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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5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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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일요일]

바쁜 날이 지나 짧은 휴식을 취하시는 아저씨께

작년도 그렇고 3월은 늘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3월이 끝나고 있어요. 저는 이번 달에 있던 예선 경기에 교체 선수로 짧은 시간이지만 몇 번 출전했습니다. 팀에 누가 되지 않는 활약을 한 듯해 제법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나신다면 저희 학교의 경기를 보러 와주시겠어요? 저뿐만 아니라 우성이와 대협이의 활약도 보셨으면 해요. 어떻게 그새 실력이 더 좋아졌을까요. 그 애들은 농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아요. 두 사람의 활약이 워낙 압도적이라 저를 비롯한 다른 선수들이 족쇄가 되지만 않는다면 올해도 우승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이번 달로 저도 드디어 선배가 되었습니다. 농구부에 후배가 제법 많이 들어왔어요. 작년에 우성이의 활약을 보고 동경해 들어온 애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우성이와 가까이 지내는 저와 달재도 많이 보게 되었는데, 부원들이 저를 고목나무라고 부르잖아요. 왜 우성이가 아닌 저에게 고목나무라고 하는지 궁금해하던 그 순수한 눈들이 이제는 저에게 고목나무 선배라고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이러다 농구부 고목나무가 될 것 같아요.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설상가상으로 쐐기를 박으려는 듯 우성이가 저를 인형처럼 끌어안고 다니기까지 합니다. 일부러 그러는 거냐고 했더니 개구쟁이처럼 웃기만 하는데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얼굴이라 보여드리고 싶다니까요. 달재에게 눈빛을 보내도 전혀 도와주지 않아요. 한 번은 기숙사에서 진짜 고목나무와 매미가 되기 전에 우성이의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말했더니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더군요. 우성이가 이번에도 저희를 따라 교양과목을 수강하긴 하지만 그 수가 두 개밖에 되지 않아 아쉽고 쓸쓸해 어리광을 피우는 거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들어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어요. '우리는 10대가 아닌데 왜?'라는 의문이 제 머릿속을 부유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전공의 학생들과 친해지며 친구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저희는 농구부에서만 제일 가까운 친구가 되겠죠. 아마 우성이는 그 가능성이 싫은 모양이에요. 저와 달재도 우성이를 소중한 친구라 생각하고 있으니, 지금보다 멀어지는 것이 아쉬운 마음이 들어요. 영원히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에만 머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3월부터 교내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겠네요. 말했던 대로 기회의 제공에 관해 썼는데요, 생각보다 운동부 학생들의 반응이 긍정적이었어요. 누군가 농구부원이 칼럼을 썼다고 소문을 냈는지, 언론사가 아닌 교내 신문에는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던 운동부가 이번 달 신문을 유행하는 소설처럼 읽어본 모양이에요. 다들 그런 방식으로 자기가 하는 운동에 인재가 유입되는 것을 바라더군요. 어쩌면 돈이 없고 신분이 낮아서 테니스나 크리켓, 축구 등에 뛰어난 재능이 있으면서도 본인을 포함해 아무도 모른 채 썩히게 되는 걸 상상하니 견딜 수가 없대요. 물론 말을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저의 짧은 글 하나에 가치관이 격동해 당장 누군가를 후원하며 재능이 있는 아이를 찾아야겠다고 나서지는 않습니다. 며칠 안에 그 생각이 휘발되겠지요. 그러나 오래도록 갇힌 집 안의 공기를,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하듯 그들의 생각을 잠시나마 환기해 주었다는 것에 저는 큰 만족을 얻습니다.
앞으로 칼럼이 실리는 신문은 편지와 함께 전달해 드릴게요. 항상 책을 통해 전해주시는 말이나 글에 대한 피드백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올해는 겨울이 유난히 추운 탓인지 개화 시기가 상당히 늦네요. 꽃망울이 터지는 광경을 보면 그와 함께 저의 부정적인 감정들도 터져나가는 듯해요. 그러고 나면 꽃과 함께 일종의 후련함만 남습니다. 봄이라는 계절이 주는 희망이 있어서 그런가 봐요.

바쁘다고 생색을 내본 태섭







[4월 23일 화요일]

늘 저에게 등대가 되어주시는 아저씨께

오히려 제 글에 쑥스러워하실 줄은 몰랐어요. 저희에 대한 단서는 하나도 없지만 저희 얘기이기도 해서 대입해서 읽게 되셨나 봐요. 저라도 그럴 것 같긴 해요. 사실상 저희 이야기나 마찬가지인 걸 알고 읽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읽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겠죠. 운이 좋게도 후속 글을 하나만 더 써주었으면 한다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대학에 가려면 고등학교를 나와야 하는데 제가 자란 곳처럼 고등학교까지 지원해 주는 고아원은 거의 없다 보니 그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중학생부터 대학 측에서 장학금을 지원할 것인지, 할 수는 있는지, 그 긴 시기를 대학이나 일개 개인에게 감당하게 하는 것이 괜찮을지 고민이 많아요. 그래서 이번 학기 중간시험이 끝난 뒤에는 계속 준호 선배와 만나 조언을 얻고 있어요.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인생의 선배 중에 제일 똑똑하신 분이거든요.
이번 달에 아주 놀라운 일이 있었어요. 며칠 전에 경기가 끝나고 있었던 일이에요. 평소에도 우성이를 응원하는 팬들이 많아서 경기장에 많이 찾아오곤 했어요. 그런데 저희가 아직 경기장에 남아있는 때 관중석에서 어떤 여자가 막 뛰어나오더니 몸집보다도 큰 꽃다발을 내밀면서 쩌렁쩌렁 울리도록 엄청난 목소리로 우성이에고백하는 거예요.. 저희 모두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굴리며 우성이의 눈치만 살피는데 정작 본인은 얼굴이 벌게져서 입만 뻥긋거리더니 그대로 탈의실로 뛰어서 도망가 버렸어요. 몇 명은 그렇게 가면 어떡하냐고 우성이를 뒤쫓아 뛰어가고 그 여자는 완전 울상이 됐죠. 그대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도록 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제가 다가가서 꽃은 우성이에게 전해줄 테니 다음에 학교로 찾아오라 말하고 돌려보냈어요. 눈물을 글썽거리며 저에게 고맙다고 꾸벅 인사하는 게 퍽 귀엽더라고요. 탈의실에 우성이를 놀리며 들어갔더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더군요. 평소에 팬레터도 잘 받고 인사도 해주던 애가 이상하죠. 제가 꽃다발을 돌려주려니 버리라고 얼굴을 굳히며 냉정하게 말하는 것도 그렇고요. 얼굴을 붉혀서 쑥스러워 그러는 줄 알았더니 어쩌면 평소에 그어놓은 선이 있어서 그걸 넘어오는 것을 싫어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우성이 나이의 상류층이면 약혼자가 이미 있을 법도 하잖아요? 어쩌면 그 사람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였을 수도 있지 않나 싶어요. 하지만 달재네 약혼자가 가끔 학교에 찾아와 저희와 자리를 같이 한 적도 있는데 우성이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고 물어보거나 혼자 어림짐작하는 건 실례일 것 같아 별일 아닌 듯 넘어갔어요.
꽃은 버리기 아까워서 제가 방으로 가져와 화병에 꽂아뒀는데 꽃말을 생각해서 만들어 준 꽃다발인지 문득 궁금해지는 거 있죠? 그래서 노트에 꽃들을 대략 스케치해 다음에 근처의 화훼시장이라도 가서 물어보려고요. 화훼시장에 일하게 된 친구가 생각나서 그곳을 찾으려는 거예요.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날 순 없으니 그 친구처럼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는 겁니다. 처음엔 달재에게도 혹시 꽃말을 아느냐 물었더니 꽃에 무지한 게 저와 비슷해 보통 연인에게 붉은 장미를 선물한다는 것 외에는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화훼시장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기에 같이 데려가려고요. 아마 이 꽃을 버리지 않았다는 걸 알면 우성이가 길길이 날뛸 테니 둘이 함께만 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우성이가 저희 방에 자주 찾아와서 꽃은 시들기 전에 버려질 것 같긴 해요. 아저씨는 방에 어떤 꽃을 장식하고 계실까요. 제 고등학교 졸업식에 보내주신 꽃다발을 생각하면 꽃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아 계절이나 기분에 맞는 꽃을 꽂아두실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제 상상은 하지만요..

방에 꽃향기가 가득해 머리가 아픈 태섭







[5월 15일 수요일]

바쁜 틈에도 언제나 저에게 책을 골라 보내주시는 아저씨께

항상 감사히 여기고 있어요. 어지간하면 보내주신 책은 그달 안에 다 읽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책을 매달 보내주셨다면 과제처럼 압박감이 느껴졌을 텐데 귀신같이 제가 책을 읽을 틈이 나는 때만 보내주시더군요. 대학교 생활을 해보셔서 아시는 건가요? 정말 대단하세요. 생일을 축하드린단 말도 미리 드려요. 약간 과장을 보태서 아저씨의 생일은 저에게 성탄절과 같은 날이랍니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생신 당일에는 아침에 눈을 뜨면 침대에 누운 채로 아저씨에게 행복과 축복이 영원하기를 기도할 거예요. 선물로 산 넥타이를 같이 보냅니다. 가지고 계신 것들보단 보잘것없겠지만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지난달에 화훼시장에는 결국 우성이도 같이 갔습니다. 어떻게 알고 눈이 벌게져서는 씩씩대며 쫓아왔더라고요. 자기를 따돌리려는 줄 알았대요. 저와 달재는 즉석에서 항상 고생하는 너에게 몰래 꽃다발을 선물하려고 했다고 거짓말했지요. 순진하게도 그 말에 좋다고 웃었어요. 살 예정이 없던 꽃을 사게 되기도 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에요.
작년 가을에 제가 우성이의 당숙을 만났던 것 기억하세요? 오늘 그분이 학교로 찾아오셨어요. 놀랍게도 우성이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농구부와 관련된 업무가 있어서 오신 거였어요. 얼마 전부터 논의가 오가다 이번에 농구부의 고문을 맡기로 하셨대요. 본래 하는 일이 바빠서 자주 올 순 없어 아주 가끔만 얼굴을 비출 거라더군요. 그런데 저에게 와서 자기 이름을 정대만이라고 소개하고는 느닷없이 생각한 거랑 아주 다르다고 저에게 시비를 걸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도 '아, 예. 우성이한테 저에 대해 좋은 말만 들으셨나 봐요.' 하고 실컷 비꼬았지요. 그런데도 뭐가 좋은지 목젖이 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려서 몸을 젖히며 웃는데 우성이와는 다른 얄미움이 느껴졌어요. 친척이라고 저런 것까지 닮나 싶을 정도로? 그날은 농구부가 연습하는 걸 끝까지 보다가 돌아갔는데 제가 슛을 쏠 때마다 얼마나 딴지를 걸었는지 몰라요. 제가 아직 드리블에 비해 슛이 약하긴 하지만 그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시달릴 정도는 아닌데.
또 곤란한 일이 하나 생겼는데,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요란하게 우성이에게 공개 고백을 했던 여성분이 학교로 찾아와서 자꾸 체육관을 기웃거리고 있어요. 그게 무어가 그리 큰 문젠가 싶으시겠죠. 연습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도 늘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여성분이 저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처음엔 저에게 꽃 한 송이를 주며 그때 고마웠다고 하기에 받았을 뿐인데 음…. 정도가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저번 주에는 강의실에 앉아있어서 저희 학교에 다니는 학생인 줄 알고 이 수업을 듣느냐 물었더니 아니래요. 애초에 대학생도 아니었어요. 눈을 반짝이면서 그저 저를 보러 왔다고 말하는데 나쁜 말을 하기도 미안하고. 그래서 카페에 데리고 가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며 외부인이 수업하는 곳까지 들어오면 쫓겨날 수 있으니, 경기장에서 보는 것으로 끝내기를 권유했어요. 자기 행동이 도가 지나친 것을 깨달았는지 부끄러워하며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쏟아내는 걸 보니 또 마음이 무겁더라고요. 최선의 방법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잘 알아들은 것 같아서 좋게 마무리된 듯해요. 이런 상황에서 아저씨라면 어떻게 대처하셨을까요. 분명 저보다 지혜롭게 이 상황에 대처하셨겠죠?
다음 달 교내 신문에 실릴 칼럼을 쓰느라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은데 이번 달은 참 피곤한 일이 많네요. 이럴 때 마시기 좋은 차가 있으면 좋겠어요. 이제야 저도 차에 대해 맛을 들이고 즐기기 시작했는데 때에 따라 어떤 차가 좋은지는 아직 잘 모릅니다. 특히 홍차는 어떤 회사의 이름을 말하거나 다즐링이니 아쌈이니 하는데 당최 무슨 소리인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달재나 우성이에게 물어도 되지만 아저씨가 추천해 주는 차를 마셔보고 싶어요.

늘 새벽에 잠이 드는 태섭







[6월 14일 금요일]

여름을 기다리는 아저씨께

이번에는 시험이 끝나기 전에 잠시 틈을 내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시험이 끝난 다음에는 훈련 때문에 정신이 없고 리그가 마무리된 후에는 방학 동안 우성이네 집안에서 소유한 농장에서 머물기로 했거든요. 저는 그곳에서도 편지를 쓰겠지만 비서님을 그곳까지 오시게 할 순 없고 농장에서 지내는 동안 별다른 용돈이 필요하지 않으니 7, 8월에는 비서님을 쉬게 해주세요.
저를 쫓아다니던 여성분에 대해 우려를 표하시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예상하신 대로 그분의 행동이 점점 도를 넘어 기숙사 건물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기도 했어요. 애써 못 본척하고 들어갔더니 그대로 아침까지 서 있던 걸 마주했을 땐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같이 기숙사를 나서던 우성이가 그 꼴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며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닦달하는데 할 말이 없었어요. 제가 여태 취했던 행동이 사태를 악화시킨 것 같아 눈앞이 깜깜해지는데 그대로 눈을 돌리고 이 상황을 도망칠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이전에 강의실에 있던 걸 발견했을 때 달재도 걱정하긴 했는데 제가 괜찮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라고 했거든요. 어차피 저희가 최대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교내 순찰 강화나 강의실이나 기숙사 같은 건물의 외부인 단속을 엄하게 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없기도 하고요. 실제로 우성이가 학교에 따져도 그 정도가 전부였어요.
심지어 그분이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선수들 사이에선 암암리에 유명한 사람이었나 봐요. 남편도 있는 사람이었다는 게 제일 놀라운 점이었어요. 남편은 다른 대학에 재학하고 있고 운동을 하는 사람도 아니던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알고 싶지도 않지만요. 남편이 찾아와 저에게 석고대죄하는데 제가 별달리 할 말이 없었어요. 부르주아나 젠트리, 상류층일 그 사람이 고작 고아에게 몸을 조아리는데 뭐라고 하겠어요. 앞으로 고용인을 시켜 그분이 외출하지 못하게 감시한다고 하니 이제는 정말 괜찮을 거예요. 제 생각엔 그 사람을 집에 가둘 것이 아니라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아무튼 이런 큰 사건이 있었다 보니 우성이가 자연 속에서 심신을 안정시키며 요양해야 한다며 방학에 농장에서 지내자고 제안했습니다.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보니 저도 수락했고요. 달재도 함께 가기로 했어요. 농장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걸 듣더니 대협이가 끼어들어 자기도 데려가면 안 되겠냐고 해서 넷이 가게 될 것 같아요. 대협이가 자기는 그런 고즈넉한 곳을 좋아한다며 웃었어요. 제 상상 속의 농장은 동물 소리로 시끄러운 곳이라 고즈넉한지는 모르겠지만 도시보다야 덜 복잡한 건 분명하니까요.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추신. 이번 달 교내 신문을 동봉해 드려요. 이번에는 준호 선배의 도움과 첨삭을 받아 꽤 완성도 있는 글을 쓴 듯 해 쑥스럽지만 자신 있게 보여드립니다.

추천해 주신 캐모마일티를 마시며 태섭







[7월 12일 금요일]

고집쟁이 아저씨께

오, 제가 용돈과 편지를 등가교환 하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당장 부치거나 보내진 못해도 편지는 당연히 쓴다고도 했는데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건 아니시죠? 제가 벼락치기를 하듯 편지를 쓸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한편으로는 혼자 지내시느라 적적하신데 제 편지가 도움이 되는가보다 싶기도 해요. 자식은 장성해서 집을 나가고 부인과 사별해서 저택에 혼자 지내시는 걸 텐데(아저씨가 가족에 대해 말한 적이 없으니 오로지 제 상상이지만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 편지는 8월에 수거해가실 수 있도록 기숙사로 부칠게요. 제가 기숙사 관리인에게도 미리 언질을 주었으니 편지를 보관하고 계시다 전달해 준다고 하셨어요. 관리인도 비서님의 얼굴을 아니까 출입에는 문제가 없을 거예요.
저는 지금 우성이네 농장에 있는 별장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말이 농장이지 거대한 목장이나 다름없는 곳이네요. 작물을 재배하는 곳은 거의 보이지 않고 온갖 가축이 있어요. 마치 동물원에 온 기분이 들어 공연히 아이처럼 들뜨는 기분이에요. 부지가 어찌나 넓은지 우성이가 서서 한 바퀴를 돌며 지평선을 쭉 손으로 가리키더니 이보다도 더 크다고 하는데 정말 입이 딱 벌어졌어요.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지평선 너머로 펼쳐진 땅이 전부 농장이라니. 이번에 처음으로 말을 보고 타봤는데 생각보다 높아서 겁이 나더라고요. 뒤에 누가 같이 타주지 않았다면 정말 볼썽사납게 몸을 떨었을 겁니다. 실제로 제가 쭈뼛대는 것을 보고 대협이가 웃기도 했어요. 머무는 동안 승마를 배워보려고 해요. 제가 뭐 높거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승마라는 것이 생각보다 말과 교감을 필요로 하기에 동물과 언어가 아닌 것으로 교감하는 감각이 낯설고 신기하면서도 좋아서 그래요. 생명과는 언어가 아닌 것으로도 서로를 나눌 수 있다는 걸 체감하니 벅찬 기분이 듭니다. 넓은 들판에 양 떼와 양몰이 개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바람을 쐬는 것도 좋았어요.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름과 함께 제 고민도 전부 흘러가는 것 같아요. 왜 대협이가 고즈넉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동물이 내는 소리는 소음이 아니네요. 바람에 나무,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자연이 합창을 하는 것처럼 들려요.
아직은 농장에 온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제가 겪은 일이 많이 없네요. 아저씨에게는 그다지 신기하지 않은 풍경들이겠죠? 저는 이렇게 다양한 동물을 보는 것도 처음이고 아침에 창가에 새가 앉아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 것도, 닭이 우는 소리를 듣는 것도 하루하루가 새로워요. 이번 편지는 조금 짧아서 죄송해요. 아마 다음 달에는 제법 길지 않을까요? 새로운 경험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조잘거리며 아저씨에게 떠들 제 모습이 선해요. 부디 올여름에도 더위를 조심하시고, 작년의 그 바다에서 편안한 휴가를 보내시길 바라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태섭







[8월 28일 수요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을 아저씨께

기숙사에 돌아와 짐을 정리하자마자 바로 글을 씁니다. 저는 농장에서 그야말로 편안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느새 스토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었을 정도였답니다. 내내 승마를 배우며 저와 친해진 말도 생겼어요. 이름이 세실리아라는 백마인데 속눈썹이 길고 우아한 말이에요. 우성이가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가 한 대 얻어맞았죠. 하여간 말 한마디를 참지 못해서 매를 버는 녀석이에요. 그렇게 농구부 선배한테 등짝을 수없이 맞으면서도 왜 고치지를 못할까요.
농장 한편에 젖소들이 있는 울타리도 있었어요. 자유롭게 풀을 뜯어 먹으라고 울타리를 아주 넓게 쳐서 젖소들을 풀어놓았더라고요. 우유를 짜러 나가는 사용인을 따라가 저희도 젖을 짜보기도 했어요. 양동이를 대고 젖을 짜는데 젖소가 아플까 봐 힘을 세게 안 주니 우유가 전혀 나오지 않았어요. 제법 힘을 써야 하는데 알고 계셨나요? 모르셨겠죠? 아저씨 같은 분들은 이런 일을 하지 않으니까요.
힘 조절도 그렇지만 젖소의 젖을 짜면서 우유가 뿜어져 양동이에 고이는 모습이 너무 생경해서 눈이 빙글빙글 돌았어요. 처음 힘을 주어 젖이 나올 때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고 얼굴을 가렸다니까요. 다행히 양동이에 우유가 거의 없어 엎지른 건 없었지만 호기롭게 나선 것에 비해 우스운 꼴을 보여 애들이 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그래 놓고 자기들도 당연히 해볼 일이 없던 일이다 보니 우성이는 저보다 더한 반응을 보였어요. 저처럼 손을 떼고 엎진 않았지만 젖을 짜는 내내 양동이에 쏴 하는 소리에 맞춰서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답니다. 저는 금방 익숙해졌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저도 손가락질을 하며 놀림을 되돌려주었어요. 놀랍게도 대협이는 처음부터 능숙하게 잘했어요. 그렇게 자연자연하며 조용한 걸 좋아하더니 해본 적이 있었나 봐요. 물어봐도 그저 웃으며 자세한 대답은 내주지 않았지만. 상류층에게는 하층민이 할 법한, 손을 더럽히는 일이라 평소에 동물을 좋아해 농장이나 목장을 자주 찾았어도 굳이 말하지 않은 것이겠죠. 뒤에서 말이 돌 게 뻔하니까요.
별장에서 보이는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제법 큰 강이 있어 그곳에서 낚시하기도 했어요. 대협이가 하는 걸 옆에서 구경만 하다 저도 주변의 나뭇가지와 실로 조악한 낚싯대를 만들어 같이 해보았어요. 입질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제 성미에는 그다지 맞지 않았어요. 조금 지루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만든 낚싯대와 어설프게 끼운 미끼 때문에 입질이 오지 않아 제가 그 재미를 느끼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요. 낚시한 물고기들을 식재료로 쓰진 않았어요. 그게 무슨 생선인지도 모를뿐더러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는지 대협이는 낚는 족족 다시 풀어서 강에 던졌어요. 낚시한다면서 왜 물고기를 담을 통을 가져오지 않나 했더니 순수하게 무언가를 물에서 낚는 행위만 하고 싶었나 봐요. 저와 대협이가 낚시하는 동안 옆에서 잔디밭에 누워 굴러다니며 징징거리던 우성이는 달재를 데리고 토끼풀을 꺾어 팔찌나 왕관을 만들며 놀았어요.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어린애냐고 놀리려고 했지만, 그 외에 손이나 몸을 움직여 할 만 것이 주위에 없어 저라도 그럴 것 같아 입을 다물었습니다. 두 사람은 금방 그만두고 왕복달리기를 하기도 했고요. 강과 반대 방향으로는 숲이 있어 그곳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습니다.
8월 중순쯤에는 정대만 씨가 농장에 찾아오셨어요. 2주 동안 머물 예정이었는데 저희가 먼저 와있는 줄 몰랐는지 별장에서 마주치고 제법 놀란 눈치였습니다. 원래 이 집안사람들의 공간이니 괜히 객식구가 된 것 같아 멋쩍어진 저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습니다. 마주하기 껄끄러운 사람이기도 했지만요.
원래 우성이보다는 정대만 씨가 자주 찾는 곳인 듯했어요.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모두 반기고 어릴 땐 여기서 자랐다고 하시는 말을 들었어요. 우성이네와 정대만 씨는 상류층치고는 집안사람 중에서도  드물게 고용인들에게 친절해서 좋아한다고도 들었어요. 정대만 씨가 친절하다는 말에는 저는 속으로 동의하지 않으며 입을 삐죽였지만요. 제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키를 가늠하며 키는 컸냐고 말하면서 제 제 속을 긁었거든요. 이렇게 얄밉게 구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듣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우성이는 개구쟁이 같은 면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분명 다정한 아이라 반박할 거리가 없지만 정대만 씨는. 흠…. 너무 남 험담을 하는 것 같으니 더 이상 말하지는 않을게요.
몇 번 만난 적도 없는 사람에게 너무 편견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냐 생각하셨죠? 그렇다면 그 생각이 옳아요. 역시 아저씨는 지혜로우세요. 저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하루는 그 사람도 포함해 숲으로 사냥하러 갔어요. 저는 총을 다룰 줄 모르니 동행한 사냥개들을 쓰다듬거나 나머지 사람들이 토끼를 잡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어요. 대협이와 정대만 씨가 왜 총을 잡지 않냐고 물어서 직접 사냥하는 게 무서운 겁쟁이라 그렇다고 둘러댔어요. 고아라는 걸 들키느니 겁쟁이가 되는 것이 나았거든요. 그렇게 평소에는 집안사람들도 가지 않을 정도로 깊은 숲까지 들어갔다가 사슴을 발견했어요. 뿔이 그렇게 크고 화려한 사슴은 모두가 처음 보았습니다. 정말 그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감히 인간이 상상으로 삽화를 그려내지도 못할 정도였어요. 제 생각엔 엘크였던 것 같아요.
문제는 저희가 그 사슴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것이었죠. 안 그래도 몸집이 큰 사슴이라 이쪽으로 돌진하니 저희는 혼비백산하여 도망갈 수밖에 없었어요.. 달려든 사냥개 한 마리가 이미 뿔에 치여 땅에 팽개쳐져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경련하며 떠는 모습은 정말 두려웠습니다. 제일 패닉 상태에 빠진 건 당연히 저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 바위 같은 곳에 몸을 숨겼는데 저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거든요. 결국 발을 헛디뎌 비탈길을 굴러떨어지며 다치고 말았어요.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온 머릿속이 공포와 혼란으로 잠식당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정말 그렇게 두려운 순간은 다시 없을 거예요. 제가 떨어진 곳 주변으로 아직 사슴이 서성이고 있어 다들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데 정대만 씨가 몸을 날려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와 부축하며 절 꽉 끌어안았어요. 누군가의 체온이 느껴지니 안심되며 긴장이 풀려 저는 기절하고 말았어요.
눈을 뜨니 이미 해가 져 밤이 되었고 저는 숲속에 임시 숙소로 마련해 둔 산장에 누워있더군요. 정대만 씨가 기절한 저를 데리고 그곳으로 온 거였어요. 다른 애들은 사고 소식을 알리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갔는데 날이 저물어 어두운 숲길을 지나 산장까지 오기에는 위험하니 날이 밝으면 올 거라는 말을 하며 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와 녹색 눈동자가 아주 다정했어요. 별장의 고용인들이 말하는 그 사람의 다정함을 알게 된 순간이었죠.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저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것도 아닌데 그렇게 몸을 날려 데리러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사슴은 근처에 짝과 새끼가 있어 예민했던 모양이라 사냥하지는 않았다는 말에 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어요. 사슴 때문에 그 꼴이 되었는데 살아있는 것에 다행이라 생각했다니 속도 좋다고 생각하시겠지만, 피를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어요. 보복할 마음도 들지 않았고요. 아마 멧돼지였다면 다른 애들의 귀환도 보장하지 못해 분명 사냥당했을 테니 사슴을 만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누워서 간병을 받는 동안 저는 정대만 씨에게 어차피 자주 오지도 못할 거 농구부 고문은 왜 맡았냐고 물어봤어요. 그건 정말 궁금했거든요. 한 달에 한 번도 올까 말까 하는 직책을 왜 굳이 맡았을까. 리그를 관리하는 협회에서 일을 하고 있다던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특정 학교의 고문이 될 수 있겠어요? 편파 논란이 날 수도 있잖아요. 정대만 씨는 말을 고르는 듯 한참을 있더니 미처 끝을 보지 못한 모교 농구부에 미련이 남아 그랬다고 대답했어요. 친동생처럼 여기는 당질이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지만 앞의 대답이 제 가슴을 쿡쿡 쑤시는 듯했어요. 그제야 우성이의 아버지에게 들었던 얘기가 번개처럼 제 머리를 스치며 창피해졌어요. 물론 정대만 씨는 제가 그런 얘기를 들은 걸 모르겠지만 의도치 않게 상처를 들쑤신 꼴이 되었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은 이해 못 할 사과의 말을 했어요. 그 사람은 제가 왜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단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뭔지 모르겠지만 받아주겠다고 했어요. 그 말에서도 저는 다정함을 느꼈답니다.
그 후로 우성이와 어쩌다 친해지게 된 건지부터 시작해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었어요. 협회 일이 얼마나 귀찮고 힘든지에 대한 투정도 들었지요. 제가 문학을 전공한다는 것을 이전에 들었기에 어떤 작가와 책을 좋아하는지 묻기도 했어요. 별로 관심 없어 할 줄 알았는데 맞장구를 치며 경청해 주었습니다.
그다지 많은 말을 나눈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밤이 지나 해가 뜨고 새가 우는 소리가 들리며 창으로 빛이 들어오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더라고요. 저를 간호하느라 피곤해야 할 사람도 멀쩡해 보여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해가 뜨니 조금 눈을 붙이자며 저를 토닥여 재워서 점심때가 지나서 사람들이 데리러 올 때가 되어야 깼답니다. 저를 재우고 나서도 계속 지켜봤는지 곁에서 옆으로 누워 손으로 얼굴을 괸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더군요. 나중에 일어나서는 손목이 아프다며 엄살을 피워댔고요.
정대만 씨는 저희보다 먼저 농장을 떠났는데, 작별 인사를 하면서 저에게 몸조심하라며 머리를 쓰다듬듯 쓸어내리고 뺨을 감싸는 손길이 참으로 사람을 쑥스럽게 만들었어요. 빤히 쳐다보는 눈빛도 한몫했지요. 다음에 볼 땐 키를 더 키워오라는 말만 안 했으면 좋은 인상만 남았을 거예요. 쓸데없이 말을 얹는 건 정우성이나 정대만이나 똑같아요.
어쨌든 저는 상처를 그리 크게 입은 것이 아니라 남은 기간을 침대에서 보내는 일은 없었으니 너무 놀라지 마세요. 하도 우성이가 극성이라 매일 타진 못했지만, 똑같이 승마도 배웠고 들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책을 읽다 낮잠을 자기도 했어요. 대협이가 풍경을 스케치하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고요. 되게 그림을 잘 그리더라고요. 노트 하나가 그림으로 꽉 차 있었어요. 기억에 의존해 그때의 사슴을 그려놓은 페이지도 봤는데 마치 사진처럼 자세히 그린 걸 보고 감탄을 내질렀어요. 계속 관찰하면서 그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그릴 수가 있을까요. 제가 하도 빤히 쳐다보니 사슴이 그려진 페이지를 저에게 찢어주었어요. 그 찢긴 종이는 아저씨가 보내주신 엽서 옆에 붙여놓았습니다. 벽에 제 여름의 추억들이 장식되는 것 같아요.
농장에 갔던 게 너무 좋아서 아마 내년 여름에도 갈 것 같아요. 달재와 대협이도 제법 만족한 듯했으니 또 넷이 가게 되겠네요. 제가 농장에서 직접 짜서 가져온 우유를 드리고 싶지만, 그동안 우유가 상하니 전해드리지 못하는 게 아쉬워요. 대신 토끼풀로 만든 팔찌를 드려요. 시든 뒤에 버리시면 됩니다. 처음엔 봉투에 넣을 수 있게 작은 반지로 할지 고민하며 풀을 꺾는 사이 더 많이 꺾어버려 팔찌로 만들었어요. 토끼풀로 만드는 반지나 팔찌만큼은 제가 제일 잘 만든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화단에 핀 것으로 많이 만들어서 놀았거든요.
또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네요. 벌써 이 학교에서 네 번째 학기를 맞이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시간이 참 빨리 갑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느낀다는 건 제가 이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겠죠? 언젠가는 여름에 바다에도 가보고 싶어요.

지평선을 바라보며 여름을 보낸 태섭







[9월 11일 수요일]

즐거운 여름을 보낸 아저씨께

무얼 하며 여름을 보내셨는지 자세히 말해주시지 않으니 모르겠지만 퍽 즐거우셨던 모양이라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요.
저는 이제 선배들이 흔히 말하는 끔찍한 전공의 세계로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양으로 듣는 과목도 하나밖에 없어요. 우성이와 같이 듣는 수업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죠. 그래서 그런지 달재와 가는 봉사에 자주 따라오더군요. 저번 주말에는 저더러 교육과정을 이수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했어요. 저도 가르치는 것에 제법 보람과 흥미를 느끼고 있던 터라 제법 괜찮은 제안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일찌감치 교직을 목표로 한 동기들은 2학년부터 이미 시작하긴 했지만, 3학년에도 교직과정을 수강할 수 있대요. 그래서 이번 달에는 교직 이수에 대한 걸 좀 알아보는 데 집중하려고 합니다. 교직과정을 다 마치면 저는 문학 교사가 되는 거겠죠? 제가 문학을 가르친다니 생각만 해도 쑥스럽고 남사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차라리 우성이처럼 체육 쪽이었다면 체육 교사가 될 텐데. 문학 교사 송태섭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마 주변에서 다들 어울리지 않는다고 웃을 거예요.
다음 달에는 운동부 사람 중 몇이 모여서 소아병동에 가서 연극공연을 하기로 했어요. 축구부 애들이 주축이 되어 가끔 소아병동이나 고아원같은 곳에 가서 아이들에 연극을 보여주거나 같이 운동하기도 하고 자선행사도 하는데 저희가 하는 일을 듣고는 찾아와 제안했습니다.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수락했지요. 막상 병원에 가는 날이 임박할 때는 시험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지금부터 엄청나게 연습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대상이듯 뻔하게도 동화를 주제로 하면서도 약간 비틀기로 했는데 우습게도 우성이가 공주를 맡게 되었답니다. 여장하면 충분히 예쁜 얼굴이지만 체격이 워낙 엄청나서 되게 재밌는 모습이 될 거예요. 아이들도 그런 몰골이 우스꽝스럽다고 웃을 게 분명하고요. 그래서 우성이가 질색하며 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버텼지만…. 보시다시피 결국 하게 되었어요. 그래도 소아병동이면 아픈 아이들이 있는 곳인데 웃을 날이 적은 아이들이 그렇게나마 웃으면 좋은 일이 아닐까 해요. 그런 식으로 설득해서 우성이가 넘어온 것도 있어요. 달재는 요정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잘 어울려서 아주 귀여워요.
연극을 준비하는 덕분에 여자 농구부와도 교류하게 되었어요. 학교에 여자부도 있는 건 알았지만 제가 딱히…. 음….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요. 말을 걸 일도 없고 제 일로 워낙 정신이 없었거든요. 그중 이한나라는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사귀게 되었어요. 화려한 인상의 미인이라 인기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흔치 않은 곱슬머리라는 공통점이 있다 보니 관리의 번거로움에 대해 서로 박수치고 동감하며 웃기만 해도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흘러갔어요. 카페에서 만나 얘기하기도 했는데,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고 있다는 걸 보면 농구도 엄청나게 잘하나 봐요. 다음에 학교 운동장에 비치된 농구대에서 만나서 1대1도 해보기로 했어요. 아마 내년부터는 스타팅에 들 거라고 자신하며 말하는 모습이 참 눈이 부셨습니다. 자신감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태양처럼 반짝이는 빛을 내는가 봐요. 겉으로는 침착하게 대단하다는 말만 했지만요. 준호 선배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는 사이이기도 한데…. 아참! 아저씨도 준호 선배를 아시니 소식을 들으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준호 선배가 사법 시험의 면접 결과만 기다리고 있다는 거 아세요? 앞선 1, 2차 시험도 우수한 성적으로 무난하게 합격했는데 준호 선배의 인품과 성격, 인상을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면접 결과도 사실상 뻔하다고 봐요. 칼럼 때문에 끙끙대던 저를 도와주느라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하지도 못했을 텐데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요. 준호 선배의 부모님 또한 모두 법관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그러한 직업도 대물림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래도 사소한 용어부터 시작해서 그 직업인 사회의 생리를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설령 준호 선배가 법학을 진로로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그러한 환경 자체가 참 큰 재산이 되는 것 같아요. 저도 나중에 결혼하고 자식을 낳게 된다면 그러한 재산을 물려줄 수 있을까요?

진로를 고민하는 태섭







[10월 29일 화요일]

언제나 상냥하신 아저씨께

이번 달은 정말 정신없는 한 달이었네요. 시험과 연극 준비에 다음 달 교내 신문에 실을 칼럼까지. 업무가 많이 밀려 바쁜 어느 사업가라고 생각하며 하다 보니 나름대로 몰입도 되고 버틸 만하더군요요. 추천해 주신 차를 마시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어요. 아저씨께서 알려주신 대로 저는 운동부라 특별히 전국대회나 국제대회에서 큰 성과를 내면 체육 쪽으로도 교직을 이수할 수 있다고 해요. 이런 건 어떻게 아셨나요? 아저씨도 이런 경우였나요? 어쩜 항상 모르는 것이 없으시고 저에게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시네요.
9월 말이었나요. 슬슬 가을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는 시점이었던 건 확실해요. 이번 학기 들어 처음으로 정대만 씨가 학교로 오셨어요. 우성이에게 그분이 오신다는 말을 먼저 전해 듣고 여름날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습니다. 농구장에서마저 달재와 우성이를 포함한 셋이 머리를 맞대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으니 대협이가 다가와 찻잎을 선물하는 게 무난하니 괜찮을 것 같다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로네펠트라는 회사까지 추천해 주더군요. 우성이가 눈을 굴리며 한참 생각하더니 정대만 씨가 차를 싫어하지 않으니 나쁘지 않을 것이라 해주어 그날 훈련이 끝나고 바로 차를 사러 갔어요.
정대만 씨는 이번에도 저를 보자마자 키 얘기를 하더군요. 저를 보자마자 "어디 얼마나 키가 자랐나 볼까~." 하고 말끝을 늘이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꼴을 아저씨도 보셨어야 했는데! 분명 아저씨도 그 모습을 보면 저에게 한 방 먹여주라고 하실 거예요. 제 정수리에 손을 얹어 가슴께로 재보더니 눈이 동그래져서 키가 큰 것 같다고 호들갑도 떨었어요. 분명히 키가 크긴 했지만, 성장기 어린이가 아니라 많이 크지 않았을 텐데 손으로 대충 가늠하는 것으로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입니다. 어쨌든, 저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이고 숲속의 별장에서 밤새 말을 나눈 정도 있어 제가 준비한 선물을 줄 테니 훈련이 끝나고 시간을 내어달라 부탁했지요. 특유의 호탕함으로 흔쾌히 허락해 주었어요.
훈련이 끝나면 저녁 시간이라 다른 애들과도 같이 저녁을 외부의 식당에서 먹으며 선물을 전해주려 했더니 우성이는 대협이 손에 추가 훈련으로 끌려가고 달재도 약혼자가 찾아와 그쪽으로 데이트한다며 끌려가고 말았어요. 결국 단둘이 식당에 가게 되었죠. 작년에 처음 정대만 씨를 만나 제가 의심하며 밖으로 돌렸던 때가 생각나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어요.
식사하며 저에게 이중으로 교직 이수를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조언을 해주기도 했어요. 일단 성적을 거의 최상위권으로 유지해야 하는데 그건 지금도 그래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신경 쓸 것이 하나 줄어서 다행입니다. 2학년의 마지막 학기이니 당장 국가대표가 되어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낼 순 없어 4학년부터 체육 관련 교직 이수는 무리더군요. 그래서 정대만 씨는 지금 전공의 교직만 이수한 뒤 대학원으로 가서 체육 쪽 과정을 이수하는 방법도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그렇게 되면 참 좋겠지만 아저씨는 저에게 대학에 다니는 4년을 후원해 주시기로 하셨고, 제가 아무리 대회에서 상금을 받고 용돈을 아껴서 모아도 대학원의 학비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것도 저는 만족스러운 일이라,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저씨가 추천해 주시거나 선물해 주신 책을 따로 모은 책장으로 채운 서재를 만드는 상상을 하며 그 또한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아니면 이번에 시험에 합격한 준호 선배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직원으로 일해도 좋죠. 준호 선배가 제가 손이 꼼꼼하고 일 처리가 아주 좋다고 언제든지 나중에 사무실을 열게 되면 문을 두드려달라고 하셨거든요. 제 포지션이 그렇다 보니까요. 그게 코트 밖에서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보면 어떤 경험이든 다 쓸모가 있고 필요한 능력이 겹치는 일은 얼마든지 있는 것 같습니다.
얘기가 다른 곳으로 샜네요. 하여간 저는 예쁜 상자에 포장된 찻잎을 건네며 여름날의 숲속에서의 고마움을 표현했고 정대만 씨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받아주셨어요. 그렇게 활짝 웃으며 기뻐하는 얼굴은 처음 봤어요. 저에게 아무리 부상의 정도가 약했다지만 농구하는데 사소하게라도 불편한 점은 없는지도 다정하게 물어봐 주었지요.
소아병동에서의 연극도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어요. 큰 키와 근육이 우락부락하지만, 얼굴이 예쁜 공주님이 씩씩한 발걸음으로 등장하니 아이들이 전부 손뼉을 치며 좋아했어요. 오히려 어린아이들이라 편견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공주는 작고 가냘픈 모습만 떠올리는 건 저희 같은 지저분한 어른이었던 거예요. 아이들의 그러한 반응이 제법 인상 깊었는지 다음에 연극을 할 때는 모든 사람이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역할을 해보자는 말이 나왔어요. 그 발언을 한 사람은 당연하게도 한나였죠. 항상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멋지게 밝히고 피력하는 모습은 볼 때마다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리 오래 가는 다짐은 아니지만요. 어떤 생각이 떠올라 그것을 표현하려 할 때는 늘 한나의 그러한 모습을 닮으려 노력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핼러윈 파티를 준비하는 태섭







[11월 23일 토요일]

눈썰미가 참 좋으신 아저씨께

연극 때 제가 맡은 역할을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는데 지난달에 이어 정말 집요하게 물어보시네요. 그렇게 궁금하세요? 비중이 없는 배역이라 별 대단치 않다 보니 말하기가 멋쩍어 피했던 건데. 저는 이름조차 없는 배역이었답니다. 대본에는 '남자 4'라고만 적혀있었어요. 추임새를 넣으며 분위기를 띄우거나 가끔 호들갑을 떨며 웃기는 정도였어요. 마치 들러리 같았지요. 그에 대해 제가 낙담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전 농구에서도 눈에 띄게 득점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주목받는 것에는 큰 욕심이 없어서 괜찮아요. 항상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제일 잘하려 노력하니까요.
같이 보내드린 핼러윈 파티 사진들을 먼저 보셨을까요? 다들 엉망진창이지요? 분장도 그렇지만 술에 취해 눈도 풀려 바보와 같이 웃고 있는 몰골만 찍혀있더라고요. 사진기를 들고 온 사람이 애초에 다들 그렇게 해롱거리며 늘어져 있는 모습만 찍을 생각이었대요. 그래서 나중에 인화한 사진을 뭉텅이로 가져와 나누어주는데 사진이 하나같이 그런 꼴이라 다들 사진 속의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물을 쏙 뺄 정도로 웃었습니다. 그런 즐거운 순간을 원했다고 찍은 사람이 가슴을 내밀고 어깨를 으쓱이며 만족스러워했어요.
파티 중에 다른 과 학생에게 어느 학교에나 있다는 괴담이 저희 학교에도 있다는 걸 들었어요! 진짜 괴담이라기보다는 우스운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요, 자정이 지나 공대 앞에 있는 분수에 빠진 사람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대학원에 갔대요. 다들-특히 공대생들이- 팔을 감싸 안으며 몸서리를 치는데 저는 내심 그 말이 진실이라면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제가 예외를 만들게 되는 걸까요?
물론 이런 우스갯소리만 있는 건 아닙니다. 주기적으로 학생회관에 도둑이나 강도가 드는 모양이에요. 작년 겨울에도 어떤 동아리방에 강도가 숨어들었는데 그곳이 야구부 애들이 만든 수예 동아리여서 야구 배트가 널려있었거든요. 그 안에서 자고 있던 야구부원들에게 흠씬 얻어맞고 쫓기기 바빴다죠. 경찰에 검거되었을 때는 몸에 바느질할 때 쓰는 바늘이 꽂혀있고 야구 배트에 맞았으니 처참한 몰골이었대요.
아주 옛날에는 기숙사에도 강도가 든 적이 있었다는 말도 들었어요. 강도라기보다 정확히는 스토커일지도 모르겠네요. 여학생이 처참하게 살해당해 유령이 되어 돌아다닌다는 얘기였는데, 유령 부분을 빼면 제법 그럴듯하지 않나요? 있을 법한 사건이 주제라 진실 여부를 가리지 않고 쉽게 믿게 되는 일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학과 선배에게 물어보니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던 걸 보면 그저 부풀려진 소문에 불과한가 봐요.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농구부에서 파티하기로 했어요. 한 달 만에 또 파티라니 대단하죠? 학교가 무패 기록으로 2년 연속 우승한 건 처음이라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래요. 원래는 크리스마스에 하려 했으나 시간을 못 낸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추수감사절에 기념하기로 했어요. 올해도 달재 네에 신세를 지게 되면 어떤 선물을 사 들고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잘 되었다 싶어요.
아저씨는 이번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보내시나요. 제가 다그치지 않으면 일하거나 책을 읽으시느라 또 혼자 보내실 게 눈에 선해요. 연락하거나 찾아오는 친구도 많으신 것 같은데 너무 물리지 마시고 어울려주세요. 친구 입장에서는 서운할 수도 있잖아요.

추수감사절 파티에 어떤 음식을 싸갈지 고민하는 태섭

추신. 이번 달 교내 신문 동봉합니다. 관련 전공인 우성이 도움을 많이 받아 가볍게, 농구뿐만이 아닌 운동 전반에 관해 쓴 거예요.







[12월 31일 화요일]

의외로 괴담을 무서워하는 아저씨께

지금 저는 번화가의 한 호텔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왜 여기에 나와 있느냐고요? 학기가 끝나고 달재와 같이 우성이네 집에서 주최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했어요. 집이 수도의 번화가에 있다 보니 제법 멀어 숙소를 얻었습니다. 우성이가 손님이니 집에서 머무르라고 했지만 저희가 극구 사양했어요. 달재에게는 몰라도 저에게는 너무 크고 화려한 건물이라 주눅이 들어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더군요. 거의 성채나 마찬가지였어요. 마음이 여리고 다정한 달재는 혼자 호텔에 있을 저를 걱정해 따라와 주었어요. 낮에 편지를 쓰고 있지만 저녁에는 거리에 나가 다시 우성이를 만나서 사람들과 섞여 새해를 맞이할 예정이랍니다.
제가 살면서 파티에 참석해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긴 하지만 그곳에서 열린 파티가 아마 나라에서 제일 큰 규모일 거로 생각해요. 구석에 저와 나란히 벽에 기대고 서 있던 달재가 귓가에 자기와 같은 젠트리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속삭였거든요. 그렇게 사람이 많았는데 말이에요. 그러니 제가 어찌 다른 손님들과 같이 그 집에서 머물 수 있겠어요.
우성이의 집에서 주최했다는 말에서 예상하셨다시피 파티장에서 정대만 씨도 만났습니다. 우성이와 친형과도 같은 사이니 당연히 그 자리에 참석했죠. 무표정하고 몸이 단단한 남자와 이목구비가 진한 남자와 함께 있다가 저와 달재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인사를 해주었어요. 인맥이 없어 벽과 동화되어 가던 저희에게 말을 걸어주다니 다정하기도 하죠. 실제로 정대만 씨가 저희에게 아는 체를 했단 이유 하나로 이목이 쏠리기도 했어요. 대화하는 도중에도 그에게 인사나 말을 건네는 사람이 상당했습니다.
달재는 파트너로 약혼자를 데려와 춤을 추러 가기도 했는데 저는…. 아, 정말 난감하더군요. 전 그런 자리에 파트너를 동행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들에게나 상식이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달재가 약혼자를 데려온 것을 보고 아차 싶더군요. 저도 파트너를 구했어야 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달재도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라 혼자 나온 저를 보고 티는 내지 않았지만, 눈빛에서 제법 놀랐음을 읽을 수 있었어요. 제가 가까운 여자애들이 없기도 해요.
그 넓은 홀에 있는 수많은 사람이 다 파트너가 있는데 저만 덩그러니 있던 그 기분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때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기분이 제일 강하게 들었지요. 그대로 발코니로 도망가듯 자리를 피하려 했는데 잠시 친구를 보러 비켰던 정대만 씨가 저를 붙잡고 춤을 신청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목이 또 쏠릴까 초조해져 그를 타박하며 뿌리치려 했지만, 오히려 제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가 저도 모르게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듯 긴장하게 되더군요. 그는 반대쪽 손으로 홀을 가리켰어요. 분명 동성끼리도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꼭 파트너나 연인, 부부, 이성끼리 춤을 춰야 하는 것이 아니니 괜찮다고 저를 달랬어요.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죠. 저는 춤을 출 줄 몰라요! 제가 춰본 춤이라고는 고아원에서 아이들과 아무렇게나 사지를 흔들며 덩실대던 것이 전부였단 말이에요. 도저히 피할 수도, 변명할 수도 없는 부분이라 어떻게든 춤을 추지 않으려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변명거리를 생각했어요. 어떻게 되었게요?
정대만 씨는 저를 그대로 끌어당겨 제 귓가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기가 이끄는 대로 따라 빙글빙글 돌기만 하라고 속삭였어요. 그 말에 순간 얼이 빠진 저를 홀로 데려가 제 왼손을 자기 어깨에 올리고 오른손은 맞잡은 뒤 제 허리에 손을 얹더군요. 어디선가 삽화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익숙한 동작이었어요. 그 뒤는 그의 손과 발이 이끄는 대로 별다른 동작 없이 빙글빙글 돌기만 했죠.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계속 마주 본 채로 돌기만 하니 약간 쑥스러워졌어요. 그 사람이랑 그렇게 오래 눈을 마주치고 있어 본 적도 없고요. 춤을 출 때는 원래 파트너를 그렇게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나요? 대화하는 상황이 아니라 그런 것인지요. 아! 머리가 혼란스러웠어요.
거의 홀 전체를 돌았다 보니 운이 좋게도 한나와 마주쳐 춤 아닌 춤을 추기도 했어요. 한나에게는 최근에 발목을 삐었다고 둘러댔죠. 그사이에 이렇게 되지도 않는 변명거리밖에 생각하지 못한 게 한심할 따름이에요. 파트너를 바꾸는 타이밍이 되어 구석이나 발코니로 빠져 대화하려고 했는데 어디선가 정대만 씨가 나타나 또 제 손을 낚아채 갔습니다. 얼마나 세게 끌고 가는지 인사도 제대로 못 할 정도였어요. 그 뒤로 파티 중 한나와 대면하는 일은 없었어요. 나중에 개강하고 난 후에 그 일에 대해 사과해야겠어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낯선 음악들. 파티란 참 소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에 질려 아저씨가 혼자 지내시는 걸까요? 그렇다면 조금 이해가 됩니다. 파티를 좋아해 자주 참석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던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요? 정말 대단해요.
올해도 이제 끝나가네요. 아저씨라는 소중한 인연에 닿은 지 2년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이번 학기 성적에는 제법 자신이 있어 내년에 교직과정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를 후원하기로 하신 것을 후회하지는 않으실까요? 단 한 순간이라도 그런 적이 있다면 주저 없이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저에게 알려주세요. 언제나 당신의 조언을 듣고 실천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부상으로 그만두었다는 아저씨가 지금도 운동을 사랑하고 즐기고 계신 것 같아서 기뻐요. 내년 한 해도 건강하시고 항상 행복하시기를 바라요. 내년 이맘때쯤에는 저희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내리는 눈을 보면 아저씨를 생각하는 태섭







[1월 13일 월요일]

저를 행운이라 생각해 주시는 아저씨께

자랑스러워하실 만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제가 저번 학기에 수석을 했답니다! 시험을 잘 보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기대 이상의 성적을 받아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성적을 보고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었다니까요. 아저씨가 그런 제 모습을 봤다면 원숭이라며 웃으셨을 거예요. 농구부에서도 역대 부원 중 수석을 받은 사람은 제가 처음이라며 아주 거칠게 축하해주었어요. 등을 하도 맞아서 곱사등이가 된 줄 알았어요. 아직도 얼얼해서 어떻게든 손으로 문질러보려고 하고 있어요. 아저씨를 만난 이후로 겨울이 저에게 행복한 기억을 하나씩 선사해 주는 계절이 되었네요. 아저씨야말로 저에게 행운이세요.
전에 제가 교직 얘기를 하며 국가대표에 대해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계실는지요. 또 다른 자랑스러운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제가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거든요. 제가 되었으니, 우성이나 대협이도 당연히 선발되었습니다. 깜짝 놀라셨죠? 정말 하루하루 꿈만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젠 제 일과에 국가대표 훈련이 추가되었네요. 저처럼 키가 크지 않은 선수도 국가대표가 되다니 저와 같은 다른 선수들이 얼마나 희망을 품게 될까요. 이것이 칼럼에 쓸 좋은 소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면 아주 제가 진짜 칼럼니스트가 된 줄 아느냐고 웃으실 건가요? 그것이 어떤 웃음이든 당신이 웃으셨으면 된 일이죠. 어릴 때부터 웃으면 복이 온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거든요. 음침하고 우울한 고아들에 비하면 웃는 아이들이 입양을 갈 확률이 높다고요. 그렇다고 저도 항상 생글생글 웃고 다니냐고 물으시면 정답은 아니오에 가깝겠네요. 빈말로라도 제가 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거든요.
이번에는 비서님께 제가 직접 만든 케이크를 같이 보내드렸어요. 맛에 자신은 없지만 저를 위해서라도 객관적인 평가를 해주세요. 원래 요리를 할 줄 아는 건 아니고요, 봉사 관련해서 아이들에게 줄 것을 만들기에 옆에서 기웃거리다 배웠어요. 아저씨께 드리는 것이 가장 마지막으로 만든 케이크이자 최대한의 기량으로 만든 가장 완벽한 케이크랍니다. 몇 번을 만들었냐고는 묻지 마세요. 한나와 달재가 평생 먹은 케이크보다 더 많이 먹은 것 같다고 말한 것만 살짝 알려드릴게요. 우성이는 영리하게도 먹지 않고 제 가문에서 후원하는 고아원에 갖다줬어요. 자기가 직접 만들어왔다는 거짓말도 잊지 않았더군요. 어차피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모양과 맛이었던지라 그에 대한 평도 우성이에게 떠넘기면 저는 좋은 일이지요. 아마 아이들에게 야유를 들었을 거예요. 사실 한나가 쿠키가 더 간단하고 쉬울 거라고 저를 극구 말렸어요. 하지만 저는 꼭 아저씨께 케이크를 드리고 싶었답니다. 그 위에 제가 글씨도 쓸 수 있고 쿠키보다 다채롭게 꾸밀 수 있잖아요. 맛은 몰라도 모양새만은 저의 안목의 결정체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추천해 주신 책 중에 설국을 읽고 있는데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며 읽으니, 마치 첫 문장처럼 제가 긴 터널을 빠져나와 설국에 도착한 기분이 들어요. 읽다 보면 마치 그 정경이 눈 앞에 펼쳐진 듯합니다. 문장이 참 아름다워요. 그러한 점 때문에 저에게 추천해 주신 걸까요? 사실 한 번에 두 여자를 만나고 있는 주인공이 저에겐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이입되지 않거든요. 인물들의 성격이 그리 묘사되는 것 같지도 않고요. 그들의 이야기가 담긴 삽화가 나열된 것을 글로 읽는 느낌이랄까요. 제 식견이 아직 좁아서 그럴 수 있어요. 내용이 온전히 이해되는 것도 아니고요. 아마 시간이 지나 나이가 더 든 뒤 다시 읽으면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겨울에 눈이 많이 쌓이는 곳에, 설국이라고 부를만한 곳에 여행을 가보는 것도 멋질 거란 생각도 들어요. 책 때문인지 눈이 내리는 풍경에 서 있는 연인의 모습을 상상하면 아름답게 느껴져요. 쓸데없는 환상만 커지는 것 같아요.

겨울의 낭만이 생긴 태섭







[2월 27일 목요일]

거짓말쟁이 아저씨께

제가 드린 케이크를 맛있다고 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제가 만든 것은 고소한 아몬드가 들어간 케이크가 아니라 초코케이크였답니다. 씁쓰름한 맛이 났나 보군요. 아마 너무 오래 구워서 태운 모양이에요. 초콜릿이라 제가 탄 것을 구분하지 못했나 봐요. 분명 솔직하고 객관적인 평을 부탁했는데 너무하세요. 다음엔 과일이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를 도전해 볼게요. 미리 어떤 것인지 얘기하면 이번엔 진짜 솔직하게 답해주시겠죠? 탄 맛이 나면 탄 맛이 난다, 크림이 느끼하거나 너무 달다. 이런 구체적인 말을 해주세요. 어쩌면 아저씨는 손자가 고사리손으로 구워온 케이크를 먹는 기분이라 다 맛있다고 해주실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절대 안 돼요. 훈련이나 다름없는데, 결과물에 대한 피드백이 필요하답니다.
국가대표 훈련에 대해 조금 더 말해볼까 해요. 감독이 저번 크리스마스 파티 때 본 정대만 씨의 친구 중 한 분이시더라고요. 하긴 그 사람도 농구했던 사람이니 주변인 중에도 그런 사람이 당연히 있겠죠. 감독님이 선수 시절 포인트가드를 하던 사람이라 저를 비롯한 같은 포지션이 선수들의 만족도가 아주 높아요. 저희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나 코트 위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자세히 알려주시는 것이 큰 도움이 되거든요. 현역 시절엔 정말 대단한 선수셨을 거 같아요. 실제로도 유명한데 저만 모르는 걸 수도 있고요. 저는 고아원에 있었으니, 매체로 접하기가 힘들잖아요. 간혹 농구 경기에 나가 주변 애들이 하는 말을 들어도 보통은 득점하는 선수들에 대해서 떠들기 바쁘니 상대적으로 활약이 돋보이지 않는 포인트가드에 대해서 어린애들이 뭘 알고 떠들겠어요. 하여튼 그분이 워낙 대단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 기백에 압도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가끔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특이한 말투를 사용하기도 하세요. 배려심이 많으신 분인 것 같아요. 군기를 잡겠다며 일부러 세게 나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오히려 반대로 행하다니.
친구가 있어서인지 정대만 씨도 훈련하는 걸 자주 보러 오셨어요. 저희 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식당이나 카페에 데려가기도 하셨죠. 거기서 오랜만에 남이 만든 케이크를 먹으니 얼마나 입에서 살살 녹고 맛있는지요. 심지어 전문가가 만든 거잖아요. 감히 저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요. 그래도 제가 직접 만들어보기 이전과는 달리 먹으면서 더 집중하게 되고 이걸 사용하고 이렇게 했구나, 장식을 이렇게 하는구나 하며 세세한 걸 신경 쓰게 되더라고요. 제가 세상을 보는 시야가 더 넓어진 게 그런 식으로 느껴질 줄은 몰랐어요. 그때 딸기와 블루베리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가 인상적이어서 아저씨께도 꼭 맛보여주고 싶다고 다짐했답니다. 완벽히 똑같게 만들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신선한 과일과 생크림이 올라간 케이크라는 건 제법 비싸고 맛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에게는 과일 케이크가 그리 생소하지 않으실 테니 역으로 제가 만든 케이크에 신선함과 충격을 받으실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놀라시지 않게 더 많이 연습할게요.
국가대표 훈련이란 대학생 신분인 사람들이 3월에 학교에 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몰아치더군요. 덕분에 너무 피곤해요. 그나마 내일 하루는 쉴 수 있어 실컷 늦잠을 자려고 해요. 아마 습관처럼 일찍 깰 확률이 높긴 한데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과 긴장감 없이 편히 잘 수 있으니까요. 그건 실로 오랜만이거든요. 지금도 사실 조느라 제가 무슨 말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횡설수설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늘 제가 당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건 변치 않습니다. 겨울이면 늘 낙상을 조심하세요. 날이 추워 움츠러들기 쉬우니 벽난로 앞에서 몸을 따뜻하게 데우시고 어깨 통증도 조심하시구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글자가 무너지기 시작해 정말 자야겠다고 생각하는 태섭






슬램덩크
2024.01.25 04:59
ㅇㅇ
모바일
갓작......ㅠㅠㅠㅠㅠㅠㅠ
[Code: dd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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