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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2 22:13



모든 인간의 행위에는 망각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살아 숨 쉬는 유기체의 생명에는 망각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묻혀 잊히는 것뿐이다.

나를 기억에 묻고 너를 그 위에 다시 묻는다.
 

<아스트로 피아졸라>
 



 맵을 처음 만난 건 다섯 살 무렵이었다. 계절은, 그래. 반소매를 입었던 걸 보면 여름이었겠지. 나는 플로리다에서 태어나 일곱 살까지 이곳에 살았다.

플로리다는 여름에 볕이 따가울 만큼 내리쬐는 곳이다. 하지만 일 년 내내 습도가 없어 쾌적했다. 단 한 가지, 허리케인만 빼면. 엄마는 이곳 사람들이 밝고 친절하다며 참 좋아하셨다. 실제로도 그랬다. 옆집 이웃은 정정하신 할아버지였다. 커튼만 걷으면 낡고 허름한 이층집을 우리 집에서 볼 수 있었다. 유일한 장점은 드넓은 뒷마당이었는데, 우리 집 세 채는 들어갈 수 있는 넓이였다. 할아버지는 그곳을 메마른 시멘트로 덮어 놓았다. 엄마한테 듣기로는 그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라고 했다. 잔디를 심으면 관리해야 하고, 할아버지에게 매일 아침 잔디 깎는 일은 고될 테니까.
 

 성격이 나긋나긋한 이웃이었지만, 그 노신사가 아이들에게 다정한 타입은 아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이웃을 골려주기 위한 작당 모의를 하다가 한 번은 크게 혼날 뻔했다. 현관 카펫에 있는 열쇠를 창가에 있던 화분 아래로 옮겨둔 탓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부름하러 지나가는 길에 슬쩍 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들은 얘기로는 갑작스럽게 다른 주로 이사를 하신 거라고 했다. 부디 나와 친구들이 벌인 장난 때문에 이사한 게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고 나서 옆집은 한참 동안 비어 있었다. 문도 안 잠겨 있어서, 나는 종종 친구들과 함께 빈 집을 몰래 탐험했다. 관리를 하지 않아 거미줄이 켜켜이 쌓인 계단을 뛰어 내려갈 때면, 유령의 집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달릴 때마다 마룻바닥은 끼익, 하며 비명을 질렀다. 차고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나가면 창문 틈 사이로 우리 집이 보였다. 엄마가 전화 통화에 정신 팔린 틈을 타서 자연스럽게 집에 돌아오면 끝이었다.
 

 엄마는 몰랐겠지만, 그 집은 작은 비밀 기지로도 쓰였다. 벽에 글씨를 써도 뭐라 할 어른 하나 없었으니까. 그 놀이를 그만두게 된 건 한 남자가 그 집을 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놀러 가려 한 우리들은 잠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이런 집을 산 사람이 누구인지나 알아야겠다 싶어서, 우리는 차고 뒤에 숨어서 기다렸다. 한 손에는 카세트 플레이어, 어깨에는 커다란 더플백을 메고 바이크에서 내린 집 주인은 아버지와 꼭 닮은 옷을 입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얼굴 곳곳에 주름으로 패어 있었으나, 커다란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이 나를 사로잡았다. 발목에 감겨 있는 붕대와 벽에 세워진 목발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요소였다. 그는 한쪽 발을 끌다시피 걸어와 내 앞에 서더니 눈높이를 맞춰 고개를 숙였다. 두 개의 에메랄드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심장이 널을 뛰는 듯했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다른 아이였다고 하더라도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반응이었을 것이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안녕, 얘들아. 난 피트 매버릭 미첼이란다. 브래들리, 많이 컸구나."
 

아무리 어린 나이더라도 얼굴을 보는 눈은 있었다. 같이 있던 여자아이들은 환호했고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일단 엄마가 아는 사람은 아닌 게 확실하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알아요?"
 

"네 아버지 친구거든. 네가 어릴 때 기저귀도 갈아줬는걸?"
 

피트의 얼굴에 장난기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표정을 잘 알았다. 아빠가 훈련하던 시절에 보내준 사진에서 자주 본 미소였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되지는 못했다. 사진 속에서 엄지를 치켜들고 어깨동무하고 있던 그 사람의 얼굴은 칼로 오린 것처럼 잘려 나가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동일 인물인지는 그 사진을 찾아봐야 알 것 같았다. 몇 년 전이니 지금은 엄마가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뭐... 아빠한테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그의 얼굴에 언뜻 실망감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곤란한 상황에서는 모른 척하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다. 부부 싸움을 하고 나서 엄마가 해 준 명언이다.
 

"구스가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섭섭하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메고 있던 더플백을 내려놓았다. "좀 도와주겠니?"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친구들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나서서 그의 짐을 들었다. 무거운지 끙, 하는 한숨이 들렸다.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나도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들었길래 캐리어도 아니고 메는 가방이 묵직한 건지. 다친 다리로 들 만한 무게는 아니었다. 먼지가 가득했던 바닥은 언제 치웠는지 말끔하게 닦여 있었으며, 거미줄이 처져 있던 계단참 역시 그랬다. 괴상한 소리가 나던 바닥도 진홍색 카펫으로 덮였다. 그의 취향보다는 배우자의 취향이 반영되었을 법한 미니 테이블도 보였는데, 그 위에는 꽃이 가득 담긴 화병 하나가 있었다. 한 떨기의 장미는 물을 머금어 그 어느 때보다 싱그러웠다. 이 집 주인처럼. 그는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마음에 드냐는 듯이.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대뜸 그렇게 묻고 싶었다. 혹은, '저를 아세요?'라든가. 하지만 구닥다리 플러팅 같아 보일까 봐 관뒀다. 침실은 소박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킹사이즈 침대에 사이드 테이블이 맞닿아 있었다. 그 위에 엎어 둔 액자가 빼곡했다.
 

"어제 너희 부모님이 도와줘서 같이 치운 거야."
 

 너희들이 올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신경 써서 치우는 건데. 그가 덧붙였다. 나는 꽤 그 집이 마음에 들었다. 전직 파일럿답게 옷장에는 부대 패치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벽에 붙은 사진들은 주로 아빠와 함께한 사진이었다. 사진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물었다. "아저씨는 애인 있어요?"
 

"야, 뭔 소리야."
 

"애인은 없단다. 결혼했거든."
 

 내 시선은 그의 왼손으로 향했다. 반지가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 있었다. "거기가 아니야." 그는 티셔츠를 살짝 내려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같은 디자인의 다이아몬드 반지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배우자가 파일럿이라, 결혼반지를 손가락 대신 목에 걸게 되었다고 했다. 옆에 있던 피터가 불쑥 물었다. "이거 진짜 다이아예요? 한 번 봐도 돼요?"


"그러렴."


"야, 이거 봐봐."


 앤디는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보다 반지에 달린 다이아몬드 크기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나이가 있으니 결혼했을 법도 하지, 싶은 눈치였다. 반지를 뒤집자, 안쪽에 새겨진 이름이 보였다. 피트 미첼의 이니셜과... 남편, 혹은 아내의 이름을 확인하려던 찰나에 목걸이는 주인 손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이유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뒤집힌 액자에 손을 대려고 하던 찰나에, 그는 짐 옮기는 걸 도와준 답례로 피자를 사 주겠다고 했다. 신이 난 나는 결혼사진을 보는 것도 잊고 방을 돌아다니며 다른 장식품들을 구경했다. 부엌과 거실에 딸린 화장실, 그리고 이 층에 있는 작은 방 하나와 큰 방 하나, 샤워실. 사실 이미 그가 없을 때도 자주 드나들던 곳이라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었다. 피터가 투덜댔다. "차라리 그 무거운 가방이나 터는 게 더 재밌겠다."


"안에 아령이라도 넣고 다니나 보지."


 화살은 나에게 돌아왔다. "그게, 난 기억이 안 나." 어릴 때 가끔 본 친척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저 정도로 눈에 띄는 얼굴이라면 더더욱. 친구들은 몇 년 전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나사는 못 가겠다고 낄낄거렸다. 나는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아빠는 예정된 일정보다 조금 더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장미꽃 한 다발을 엄마에게 건네며 키스를 나누는 동안, 나는 아빠 옆에 서 있는 피트 삼촌과 눈인사했다. 항모 생활을 오래 한 아버지에게서는 바다 내음이 풍겼다. 엄마와 아빠가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동안, 나는 목발을 짚은 삼촌에게 다가갔다. 선글라스를 쓴 탓에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올라간 입꼬리로 그가 나를 반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리는 괜찮아요?"


"그럼, 브래들리. 걱정해 줘서 고맙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부축하고 싶었지만, 생각 외로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투는 마치 아이를 달래려는 것 같았다. 이제 난 어리지 않은데... 그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웃기만 할 것 같아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열렬한 입맞춤 끝에 부모님은 우리를 돌아보았다. 엄마는 이전에도 그와 만난 적이 있었는지, 다친 발목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매버릭! 결혼했다면서요. 소식이 늦었어요. 이번에도 애인이랑 올 줄 알았지 뭐예요. 다친 게 오래 가나 봐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캐롤. 식은 아직이에요. 어쩌다 보니 기대를 저버렸네요. 발목은 금방 나을 거예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엄마는 생기가 도는 얼굴로 나와 삼촌을 번갈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아빠가 헛기침하며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내년에 할 거래. 그것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 있어. 매버릭이 집 근처로 이사를 오거든."


"그래? 어디로?" 엄마가 물었다. 아직 옆집에 세워져 있는 가와사키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바로 옆집이야. 브래드, 너 피트 삼촌한테 심한 장난치면 안 된다."

"세상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엄마가 매버릭을 끌어안았다. 손에 든 꽃다발에서 잎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적적하면 언제든지 놀러 와요."

"그게...." 매버릭이 뜸을 들였다. 말을 꺼내기가 난감한 듯했다. 아빠는 엄마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더니 볼에 입을 맞추었다. "허니, 집을 보수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그동안 우리 집 손님방에서 지내게 해도 될까?"

"오, 매버릭." 그의 두 손을 붙잡고서 엄마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당신은 우리 가족이에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옆집부터 찾았다. 현관 카펫 밑에는 삼촌이 나를 위해 남겨둔 스페어 키가 있었다. 둘만의 약속이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그는 뒷마당에서 머스탱을 수리하고 있었다. 열정적으로 내부 부품을 뜯어고치는 걸 도왔지만, 오늘도 시동이 걸리다가 말았다. 맵은 남편이 돌아오면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머스탱을 타고 함께 날던 시절이 그립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그의 남편이 부러워졌다. 맵이 즐겨 입는 흰 티셔츠는 엔진 오일과 먼지가 묻어 얼룩덜룩했다.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 냄새를 맡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같이 살았던 것처럼.


"맵도 전투기 조종사였다면서요."


"대령이었지."


 왜 비행을 그만두게 됐는지, 다리는 어쩌다 다쳤는지를 묻고 싶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 이상 과거를 꺼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내가 알게 되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상관없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비밀이 있는 법이니까. 수십 개의 스패너, 드라이버가 오가다 보면 해가 지는 게 보였다. 땅거미가 늘어진 햇살이 거실에 난 통유리 사이로 노랗게 쏟아져 들어왔다. 그 볕 밑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삼촌이 무릎을 내주었다. 처음에는 쑥스러웠지만 나는 곧 익숙해졌다. 무릎을 베고 올려다보면 그의 결혼반지가 빛을 받아 선명하게 빛났다. 그 안에 쓰인 이니셜은 나와 같았다. B.B. 우연이라는 걸 알면서도 설렜다. 토닥이는 손길을 자장가 삼아 눈을 감고 몰려드는 잠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내가 그의 배우자이기를 바랐다. 적어도, 그런 꿈이라도 꾸고 싶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사를 끝마친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주말 저녁은 별일이 없다면 저녁 식사에 함께했기에, 엄마는 나에게 그를 불러오라고 했다. 이 층에는 창문이 열린 채로 불이 꺼져 있었다. 오늘 분명 아무 약속도 없다고 했는데.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문고리를 돌리자 잠기지 않은 문은 침입을 쉽게 받아들였다. 누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맵?"


 불이 다 꺼진 복도는 고요했다. 계단 앞에 다다르자, 한 남자가 이야기하는 소리와 미약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맵이 아니었다. 남편이 돌아온 걸까? 계단을 오르는데 거센 파도를 맞닥뜨린 선원처럼 심장이 뛰었다. 그 남자는 할 말이 많은지, 끊이지도 않고 대화가 이어졌다. 방문 앞에 다가서서야 비로소 라디오에서나 들을 법한 잡음이 섞여 난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그리움을 달래기 위한 임시 조치였다.


"브래들리...?"


 달빛 덕에 그의 눈가가 젖어 있다는 걸 알았다. 콧잔등을 따라 그늘진 그림자 때문에 표정은 알 수 없었으나 축 처진 어깨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옆에 앉아 맵의 손을 잡아주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뱃사람과 결혼한 숙명 같은 거였다. 엄마도 종종 그랬으니까. 어디서 듣기로는 한마디 말보다 곁에 있어 주는 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에게도 그 조언이 맞아떨어지길 빌면서, 사이드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사진들을 바로 세웠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삼촌의 얼굴이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문제의 결혼 사진 같았다. 나는 그 사진들을 소리 나지 않게 다시 뉘어 놓았다.


"맵, 제가 더 크면 결혼해요. 저는 맵을 두고 어디 가지 않을 거예요."


 맵은 눈물을 닦으며 설핏 웃었다. 내 딴에는 진심이었다. 다리를 다친 남편이 이사하는 날에도 함께 있어 주지 않고 전화 한번 없는 배우자라니. 그건 그냥 남이나 다름없었다. 맵이 걸고 있는 목걸이가 목줄처럼 보였다. 반지만 없다면,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나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목걸이를 잡아채 창밖으로 던지고 있었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맵은 그걸 인지하지 못한 듯 잠시 얼어붙었다가, 이내 내 멱살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반지가 그렇게 중요해요? 지금까지 남편한테서 연락 한번 없었잖아요. 그런 사람이랑 대체 왜...!"


 뺨이 후끈거렸다. 맞은 건 나인데 그가 울고 있었다. 맞았다는 아픔보다, 상처받은 삼촌의 눈빛을 마주한 충격이 더 컸다. 밀물이 들이차듯 숨이 가빠왔다. 맵이 나보다 작아 보였다. '많이 컸구나.' 그 말이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의 키를 추월한 지는 오래되었다. 왜 나를 열 살이라고 생각했을까. 어쩌다 이곳으로 오게 되었던가.

 

 그건 몇 달 전이었다. 새로 투입되었던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퇴로를 막고 기다리던 적군으로 인해 비상 탈출을 하는 과정에서 일이 잘못되었다. 바다에 무사히 낙하하여 몸을 숨긴 것까지는 좋았다. 행운의 신은 거기까지였다. 바닷물을 머금은 옷은 점점 차가워졌고, 밤이 되어도 구조대를 볼 수 없었다. 접경 지역이라 그래. 금방 올 거야. 나는 맵의 얼굴을 떠올리며 견뎠다. 단좌기였으니 망정이지, RIO가 타고 있었더라면 두 명이 골로 갈 뻔한 셈이다.

 육지에서 부는 칼바람은 따뜻하게 껴입으면 그만이지만, 물은 평등하게 온도를 낮춘다. 나는 발견 당시 체온을 모두 빼앗겨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곧장 옮겨진 병원에서 저체온증 치료를 받는 동안 내 옆을 지키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따금 말을 걸었고, 내 손을 잡았고, 사랑한다고도 말했다. 몇 시간, 어쩌면 몇십 시간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그제서야 나는 자의로 일어났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이 정도로 잠들지는 않았겠지. 그날도 그는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얼굴을 감싸 쥔 손에는 결혼반지가, 잠깐.


"날 두고 과거로 돌아간 건 너잖아."


 기억의 편린은 잘게 부서져 파도처럼 자꾸 나를 떠밀었다. 나는 매몰되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웠다. 비틀거리며 문으로 다가가 전등을 켜니 아까 엎어둔 사진 액자들이 보였다. 그건 환하게 웃고 있는 피트 미첼과 나였다. '매버릭, 당신은 우리 가족이에요.' 그제야 나는 엄마가 한 말을 이해했다.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이었다. 알람은 이미 열댓 번 울린 지 오래였고, 나는 눈을 뜨지도 않고 이부자리를 더듬었다. 곁에 있어야 할 그가 없다. 잠긴 목소리로 맵을 불렀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비몽사몽인 눈으로 옷을 대충 꿰어 입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머스탱도, 매브도 사라졌다. 망가졌던 게 아니었나? 고개를 들자 붉은 점이 눈에 띄었다. 그건 점차 가까워졌다. 손을 흔들자, 호응하듯 기체가 오른쪽으로 반 바퀴 돌았다. 몇 차례의 곡예비행 끝에, 머스탱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캡틴 미첼!"


 나는 뒷마당과 이어지는 도로를 향해 달렸다. 산등성이에 가려졌던 머스탱이 착륙하고 있었다. 귀가 먹먹했다. 나는 전투기에서 내리는 삼촌을 향해 팔을 벌리며 속력을 냈다. 달려가느라 붙은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우리는 함께 넘어졌다. 나는 그에게 쉴 새 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많았는데 막상 말을 꺼내자니 어려웠다. 맵의 눈은 슬퍼 보이기도, 기뻐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단단히 끌어안고 속삭였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그 순간 나는 피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수축하는 걸 보았다. 그는 목이 메는지, 말 없이 반지를 끼워주었다. 꿈에서, 혹은 현실에서 내가 던져 버렸던 그 반지였다. 씁쓸함이 밀려왔다. 내 기억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몇 날 밤을 새웠을까.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곁에서 얼마나 맴돌았을까. 기약 없는 기다림이다. 그건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되지 않는 난제였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약지에 입을 맞췄다.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눈물샘이 터지기라도 한 건지, 하염없이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오래 기다렸어요? 많이 늦었죠. 내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로 약속했는데, 결국 그 약속을 저버린 내가 한심했다. 내가 기억을 잃은 지 네 달이 지났다고 했다. 그날 방심하지 않았다면, 내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 매브는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이마를 맞댔다. 두근거림이 심해졌다. 침대에 앓아누운 동안 연인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진 게 분명하다.


"브래들리, 넌 언제나 나에게 아이란다."


 하나밖에 없는 조카이자, 연인이자, 아이. 오늘은 왠지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사수생들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2024.01.02 22:2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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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사랑해 ㅠㅠㅠㅠㅠㅠ
[Code: f384]
2024.01.02 22: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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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센세ㅠㅠㅠㅠㅠㅠㅠ날 두고 과거로 돌아간 건 너잖아라니ㅠㅠㅠㅠ
[Code: 3e32]
2024.01.02 22:58
ㅇㅇ
센세가 세뱃돈을 선불로 줬어 절 받아 센세
[Code: 6b82]
2024.01.02 23:2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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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ㅈㄴ 홀려서 들어오게 만들었어 센세 사랑해 ㅠㅠㅠㅠㅠ선개추 후감상 갑니다
[Code: 39e6]
2024.01.02 23:3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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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울어 ㅠㅠㅠㅠㅠ넉 달 동안 루스터는 기억을 잃었었구나 그래서 매버릭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있었던거였어 하지만 기억을 잃은 동안에도 아이였을 때도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우는 매버릭에게 결혼하자고 곁에 있어 주겠다고 말하는 브래들리잖아 ㅠㅠㅠㅠㅠㅠ
[Code: 39e6]
2024.01.02 23: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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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어도 브래들리는 매브를 사랑하는 것은 잃지 않았던거야 그거면 됐다 이제 절대 헤어지지 말고 영사해 ㅠㅠㅠㅠㅠㅠ
[Code: 39e6]
2024.01.02 23: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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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새해선물을 이렇게 크게받아도되는거야ㅠㅠㅠㅠㅠ
[Code: 7723]
2024.01.03 10: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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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들리 뇌에 힘줘 키드도 와이프도 다할거면 맵 절대잊지마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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