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87396929
view 464
2024.03.11 20:29
무석중 MVP 주제에 북산고등학교에 자진 지원해서 그 해말간 얼굴로 "목표는 전국재패입니다!" 외치던 그 소년이 싫었다. 그건 원래 내가 중학교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밀던 구호란 말이다.

정대만이 싫었다. 키도 나보다 작으면서. 빅맨인 내 플레이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 다분히 의식하고, 언젠가부턴 무리해서 카피를 하는 듯 보이다가, 무리를, 해서, 무릎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지더니, 병원에 입원을 하고, 그대로 2년간 농구부에 돌아오지 않은 그 소년을 정말정말 싫어하고 미워했다. 나쁜 새끼. 그러면 그 2년간의 네 모든 행적과 아픔은 내 잘못이 되잖아. 내가 나쁜 놈이잖아.

정대만이 싫다. 또 그놈의 무릎, 땅에 털썩. 꿇으면서 안선생님 앞에 아이처럼 울어버리면서 농구가 하고 싶다고 애원했던 걔가 너무너무 싫었다. 우리애들 다친것도 다친건데. 나는 다 집어치우고 또 그놈의 무릎. 꿇는 거 보니 감이 왔다. 이 새끼 또 지몸 안아끼겠네. 아. 정대만이 너무 싫다. 그런데 전국대회 가려면 쟤를 주전으로 안세울수도 없다. 나는 전국대회를 위해 또 쟤의 몸을, 무릎을 혹사시켜야 하는건가. 아니. 사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전략적으로 답은 정해져 있다. 전국을 재패하는 길은 정대만이라는 도로. 걔를 밟고, 걔를 통해 지나가지 않으면 뚫을 수 없다. 정대만을, 그 아이의 몸과 투혼을 '태워서' 밀고 가야한다. 이러면 내가 나쁜 놈이잖아. 또. 내 꿈에 왜 죄책감과 아픔을 심어주는데. 왜 단순하고 무식하고 다혈질인 듯한 표정 뒤 복잡다단한 얼굴. 그리고 나랑 준호를 바라보는 그 복잡미묘한 친밀감, 또는 거리감,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언젠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슬픈 눈을 고개 숙여 훅 감추며, 그저 그 입술만을 떨면서 움찔, 우물하다가 그냥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사라져버렸던 그 언젠가의 모습을. 나는 정말 싫어했다. 여름이 깊어질 때까지 그 아이가 계속 꿈에 나와서 괴롭혔고, 걔가 나한테 절대 하지 않을, 말을 나한테 하면서, 걔가 나한테 절대 하지 않을. 어떤 행동을 나에게 하는 그 꿈이 그 해 여름 내내 나를 괴롭혔던 악몽이었다. 나는 이룰 수 없는,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미워한다.


정대만은 정말 나쁜 놈이다. 한창 악몽에 시달리고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어느 새 내 등 뒤에 와서 멋대로 훅 안아버리더니, "좋아해. 치수야." 라고 다짜고짜 내뱉어버린 그 새끼는 진짜 양심도 없고 귀신보다, 도깨비보다 무섭고 못된 놈이다. 경기 뛰고 와서 덜덜덜 떨리는 팔로, 진짜 애를 쓰고 혼을 태워 만들어낸 에너지를 실어 나를 멋대로 가둬버린 그것은 세상 어느 스포츠맨도 하지 않을 거대한 반칙이었다. 그것만으로 이미 퇴장감인데, 내 등에, 내 뒤에, 몸을 꽈악 붙이면서, 그애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그리고 그애의 젖고 떨리는 숨결과, 그애로 인해 젖어가는 내 등이 고스란히 느껴지게 만드는 그 거부할 수 없는 정적. 모든 조명은 아웃. 모든 소음은 뮤트. 그 공간에 오로지 정대만만 존재하고, 정대만만을 느끼게 하는 그 아이의, 그 아이만의 절대적인 힘. 그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멈추어. 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팔을 풀어, 나를 놓아주고, 멈추어진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면서 덧붙였다. "이제와 말하기엔 이미 늦었지만 말야." 나쁜 새끼. 가증스런 새끼. 너 그래놓고 잘만 말했잖아. 잘도 나한테 '고백'을 했겠다.
그것은 너무나도 강력한 주문이자 저주였다. 정대만은 요사스러운 놈이다. 마법(魔法)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놈이다. 그 마법이, 그래, 나를 정말 그 여름의 절정까지 괴롭게 하고 나를 일으켜 세우고 악몽을 떨치게 하고, 다친 것을 참게했다. 그 나쁜 놈이 걸어놓은 사악한 주문이 말이다.


정대만이 정말 싫다. 내가 전국대회 마지막 경기에서 신현철을 무리하게 뛰어넘어가려다 기절해버렸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서, 가장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대고는, 손을 뻗어 당기다가 바보같이 넘어져버린 그놈이 정말 부끄럽고 싫었다. 우리애들이 일으켜줘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더 싫은 건, 내가 그놈 때문에, 그, 그 순간 때문에 내 진짜 꿈인 '전국재패'의 꿈을, 아니 욕심을 내려놓고 '내 꿈은 이미 이루어졌어'라고, 나도 모르게 선언해버린 것이다. 정대만. 너는 결국 내 꿈을 나의 의지로, 내 스스로 내려놓고 포기하게 만든 아주 나쁜 놈이다.


솔직히 말해, 정신이 아직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바라본 그애의 얼굴...그리고 구도는 내가 동화책에서 본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솔직히 말해, 이런 말 하는 내가 정말 싫고 부끄럽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화는 공주님들의 이야기였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백설공주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죽은 듯 잠들고 잠들 듯 죽어버린 공주님을 깨우는 왕자님의 키스가 너무 멋있고 좋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 없는 따뜻한 눈물을 또르르 흘리게 하는 그 클라이막스가, 매번,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거의 졸업할 무렵이 될때까지도 나를 울리는 '버튼'이었다.

'오빠는 공주 이야기 정말 좋아하네.' 너덜너덜해진 동화책을 손에 쥐고 또 눈물버튼 작동해버린 내 모습을 보고, 소연이는 너무 당연해서 이상하지도 않다는 듯 곁에서 자기 일을 하며 무심하게 물어봤었다. '왕자님이 되고 싶은거야? 슬리핑 뷰티나, 스노우 화이트 같은 공주가 이상형이야?'

왕자는 무슨. 나를 봐. 나는 미녀와 야수의 Beast 역할이 딱이지.

'하지만 Beast도 원래 왕자잖아? 그럼 오빠는 벨 같은 여자를 만나야겠네'

소연아.
그거 아니야.
미안해.
내가 동경하는, 내가 맡고 싶은 역할은 말이야.
'왕자'가, 아니야.


그런 나를 나는 나의 성장기 내내 죽도록 미워했고 입을 닫게 만들었고 운동을 하면서 군기로, 정신력으로 다스렸다. 나는 채치수 안의 진짜 채치수를, 너무나도 증오하고 미워하고 혐오하고 싫어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남자, 아니 사람은 내안의 아주 작고, 부드럽고, 여린 채치수, '였'다.


그런데, 내가 가장 좋아...사랑하는 사람이,
그 산왕전이 끝나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에게,
채치수. 걔를 멋대로 내 안에서 꺼내서,
멋대로, 왕자의, 키스를 해버렸다.
내가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던 꿈의 방식으로, 너무나도 정확하게, 꿈에서 보고, 동화책처럼 꿈꾸던, 그러한 방식으로.

정대만 그 나쁜 놈. 그 궁극의 마법으로 인해,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햇수로 18년 동안 죽은 듯 잠들고 잠들 듯 죽어있던 '그 분'은 말이야.
이제 다시는 잠들 수가 없게 됐다고.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러냐.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랬을까. 나는 고3이고, 준호랑 같이 은퇴할거고. 너는, 너는 농구를 더 해야겠고. 스타의 부활에 열광하는 팬들을 향해 주저앉은 시간만큼 더 힘을 내어 나아가야겠고- 뭐 그러한 사정들을 다 떠나서. 키스는 클라이막스잖아.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에서 '절정'에 달하는 부분. 원래 동화는 '왕자와 공주님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결말, 엔딩을 내야 한다고.


우리한텐 그런 엔딩이 없어. 없었어. 우리 결혼 못해.
그럼 우린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수 없는건가?
진실한 사랑의 키스는 이미 해버렸는데, 엔딩은 배드엔딩 뿐이라는건가?

이 루트를, 정대만 너는 어떻게 책임지려고, 어떻게 마무리하려고 그런 선택지를 골랐던거야? 나는 지금도 궁금하고, 묻고 싶어.

근데 정말 진지하게 물어도, 그놈의 진실한 대답은

"별 생각 없었어."

이거일거 같다는 게 정말 이놈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나쁜 놈인 부분이지만.



뭐 생각보다 이 이야기가, 고해성사가 엄청 늘어지고 길어지긴 했는데, 그 다음의 이야기는 long story short 모드로 압축하려 한다.


나는 윈터컵에 나갔다. 정대만이랑 같이 고교시절 마지막 농구를 하기 위해서.

정대만은, 정말로, 정말로 윈터컵에서 나의 꿈, '진짜 전국재패'를 이루어주었다. 북산고등학교 농구부는, 우리는 진짜 우승기와 우승컵을 안고 정말 많이 울었고, 울면서,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모두하고 그렇게 했지만, 카메라 앞에서 정대만과 나는, 눈빛을 한번 교환하고 그 누구보다도 진하게 끌어안고 숨결을 나누었다. 우리 둘만의 비밀이지만, 동시에 세상 사람들한테 아주 보란듯이.

정대만은 대학 농구부에 들어갔다. 농구로 대학을 갔다. 농구부 명문으로 유명한 대학교였다. 나도 대학을 갔다. 누가봐도 누가 이름을 들어도 아! 하는 유명한 명문대였다. 근데 나도 농구로 대학을 갔다. 최종 입시 면접에서 교수님들이. 나의 북산고등학교 농구부 동아리에서 있었던 경험을 아주 좋게 들어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성적보다 조금 더 좋은 수준의 과와 대학에 최종 합격을 했다. 나는 농구로 대학을, 명문대를 갔다.


개강이 한창 지나고 새터 오티니 동아리 오티니 과오티니 온갖 오리엔테이션이 지나고 이게 대학 생활이라는 건가...... 생각보다 참기 힘들게 무거운, 혹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그 '대학 생활'이라는 것의 무게를 자각하기 시작하는 그 시기에, 정대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치수야 우리 같이 벚꽃보러 안 갈래?'
'...중간고사 주간인데?'
'그 전에 수업들 휴강 때리지 않나? 야 이걸 어떻게 참냐. 놀자. 제발.'
'그거 놀라고 준 시간 아니잖아. 중간고사 준비 기간이다. 너 대학교에서는 낙제하면 진짜 힘들어진다'
'아 한 번 한 번 정도로 낙제 안먹어 그리고 너가 말했잖아 공부는 평소에 하는거라며! 너 그 주에 공부 안한다고 낙제먹을 그런 애 아니잖아! 예습복습 철저히 했겠지.'
'......나 과 수석이 목표인데.'
'......알겠다. 스무 살의 봄은.....첫 벚꽃은......그냥 뭐......농구하다가 나오는 길에 그냥 어. 하고 보고 마는거지. 그치? 나 혼자!! 혼자!!! 어???? 나오면서!!! 처량하게!!!!'
'도서관에서 보는 벚꽃이 얼마나 낭만적인데'
'흥. 너는 혼자가 그리 좋으냐!'
'아니 보러오라고 우리학교 도서관에.'
'뭐?'
'중간고사 전 주 수요일에...... 도서관 앞 벚꽃나무에서 기다릴게.'
'......'
'같이 보고, 공부하고, 밥먹자.'
'어. 어. 어 꼭 연락해 나 시간 꼭 맞출테니 나 진짜 가. 삐삐쳐! 갈테니까!'



그리고 나는 우리학교 도서관에서 내 옆자리, 앞자리에 정대만을 앉혀놓고 공부를 했고, 공부를 시켰고, 정대만이 머리아프다고 울먹일때쯤 창가로 가서 벚꽃나무를 봤고, 햇살의 움직임과 바람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모든 빛깔과 모든 낙화의 속도를 목격했다. 그리고 책을 두고 바깥에 나가서 그 모든 따스하고 시원한 공기의 냄새와 온도를 같이 호흡-들이마쉬고, 내쉬었다.

'나 들어가면 공부해야 되는거지.'
'어. 당연하지.'
'공부하기 싫어어......'
'한 바퀴 더 돌아야겠다.'
'바라던 바야.'
'들어가면 공부해야돼. 책에서 손 떼지 마.'
'아 진짜 차라리 운동장 200바퀴 돌래 진짜'
'대만아 우리 조금 먼 코스로 갈래? 코스도 꽤 길고, 사람도 없고 뭐.'


나는 해질무렵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우리학교 뒷뜰 숲쪽 터로 정대만을 데려가서, 그 나쁜 새끼, 나쁜 놈을 나의 '고백'으로 혼내줬었다. 그건 그놈의 자식이 멋대로 고등학교 때 나를 안고, 입을 맞추며 했던 그 짓거리에 대한 나의 복수였다.


그리고 정대만 그 나쁜 놈이, 내 고백을 가만히 맞고 있지 않고 또 반격을 해왔다. 정대만 그 나쁜 새끼가, 그날, 나를 도서관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동이 틀때까지. '사랑해.'라고 말하면서, 입을 맞추고 껴안으면서 나한테 '무언가'를 했다! 그 나쁜 새끼가 말이다. 뭐. 그놈을 아무도 모르는 으슥한 캠퍼스 안 비밀공간으로 끌어들인건 채치수니까 나도 나쁜 놈이다. 응큼한 놈이다.

우리는 동이 틀때까지 나란히 누워, 눈빛을 교환하고 손을 잡고 숨겨왔던 많은 마음들을 우리의 목소리로 주고받았다. 황혼을 보고, 한밤을 새고, 여명을 맞으면서 눈부신 해가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을 함께 봤다. 인생의 다시 오지 않을, 스무 살의 봄과 스무 살의 벚꽃놀이를. 우리는 함께했다.

우리는 그 뒤로도 잘 지냈다. 함께. 아주 오래오래.






퍼슬덩 대만탑 치수텀 대만치수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
성인글은 제외된 검색 결과입니다.
글쓰기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