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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1 18:50

ㅅㅈ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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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허니는 잔뜩 초초한 얼굴이었어.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몸에 걸쳐진 옷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지. 불안감에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어.

 

 

“들어오세요.”

 

 

“준비는 다 되었니 아가?”

 

 

허니는 철옹과 나란히 걸어서 마차를 타러 가겠지. 저택에 온 이후로 꽤 가까워진 고용인 중 한 명이 잘 다녀오라며 인사를 건넸고, 허니는 애써 웃어주었어. 데뷔탕트 무도회 당일이었어.

 

공작 저는 다른 귀족들과는 다르게 수도 외곽에 위치했어. 덜컹거리는 마차의 창밖으로는 넓게 펼쳐진 공터들이 빠르게 지나가겠지. 허니는 말없이 창밖만을 바라보았고, 그런 허니에게 철옹도 부러 말을 걸지 않았겠지. 마차가 공작저를 빠져나온 지 어느 정도 지났을까, 허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어.

 

 

“저 잘할 수 있겠죠..?”

 

 

 

“물론이지 허니 아가,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흔들림에 엉덩이가 아파질 때 즈음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어. 이미 입구에는 가문의 문장을 찍은 마차들로 혼란스러웠어. 허니는 철옹의 팔에 팔짱을 끼고 시종의 안내를 받아 홀로 올라가겠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허니의 귀족 예절은 좋다 못해 완벽하다는 점이랄까. 살면서 이렇게까지 부모님에게 감사한 건 처음이었겠지.

 

허니는 연회장 입구에 섰어. 문 앞의 시종이 철옹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주며 두 사람의 방문을 큰 소리로 알려. 허니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한걸음 내디디며 다시 떠. 온갖 화려한 차림새의 사람들의 시선들이 두 사람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허니에게 쏟아졌지. 적대감, 호기심, 경멸, 그 외의 여러 가지 것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받은 교육으로 허니의 얼굴은 태연하게 여유로운 미소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중이었어. 수백 명의 시선에 압사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어. 웅성거리는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쟤가 허니 비네’ 라던가 ‘완전 꽃뱀 아니야?’ 따위의 말들이 귀에 박혀 들어왔어. ‘결국 고고한 척은 다 하던 아이언스도 다른 늙은이들과 다를 거 없었네’라는 얘기를 듣자 좀 울컥하는 기분이었지. 허니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줘 팔짱을 끼고 있는 철옹의 옷자락을 잡았어.

 

어딘가로 피하고 싶어도 철옹의 지위가 지위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홀의 중앙으로 이끌려 들어갔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철옹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겠지. 허니에게는 가벼운 인사나 스몰 토킹 정도가 다겠지. 간혹가다 돈 많고 엉덩이 헤플 것 같은 젊은 공작부인의 첩자리라도 탐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질 낮은 남자들이 말을 걸어 오기는 했으나 허니는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쳐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은 거리를 두고 허니를 관찰하고 있었겠지.

 

 

“허니 양, 한잔 받아요.”

 

 

“아, 고마워요.”

 

 

그 와중에 누가 허니에게 샴페인이 담긴 잔을 건네겠지. 자신에게 호의적인 시선은 거의 없다시피 하는 장소에서 남이 주는 걸 함부로 받아먹는 것은 썩 좋은 행동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절하기엔 그 뒤에 따라올 악의적인 소문들이 두려워, 허니는 웃는 낮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방과 마주 한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잔을 들고만 있었지. 여기서 자신이 대놓고 거절했다가는 좋을게 하나 없었거든.

 

 

“이런 실례, 이건 제가 마시도록 하죠.”

 

 

허니가 난감해 하는 것을 알아챈 철옹이 손에 있던 잔을 훌쩍 들고 갔어. 잔을 기울여 입술만 가볍게 닿고는 뒤에 있는 테이블 위로 내려뒀지. 허니의 앞에 있는 사람에게 싱긋 웃어 보이자. 그 사람은 좋은 시간 보내라며 뒤돌아서 갔어.

 

 

“조심하렴. 안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철옹은 허니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작게 속삭였어. 그러고는 허니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겠지.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는 느낌에 허니는 안정감을 되찾아. 무도회가 한창 무르익을 때 즈음. 철옹은 멀리 떨어진 친구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봤겠지. 허니가 충분히 대응을 잘 하는 걸 본 철옹이기에 여전히 불안하긴 하지만 그를 데리고 오는 잠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금방 다녀오마 아가.”

 

 

“네.”

 

 

그러고는 잠시 머뭇하다가 허니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지는 철옹이겠지. 허니는 스스로가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고, 철옹에게 여유롭게 손까지 흔들어 줬는데 철옹의 팔이 허리에서 풀리고 난 후에 알았어. 사실 전혀 괜찮이 않았던 거지. 허니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기 직전의 철옹을 쫓아가 옷자락을 붙잡았어.

 

 

“안 가면... 안돼요?”

 

 

손안에 들어온 소맷자락을 구명줄 마냥 움켜쥐는 허니의 표정은 뭐랄까, 너무나 절박해 보여서 철옹은 차마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지. 허니가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붙잡았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야. 철옹은 자신의 옷소매를 쥐고 있는 허니의 손을 떼고 손깍지를 껴. 힘을 줘서 허니의 손을 잡았어.

 

 

둘은 발코니로 자리를 옮겨. 허니는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 않겠지. 철옹은 허니 옆으로 와 제 어깨에 허니의 머리를 기대게 했어. 허니는 소파 옆 협탁에 있는 와인을 열어 잔에 부어. 철옹에게 먼저 잔을 건네주고는 자신도 잔에 와인을 가득 담아 목을 축이겠지.

 

 

“괜찮니 아가?”

 

 

허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과 비교적 조용해진 공간에 숨통이 틔는 기분이었어. 머리 위로 다정하게 들려오는 묵직한 목소리도 좋았지. 말없이 와인만 홀짝이고 있자 멀리서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가 들려왔어.

 

 

“무도회에 와서 춤 한번 안 추고. 아쉽지는 않니?”

 

 

“괜찮아요. 저 사이에 섞이는 게 더 머리 아픈걸요.”

 

 

반쯤 한숨을 섞어 말하는 허니를 보던 철옹은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말해.

 

 

“Shall we dance?"

 

 

“안 돼요. 저 합을 맞춰본 거라곤 아버지가 다인 걸요. 아이언스씨 발 밟을지도 몰라요.”

 

 

허니는 손을 내저으며 푸스스 웃겠지. 그럼에도 철옹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있는 허니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손을 내밀어. 허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맞잡으며 일어났어.

 

 

“딱 한 곡만이에요.”

 

 

멀리서 흐릿하게 들려오는 음악소리.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 사이사이로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테라스 밖의 풀이 스치는 소리까지. 사랑에 빠지기 딱 좋은 장소였고, 살짝 들어간 술 때문에 기분이 약간 들떴어. 걱정한 것과는 달리 허니는 춤을 꽤 추는 편이었고, 춤은 부드럽게 이어졌어. 시작부터 빠르지 않았던 춤은 점점 느려지다 결국 얼마 안 가 멈췄지. 철옹의 손은 허니의 허리에, 허니의 손은 철옹의 어깨에 올린 채로.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코가 맞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봐. 그리고 그대로 느릿하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어.

 

코끝이 스치고, 입술이 맞닿았어. 꾹 눌려졌던 입술이 때 졌다 다시 맞붙으며 곧 혀가 얽혀. 벌어진 틈 사이로 누구의 것일지 모르는 더운 숨이 흘러나왔어. 갓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 같은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어.

 

숨이 찬 허니가 철옹의 어깨를 밀어낼 때가 되어서야 입술이 떨어졌어.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을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고, 허니는 웃음을 터뜨려. 그 모습을 보고 철옹도 웃어버리겠지. 웃긴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그저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공작님.”

 

 

“이름으로… 불러 주겠니?”

 

 

허니는 철옹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어. 그리곤 이내 눈을 예쁘게 접어 웃었지. 갑자기 이름을 부르려고 하니 어색한 것도 있었지만 괜히 간질간질 이상한 기분이었어. 허니는 잠시 망설였어.

 

 

“제레미. 절 사랑해요?”

 

 

약간의 애정과 단순한 호기심을 담은 물음이었어. 철옹은 그런 허니의 물음에 쉬이 답을 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허니는 애초에 철옹의 답변을 들을 생각 따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어나가.

 

 

“전 제레미가 좋아요. 생각보다… 조금 더 많이.”

 

 

허니는 철옹의 품에 안긴 채로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발뒤꿈치를 들어 올려 가볍게 입을 맞췄어. 비로소 두 사람의 마음이 맞물리는 순간이었지

 

 

 

7.

 

반나절 만에 돌아온 공작저의 제 방이 천국같이 느껴졌어. 너무 지쳐서 바로 침대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장식용으로 머리카락에 뿌린 반짝이 가루로 침대에 범벅을 할 수는 없었기에 허니는 반쯤 졸면서 씻고 왔겠지. 정말 고단한 하루였어. 굽이 높은 구두를 이렇게 오래 신고 있던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시선을 받은 것도 처음이었어. 그리고 꿈만 같았던 첫 키스도.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당분간은 무도회고 뭐고 거들떠도 보고 싶지 않아. 허니는 긴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고 침대로 기어들어갔어. 폭신폭신한 침대가 허니를 반겼고 허니는 눈을 감았지. 그런데 문제는 몸은 피곤해 죽겠는데 정신이 너무 멀쩡해. 빛 때문에 그런 건가 싶어서 협탁의 램프를 꺼봤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였어.

 

램프마저 끈 방 안은 얼마 전까지 있었던 무도회 장소와는 정 반대로 완전히 깜깜하고 조용했어. 북적거리는 장소에 있다가 사람이라곤 자신 하나뿐인 곳에 오니까 조용하다 못해 적막할 지경이었지. 마음이 한구석이 허한 기분이었어. 분명 무도회에 있을 때는 데뷔탕트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고 싶었음에도.

 

허니는 표정을 숨기고 자신을 관찰하던 사람들이 생각났고, 동시에 가까운 이들끼리 웃으며 떠들던 사람들의 모습도 생각이 났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이 부러웠어. 허니에게는 제대로 된 가족은커녕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생각나겠지.

 

‘가도 괜찮으려나…’

 

허니는 상체를 일으키고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겼어. 수건은 의자에 걸쳐두고 방을 나섰지. 복도의 등은 켜져 있었지만 고용인들은 모두 퇴근 한 후라 저택은 고요했어. 슬리퍼를 끌며 걷는 허니의 발소리만 사박사박 들려오겠지. 시선을 멀리 던지면 어둡게 보이는 복도의 끝에 조금 무서워져서 발걸음을 빨리했어.

 

똑똑.

 

허니는 마침내 제가 찾던 방의 문 앞에 섰고, 문을 두드렸어. 안에서부터 대답이 없기에 한 번 더 두드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겠지.

 

“아가, 무슨 일 있는 거니?”

 

“아뇨 그건 아니지만…”

 

“같이 자도 돼요?”

 

“물론이란다.”

 

 

철옹은 반 박자 느리게 대답했어. 그리고 문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방 안으로 허니를 들이겠지. 잘 정돈돼 있는 방 안의 테이블 위에는 반쯤 식은 커피와 가죽 노트가 올려져 있었어. 잉크병 안의 펜이 아직 잉크를 반 정도 머금고 있는 것을 보아서 무언가를 쓰던 중이었던 모양이야. 허니가 방을 구경하는 사이 철옹은 벽장에서 베개를 하나 더 꺼내.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구나.”

 

“조금요.”

 

“허전하지?”

 

“…”

 

“나 역시 그랬단다.”

 

 

씩 웃는 철옹의 얼굴을 허니는 넋 놓고 바라만 봤어. 숨이 죽은 베개를 손으로 툭툭 쳐. 침대에 원래 있던 베개를 옆으로 당겨 두 개를 나란히 둬. 그러고는 허니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고, 허니는 쪼르르 가서 누웠어.

 

 

“하긴 제레미도 무도회에 처음 간 시절이 있었겠네요.”

 

 

상상도 못했다는 듯한 허니의 얼굴. 잠자기 전의 이야기를 듣기 직전에 침대에 얌전히 누워 기다리는 아이 같은 시선이었어. 철옹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어.

 

 

“참 신기했지. 그리고 불쾌했고.”

 

 

명망 높은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의 첫 무도회. 얼마나 줄을 데려는 사람들이 많았겠어. 말 한마디라도 걸어보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들이 태반이었어. 순수하게 축하의 말을 건네는 이들도 많았지만 사람들의 말에서 보이는 탐욕이라던가 질투 같은 것들이 어린 철옹의 눈에 그대로 비춰 보였어.

 

 

“그래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쉽더구나.”

 

 

 

철옹은 허니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허니는 그 손길을 따라 고개를 기울였어. 고개만 돌리고 정 자세로 누워 있던 허니는 철옹쪽으로 아애 몸을 틀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서 철옹을 바라봐. 잠시간 그렇게 마주 보고 있다가 철옹이 팔을 뻗어 허니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어. 허니의 뺨과 목덜미에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 역시 조심스럽게 걷어주겠지. 그 손길이 간지러웠던지 허니는 작게 웃음을 흘렸어. 가슴께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심장이 간질간질해. 허니는 철옹의 품으로 고개를 묻으며 속삭였어.

 

 

“잘 자요.”

 

 

철옹은 눈을 감은 허니의 이마에 입을 맞췄어.

 

 

“좋은 꿈 꾸렴.”

 

 

 

 

 

 

 

 

-

 

 

 

네가 내게 널 사랑하느냐 물었을 때.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기어코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결국 나는 네 입으로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겨우 알아차렸던 것이다. 네가 나와 가까이 지낸다면 언제까지고 좋지 않은 소리들이 따라올 테고, 네가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는 두렵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려보자면… 나 역시 너를 사랑하나 보다.

 






 

 

 

8.

 

제 이름은 로라. 아이언스 저택의 고용인 중 한 명입니다. 올해로 저택에서 일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요. 아직 말단이라 정확하게 맡은 구역은 없고… 일단 1층 청소와 기타 잡일들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침 해가 밝았어요. 저는 지금 저택에 출근을 한 상태이고, 어디부터 청소를 해볼까…

 

 

“로라!! 공작님 호출이야~!”

 

 

이런, 선배가 저를 부르네요. 공작님이 고용인들을 부르실 때는 보통 가장 가까이 있는 고용인이 가거든요. 아이언스 공작님은 좋은 분이지만 직접 시키시는 일을 하는 것은 별로입니다. 솔직히 고용주와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저는 아직 말단이라 실수도 많이 하고… 먹여살릴 참새 같은 동생들도 있기 때문에 일한 지 1년도 안 돼서 잘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네!! 바로 갈게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까라면 까야지…

 

아! 그리고 고용주라기에는 애매한 위치인 것 같지만 공작님뿐만 아니라 공작부인도 계신답니다. 저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데, 아주 귀여운 분이에요. 저번에 심부름하러 부인의 방에 간 적이 있는데 고용인들에게 매우 친절하신 분인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공작님과 아직 그렇게 가까운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두 분이 빨리 가까워지신다면 좋을 텐데..

 

똑똑,

 

“공작님. 부르셨어요?”

 

 

“아, 로라군요. 라벤더 티와 커피, 그리고 간단한 아침식사를 방에다 가져다주겠어요?”

 

 

“네 물론이죠.”

 

 

저는 인사를 하려 허리를 숙였습니다. 숙였는데…

 

???

 

세상에… 방 안에 있는 저 여성분은 혹시 공작부인인가요? 제가 분명 어젯밤에 복도에 불을 켜면서 두 분이 각자 방에 가시는 걸 봤는데. 어머나… 공작님도 남자였네요… 놀라서 멈칫한 저를 공작님께서 의아하게 쳐다보시기에 저는 황급히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제 눈을 믿을 수가 없네요. 두 분이 동침이라니… 공작가에서도 이제 귀여운 도련님이나 아가씨를 볼 수 있는 걸까요??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만 알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빨리 선배들한테 알려주러 가야겠어요!

 

 

 

 

 

 

 

 

 

 

 

 

-

 

 

 

 

 

 

 

 

 

 

 

 

 

철옹은 허니가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일어나 있었겠지. 허니가 보여주는 평소의 바르다 못해 완벽한 생활습관과는 달리 얌전하지만은 않은 잠버릇 때문에 철옹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어. 철옹이 고용인을 돌려보내고 난 후, 뒤돌자 허니가 비몽사몽 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겠지.

 

 

“아가, 깼니?”

 

“네에…”

 

 

목소리가 푹 잠겨 있었지. 허니는 무의식적으로 철옹쪽을 돌아보려다가 그대로 손에 얼굴을 묻고는 이불에 고개를 처박았어.

 

“아 잠깐만요! 지금 쳐다보지 마요!”

 

“…?”

 

“지금 자고 일어나서 얼굴도 너무 많이 부었고, 머리도 엉망인데…”

 

 

허니는 허리를 숙인 그대로 한 손만 꺼내서 공중에 휘저었어. 철옹은 그런 허니가 마냥 귀엽기만 하겠지. 철옹은 파닥거리는 허니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 손깍지를 꼈어.

 

 

“그래도 내 눈에는 충분히 예쁘단다. 얼굴 보여주지 않겠니 아가?”

 

“그래도요…”

 

“착하지, 얼른.”

 

 

허니는 망설이다 조곤조곤 채근하는 철옹의 목소리에 손으로 최대한 뻗친 머리라도 정리하면서 고개를 들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반칙이잖아요.”

 

 

 

철옹은 그저 웃겠지. 두 사람이 그렇게 아침부터 갖은 깨를 솓아내는동안 고용인이 식사를 들고 와서 방문을 노크했어.

 

 

 

“제가 가볼게요!”

 

 

 

허니는 눈 뜨자마자 썸이라도 타는 것처럼 미묘해진 분위기에 괜히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침대를 뛰쳐나가며 문을 벌컥 열었어. 허니는 몰랐겠지만 고용인은 아까와 다른 사람이었지. 고용인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지만 허니는 그 고용인의 눈이 조금 커지는 걸 봐버렸어. 아침에 같은 방에 있는 데다가 철옹은 가운만, 허니는 얇은 슬립만 입고 있는데, 고용인이 하는 생각이 뭔지 허니는 단박에 알아버리고 얼굴이 토마토보다 훨씬 더 빨개졌겠지.

 

 

 

“아… “

 

 

 

고마워요! 허니는 고용인의 손에 있는 접시를 황급히 들고 들어왔어. 허니는 왜 말리지 않았냐는 약간의 원망이 섞인 눈으로 철옹을 바라봤지만 철옹은 그저 눈썹만 까딱할 뿐이었어.

 





 

9.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벌써 늦여름이었어. 허니의 훌륭한 처신과 밝은 성격에 사교계에서도 적지만 친한 영애들이 생겼고, 철옹과의 관계에도 많은 발전이 있었어. 이제 저택에서 철옹과 허니가 못 죽고 못 사는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고용인에 모자라서 사교계에도 그런 소문이 따름 따름 퍼졌을 거야. 허니는 얼마 전 친해진 영애와 오전에 티파티를 가진 후 저택으로 다시 돌아왔지. 허니는 곧바로 철옹의 집무실로 향했어.

 

 

“저 왔어요!”

 

 

철옹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어. 허니는 쪼르르 다가가 볼에 쪽, 뽀뽀를 했어. 짙게 바른 분홍색의 립스틱에 볼에 그대로 남았고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나눴지.

 

 

“즐거운 시간 보냈니?”

 

“네. 그리고 오래간만에 외출한 거 치고는 빨리 들어와서 조금 아쉬운데…”

 

 

안 바쁘면 저랑 차 한잔하실래요? 오랜만에 양껏 꾸민 예쁜 모습을 철옹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없는 핑계를 지어낸 허니였지. 차는 온실에서 마시기로 했어. 고용인들이 준비를 하는 동안 둘은 정원을 빙 둘러 천천히 반대편에 있는 온실로 향하겠지. 허니는 오늘 있었던 티 파티에 대해 재잘거리며 떠들었고 철옹은 간간이 반응도 하며 허니의 얘기를 즐겁게 들었어. 제레미는 오늘 별일 없었냐는 말에 단조롭고 뻔한 하루의 이야기일지라도 조곤조곤해주는 철옹이겠지. 끝에는 허니가 많이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을 거야. 늘 있는 일인데도 허니는 그럴 때마다 항상 기분이 들떴고 그럼 철옹은 항상 허니가 한눈팔다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허니의 손을 힘줘서 꼭 잡아.

 

정원 둘레를 반쯤 걸었을까 허니는 잔디에 민들레가 한 움큼 피어있는 걸 봐. 쪼그려 앉아서 한 송이를 꺾고 있으려고 할 때면 철옹도 허니의 옆에 쪼그려 앉겠지. 허니는 철옹 귀에다 꺾은 민들레를 꽂고 꺄르르 웃음을 터뜨릴 거야. 그럼 철옹도 민들레 몇 송이를 하나씩 꺾어다 오늘은 곱게 땋아 앞으로 늘어트린 허니의 검은 머리카락에 한 송이씩 엮어주겠지. 허니는 거울이 없으니까 자기 머리가 어떻게 돼 있는지 못 보고 마냥 궁금해할 거야. 철옹은 다 됐다며 마지막으로 흘러내려온 잔머리까지 귀 뒤로 넘겨주겠지. 그럼 허니는 벌떡 일어나서 한 바퀴 빙그르 돌아. 치맛자락이 하늘거리며 펼쳐졌어.

 

 

“나 어때요?”

 

“요정이 따로 없구나 허니. 내 아가.”

 

 

 

맨날 예뻐죽겠다고 하는데도 들을 때마다 부끄러워하는 허니였고 그런 허니가 귀여운 철옹이겠지. 그리고 열심히 찻잔과 다과를 옮기고 있던 고용인들도 뒤에서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흐뭇한 웃음을 지을 거야.

 

 

늘 신경 써서 관리하는 온실 안은 딱 온도가 좋았지. 그저 차를 준비해달라고 말했을 뿐인데 허니의 취향을 찰떡같이 알고 있는 주방 사람들이 입가심할 간식으로 딸기 케이크 조각을 준비해온 덕에 허니는 냉큼 포크를 들었어. 허니는 케이크를 먹느라, 철옹은 차를 마시느라 말없이 조용한데도 분위기는 여전히 포근할 거야. 한참을 조잘거리던 입이 오물거리면서 케이크를 먹는 걸 즐겁게 지켜보는 철옹이겠지. 그러다가 허니는 철옹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 먹던걸 멈추고 철옹을 빤히 쳐다봐..

 

반대편에 앉아있던 철옹은 허니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서 입에 생크림이 묻은 걸 엄지손가락으로 쓸어서 닦아주겠지.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괜히 진득해지는 분위기에 철옹이 슬그머니 얼굴을 가까이할 거야. 거의 입술이 맞닿을 때 즈음 허니가 얼굴을 획 돌려버렸어. 철옹은 놀라서 얼굴이 굳었지.

 

 

“아가…?”

 

 

정말 찰나의 순간에 속으로 허니가 자기한테 질렸나?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거 싫은 건가? 혹시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어. 하고 온갖 최악의 상상들이 머릿속으로 지나가는 철옹. 특유의 처연한 표정을 얼굴에 띄우고 있으면 허니는 그저 배시시 웃어.

 

 

“여자가 가끔은 이렇게 튕겨줘야 한다고 그러던데요~”

 

 

그러고는 쪽쪽거리면서 버드키스해 주겠지. 그러면 자그마한 허니 꼭 끌어안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는 철옹이겠다. 허니는 자기보다 한참 어리고 매력적이라 자주 자낮되는 철옹인데 그런 마음을 허니한테 말 안 해줬지만 허니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겠지. 그래서 철옹이 이렇게 행동할 때마다 애궁 울 남편 속상한가 보네 하고 그날은 더 붙어있어줄 거야. 그렇게 한참 끌어안고 뽀뽀하고 꿀 떨어지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허니가 품 안에서 편지 한창을 꺼내.

 

 

 

“제레미, 나 이거 초대받았는데요…”

 

 

 

은색 장미가 그려진 흰 봉투에 금색 실 리본으로 포장된 작은 봉투는 누가 봐도 청첩장이겠지.

 

 

 

 

“오늘 만난 영애는 아니고, 건너건너 아는 사람인데 시간 나면 오라고 주더라고요. 초대받았는데 안 가기도 좀 그렇고. 근데 아는 사람도 아니니까…”

 

“아가가 좋다면 축하해 주러 가는 것도 좋지. 이 바닥에선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많이 가니 말이야.”

 

 

 

 

사실 그 편지는 결혼식에 공작이 와주어서 자신의 결혼식이 화제가 되었으면 하는 결혼식 주인공의 얕은 술수였지만 순진한 허니는 그까지 생각하지는 못했겠지. 허니는 순수하게 축하해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겠노라 얘기했어. 그리고 철옹은 문득 자신들은 결혼식을 생략해버렸다는 사실이 떠오르겠지.

 

 

 

 

 

 

10.

 

청아한 종소리가 하늘 위로 울려펴졌어. 아직 푸르른 잔디 위에는 새하얀 커버를 씌운 의자와 새하얀 주례대. 그리고 그 앞에 길게 늘어진 레드 카펫이 있었고 곧 부부가 될 신랑신부가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걸어들어왔지. 꽃바구니를 든 아이들이 그 뒤를 쫓아가며 꽃을 흩뿌렸어. 허니는 철옹과 신부 측 하객석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어. 순수한 기쁨에서 나온 축하였지. 주례대 앞에 선 신랑과 신부는 선서를 한 후 키스했어. 이윽고 주례자가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했고 모두가 박수를 치는 동시에 뒤쪽에서 흰 비둘기가 날아올랐지.

 

허니는 나름 귀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제일 앞줄에 앉아 있었어. 청량한 날씨와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이곳에서 허니는 잠시 상념에 잠기겠지 반쯤 멍 때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무언가를 외치는 소리와 함성소리가 나서 허니는 번뜩 정신을 차리겠지. 그와 동시에 위에서부터 자신을 향해 뭔가 날아오기에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지도 못한 채로 그것을 잡았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허니의 팔 안에는 화사한 부케가 들려 있겠지. 신랑 신부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허니를 향해 박수를 쳤고 허니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웃었어.

 

마차를 타고 공작저로 돌아오는 길이었어. 허니는 손에 들려있는 부케를 연신 만지작거렸고 그러다 자신이 두 사람의 결혼식을 부러워했다는 걸 자각해. 허니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철옹을 바라봤어. 철옹은 허니를 마주 보겠지.

 

 

 

“제레미.”

“아가-”

 

 

둘 다 상대방이 말을 꺼내려는 게 보여서 타이밍을 재다 결국 동시에 서로를 부르고 말았지. 풋, 웃음소리가 났어.

 

 

 

“먼저 말하렴.”

 

“그… 있잖아요…”

 

 

 

허니는 막상 얘기를 시작해놓고서는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 싶어서 망설여. 그러다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따뜻한 색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나서 마저 말할 거야.

 

 

 

“우리도 결혼식… 하지 않을래요?”

 

 

 

허니의 말에 철옹은 웃었어. 허니가 얼마 전 청첩장을 받아왔을 때부터 자신이 하고 싶었던 얘기를 허니가 먼저 말한 거였거든. 철옹이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자 허니는 조금 초조해졌어.

 

 

 

“무조건 하자는 건 아니구요…! 싫으면 안 해도…”

 

“바라던 바란다 아가.”

 

 

 

철옹의 대답에 허니는 활짝 웃겠지. 그러는 사이에 마차는 저택의 입구로 들어왔어. 이 나이 먹고 이렇게 들뜬 게 주책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빨리했으면 좋겠다는 허니의 말에 철옹은 허니와 나란히 집무실로 올라와서 당장 계획을 짜기로 했어. 돈이야 얼마든지 차고 넘치니 당장 내일 식을 올린다고 해도 못할 건 없었거든.

 

 

 

“야외보다는 성당에서 했으면 좋겠어요. 스테인글라스가 예쁜데로요!”

 

 

 

집무실에 들어와서 허니가 내뱉은 첫마디였지. 어릴 적부터의 로망이었다며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어.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때는 보여주기식의 결혼식마저 생략한 게 미안하다 못해 가슴이 쓰라린 철옹일거야. 철옹은 책상에 앉아 종이에 허니가 말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적었고, 허니는 빈 의자를 끌고 와서 그 옆에 앉았어. 텅 빈 종이에는 철옹의 정갈한 글씨로 적힌 메모들과 허니가 주의, 별표 세 개 따위를 빨간색으로 표시해둔 것들, 그리고 하트가 잔뜩 그려진 낙서들이 그려졌지.

 

 

 

“하객은 어떻게 할 거니?”

 

“음… 하객은 필요 없어요. 애초에 초대할 사람도 거의 없고… 난 제레미만 있으면 되는걸요.”

 

 

 

허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어. 종이의 빈자리에 펜을 톡톡 두드리다가 드디어 생각이 났다는 듯 말하겠지.

 

 

 

“아! 그리고 반지도 빼먹지 말아요!”

 

 

 

종이의 빈자리에 자신의 반지 사이즈를 휘갈겨 써 두는 것도 잊지 않았지. 몇 호라고 쓴 글에 동그라미를 치고 ‘허니 반지 사이즈’라고 적어 두는 것도 빼먹지 않았어. 철옹은 그런 허니가 참 야무지다고 생각하겠지.

 

 

 

“그래, 잊지 않으마. 드레스도 새로 맞출 거니?”

 

“대여도 괜찮은데, 제레미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난 새로 했으면 좋겠구나. 네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으로 맞추도록 하자.”

 

“그럼 그렇게 해요!”

 

 

 

이윽고 드르륵 소리가 나며 서랍이 열렸어. 철옹은 안에 있던 종이뭉치를 꺼내. 그중 몇 개를 골라 빼내더니 허니에게 건네주겠지. 종이에는 결혼식 때면 다들 많이 가곤 하는 성당의 자료들이 있었겠지. 허니가 청첩장을 받아왔을 때부터 조용히 모아둔 자료들이었을 거야. 허니는 종이를 뒤적거리다가 하나를 골라 책상에 내려놓았어.

 

 

 

“여기가 좋을 것 같은데요?”

 

 

 

허니가 고른 장소는 공작저와 수도의 중간 즘에 있는 외딴곳에 있는 성당이었지. 애초에 돈이 넘쳐나는 어떤 귀족이 자기네들의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지은 성당이라 예배당의 가운데에 있는 스테인글라스는 굉장히 섬세했고 성당 자체도 유명한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었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단둘이서 진행할 결혼식이었기에 수도의 한복판에 있지 않다는 것도 장점 중에 하나로 들어갔지. 하객이 많은 이들이 주로 이용했기에 홀은 엄청 컸고 비용도 만만찮겠지만 그건 두 사람의 알 바가 아니었지. 한참을 이야기하고 자료들을 뒤적거리다 보니 시간은 벌써 저녁이었어. 고용인이 방을 찾아와 저녁이 준비되었음을 알렸고 두 사람은 들뜬 마음으로 방을 나섰어.

 

 

 

 

 

11.

 

“이 디자인은 너무 딱 붙지 않아요? 한 달이나 남았는데 그 사이에 살찌면 티 많이 날 것 같다고요."

 

“아가는 너무 말라서 좀 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단다.”

 

 

 

허니와 철옹은 디자이너가 가져온 카탈로그를 보면서 고민에 잠겼겠지. 철옹은 허니가 뭘 입어도 다 예뻐서 고민이었고 허니는 사진에 있는 드레스들이 죄다 눈 돌아갈 만큼 예뻐서 고민이었어. 아무래도 결정이 나지 않자 허니는 디자이너에게 어느 디자인이 자신에게 잘 어울릴 것 같냐고 물었어.

 

 

 

 

“제 생각에는 이쪽이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디자이너는 프린세스 라인의 드레스 중에서 하나를 가리켰어. 흰 웨딩드레스는 어깨와 쇄골, 등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그런 등과 팔의 윗부분은 흰색의 수가 놓인 반투명한 천으로 감싸져 있었어. 풍성하게 퍼진 치마 부분은 프린세스 라인 특유의 치마 접힘이 있는 도톰한 천이 예쁘게 흘러내리는 디자인이었지. 너무 화려하지 않는 드레스는 허니의 젊은 나이에서 나오는 아름다움 역시 가리지 않고 보여주기 딱이었지. 디자이너의 안목에 감탄한 허니는 그 드레스로 결정을 내렸어.

 

 

 

“예식장 예약… 했고, 드레스 방금 맞췄고, 남은 건…”

 

 

 

결혼식 준비를 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적어둔 체크리스트에 또 줄이 하나 더 그였어. 종이에 있는 일들 중 이미 반 이상이 완료가 되었다는 줄이 그어진 후 겠지. 드레스가 완성될 날짜라던가 그런 것들을 감안해서 결혼식은 한 달 정도 뒤에 이루어질 예정이었어. 그맘때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라 딱 좋을 거라고 생각되었지. 다만 활짝 핀 꽃들과 싱그러운 풀이 아니라 낙엽인 게 조금 아쉽지만 아무렴 어떨까. 갈색빛으로 떨어지는 낙엽도 꽤 운치 있고 좋을 것 같긴 해.

 

해야 할 일들을 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하루가 빨리 지나가던데 일주일 만에 빠르게 해야 할 일들을 끝내고 나니 하루가 어찌나 더디게 가는지 허니는 너무 기대가 돼서 매일 밤을 뜬눈으로 보낼 지경이었지. 하지만 아무리 가지 않을 것 같은 시간도 결국은 다 지나가기 마련이고, 어느덧 정원에 있는 나무들은 전부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었지. 원래라면 늦잠을 자서 오전이 다 지날 때 즈음 느지막이 일어나던 허니는 기대감에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떠.

 

 

“제레미 좋은 아침!”

 

“그래. 좋은 아침이구나.”

 

 

그래도 워낙 잠을 푹 자는 허니라 이른 아침은 아니어서 철옹보다 늦게 일어나겠지. 이제는 같은 침실에서 자고 일어나는 두 사람이었고 허니는 이미 슈트를 입고는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철옹을 홀린 듯 보겠지. 그럼 철옹은 침대에 있는 허니를 번쩍 안아들고는 바닥에 내려줘.

 

 

 

“늦지 않으려면 아가도 어서 준비해야지.”

 

 

 

허니의 뺨에 모닝키스를 한 철옹은 말을 이었어.

 

 

 

“미안하지만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 먼저 나가봐야겠구나. 괜찮겠니 아가?”

 

 

 

같이 나란히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봤자 대기실에서 각자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따로 입장하지만- 허니는 조금 아쉬웠지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어.

 

 

 

“당연하죠. 예쁘게 하고 올 테니까 기대해요.”

 

 

 

허니는 준비를 하러 드레스룸으로 총총 나갔어. 고용인들이 허니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왔지.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고용인들의 손길에 오늘따라 더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어. 중간중간 머리카락이 뽑히는 건 아닐까 걱정됐지만 흐트러질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지. 한참 단장을 받던 허니는 창밖을 봤어. 그러고 보니 일어나자마자 씻고 단장을 하느라 오늘 날씨도 확인을 못했거든. 당연히 평소와 같이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이겠지라고 생각하고 창문을 봤지만 애석하게도 오늘의 날씨는 흐렸어. 하늘에 먹구름이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모습이 비가 올 것만 같았지. 요 며칠 소나기가 종종 내리더니 오늘은 본격적으로 비가 올 것 같은 모양새였어

 

 

 

‘그래…오늘따라 왜 커튼이 안 걷어져 있는 것 같나 했었더니…’

 

 

 

허니는 자신의 둔함을 한탄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어. 그래도 다행인 점은 둘의 결혼식은 야외가 아니라 실내라는 점이었지. 마차에서 성당으로 이동하는 동안 비가 내려서 단장이 흐트러진다고 해도 예식장에 들어가기 전 대기실에서 빠르게 다시 손보면 될 테니까 걱정이 없었어. 비가 온다고 해도 둘의 결혼식을 계획한 것과 다를 것 없이 순조롭게 흘러갈 거야. 허니는 큰 장우산을 챙기고 마차를 탔어. 고용인들이 정문 앞까지 우르르 나와서 허니에게 인사해 주었지. 그제야 다시금 오늘이 자신과 철옹의 결혼식이라는 게 실감이 나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마냥 뛰었어. 허니는 활짝 웃으며 고용인들에게 손을 흔들어줬지. 데뷔탕트 무도회를 갈 때 지었던 억지웃음과는 전혀 다른 자연스러운 웃음이었지.

 

 

 

‘그동안 진짜 별의별 일이 다 있었네… 장하다 허니 비!’

 

 

 

아니 허니 아이언스라고 해야 하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허니는 실실 웃었어. 구름 위를 걸어가는 것만 같은 붕 뜬 기분에 광대가 주체가 안되겠지. 마차는 덜컹거리며 한적한 들판 길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어. 허니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면서 철옹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마차 안에서 딱히 할 것도 없어서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로 장 밖을 보고 있는데 마차의 창문에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졌어. 우산을 챙겨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겠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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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소나기로 시작했던 비는 점차 굵어지더니 이제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내렸어. 허니는 평소에 비가 오는 날을 싫어하는 건 아니자만 왜 그게 하필 오늘인지 모르겠어서 애꿎은 치맛자락만 움켜쥐었어. 가을비는 하필이면 두 사람의 결혼식 날에 주룩주룩 쏟아졌고 설상가상으로 바퀴가 빗물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금이 가고 말았지. 마부가 창문을 두드려 허니에게 그 얘기를 알렸어. 이대로 가다간 위험하니 바퀴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도 함께. 하지만 마차에는 당장 예비 바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허니가 지금 당장 있는 곳은 시내와는 한참 떨어진 곳이었지.

 

 

 

식장까지는 마차로 5분만 가면 되는 거리인데 교외에 있는 이곳에서 마차를 수리하려면 일단 마부가 수리공을 부르러 가고, 다시 오는 데만 한 시간. 수리하는데 십분. 그리고 다시 점검을 하고 출발하는데 십분. 지금 장난해?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한 달 동안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결혼식에 신부가 지각까지 하다니. 허니는 제 지시를 기다리는 마부를 한번 보고 창밖을 한번 봤지. 마차로 5분이니까 뛰어가면 10분. 늦어도 15분 안에는 도착할 수 있어.

 

 

 

 

 

“나 그냥 마차 없이 갈게! 결혼식 끝나기 전까지 고쳐놔요!”

 

 

 

 

 

충동적인 결정이었고, 허니는 마차의 문을 열고 빗속으로 뛰어들었어. 드레스와 머리카락에 빗물이 젖어들기 시작했고 세찬 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빗물에 흠뻑 젖어버리겠지. 물을 잔뜩 먹은 옷 때문에 속도를 내기가 힘들었지만 허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뛰었어. 허니는 계속 뛰었고 드디어 시야에 성당의 문이 들어왔겠지. 누군가가 이미 도착했다는 것을 보여주듯 성당의 정문은 살짝 열려있었고, 열린 문 안쪽에서부터 은은하게 불빛이 흘러나왔어. 구름이 어둡게 하늘을 가려 그 불빛은 눈에 더 잘 들어왔지. 허니는 문안으로 들어갔어. 결혼식이 진행되는 예배당은 위층이었기에 허니는 계단을 올라가기 전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에서 물을 짜냈어. 최대한 많이 짜냈지만 세찬 비에 푹 젖어버려서 비에 젖기 전처럼 되길 바라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했을 거야.

 

 

 

찝찝하게 몸에 들러붙는 드레스 자락을 끌고 허니는 위층으로 올라가.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는데 갑자기 서러워졌어. 내가 지금 누구랑 결혼식을 하는데. 날씨는 왜 이렇고 자기 꼴은 또 왜 이꼬라진지. 옅게 발라서 흘러내릴 것도 없는 화장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안 그래도 제 모습이 이래서 철옹이 놀랄 텐데 만약 눈에서 마스카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면 도망가는 거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어.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데 눈물이 날 것만 같았지.

 

 

 

허니는 괜히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들어갔어. 고개를 드니 철옹은 주례대 앞에 서서 허니를 기다리고 있었지. 세찬 비바람에 철옹도 옷이 어느 정도 물에 젖은 흔적이 있었고, 깔끔하게 쓸어넘긴 머리는 바람에 한차례 휘저어진 티가 났지만 빗속을 뛰어온 허니만큼은 아니었어. 하지만 허니의 걱정과는 다르게 철옹은 물에 쫄딱 젖은 허니의 모습을 보고 전혀 놀란 얼굴이 아니었어. 오히려 평소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었지. 그 모습을 본 허니는 괜히 울컥했을 거야.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리는 철옹을 보자 눈물이 참지 못하고 흘러내렸어. 허니는 철옹에게 한달음에 뛰어가서 안겨.

 

 

 

날씨는 흐렸고 백색의 드레스는 흙탕물이 튀어 얼룩덜룩했어. 곱게 세팅해둔 머리카락은 다 풀려 미역처럼 흐느적거렸고, 버진 로드도 제대로 걷지 못했지. 축하해 주는 하객들이라곤 한 명도 없었지만 허니는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웃었어. 모든 게 다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철옹이 너무 좋아서. 그것 단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전부 가진 기분이라서. 처음에는 서러워서 눈물이 났지만 지금은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겠지.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이 너무 다정하고 따뜻했어. 자신의 허리에 팔을 꼭 두른 허니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댄 철옹이 천천히 주례사를 읊었어.

 

 

 

 

“오늘 같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에, 허니 비는 제레미 아이언스를 남편으로 맞이해 주시겠습니까?”

 

 

 

 

 

허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어. 눈물이 멈추지를 않지만 미소 역시 둘의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지.

 

 

 

 

 

“제레미도요. 제레미도 저를 아내로 맞아줄 거죠?”

 

 

 

 

 

철옹은 대답 대신 허니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쳐. 허니는 물에 빠진 사람이 숨 쉴 공기를 갈구하듯 다급하게 철옹의 목에 제 팔을 둘러안았고, 둘은 격정적으로 키스했어. 원래라면 햇빛을 받고 찬란한 색을 비춰내야 할 스테인글라스는 내리치는 번개에 음울한 빛을 냈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떤 화창한 날보다도 아름다운 날이었지.

 

 

 

 

“사랑한단다 나의 허니.”

 

 

 

 

나직하게 내뱉은 한마디. 동시에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는 웃음이 터져 나왔어. 서로 한참을 마주 보다가 철옹이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우린 어째 죄 거꾸로 밟아나가는 것 같구나.”

 

 

 

“그래도 상관없어요.”

 

 

 

 

탈칵. 상자의 뚜껑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보석이 촘촘하게 박혀 세공된 반지 한 쌍이 나오겠지. 철옹은 그중에 작은 반지를 꺼내 허니의 왼손 약지에 끼웠어. 허니도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철옹의 손가락에 끼워 넣었지. 맞잡은 손에서 반지 한 쌍이 반짝이며 빛났어. 약간의 갑갑함과 함께, 손가락을 알맞게 감싸오는 물리적인 구속에 정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되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어. 허니는 가슴 한구석이 빠듯하게 차오르는 감각을 느꼈지. 허니가 사랑에 벅차올라 말이 없는 동안 철옹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허니의 어깨에 둘러줘.

 

 

 

 

 

“감기 걸리겠다. 빨리 돌아가자꾸나.”

 

 

 

 

 

어깨에 올라온 재킷을 만지작거리던 허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어. 얼굴에서는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였고 그건 철옹도 마찬가지였지. 원래는 하객석 의자 제일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스테인글라스를 실컷 보면서 이야기나 나누고 싶었지만 날이 이런 데다 옷까지 젖었기에 허니는 순순히 발걸음을 옮겼어. 허니를 뒤따라 나가며 철옹이 예배당의 문을 닫았어. 그렇게 두 사람의 결혼식은 막을 내렸고 앞으로는 행복한 나날만이 남아 있을 거야.

 

 

 

 

 

2023.12.31 18:5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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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행복한 나날이 어떻게 남았는지 알려주고 가실거죠???? 2023년 마지막날 선물로 센세의 글을 보다니..(ᵕ̣̣̣̣̣̣﹏ᵕ̣̣̣̣̣̣)
[Code: 38dd]
2023.12.31 20:37
ㅇㅇ
모바일
(ᵕ̣̣̣̣̣̣﹏ᵕ̣̣̣̣̣̣) 최고다 센세 글봐서행복해짐
[Code: 4681]
2024.01.01 10:00
ㅇㅇ
모바일
센세 사랑해♡
[Code: 0a45]
2024.01.02 00:08
ㅇㅇ
모바일
철옹이 허니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에스코트하는 거 쏘스윗ㅠㅠㅠㅠ 둘이 비밀스럽게 춤추는 부분 개설레고 영화같다...벌써 서로가 스며들고 좋아지는데ㅠㅠㅠ 철옹 욕심내도 괜찮아ㅠㅠㅠ 그러면서 허니 베개 준비해둔 거 커여움
[Code: 3f74]
2024.01.02 00:15
ㅇㅇ
모바일
고용인들이 생각하는 대로 보여줍시다! 철옹이 허니 얘기 잘 들어주고 시시콜콜한 얘기라도 다정하게 얘기해주고 배려해주니까 너무 좋다 ㅠㅠㅠ 그러면서 끝내 많이 보고싶었다고 말해주는 으른 왕감자...게다가 자낮하는...미슐랭 ㅠㅠㅠㅠㅠ
[Code: 3f74]
2024.01.02 00:2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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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드레스 너무 예쁘다...근데 결혼식날 비와서 엉망이 되니까 허니는 힝인데 철옹 활짝 웃어주고 낭만적이다 ㅠㅠㅠㅠㅠ 철옹은 허니면 됐던 거야ㅠㅠㅠㅠ 둘뿐인 결혼식 사랑해...가장 아름다운 날이야 흑흑 최고의 결혼식은 막을 내려도 둘이 사랑하게 되는 거 더 보고싶다...센세..난 센세가 좋아..생각보다 조금 더 많이 ㅠㅠㅠㅠㅠ 이런 선물 줘서 고마워
[Code: 3f74]
2024.01.02 12: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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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결혼식 장면 전에도 너무 좋았는데 ㅠㅠㅠㅠ더 좋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ㅍ
[Code: df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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