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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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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일요일]

저를 대견하게 여기고 늘 지지해주시는 고마운 아저씨께

저번에 제가 준호 선배의 졸업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더라고요! 저에게 큰 도움을 주신 선배인데 빼먹을 수 없죠. 아저씨께서 저에게 주셨던 것처럼 적당한 꽃말의 꽃들을 골라 커다란 꽃다발을 주문했는데 한 아름이나 되는 꽃다발을 처음 받아본 준호 선배가 탄성을 내질렀어요. 얼굴을 보려면 상체를 옆으로 기울여야 할 정도로 큰 꽃다발이었거든요. 달재와 제가 머리를 맞대다 떠올린 아이디어였는데 준호 선배는 물론 졸업식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이 모두 좋아서 뿌듯했어요. 꽃다발에 안경이 걸려 비뚤어진 모습에 웃기도 했습니다. 준호 선배는 연수가 끝나면 로펌에 들어갈 예정이래요. 준호 선배의 성향을 생각하면 로펌에서 선배가 만족할 만한 경험이 쌓이면 바로 사무실을 개업할 게 분명해요. 개업하는 것을 전제로 말을 한 적도 많고요. 제가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준호 선배에게 취업을 청탁해 볼지 하는 짓궂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는 건 아저씨만 아는 비밀이에요.
오히려 학기 초가 이렇게 평화롭게 느껴질 줄은 몰랐어요. 수업들 진도도 이제 막 나간 참이니 별로 할 것도 없고, 신입생들 덕에 분위기가 들뜨고 어수선한 탓도 있습니다. 저희 과나 농구부도 매년 그렇듯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새로운 만남이 있었죠. 친한 후배를 사귀게 되었느냐고 묻지 마세요.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답니다. 제가 그다지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이기도 하지만 이번 학기부터는 교직 이수 과정까지 추가되어 아주 죽을 맛이에요. 대협이가 왜 스스로 지옥문을 열고 들어갔냐고 웃으며 물었는데 대답할 말이 없더군요. 그저 열심히 살고 있다고만 했어요.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사느냐는 눈빛을 읽었지만 무시했습니다. 이 학교에 다닌 학생의 대부분은 저처럼 모든 일에 뛰어들며 무엇이든 해보거나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지금처럼 카페에 앉아 봄바람을 맞으며 편지를 쓰고 있으니 입학한 해가 생각이 나요. 그때도 지금처럼 달라진 일상에 적응하느라 지쳤고 카페에 앉아 오랜만의 휴식을 취했는데, 그게 벌써 2년 전이라니 믿어지세요? 시간이 무서울 정도로 빨리 가네요. 하지만 대학 졸업식에는 직접 꽃다발을 전해주겠다고 하셨으니, 아저씨를 직접 만나게 될 날이 다가오기도 한다고 생각하면 마냥 무섭지는 않습니다. 제가 졸업하면 후견인으로서의 관계는 끊어지겠지만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어요. 아저씨처럼 좋으신 분과의 관계는 그 누구라도 놓치고 싶지 않을걸요? 저도 아주 욕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서 그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아 꽉 쥐고 있는 거랍니다. 당신 쪽에서 놓으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당신의 의지로 시작된 관계이니 당신의 의지로 끝날 수도 있지요.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우성이가 또 편지를 훔쳐보려고 하는 데다 노을이 지기 시작해 저녁을 먹기 위해 자리를 옮기려고 해요. 국가대표 선발 축하 선물로 보내주신 농구화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제가 신는 것이 멀쩡해서 방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어요. 다만 꺼내서 신을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선물해 주신 농구화를 신고 국제대회에 출전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은데 그러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신발을 신어 신발과 제 발이 서로 맞춰가야 하니 말이에요.

새 신발을 신고 날아다닐 예정인 태섭







[4월 18일 금요일]

제 걱정과 달리 항상 건강을 잘 챙기시는 아저씨께

이번 꽃샘추위가 너무 심해서 감기에 걸리실까 노심초사했습니다. 봄이 아니라 한겨울인 줄 알았다니까요. 이번에 비서님을 만났을 때 건강을 해치지 않고 잘 계시는지 물어보았더니 평소보다도 더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신다고 해서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주변에 조부모님이 꽃샘추위 때문에 감기에 걸린 경우도 많고 개중에 폐렴으로 번져 돌아가신 분도 있어 아무리 지금도 운동을 적당히 즐기며 건강을 유지하시는 분이어도 방심했다가 더 큰 사달이 날지 걱정이 많았어요.
꽃샘추위라는 불청객 외에 반가운 손님이 저를 찾아오기도 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졸업식 때 받은 꽃다발에 있는 꽃들의 꽃말을 물어보았던 친구말이에요. 그 애가 이 근처로 찾아온 거예요! 제가 어느 학교로 갔는지 알고 있다 보니 이리로 찾아와 농구부의 송태섭을 찾은 것이었죠. 어찌나 놀랐는지요. 고향에서 이곳은 꽤 먼데 말이에요. 어느 회사에서 그 지역 근처에서만 나는 꽃을 주문해 배달해달라고 요청했고 마침 이곳이었다는데 어쩜 이런 우연이 있을까요. 그쪽에서만 자생하는 꽃의 종류가 그리 많지도 않고 크고 탐스럽거나 예쁘지도 않다는데 참 특이한 취향의 손님인가 봐요.
그 애는 이미 결혼해 조만간 아기가 태어난대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가 아빠가 되다니 너무 신기하고 오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아저씨도 젊은 시절에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들으면 이런 기분이었어요? 아내도 화훼시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래요. 꽃을 좋아하는 두 사람 사이의 아기라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인데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아요. 그 아기는 계속 꽃에 둘러싸여 살게 되겠죠? 여자앤지 남자앤지는 태어나야 알 수 있으니 이름은 정하지 않았지만, 성별에 상관없이 이름에 무조건 꽃을 뜻하는 말이 들어가도록 할 거라며 수줍게 웃는데 제 고향 친구에게서 고아원의 아이가 아닌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그에 역으로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제가 이 학교에 다니며 상류층과 젠트리같은 계급과 섞여 지내다 보니 옷차림부터 생활 전반에 대한 것들의 기준이 그것에 맞춰지고 그런 환경이 익숙해졌나 봐요. 물론 상류층 중에도 대학을 가지 않고 이 나이에 결혼해 자식을 낳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적어도 제 주변은 결혼을 미루고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이니까요. 심지어 저도 아저씨께서 늘 계절에 맞춰 산더미처럼 선물로 보내주시는 옷을 입고 있으니, 분수에 맞지 않게 옷을 보는 눈만 높아진 거 있죠? 그 애가 입은 옷이 얼마나 낡고 옷감 또한 형편없는지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런 걸 판단하는 자신에 혐오감이 울컥 올라오기도 했어요. 제까짓 게 뭐라고.
아마 제가 순간적으로 거리감을 느낀 것을 그 애도 눈치채거나 제 옷차림과 언행을 보고 저처럼 거리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늘어놓다 제가 자리를 옮겨 식사를 같이하며 얘기를 더 하자고 했는데 거절당했어요. 이 주변의 식당은 가격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기에 먼 곳까지 나를 만나러 온 너를 대접하고 싶으니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말고 같이 가자고 재차 권유해도 한사코 거절하더군요. 제가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다가가자 슬쩍 시선을 피하려다 마는 모습에 더욱 확신했지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법 많은 친구를 사귀었지만, 그 시간이 다른 친구를 앗아가기도 한 것이었어요. 결국 그 친구에게 상처가 자주 날 손에 바를 좋은 연고를 선물로 쥐여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배웅해야 했습니다. 웃으며 인사하고 멀어지는 등을 보고 있으니 늘어나는 거리와 비례해 커지는 씁쓸함이 저를 덮쳤어요. 이젠 정말로 다시 만날 일이 없겠지요. 그 친구는 이 도시로 다시 오더라도 결코 저를 만나러 오지 않을 거예요. 같은 고아였으나 하늘과 땅처럼 달라진 모습에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털끝만큼이라도 느껴질 테니. 저라도 그럴 겁니다.
아저씨를 탓하거나 죄책감을 심어주는 건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러겠어요. 당신에게 그 누구보다 큰 은혜를 입고 당신을 어버이처럼 사랑하는걸요. 그에 대한 표현으로 이번 학기 중간시험이 끝난 뒤에 한나의 도움을 받아 케이크를 다시 만들어 보았어요. 처음엔 제가 케이크 얘기를 꺼내자마자 도망가더니 운동부들의 봉사 모임 자리에서 끈질기게 굴었더니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요. 이번엔 드리기 전에 제가 직접 맛을 보고 그 레시피대로 다시 만든 거니까 정말! 진짜로! 자신 있어요! 그리고 하얀 빵과 생크림이라 조금이라도 태우면 알아볼 수 있어 그런 것들은 전부 운동부들의 간식이 되었습니다. 제 실력으로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케이크라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다. 평생 이렇게 딸기를 많이 먹은 적도 없어요. 당분간 딸기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 같아요. 이번에야말로 진솔한 평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파티시에는 적성에 맞지 않는 태섭







[5월 19일 월요일]

기분이 좋으신 아저씨께

일이 줄었는데 제가 드린 케이크도 맛있으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생크림도 우성이가 본가에 물어봐 거기서 쓰는 것을 골라 사와 제가 직접 팔이 빠져라 거품기로 저어 만든 것이랍니다. 크림이 느끼하지 않아 산뜻하고 너무 달지도 않아 좋았다는 말에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편지를 읽는 제 표정을 보고 달재가 그렇게 기쁘냐고 웃었거든요. 제가 얼마나 웃고 있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그대로 표정을 굳힌 채 창가로 다가가 비춰보니 정말 가관이 따로 없었어요. 광대는 터질듯하고 입은 찢어질 것 같은 얼굴이었어요. 마침 사흘 뒤면 생신이기도 하니 제가 미리 생일 케이크를 드렸다고 생각해 주세요. 물론 진짜 선물은 제가 이번 달 편지와 함께 따로 드리겠지만요. 며칠 전에 양복점에 들렀다가 멋진 커프스단추를 발견했거든요. 테두리에 작은 글자로 각인도 해주는 모양인데 저는 아저씨의 본명을 모르니 할 수가 없어 농구공 모양의 그림 하나만 부탁했어요. 다음 주쯤에 찾으러 갈 텐데 테두리의 모양 자체도 은근히 복잡한 편이라 동그란 농구공 각인이 찾기 어려우실 수 있어요. 돋보기로 자세히 보면 찾을 수 있으실 테니 작은 재미로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슬픈 소식이 하나 있어요. 얼마 전에 운동부 연합으로 하는 봉사활동을 정지당했습니다. 그쪽에서 저를 내친 것은 절대 아니에요. 농구부에서 금지한 거에요. 7월 초에 대학리그가 끝나면 말에 바로 국제대회니 다른 곳에 에너지와 일정을 빼서는 안 된대요. 국가대표 감독님께서 저희 농구부에 직접 요청했다고 전해 들었어요. 감독님과 정대만 씨가 친우다 보니 학교에 그 사람이 찾아왔을 때 감독님께 말해주시면 안 되냐, 작년까지도 다니면서 학교와 농구 성적을 잘 내지 않았냐고 간곡히 부탁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감독님에게 그런 요구를 할 것을 종용했더라고요? 저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어요. 제가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고 훈련을 참여하는지 최근에 뻔질나게 농구부 오면서 누구보다 가까이서 봤던 사람이 어떻게 저에게 이럴 수가 있어요. 저번 학기에는 무려 수석을 한 저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냔 말이에요. 더 열받는 건 우성이는 봉사활동을 금지당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국제대회라는 큰 일정이 생겼으니, 저도 봉사활동 중 연극 같은 연습이 필요한 것들에는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타의로 완전히 금지당하는 건 다르잖아요. 곱씹으니, 머리에서 김이 나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사람은 저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었나 봐요. 저와 대화를 나누고 이해하는 모습은 상류층 특유의 가식이었던 거에요. 달재가 감독님은 정당한 요구를 하신 것이라고 속상해하는 저를 위로하는 말이 작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내막을 모르고 하는 말이지만 달재가 저를 걱정해 위로와 격려를 하는 마음은 진짜니까요. 분노로 뒤덮인 제 마음을 새벽에 밤의 장막을 걷는 햇살처럼 끓어올라 터지려던 제 분노를 잠재웠어요. 제가 속상해한다고 덩달아 속상해하지 마세요. 저는 울지 않았으니까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둑이 터진 것처럼 모든 것이 터져 나와 그대로 무너질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전 절대 안 울어요.
다른 소식도 있어요. 이건 우울한 얘기가 아니에요. 최근에 제가 처음으로 양고기를 먹어보았어요. 양갈비 스테이크였는데 입에 넣자마자 낯선 양고기 특유의 냄새에 아주 잠깐 정신을 놓고 멍해졌어요. 아주 훌륭하고 맛있었고요. 제가 케이크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느라 시달린 한나에게 답례하려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사달라기에 그곳으로 갔다가 신세계를 맛보았습니다. 아저씨는 양고기 요리를 자주 드시나요? 의식한 뒤에 보니 생각보다 양고기 요리가 흔하더라고요. 매번 비슷한 음식들만 먹어 1학년에 처음 학교 주변의 식당에 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메뉴가 있는지 훑어보지 않아서 몰랐어요. 다음에 달재랑 우성이랑 식당에 가게 되면 그곳의 양고기 요리를 시켜 먹어볼까 봐요. 두 사람에게 어떤 양고기 요리가 맛있는지도 물어보려고 해요. 아저씨가 저에게 추천하는 양고기 요리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그 음식도 꼭 먹어보려고 합니다. 학교 주변이나 학교에서 멀더라도 괜찮은 식당이 있으면 그 또한 추천해 주시겠어요?

미식가 흉내를 내는 태섭







[6월 25일 수요일]

척척박사 아저씨

정말 제가 물어보거나 추천해달라 하면 언제나 친절하고 상세히 알려주세요. 어쩜 그리 모르는 게 없으신지 항상 감탄합니다. 이번 학기 시험이 끝나고 알려주신 식당에 바로 달려가서 먹어보았어요. 정말 고기가 입에 넣자마자 크림이 녹아내리듯 부드럽게 씹히는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이제 7월이 되면 정말 저는 지옥의 나날이 펼쳐지잖아요. 사실 운동부 연합 봉사는 못 가고 있지만 원래 달재랑 우성이와 하던 글을 가르치는 봉사는 꾸준히 가고 있거든요. 이전만큼 자주 가지는 못하고 대부분 달재가 혼자 가긴 합니다만 저와 우성이도 시간이 나는 대로 동행하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줄 간식을 사 들고 가기도 합니다. 입가에 잔뜩 묻히며 먹는 모습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저희가 국가대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눈이 반짝거리는 게 귀엽기도 하고요.
봉사와 관련하여 아저씨가 말씀하신 것이 맞아요. 제가 너무 흥분했어요. 제 감정을 헤아려주시면서도 섣불리 상대를 넘겨짚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오늘 감독님을 통해 정대만 씨를 만나서 얘기를 나누었어요. 왜 저에게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독단적으로 감독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우성이는 당질이라 말하지 않은 것인지도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놀라며 우성이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저에게 언질을 주지 않은 거에 대해서도 사과했고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뭐가 괴로운지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과 목을 마구 문지르며 고개를 흔들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질투가 나서 그랬다는 거예요. 못 들은 줄 아나 본데 제가 생각보다 귀가 밝아서 제법 선명하게 들렸거든요. 눈앞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사람에게 굳이 되묻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쐐기를 박아 더 고통을 줄 필요는 없잖아요. 뭐에 질투가 났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농구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말인가 싶어요. 올해는 작년까지의 무패 기록이 깨지긴 했지만, 신입생들의 상태가 좋아서 우승은 할 것 같거든요. 거기다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면 일석이조잖아요. 집중할 때긴 하죠. 미안하다며 저를 상당한 고급 식당에 데려가서 코스 요리를 먹여주고 음식이 나올 때마다 정성스레 설명해 주는 모습을 보고 화가 풀리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그런 고급 식당에 갈 줄은 생각도 못 했고 걸맞은 옷을 입을 새도 없었다 보니 식당의 분위기가 다른 손님과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는 것 또한 저희 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외딴섬에 저희 둘만 뚝 떨어진 것처럼요. 마주 앉은 정대만 씨의 주변에 배경처럼 저희가 앉은 테이블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보였어요. 그는 주변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았죠. 타인이 어떻게 바라보아도 자신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한 강한 확신이 없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태도였어요. 그런 걸 자존감이나 자기에 대한 확신이라고 하나요? 그는 늘 그렇게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잡혀있는 사람이란 생각을 들게 해요. 참 멋있지 않아요? 마치 아저씨처럼 말이에요.
식사 후에 바에 가지 않겠냐는 제안은 제가 거절했습니다. 저번에 제가 식사를 권유한 것을 거절한 고향 친구가 당시 느꼈을 기분이 들었거든요. 정대만 씨와 달리 저는 옷을 갑옷처럼 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제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느낀 그 사람은 대회가 다 끝나고 시간이 나면 같이 도서관에 가자고 물었어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정대만 씨의 눈을 다시 쳐다보았어요. 밤이 된 것도 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 사람은 거리의 가스등 불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어요. 새삼 그의 다정함에서 아저씨를 느꼈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서관도 가고 서점도 가보자고 웃었지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 같지는 않지만, 저를 생각해서 꺼낸 말이 참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가슴속에 맺히지도 않은 응어리 같은 것들도 다 풀려 홀가분해져서 남은 리그와 대회들을 잘 마무리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아요.
시간이 나시면 나중에 결승 경기를 보러 오셨으면 좋겠어요. 아직 결승 진출을 확정한 것도 아닌데 참 자신만만하죠? 하지만 지금 저희 농구부가 정말 기세가 좋아서 결승은 무조건 진출일 거라 확신하거든요. 당연히 저를 찾아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많은 관객 중 아저씨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 힘이 날 것 같아요. 그런 무대에서 뛸 수 있게 저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길을 내주고 등을 밀어주신 분이잖아요. 아저씨가 투자하신 것의 결과물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세요.

투지를 불태우는 태섭







[7월 19일 토요일]

여름휴가를 떠나지 못할 정도로 바빠 안쓰러운 아저씨께

오, 이런. 이번 여름은 유난히 기온이 높은데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하신다니 건강이 염려되어요. 처음 답장을 읽은 날에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거렸을 정도였답니다. 더위와 햇살을 조금이라도 피하시게 할 방법이 없나 고민하면서 말이에요. 방법을 생각해 낸다고 해서 당장 아저씨나 비서님께 연락할 수 없는 입장이니 더욱 가슴이 답답해졌어요. 그렇게 바쁘신데 시간을 내서 제 경기를 보러 와주셨다니 정말 감읍할 따름입니다.
제가 우성이에게 들어 올려져 우승컵을 들고 있는 모습 보셨나요? 분명 MVP는 우성이였는데 느닷없이 저에게 우승컵을 던지듯이 안기더니 제 다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리는 거 있죠? 하마터면 그대로 휘청이며 고꾸라질 뻔했어요. 나중에 탈의실로 가는 복도에서 물어보니 이번에 제가 다른 PG들보다 출전 시간이 길었고 이런저런 일을 벌여놓으면서도 전부 해내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나요.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라지만 제가 제 칭찬을 하려니 굉장히 쑥스럽네요. 농구부원들에게 둘러싸여 혼자 솟아오른 채로 사진도 찍었습니다. 나중에 인화된 사진을 받으면 보내드릴게요. MVP 대신 돋보인 제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꼴을 하고 있는지 보시면 참 재미있을 거예요.
작년까지는 리그가 끝나면 남은 방학 동안은 쉴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국제대회 때문에 훈련이 끝나지 않아요. 덕분에 리그 우승을 기념하는 파티에서 술 대신 음료수를 마셔야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숙취에 시달리면 안 된다고 말했으니 한 두 잔 정도는 허용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감독님이 완고하셔서 절대 허락을 해주지 않았어요. 아예 저와 우성이, 대협이가 술을 입에 대는지 감시하러 파티장에 쫓아오기까지 했다니까요? 구석에서 허리에 손을 짚은 채로 서서 이쪽을 노려보는데 정말 무서웠어요. 대협이는 몰래 술잔을 입에 댔다가 감독님에게 목덜미를 잡혀 끌려갔어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이라 저와 우성이는 눈빛을 주고받았죠. 얌전히 주스나 마시자고요.
내일이면 저는 출국을 합니다. 대회는 아직 남았고 시차가 크지 않은 나라긴 하지만 외국이라 미리 도착해서 적응 기간을 가진다고 해요. 이에 대해서는 이번 달에 비서님을 만났을 때 미리 말씀드렸어요. 비서님은 편지를 써두기만 하면 나중에 한꺼번에 가지러 오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대회 일정이 끝나고도 1주일 정도 머물면서 관광을 할 계획이었거든요. 그래서 10일에도 기숙사로 돌아가진 않을 예정이라…. 그래서 제가 생각한 방안은 작년에 제가 농장에 갔을 때처럼 국제우편으로 제가 편지를 기숙사로 부치면 비서님이 수거해가시는 건 어떠세요? 이미 그렇게 비서님께 말했으니 사실상 통보나 다름없긴 해요. 제가 관광을 한다는 말을 들은 비서님께서 개인적으로 저에게 용돈도 주셨어요. 외국을 여행할 때는 돈 걱정하지 말고 넉넉하게 쓰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해주셨습니다. 항상 느끼지만, 비서님도 아저씨처럼 친절한 분이세요. 아저씨가 제 아버지 같다면 비서님은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에요. 아마 비서님이 이걸 들으시면 더 젊은 데도 높은 항렬의 친척으로 여긴다고 발칙하다 하실 수도 있겠죠? 제가 알고 있는 비서님이라면 허허 웃으시고 말 것 같긴 해요.
바쁘신데 외국까지 나와 경기를 보실 수는 없으시겠죠. 결과가 어찌 되었든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내고 제 열정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너무 과로하시지는 마세요.

평생 외국을 나갈 일이 없을 거로 생각해 마음이 들뜬 태섭

추신. 일을 하시는 틈틈이 레몬을 설탕에 절인 것도 드세요. 레몬이 너무 시다면 복숭아 꿀절임 같은은 것도 좋습니다. 염분과 당, 수분을 꼭 섭취하세요. 과로로 쓰러지실까 무서워요.







[8월 5일 화요일]

고국에서 저의 소식을 기다렸을 아저씨께

국제대회 일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예상했듯이 신체 조건이 월등히 뛰어난 외국인들을 상대로 저희가 우승이나 메달을 따내기는 힘들었어요. 어떤 나라는 분명 기술이 저희보다 못하다는 것이 뻔한데 그놈의 키와 높이. 그것에 가로막혀 어찌할 방도가 없었어요. 농구에 체격이 중요하다는 걸 끔찍할 정도로 실감했습니다. 그래도 질 것이 뻔하다고 설렁설렁하진 않았어요. 악바리라면 저희가 제일 끝내줬을 겁니다. 거의 거머리 같았을 거예요. 저의 허세라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어찌 되었든 저는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저희의 경기는 금방 끝났지만, 경험 삼아 결승전까지는 직관했어요. 감독님이 선수들보다도 더 매서운 눈빛으로 코트를 보시더군요. 평소에도 저런 눈빛으로 저희가 훈련이나 경기하는 걸 보고 계셨을까요? 나중에 훈련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아 저도 노트에 연필로 경기를 열심히 기록했어요. 옆에 앉으신 감독님이 무얼 적으셨나 힐끔거리기도 했는데 거의 백지라 참고할 게 없었어요. 나중에는 그냥 팔짱을 끼고 코트를 노려보고만 계셨어요.
내일 도착하는 달재와 합류해 즐겁게 놀러 다닐 생각이에요. 주변에 고대 건축물이 있는데 아주 크고 웅장하대요. 제법 잘 보존된 석상도 있고 바다만큼이나 큰 호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처음엔 자동차를 타고 다닐 생각이었는데 우성이가 팔을 붕붕 휘두르며 기차를 타보고 싶다고 졸라서 기차를 타기로 했어요. 기차는 제가 고아원에서 학교로 갈 때나 멀리 있는 서점에 갈 때 타곤 했기 때문에 그 애 앞에서 잘난 체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성이는 쓸데없는 말을 얹어 매를 벌기도 하지만 놀려먹는 재미도 있는 애거든요.
대협이가 도시를 다닐 때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자고 제안했어요. 자전거를 타고 낯선 언어가 들리는 곳을 돌아다니는 상상만 해도 두근거려요. 관광이 아주 기대가 됩니다. 가는 곳마다 엽서가 보이면 사서 아저씨께 드릴 생각이에요. 예쁜 기념품도 잔뜩 살 생각이랍니다. 당연히 아저씨 선물도요!
달재가 내일 이른 아침이면 도착할 예정이라 훈련할 때보다 더 새벽에 일어나야 해서요. 저는 이만 자러 가보겠습니다. 편지에 제가 경기장 근처에서 주운 작은 돌을 같이 보내드려요. 걷다가 발에 차여 눈에 들어왔는데 모양이 둥글고 빛깔이 제 눈을 사로잡기에 부적처럼 손에 쥐고 다녔거든요. 덕분에 최상의 경기력도 냈습니다.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돌인 것 같죠? 물론 그런 건 미신이고 저도 진지하게 믿는 건 절대 아니에요.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으로 보내드리는 겁니다. 9월에 만나요.

오히려 눈이 말똥말똥 해지는 태섭







[8월 22일 금요일]

저와 같지만 다른 하늘을 보고 계실 아저씨께

이곳의 하늘도 분명 같은 하늘인데 어쩜 이렇게 다를까요. 여기가 멀지 않아도 외국이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온 제가 지나치게 들뜬 탓일까요? 그래서 모든 것이 실제보다 과장되게 보이고 색다르게 느껴지는 걸까요? 그래서 시간과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외국으로 여행이나 휴가를 떠나는 건가 봐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똑같이 파란 하늘에 흘러가고 있는 구름인데 달콤한 솜사탕을 뜯어서 뿌려놓은 것처럼 생겼고, 여름인데도 햇살이 봄볕처럼 따사롭게 느껴져요. 다른 애들이 덥다고 차양 밑으로 도망한 것을 보면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해요.
자전거를 타고 가다 작은 분수대라도 보이면 멈춰서 앉아있곤 했어요. 서점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들어갔고 휴대하기 편한 책을 사서 들고 다니며 읽기도 했어요. 외국어로 된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고요? 외국어로 된 책이 아니었거든요. 서점이 아닌 골동품 가게에서 산 건데 소품으로 우리말로 적힌 책을 팔고 있는 걸 발견했어요. 출판한 지 오래되어 낡았지만 상태가 제법 좋아 읽을 수 있는 수준이어서 냉큼 구매했지요. 여기서 다 읽고 9월에 아저씨께 편지와 함께 드리려고요. 이 책을 꼭 보여주고 싶어요. 별 특별한 내용은 아닌 소설인데 여자아이가 산골 마을을 떠나 여행하는 내용이에요. 내용을 전부 알려드리면 재미없으니 이 이상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길거리 악사들도 보았어요. 다른 애들이 바닥에 놓여 펼쳐져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에 동전이나 지폐를 던져넣기에 저도 따라 했지요. 그가 연주하는 곡이 어떤지 대화도 하던데 저는 그가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도, 거기서 무엇이 느껴지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거든요. 그래서 연주자에 집중하는 시늉만 하고 있었어요. 나중에 점심을 먹을 때 달재가 악사의 솜씨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말했어요. 음식은 해산물이 잔뜩 들어갔는데 비린 맛이 하나도 나지 않은 것이 너무 신기했어요. 화이트 와인과 즐기니 금상첨화였죠. 저는 좋은 와인을 고를 줄 모르지만 고를 줄 아는 친구들은 있잖아요.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엽서나 열쇠고리, 자석 따위의 기념품을 파는 좌판을 발견하면 꼭 멈춰서 구경했어요. 아저씨에게 드릴 예쁜 엽서들을 고르고 싶었거든요. 저는 아저씨처럼 엽서에 직접 제가 본 풍경을 그려내지는 못하니 이런 노력이라도 들여야 하지 않겠어요? 대협이가 노트를 들고 풍경이나 사람을 빠르게 스케치하는 것이 부럽다고 느끼기도 했어요. 그때 농장에서 보고 대협이에게 그림을 좀 배워볼 걸 그랬나 봐요. 그럼 저도 이곳의 풍경을 어설프게나마 그려서 아저씨께 보여드릴 수 있었을 텐데. 우성이가 기차 창문에 코가 잔뜩 찌그러질 정도로 붙어있는 모습도 그려져 있었는데, 기차 밖에서 그 얼굴을 본 사람들이 부러워요. 저도 그 꼴을 꼭 봐야 했는데. 얼마나 얼굴을 찌그러뜨렸는지 우성이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그림이 뒷모습이라 아쉬울 따름이에요.
달재의 약혼자에게 선물할 브로치를 같이 고르기도 하고, 이 나라에서만 파는 향신료들을 다 같이 사기도 했어요. 사실 요리를 하지 않고 하는 가족도 없는 저는 살 필요가 없었지만 대협이는 저도 본가가 따로 있는 줄 알잖아요. 달재처럼 젠트리인줄 알아요. 계속 그런 식으로 부엌에나 있어야 할 것들을 사다가 결국 대협이에게도 사실을 털어놓았어요. 제가 쓰지도 못할 것들을 사는 것에 달재와 우성이가 걱정하며 눈치를 보기도 해서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대협이는 잠시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눈을 크게 뜨더니 그러면 여태 산 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어요. 물론 계속 숨기느라 불안했을 저에게 가벼운 위로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잠깐 생각하다 이것도 아저씨께 보낼 기념품으로 좋겠다는 생각에 미쳐 전부 한꺼번에 포장해 선물할 것이라 대답했죠. 아저씨는 많은 음식을 먹어보셔서 제 선물 중 맛보지 못한 향신료와 식재료, 차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새로운 것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사이에 새로운 향신료가 알려졌다든지 말이에요.
무지막지하게 많은 향신료와 야채 고기가 들어간 스튜도 먹어보았는데 너무 신기하고 맛있었어요. 가게 종업원에게 요리에 들어간 향신료를 사고 싶어서 알려달라고 말했더니 흔쾌히 알려주었어요. 주방장의 자신감이죠. 재료를 다 알려주더라도 손님이 절대 자신의 맛을 재현하지 못할 걸 아는 거예요.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싶어요. 제가 메모를 해놓은 것들만 봐도 너무나 많은 재료가 들어가는데 이들의 비율은 요리의 주인이 아니면 절대 맞출 수가 없어요. 주방장은 호기심 많은 외국인 손님에게 귀가 아플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비율까지 알려주었지만, 그 외국인은 분명 상세한 레시피를 들어도 그 스튜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식당에 현지인 외에도 저희 같은 외국인 손님도 그리 많았지 싶어요.
바다처럼 큰 호수에서는 쪽배를 탔습니다. 배를 타고 호수 위를 둥둥 떠다니니 그곳이 바다처럼 보이지만 바다가 아닌 호수임을 오히려 실감할 수 있었어요. 끝이 보이니까요. 바다는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고 나중엔 배 위에서 온 사방을 둘러봐도 바다밖에 없고 육지는 보이지 않는다면서요? 아무리 해도와 나침반을 본다지만 어떻게 선원들은 항해하는 걸까요. 정말 대단하게 느껴지고 바다가 두려운 존재라는 생각도 들어요. 모든 걸 집어삼킬 것만 같아요. 바다를 횡단할 일은 없으니 기우이긴 합니다. 그리고 바닷물과 달리 호수는 물이 짜지 않아요. 맞아요! 바닷물이 짜다는 것도 저는 너무 신기해요. 정말 한 모금 마셔보면 그렇게 짠가요? 얼마나 짠가요? 내년 여름은 저희의 마지막 여름방학이니 바다에 가보자고 할까 봐요.
올해는 8월 초까지 정말 너무 쉼 없이 달려온 것 같아요. 저희의 그런 노력을 알아주셨는지 농구부 감독님이 9월 한 달은 농구부에 나오지 않고 쉬어도 좋다고 하셨어요. 그렇다고 완전히 놓아버리면 몸이 굳으니, 저희가 알아서 체육관에서 감을 잃지 않기 위한 정도의 운동은 할 예정입니다. 국제대회가 끝나고 먼저 귀국한 감독님이랑도 한 번 만날 생각이에요. 그분이 왜 그리 젊은 나이에 은퇴하고 지도자로 돌아섰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분명 부상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만나 본 PG중 가장 뛰어나시거든요. 정말 배울 점이 많은 분이세요. 만나서 지금 제 실력에 대한 피드백도 받고 시간이 나면 개인 훈련이 가능하실지 여쭤보려고 해요. 좀 치사하지만, 감독님과 친구인 정대만 씨도 대동해서 가려고요. 그러면 제 부탁을 수락해 주실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지지 않을지 하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이런 저를 두고 야유를 하셔도 괜찮아요. 그 정도로 저는 감독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으니까요.
이제 제 대학 생활이 세 학기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믿어지세요? 고작 셋이라니! 아, 시간이 느리게 갔으면 좋겠어요.

피부가 초코케이크처럼 탄 태섭







[9월 28일 일요일]

가을과 휴식을 맞이하시는 아저씨께

제가 보내드린 향신료가 마음에 드셔서 정말 기뻐요. 향신료의 질이 좋고 처음 보는 것도 있다고 하시니 뿌듯합니다. 제가 깔끔하게 정리해서 같이 보내드린 향신료와 온갖 식재료들이 가득 든 스튜의 레시피도 활용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저씨는 저택에 솜씨가 뛰어난 주방장이 있으니 어떻게든 아저씨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내놓으실 겁니다.
이번 달에는 수업이 없는 시간이나 새벽에 가벼운 운동을 하며 쉬었습니다. 아직 날이 더우니 낮이나 오후보다는 새벽이 운동하기 좋더군요. 오후에 일정이 뜻하지 않게 생기는 경우가 많았어요.
학기 초에는 정대만 씨가 찾아와 저에게 대학리그와 국제대회에서 쭉 본 저의 슛을 폼에 대해 상세한 분석과 조언을 해주었어요. 전처럼 저를 반쯤 놀리려고 하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사뭇 진지한 모습에 저도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습니다. 전에도 가끔 저에게 중장거리슛을 쏘는 걸 몸소 보여주며 가르쳐줬는데 이번처럼 저도 미처 몰랐던 저의 사소한 버릇까지 집어내며 설명한 건 처음이었어요. 새로운 습관이 몸에 배게 하려면 삼칠일이 걸린다고 하잖아요? 덕분에 그 사람이 가르쳐준 자세를 연습한다고 짧은 훈련 시간이었어도 3주를 매일 체육관에 들렀답니다. 제 피부를 보더니 무슨 초코케이크냐고 깔깔대며 웃는 것도 있지 않았지요. 직접 시범으로 보여준 자세가 너무 깔끔하고 정확도도 높았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뒤에 서서 제 팔을 잡고 자세를 고쳐주거나 이 근육을 이렇게 쓰라고 만지며 알려주니 이해하기가 쉬워 좋았어요.
그런데 제가 드리블이나 경기 운영, 코트와 선수를 살피는 것 등에 대해 상담하고 싶어서 감독님을 뵐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거나 편지를 보낼 수 있게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할 때마다 화제를 돌려서 좀 짜증 났어요. 지금의 저로도 충분히 잘한다고 칭찬해 준 건 고마운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이것저것 건드리지 말고 당장은 자세를 교정하는 것에 집중하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데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를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감독님과 같은 고등학교 후배라 안면이 있는 우성이에게 물어보려고 했어요. 근데 어떻게 알고는 귀신같이 쫓아와서 자기가 자리를 만들겠다고 하는 거예요. 진작 그럴 것이지.
시가지의 한 카페에서 만났을 때 감독님이 안 그래도 저에게 연락하려고 했다고 말씀하시는 거 있죠? 기뻐서 저도 모르게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를 쳐서 잔에 담긴 차가 넘치기도 했어요. 심지어 아무런 조건 없이 2주 간격으로 주말마다 봐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와! 얼마나 황홀하던지요! 그렇게 훌륭한 스승을 쉽게 구하는 운 좋은 사람은 세상에 저밖에 없을 거예요. 정대만 씨를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됐던 거였어요. 괜히 한 사람분의 지출만 늘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제가 한 푼도 쓰지 않았다는 게 더 감동을 주는 점이었답니다. 뭐가 그리 감동이냐고요? 감독님이 카페와 식사, 그날 있던 실업팀 경기관람까지 전부 부담하셨거든요. 경기를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정말 행복한 하루였어요. 감독님은 아저씨의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면을 떠올리게 하는 멋진 어른이에요.
농구 외의 휴식이라면 또 정대만 씨가 등장하게 되네요. 경기가 다 끝나면 도서관과 서점에 가자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약속을 잡더군요. 저는 지나가는 말로 한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아니었나 봐요. 기차를 타고 나가 도시의 번화가에 있는 커다란 국립도서관에 갔어요. 아저씨도 그 국립도서관에 가보셨나요? 세상에. 신전처럼 거대한 건물이 도서관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어요. 교내나 그 근처의 도서관과는 정말 비교가 되지 않았어요. 도서관에 있는 책의 종류가 많은 것이 제일 좋았어요. 이 나라에 출판된 모든 책을 다 모아 놓은 것 같았어요. 그 정도 규모라면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요. 서점에서 저에게 읽고 좋았다는 책들을 꺼내 보여주는데 아저씨가 저에게 추천해 주신 책들이랑 상당히 유사해 신기했습니다. 의외로 독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가 봐요. 서점에 들른 김에 잉크도 구매했는데 가격에 비해 고급 잉크 못지않게 질이 좋은 잉크를 골라주었어요. 제가 쓰던 것과 가격이 큰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상당히 질이 좋더라고요. 정대만 씨는 어떻게 이런 걸 알았을까요. 상류층 사람들은 그저 최고급, 고가의 물건만 쓰는 게 아닌가 봐요. 제 편견이 또 하나 부서지는 순간이었어요.
정대만 씨가 학교로 돌아가는 기차역에 저를 데려다주며 다음에 공연을 하나 같이 보러 가자고 티켓을 내밀었어요. 10월에 하는 오페라 공연이었는데 저는 떠돌이 극단이나 서커스단이 보여주는 작은 규모의 연극 밖에 본 적이 없거든요. 제안을 수락할지 몹시 망설였습니다. 대형 극장에서 하는 연극도 아니고 오페라라니 좀 부담스러웠어요. 그곳의 분위기나 관람객들의 예절도 전 모르잖아요. 그래서 저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받은 티켓을 내려다보며 매만지기만 했어요. 그 사람은 제 어깨를 짚고 몸을 숙여 제 밑으로 눈을 마주치며 파티 때처럼 수트를 입고 오기만 하면 된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어요. 어차피 관람 문화라는 게 규모나 관객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말해 제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정말 좋은 공연이라 꼭 보았으면 한다고 하기에 저는 더 고민하는 척 입술을 씰룩거리다 수락했죠. 괜히 고민하는 척한 게 티 났으려나요.
나중에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달재에게 오페라가 어떤 것인지 관람할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꼬치꼬치 캐물었어요. 우성이나 대협이에게도 물어보았죠. 물론 한나한테도요. 아참! 올해는 저희 학교가 여자 농구부도 대학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어요! 정말 대단하죠? 원래라면 리그가 끝나자마자 남녀농구부 합동으로 큰 파티를 하려고 했는데 국제대회 훈련을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서 이번 달로 미뤘거든요. 거기서 오랜만에 한나를 만난 거예요. 한나는 섬세해서 저희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잘 짚어줘요. 모두 공통으로 하는 얘기도 있고 조금씩 다른 부분도 있어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오페라 하우스에서 제가 그런 공연을 본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안 될 수는 없네요. 혹시 모르니까 손수건을 세 개는 챙겨가야겠어요. 땀을 비 오듯 흘릴지도 모르니까요.

꿀처럼 달콤한 휴식기를 보낸 태섭







[10월 11일 수요일]

예지능력이 있으신 아저씨께

오페라의 내용이나 감상을 잊어버릴까 그에 대한 걸로 먼저 짧게 편지를 쓸까 해요. 그런데 제가 수트를 새로 사려고 했던 건 어떻게 알고 보내셨어요? 미리 알고 계셨나요? 분명 치수를 재고 만드는 시간이 걸릴 텐데 비서님께 용돈과 수트가 든 커다란 상자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오페라 하우스라고 하니까 괜히 주눅이 들어 제가 가진 것보다 좀 더 좋은 옷을 마련하려고 했거든요. 제 이런 상황과 마음을 어떻게 아시고 이리 보내셨어요. 마치 예언자 같으세요. 하지만 다음부턴 이러지 마세요. 저를 얼마나 아저씨에게 의존하고 자율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만들 셈이세요? 주신 용돈이 늘 넉넉하니 충분히 정장을 살 수 있답니다.
정대만 씨는 척 보아도 아주 고가의 수트를 입고 왔는데 소매에 달린 커프스단추가 제가 선물로 보내드린 것과 똑같이 생겨 깜짝 놀랐어요. 제가 살만한 물건이니 그 사람에겐 보잘것없고 싸구려나 다름없는 단추였을 텐데요. 혹시 그런 디자인이나 모양이 유행하는 것인지 물어보았어요. 그 사람은 한 쪽 팔을 들어 입을 내밀고 버튼을 잠깐 쳐다보고는 주먹 쥔 손을 흔들며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로 받은 것인데 가진 것 중 제일 마음에 들어 수트를 입을 때면 항상 그걸로 차고 다닌대요. 누군가가 저렇게까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라고 하니 잘 골랐다 싶어 괜히 뿌듯해지더군요. 사실 아저씨는 제가 드린 것이면 무조건 마음에 든다고 하시니 정말 제가 잘 고른 것이 맞는지 확신이 없어요.
오페라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자면, 관람한 극의 이름이 사랑의 묘약이었어요. 무대에 선 가수들이 노래를 크게 부르긴 하는데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외국어로 된 노래였나 봐요.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오페라는 연극처럼 대사로 진행되는 부분이 없고 대부분 혹은 전부가 노래로만 이루어져 있는 가극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걸 알면 뭐 하나요. 제가 노랫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데. 객석의 사람들은 대체로 손잡이가 달린 작은 망원경을 눈에 대고 조용히 무대를 지켜보고 있으니, 옆에 앉은 사람에게 설명하겠다고 쑥덕거리면 그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일이 되잖아요.
그래도 전 옆에 앉은 사람에게 설명을 들으며 볼 수 있었답니다. 저는 2층 발코니에 있었거든요. 무대가 멀어 배우들의 얼굴을 보려면 망원경이 필수였어요. 사람들이 들고 있는 그 손잡이가 달린 작은 망원경 말이죠. 정대만 씨가 저에게 하나를 주며 그것을 오페라글라스라고 부른다고 가르쳐주었어요. 그리고 자신은 맨눈으로 보고 손가락으로 배우와 무대를 가리키며 저에게 노랫말과 무대의 구성, 배우들에 대해 계속 설명했어요. 덕분에 저는 배우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극의 내용은 전부 알 수 있었죠.
사랑의 묘약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결국은 진짜와 같은 효과를 내어 주인공이 사랑을 이루게 된다니 재미있는 내용이었어요.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도 노래가 좋은지는 알 수 있잖아요. 아주 훌륭한 멜로디와 음색이었어요. 사랑의 묘약이 아니어도 진실로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며 온 마음을 다한다면 상대도 나의 사랑을 알아주고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다는 뜻이겠죠? 참 멋진 일이에요. 주인공은 그런 거창한 의도를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요. 묘약의 효과가 왜 없는 거냐고 따지다가도 한 병을 더 마셔 어떻게든 약의 효과로 쉽게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는 편법을 쓰는 사람이었잖아요. 하지만 그 약은 그저 포도주일 뿐이었고 결국 사랑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던 행동 덕에 사랑을 얻었으니, 그의 마음과 열정이야말로 사랑의 묘약이었나 봐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아마 틀렸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전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유치하다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재치 있게 풀어내는 작품을 보니 로맨스라는 장르가 왜 인기가 있는지 조금 이해가 되었어요.
극이 끝나고 모두 기립박수를 치고 있을 때 정대만 씨가 저에게 몸을 살짝 기울여 사랑의 묘약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마셔볼 것이냐고 물었어요. 저는 짧은 고민에 빠졌죠. 질문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했지만 주인공 네모리노 또한 약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약을 마셨잖아요. 그것은 분명한 사기였고 네모리노는 멍청하게 속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요. 제가 그 네모리노의 꼴이 되면 어떡하나 우습게 보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엄습했어요. 누군가가 저를 그렇게 얕보고 비웃으며 괄시할 걸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어요. 대학에서 계속 한 겹이라도 더 두르고 갑옷을 입고 가면을 써서 태연한 척을 하며 저를 숨기며 살고 있는데 그런 우스운 꼴을 보여 밑천이 드러나면 전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기분일 거예요.
그래서 전 마시지 않을 것이라 대답했어요. 어차피 네모리노도 약의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사랑을 쟁취한 사람이지 않으냐고 덧붙이고 그러는 당신은 마실 것이냐 되물었어요.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마실 것이라는 대답을 내놓았어요. 그래서 전 네모리노처럼 되어도 괜찮은지 누군가 그렇게 등쳐먹고 뒤에서 비웃는 것을 견딜 수 있는지 물었죠. 그는 눈썹을 으쓱이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저 아디나의 마음을 얻는 것에만 집중하고 아디나만 바라보는데 다른 이들이 자기더러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을 거라나요. 마치 경주마처럼 목표만 바라보는 사람인가 봐요. 오히려 그런 점이 대단하고 멋져 보였어요. 제가 아직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 못해 네모리노와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요?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젊은 시절에 사랑의 묘약이 있으면 부인이나 첫사랑과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마실 건가요? 이렇게 편지를 쓰는 지금도 머릿속에서 여러 상황을 상상하고 고민을 하고 있어요. 저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새벽이라 더 감성적인 태섭







[10월 24일 금요일]

가을의 정취를 즐기고 계시는 아저씨께

교육자의 길을 제가 얕보았나 봐요. 생각보다 힘들어요. 그러면서도 제가 다닌 학교의 교사들도 분명 이러한 과정을 거쳤을 텐데 어떻게 그 모양이지? 하는 생각에 분노가 성냥에 불을 붙이듯 번쩍거리기도 해요. 혹은 그 사람들도 처음엔 열정이 넘치는 순수한 사람이었으나 그렇게 변해간 것일지도 몰라요. 그럼, 타성에 젖은 그 모습이 제 미래가 되는 걸까요? 으,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데….이번 달에 있던 중간시험이 끝나고 오랜만에 기숙사의 뒤뜰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쉬었어요.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더군요. 선선해지는 가을바람이 오히려 제 주변을 쾌적하고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기분이었어요. 바람에 흔들리는 풀이 발목을 간질여서 몸을 숙여 쳐다보니 작은 가을꽃이 살랑거리며 저를 톡톡 건드리고 있는 것이었어요. 마치 저를 밟지 말라고 귀여운 항의를 하는 것 같았어요. 그 작고 부드러운 초본식물이 저를 때려봤자 얼마나 아프겠어요. 간지럽고 웃음만 나오죠. 저는 그 작은 요정의 항의를 받아들여 다리를 쭉 뻗는 것으로 자리를 옮기는 걸 대신했습니다.
대학원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대학원이라는 말에 놀라지 마세요. 아저씨께 손을 벌리려는 게 절대로 아니니까요. 눈치를 주거나 강요할 생각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어요. 제 모든 걸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하여튼 내년 대학리그와 특히 같은 대륙 국가들만 참가하는 국제대회에서 활약이 좋으면 장학생으로 받아준대요. 제법 달콤하게 들리는 말이라 고민이 되어 아저씨께 여쭤보는 겁니다. 정말 농구나 체육 계열의 지도자로 진로를 정한다면 지금 하는 교직은 무슨 의미가 있나? 시간 낭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혼자 그런 생각을 떠올린 건 아니고 사실 대학원에 대해 알아보다 우성이에게 그런 말을 들었어요. 그 말이 떠나지 않고 제 것인 양 머릿속에 떠다니며 거대한 먹구름이 되는 것을 보면 제 딴에는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달재도 같이 교직과정을 하고 있어 얼마 전에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이대로 다음 학기에는 교직과정을 이수하지 않고 포기한 뒤 대학원 진학에 집중하면 좋을지 반대로 농구와 운동을 포기하고 문학 교사가 될지 말이에요. 저는 제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달재는 특유의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미소를 유지한 채 제가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줬습니다. 달재는 저를 과대평가하고 있나 봐요. 저는 두 가지를 다 가질 능력이 없어 양손에 쥔 것 중 하나를 놓아야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것도 솔직하게 말했죠. 그랬더니 달재는 오히려 눈동자가 보이지 않도록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제가 저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반박하려 하자 말을 막듯이 제 손을 꼭 잡고는 다음에 감독님과 개인적으로 만나 훈련할 때 물어보래요. 어떻게 저도 갖지 못한 저에 대한 확신을 그렇게 강하게 가질 수 있을까요. 참 의지가 되는 친구예요. 이전에 저와 달재, 우성이를 가리켜 고목나무와 매미들이라고 다들 부르던 것을 기억하세요? 여전히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달재가 저희를 지탱해 주는 고목나무 같아요. 달재만큼 심지가 단단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제가 그 나무에 달라붙어 휴식을 취하고 용기를 얻는 매미이죠.
얼마 전에는 오랜만에 달재와 우성이를 포함한 세 명이 만나 시간을 보냈어요. 농구부 연습이나 봉사를 갈 때가 아니면 만나기가 영 힘들었거든요. 우성이는 실력이 워낙 출중해서 벌써 여러 구단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대요. 해외구단에서도 우성이에게 관심을 보인다고 들으니 새삼 우성이가 대단해 보이고 자랑스럽기도 해요. 만나서 이번 겨울방학에는 셋이 여행을 가기로 하고 계획을 짰어요. 농장이나 별장에 휴가를 가는 것이 아니라 배낭여행으로 전국 일주를 할 생각이에요.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해보고 싶던 것들 중 하나였거든요. 상상만 해도 설레요. 어릴 때 배낭과 그리 많지 않은 돈만 가지고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의 수필을 읽고 저도 배낭여행을 떠나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고아원 창밖의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언젠가는 진짜로 세계여행도 해보고 싶어요.

핼러윈을 맞아 아이들에게 보여줄 연극의 분장을 준비하는 태섭


추신. 이번 교내 신문을 한 부 같이 보내드립니다. 대학리그와 국제경기를 동시에 준비했던 것들과 국내 최고의 농구선수, 정우성 선수에 대한 내용도 적었어요. 제 친구라고 편향된 시각으로 칭찬하는 글은 절대 아닙니다.







[11월 16일 일요일]

자선 파티에 불려 다니느라 정신없는 아저씨께

아저씨처럼 저도 이런저런 행사나 파티에 많이 끌려다녔어요. 이번에 국가대표로 뛰었던 선수들을 자꾸 부르는 거 있죠? 저만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 꾸역꾸역 참석하느라 정말 혼났어요. 메달 하나 따지 못한 순위에 그쳤어도 역대 최고 순위를 기록해서 사람들의 관심이나 호응도가 상당히 높아졌대요. 특히 우성이와 대협이는 팬이 폭발적으로 늘어 학교에 팬레터를 들고 기웃거리는 사람이 매일 끊이지 않아요.
그렇다고 제가 그 파티장에서 특별히 한 것은 없었어요. 대개 주장이나 우성이가 말할 때가 많았고 저는 그저 눈만 끔뻑거리며 들러리처럼 서있다가 음식을 즐기고 간혹 누가 말을 걸면 적당히 대답해 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주최자들 또한 대부분 국가대표 선수를 자기가 주선하는 파티에 초대했다고 목을 빳빳하게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던 사람이었던지라 저희를 대접하는 것에 성의가 없었어요. 주최자이니만큼 기본적인 것들은 조사하고 정보를 숙지하고 있지만 평소에도 농구에 관심이 있고 좋아하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졌거든요. 그걸 초반에 깨달은 우성이도 기분이 상해서 갈수록 장소에 맞게 적당히 사람들의 비위는 맞추되 선을 긋기 시작했어요. 저에게 다가와서야 표정을 풀고 제가 아는 정우성의 얼굴이 되었는데 역시 이런 자리와 상류층의 생리란 참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질문에 최소한의 답만 내놓고 가버리는 감독님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어떤 파티에서는 정대만 씨를 만나기도 했어요. 농구협회에서 일하기도 하지만 정대만 씨와 우성이의 집안이 상류층 중에서도 상류층이라 초대를 받나 봐요. 그 사람은 항상 이런 자리가 너무 싫다며 질색하는 얼굴로 불만을 표했어요. 그런 것치고는 항상 손에 샴페인이 들려있고 입 안에 무언가를 우물거리고 있어 충분히 즐기는 것으로 보이긴 했지만요. 몇 번을 더 보고 나서야 상대방이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입에 음식을 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죠. 평소에는 집안의 다른 사람이 참석하는데 최근에는 우성이나 농구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자꾸 그 사람을 부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파티장에서 마주치면 그 자리가 불편한 사람들끼리 발코니로 피신하곤 했어요.
한 번은 저에게 또 오페라를 보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는데 이미 그에게 받았던 오페라글라스가 아깝긴 하지만 거절했어요. 저는 그런 귀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오페라 하우스보다는 극장에서 하는 연극이나 떠돌이 극단이 보여주는 거리공연이 잘 맞는 것 같았거든요. 그것보다도 코트에서 공을 튕기며 뛰어다니고 풀밭을 달리며 동물들의 소리를 듣는 것이 더 좋아요. 그런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 가극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었지요. 정대만 씨는 애초부터 거절당하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어요. 그리고 발코니 너머로 수풀을 보는 제 시선을 따라 밖을 쳐다보더니 내년 여름방학에 농장으로 다시 놀러 오라며 초대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자기도 원래 집 안이나 이런 놈들 사이에서 괴짜 취급을 받지 않느냐,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며 제 장단에 맞춰주었어요. 참 눈치도 좋은 사람이에요.
올해는 겨울이 유난히 따뜻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처음으로 눈이 내리지 않는 성탄절을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저희 여름날의 뜨거운 열정이 아직도 식지 않아 동장군을 막고 있는 건가 봐요. 어릴 때는 그렇게 겨울마다 눈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제는 제가 그리 오래도록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지면 서운할 거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제법 눈을 좋아하게 되었나 봅니다. 이번 겨울에 예정된 배낭여행이 기대되기도 하고요.
여행에 대해 정말 친손주처럼 저를 과하게 걱정하시던데 저희는 운동하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는 걸 상기시켜 드릴게요. 축구부나 야구부, 배구부 등등 다른 운동부 애들한테도 많은 것을 물어보고 있어요. 여행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니 그 또한 염려하지 마세요. 아마 이번 학기에도 수석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감독님과의 훈련도 아주 순조로워요. 감사의 뜻으로 작은 선물을 드리려는데 무엇이 감독님을 기쁘게 하면서도 도움이 될지 고민이 깊어집니다. 은근슬쩍 캐보려고 해도 통하지 않네요.
뒤뜰에서 꺾어 책 사이에 끼워 압화로 만들어두었던 코스모스를 보내드릴게요. 여러 송이를 만들었는데 제일 예쁘게 된 것을 골라보았어요. 나머지는 주변에 나누어줄 생각입니다. 며칠 전에 한나에게도 줬는데 그걸 액자로 만든 것을 제게 보여준 것을 보니 아주 예쁘더라고요. 아저씨의 집에도 좋은 장식이 되어줄 거예요.

새빨간 사과를 베어먹고 있는 태섭







[12월 27일 토요일]

한 해를 마무리하느라 바쁘신 아저씨께

어떤 일이든 간에 업무라는 것은 해가 넘어가기 전이 정리를 하느라 제일 바쁜가 봐요. 연말마다 늘 그러시고 얼마 전에도 시가지에서 열리는 박람회를 구경할 겸 만나기로 한 정대만 씨가 도저히 시간을 못 낸다고 약속을 파기했거든요. 그것도 당일 아침에요! 정해진 학사일정이 끝나고 방학을 맞이하면 여유가 생기는 학생들과는 다른 세상이네요. 입장권은 이미 두 장이 제 손에 있었으니 아쉬운 대로 시간이 나는 사람과 갔죠. 마침 감독님이 봐주시는 날이 가까워서 감독님이 오시자마자 연습 대신 박람회에 가자고 했어요. 감독님은 잠시 머뭇대다 좋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감독님도 취향이 특이하시더라고요. 하긴 그런 말투를 가끔 쓰시는 걸 보면 비범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어요. 별난 사람이라 감독님과 정대만 씨가 친구인가 봐요. 다른 한 사람은 멀쩡해 보이던데. 그 이목구비가 진한 사람이요. 과묵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두 사람처럼 특이한 구석이 있는지도 몰라요.
아저씨는 박람회를 가보신 적이 있나요? 아마 없을 거예요! 박람회장에 은발의 노인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거든요. 대부분은 콧수염을 단 배불뚝이 아저씨들이었는데 감독님이 그들은 발명가들에게 투자하러 온 자산가들이라고 설명해 주셨어요. 저희처럼 순수하게 여러 발명품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젊은 청년들이었고요. 그렇다고 신기술을 구경하러 온 중년이 전혀 없진 않았으니, 제가 편견이 가득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감독님은 구조가 특이하게 생겼거나 원리가 복잡하고 언뜻 보면 용도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기계들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마치 훈련이나 경기를 분석하실 때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시더라고요. 저에게 손가락으로 부품과 동작 원리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기도 했어요. 공학에 문외한인 저도 완전히 이해되도록 어찌나 쉽게 설명을 해주셨는지 몰라요. 농구 외에 공학에도 그렇게 조예가 깊으신 줄은 몰랐어요. 발명가와도 깊은 대화를 나누시는 거 있죠? 감독님에 대한 존경심이 커졌어요. 그리고 세상은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진보하고 제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기술이 있다는 깨달음도 얻었죠. 온갖 기계들을 시연하는 걸 구경하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요. 박람회 직원이 페장 시간이니 관람객들을 퇴장시키는 말을 듣고 나가서야 나왔어요. 언젠가 아저씨도 꼭 박람회에 가보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성탄절에는 학교의 모든 운동부끼리 모여서 연합으로 파티를 열었어요. 평소처럼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운동부에 소속된 모든 사람이 모이니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장점이라면 다들 체력이 좋아 도무지 지치지 않고 질릴 때까지 수다를 떨고 먹고 마시고 놀았다는 점이었어요.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어요. 저를 향한 축구부와 야구부의 열렬한 구애도 끈질겼다는 것은 단점이 되겠네요. 실제로 경기를 같아 뛰어달라는 게 아니라 연습이나 재미로 축구나 야구를 같이하자는 정도예요. 잘난체하는 걸로 들리시겠지만, 저의 재빠른 다리가 탐이 난다나요? 사실 잘난 채 맞아요. 당신께서 선택하신 제가 이렇게 뛰어나고 당신의 안목이 뛰어나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어요.
우성이가 원래는 연말에 집안에서 열리는 가족 파티에 참석해야 해요. 그런데 배낭여행을 출발하는 날은 내일이고 저희는 2주 동안 여행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 문제였어요. 더 큰 문제는 저와 달재는 우성이가 가족들과 합의한 줄 알았더니 얘가 아예 집에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냥 저희랑 무슨 야반도주 하듯 여행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던 거죠. 진짜 제정신인가 싶어 제가 언성을 높였는데 우성이는 오히려 왜 집안 어른들처럼 꽉 막히게 구느냐고 저에게 뭐라 하더군요. 맞는 말이지만 그쪽 집안에서 저희를 찾으러 와서 여행을 망칠까 봐 걱정되었거든요. 하지만 이미 집에 말할 기회는 지나갔고 저희는 내일 새벽에 떠나고….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올해는 지난달에 제가 말했던 대로 성탄절에 눈이 내리지 않은 것이 신기했어요. 오늘은 날이 제법 춥고 공기가 습한 것을 보면 조만간 눈이 내릴 것이 연말에는 하얀 눈으로 뒤덮이겠어요. 늘 말씀드리지만 이제 눈은 저를 아저씨와 이어준 행운의 요정과도 같은 존재예요. 이렇게 해를 마무리할 때가 되면 제가 이런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에 늘 감사드리고 당신을 사모하는 마음을 재차 확인합니다. 이전에 제가 하던 고민은 이미 끝마쳤습니다. 달재나 감독님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저를 도와주었어요. 아저씨께서 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신 것이 제일 컸습니다. 내년에도 당신의 결정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생에 첫 여행에 들뜬 태섭







슬램덩크
2024.01.25 16:03
ㅇㅇ
모바일
센세는 진짜.... 최고야..... 올려줘서 고마워༼;´༎ຶ ۝ ༎ຶ༽
[Code: bf57]
2024.01.26 10:47
ㅇㅇ
모바일
이런 태섭이를 사랑하지 않을수가 있나? 기특쪼푸 성장쪼푸ㅠㅠ
[Code: 05f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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