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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9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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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제일 많은 수정이 있는듯


[1월 9일 금요일]

편지가 또 들어있어 당황하실 아저씨께

여행 중에 매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쓰려고 했어요. 일기처럼요! 제가 어떤 것을 보고 다녔는지 아저씨에게 알려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연필과 수첩을 챙기는 걸 깜빡하고 말았지, 뭐예요. 오늘 기숙사로 돌아와서 짐을 정리하고 자기 전 책상에 앉아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출발하던 날의 새벽이 잊히지 않아요. 6시 40분에 출발하는 기차라 기숙사에서 6시에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우성이가 5시부터 저희 방문을 두드리면서 깨웠어요. 심지어 이미 출발할 준비를 다 마친 상태로요. 하도 세게 두드려서 제가 눈도 뜨지 못하고 벽을 더듬어가며 걸어가 문을 열었다가 우성이의 상쾌한 목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니까요. 자기 짐을 저희 방에 던져두고 저와 달재가 씻고 준비하는 동안 뛰어나가서 아침으로 먹을 크루아상을 사 왔어요.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새벽공기를 맞으며 따뜻한 크루아상을 먹으니 그렇게 맛있는 크루아상은 다신 먹을 수 없을 거예요. 따뜻한 커피까지 정말 천상의 맛이었다니까요.
저희의 첫 행선지는 북쪽 지역이라 기차를 타고 쭉 올라갔어요. 아저씨는 기차 안에서 간단한 음식을 먹은 적이 있으세요? 마치 소풍 같은 기분이랍니다. 샌드위치를 씹으며 유리창 너머로 점점 눈밭으로 변하는 것이 보았어요. 북쪽이 얼마나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인지 실감이 나더군요.
그 지역은 겨울이 너무 혹독해서 그런지 따뜻한 곳에 들어가 몸을 데우는 사우나가 아주 많았어요. 당연히 저희도 사우나에 들어가 보았지요. 누가 오래 버티나 대결도 했는데 저와 우성이만 이를 악물고 이기겠다고 버티고 달재는 영리하게도 적당히 몸만 데우고 나갔어요. 우리도 그랬어야 했는데…. 미련하게 버티다가 비긴 것으로 합의하고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 현기증이 나 둘 다 쓰러지고 말았어요. 주변에 앉으신 노인분들은 청년들의 객기에 당신들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너털웃음을 지으셨죠. 저희를 일으켜주면서 예나 지금이나 젊은 애들이 하는 짓은 변하지를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시원한 맥주가 담긴 잔을 들고 오던 달재가 벌겋게 달아오른 저희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서 쪼르르 달려와 잔을 하나씩 저희 뺨에 대주었을 땐 머릿속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 도시에서 새해도 맞이했는데 밤에 열어 아침까지 운영하는 술집에 들어가 그곳의 손님들과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시며 놀았어요. 새해가 되는 순간에 다 같이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새해를 축하하는 말을 외치며 잔을 높이 들어 맞부딪쳤습니다. 상당히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직접 맥주를 만들어서 파는 가게라 맥주의 향이 풍부하고 맛이 엄청 진했어요. 아저씨도 맥주를 좋아하신다고 하니 언젠가 여기 오셔서 맥주를 꼭 드셔보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가게 주인에게 주소도 받아놓았답니다.
조금씩 남부로 내려가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쯤에 우성이가 현금을 소매치기당했어요. 제일 덩치가 커서 위압감이 있을 텐데 왜 우성이에게만 그런 일이 생길까요. 관광지는 소매치기가 극성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제가 현금을 여기저기 숨기는 방법으로 넉넉하게 챙겨간 덕에 돈이 부족해 문제가 생기진 않았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니 그곳은 눈이 하나도 없는 곳이라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어요.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눈이 오는 날이 극히 드물어 몇 년이 한 번 볼까 말까 한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덕분에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니며 도시를 구경하기 좋은 환경이었어요. 강가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최근에 유명해진 어느 소설가가 소설을 집필할 때 애용했다는 카페에도 가보았습니다. 오후에는 겨울임에도 햇살이 따사로워서 거리를 거니는 사람을 구경하며 영감을 얻는 장소로 탁월한 곳이었어요. 기념품으로 파는 엽서에 달재가 약혼자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동안 저와 우성이는 차를 마셨어요. 간혹 저희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걱정과 달리 우성이네 집에서 저희를 찾지 않았는지 별다른 낌새가 없기에 점점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을 즐겼어요.
거대한 수족관에도 가보았습니다. 온갖 해양생물이 헤엄치고 있는 모습에 저는 입을 벌리고 넋을 놓았어요. 바다라는 곳은 얼마나 커다랗기에 저런 생물들이 모여 살고 있는 걸까요. 수족관 너머로 보이는 상어와 고래가 저렇게 큰데 저 커다란 생물이 수백 마리, 수천 마리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거대하다니. 바다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납득이 가는 표현이에요. 어느 해양생물학자가 심해어와 같은 해양생물들을 스케치한 그림들을 책으로 만들어 팔고 있어서 냉큼 구입했습니다. 기차에서 이동할 때 보면 재미있더라고요.
길거리의 화가가 저희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어요. 뜨내기손님을 상대하는 사람들이라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지만, 관광과 여행의 추억 값이라 생각하면 그럭저럭 기분을 상하지 않고 넘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어요? 괜히 그걸로 실랑이하다 여행하는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기도 하고요.
도시마다 특산물로 만든 요리들을 먹어보았는데 세상엔 별미가 참 많은 것 같아요. 언젠가 온 세상의 산해진미들을 먹으러 여행을 다니는 것도 멋질 거예요. 요리들을 먹은 감상을 노트에 기록해 두면 한 권을 꽉 채워서 책처럼 되겠죠? 원래는 바다도 가보려고 했는데 다른 건축물이나 공원, 도서관, 체육관 같은 곳들을 구경하느라 바빠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어요. 겨울날의 바다는 여름의 바다와는 또 다른 정취가 있다고 들었어요. 여름의 바다도 본 적이 없지만 회색빛 겨울 바다도 궁금해요. 매번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저는 언제쯤 바다를 보게 되려나요.

또 기념품을 잔뜩 산 태섭







[1월 25일 일요일]

저와 기념품 경쟁을 하시는 아저씨께

아저씨도 여행을 다녀오셨군요! 겨울에 따뜻한 열대기후를 가진 나라로 다녀오셨다니 현명한 선택이세요. 열대과일로 만든 주스가 그렇게 달고 맛있다고 하시니 너무 궁금하고 저도 가보고 싶어져요. 이전에 휴가를 가셨던 곳처럼 그곳의 풍경을 스케치한 엽서를 보내주시고, 그 나라에 잔뜩 피어있는 꽃이나 풍경을 형상화한 작은 조각상들도 아기자기해서 귀여워요. 책상에 올려두었는데 저도 그 바다에서 아저씨랑 같이 휴가를 보낸 착각이 들어요. 주신 엽서는 당연히 벽에 붙여두었어요. 엽서에 그려진 바다들을 보고 여행 중에 보았던 수족관을 떠올리며 저도 바다에 들어가 헤엄치는 것을 상상했어요. 실제 바다는 파도가 치느라 물이 계속 일렁거려서 수영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저는 허우적대기만 하겠죠? 우성이에게 듣기로 저처럼 수영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다에 들어가서 떠 있을 수 있게 공기가 들어간 도넛 모양의 풍선이 있대요.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주로 사용한다고 하니 실제로 바다에 놀러 가기 전에 수영을 배워야겠어요. 성인이 풍선을 끼고 있으면 얼마나 창피하고 꼴사납겠어요.
이번 달에는 여유롭게 책을 읽은 날이 많았어요. 여행을 다니며 저와 달재가 심사숙고해서 골라 구매했던 책들을 커피를 마시며 읽었습니다. 유난히 비 오는 날이 많아 비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마시니 제법 운치가 있네요. 일부러 카페에 나가서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커피만 마실 때도 있었어요.
본가에 불려 가 혼날 것으로 생각했던 우성이도 조용히 잘 지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기숙사에 우성이를 찾는 연락도 오지 않았고, 우성이가 다른 일로 잠깐 부모님을 뵙고 왔는데도 평소와 별다를 게 없었대요. 오히려 여행은 잘 다녀왔냐고 물으셨다나요. 이전에 별장에서 뵈었을 때 특히 아버님이 상당히 자유로운 분으로 보였는데 그래서 우성이를 이해하시나 봐요. 가문 내 괴짜로 통하는 정대만 씨와 사촌지간이라 아들이 하는 행동은 애교로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또 박람회에 다녀왔어요. 아저씨는 제가 새로운 시대와 기술, 기계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하시겠죠?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시다시피 전 공학보단 문학에 가까운 사람이죠. 그렇다면 제가 왜 또 박람회를 보러 갔을 거로 생각하세요? 한번 맞춰보실래요? 아저씨는 똑똑하신 분이니 감이 오실 거예요. 지난달에 저를 바람맞힌 정대만 씨 때문이죠.
박람회 입장권에는 날짜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요. 그렇게 가고 싶었으면 그날 약속을 파투 낼 때 다음을 기약했으면 되었을 텐데, 그 비싸고 귀한 입장권을 기어이 두 장을 구해오더니 박람회를 구경하러 가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미 갔다 와서 더 볼 것이 없다고 했는데 안 된대요. 꼭 저랑 가야만 한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없어요. 오히려 감독님과 가는 것이 낫잖아요. 저에게 그랬듯이 기계의 원리에 대해서도 쉽게 설명해 주실 테고 감독님도 기뻐하실 것 같고요. 그래서 표를 하나 더 구해서 감독님까지 셋이 가는 건 어떠냐고 했더니 인상을 찡그리며 화를 냈어요. 정대만 씨는 화난 투로 말한 줄 모르던데 저는 바로 알았어요.
기술에 무지한 사람들이 박람회에 가봤자 뭘 하겠어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기계를 시연하는 걸 어린아이처럼 구경하기만 했다니까요. 그래도 감독님과 다닐 때는 보지 못한 새로운 먹을거리를 접했어요. 솜사탕이라고 구름처럼 생겼는데 크기에 비해 엄청 가볍고 베어 물면 입에서 순식간에 녹아요. 그리고 엄청나게 단맛이 나요. 기계에 설탕을 넣으니, 실처럼 막 뽑아져 나오는 게 어찌나 신기하던지요. 맛있기도 하지만 실이 뽑아져 나오는 걸 구경하느라 솜사탕을 세 개나 먹었답니다. 그렇게 커다란 걸 세 개나 먹어도 별로 배가 부르지가 않아요. 그것도 참 신기하죠? 정대만 씨가 그렇게 맛있냐며 기껏 정돈한 머리를 헝클어뜨려도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요. 사탕은 아이들이나 먹는 걸 텐데 너무 신기한 간식이다 보니 연령 불문하고 사람이 엄청 많았어요. 사실상 박람회에서 제일 많은 사람이 방문한 곳이 아닐까 싶은 정도예요. 저번에 감독님과 갔을 때는 왜 못 봤는지 의아할 정도로 솜사탕을 먹는 사람들이 한가득하였어요.
며칠 전에는 저에게 입학 선물로 주셨던 만년필의 펜촉이 망가져서 수리하러 갔어요. 교체하려고 하니 펜촉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회사와 종류가 있어 눈이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일단 가게 주인이 기존에 쓰던 펜촉과 유사한 것들로 추려줘서 그중에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대의 펜촉을 구입했는데요, 돌아와서 써보니 필기감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 느껴져요. 원래 하급품을 쓰다 고급품을 쓰면 그 차이를 모르지만 반대는 크게 느낀다더니 제가 그런 꼴인가 봐요. 그래서 기존의 망가진 펜촉을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고 있어요. 제조사나 모양을 보고 다음엔 같은 제조사의 저렴한 것이라도 사려고 합니다.

눈이 높아졌음을 깨닫는 태섭







[2월 17일 화요일]

제가 무슨 말을 꺼내기가 두려워지게 만드는 아저씨께

저를 날강도로 만드시네요. 펜촉을 보내주시지 않으셔도 정말! 정말 괜찮은데 말이에요. 제가 산 것을 버리기는 아까우니 적어도 망가질 때까지는 쓰고 새로운 펜촉을 쓸게요. 갈아 끼우는 방법을 가게에서 배워두었기 때문에 최소한 편지를 쓸 때는 선물해 주신 펜촉을 사용하려고 해요. 저번 편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잉크가 균일하게 나오지 않더라고요. 아! 그게 보기 싫으셔서 보내주신 건가요? 저는 울퉁불퉁한 선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주에 학교 근처의 번화가에 떠돌이 극단이 찾아왔습니다. 친구들을 데리고 연극을 보러 가려고 했는데 제가 그 아이들에게 권유를 꺼내기 전에 농구부 연습이 끝나고 정대만 씨가 저를 불러 선수를 쳤어요. 떠돌이 극단이 온 소식을 들었냐며 같이 연극을 보러 가자고 했어요. 제가 오페라를 거절했던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나 봐요. 그렇다고 얘기한 건 아니지만 괜히 양심에 찔려 수락했죠.
막상 연극을 보니 친구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 잘한 결정이란 생각이 들지 뭐예요. 떠돌이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인지 상당히 자극적인 내용들이 나열된 치정극에 불과했거든요. 민망한 장면도 있었고요. 친구들을 데리고 왔으면 제 평판과 함께 학교생활이 땅바닥으로 떨어질 뻔했어요. 그렇다면 정대만 씨와 보는 건 괜찮냐고요? 아니요! 더 민망했죠! 하지만 그 사람이 저를 데리고 연극을 보러 간 것이니 그 사람이 더 민망해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나마 맨 뒷자리에 앉아있어 무대에서 눈을 돌릴 틈이 있어 다행이었죠. 정대만 씨는 서민들이 즐기는 일종의 천박하고 노골적인 문화생활에 대해 아주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였어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꽉 쥐고 있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는 입 모양으로 미안하다고 하는데 그 얼굴에 웃을 뻔했다니까요. 저도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지만 안절부절못할 것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저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사춘기 소년처럼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웠어요. 자기는 이렇게 저속한 인간이 아니라며 저에게 필사적으로 해명하려는 모습도 그렇고요. 다음에는 제대로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자는 약속까지 기어이 저에게 받아냈어요. 저보다 얼굴이 더 시뻘게지고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사람을 제가 오인할 리가 없는데 말이죠.
다음 달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봄학기에 제가 어떤 수업을 듣는지 궁금하시겠죠? 제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말씀드리지 않았으니까요. 교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이고 제가 늘 말했던 아저씨의 선한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에도 부합하기에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농구를 포기하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농구를 사랑하고 농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아저씨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꼭 우성이나 대협이처럼 프로가 돼야만 농구를 계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전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한계치까지 할 거예요. 그래야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겠죠.
글을 비롯한 중학교 수준을 가르치는 봉사는 늘 꾸준히 다니고 있는데 그중에 기자의 조수로 일하게 된 아이가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 아이의 집은 형편이 상당히 어렵고 아버지의 주취 폭력이 심했거든요. 덕분에 집을 벗어나 독립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는데 엄청나게 뿌듯하고 가슴이 벅차기까지 했어요. 달재는 눈물을 글썽거렸어요. 사실 기자의 조수가 되지 않았으면 사창가로 팔려 갈 위험에 처했던 아이라 천만다행이기도 했지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알면서도 달재가 항상 그 아이가 팔려 가지 않게 푼돈을 쥐여주었거든요. 약간의 도움과 교육으로 누군가의 인생이 크게 바뀔 수 있다는 걸 또 한 번 느끼게 되었어요. 제 결정에 더욱 확신을 준 사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교내 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다는 말을 들은 기자에게 저와 그 아이의 신상을 특정하지 않으면서 저희가 계속해 왔던 봉사나 문맹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야학 등에 대한 글을 투고해달라는 부탁도 들었습니다. 덕분에 연수원에서 바쁜 준호 선배의 시간을 뺏어 조언을 듣고 있어요.
고아원에서 원장님이 아저씨를 괴짜라고 표현했던 것이 생각나요. 그러나 그 괴짜가 세상을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있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이렇게 얘기하면 또 쑥스럽다고 하시겠죠? 늘 느끼던 아저씨에 대한 고마움과 이번 일에 대한 기쁨을 담아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별 대단치 않은 것이긴 한데요, 여태 교내 신문에 투고했던 칼럼과 에세이들을 책으로 엮은 것과 예전에 제가 보내드렸던 넥타이보다 좀 더 좋은 것을 골라보았어요. 겨울에 감기에 드시지 마시라고 목도리도 샀습니다. 우성이에게 추천받아 캐시미어라는 직물로 된 목도리를 사보았는데 제가 사본 것 중 가장 값이 나가는 것이었어요. 캐시미어라는 것이 고급 원단인가 봐요. 촉감이 상당히 부드러워 매장에서 넋을 놓고 한참 만지작거렸다니까요.
이번 겨울은 예년보다 춥지 않은 데다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을 보내셨으니 다행이지만, 늘 겨울에는 낙상이나 추위에 급사하시는 분들이 많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저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더울 때나 추울 때 몸이 상하지 않으시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효과가 있는지 아저씨가 잔병치레 하나 없으시니 정말 제 기도를 들어주는 어떤 절대자가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 때도 있어요. 실제로 존재했다면 제가 그리 겨울에 눈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빌 때 들어줬겠죠? 부모 없이 자라는 가여운 아이의 소원도 들어주지 않는 무심한 절대자가 어디 있겠어요. 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이 저의 신이겠지요. 신보다는 구원자가 가까우려나요.
제가 저번 학기에도 수석을 했다는 얘기 했던가요? 기왕 봄학기에 수석 차지한 거 가을학기도 해보려고 정말 이를 악물고 공부한 보람이 있었어요. 12월 한 달은 잠을 5시간 이상 잔 적이 없고 코피를 쏟은 날도 있었어요. 고전문학을 제가 재미있게 듣고 있어서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어요. 고전을 싫어하던 제가 좋아하게 된다니 무슨 영감님이라도 된 기분이에요. 영감님이 추천해 주는 책을 읽어서 그런 걸까요? 하하하. 하지만 영감님이 추천하는 책이 취향에 맞으니, 저도 할아버지인가 봐요.

애늙은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부하는 태섭







[3월 16일 월요일]

마음은 늘 청춘인 아저씨께

이제 학교 내에서 선배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니 믿기지 않아요. 그런 와중에도 같은 학부면서 농구하는 후배는 하나도 없다는 게 참 우스운 일이에요. 항상 신입생이 입학하면 달재처럼 같은 학부에 같은 농구부인 후배가 들어오지 않을지 내심 기대했는데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는군요.
제가 본 연극 내용이 어땠기에 그리 질색했는지 제발 궁금해하지 말아 주세요. 세상에는 해결하지 않는 것이 이로운 호기심도 있는 법이랍니다. 차마 입에도, 글로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저속하고 아저씨와 같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천박하기에 놀라서 쓰러지실까 염려되어요. 배우들의 복장부터 정숙하지 않았다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더는 진짜 안 돼요. 알아볼 생각도 하지 말아주세요…. 제 부탁이에요. 그래도 저는 즐겁게 지냈어요. 이유는 역시 부끄러우니 말하지 않을래요.
최근에는 춤을 배워보고 있어요. 아주 가끔 시간이 날 때만 해서 그다지 빠르게 늘지 않아 춤을 춘다고도 하기 민망한 수준이라 말하기가 좀 부끄러워요. 느닷없이 왜 춤을 배우냐면, 작년 겨울에 지겹도록 파티에 불려 갔을 때 춤을 추지 못해 사람들을 피해 다니거나 일부러 술을 많이 마셔 바람을 쐬겠다고 발코니로 도망갔는데 계속 그러기는 아무래도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불가피하게 춤을 춰야 하는 경우에는 우성이가 도와주었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도 그렇지만 우성이도 항상 파트너 없이 파티에 참석하던데 얘도 진짜 별난 애인 것 같아요. 제 당숙이랑 똑같아요. 물론 춤을 출 줄 모르는 저를 배려하는 모습도 똑같았지만요.
춤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라 그런지 제법 재미가 있어요. 농구부 훈련이 끝나는 시간에 한나가 체육관으로 와서 우성이와 함께 저를 가르쳐주는데 매번 둘이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투덕거려요. 심지어 한나가 큰 눈을 깜빡이고 씩 웃으며 설마 맨입으로 부탁하는 거냐고 장난식으로 말했을 때도 발끈하는 거예요. 제 처지를 생각해 준 것 같아 고맙긴 한데 정작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저가 화를 내니 한나가 이상하게 여기고 더 괜히 우성이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던지곤 합니다. 우성이의 그런 모습을 보니 여태 학교에 제가 고아라는 소문이 퍼지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예요.
사실은 춤도 한나가 더 잘 가르쳐줘요. 저번에 농구를 우성이나 대협이에게 묻고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죠? 잘난 놈들의 표현은 자기들만 이해할 수 있는 외국어와도 같아 그 애들의 입에서 나오는 감각적인 단어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거든요. 햇수로 4년이 되도록 듣는 표현들임에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동작을 몸소 보여주며 시범을 보이니 그를 따라 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웠지요. 우성이에게는 그런 식으로 배우고 있어요. 게다가 졸업 전에는 아주 큰 파티를 연다면서요? 그때도 지금처럼 쭈뼛거릴 수는 없으니 이젠 피하지 않고 정면을 돌파할 때가 된 겁니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며칠 전에 수업을 듣다 문득 제가 보지 못한 물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사막 따위를 실물로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들었어요. 이번 여름방학이 제 마지막 방학이 되잖아요. 애들한테 물어봐서 바다나 사막으로 여행을 가자고 해보려고 해요. 사막으로 가려면 해외라 좀 번거로울 것 같지만…. 저 혼자 가기는 솔직히 좀 무섭거든요. 제가 외국어를 잘못하기도 하고 어려서부터 외국에 자주 가본 달재나 우성이에 비해 저는 작년 국제대회 때 가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아아. 마지막 방학이라니 벌써 아쉬운 기분이 들어요.
작년에 동장군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봄의 요정이 심술이 났나 봐요. 제 방의 창문에서 서리가 내릴 정도니까요. 꽃샘추위가 유난히 심하니 부디 봄이라고 가볍게 입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아저씨에게는 질 나쁜 물건이겠지만 제가 드린 목도리를 하신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예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구요.

모든 병마와 싸워 이겨내는 태섭







[4월 25일 토요일]

저에게 거짓말을 듣고 만 아저씨께

오, 말이 씨가 된다거나 입이 방정이라는 말이 딱 저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네요. 감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고아원에 살 적에도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는 한 번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고 잠을 적게 자서 피곤함에 시달리던 작년 학기 말에도 멀쩡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의문과 고통에 이불을 부여잡고 몸부림을 쳤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험 준비 전에 걸려서 그전에 다 나은 뒤 시험을 무사히 치렀다는 것이지요.
감기에 걸렸을 때 목 상태가 유난히 좋지 않아 열이 나기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나서는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게 되었어요. 그래도 꾸역꾸역 체육관에 나가 구석에 앉아서 다른 애들이 훈련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는데 대협이가 저에게 꿀에 절인 생강이 담긴 유리병을 주며 차로 마시라고 하더군요. 생강차가 목에 좋다고 하면서요. 반사적으로 말을 하려다 짐승과도 같은 쇳소리만 나와서 민망함에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함을 대신했죠. 대협이는 입을 벌리며 하하 웃고는 빨리 나으라며 어깨를 두드려줬어요. 참 착한 친구예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 잘 모르기에 그렇지. 소식을 들은 한나도 배숙을 만들어 갖다주고 우성이는 울면서 근처 약방에서 감기에 좋다는 약을 사다주였어요. 국가대표 훈련에도 빠져서 그런지 감독님이 우성이와 대협이에게 제가 감기에 걸렸다는 말을 들으셨나 봐요. 대협이처럼 꿀에 절인 생강을 주셨어요. 약간 다른 점은 생강 외에 레몬도 들어있어 더 상큼한 차로 조금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밤에는 자면서 기침을 많이 해서 달재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제 기침 소리가 시끄러워서 잠을 설친 것인지, 걱정되어서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인지 모르겠지만 밤에 열이 끓으면 물수건을 갈아주고, 목에 손수건을 둘러주고, 제가 언제든지 따뜻한 생강차나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침대 옆에 협탁을 옮겨 준비해 두었어요. 달재와 같은 천사가 룸메이트이자 친구라니 저는 정말 엄청난 행운아가 틀림없어요.
다음 달 초에는 2주 동안 실습을 하러 갑니다. 모름지기 교사가 되려면 실제 현장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쳐봐야 하지 않겠어요? 교사를 양성하는 학부가 아님에도 규모가 크고 유명한 학교라 그런지 교직 이수 과정을 밟는 학생들도 신청자만 실습을 갈 수 있대요. 진짜 학교로 가서 수업한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어요. 희망하는 학교가 있는지 저에게 묻기에 다른 학생들의 선호도가 낮은 외진 곳의 학교를 선택했어요. 이유는 짐작하시겠죠? 그리고 달재도 같은 학교에 가기로 했어요.
신문에 내기로 한 칼럼은 아직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어요. 진짜 언론에 제 글이 실린다고 생각하니 몇 번이고 글을 고치고 새로운 자료조사나 조언을 구해보겠다고 돌아다니느라 작업이 끝나지 않아요. 버려진 원고지만 모아도 책 한 권만큼은 될 정도입니다. 제가 이렇게 아는 것도 없고 두서없이 글을 썼나 싶을 정도로 결과물을 볼 때마다 끔찍하기만 해요. 게다가 이제 준호 선배도 더 바빠져서 만나기 힘들어지고 있어요. 최근에는 처음 교내 신문에 썼던 칼럼과 그 후속 글을 참고해서 정리해 보고 있습니다. 운동부 연합 봉사 모임의 애들에게도 물어보려고요. 제가 기자가 된 기분이네요. 만약 제가 기자라면 아저씨와같이 훌륭한 사람을 재야에 두지 않고 취재를 해 세상에 알렸을 거란 상상도 해봅니다.
요즘 꽃이 만발한 것 보셨나요? 봄의 요정이 뒤끝이 없나 봐요. 꽃샘추위가 거의 한겨울처럼 매섭더니 작년보다 꽃들이 더 많고 탐스럽게 피어있어 교내는 물론 거리도 무척 아름다워요. 어느새 저만의 아지트가 된 기숙사 뒤뜰에도 꽃비가 내린답니다. 바람이 불면 은은한 꽃향기가 저를 감싸안고 다독여주는 것 같아요. 제가 솜씨가 좋았다면 꽃비가 내리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스케치해서 보내드릴 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당신께서 알려준 당신의 비밀기지가 나의 비밀기지가 되어 봄을 만끽하는 기분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어요. 언어만으로 담지 못하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는군요. 여러 단어를 떠올리고 나열해 봐도 마땅한 것이 없네요. 그래서 사람들은 글 대신 그림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하나 봐요. 학교에서 맞는 마지막 봄과 꽃이라고 생각하니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져요.

앞으로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태섭







[5월 24일 일요일]

늘 상냥하고 다정하신 아저씨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여 공연히 걱정을 끼치고 말았네요. 목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열흘이 걸렸지만 감기 자체는 7일 만에 나았습니다. 주변에서 많이 챙겨주었으니 더 빨리 나아야 했는데 말이에요. 오히려 그 덕에 열흘 만에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번 달에는 아시다시피 실습을 다녀왔습니다. 확실히 무언가를 배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과 반강제로 학교에 나와 공부하는 사람을 대하는 것에는 제법 큰 차이가 있었어요. 대체로 애들이 산만했어요. 쓴소리하지 못하는 달재가 난감한 상황에 부닥친 적이 많았습니다. 저는 인상도 그렇고 원래 선생님이 제가 작년부터 국가대표라는 걸 말했는지, 교실로 들어가자마자 아이들이 눈에 빛을 내며 저를 쳐다본 덕분에 산만함은 직접 경험한 적이 없었어요. 대신 무대 위에 선 배우가 된 느낌이었답니다. 농구선수인데 왜 문학 교사를 하느냐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수업과 관련 없는 농구에 대한 질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수업에 집중시키기가 은근히 힘들었어요. 이것도 산만함이려나요.
지역이 수도나 도심이 아니어서 그런지 일찍이 자신의 한계를 정하고 패배주의에 젖은 아이들이 많아 참 안타까웠어요. 제 출신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형편이 어려웠다는 식으로 돌려 말하며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낭중지추라는 말도 있고 재능과 열정이 빛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도 했는데, 그 애들에게 와닿았을지 확신이 들지 않아요. 저에게 야유하지도 않았지만 제 말이 특별히 와닿거나 감동을 한 것 같지도 않았거든요. 미적지근했어요.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있던 곳은 중학교였는데 문학 교사들보다 체육 교사들이 더 많이 다가오고 말을 걸었어요. 문학 교사들이 보기에 제 행색이 단정하지 않은가 봐요. 나이가 지긋한 선생님 중에는 은근히 저를 흘겨보는 분도 계셨거든요. 체육 교사들은 저에게 농구 외에는 어떤 운동을 하는지, 체력과 근력 운동은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며 친근하게 다가오고, 제 팔과 다리를 주무르며 탄성을 지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두세 명이 달라붙어 몸을 주무를 때는 좀 민망하더군요.
실습이 끝나고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준호 선배를 만나 마지막으로 신문사에 보낼 원고를 수정했어요. 그런데 연수원이 아주 힘든 모양이에요. 준호 선배의 눈빛에 생기가 없고 눈 밑은 거뭇한 데다 피우지 않았던 담배를 피우더군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와중에도 상냥함을 잃지 않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말하는 목소리만 들으면 이전의 준호 선배와 차이점을 하나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렇게 원고를 빠르게 마무리하고 실습 때문에 2주나 빠진 농구부 훈련에 돌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참가하는 대학리그도 좋게 마무리하고 싶었거든요. 경기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나오고 늦은 시간까지 훈련했습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훈련하고 있으니, 몸은 상하지 않아요. 무리한 훈련을 하다 정작 경기에 나가지 못하게 되는 것만큼 아깝고 멍청한 짓이 어디 있겠어요.
앞서 말한 신문사에 투고한 원고 대한 얘기를 더 하자면 투고한 것이 저번 주고 그저께 발간된 신문에 실렸어요. 인쇄 전에도 편집부에서 반응이 좋았단 말을 전달받아 어깨에 힘이 들어가더군요. 공을 들여서 쓴 보람이 있잖아요. 농구부에서는 반쯤 저를 놀릴 심산으로 신문 몇 부를 사와 돌려 읽었는데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딴지를 걸고 싶어 부리처럼 내밀고 씰룩거리는 입이 한가득이었는데 전부 별말을 하지 못하더군요. 저처럼 아저씨도 뿌듯하시리라 믿어요. 마침 신문의 발행일자가 아저씨의 생일이잖아요. 이것이 또 하나의 생일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원래 준비한 선물은 실습하러 간 지역의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서 파는 바구니들이에요. 과일을 담아두는 데 쓰셔도 좋고 크기와 모양이 다양해서 여름에 가시는 바닷가의 별장에 두셔도 좋아요.
또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제가 한나에게 춤을 배우고 있잖아요? 숙련도를 시험해 볼 겸 매년 광장에서 열리는 오월의 장미축제에 참가해 보았어요. 한나가 워낙 화려한 미인이다 보니 붉은 장미로 치장한 것이 정말 잘 어울리더군요. 파트너로서 참가하는 저도 그에 맞춰야 하니 아저씨께서 주신 수트에 붉은 장미로 만든 부토니에를 꽂아보았어요. 한나가 잘 끌고 가준 덕에 큰 실수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고 당연하게도 한나는 축제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저는 춤이 끝나고 극도로 긴장한 것이 풀려 구석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며 쉬느라 그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어쩜 국제대회보다 더 떨릴 수가 있는지요. 우성이가 그런 저에게 장밋빛 샴페인을 내밀었는데 한 번에 들이켜서 무슨 맛인지 아직도 기억나지 않아요. 산딸기 맛이 나는 달콤한 샴페인이었다는데 전혀 모르겠어요. 식은땀을 흘리던 저를 놀리듯 우성이가 잡고 일으켜 탱고라는 춤도 재미있다며 마구 휘두르는데도 축제를 즐긴다고 생각하니 신경질이 나지는 않더군요. 같이 어울리면서 빙글빙글 돌았어요. 친구들과 그런 축제에 참여해서 즐기는 것도 즐거운 일이네요.
감기에 걸렸던 일이 전화위복이 되었나 봐요. 그 이후로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아요. 마침 원래 올해 열릴 예정이었던 국제대회가 내년으로 미뤄져서 마지막 여름방학을 훈련으로 보내지 않게 되어 기쁘기도 하고요. 감독님은 대회가 연기된 것이 썩 반갑지 않은 눈치셨지만요. 농구부 훈련 시간이 되면 4학년들은 삼삼오오 모여 여름에 어디로 놀러 갈지 열변을 토하느라 바쁘답니다.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느라 설레발을 치는 태섭






[6월 17일 수요일]

더위와 함께 몰려오는 일에 바쁘신 아저씨께

날이 제법 덥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애플민트 티에 얼음을 넣어 차게 먹으니 상쾌하면서도 시원하니 참 좋아요. 학교 앞의 어느 카페에서는 애플민트 티에 얇은 레몬 조각을 하나 띄워주는데 그렇게 마시니 레몬의 상큼함도 있어 올 여름에 즐겨 마시게 될 것 같아요. 최근에는 해 뜰 무렵에 조깅을 가볍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 시험공부를 할 때도 집중이 더 잘 되더라고요.
저번 주말에는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을 보러 갔어요. 곧 시험이 다가오는데 어쩌다 보게 되었냐면, 평소처럼 기숙사 뒤뜰의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었어요. 녹음이 우거져 나무 그늘 밑의 자리에 앉아있으면 바람이 풀 내음을 싣고 와요. 낮임에도 풀벌레의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머리를 식히기에 좋은 장소거든요.
그날은 바람이 풀 내음뿐만 아니라 정대만 씨를 데리고 왔어요. 제법 외진 곳인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물으니, 학교에 다닐 적에 자주 찾았던 곳이래요. 아저씨와 저 말고도 이곳을 비밀기지로 쓴 사람이 또 있다니 신기했어요. 심지어 학교를 그리 오래 다니지 않고 그만둔 사람인데. 제가 시험과 훈련 때문에 피곤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는 이전에 약속한 대로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하기에 덥석 수락해 그 길로 따라나서게 된 거예요. 즉흥적인 결정이었죠.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라 기분이 좋아서 그렇기도 했어요. 최근에 일이 바빠 협회 사무실에서 꼼짝을 못 하고 있었다며 우는 소리를 내는데 연장자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제 모습이 참 우습게 느껴졌어요. 그 사람도 그래서 이곳의 냄새와 그늘을 찾아 걸음한 것이겠죠?
극장 건물이 무슨 신전처럼 웅장해서 입을 벌리고 건물을 올려다보았어요. 오페라 관람처럼 수트를 입고 왔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정대만 씨는 웃으며 극장은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어 괜찮다고 제 손을 잡아 이끌었어요. 최근에 가장 인기 있는 배우가 주연으로 서는 공연이라 표를 구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며 으스대기에 과장된 몸짓으로 고맙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연극 배우들을 잘 몰라서 이름을 들어도 누구인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모르니까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마는 수준이었어요. 외벽에 배우들의 얼굴이 그려진 커다란 그림이 붙어있는데 명색이 배우이니만큼 외모가 뛰어난 사람들인 건 알겠더군요. 옆에 선 정대만 씨의 얼굴을 보니 그의 얼굴이 새삼 잘생겨서 배우가 되었으면 큰 인기를 얻지 않았을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극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 유명한 리어왕이었어요. 내용도 그렇고 배우들의 연기가 워낙 뛰어나고 처절해서 보는 내내 엄청나게 몰입했어요. 공연 시간이 제법 길었음에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를 정도였어요. 책으로 읽으며 상상하는 것과 그 장면이 제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군요. 그래서 원작이 존재하고 이미 그 내용을 앎에도 극 공연을 보러 가는 건가 봐요.
연극이 끝나고 그대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해 저녁까지 먹었어요. 거리에 야외 테이블이 있는 식당으로 갔는데 하지에 가까워 저녁임에도 여전히 날이 밝았어요. 제 기억으로 거의 8시가 되어야 어두워졌던 것 같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코스요리를 먹어보기도 했습니다. 원래 커다란 접시에 음식이 콩알만큼 적게 나오나요? 처음에는 전채요리라 해서 양이 적은 줄 알았더니 그 뒤로도 계속 음식의 양이 적더라고요. 나중에는 왜 음식의 양이 적을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되었죠. 그렇게 많은 종류의 음식을 다 맛보려면 조금씩 먹어야 했던 거예요.
시내로 나온 김에 이번 여름까지 하기로 한 감독님과의 개인 지도에 대해 보답을 할 겸 선물로 행커치프를 사려고 했어요. 제가 물건을 고르는 동안 정대만 씨는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있기에 감독님의 취향에 맞는 색이나 무늬를 고르기 위한 조언을 구했어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감독님은 수트를 불편하게 여겨 어지간하면 입지 않으므로 행커치프는 좋은 선물이 되지 못한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박람회에서 신기한 발명품들에 주로 관심을 보이시던 것이 생각나 골동품점으로 가 신기하게 생긴 기계인형이나 정체 모를 장치들을 구매했습니다. 감독님이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어요.
대회가 미뤄진 덕분에 리그가 끝나면 휴가를 갈 수 있게 돼서 우성이가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몰라요. 대협이는 재작년처럼 농장에 가고 싶다고 하는데 우성이는 집안 소유의 별장 중에 바닷가에 있는 곳으로 가자고 우겨요. 달재는 둘 사이를 중재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어요. 언성을 높여 싸우는 건 아닌데 묘사하자면 우성이가 벽에 대고 칭얼거리는 꼴이랄까요. 상대가 뭐라 말하든 하하 웃으며 농장에 가자거나 농장으로 이미 결정된 것처럼 무얼 하면 좋을지 묻는 대협이가 참 대단해 보여요. 저는 내심 바다에 가보고 싶은데도 아무 곳이나 상관없단 말을 하기만 했어요. 고민하는 저를 보고 연합봉사를 같이하는 축구부 한 명이 남쪽 섬에 놀러 가는 것은 어떻겠냐고 했는데 그것도 멋진 생각인 것 같아요. 그곳의 바다를 바라보며 달콤한 열대 과일을 먹는 상상을 하면 코끝에도 달큰한 향기가 스치는 기분입니다.

끝내주는 여름을 보낼 예정인 태섭







[8월 28일 금요일]

꼬장꼬장한 아저씨

독선적인 면이 있으시네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감기를 크게 앓았던 제가 물에 들어갔다가 또 감기에 걸릴까 염려하신 마음에서 하신 말임을 알지만, 당시의 저에게는 별다른 말 없이 비서님께 바다나 섬에는 절대 가지 말라는 작은 쪽지만 전달받은 것이 무척 속상했답니다. 저에게 그렇게 단호한 어조로 명령을 내리신 것도 처음이어서 당황스러웠어요. 제 항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바늘만큼도 없네요. 결승 경기에서 상대 팀의 거친 파울로 발목을 심하게 접질려 짧은 기간 동안 보조기구에 의지해 걷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더욱 저를 날카롭게 찌르는 듯 아팠어요. 결국 상처의 회복과 요양을 위해 여름 내내 농장에 있었으니, 아저씨의 바람이 이뤄진 것이 되었네요. 그래도 저는 아저씨한테 심술이 났기 때문에 방학 동안 편지를 쓰지 않았어요. 처음 내거셨던 약속을 어겼으니 혼내셔도 좋아요.
다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해요. 고의로 제 발밑에 자리를 잡고 있었거든요. 그놈 발을 밟고 발목이 꺾이면서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데 자기도 발을 밟혀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움직임인 척 과장되게 허우적대더니 꺾인 제 발목을 짓밟더군요. 그 고통이 너무 생생해요. 농구하면서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을 정도였어요. 그걸 보고 흥분한 우성이가 상대 팀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르다 파울을 받아서 그걸 진정시키는 데도 애를 먹었어요. 저희는 결국 경기에서 이기고 4년 연속으로 우승 트로피를 차지해 그들의 행동은 쓸데없는 짓이 되었죠. 분해서 씩씩거리는 얼굴들을 보니 쌤통이다 싶더군요.
스포츠를 하는 사람에게 부상은 늘 함께 가는 동료이니 그렇게 낙담하진 않았어요. 그리고 두 달을 농장에서 꽤 즐겁게 보냈답니다. 처음엔 저는 기숙사에서 발목이 나을 때까지 쉴 테니 친구들에게 먼저 바닷가 별장이 가 있으라고 했어요. 사실은 아저씨와 친구들 몰래 바다로 갈 작정이었거든요.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니 혼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전 바다가 아닌 농장에 가게 되었으니까요. 다 같이 움직이겠다며 휴가지를 바꾸겠다고 하더라고요. 전 참 좋은 친구들을 둔 것 같아요.
여름휴가에 관해 얘기하자면, 농장 내에 있는 별장에서 쉰지 나흘쯤 지난 날이었어요. 달재와 우성이, 대협이가 자리를 비워 별장에 저 혼자 있었는데 쿵쾅대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정대만 씨가 제가 있는 방에 들이닥쳤어요. 감독님을 포함해 예의 그 두 친구를 데리고 휴가차 왔다가 제가 있다는 말을 들었대요. 느긋하게 뒤따라 들어온 감독님이 얼굴을 내밀고 많이 다쳤냐고 물어보는데 정대만 씨가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무슨 밀가루 반죽처럼 주물러서 얼굴이 찌그러져서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간신히 손을 떼고 골절은 아니라 괜찮다고 대답했어요. 그렇게 심한 부상이 아닌데도 걱정이 과하기에 되레 제가 민망해지니 보다가 하지 못한 감독님이 정대만 씨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가셨어요. 다른 친구분이 그 사람이 부상으로 농구를 그만둬서 예민한 것이라 설명해 주고 나가셨는데 세 사람이 사라진 문을 얼마나 오래 바라보고 있었는지 몰라요. 부상으로 그만둘 정도였다면 얼마나 심한 부상이었던 걸까요.
뼈는 멀쩡했기에 저는 금방 평소와 같이 걸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친구분이 했던 말이 계속 생각이 나기도 하고 제가 세실리아를 타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 뒤에 앉아 다리를 못 쓰게 하는 등 지켜보던 친구들도 눈치를 보고 우성이가 보다 못해 말을 얹을 정도로 극성이라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어요. 결국 그만하라고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답니다.
오히려 밖에 있는 것이 피곤해진 저는 별장으로 돌아가 책을 읽으며 쉬었어요.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무시하고 놀자니 친구들이 저희 눈치를 보게 되니 들어가 쉴 수밖에요. 독서에 집중이 되지 않아 손가락으로 애꿎은 팔걸이만 두드리고 있는데 정대만 씨가 쭈뼛거리며 슬그머니 다가왔어요. 자기가 지나쳤음을 인정하고 화해를 청하지 않겠어요? 사슴의 습격을 받았을 때 갔던 산장에 가자고 하면서요. 그날은 꼼짝없이 별장에 틀어박혀 있을 셈이었는데 재미있는 걸 보여준다기에 냉큼 따라가고 말았지 뭐예요.
산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정대만 씨에게 불안해하는 이유를 물었어요. 그의 대답하는 얼굴에 진 그늘이 너무 어둡고 눈빛이 슬퍼 보였습니다. 저를 자신의 과거와 겹쳐보는 것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요. 그가 얼마나 농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알기에 타의로 그만둔 것이 얼마나 큰 상처와 슬픔이었을 지도 아니까요. 그래서 다쳤던 발목을 돌려 보이며 멀쩡함을 과시했어요. 그제야 그의 표정이 편해지더군요.
산장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들과 어느 정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는 곳이라 며칠을 그곳에서 지냈어요. 어느 숲속의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동화 속에 사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곳은 언덕보다 구릉에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런지 밤하늘이 달랐어요. 별이 훨씬 잘 보여요. 정대만 씨가 뒤에서 제 손을 잡고 선을 그으며 별자리를 보는 법도 가르쳐줬어요. 아저씨는 별자리를 볼 줄 아시나요? 전 이번에 처음으로 여름의 대삼각형을 봤어요. 백조자리의 데네브, 처녀자리의 베가, 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를 이으면 삼각형이 된대요. 겨울에는 오리온자리의 허리띠를 찾기가 쉬우니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했어요. 그 전에 도서관에서 책으로 오리온자리가 어떤 모양으로 생겼는지 찾아볼 생각이에요.
사슴과 마주쳐 제가 굴러떨어졌던 일 같은 추억을 떠올리며 웃는 날도 있었고, 놀랍게도 찻잎이 마련되어 있어서 -오래 묵은 것이라 향은 약했지만요- 여름에 상쾌하게 마시기 좋다며 애플민트 티를 찻주전자에 가득 담아와 산장 근처의 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마시기도 했어요. 최근에 읽은 책들에 대해 대화도 했는데 공리주의를 다룬 책을 읽은 것이 저와 같더라고요. 발이 계곡물에 퉁퉁 불 때까지 대화가 끊이지 않았어요. 그 사람이 어떻게 농구를 그만두게 되었는지도 상세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겉으로는 짓궂게 말하고 행동해 쉽게 잊는데 참 다정한 사람이에요. 저는 이미 부상에 대한 건 개의치 않음에도 저보다 더 마음을 쓰고 저를 위로하려고 하니 이렇게 상냥한 사람을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별장의 사용인들도 늘 입이 마르도록 다정한 대만 도련님이라고 칭찬해요.
분위기를 띄우려 또 짓궂은 얼굴로 저보고 발목이 그래서 춤을 제대로 출 수 있겠냐고 갑자기 시비를 걸기도 했습니다. 겨울에 있을 졸업 파티를 말하나 본데, 제가 아무리 발목을 접질렸다지만 이미 다 나았고 코트 위도 뛰어다니는데 춤을 못 추겠어요? 근데 생각해 보니 연말에 제가 춤을 출 줄 몰라 이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 끌려다닌 적이 있었던 거예요. 아마 그 때문에 저에게 그런 말을 했나 봐요. 그래서 다른 친구에게 춤을 배우고 있다고 하니 졸업 파티에서 애들이 추는 춤은 다르대요. 대학 졸업 파티에는 가지 않았을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게 믿기지 않긴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파티에는 참석했을 테고 그는 상류층이라 춤에 박식할 테니 믿는 셈 쳤죠.
확실히 직접 같이 춰보면서 몸을 움직여보니 동작이 다르긴 하더라고요. 저보고 졸업 파티 파트너는 정했냐는데 그걸 벌써 정하나요? 한 달 전쯤에 정하면 되는 건 줄 알았어요. 아니면 달재처럼 약혼자가 있는 사람이 많아 이미 파트너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 대부분인 걸까요? 졸업 파티면 졸업생들만 참가하는 게 아닌지, 파트너는 외부인을 데리고 와도 되는 건지…. 질문은 하나였는데 그걸 들은 제 머릿속에서는 그런 수십 개의 질문이 폭탄이 터지듯 정신을 빼앗아 가득 채웠어요. 제가 잡념 때문에 집중이 흐트러진 것을 알았는지 그 사람은 제 허리를 확 끌어당기며 집중하라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어요. 그땐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답니다. 순간적으로 그 사람의 체향이 훅 들어오는데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서 그 사람 발을 콱 밟고 말았어요. 그런데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양 다음 동작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거 있죠? 저도 파트너가 제 발을 밟았을 때 그렇게 유연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연습해야겠어요.
풀밭과 숲에서 이전과 다른 재미와 휴식을 얻은 것이 참 좋았어요. 맨발로 푸른 목초를 뛰어다니며 춤추는 게 얼마나 해방감을 주는지 느낀 적 있으세요? 오, 맨발을 드러내고 흙을 밟다니 품위가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승마하거나 닭장에서 달걀을 가져오고, 양 떼가 풀을 뜯는 것을 보거나 젖소의 젖을 짜는 목가적인 것과는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고아원에서도 맨발로 뛰어다닌 적은 많지만, 그것과는 전혀 달라요. 한 번쯤은 미친 척 그런 소소한 일탈을 즐기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요?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끼어 왁자지껄해, 한 달이 넘도록 파티가 이어지는 기분이었어요. 감독님께 선물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는 말을 세 번이나 들어서 괜히 뿌듯해져 웃음을 참느라 웃긴 얼굴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정대만 씨의 조언을 듣고 샀다는 말은 하지 않고 박람회에서 구경하시던 것으로 말미암아 좋아하실 것들을 골랐다고 했어요. 꽤 얄밉죠? 감독님이 신이 나서 그 장치들의 작동 원리 따위를 일장 연설로 늘어놓는데 저는 기계와는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 마치 외국어를 듣는 듯했어요. 그런데 대협이가 눈을 빛내더니 대화에 동참해 감독님과 말을 주고받더군요. 체육관에 엎드려서 퍼즐을 풀고 있는 꼴을 봤을 때부터 특이하다는 걸 알긴 했지만, 감독님과 비슷한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호수에서 배를 타며 제가 바다를 보지 못해 아쉽다고 중얼거린 것을 들었는지 정대만 씨가 바다에 있는 별장에 가지 않겠냐고 묻더군요. 엄청 작게 중얼거린 건데 귀가 얼마나 밝기에 들은 건지 신기해요. 그곳에서 바다로 가는 것은 너무 거리가 멀어 이루어지지 못할 말이 되었지만요. 호숫가에 붓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걸 보는 것도 좋았기에 괜찮았어요. 바다가 하루아침에 증발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갈 기회는 언제든 있잖아요.
이제 마지막 학기만 남았으니 달재와 졸업을 위한 학사 논문의 주제를 정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쓴 것 같네요. 우성이와 대협이는 스카우트로 이 학교에 입학했고 그들이 농구에서 보인 활약 자체가 성적이나 다름없어서 논문이 사실상 면제나 다름없는 상태라 상당히 여유롭더라고요. 돗자리를 펴고 앉아 나름대로 깊이 있는 고민과 토론을 하는데 옆에서 통나무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모습이 어찌나 꼴 보기 싫던지요. 대협이는 저희가 자주 읽거나 좋아하던 작가 중에 아무나 고르면 되는 것 아니냐는 속 편한 소리나 하고…. 저 화상들을 보면 저도 체육대에 갔어야 했나 싶은 부러운 마음이 불쑥 든다니까요. 그래도 문학부를 선택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아, 참! 휴가 중에 달재에게 들은 건데 봄학기 막바지에 달재의 약혼자가 청혼했대요! 달재가 학교를 졸업하면 결혼식을 올리기로 예정이 되어있었는데 약혼자는 달재가 너무 좋아서 겨울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나 봐요. 약혼이 어린 시절에 한 것이라 거의 형식적인 약혼자지 친구에게 가까운 사이기도 했고요. 너무 귀엽지 않나요? 말하면서도 달재가 얼굴이 사과처럼 달아올라 부끄러워하는데 어찌나 사랑스럽던지요. 달재는 분명 심지가 굳고 강단이 있는 아이지만 겉보기에는 마시멜로처럼 말랑하고 여려 보이는 애라 그렇게 밀어붙이는 사람이랑 잘 맞는 것 같아요. 파티가 있으면 달재의 파트너로 늘 참석하니 저도 여러 번 본 적 있는데 달재처럼 체구가 작지만, 표정만 봐도 얼마나 야무진지 총명한 고양이 같은 인상의 사람이었어요. 대학에 다니지 않는 대신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대요. 파티 자리에서 나중에 달재와 서점을 차릴 거라고 그 조그만 몸이 가슴을 쭉 펴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면서도 그들은 분명히 그렇게 살게 될 것이란 확신도 들었어요. 서점처럼 책에 둘러싸인 곳에서 책 냄새를 맡으면 글이 술술 써질 것 같아요. 달재는 얼마 전에도 신문에 연재하던 단편 소설들을 엮은 책을 출판했거든요. 분명 멋진 작가가 될 거예요. 저도 달재에게 자랑스러운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환상적인 여름을 보낸 태섭







[9월 24일 목요일]

행복으로 가득한 여름을 보내신 아저씨께

목가적인 삶은 특히 나이가 드신 분들에게는 더 안락함을 주는가 봐요. 아저씨께서 제일 행복한 여름을 보내셨다고 하시니 저도 기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저의 부상에 가슴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우셨다는 말은 제 마음도 슬프게 해요. 제가 짧은 기간이지만 보조장치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고 하는 바람에 더 놀라게 했나 봅니다. 전 휴가가 끝나고 나서 바로 복귀해서 훈련에 참여하고 있어요.
이번 학기는 졸업반이기도 하고 올해의 남은 기간 특별히 큰 대회도 없기에 저는 감을 잃지 않기 위한 훈련만 하고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고 있어요. 어차피 선수가 될 게 아니니까요. 제일 중요한 건 훌륭한 학사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겠어요? 논문 주제는 고민 끝에 셰익스피어로 잡았어요. 역시 고전은 셰익스피어죠. 마침 리어왕을 연극으로 보기도 했으니, 셰익스피어가 계속 제 귓가의 자기에 대한 걸 쓰라고 속삭이더군요.
심지어 지난달부터 이번 달까지는 다른 대극장에서 한여름 밤의 꿈이 공연되었어요. 올해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극으로 많이 올라오나 봐요. 제가 주제를 셰익스피어로 잡게 된 것은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한여름 밤의 꿈이 공연하는 것은 당연히 정대만 씨 덕분에 알았습니다. 리어왕을 감명 깊게 관람하고 신이 나서 떠들던 저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었죠. 공연도 같이 보러 갔는데 그날은 수트를 입고 왔더라고요. 엄청나게 격식을 차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맞춰 저도 옷을 갈아입으러 다급하게 기숙사에 들어갔다 나와야 했답니다.
아저씨께 드린 것과 똑같이 생겼다는 커프스를 좋아해서 항상 차고 다닌다는 말이 진짜였나 봐요. 오페라를 보러 갈 때처럼 보타이를 하면 너무 격식을 차린 꼴이 되니 일반적인 넥타이를 매고 왔는데 그것도 무늬가 낯이 익었어요. 제가 아저씨께 넥타이를 여러 번 선물한 적이 있고 그러느라 많은 종류를 봐서 기시감이 드는 것이었죠. 제가 넥타이를 힐끔거리니 그렇게 탐이 나느냐고 또 짓궂게 굴더군요. 선물 받은 넥타이라 줄 수 없다고 히죽 웃는데 제가 강도도 아니고 남의 물건이 탐이 난다고 뺏을 리가 없잖아요. 분명 다정한 사람인데 한편으로는 나잇값을 못 하는 사람이란 생각도 들고, 그래서 집안에서 괴짜라는 소리를 듣는가 싶고…. 하지만 그 사람이 일가친척이 뭐라 하든 귀를 닫고 사랑하는 일을 했기에 우성이도 그럴 수 있었음을 생각하면 강하고 대단한 사람이란 존경심도 들고 이래저래 복잡한 감정이 들게 하는 사람이에요.
교내의 나무 중에는 이제야 가을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음에도 벌써 단풍이 드는 나무가 있어요.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따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느 단풍보다도 유난히 새빨간 색이에요. 이렇게 새빨갛게 성질이 급하니 가을은 이제야 걸음하고 있는데도 완연한 가을이 온 것처럼 옷을 갈아입나 봐요. 어쩌면 그렇게 할수록 가을이 더 빨리 찾아온다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겠네요. 가을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나무라서 그럴지도 몰라요. 누군가가 저에게 어느 계절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이제는 여름이라고 즉답할 거예요. 예전이라면 아저씨를 만나게 된 겨울도 좋아져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겠지만, 여름에 행복한 추억이 너무 많이 쌓여서 앞으로의 여름도 너무 기대되어요. 그래서 전 여름이 좋아요. 그렇다고 겨울이 싫어진 건 절대 아니니까 실망하지 마세요. 그리고 자식이나 손주가 어버이보다 또래를 좋아하게 되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늘 여름이면 아저씨께서 혹여 열사병에 걸리지 않을지 염려하고 겨울이면 어깨를 너무 움츠리다 아프시지 않을지 걱정하고 눈이 내리면 아저씨를 만난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손과 얼굴에 그 하얀 천사들을 앉게 해요. 제가 행복한 여름을 보내게 된 것도 더 이상 겨울이 싫지 않은 것도 다 당신 덕분입니다.

태어나서 제일 긴 시간 동안 글자를 쓰고 들여다보고 있는 태섭







[10월 26일 월요일]


다정하신 나의 아저씨께

시험이 끝나고 주말에 달재, 우성이와 함께 양복점에 갔습니다. 졸업 파티 때 입을 옷을 맞추기 위해서였어요. 우성이는 그 집 안의 옷을 제작하는 전속 재단사가 있어 이미 그쪽에 맡긴 상태고 저와 달재의 옷을 고르러 갔어요. 수많은 옷감을 몸에 대보고 치수를 재며 어떤 옷으로 지을지 고르고 있으니 새삼 제가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이 났어요. 이렇게 맞춘 수트에 이번에 선물로 보내주신 행커치프를 꽂을 생각이에요. 음, 파트너가 저에게 부토니에를 꽂아줘야 하는 걸까요?
그래요. 저는 파트너를 구해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했어요. 파트너는 꼭 같은 졸업생이 아니어도 된다고는 하던데, 도무지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요. 제가 인간관계가 협소한 것은 아닌 데 그리 깊지도 않기에 누구에게 선뜻 파트너를 해달라고 하기가 음, 부끄러워요. 봄에 축제에 같이 나갔고 저에게 춤을 가르쳐주던 한나에게 신청하는 것이 어떻겠냐 생각하셨죠? 한나는 이미 정해진 파트너가 예전부터 있었어요. 달재처럼 약혼자인 것은 아닌 데 오래전부터 가까웠던 사람이에요. 춤을 가르쳐주는 것을 빌미로 저에게 그 사람에게 파트너를 신청하는 것이나 청혼에 가까운 이벤트를 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우겨서 들러리까지 했거든요. 설마 같은 여자 농구부의 매니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줄이야. 농구부의 매니저이니만큼 자주 봤고 한나처럼 연합봉사에도 참여했기에 정말 자주 본 얼굴이었는데도 그 둘이 가까운 사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제가 생각보다 눈치가 별로 없나 봐요.
주변 애들이 자연스럽게 제 파트너로 정대만 씨가 올 거로 생각해서 놀랐어요. 그 사람은 다정해서 제가 부탁하면 흔쾌히 들어주겠지만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을 게 분명해요. 최근에 감독님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여름에 휴가를 길게 간 바람에 일이 밀려 커피를 하루에 열 잔 가까이 마시고 거의 울면서 일을 한다고 들었어요. 얼마 전부터는 아예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어서 감독님이 다른 일이 있어 들렀다가 그 사람의 수염도 밀지 않은 꾀죄죄한 모습을 보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나요. 그리 바쁜 사람이 일개 대학생의 졸업 파티에 어찌 참여하겠어요. 심지어 졸업 파티는 성탄절 파티와 겸해서 할 예정인데 성탄절과 연말엔 파티가 많잖아요.
연합봉사를 같이 다니는 애 중에 크리켓부의 여자애와 최근에 말을 많이 하고 친해졌는데 그 애도 파트너가 아직 없대서 그쪽에 부탁해 볼까 싶기도 해요. 둘 다 마땅한 사람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파트너 신청을 빌미로 고백하는 사람도 많다던데 저희는 그럴 사람도 없거든요.
날이 더 추워져 몸이 움츠러들고 옷을 두껍게 껴입기 전에 셋이 사진관에 가서 사진도 찍었어요. 대학 생활을 함께 보낸 소중한 친구들이니 서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나눠 갖고 싶었거든요. 우성이는 인화된 사진을 붙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어요. 농구 규모가 큰 나라의 구단에 스카우트되어서 졸업하면 출국할 예정이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워 틈만 나면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결국 사진을 구길 기세로 꽉 잡고는 얼굴 자주 보러 와달라고 울먹거렸어요. 저와 달재는 양쪽에서 우성이를 꼭 끌어안아 시간이 나는 대로 경기도 보러 가고 놀러 가기도 할 것이라고 말하며 달래주었지요. 덩치는 제일 큰 게 마음은 제일 어리고 순수해서 항상 동생처럼 챙기고 귀여워해 줘야 한다니까요. 나중에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저희 셋의 모습이 이런 것은 아닐지 생각하면 웃음이 나요.
저는 달재와 함께 밤에 글을 배우지 못한 공장노동자들을 위한 야학을 열 생각이라 국내에 있을 예정이에요. 저도 이미 어떤 구단의 스카우트를 받은 상태입니다. 사실 졸업하면 농구를 취미로만 할 생각도 있었는데-문학 교사가 될 거니까요-농구는 제가 떠나는게 싫은가 봐요. 조금 더 같이 가보려고 해요. 이렇게 저에게 눈부신 기회를 주시고 저의 결정을 자랑스럽게 여겨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비서님이오시기에 전날에  화훼시장에 가서 감사함의 꽃말을 가진 꽃을 물어 꽃다발을 사서 이 편지와 같이 전달해 드려요. 이 편지를 읽으실 때면 꽃다발을 받으셨겠죠? 예전에 꽃을 좋아하던 고아원의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화병에 담긴 물에 설탕을 약간 타면 꽃이 더 오래 간대요.

친구가 없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으셨길 바라는 태섭







[11월 18일 수요일]

저에게 바다 위의 등대가 되어주는 아저씨께

한 때나마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과거의 저를 때려주고 싶습니다. 고작 학사 논문을 쓰는데도 이렇게 쩔쩔매는 제가 어찌 더 수준 높은 학문을 논할 수가 있겠어요. 아니면 제가 교직 이수 과정까지 병행하고 있어 더 힘든 걸까요? 주제로 셰익스피어를 고른 것이 잘못이었을까요? 이젠 라틴어가 적힌 종이만 보면 눈을 질끈 감게 되고 저에 대한 확신이 깎여나가고 있어요. 그럴 때면 선물해 주신 책 중 인간 찬가를 주제로 한 책을 읽으며 혼란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활력과 용기를 얻어요. 너무 비관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며 악순환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하루는 머리를 식힐 겸 산책하러 광장까지 걸어간 적이 있어요. 카페에서 따뜻한 브루잉 커피를 사 마시면서 걷는데 제 머릿속과 달리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가 없었어요. 한편으로는 머리와 가슴 속을 답답하게 하는 것들이 걷혀 가을 하늘처럼 개운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술가는 사람의 그런 복잡한 감정과 표정을 기민하게 읽는데 뛰어난 사람들인 것 같아요. 광장에 가면 늘 사람들의 초상화를 터무니없는 돈을 받고 그려주는 그림쟁이들이 있거든요. 그들 중 하나가 저에게 얼굴에 근심이 많아 보이는데 그늘진 얼굴이 멋있으니 한 번만 그리게 해주지 않겠냐고 말을 거는 거에요. 너무 뻔한 수작이라 저는 그를 유령처럼 취급하며 대꾸도 하지 않고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제 허락도 없이 저를 그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길어지기에 몸을 움직여 최대한 사나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 강매꾼의 손목을 잡아 저지했습니다. 손이 어찌나 빠른지 대협이의 노트에서 봤던 것처럼 크로키로 빠르게 제 흉상을 이미 완성한 상태였어요. 돈을 주지 않기 위한 말을 고르고 있는데 그 그림쟁이가 아무 말 없이 그림을 내밀었어요. 제가 뚱하게 쳐다보자 아까 말한 대로 정말 돈은 받지 않을 거라고 힘주어 말하는데도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어요. 그런 말에 속는 사한두 번 본  본 게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제 옆에 그림을 올려두고는 자신의 남은 종이와 화구들을 광장 바닥에 장작처럼 쌓더니 성냥을 꺼내 불을 지르는 거예요.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저는 깜짝 놀라 외투를 벗어 불을 껐습니다. 이미 상당수의 종이와 화구는 망가져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저는 씩씩대며 그 그림쟁이를 노려보았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가방을 열고 타다 만 자신의 화구들을 챙기고 저에게 명함을 주고는 광장을 떠났어요. 어느 아틀리에의 주소와 그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적힌 명함이었는데 정말 돈을 받지 않은 것이 놀랍기도 하고 제가 의심을 했다는 이유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보인 것이 놀랍기도 했습니다. 예술을 하려면 미쳐야 하나 봐요.
이렇게 들으면 아저씨도 이 특이한 사람이 궁금하시지 않으세요?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그래서 며칠 뒤에 명함에 적힌 아틀리에를 찾아갔습니다. 입구부터 벽에 저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림들이 잔뜩 걸려있었어요. 그런 걸 추상화나 초현실주의라고 하던가요? 머리카락과 얼굴에도 물감을 잔뜩 묻힌 몰골로 저를 환영하는데도 저는 그 화가보다 주변에 널린 그림에 더 눈길이 갔어요. 사람을 현혹하는 화려함과 난해함. 그 그림들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어요. 한참을 주변을 보며 멍하니 있다 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림을 사러 온 것이 아님을 상기시켰어요. 화가는 양손을 펴 보이며 팔 생각도 없었다고 받아쳤습니다.
광장에서 여러 번 저를 목격했는데 영감이 떠오를 때가 많았다고 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제가 그의 뮤즈였다는 거였죠. 그날은 저를 몰래 뮤즈로 삼았던 것에 대한 대가로써 저를 그려준 거였다고 설명했어요. 그가 작업하고 있는, 거의 벽만큼 거대한 캔버스에는 그의 그림인 만큼 난해하고 추상적이었지만 저를 형상화한 듯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형상이 그려져 있더군요. 예술가의 뮤즈라는 환상적인 말에 저는 기개를 잃고 수줍은 소년이 되고 말았어요. 누구나 한 번쯤은 천재 예술가의 뮤즈가 되는 상상을 한 번쯤은 하잖아요.
그 뒤로도 몇 번 제가 아틀리에로 찾아가거나 광장에서 만나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어요. 저도 반대로 그 사람에게서 논문에 필요한 영감을 얻었거든요. 그는 외출할 때면 허리까지 오는 긴 곱슬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커다란 안경을 썼는데 전형적인 괴짜의 외형으로 보였어요. 팔레트까지 들고 있으면 그림으로 그린 듯한 화가 그 자체였죠. 그는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서 이야기꾼처럼 읊을 때가 많았는데 보통의 사람이라면 생각지 못할 다양하고 특이한 관점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명함을 보내드릴 테니 아저씨도 꼭 아틀리에에 방문하거나 이 대단한 여자를 만나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림을 그리지만 거의 철학가에게 가까운 사람이거든요. 대화를 나누는 재미가 있으실 거예요.
대학생의 신분으로 보내는 마지막 핼러윈 파티는 거의 성탄절이나 연말 파티에 버금갈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어요. 학교의 거의 모든 4학년이 모여서 그렇기도 했고 핼러윈에는 가장을 하므로 사실상 가면무도회를 즐기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어요. 아직 졸업 파티 파트너가 없는 가여운 학생들이 파트너를 찾거나 고백할 마지막 기회의 장이었어요. 저는 그저 파티 음식과 여러 종류의 술을 맛보러 다니는 주정뱅이였답니다. 오월의 장미 축제 때 우성이가 장밋빛 샴페인을 몇 병 사두었는데 그것도 꺼내서 마시자고 했더니 꼬부라지는 발음으로 그건 졸업 파티를 위해 아껴둘 거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이미 상당히 취한 상태였기에 그 당시에 마셨으면 또 맛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 뻔해 우성이의 판단은 아주 현명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무슨 분장을 했는지 궁금하시죠? 저는 달재, 우성이와 한 팀을 이룬 분장을 했어요. 우성이는 빨간 두건, 저는 늑대, 달재는 빨간 두건의 할머니로 분장했답니다. 상상만 해도 웃기지 않나요? 그 처참한 몰골로 사진도 찍었어요. 당연히 한 장 보내 드립니다. 늑대와 할머니를 압도하는 거대하고 예쁘장한 빨간 두건은 파티장 어디에서나 주목받았어요. 우성이의 팬 중 우성이와 사진을 찍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사진을 찍고 저희 셋 모두와 사진을 찍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농구를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성이처럼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몸이 다부진 사람은 항상 인기를 몰고 다니니까요.
몇 무리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서로 연락을 끊지 말자며 얼싸안고 울기도 했어요. 저희도 그랬을 것 같나요? 생각해 보면 사진을 찍느라 이미 그랬죠? 그래도 우성이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 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답니다. 술에 취해서 감정적인 상태가 되어 쉽게 휩쓸렸던 모양이에요. 거기다 대고 대협이는 장난을 친다고 외국에 나간 사람하고 어떻게 연락하냐며 하지 않을 거란 말을 해 우성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빨간 두건의 분장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화를 냈어요. 나중에 그 광경을 들려주니 자기가 그 정도로 어린애처럼 굴진 않는다며 믿지 않는데 사진처럼 그 순간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움직이는 사진처럼요. 그래야 얼마나 주사가 심했는지 알 텐데.
저는 그 정도로 취해서 난동을 부리지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기본적으로 잘 마시는 편이고, 저는 술에 많이 취하면 오히려 젖은 빨래처럼 늘어져서 잠을 자는 편이라 그날도 누군가에게 기숙사로 옮겨졌어요. 다음 날 숙취로 깨나 고생했지만요.

천고마비의 계절을 톡톡히 즐긴 태섭


추신. 이번 성탄절에 아저씨께 선물을 드리고 싶어 혹 필요하거나 사려고 하시는 물건이 없는지 비서님께 여쭤봤더니 부토니에가 필요하시다면서요? 생화라 성탄절 파티까지 꽃이 버틸 수 없을 테니 부토니에보다 쓰임새가 다양한 것으로 보내드릴게요. 무엇일지는 비밀이에요!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궁금해하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12월 26일 토요일]

항상 좋은 말로 저를 감동하게 하는 아저씨께

솔직히 행커치프를 장만하려고 했다는 건 너무 티 나는 거짓말이었어요. 그래도 제 선물을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기꺼이 받아주시니 그런 하해와도 같은 마음씨에 늘 감동하고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졸업논문도 무사히 통과하고 마지막 시험도 끝마쳤습니다. 이젠 정말 졸업만 남았어요. 4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다니요. 어릴 때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어른들의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제가 그리 느끼고 있네요.
24일 저녁에는 졸업 파티가 있었어요. 저는 크리켓부의 여자애와 같이 가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서로 그러자고 했는데요. 핼러윈 파티에서 그 애가 다른 남자애에게 아주 요란한 공개 고백을 받았어요. 제 눈치를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에 괜찮다고 손짓을 했고 저는 파티에서 파트너를 얻기는커녕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지요. 졸업 파티에 혼자 파트너도 없이 갈 수도 없고 어쩌나 고민하는데 파티 일주일 전에 정대만 씨가 불쑥 찾아와서는 파티에 꽂을 부토니에를 어떤 꽃으로 할지 정하자고 하는 거예요.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당연히 제 파트너로 파티에 가는 줄 알고 있었다는 거 있죠? 와, 그 남자애가 아니었으면 저는 최초로 파트너를 양손에 끼고 입장하는 사람이 될 뻔했어요. 당연히 그 사람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고 꽃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사실 지난달에 광장에서 만난 그 화가에게 부탁해 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왜 정대만 씨는 범주에 넣지 않았냐면 최근까지도 계속 바쁘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어요.우성이도 연락하거나  보지 못한지 오래되었다고 했고, 그 사람보다 친구인 감독님을 더 많이 만났으니까요. 오죽하면 감독님께 파트너를 부탁해 볼지 하는 생각이이 들었을 정도라니까요. 감독님은 듬직하고 좀 기대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라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짧게 스쳤어요. 당연히 입도 벙긋하지 않았지만.
한나와 우성이에게 춤을 배우고 틈나면 혼자나 방에서 달재를 데리고 연습한 보람이 있었어요. 여러 명과 춤을 추는 동안 저는 한 번도 상대의 발을 밟지 않았습니다. 감격해서 눈물이 흐를 뻔했어요. 마지막 연습까지도 달재나 우성이 발을 밟아서 걱정했는데 천만다행이죠.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을 때는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성탄절을 축하하는 말을 외쳤고 바로 이어서 서로의 졸업을 축하하는 말도 외쳤어요. 벌써 스무 번도 넘게 겪은 연말인데 유난히 올해는 제 인생의 한 단편이 끝난다는 느낌이 들어요. 오히려 제 생활과 주변 환경이 크게 바뀐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일 텐데 이상하죠. 어쩌면 저에게 너무 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이것이 얼마나 제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힘들게 하는지 몰라요. 졸업식에 오시겠다고 한 아저씨를 당장 만나 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고 계신 아저씨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고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이라면 짐작이 가세요? 단순히 대학을 졸업하는 것에 대한 감회는 절대 아니에요. 머릿속이 복잡해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어요.

당신의 도움이 절실한 태섭







[1월 13일 화요일]

저의 어버이와도 같은 아저씨

저는 지금 비탄에 빠진 문학가처럼 삐그덕거리는 낡은 의자에 앉아 낡은 테이블 위의 유리잔에 담긴 보드카를 마시며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시간이 지났으니, 마음의 고통이 누그러지지 않았나 생각하시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덕분에 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학교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는답니다. 그것은 기억을 되살리고 아물려고 하는 제 상처를 끔찍하게 헤집고 벌려놓습니다. 저는 지독한 겁쟁이라 그것을 외면하고 도망치기만 했어요. 덕분에 저번 편지에 대한 아저씨의 답도 들을 수 없네요. 만약 아저씨께서 시간이 바쁘거나 졸업식 때 보겠다는 약속을 위해 부탁을 거절했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 전 견딜 수 없을 거예요.
사랑하는 아저씨, 당신에게만 털어놓는 이야기예요. 새벽 늦은 시간에 파티가 끝난 후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정대만 씨에게 청혼받았어요. 크리스마스가 늘 그랬듯 새카만 밤하늘에서는 시리도록 하얀 천사가 땅으로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었죠. 저를 향하던 발그레한 뺨과 빛나는 눈빛, 새벽과 어우러지는 까만 수트와 대조되는 신비한 보랏빛의 거대한 장미꽃다발, 추위에 차갑게 식은 그의 손에 들려있던 작은 상자, 마치 그 순간이 박제된 듯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작은 유리관 안에 눈이 내리는 마을이 있는 장식처럼 그 순간에 저도 영원히 멈춰있고 싶을 정도로 벅차고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만이 영원했으면 했어요. 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바꿀 수 없는 현실이 저를 움직였어요. 이전에 제가 우성이네 본가에서 열린 파티에서 좌불안석이었던 것 기억하세요? 그 사람은 저에게 그런 사람이었어요. 곁이 제 자리가 아닌 느낌. 짓궂은 면도 좋고 다정한 면은 더 좋아요. 저를 간호하며 쓰다듬던 손길과 춤을 추며 맞닿았던 온기나 향수와 뒤섞인 체취는 저를 황홀경에 빠지게 만들죠. 아저씨도 아마 제 편지에서 저의 그런 마음을 느끼셨을 거예요.
하지만 저의 본질이, 저의 바탕이 저를 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찬물을 끼얹은 듯 제 머리를 차갑게 만들어요. 이 사람이 내가 천지 간에 아무도 없는, 근본이 없는 천애 고아인 걸 알아도 나를 사랑할지에 대한 두려움, 고아임을 들키기에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럼에도 내 곁에 있겠다고 결정한다면 그의 사회에서 그가 받게 될 멸시에 대한 두려움이 저를 좀먹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저는 떨리는 호흡을 한참 만에 진정시키고 내 친구의 친형과도 같은 당숙인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저의 비겁함에 대한 사과이기도 했는데 그 사람은 영원히 모르겠죠. 제가 거절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도 못 해 얼굴에 경악이 번지는 걸 보는 건 참 괴로운 일이었어요. 저는 애써 청혼을 받을 줄 몰랐던 척 태연하게 연기하며 당신은 좋은 사람이고 우성이에게 그랬듯 나에게도 좋은 형이었으니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내리는 눈 속에 묻고 잊자고 말한 뒤 도망쳤어요.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정말 미친 듯이 달렸어요. 그 뒤로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며 저를 달랜다면 그대로 속에 있는 말을 모두 쏟아낼 것 같았거든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의 청혼 때문인지 달려서 그랬는지 심장이 터질 듯이 아파 가슴을 움켜쥐고 기숙사로 돌아가 화장실에서 헛구역질했어요. 파티에서 먹은 것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제가 토할 수 있는 건 울음 외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차라리 정말 그를 좋은 형으로 여겼다면 그렇게 괴롭진 않았을 텐데.
아아, 아저씨! 살면서 이렇게 가슴이 아픈 적은 없을 거예요.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에게 늘 그랬듯 지혜를 나누어주세요. 아마 당분간은 아틀리에에서 예술가의 가련한 뮤즈 노릇을 하며 슬픔을 잠재우려 갖은 수를 써볼 것 같아요. 그 미치광이 예술가에게 내 감정을 승화시킬 캔버스를 하나 빼앗을 수도 있겠죠. 다음에 그 사람을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려면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사랑으로 인한 행복도 그로 인한 고통도 자연재해와 같아 감히 인간이 어찌할 방도가 없네요. 그저 이 폭풍이 지나가기를 감내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걸까요.
그래도 저의 실연에 대해 너무 슬퍼 마세요. 가끔 광장에서 달재나 우성이, 대협이나 한나를 만나 차를 마시고 대화를 해요. 그 애들은 제가 갑자기 어떤 예술적인 구상이 떠올라서 호들갑을 떠는 줄 알아요. 우성이는 제가 대단한 소설을 써서 문학 교사이자 명성을 크게 얻는 소설가가 되는 게 아니냐고 놀리기도 합니다. 더불어 칼럼을 투고하는 것도 잠시 쉬고 있어요. 사감을 배제하고 이전까지와 같은 기조를 유지할 자신이 없거든요. 신문사도 졸업을 목전에 둔 학생이라는 이유로 너그러이 이해해 주니 천만다행이에요. 하지만 그 변명이 언제까지 통할지 걱정이 들어요. 아직도 제 안의 감정의 폭풍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

당신이 그리운 태섭







[2월 8일 일요일]

저에게 변함없이 다정한 아저씨

이제 저는 문학사가 되었습니다. 금요일은 드디어 제가 학교를 졸업하며 아저씨에게서도 독립하는 날이었어요. 아저씨를 실제로 만날 생각에 얼마나 설렜는지 몰라요. 익숙한 얼굴이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자마자 설렘은 마치 불 앞에 눈이 녹듯 사라졌지만요. 비서님이 친절하게 아저씨가 사정이 있어 못 오게 되었다고 설명하며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과 꽃다발을 전해주었어요. 지난번 편지에도 아저씨의 답장을 받지 못했기에 아주 바쁜 일이 있으시리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의 졸업을 축하해주셔서 고마워요.
준호 선배가 복수를 하려는지 저와 달재에게 선배가 받았던 것보다 더 커다란 꽃다발을 하나씩 주셨어요. 하인 두 명이 든 거대한 꽃다발을 배경으로 하고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걸어오던 준호 선배의 얼굴은 어찌나 무서웠는지요. 우성이는 그걸 보고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어요. 그러나 곧 졸업식이 끝나가니 이별 또한 다가오고 있음을 새삼 실감했는지 침울해졌어요. 그래도 울지는 않더군요.
아시다시피 우성이는 외국에 나가게 되었고, 달재는 단기간이지만 출판사에서 일을 하기로 했어요. 제가 보기엔 약혼자가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야 그와 더 깊은 대화가 가능하고 힘들어하는 부분을 공감해 줄 수 있으니까요. 대협이와 한나도 먼 지역으로 떠나게 되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모여서 아주 긴 대화를 나누었어요. 우성이가 연락했는지 감독님도 늦게나마 합류해서 저희의 고민을 들어주셨어요. 우성이가 왜 정대만 씨가 아닌 감독님을 불렀나 싶더니 정대만 씨는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나서 부를 수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행선지도 알리지 않아 연락할 방도조차 없대요. 그가 떠난 것이 제 거절 탓인 것 같아 가슴이 쿡쿡 찔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도 자리는 좋게 마무리되었어요.
하나 더 말하자면 졸업식 전날 밤에 꿈을 꾸었어요. 부유한 자산가나 귀족이 제 부모임을 자처하면서 어린 저를 잃어버렸고 여태까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를 토로하며 저를 끌어안고 울었지요. 악몽을 꾼 듯 이른 시간에 눈을 뜨고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요. 사실 나에게 대단한 부모가 있으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러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건 어린애나 하는 짓인데 말이죠. 원장 선생님께서는 저희가 신의 아이들이고 신의 자식은 특별한 거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어린아이들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지만 머리가 조금만 커도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 알게 되죠.
고대 그리스에서는 제우스 신전이 고아원의 역할을 했다는 걸 아세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자식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건 본인이 정당성과 정통성을 얻기 위해서 주장하는 것도 있지만 신전에서 돌보는 아이들에게 너는 제우스의 자식이고 네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건 아내인 헤라가 시련을 내리기 때문이라고 한대요. 신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음에도 너그러운 헤라께서는 가여운 아이들을 위해 용서해 주셨는지도 몰라요. 다른 신이 아닌 제우스 신전이 고아들을 거둔 것도 제우스와 헤라 부부의 합의된 뜻이었는지도 모르죠. 어디까지나 제 상상이에요.
아무튼 원장님의 말이 그만큼 터무니없었다는 거고 저는 23살이나 되었으면서 사실은 대단한 부모가 있어서 절 데리러 오고, 신분이 상승할 거란 꿈을 꾸었어요. 참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유치하고 꼴불견 없는 짓을 하다니요. 그런 일이 저에게 일어났다면 그날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았을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나 봐요. 정말 부끄러워서 아저씨 외에는 어디 털어놓을 곳이 없네요.

물통을 엎질러 오랜만에 걸레질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태섭







[2월 14일 토요일]

나의 축복
나의 구원
나의 봄
나의 다정한 키다리 아저씨
나의 세상을 넓혀주고 날개를 달아준 나의 영원한 사랑. 김철수. 나의 정대만 씨

늘 그랬듯 비서님께 편지를 전달하고, 졸업을 축하한다는 이유로 주는 축하금을 빙자한 용돈을 받고 당신의 답장을 기다리며 몸을 웅크리고 내 마음이 고요해지기만을 기다리던 나날이었어요. 학교에서만 보던 비서님을 아틀리에에서 만나니 제 눈에 담기는 풍경이 상당히 생경하게 느껴졌어요. 비서님의 흐트러지고 다급한 얼굴도 낯설었지요. 비서님은 저에게 아저씨가 눈길에 사고를 당해 강에 빠졌고, 아주 편찮으셔서 위독하니 당장 만나야 한다고 말했어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어요. 나에게 연결된 인연의 끈이 하나 더 끊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바로 따라나섰죠. 이렇게 추운 겨울날 차가운 강물에 빠져 정신을 잃고 긴 시간 방치되어 있었다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어요. 이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는데 그런 슬픈 소식은 듣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에게는 기쁜 소식만 들려주고 싶었는데 괜히 제가 감정에 휩쓸려 편지에 이상한 말을 써서 아저씨가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했어요.
가는 마차 안에서 의사가 오가기 쉽도록 도시에 있는 타운하우스에 머물고 있다는 말과 아저씨가 어느 일로 크게 낙담해 멀리 여행을 갔다가 그런 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제가 아틀리에에 있던 걸 보고 그 화가와 연인이냐고 묻기에 서로 영감을 주는 좋은 친구라고 답했어요. 대답을 들은 비서님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당시의 저에게는 비서님의 그 표정이 상황에 맞지 않으니 왜 그런 얼굴을 하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죠.
저는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뛰어내려 당신의 방으로 뛰어갔어요. 겨울날 그런 사고를 당한 노인들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할 것이 뻔해 조금이라도 아저씨의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뛰쳐나왔음에도 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어요.
아저씨가 누워있다는 방의 위치를 안내받고 달려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는 내가 늘 머릿속으로 그리던 노인이 아닌 웬 젊은 남자가 앉아서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죠.
바로 정대만 당신이.
눈치가 없고 둔한 저는 방을 잘못 찾아온 줄만 알고 눈만 대굴대굴 굴리며 방을 둘러보았어요. 낯익은 물건들이 제 시야에 들어왔어요. 과일이 담긴 다양한 크기의 바구니들이 익숙했고, 벽에 걸린 액자 속에 스크랩된 어느 대학교의 교내신문, 익숙한 얼굴이 찍힌 사진들이 끼워진 액자가 올려진 장식장. 내 머릿속을 스치는 눈 속의 당신이 달고 있던 커프스, 매고 있던 넥타이, 같이 고른 부토니에 뒤에 자리하고 있던 행커치프. 당신은 늘 내가 선물했던 것들을 모두 착용하고 나와 나에게 당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있었는데 바보와 같이 몰랐던 거예요. 상황 파악이 끝난 제가 울음을 애써 참으며 다시 침대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나의 순진하고 귀여운 태섭아, 이제야 내가 키다리 아저씨라는 걸 알겠니?"
당신은 느린 동작으로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품으로 뛰어든 나 때문에 다시 침대로 넘어지고 말았지요. 당신은 결국 나의 두려움마저 햇살처럼 걷어내고 폭풍을 잠재워 나를 구원해 주는군요. 그리고 곧 의사가 사색이 되어 저를 끌어내 당신과 아쉬운 떨어짐을 겪어야 했네요.
당신과 보낸 수많은 일상을 생각했어요. 처음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 상상과 달랐다는 말, 몸을 날려 나를 구해주었던 일, 극 공연을 보러 가고, 당신의 친구와 둘이 박람회를 간 것에 대해 삐져서 하도 난리를 피우는 통에 당신의 친구가 표를 구해와 결국 당신과 박람회를 구경했던 일, 파티장에서 춤을 추었던 것이나 맨발로 풀과 흙을 밟으며 숲속에서 둘만의 무도회를 벌였던 것들에 대해서요.
당신은 처음부터 저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어요. 약간의 흥미와 호기심이 나를 실제로 만나게 했고 만남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리되었다고. 저도 어느 순간 그리되었어요.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당신은 눈과 함께 내려와 나의 겨울을 끝내고 내 마음에 봄 내음을 가져오더니 가랑비처럼 스며들었네요. 이미 깨달았을 때는 푹 잠겨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어요.
언제나 기숙사의 책상이나 카페에서 편지를 썼는데, 당신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낯선 방과 책상에서 편지를 쓰고 있으려니 어색해요. 그리고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영원을 맹세하고 나서야 첫 연애편지를 쓴다는 게 이상하면서도 쑥스러워요. 글로 알던 당신과 제가 마주하며 알던 당신이 다른 것이 밉지 않고 오히려 설렌다면 웃을 건가요? 글이어야 만날 수 있는 당신의 모습을 알게 되어서 좋아요. 나만 보고 나만 만날 수 있는 비밀스러운 당신의 모습이 있다는 게 좋아요. 억누르던 사랑이 터져 나오는 것은 봄에 꽃망울이 터지는 것만큼이나 주체가 되지 않는 것이네요. 당신은 어떻게 이 마음을 갖고 살았어요? 어떻게 매일 사랑을 말하지 않고 하루를 버틸 수 있었어요?
나 때문에 그리된 건 알지만, 빨리 당신이 건강을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의사 선생님의 으름장으로 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으려니 참기가 힘들어요. 당신을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고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여태 당신이 키다리 아저씨인 것을 모르던 바보 같은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세히 듣고 싶어요. 그래도 내가 당신이 아니라 그 화가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니, 나 연기에도 제법 소질이 있는 것 같죠? 이 문장을 읽은 당신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옆에서 지켜보고 놀리며 웃고 싶네요.
봄이 오면 같이 화훼시장에 가서 꽃을 잔뜩 사다가 온 집안을 꽃향기로 뒤덮어요. 여름에는 저에게 바다를 보여주시고, 달콤한 열대과일을 맛보여주세요. 가을에는 낙엽을 밟으며 뛰놀고 나무 그늘에서 함께 책을 읽고 연극을 보러 가요. 겨울에는 나에게 당신의 온기를 나누어주세요. 나의 세상은 당신으로 인해 넓어졌고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으로 말미암아 커질 거예요. 당신의 사랑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요.
저의 첫 가족이 되어주어서 고마워요.

영원한 당신의 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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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은 수정재업 안할거임 여기서 끝
원작 키다리 아저씨도 편지만으로 끝나기도 하고 예전에도 거기서 끝내려다 더 보고싶은 장면이 있어서 쓴거라ㅇㅇ

슬램덩크
2024.01.29 06:2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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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도 못쉬고 다 읽어버렸다..... 센세 진짜 너무너무 고마워 이렇게 아름다운 대태 이야기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
[Code: 552f]
2024.01.30 11:18
ㅇㅇ
모바일
와... 홀린 듯이 외전까지 읽고 왔어 전에 읽었던 거에서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더 추가돼서 그 시간 동안 태섭이나 대만이나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있었던 느낌이다... 그래서 대만이가 그렇게 상심에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 강물에 퐁당 빠져서 몸져누운 것도 이해되고 태섭이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런 마음아픈 꿈까지 꾸면서 내 신분이 달랐더라면 그때 그 상황에 다른 답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자꾸 되돌아보면서 자기 잘못도 아닌데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감정선이 너무 절절하게 와닿는다... 그렇게 요동쳤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돌고돌아 둘이 이어진 순간이 더 극적이고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 ㅠㅠ 전에 올라왔던 글이랑 다른 느낌으로 비교하면서 읽으니까 더 좋다... 혹시라도 수정해서 삭제하진 말아줬으면 하는 작은 부탁...!
[Code: fc41]
2024.01.30 11:18
ㅇㅇ
모바일
그때도 읽으면서 행복했는데 지금도 읽고 또다시 너무 행복하다 간질간질 썸타는 대태 너무 귀엽고... 삽질하는 대태도 너무 좋다... 앞으로는 매년 여름 겨울 별장 가고 바다 가고 둘이서 행복한 시간 보내겠지 그 둘의 안방 안에 서랍장이 되어서 관음하고 싶은 기분임 🚬(›´-`‹ ) 호옵- 대태 영사해..... 읽는 내내 너무 행복했고 마지막까지 너무 행복했다!!! 이렇게 재업해줘서 너무 고마워 센세 진짜...
[Code: fc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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