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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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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수업과 오후 수업 사이는 다른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길었다. 오후에는 교실을 이동해야 하는 수업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교사들도 수업 준비에 시간이 좀 더 걸렸고 학생들도 이동하는 시간을 주다 보니 인문학만 잡힌 날은 오전과 오후 사이에 빈 시간이 생겼다. 창밖으로 1학년들이 우르르 운동장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톰, 너는 졸업하면 뭐 할 거야?”

3학기를 코앞에 둬서 그런지 진로 상담을 앞둔 오늘의 대화 주제는 ‘졸업 후의 미래’에 대한 내용이었다. 질문을 던진 쪽도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 그렇겠지만 귀족들은 작위를 잇고, 컨트리는 영지 사업을 잇는다. 장남으로 태어났다면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게 당연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톰은 특별히 멋진 계획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콕 집어 질문을 던졌다. 이런 대화 속에서 약삭빠른 녀석들은 서로의 계급을 나누고 친해질 사람을 구분하기도 했다. 톰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대꾸하지 않았다. 당연한 걸 묻는다며 오히려 톰 주변의 친구들이 질문을 던진 동급생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고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피터, 너는?”

톰은 자기가 받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쪽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교실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창가에서 제일 뒷자리에서 턱을 괴고 앉은 아이를 향했다. 피터는 두세 달 사이에 키가 크면서 얼굴 살만 확 빠져 콧대가 매섭게 섰다. 덕분에 날카로운 인상과 진한 눈매, 높은 콧대까지 해서 작년과 다른 의미로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피터를 보며 바라보며 톰은 웃었다. 피터가 미간을 잔뜩 구기며 톰을 노려봐서 시끄럽게 떠들던 녀석들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입은 웃고 있지만 톰의 눈빛 역시 만만치 않았다. 교실에는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오늘도 싸울 거면 제발 밖으로 나가서 싸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톰은 원래 남들보다 커서 눈에 띄었다. 1학년부터 남들보다 다리가 길었다. 3학년 2학기가 되자 앞머리가 자라 눈을 가리는 길이가 되어버렸다. 톰은 엉성한 가위질로 정리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어른스럽게 왁스를 써서 머리를 넘겼다. 그 스타일이 멋들어져 동급생은 물론 신입생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다들 왁스로 머리를 올리는 게 유행이었다. 아침에는 왁스로 고정 되어 단단하게 넘긴 머리가 저녁쯤에 고정이 풀려 한쪽만 살짝 내려오는 것도 멋있다고 난리였다. 톰의 모든 것은 유행이었다. 그의 의견은 신념이 없는 학생들에겐 어려운 문제의 정답처럼 여겨졌다. 그의 신봉자가 점점 늘어났다. 내년에는 학생회장에 나가는 건 어떠냐는 아이들 속에서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서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그걸 지켜보는 피터는 항상 인상을 찌푸렸다. 기숙학교같이 닫힌 곳에서 눈에 띄는 건 질색이었다. 안 그래도 교사들의 주목을 받고 있어서 행동 하나하나가 감시당하는 느낌인데 교실을 벗어나 기숙사에서 마저 그렇게 지내고 싶지 않다. 절대 싫어. 끔찍하다.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 고개를 좌우로 털며 그런 귀찮음을 털어냈다. 제발, 아는 척 좀 하지 마. 나한테 말 걸지 마.

 


 

교사는 피터를 특별대우했다. 마치 깨지는 물건처럼 조심스러워했다. 대놓고 그러진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하려고 해도 은연중에 느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교원들이 학생들 없는 자리에서 물어도 이유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 탓인지 교원들은 툭하면 피터를 괴롭혔다. 사감까지 그를 괴롭혔다면 피터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교사들도 감싸기 힘든, 퇴학하기 딱 좋은 정도의 사고를 치려고 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고 피터는 체벌실 단골이었다. 들어갔다 하면 본보기로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한 학기에 열 명 정도 들어간다고 하는데 마치 피터는 체벌실이 아니라 개인실처럼 드나들며 저 혼자 다 혼나는 모양새였다.

사감 역시 피터를 특별대우한다며 동급생들에게서 원성이 자자했다. 매번 피터는 소등시간까지 혼나고 기숙사 불이 다 꺼지고 나서야 초주검이 되어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걸어들어왔다. 룸메이트가 한 명이라도 없으면 연대책임으로 모두 벌점을 받는다. 벌점을 쓰면서 사감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300년 전통이 있는 기숙사 규칙을 바꿀 순 없었다. 기숙사 사감은 매 맞은 피터를 데려와서 약을 발라주고 치료해 주었다. 뼈가 부러지진 않았는지 늦은 시간까지 봐줘야 했다. 결국 피터를 예외로 두기 위해 제일 안 좋은 3인실을 혼자 쓰도록 했다.

아무리 3인실이라고 해도 기숙사를 혼자서 쓴다는 건 특혜라며 기숙사 전체가 시끄러웠다. 사감실에 와서 따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불만이 조용해졌는데,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사감실에 따지러 온 아이들이 시끄러워 나온 톰이 나서서 그와 룸메이트 할 사람이 있으면 나서보라고 하니 다들 돌아갔다고 한다. 사감은 아이들이 찾아올 때마다 잠잘 시간까지 매 맞는 게 특혜냐고 아이들에게 묻고 싶었지만 소문을 듣고, 그 말을 참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아까 전의 폭풍전야는 폭풍이 몰려오기 전에 자연 소멸했다. 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전에 교사가 이르게 들어와준 덕분이었다. 교사는 교실 분위기를 정리하고 일찍 마쳐주는 것을 조건으로 이른 수업을 시작하였다. 피터는 다시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책을 넘기라는 소리에 맞춰 책장을 넘겼다. 페이지는 모르겠다. 넘기라고 할 때 넘기기만 해도 교사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학 시간은 이래서 좋다. 턱을 괴는데 피부에 소매가 닿았다. 그가 준 소매가 긴 재킷은 손목의 밧줄 자국을 가리기에 좋았다. 다음에 교복을 맞출 때에는 소매만 조금 길게 맞출까? 운동장에는 연한 녹색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바짝 마른 가지에서 녹색 봉우리를 달고 웅크린 나뭇잎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겨울의 끝까지 달려있던 마른 나뭇잎은 다 떨어졌다. 헐벗은 나무들 뿐이라 수업을 빠지고 몸을 숨기기도 어려웠다. 이제 하복을 입으면 재킷 없이 셔츠만 입어야 하는데 그 일도 걱정이 앞섰다. 피터 나름 조심하려고 해도 악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교원들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순종적인 것이 전부인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고. 손목만 두꺼운 천으로 해달라고 할까. 아님 손목에만 붕대를 두를까. 수업과 관련 없는 고민으로 가득 찼다. 다음 장으로 넘기라는 소리도 서서히 들리지 않게 되었다.

 

 

 

체벌실에서 세차게 휘두른 채찍이 등을 후려쳤다. 그들은 상체는 때리지 않았다. 잘못하면 크게 다치는 일이 많았다. 허리나 하체를 노린 모양인데 움츠리다 등의 얇은 살이 찢어진 모양이다. 옷 위로 맞았는데 화상을 입은 것처럼 따끔거렸다. 아직도 피부에서 열감이 느껴진다. 기숙사로 돌아와서 셔츠를 벗으니 하얀 천 안쪽으로 옅은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상의를 벗은 채로 세면실로 향했다. 새 옷을 입더라도 또 피가 묻을 수 있으니까 벗고 이동했는데 차가운 밤공기에 닭살이 돋았다. 어두운 복도를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걸었다. 물을 틀어 피가 묻은 부분을 적셨다. 옆으로 퍼지는 걸 보면서 손가락으로 누르며 부위를 비볐다. 많이 묻은 게 아니라 다행이다. 비누로 문지르면 작은 얼룩만 남기고 사라질 정도였다. 솨아아아, 물소리가 타일에 부딪혀 잔뜩 울렸다. 맷집은 좀 늘었다. 그래도 부동자세를 유지하는 건 무척이나 피곤했다. 세면대에 손을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비누로 문지른 셔츠를 옆 세면대에 집어던지고 수도꼭지 밑으로 머리를 가져다 댔다. 차가운 물이 마구 튀었다. 머리를 적시는 것과 어깨를 적시는 비율이 비슷할 정도였다. 귀에도 물이 들어갔는지 소리가 먹먹해졌다. 수도를 잠그고 머리를 털었다.

“피터.”

그 소리에 심장이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깜짝 놀라서 어깨를 들썩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톰이 서있었다. 언제부터 서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조용한 기숙사 복도에 저런 구두를 신고 걸었으면 발소리가 들렸을 텐데,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너무 놀라서 숨을 갑자기 들이켰더니 놀란 기도에서 기침이 나왔다.

“또 맞았어? 이번엔 너무 심하다.”

기침하는 등을 두드려주려다가 멈춘 손이 상처를 따라 쓸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의 팔을 내치고서 세면대에 던진 옷을 향해 시선을 두고 톰에게서 몸을 돌렸다.

“괜한 참견이야.”

핏자국이 거의 사라진 셔츠를 들고 꼭꼭 눌러서 짰다. 누를 때마다 한두 방울 물이 떨어졌다. 보다 못한 톰이 가져가서 젖은 셔츠를 짜내자 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 안 고마워.”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내민 셔츠를 받았다.

“넌 소등시간 이후에 뭐 하는 거야. 내가 사감한테 이르면 어쩌려고."

“안 그럴 거잖아.”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하고 싶다.”

“가자.”

“어딜? 사감실?”

톰이 피터의 손을 이끌었다. 향한 곳은 피터의 방이었다. 2인실과 다르게 비좁게 침대가 3개 놓여있었고 침구가 없는 침대 위에는 피터의 짐이 어질러져 있었다.

“와……. 여기 사감 몰래 다섯 명이서 살고 있어?”

“신경 꺼.”

“이 꼴을 보고 어떻게 말을 안 해.”

침대 한 쪽에 쓰러진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지런히 탑을 쌓았다.

“아, 하지 마. 제일 밑에 있는 거 꺼낼 때 또 쓰러지잖아.”

“…….”

책상에 올려두면 될 텐데 책상은 또 깨끗했다. 책상에는 덮어 놓은 액자가 두 개 있었다. 덩그러니 그것들만 있었다. 들추면 안 될 것 같아서 눈길만 줬는데 피터가 황급히 액자를 겹쳐 짐 가방 안에 던져 넣었다.

“그러다 유리 깨져.”

“유리 없으니까 걱정 마.”

저건 액자잖아. 사진을 전시하려고 필요한 물건에 왜 유리가 없어? 대화가 진행될수록 의문이 솟구쳤다. 항상 이런 사적인 이야기에 인상을 찌푸리던 피터가 어딘가 쓸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애처로운 표정에 톰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전부 잊어버렸다.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일단 누워 봐.”

피터의 등을 떠밀어 침대에 눕힌 후 살펴보니 가죽 채찍에 쓸린 곳에서 아직도 끈적한 진물이 묻어 나왔다. 손수건을 적셔 등을 닦아내고 후후 바람을 불었다. 몸을 닦고 바람이 불자 피터가 어깨를 움츠렸다.

“나, 양호실 가서 필요한 거 가져올게.”

일어나는 톰을 향해 피터가 말을 걸었다.

“가지 마.”

“……얼른 치료해야지. 흉터 남아.”

“저쪽 침대에 구급상자 있어. 사감 선생님이 가져다 둔 거.”

옷가지를 들추자 그 밑에 베이지색 철제로 된 보관함이 있었다. 중앙에는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것을 보아하니 비상용 구급상자였다. 열어보니 이미 사용한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스테인리스 통을 열어보니 이미 소독약에 솜을 뭉쳐 적셔놓은 것이 있었다.

“얼마나 자주 쓴 거야?”

저도 모르게 나온 중얼거림을 인지하고 나서 톰은 인상을 썼다. 피터가 매를 맞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상처가 생기고 누군가 치료해 줬을 거란 생각을 못 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핀셋으로 알코올 솜을 집어 붉어진 곳을 문질렀다. 찢어진 곳이 따가운지 긴장한 근육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얼굴을 감싼 팔이 더 안으로 모여드는 것이, 긴장으로 꽉 쥔 주먹에 혈관이 도드라지는 것이, 낡은 침대의 스프링이 피터 대신 슬픈 소리를 내며 기울어지는 것이.

“아파?”

“아니.”

“…….”

뻔히 보이는 거짓말과 끝을 모르는 강한 척에 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도 직감한 것이 있다면 피터에게 우는 모습을 들키면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피터는 엎드린 채로 누워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핀셋을 구급상자 뚜껑에 내려놓고 급하게 눈을 비볐다.

“바보같이 그만 맞고 다녀.”

“잔소리는 3학기 시험에서 이기고 말해.”

“너……!”

“누가 누구한테 바보래.”

톰은 킥킥거리는 피터의 얼굴을 보진 못했다. 아마 지금 카메라가 있어도 고개를 벽을 향해 돌린 탓에 그의 얼굴을 찍을 수 없었다. 그래도 어쩐지 저번처럼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구분하지 못할 표정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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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엄청나네
얘들아 왜 아무도 말을 안 해주냐
2024.04.12 11:42
ㅇㅇ
모바일
교원들 대체 무슨 악의를 갖고 학대를 하는거지
저 가학적인 행위가 다른 방향으로 틀어질까봐 조마조마하고

대외적으론 적대적인 라이벌이지만 실질적으론 교내에서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이란게 너무 맛있다
[Code: 61f6]
2024.04.12 11:54
ㅇㅇ
모바일
내 센세가 어나더를 주셨어! ㅅㄹ부터 달고 정독하러 달려간닷
[Code: 671c]
2024.04.12 15:50
ㅇㅇ
모바일
우리 피트 때린 색기덜 다 죽이고 붕붕이 지옥간다....
[Code: c0f9]
2024.04.12 19:32
ㅇㅇ
모바일
센세 넘 재밌어 고마워 ㅜㅜ피트 때리지마 이놈들아
[Code: 2af1]
2024.04.12 21:00
ㅇㅇ
모바일
대체 피트 때릴데가 어딨다고 때려? 저건 그냥 고문 아니냐 얘들 언제 졸업해 기숙사가 아니라 감옥같은데 ㅠㅠㅠ피터에게 무슨 비밀이 있는건지 빨리 밝혀졌으면 ㅠㅠㅠ
[Code: 6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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