..어디 가나요?”

!”

 

 

 

매버릭이 손에 든 무언가를 들어 올리며 해맑게 웃었다. 옷차림에 혼이 나간 그들은 그제야 그의 손에 들린 것이 풋볼 공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예일과 하버드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커진다. 설마, 설마..프리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저 묻는다.

 

 

 

“...저희 오늘 노나요?”

 

 

 

제발 아니길..루스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길 바라는 마음과는 반대로 그는 이미 매버릭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알았다.

 

 

 

!”

 

 

 

. 이 대책 없는 인간아..

 

 

 

 

 

-

 

 

 

 

 

이후의 일은..루스터의 걱정과는 달리 잘 풀렸다고 볼 수 있다. 본래 군인들이란 놀면서 친해지는 법이다. 그 원수 같은 행맨과도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며 웃고 떠들다 보니 금세 날이 저물었다. 어느새 매버릭은 떠났지만 그들은 딱히 이 즐거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꽤 늦은 시간까지 함께했다.

 

 

 

모두가 지쳐 해변에 널부러져 있을 때, 대화의 물꼬를 튼 건 의외로 밥이었다.

 

 

 

저기 뭐 하나 물어봐도 돼?”

“shoot.”

대령님이랑..무슨 관계야?”

 

 

 

밤하늘의 별을 세서 자기가 말한 숫자와 가장 인접한 사람에게 각자 100달러씩 주기로 내기한 행맨, 페이백, 팬보이가 멀찍이서 떠들고 있었다. 파도가 몰아치는 해안가 가장자리에 누워 밤하늘을 보고 있는 건 밥과 루스터 뿐이었다. 파도소리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을 덮었다. 팔짱을 끼고 누워있는 그에게 보이는 거라곤 밤하늘의 별과 달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루스터는 밤의 마력을 핑계 삼아 입을 열었다. 어쩌면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민을 10년이란 세월동안 홀로 짊어지고 있었던 게 힘겨워서였을 수도 있다. 루스터는 제 망막에 고이는 밤의 별빛을 원동력 삼아 조용히 속삭였다.

 

 

 

대령님은..매버릭은 내게 가족 같은 사람이야. 내 오랜 친구이기도 하고, 때론 철없는 동생 같은 사람이기도 했어. 그리고..내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하지.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그 기체에 함께 타고 계셨어. 살리려고 노력했지만..끝내 떠나셨지. 많이 자책했던 것 같아. 이후엔 언제나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으니까..아마..이미 떠나신 아버지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싶어 했던 것 같아.”

 

 

 

드디어 떠드는데 지쳤는지 사위가 조용해졌다. 들리는 거라곤 귓가에 울리는 파도소리 뿐이다. 바다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루스터는 다시 말을 이었다. 고백이 그저 힘겹기만 할 줄 알았는데, 어느 때보다 마음이 평화로웠다.

 

 

 

사실 매버릭은 딱히 좋은 아버지 감은 아녔어. 너도 겪어봐서 알겠지만..사람이 원체 조용하고 진중한 성격이 아닌지라. 내킬 때 머물고, 금세 떠나갔지. 그렇지만 매번 돌아왔어. 이상한 선물을 한 아름 싸들고서..”

 

 

 

언제나 개구지게 웃는 그 모습을, 밤하늘을 도화지 삼아 그려본다. 눈을 감고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본인이 파병 간 지역에서 토착민들이 주었다며 제게 안겨주던 목각인형, 무늬가 그려진 도자기 찻잔, 이제는 다 낡아 부스러진 짐승의 이빨로 만들어진 목걸이 같은 것들. 루스터는 매번 그 선물에 진저리를 쳤지만 끝내 버리지 못하고 침대 아래 상자에 숨겨두었다. 그가 못 견디게 그리운 밤이면 그는 상자를 열어 선물을 쓰다듬어 보곤 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선물들인데. 분명 그럴 텐데. 그래도 그걸 만지면 사무치는 그리움이 조금은 덜어져서.

 

 

 

좋아했어?”

 

 

 

이야기 끝에 밥은 스쳐지나가듯 질문을 던졌다. 루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파도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파고들었다. 밤하늘의 별들이 저마다 각자의 밝기로 빛나며 대답을 종용했다.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불가항력이라고. 들리지 않을 변명을 주워 삼으며 그는 대답했다.

 

 

 

아니.”

 

 

 

그 누가 그를 미워할 수 있을까. 그를 사랑하는 건 관성과도 같았다. 아무리 멀어지려 해도, 다시 튕기듯 되돌아가게 된다. 그 자신만만한 미소를.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는 그의 표정을. 딱딱하지만 따뜻하고 듬직한 체온을. 어떻게든 다시 되돌아오는 그의 모습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랑하고 있어.”

 

 

 

루스터는 눈을 감았다. 어느 새 고인 눈물들이 그의 눈꼬리를 타고 내려가 모래사장을 적셨다. 10년간 담아놨던 감정은 끝내 범람했다. 막을 수 없었다.

 

 

 

막고 싶지도 않았다.

 

 

 

 

 

-

 

 

 

 

 

루스터는 자신이 어떻게 달리는지도, 어떻게 숨 쉬는지도 모른 채 달렸다. 한계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금방이라도 폐부가 찢길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달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복도를 지나가던 간호사가 전력으로 뛰는 그를 보고선 뛰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루스터에겐 들리지 않았다. 겨우 도달한 복도 끝 병실 앞에서야 그는 가까스로 멈춰 설 수 있었다.

 

 

 

, 허억.’

 

 

 

숨을 몰아쉬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고. 루스터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내뱉은 후에야 병실 문을 열 수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겨우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

 

 

 

매버릭은. 그 철없는 삼촌은. 무사히 돌아온다며 약속까지 하고 떠난 사람은.

 

 

 

‘...못 지킬 약속, 하지나 말지.’

 

 

 

새하얀 붕대에 온 몸이 꽁꽁 묶인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감긴 눈꺼풀은 미동조차 없었고, 잠든 얼굴은 화날 정도로 평온했다. 루스터는 조용한 병실 안을 가로질러 매버릭의 침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진이 다 풀려 더는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

 

 

 

사고였다고 했다. 버드 스트라이크로 기체는 망가졌고 전투기는 추락했다고 들었다. 다만, 그건 매버릭이 아닌 다른 파일럿의 사고였다. 그때 그는 다행히 재빠르게 회피해 기체가 손상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문제는 사고를 당한 파일럿이었다. 그는 추락하는 기체 안에서 정신을 잃었고, 후발부대로 출발한 매버릭은 탈출하지 않는 선발부대의 동료를 깨우기 위해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그 하강의 끝에 동료 파일럿은 깨어나 탈출했지만, 매버릭은 중력과 더불어 거리를 좁히기 위해 빠른 속도로 몰던 전투기를 제시간 안에 상승시키기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기체를 포기하고 탈출했지만, 고도가 너무 낮아 낙하산을 폈음에도 부상을 입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왜 그랬어요, .’

‘....’

대체 왜..’

 

 

 

사실 매버릭이 할 필요 없었던 일이다. 매버릭의 앞엔 이미 앞서 출발한 전투기 대열이 있었으며 그들이 추락하는 전투기와 더 가까웠던 탓이다.

 

 

 

하지만 매버릭은 그들 모두를 추월하며 지상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떨어지는 기체와 가까이 붙는다 한들,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면서.

 

 

 

선물, 사온다고 했으면서.’

 

 

 

루스터의 목소리에 끝내 물기가 서린다. 그는 힘없이 침대에 놓인 매버릭의 손을 감싸 쥐며 눈을 깜빡였다. 아롱진 눈물이 눈썹 끝에 매달려 새하얀 침대보를 적셨다. 그 차가운 손끝을 감싸 쥐곤 자신의 이마에 묻었다.

 

 

 

항상 불안했다. 떠나는 그 모습이 언제나 미련 한 톨 없어 보여서.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그 모습이 금방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서.

 

 

 

언제나 당당하고, 해맑고, 잘 웃지만.

하늘이 화창할 때, 무더운 여름의 한복판에, 7월의 끝자락에.

그 찰나, 당신은 서글피 웃고 있었노라고.

웃음이 울음보다 더 슬퍼 보인다는 걸, 당신을 통해 알게 되었다.

 

 

 

‘....’

 

 

 

당신이 하늘을 떠날 수 없다면,

 

 

 

‘..., 미안해요.’

 

 

 

내가 당신의 하늘에 속하겠노라고.

 

 

 

, 아버지를 따라 해군 파일럿이 될 거예요.’

 

 

 

그리하여 당신이 쉽게 떠나갈 수 없도록. 당신의 곁에 서서 당신을 지키겠노라고.

그 날, 결심했다.

 

 

 

 

 

-

 

 

 

 

 

루스터. 네 마음을 고백해 보는 게 어때?”

“....그러다가 완전히 틀어지면? 다신 보지 못하면?”

 

 

 

밥은 옆을 돌아 루스터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친 표정이 느리게 그의 얼굴 위를 배회했다. 밥은 다시 정면으로 얼굴을 돌렸다. 오늘따라 밤하늘이 맑아서 그런지, 별빛이 눈부시게 빛이 난다.

 

 

 

내 생각뿐이지만.”

“....”

그렇진 않을 거 같아.”

 

 

 

루스터는 모르는 매버릭의 얼굴이 있다. 그 날, 모든 게 엉망으로 끝난 날. 밥은 루스터의 뒤를 따라가다 예기치 않게 매버릭과 루스터의 대화를 들었다. 루스터는 고개를 숙이느라 보지 못한 매버릭의 얼굴을. 밥은 봤었다.

 

 

 

너에게 매버릭이 소중한 만큼, 매버릭에게도 네가 소중할 것 같아.”

“....”

항상 돌아왔다며. 하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

 

 

 

루스터는 잠시 말을 고르기 위해 침묵했지만, 끝내 이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는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알기라도 한 듯 밥은 조용히 덧붙였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

“....”

어떤 결론이 나든, 매버릭이 널 떠나진 않을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알아?”

 

 

 

밥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해안가의 부드러운 모래들이 그의 옷에 들러붙어 있었다. 밥은 옷을 가볍게 툭툭 치며 루스터의 물음에 대답했다.

 

 

 

매버릭은 항상 너에게 다가가잖아.”

“....”

그래서 알아. 그런 눈빛을 가진 사람이 널 떠날 리 없다는 걸.”

 

 

 

 

 

-

 

 

 

 

 

아버지의 친구였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어른이었고. 자신을 어릴 적부터 돌봐준 사람이었다.

 

 

 

이래선 안 돼. 이런 감정은 용납할 수 없어.

 

 

 

처음 제 속에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자각했던 날, 그는 변기통을 부여잡고 내내 헛구역질을 했다.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런 마음을 품을 수가 있어?

 

 

 

그건 배신이었다.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

 

 

 

 

 

고백을 하자. 이후의 관계가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한 번 해보자. 밥의 조언대로, 자신의 바람대로. 그는 이야기하기로 했다. 제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했던 자신의 감정을. 그 숱한 밤, 스스로가 역겨워 그저 삼키기만 했던 수많은 말들을.

 

 

 

그래서 루스터는 그 날, 훈련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미 앞전 순번으로 끝난 자신의 훈련 뒤에도 그는 텅 빈 대기실에 앉아 그들의 훈련이 빨리 종료되기를, 약간은 벅차고, 설레며,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 사고가 일어날 때까지.

 

 

 

 

 

-

 

 

 

 

 

코요테가 훈련 도중 기절했다. 추락하는 기체를 따라 매버릭은 지상으로 전투기를 몰았다. 이후 일어난 버드 스트라이크로 피닉스와 밥은 기체를 버리고 탈출했다. 다행히 탈출 과정에서 부상은 없었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그들은 모두 병원에 갔다. 모두가 무사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훈련은 끝이 났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루스터는 마른세수를 하며 텅 빈 대기실에 앉아 기다렸다. 올 것이란 걸 알았다. 밥이 말했듯이, 매버릭은 언제나 자신에게 다가오니까. 그를 결코 홀로 두지 않으려 하니까.

 

 

 

이윽고, 강의실 문이 열리고.

 

 

 

매버릭이 들어왔다.

 

 

 

 

 

-

 

 

 

 

 

당신이 내게 상처를 줄 방법을 알고 있듯이.

 

나 또한 당신에게 상처를 줄 방법을 알고 있어.

 

 

 

 

 

-

 

 

 

 

 

매버릭은 지쳐 보였다. 재회한 이후, 그는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웃지 않았다. 루스터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피로한 안색의 그를 몰아세우고, 상처 주고, 화를 냈다.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끊임없는 충동이 그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불길은 계속해서 타올랐다. 모든 감정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을 때. 그 말이 루스터의 마음을 산산조각 냈다.

 

 

 

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 하늘에선 생각하면 죽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야 돼!”

 

 

 

루스터는 웃고 싶다가도, 무너져 울고 싶었다. 그의 발치에 꿇어 앉아 발목을 으스러뜨리고 싶다가도, 그와 함께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었다. 썩은 감정이 해일처럼 범람했다. 혀끝이 독을 머금고 칼날을 세운다.

 

 

 

아버지는 당신을 믿었죠.”

 

 

 

매버릭의 눈이 충격으로 물드는 걸 바라보며, 루스터는 자신의 마음 또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텅 빈 마음에 매버릭을 흔들었다는 희열감이, 그런 자신을 향한 경멸감이, 매버릭을 향한 죄책감과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다.

 

 

 

전 아버지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 둑이 터진 마음은 자꾸만 바깥으로 화산처럼 폭발해 나간다. 매버릭의 텅 빈 표정이, 그 굳어버린 몸짓이 자꾸만 루스터를 자극한다.

 

 

 

아버지에게 질투하는 아들이라니.

나는 죽어 어떤 지옥 속으로 떨어질까.

 

 

 

“....넌 지금. 흥분했어, 루스터. 나중에, 나중에 다시..”

 

 

 

뒷걸음질 치며 그에게서 멀어지려는 매버릭을 우악스레 붙들고 루스터는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간다. 코앞에 그의 숨결이 들려온다. 충격으로 확장된 동공이 루스터의 얼굴을 담는다. 당신의 눈 속의 나는, 어떤 표정으로 비칠까.

 

 

 

나중 언제요?”

루스터..”

 

 

 

양 어깨를 꽉 틀어잡아 그가 더는 벗어날 수 없도록 한다. 꽤 아플 텐데도 신음 한 번 내지 않는다. 올리브 색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린다. 그가 떨리는 손길로 루스터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끝에 물기가 묻어있다.

 

 

 

. 나는 지금 울고 있구나.

 

 

 

그제야 깨닫는다. 바보같이, 멍청하게.

 

 

 

울지 마.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왜 당신이 사과를 해요?

 

 

 

내가 전부 미안해. 널 떠나선 안 됐는데..그런 말도 해선 안 됐는데..”

아뇨.”

 

 

 

루스터는 눈을 깜빡여 흐릿한 그의 얼굴을 다시금 선명히 볼 수 있게 눈물을 털어낸다. 하지만 자꾸만, 양 뺨을 적시는 눈물은 끝없이 흘러간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아냐! 내 잘못이야. 너는 잘못 없..”

하하..이게 어떻게 당신 잘못이야.”

 

 

 

절박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바싹 다가가며 루스터는 눈을 감았다. 떨리는 눈꺼풀을 감으며 그는 시야에서 매버릭의 얼굴을 지웠다.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틀어 눈을 감고 그에게 키스했다.

 

 

 

창문 밖으로 비가, 세상을 지울 듯이 내리고 있었다.

 

 

 

 

 

-

 

 

 

 

 

여윈 팔이 힘없이 이불보를 움켜잡고 있었다. 화창한 봄의 어느 날이었다. 창문 밖으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창문을 살짝 열어, 봄의 꽃내음과 참새의 노랫소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루스터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브래들리.’

‘...깨셨어요?’

 

 

 

브래들리의 어머니, 캐롤은 작은 걸음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녀는 눈을 떠 자신의 눈앞에 어색하게 서 있는 장성한 아들을 보았다. 어느 새 이렇게 커서, 듬직하게 자랐을까. 그녀는 설핏 미소 지으며 침상 아래 놓인 간이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렴.’

 

 

 

루스터는 순순히 그녀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고 어색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순이 돋은 나뭇가지가 창문 밖에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앉아 있는 자세가 불편한지 잠시 몸을 움직이더니 이윽고 마른 손가락으로 무릎 위에 놓인 루스터의 손등을 토닥였다.

 

 

 

아직 그 꿈은 버리지 않았니?’

‘...죄송해요.’

 

 

 

그녀는 손을 거두곤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갈 날이 가까워져 오는지,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죽음의 장막이 두렵지 않은 까닭은 그 너머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까.

 

 

 

그 사람도 꼭 너와 같았지.’

‘...아버지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본인이 원하는 건 꼭 해야만 하는 성격이었어.’

 

 

 

그녀는 물끄러미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부턴가 자신의 아들은 저런 표정을 종종 짓곤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구스가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 전, 제 마음이 거절당할까 끙끙 앓을 때의 표정이었다.

 

 

 

‘...포기할 수가 없어요.’

그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니?’

 

 

 

고개를 숙인 루스터가 그녀의 말에 놀란 표정을 그대로 드러낸 채 고개를 들어올렸다. 동그랗게 뜨인 그 눈동자는 그리운 그 사람의 눈과 똑 닮아 그녀를 슬프게도, 기쁘게도 만들었다. 살아오는 내내 그랬다. 행복했고, 불행했다. 삶은 어찌도 이리 모순적인지. 그녀는 작게 웃으며 짓궂게 놀렸다.

 

 

 

모를 거라 생각했니?’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는 바람이 흘러나오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향긋한 꽃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캐롤은 아주 오래 전, 그녀를 떠난 무심한 이를 그려봤다. 고백을 하기 직전, 어물거리는 입술을.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바퀴와 흔들리는 눈동자를. 좋아해, 그녀가 말하자 크게 뜨인 다정한 눈동자를.

 

 

 

넌 아버지와 아주 많이 닮았어.’

‘....’

그래서 알았지. 어느 순간 네 아버지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바라보고 있었거든.’

 

 

 

그녀를 사랑하며 짓는 그 모든 표정을 그녀 또한 사랑했기에. 떠나는 매버릭의 뒷모습을 보며 그와 똑같은 표정을 짓는 자신의 아들을 목격한 날, 어쩌면 그녀는 오늘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말을 잃은 자신의 아들을 다시 돌아보며 그녀는 슬프게 미소 지었다.

 

 

 

그이도 매브와 함께 하늘을 나는 걸 가장 좋아했어.’

‘....’

그래서 어쩌면, 예감하고 있었는지 모르지.’

‘....’

나는 두려웠어. 내 아들마저 저 하늘에 뺏길까봐.’

‘....알아요.’

아마 매브도 그럴 거야. 널 잃을까봐 두려웠겠지.’

그래도 전 가야해요.’

물론, 그럴 거라는 걸 알아. 하지만 너 또한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있단다. 나는..내가 떠난 뒤에도 네가 너무 이르게 우릴 따라오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할 거야.’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가 매버릭에게 부탁한 일이 그들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때론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저도 다치지 않도록, 오래 살도록 노력해 볼게요.’

물론 그래야지.’

‘....매버릭을 좋아하는 제가..이상하지 않으세요?’

난 너에게 이미 못할 짓을 했어. 그러니, 엄마로써 그것 하나만큼은 널 응원할게.’

 

 

 

루스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캐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싱그럽게 젊은 시절, 구스의 무릎에 앉아 피아노를 뚱땅거리던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일순간 환하게 웃었다. 매브. 내 오랜 친구. 부디 나의 아들이 널 이 지상에 붙들 수 있는 중력이 되기를.

 

 

 

 

 

-

 

 

 

 

 

창밖으로 내리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서로의 입술을 뗀 그들 사이의 적막은 대지를 두드리는 힘찬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루스터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매버릭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손으로 제 입술을 만져보자, 말캉한 입술의 촉감이 느껴졌다. 방금까지 이 입술이 매버릭의 입술을 덮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귓바퀴까지 붉게 색이 번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

“....”

 

 

 

그들은 그렇게 오래도록 서 있었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한 채, 그저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며.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매버릭에게 톰 카잔스키의 부고를 알릴 때까지.

 

 

 

 

 

-

 

 

 

 

 

당신이 또다시 누군가를 잃을 줄 알았다면.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는 건데.

그 독한 말 대신, 하고 싶은 말들은 폭신한 구름 같은, 달콤한 솜사탕 같은 말들뿐이었는데.

사실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노라고, 하늘을 바라보면 언제나 당신이 생각난다고.

중력이 거꾸로 작용하는 당신의 세상에서, 나 또한 함께 살고 싶었노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이스맨은 죽었고, 그의 장례식에 덮인 흙이 마르기도 전에 사이클론은 매버릭을 교관직에서 내쫓았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낯선 발걸음 소리가 바닥을 울렸을 때, 그 걸음걸음마다 루스터의 심장도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이대로 끝인 걸까? 당신과의 관계도, 이번의 작전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고개를 테이블 쪽으로 수그렸을 때, 기적처럼 매버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스터는 번쩍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봤다. 그 화면 속에서, 매버릭은 담담하게 선언했다.

 

 

 

215. 그 기적의 시간을.

 

 

 

 

 

-

 

 

 

 

 

이후의 상황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작전은 코앞이었고 그들은 언제나 시간에 쫓겼으므로. 루스터는 잠시의 시간을 내 매버릭과 함께 그 날의 일에 대해 대화하고 싶었지만, 그들에겐 그 잠시의 여유조차 사치였다. 작전일이 다가올수록 그는 초조해졌지만, 이윽고 마음을 비웠다.

 

 

 

생각하지 말자.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그는 당장 코앞의 훈련에 집중했다. 반드시 뽑혀야 했다. 그가 오래도록 바란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했고, 기어코 매버릭의 윙맨으로써 작전을 함께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벅찬 가슴이 부풀어 올라,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바로 오늘, 작전이 시작되었다. 브리핑 내내 집중하고 있던 루스터는 설명이 끝나고 전투기에 탑승하려는 매버릭을 불렀다.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루스터는 어쩌면 긴 시간 방황하고 괴로워했는지도 모른다.

 

 

 

. 할 말이 있어요.”

 

 

 

밖은 어수선했다. 배는 작전 수행지로 출발하기 시작했고 모든 정비사들이 나와 마지막 기체 점검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우뚝 선 그들 곁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바쁜 걸음으로 스쳐지나갔다. 불러 세운 매버릭은 여상한 표정이었다. 루스터는 수많은 매버릭의 표정을 마주했었지만 지금만큼 속마음을 모르겠던 적은 처음이었다. 담담한 눈길이 그를 관통하듯 직시했다. 루스터는 머뭇거리며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매버릭은 한 쪽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나중에.”

하지만, !”

나중에 무사히 다녀오면, 그 때 이야기하자.”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의 모습은 정말 평소와 같아 보여서. 루스터는 자꾸만 나아가려는 발길을 가까스로 붙들어 맸다.

 

 

 

매버릭은 약속했다. 물론 그 약속을 그가 정말 지키느냐가 관건이겠지만.

어찌됐건, 그는 언제나 돌아왔으므로.

 

 

 

알겠어요. 대신 그 땐, 꼭 대화하기에요.”

그래.”

 

 

 

그래서 루스터는 그를 등 뒤에 남겨두고 떠났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의 그를 믿었기에.

 

 

 

 

 

-

 

 

 

 

 

무사히 다녀오면. 그 때 이야기하자.

 

 

 

그 말 한마디로 자신의 입을 막았으면서.

 

 

 

매버릭은..죽었어.”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래.

 

 

 

 

 

-

 

 

 

 

 

루스터!!”

 

 

 

기체를 기울여 항로에서 이탈하자 놀란 피닉스가 그를 불렀다.

 

 

 

너희들은 먼저 가.”

무슨 짓이야! 명령을 어길 셈이야?! 매버릭은 구할 수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지금가면 너도 죽어! 죽는다고, 루스터!”

 

 

 

귓가에 울리는 피닉스의 날카로운 부름에도 루스터는 흔들림 없이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그가 평생토록 원한 광활한 하늘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 푸르고, 아득하고, 닿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하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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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버릭 루스터매브

2023.12.19 23:0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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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와 센세 재업은 사랑이야 ㅠㅠㅠㅠㅠㅠ센세 사랑해 이제 정독해야지 ㅠㅠㅠㅠ
[Code: 5728]
2023.12.19 23:3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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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와 센세 숨도 못쉬고 읽었어 이건 문학이야 탑건 원작이잖아 미치겠다 너무 두근거려 ㅠㅠㅠㅠㅠ‘하늘이 너의 품에 안길지도.’ 이 말에 브래들리는 파일럿이 되기로 결심한거구나 그에게 하늘은 곧 매버릭이었으니까 ㅠㅠㅠㅠㅠ
[Code: 5728]
2023.12.19 23:4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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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좋아했냐? 고 묻는 말에 사랑하고 있다고 현재형으로 대답하는 루스터 미쳤어 ㅠㅠㅠㅠㅠㅠ긋치 긋치 버드 스트라이크 사고 후 매버릭을 몰아세우면서 선을 넘어버린 루스터가 매버릭에게 키스하는거 원작에도 있잖아 나는 봤다고 ㅠㅠㅠㅠ루스터와 매버릭의 과거와 현재를 이렇게 실감나게 그리고 절절하게 그려줘서 정말 감탄했다 센세는 천재다 ㅠㅠㅠㅠㅠㅠ이제 어나더 읽으러 갈게 나 막 가슴이 두근두근대 너무 좋아서 ㅠㅠㅠ
[Code: 5728]
2023.12.19 23:1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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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센세 아니 이 한파에 열이 올라서 반팔반바지 차림으로 동네 한바퀴 뛰고왓다니까 이게 말이돼????? 그치만 센세 문학 정독하는 동안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주체할 수가 없었어......
[Code: 1997]
2023.12.19 23:1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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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건2 소설판 언제나왔지 뭐지 이게 탑건1.5-2가 아닐리가 없는데...... 루스터 심정 변화가 너무 눈물나서, 루스터가 어떻게 매버릭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사랑할 수 밖에 없었는지 와닿으니까 너무 가슴이 아파서... 루스터는 매버릭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거지 지금 빵리빵쇼의 첫사랑에 너무 가슴이 아려 시바....... 센세 혹시 이름이 브래들리라든가 성이 브래드쇼라든가 콜사인이 루스터 뭐 그런거 아니지
[Code: 1997]
2023.12.20 06:5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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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재업은 사랑이야..ㅠㅠ 좋아했어? 아니.. 사랑하고 있어라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 눈물난다
[Code: b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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