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78752029
view 948
2023.12.31 21:33
고증없음ㅈㅇ

https://hygall.com/578751942 전편








- 일어났냐뿅?


눈을 번쩍 뜨니 바로 앞에 명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준호의 잠옷에 준호의 머그잔을 든 채였다. 한순간 권준호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이불을 말아다 끌어안았다. 어? 벌떡 일어나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머리맡을 더듬자 명헌이 어딘가에서 안경을 주워 건네줬다. 그제야 또렷해진 시야에 똑같이 잠옷 차림인 자신이 들어왔다.


- 어…, 이게, 다 어떻게 된…?

- 이거? 어제 준호가 입고 자라고 성화였잖아뿅. 편하게 자야 한다고용.


스멀스멀 단편적인 기억이 떠올랐다. 그곳엔 흐느적거리며 고집스럽게 새 칫솔과 잠옷을 꺼내주던 자신이 있었다.


- 아…, 세상에. 미안해요, 명헌씨.

- ? 어젠 명헌아, 명헌아, 했는데뿅.

- 예…?

- 그쪽이 훨씬 나아영..용!


잔을 든 채 등을 휙 돌려 명헌은 방 밖으로 나갔다. 대학원생의 좁은 집이라 방 하나, 거실 하나가 전부였을텐데 어제 대체 명헌은 어떻게 잠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볼 자신도 없어서 준호는 비틀비틀 명헌을 따라 나갔다.

준호는 모르고 명헌은 아는 어젯밤 이야기를 짧게 하자면, 어제는 결국 새벽에 술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술을 마셨고 더는 갈 곳이 없어진 두 사람은 준호의 집으로 향했다. 제집으로 가자는 건 당연히 준호의 아이디어였다. 마시던 곳에서 겨우 10분거리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엔 명헌에게 잠옷과 칫솔을 주고 어서 씻고 자자고 선생마냥 따끔하게 말했다. 철저하게 양치에 세수까지 꼼꼼히 마친 권준호는 얌전히 침대에 가서 잠을 청했다. 명헌은, 그런 준호를 따라 양치하고 세수하고 침대 빈 자리에 똑같이 누워 잠든 준호를 구경했다.


- 명헌ㅆ..아니 명헌아, 정말 미안해. 이렇게 취하려던게 아니었….

- 아까부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뿅.


준호는 명헌이 모르는척 해주는구나 싶어 조금 감동받았다. 반면 이명헌은 정말 몰라서 모른다고 한게 다였다. 그러다 퍼뜩 궁금한게 생겨 물을 마시던 준호에게 물었다.


- 근데 왜 어제 계속 나한테 귀엽다고 했나용?

- 푸흡.


드라마에서처럼 준호는 물을 앞으로 뿜어냈다. 명헌은 놀라지도 않았다.


- 내, 내가…?

- 뿅.

- 뭐, 뭐라고 했는지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 ‘명헌이는 정말 귀여워.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명헌아, 너 입술이 진짜 귀여운거 알아? 꼭 명란젓같아. 명란젓이 뭔지 알아, 명헌아? 잘 모르려나. 아, 귀여워. 다음에 꼭 먹으러 가자. 마요네즈랑 먹으면 진짜 맛있거든. 명헌아, 너 새로운거 알 때마다 정말 귀엽….’


그마안! 기계적으로 말을 쏟아내는 이명헌의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며 준호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다 손바닥에 닿는 말랑한 입술의 촉감이 느껴져서 얼른 손을 떼내었다.


- 그게, 명헌아. 기분 나빴다면 정말 미안해. 그치만 내가 널 귀엽다고 한 거는 음…그러니까….

- 귀엽다는 것의 의미는 나도 알고 있다뿅. 새끼 개체를 보는 것처럼 돌봐주고 싶다는 뜻이잖아뿅.

-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 아니라고?


명헌이 눈썹 한쪽을 치떴다. 준호는 말문이 막혀 침만 꿀꺽 삼킬 뿐이었다.


- 난 좋다는 뜻인줄 알았는데뿅.


뭐라고? 말의 끝과 함께 돌아선 명헌의 귀가 빨개져있었다. 준호처럼 민망함이나 창피함때문에 붉어진게 아니란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 …나쁘지 않았다뿅.

- 내가 널 귀여워하는게…?


준호를 등진 명헌이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아, 어떡해. 세상에…. 너무 귀여워.





그 날 이후 두사람은 좀 더 자주 얼굴을 마주했다. 영화를 보고 놀이공원에 가고 도서관에 가서 준호는 전공책을, 명헌은 만화책을 읽다 오기도 했다. 새로운 것, 팝핑 캔디가 들어있는 아이스크림이나 2인용 자전거 같은 것을 볼 때마다 명헌은 네살짜리 아이처럼 흥미로워했고 준호는 그 모습이 도저히 질리지가 않았다. 그동안 봄이 지나고 초여름이 다가왔다. 그 해의 꽃구경은 전부 명헌과 함께였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톡톡 튀던 사탕처럼 손바닥 안에도 작은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명헌은 처음엔 의아해하다 이내 그 감각을 즐기는지 먼저 깍지를 끼었다. 마디가 도드라지는 준호의 손과 운동선수처럼 길쭉한 명헌의 손이 봄바람 밑에 겹쳐지며 귀여움은 서서히 애정으로 발전해갔다.

명헌은 귀엽다는 말만큼 사랑한다는 말도 좋아했다. 다른 새로운 것은 다 새로워서 즐거워한다면 사랑은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바람에 설레여 하는 것처럼 보였다. 준호가 짧게 사랑해, 할 때면 명헌은 일자 눈썹을 누그러뜨리고 준호의 품 안으로 숨기에 바빴다. 뾰옹. 이제는 대충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의성어로 대답을 대신했다. 준호의 해석이 맞다면 방금 그것은 나도, 라는 뜻이었다. 그 날 다 져버려 초록이 된 벚나무 아래서 두 사람은 첫 입맞춤을 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입술을 겹치고 또 겹쳤다.

그렇게 또 한 계절이 지났다. 푹푹 찌는 여름을 명헌은 유독 힘들어했다. 손부채질을 해주며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물린 준호는 더위를 많이 타는구나, 했고 명헌은 이렇게 대답했다.


- 살던 곳은 이렇게 덥지 않았다뿅.


처음으로 명헌이 제 고향을 언급했다. 그게 섭섭하진 않았다. 오히려 더위와 애정에 한껏 물러져 이제는 사적인 이야기도 서슴없이 나누게 된 명헌의 태도가 준호는 퍽 마음에 들었다. 차가운 손을 명헌의 이마에 대주며 준호는 잠시 명헌이 살던 곳을 상상해 보았다. 여름엔 덥지 않고 겨울엔 함박눈이 내리는 곳. 분명 명헌을 닮아 아름다울 터였다. 명헌의 마음이 완전히 열리면 꼭 그 곳에 가보자고 해야지.





늦가을 무렵, 준호는 열댓번은 더 참여했던 동호회에 대한 논문을 쓰느라 바빴고 그런 준호를 명헌은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거의 대부분 하루를 도서관에서 보내는 준호를 따라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도 했다. 가끔은 명헌 혼자 훌쩍 어딘가로 떠나기도 했다. 준호는 여러번 어딜 다녀왔냐고 물었지만 명헌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나중에 꼭 말해줄테니 기다려 달라고만 했다. 그렇게 둘이 서로를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사이,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준호의 학기가 드디어 끝이 나던 날이었다. 명헌은 피로에 점철된 준호의 손을 꼭 잡고 오늘은 나와 가줘야 할 데가 있다며 간곡히 말했다. 당장 집에 가서 명헌을 안고 잠들고 싶었지만. 명헌이 이렇게 무언가를 부탁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준호는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 도착한 곳은 아무도 없는 산자락이었다. 이미 늦은 저녁시간이라 인적은 커녕 낮은 도시의 불빛만이 두 사람의 얼굴을 겨우 비추고 있었다. 오는 내내 명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무표정이 너무 무거워서 준호도 감히 말을 걸지 못했다.


- 준호.

- 응, 명헌아.

-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나용.


어떤 말을 뜻하는 건지 준호는 이리저리 생각해보다 지난 밤 손 끝에서 불빛을 내던 명헌을 떠올렸다.


- 그 말, 믿었냐뿅?

- 응, 믿었어.

- 왜?

- 네가 한 말이니까.


어둠 속에 명헌의 눈이 반짝 빛났다.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입을 맞춰 위로하고 싶었다.


- 준호. 사실은 내가 거짓말을 했어용.

- 그럼 명헌인 외계인이 아니라는..?

- 아니. 지구는 무조건 멸망하지는 않을거다뿅.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은.


그리고 언젠가 명헌이 말했던 ‘사적이고 슬픈 얘기’가 시작됐다.





명헌은 지난 수십억년간 우리 은하의 주인이었던 누군가의 아이라고 했다. 평화롭게 우주 한 구석을 통치하던 그가 별로써 죽음을 택한 뒤-우주의 높은 생명체는 제 생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자연히 명헌이 주인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 애는 꽤 실력있는 통치자이자 은하의 사령탑이라고 했다. 태양계를 비롯한 천체들을 매일같이 손 위에 올려 지켜보고 발 밑에 품었다. 은하의 규칙은 곧 명헌의 규칙이었고 그것을 이루는 먼지 하나부터 행성 하나까지 전부 명헌의 몸이었다.

그러나 절대자의 자리에 있으면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허무함이었다. 우리가 숨을 쉬고 음식을 소화시키듯 명헌은 존재만 해도 한 은하를 통치하는 것이라 생명들처럼 생의 뚜렷한 목적이라던지 심지어는 의지조차 없었다. 그래서 선대 은하처럼 별이 되어 푸른 빛과 함께 작열하고 싶었다. 명헌은 생각했다. 은하 자체였던 창조주가 겨우 별이 되어 산화하기를 선택했다면 저는 그보다도 작은 인간이 되어 사라지겠다고.

그러다 찾은 것이 지구였다. 마침 그 시기에 종말론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때라 인간들의 불안 섞인 기대치에 부응을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지구의 시간으로 딱 1년, 그정도를 살아보고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 창백한 푸른 점과 함께….


- …그러다 준호를 만난거다뿅. 그러고 나니까, 도저히 이 행성을 미워할 수 없었어용. 이 행성은 재밌고 신기한 것 천지니까용. 그리고 거기에는 늘, 언제나.


명헌이 준호의 손을 끌어다 제 뺨에 올렸다. 모든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간답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네가 있었지. 날 사랑하는 네가.


양 손을 뻗은 명헌이 똑같이 준호의 얼굴을 감싸안더니 입술이 맞닿기 직전까지 다가왔다. 꼭 무언가를 허락해주길 바라는 것처럼.


- 준호, 날 용서해줄래?

- 그게 무슨 소리야, 명헌아.

- 내 몸 안에서 치열하게 사랑하고 행복해하고 불안해하는 너희를 난 그저 내 종말의 수단으로 여겼어. 마음이란걸 무시했어. 너를, 권준호라는 사람을 일시에 잃을 뻔 했어.

- 명헌아….


준호가 눈물에 젖은 명헌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대고 온 우주를 몸 안에 안았다. 온기를 넘어선 열기와 울음을 참느라 갈라진 숨소리가 허파를 통해 날것처럼 전해졌다. 그 몸을 다독이며 준호는 딱 한가지 제가 할 수 있는 말을 전했다.


- 나는 널 용서할 자격이 없어. 넌 그저, 스스로를 구원했을 뿐이야.





* * *


초겨울 추위에 야산을 올랐던 둘은 나란히 감기에 걸렸다. 안겨서 울 때는 언제고 내려오는 길에 킥킥거리며 온 동네를 한 바퀴 돌아서 그랬을 것이다. 언제나 집 한켠에 준비해놓는 준호의 상비약을 먹고 두 사람은 한 해의 마지막에 깊은 잠에 들었다.

여전히 이명헌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이 밤에 잠든 권준호는 새해 아침이 돼서야 더 생생히 깨달을 것이다. 야밤에 산을 올랐던 그 날, 진짜 외계인이었던 명헌이 자신을 위해 지구 종말을 막아주었다는 것. 아무런 관계 없는 인간들까지 자신을 위해 살려주었다는 것. 게다가 그토록 우주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으면서 겨우 자신의 옆에서 잠들기 위해 그 모든걸 등지고 제 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이 모든게 자신을 사랑해서 벌인 일이라는 것을.

그러니 종말의 밤에 전하려고 했던 마지막으로, 해피 뉴 이어 같은 말은 이젠 없다. 적어도 지금은 없다. 언젠가 지구는 종말할테고, 그럼 준호와 명헌의 사랑도 옅은 화학물질로 우주에 퍼뜨려져 흔적도 남지 않게 되겠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그게 너무 사랑스러워서 콧잔등을 문지르며 애정을 속닥거리고 있다. 종말 같은거 지금은 걱정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사랑하기 바쁘다.

그래서 마지막이란 말 대신, 함께 맞이하는 이천년 새해에 건낼 첫 마디는.


처음으로, 해피 뉴 이어!







+) https://hygall.com/583997197 외전

준호명헌 준명
2024.01.01 00:39
ㅇㅇ
모바일
와 반전ㅜㅜㅜ외계에서 온 게 맞았지만 평범한 외계인은 아니었구나 이명헌의 우주운영에 모든 걸 맡긴다ㅜㅜㅜㅜ너무 벅찬다 절대자 명헌이가 자기가 품고 있었던 준호를 발견하고 한낱 인간에게서 희망과 사랑을 발견한다는게...
[Code: 395e]
2024.01.01 00:41
ㅇㅇ
모바일
센세 고마워 잘읽었어 현재를 살아가는 연인인 준명처럼 이 글을 읽는 지금이 나의 영광의 시대야ㅜㅜㅜ
[Code: 395e]
2024.01.01 01:24
ㅇㅇ
모바일
아미친... 한 해의 말일과 새해 새벽에 읽기 너무 좋은 이야기였다 센세 글써줘서 고맙고 역시 정말 사랑해요 아아아아아 너무 좋아!!!!!!!!!!
[Code: 7bbb]
2024.01.01 02:55
ㅇㅇ
모바일
으아아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ㅠㅠㅠㅠㅠㅠ 우주의 지배자로서의 허무를 준호와의 사랑으로 극복하다니ㅠㅠㅠㅠㅠㅠ 새천년의 해피뉴이어를 함께나누는 준명 앞으로도 바쁘게 사랑하고 또 느긋하게 사랑해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7ebc]
2024.01.01 18:26
ㅇㅇ
모바일
내가 다 찡하고 행복해져 준명 영사해 센세도 해피뉴이어!🥹
[Code: dbd3]
2024.01.10 15:45
ㅇㅇ
모바일
행복해지는 이야기다 마스터피쓰야 센세ㅠㅠㅠ준호를 만나고 삶의 의미와 사랑을 찾은 명헌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고 우주적 사랑을 차분하게 품어주는 준호ㅠㅠㅠ한없이 지구적인 사랑 안에서 행복해라 얘들아ㅠㅠ
[Code: 2e92]
2024.02.07 23:56
ㅇㅇ
문득 생각나서 다시 읽었는데 너무 좋다...캐해도 갓벽하고 준호명헌의 사랑이 너무 크고 완전해ㅠㅠㅠㅠ센세 사랑해...
[Code: f14a]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
성인글은 제외된 검색 결과입니다.
글쓰기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