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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1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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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알못주의 노잼주의 알오주의 캐붕주의 뇌절주의




후궁전 나인 데이지와 레이븐은 서로 눈짓으로 소리없는 대화하고 있었음. 그 이유는 자신들의 상전인 귀비 마마께서 후궁전 정원 한편에 핀 오얏나무를 한참을 서서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이었음. 그것도 꽃이 다 져 꽃잎 몇 개나 겨우 붙어있는 이파리만 무성한 나무를. 상전이 서 있는데 아랫것들이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덩달아 나인들도 오랫동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음. 차라리 걷는 것이 낫지 미동 없이 서 있기만 하려니 좀이 쑤셔와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음. 레이븐이 데이지에게 눈짓으로 문 쪽을 가리켰음. 마마의 관심을 돌려 후궁전 밖으로 모시고 나가게 하자는 뜻이었음. 그러나 데이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음. 그러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요즘 마마는 사고뭉치가 따로 없으셨음. 폐하께서 조용히 넘어갔기에 망정이지 연회장에서의 일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음. 그뿐인가? 마마는 취하셔서 공주의 호위무사와도 부딪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셨었음. 그 호위무사 위로 쓰러져 안 다치셨기에 망정이지 귀하신 귀비 마마의 옥체에 생채기라도 생겼다면 잡도리 당하는 것은 상전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자신들이었음. 본디 후궁이 되시기 전에 전쟁터를 누비시던 분인지라 조신함과는 원체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지만서도... 그래도 명색이 후궁인데. 장차 황후가 되실지도 모르는 분이 자꾸 이렇게 엇나가시면 곤란했음.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마의 미래를 위해서였음. 지금이야 연회장에서의 일때문에 황제 폐하의 발길이 뜸하여 좀 활기가 없으셔도 두 분이 동침하시면 불이라도 붙은 듯하여 곁에서 보기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폐하께서 언제까지고 발걸음을 안 하실 리도 없었음. 그때까지 사고무탈한 것이 백번 나았음. 암 그렇고 말고. 그러나 레이븐은 다른 거 다 필요없고 오로지 제 상전의 기분이 제일 중요했음. 레이븐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고 데이지를 닥달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음. 나인들 중 가장 어려서인지 제이크가 데이지에게 가장 물렀기 때문이었음. 레이븐이 데이지에게 더욱 눈을 부릅뜨고 턱짓을 하며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외쳤음. 그래도 계속 저리 계시는 것보다야 낫지! 데이지는 눈을 감고 아예 고개를 팩 돌려버렸음. 아오, 저 쥐방울만한 게. 레이븐은 이를 바드득 갈았음. 뒤에서 옥신각신 하는 둘을 가만히 보고있던 헤더가 결국 조심스레 제이크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음.

마마, 오얏꽃이 좋으시면 나무를 더 심으라 할까요? 내년 봄엔 마마의 침실 창에서도 잘 보이게 아주 많이요. 

헤더의 말에 그제야 제이크는 고개를 돌렸음. 오얏꽃을 보니 오얏 서리를 하던 어릴 적 추억이 떠올라 잠시 상념에 잠겨버렸었음. 잊는다고 해놓고 이렇게 미련이 철철 흘러넘쳐서야 원. 나뭇가지에 달려있던 꽃잎 하나가 살랑이는 바람에 가지에서 떨어졌음. 제이크의 시선이 낙하하는 꽃잎을 따라 점점 아래로 내려갔음. 흙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물끄러미 보던 제이크는 걸음을 내딛어 그 꽃잎을 발로 지긋이 밟았음. 

됐다. 이것도 열매 맺기 전에 뽑아버리든 베든 치워버려라.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눈앞에서 치워버려야 했음. 한참을 아련한 눈으로 보고 계셔놓고 무슨 변덕인지 나무를 제거하라는 하명에 나인들은 어리둥절했음. 헤더는 괜히 내가 말을 꺼냈나 하고 시무룩해졌음. 그런 헤더에게 제인은 너 때문이 아니라는 뜻으로 어깨를 다독였음. 정원에서 도로 후궁전 안채 쪽으로 돌아가는 제이크의 뒷모습에 입매를 힘있게 꾹 다물었다 푼 레이븐이 결심이라도 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쥔 뒤 쪼르르 제이크의 옆으로 다가갔음.

마마, 벌써 들어가시려고요?
그래.
그러지 마시고 날도 좋고 바람도 잔잔하니 국궁장에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국궁장은 제이크의 속이 복잡할 때마다 찾는 곳이었음. 과녁에 명중시키는 것에만 집중해야 하니 머릿속을 비우기엔 아주 효과적이었음. 입궁 후 브래들리가 귀비의 정체가 행맨, 제이크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되기 전까지는 거의 매일같이 찾던 곳이기도 했었음. 남들이 보기에야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죽어라 구르는 것보다 존귀한 귀비 마마가 된 것이 팔자 편해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제이크에겐 아니었음. 책에 코를 박고 머리 터지게 공부를 하고 훈련이라는 이름아래 토기가 치밀 정도로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또 그 한계를 뛰어넘는 생활이 꽤나 적성에 맞았었음. 전장에서는 생존자와 전사자, 승자와 패자만 존재할 뿐 알파니 오메가니 가문이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었음. 그렇게 전장을 누비고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궁에 들어와 가만히 몸을 놔두려니 갑갑하고 좀이 쑤시는 게 당연했음. 황궁 안에서는 후궁이라는 지위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몇 없었음. 그런 제이크가 황궁 안에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국궁이었음. 이제 다시는 전장으로 돌아갈 일 없을것을 알면서도 어째서인지 그 감을 잃기는 싫어 제이크는 틈나는대로 활을 잡았었음. 그때까지만 해도 얼굴이라도 제대로 보고 대화를 나누면 모든게 다 괜찮아질 줄 알았었음. 기억을 잃은 줄도 모르고. 기억을 찾아도 아무 소용도 없는 줄도 모르고. 마음이 달아 세러신의 권력까지 써가면서 냅다 후궁 간택에 뛰어들었는데. 모든 것에 능수능란하면서도 연모의 정이라고는 브래들리 하나에게만 느껴본지라 이런 쪽으로는 하수였구나 요즘들어 처참하게 깨닫고 있는 중이었음. 그러니 황제의 발길이 뜸한 지금 레이븐이 국궁장을 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음. 그러나 제이크는 근래에는 머릿속이 시끄러워도 국궁장을 찾지 않았었음. 무엇을 하든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미답게 한 번 가면 몇 시간이고 성에 찰 때까지 활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날려대야 했었음. 그러면 아주 잠깐이라도 부드러워지려던 손은 다시금 굳은살이 자리잡곤 했음. 자수를 놓고 난을 치는 보드랍고 분내나는 여인의 손과 달리 검을 쥐고 목을 치는 거친 피비린내나는 ‘행맨’의 손. 온전히 가녀린 여인이 되지도 못하고 오롯이 사내로 있지도 못하고. 태생부터가 사생아로, 남자오메가로 이쪽도 저쪽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반쪽짜리. 제이크는 손끝을 소매 안으로 말아쥐며 말했음.

생각없다.

몸을 돌려 안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떼는 제이크를 보고 레이븐은 다급히 외쳤음.

그러면..!!! 마마, 아! 곧 있을 풍년기원제 준비하는데 가보시렵니까?

풍년기원제는 말 그대로 한 해의 농사가 잘되어 풍년이 되기를 하늘에 기원하는 제였음. 황실에서 한 해에 치루는 가장 큰 제가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가 풍년기원제였고 두 번째가 추수감사제였음. 그중에서도 풍년기원제는 조금 더 각별했는데 한 해의 농사가 잘되느냐 아니느냐에 따라서 하루 벌어 먹고 사는 가진 것 없는 백성들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기 때문이었음. 높으신 지체들이나 부유한 거상들이야 한 해 정도 흉년이 들어도 곳간 빌 일 없으니 상관없겠으나 평민들은 그렇지 않았음. 늘 풍년일 수는 없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때때로 흉년이 들 때도 있는 법이지만 연달아 이 년, 삼 년 가뭄이 지속되어 흉년이 들게 되면 민심은 흉흉해지고 굶어 죽는 이들이 떼거지로 나오게 되어 있었음. 비단 죽어 나가는 백성의 숫자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었음. 대다수의 평민은 땅 주인에게 논이나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지었고 흉년이 들어 세를 내지 못하면 노비로 전락하였음. 이는 세금 징수에도 영향을 미쳐 크게는 나라의 국고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 그래서 황실에서는 겨울을 지내고 파종하느라 먹을 것이 부족한 시기에 맞추어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며 백성들에게 구휼을 베풀었음. 때문에 현재 황궁은 이 기원제를 준비하느라 심혈을 기울이며 바지런을 떨고 있었음. 기원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단연코 황제 폐하라고 할 수 있었음. 기원제는 철옹성같은 궁 안에 계시는 황제 폐하의 귀하신 용안을 일반 백성들이 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했음. 작년 기원제 때는 제이크가 기원제 이후 입궁을 했던 터라 연관이 없었지만, 이번 기원제에는 이 황실의 유일한 후궁으로서 황제와 함께 참석해야 할 것이 자명했음. 그렇지만 제이크는 사실 황후도 아니고 아직 품계를 받은 후궁일 뿐이었기에 기원제 준비까지 신경쓸 것은 없었음. 제이크는 레이븐의 얼굴을 내려다봤음. 눈치를 보면서도 간절함이 담긴 얼굴이었음. 상전의 기분이 유쾌하지 못하여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기분을 환기시켜드릴까 꼴에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니 제법 기특하였음.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제이크의 표정은 크게 변화가 없어서 제 상전이 저를 갸륵해하고 있다는 것을 레이븐은 알 지 못했음. 제이크가 쉽사리 간다는 말을 입술로 내뱉어주지 않으니 레이븐은 이것도 안내키시는가하여 눈썹을 늘어트리며 말했음.

에휴.. 마마께서 하루 온종일 앉아 계시니 치질에 걸리실까 염려되어 그럽니다. 요즘 통 거동도 안 하시고... 운동은 커녕 산보도 않고 후궁전에만 틀어박혀만 계시니 이러다 뱃살이 느는건 순식간-

레이븐은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음. 제이크가 레이븐의 입술을 냅다 집게손으로 잡아버렸기 때문이었음. 제이크는 레이븐의 입술을 잡아서 위로 쭉 끌어당겨 좌우로 흔들며 말했음.

치질? 뭐? 뱃살?! 이게 미쳤나.
으으!! 므므 으흐느드으~!(아야!! 마마 아픕니다~!)
네가 죽고싶어 환장했지 아주. 뚫린 입이라고 겁대가리없이 맘대로 지껄이지 말라고 내 누누히 말하거늘. 넌 요 주둥이땜에 언젠가 사달이 날 것이다.

레이븐의 입술에서 제이크의 손이 떨어져 나가고 레이븐은 양손으로 제 입술을 싹싹 부비며 울상을 지었음. 어우 주둥이 다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네. 활을 잘 쏘시어 그런지 입술을 꼬집는 손이 몹시도 매워 레이븐의 눈가에 찔끔 눈물이 맺혔음. 제이크는 그런 레이븐을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음. 저건 쌓은 공을 꼭 입으로 말아먹는단 말이야. 곁에 섰던 제인이 얼른 자신의 옷소매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제이크에게 건넸음. 제이크는 건네받은 손수건에 제 손을 닦으며 말했음.

위하는 척 하기는. 후궁전 안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 그러는게지. 내가 모를 줄 아냐?
아니온데... 참말로 마마를 생각한것이옵니다.
말이나 못하면.. 시끄럽다. 침이나 닦아라.

제이크는 제 손을 닦은 손수건을 레이븐에게 휙 던지고 몸을 돌려 걸어갔음. 레이븐이 날아든 손수건을 얼른 두 손으로 받았음.

채비하거라.
어? 나가시게요?
마침 소화도 안되니 겸사겸사 산보 가는 것이다.

별로 드신 것도 없는데 소화가 안되긴. 마마도 참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깐. 제이크는 늘 이런식이었음. 말씨가 빈말로도 다정하다고는 못하겠는데 대해주는 태도에서는 정이 묻어나왔음. 지금처럼 이렇게 아랫것이 가잔다고 핑계를 대며 모른척 나서주는 상전이라니. 눈치만 보고 있던 나인들의 얼굴이 화색을 띄었음. 나인들은 제이크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며 레이븐에게 잘했다는 뜻으로 어깨를 두드리고 눈짓을 했음. 레이븐은 손수건을 제 옷소매 안에 소중히 넣고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지른 뒤에 씩 웃으며 얼른 제이크의 뒤를 따라갔음.




후궁전을 나선 제이크는 가장 먼저 생과방으로 향했음.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한 황궁이지만 평소에도 보지 못했던 오색찬란한 다과의 향연에 나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음. 생과방 궁녀들이 모두 귀비 마마를 발견하고 하던 일을 멈추고 예를 갖췄음. 궁녀들을 지나친 제이크는 후궁전 나인들의 손에 하나씩 달다구리한 정과 주머니를 던지듯 들려주었음. 이 황궁 안에서 존귀한 분의 으뜸은 당연 황제 폐하셨고 그 다음 존귀한 분은 현재 황자녀를 낳을 가능성이 가장 큰 귀비 마마셨음. 게다가 귀비 마마는 명실상부 명문가인 세러신 출신이셨으니 귀비 마마가 다과를 좀 가져가 심지어는 아랫것들에게 먹이는 것에도 토를 달 수 있는 이는 이 황궁 안에 아무도 없었음. 어차피 후궁전으로 갈 몫은 따로 빼놔야 하기도 했고 저 정도 주머니는 티도 나지 않았음. 뼈 빠지게 일한 생과방 나인들만 저것들은 상전 잘 만나 속편하게 다과나 쳐먹네하고 부러워 할 뿐이었음. 제이크는 쟁반위에 나란히 놓여져 있던 금귤정과 하나를 집어 들고는 단것을 좋아하는 막내 데이지의 코앞에 내밀었음. 저 먹으라고 내민것이라 미처 생각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데이지에게 제이크가 말했음.

먹어라. 네가 환장하는 귤이다.
헉, 마마. 제가 감히 어찌 불손하게 마마께 받아먹습니까. 당치도 않습니다.

제이크는 손사레를 치며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데이지의 젖살이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을 쭉 잡아당겼음.

어쭈, 감히 내 명령에 불복한다 이거지.
아야야~! 아닙니다, 마마! 불복이라니요.
근데 왜 주둥이가 아직도 다물려 있을까? 냉큼 안 열어?
그럼 어…손에! 손에 주십시오.
내 손이 아직도 네 주둥이 앞에 있구나. 팔 떨어지겠네. 종일 안마라도 받아야되려나?

제이크는 데이지를 골려주거나 벌을 줄 때 안마를 시키곤 했음. 손이 자그마한 데이지에게 제이크의 근육질인 몸은 돌덩이처럼 느껴져 있는 힘껏 주물러도 더 세게 주무르라는 소리만 나와 데이지가 제일 기피하는 것이었음. 결국 데이지는 아기새처럼 입을 벌려 정과를 냉큼 받아먹었음. 그냥 주셔도 되는걸 꼭 이렇게 놀리고 주시니 매번 난감하기 그지없었음. 세상에 어느 나인이 상전의 손에서 귀한 금귤정과를 받아먹냐고. 부루퉁한 데이지의 볼을 보며 제이크의 눈가가 장난스럽게 휘어졌음. 황송하다면서 안마하기 싫어서 넙죽넙죽 받아먹기는. 다른 후궁전 나인들은 그런 제이크와 데이지를 보고 평범한 후궁전 일상이 회복된 듯 하여 흐뭇하게 웃고 있었음.

맛있냐?

데이지는 고이는 침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을 오물거리며 힘겹게 답했음. 

예에. 맛납니다. 마마께서도 드십시오.

데이지가 품안에 소중히 안은 정과 주머니를 쑥 내밀었음.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양 품에 쥐고 있더니 망설임없이 내미는 모습이 퍽 대견스러웠음.

난 생각없다. 너나 많이 먹어라. 군살붙어 폐하 눈 밖에라도 나면 어째?
커헙..

제이크의 말에 뜨끔한 레이븐이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음. 한 번을 그냥 넘어가시질 않네. 군살때문이 아니라 폐하의 속을 긁은 귀비 마마의 언행이 문제인 걸 모르는 이는 없었음. 하지만 후궁전 나인들은 제이크와 눈이 마주치자 모두 아무말 없이 그저 생글 웃어보였음. 잘나신 외모만큼이나 조금만, 아주 조금만 성질 죽이시면 좋을텐데 하하하하하...
제이크는 나인들의 입에 달다구리 하나씩 넣어준 것 뿐 아니라 정과와 다식까지 한 상자 더 챙긴 뒤에 기원제에서 쓸 연등들이 만들어지는 곳으로 갔음. 형형색색의 다양한 모양의 등들을 보며 나인들의 눈이 휘둥그레해졌음. 어차피 나와봐야 같은 황궁 안이거늘. 아닌척 표정을 갈무리하려 애써도 축제라도 온 듯 들뜬 게 숨겨지지 않는 얼굴들을 보니 새삼 나인들의 나이가 어린것이 실감되어 제이크는 입안이 썼음. 가난하고 신분이 비천한 어린 여자애들은 입 하나 덜기 위해 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황궁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했음. 후궁전 나인들 또한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구슬픈 사연들을 각자 하나씩 다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인들은 외심을 품지 않고 모두가 올곧고 명랑한 면이 있었음. 그것이 마음에 들어 제이크가 수족으로 직접 택한 이들이었음. 나인들이 자기들끼리 동물모양의 등을 보고 너 닮았네 아니네하며 서로 장난을 쳤음. 그 모습을 보며 빙긋이 미소짓고 있던 제이크는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커다란 황금용의 형상을 한 등을 발견했음. 황제를 상징하는 커다란 용. 용이라...

수도에서는 풍년기원제 때 황궁에 계시는 황제 폐하를 직접 볼 수 있대. 기원제 마지막에 운이 좋으면 용을 보기도 한다는데 용이 날아오를 때 같이 본 사람들은 평생 행복하게 산다는거야.

제이크가 어릴적 브래들리에게 했던 말이었음. 나라 전체가 커 남과 북에 따라 봄이 찾아오는 시기가 다르니 일이주 정도씩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전국적으로 각 지역색이 묻어난 소규모의 풍년기원제가 열렸었음. 본디 유행이라는 것이 존귀함과 부유함의 상징인 황족과 귀족들을 흠모하여 따라하면서 파생되곤 했고 황실에서 주최하는 풍년기원제 또한 마찬가지였음. 기원은 오랜 흉년으로 고달픈 백성들을 생각한 한 선대 황제의 애민으로 인해 신께 비는 마음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하나의 절기와 풍습으로 자리잡은 것이었음. 황실에서는 제사와 구휼의 의미가 더 컸고 각 지역별로는 축제적인 성격이 더 컸음. 제이크와 브래들리가 있던 고향에서도 풍년기원제의 본고장인 수도와 비할 수는 없었지만 봄이면 나름의 풍년기원제가 열리곤 했었음. 그러나 이 시기는 농사일이 바빠져 그만큼 일손을 필요로 하였음. 그래서 빠듯한 살림에 홀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돕고자 제이크는 이 시기에 캐서린 몰래 소일거리를 하곤 했었음. 제이크는 보통 애들보다 똑부러지고 손끝이 야무져 일을 맡겨도 뒤탈이 없었음. 나쁜 어른들은 멸시받는 작은 남자오메가 아이 하나에게 싼값에 일거리들을 넘기고 놀러가곤 했음. 때문에 남들 다 가는 기원제에 가지 못하고 제이크는 홀로 바빴었음. 호기심이 많은 제이크가 이런데 빠질 리 없는데도 기원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긴 못간다고 했을 때 제이크의 사정을 알게 된 브래들리는 못된 어른들의 부당한 일들에 대해 불같이 화를 냈었음. 제이크라고 모르는 것이 아닌데 아쉬운 건 저라서 씩씩거리며 뭐라도 할 기세인 브래들리를 만류했고 브래들리는 결국 제이크가 일이 빨리 끝나도록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도 없는 일들을 엉성하게라도 도왔었음. 그런 브래들리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제이크는 부러 수다스럽게 말을 했었음.

나 혼자 해도 되는데..
둘이 하면 더 빨리 끝나잖아.
그럼 좀 제대로 하던가. 이게 뭐냐?
뭐가. 제대로 하고 있잖아.
제대로 하긴.. 너 땜에 일이 두 배다, 두 배.
아 진짜 쫑알쫑알.. 이건 도와줘도 고맙다는 소리도 없어.
누가 도와달랬냐? 됐다는걸 지가 혼자 나서놓고.
어, 그래. 내가 의리가 넘치는 놈이라 사서 이 고생을 한다, 내가. 어?
천하제일의 의리남 납셨네.

둘은 늘 그렇듯이 언제나처럼 투닥투닥.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수도말씨를 써 나긋나긋한 브래들리와 놀고싶어하는 마을애들이 많았었음. 그런데도 굳이 제 일을 돕느라 축제도 안 가고 손에 흙을 묻히는 브래들리에게 제이크는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뿌듯함을 함께 느꼈었음. 뒤에서 일을 하는 것은 둘의 어머니인 캐서린과 캐롤 모두 모르는 일이었기에 집에 들어가기 전 둘은 씻으러 냇가에 갔었음. 제이크와 브래들리는 나란히 냇가에 쭈그리고 앉아 시냇물에 손을 담궜었음. 제이크가 브래들리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다가 말했었음.

수도에서는 풍년기원제 때 황궁에 계시는 황제 폐하를 직접 볼 수 있대. 기원제 마지막에 운이 좋으면 용을 보기도 한다는데 용이 날아오를 때 같이 본 사람들은 평생 행복하게 산다는거야.
세상에 용이 어딨냐? 그냥 상징적인거겠지. 그리고 그거 본다고 뭐가 행복해져. 그럼 세상 사람 다 행복하게?
아니야! 진짜 있다고 그랬어.
누가?
저번에 장에 온 보따리 장수가.
그걸 믿냐? 넌 가만보면 은근히 맹한 구석이 있더라. 이거 순 헛똑똑이야.

제이크는 브래들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발로 브래들리의 어깨를 꾹 밀어버렸음.

저걸 누가 데려갈 지 걱정-

브래들리가 발라당 옆으로 넘어졌고 기껏 씻은 손에 도로 흙이 다 묻어버렸음. 배은망덕하게 손도 아니고 발로 밀어 넘어트린 제이크에게 화가 나 브래들리의 볼과 귓가가 불긋해졌음.

야!!!
고마워서 데리고 가줄랬더니 나중에 수도에는 나 혼자 가야겠네. 넌 거기서 평생 앉아있던지! 이 닭대가리야!!

그 용이 이 용인 줄은 고향을 떠나 수도에 와서 알게 됐었음. 기원제 마지막에 황제를 상징하는 용의 형상을 한 등은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어있었음. 하늘에 뜬 용형상의 등을 황제가 불화살로 맞추면 그 안에 있는 폭죽이 터지는 것으로 기원제는 마무리가 되는 것이었음. 보고싶던 풍년기원제에서 용을 봐도 행복해지지 않았었음. 이듬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용을 보면 행복해진다는 말따위 당연히 믿지 않았었음. 요점은 ‘같이'보는거였는데. 제이크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보며 콧잔등을 찌푸렸음. 그때나 지금이나 눈치 없는건 변함이 없네.

닭대가리새끼..

눈가를 찌푸린 채 용을 잔뜩 노려보던 제이크는 잘 구경하고 노는 나인들에게 말했음.

침방으로 가자.

황궁안의 모든 바느질거리는 침방에서 이루어졌음. 날이 다가오는 만큼 황제가 기원제에서 입을 예복 또한 침방에서 제작되었음. 여러 의상 중 황제의 선택을 받기 위해 쪽빛과 녹빛, 주홍빛, 그리고 금빛의 의상이 추려져 있었음. 최종적으로 선택된 단 한 벌의 예복만이 수방에서 금실과 은실로 수놓아질 것이었음. 제이크는 예복들을 가리키며 말했음.
 
폐하께 가져다드릴 것이니 챙기거라.
 
보고픈 놈은 낯짝은커녕 그림자마저 비출 생각이 없고, 싸질러놓은 게 있어서 차마 먼저 찾아가기도 애매하던 차에 기원제는 브래들리에게 찾아갈 수 있는 아주 그럴싸한 구실이었음. 나인들은 귀비 마마가 왜 침방에 들러 굳이 폐하의 예복을 챙기신 것인지 의아했음. 나인들은 몰랐지만, 이는 늘 자신에게 유리하게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챙긴 뒤에야 행동에 나서는 제이크의 습성 때문이었음.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데 알면서도 지는 싸움은 하기 싫고. 보고 싶어 왔다는 말 한마디면 될 것을 센 자존심 때문에 그리 솔직하지도 못하고. 반기기는커녕 싸늘한 눈빛을 받으면 받아칠 수도 있어야 하니까 뭐든 핑곗거리를 많이 만들어 가야 했음. 마지막으로 본 게 연회장에서 한 대 치기 직전으로 열받아 하는 모습이었었으니까 아마도 쌍수 들고 반겨주지는 않겠지. 그래도 소원한 사이와는 별개로 기원제는 다가오고 할 일은 해야 하니 예복과 다과까지 가져온 성의와 보는 눈들 때문에라도 매몰차게 내쫓지는 못할 터였음. 내가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울화가 치밀어도 어쩔 수 없었음. 포기한 것들이 억울해서라도. 놓친 시간들이, 견딘 시간들이 아까워서라도 브래들리를 손에 다시 넣어야 했음. 누구 좋으라고 포기해. 내가 목표로 한 것 중 유일한 실패가 네가 될 수는 없어.
 
 
 
 
빨갛고 커다랗게 줄지어진 기둥들 너머로 황금빛 지붕이 덮힌 대전이 보이기 시작했음. 호기롭게 오기는 했으나 대전을 보자 답지않게 긴장이 되어 목이 타 제이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햝았음. 궁녀들과 환관들이 제이크를 보고 모두가 깊숙이 허리를 숙여 귀비 마마께 예를 갖췄음. 그런데 어째서인지 분위기가 어수선했음. 게다가 대전에 사람도 평소보다 별로 없었음. 이러한 의문은 금방 풀렸음. 브래들리가 대전에 없었기 때문이었음. 황제가 대전에 없으니 보필하는 이들도 모두 대전에 없었고 눈에 보이는 인원 자체가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음. 한참 정무를 보느라 대전에 있을 시간인데 어째서 없는 것인가 의아했음. 제이크는 궁녀 하나를 붙들고 물었음.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
폐하께오선 현재 침전에 계시옵니다.
이 시간에 침전에?
예, 그러하옵니다. 마마.
 
오늘은 날이 아닌가. 각오를 다지고 왔건만. 어째 맥이 탁 풀려버렸음. 그냥 돌아갈까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제이크는 결국 대전에서 안쪽 침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야 없지. 침전으로 걸어가며 제이크의 머릿속은 자연스레 브래들리에 관한 생각들로 가득 찼음. 왜 여태 침전에 있을까. 어디 아픈가? 브래들리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건장하고 튼튼해 잘 아프지 않았지만 한 번 아프면 크게 앓곤 했음. 탑건에서도 미련스럽게 혼자 끙끙 앓았었음. 어릴 때도 캐롤을 걱정시킬까 봐 안그래도 쳐진 눈이 아파서 더 쳐지고 볼이 열로 더욱 빨개졌는데도 숨겨 버릇 했던 게 떠올랐음. 브래들리가 황제로서 자신의 몸을 안 돌볼 정도로 정무에 힘 쓰고 있다는 것은 이 황궁안에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음. 그야말로 모범적인 성군 그 자체였으나 옆에서 보기엔 저러다 탈나지 여간 신경쓰이던 게 아니었음.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다가 어느새 제이크의 안에서는 브래들리가 아프다는 결론이 확정된 상태가 되어버렸음. 황제라 태의가 진찰하고 온 나라에서 가장 진귀하고 효험있는 약재들을 팍팍 넣어 탕약을 내올 것인데 내가 걱정할 게 뭐 있다고. 하지만 사람 마음이, 연모하는 이를 향하는 생각과 발길이 어찌 맘대로 되던가. 염려로 어느새 제이크의 발걸음은 빨라져 있었음. 침전으로 향하는 다리를 지나 계단을 오르니 침전 앞에 환관과 궁녀들이 줄지어 선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음. 제이크가 가까이 다가오자 모두가 귀비 마마께 고개를 조아렸음. 제이크는 당장에 귀비 마마의 행차를 고하지 않는 환관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음.

뭐하고 섰느냐. 어서 고하지않고.

머뭇거리던 환관은 제이크의 서슬퍼런 눈빛에 겁을 먹고 얼른 귀비 마마가 납시었다고 고했음. 굳게 닫혀있던 침전의 문이 열리고 제이크는 망설임없이 안으로 들어섰음. 복도에 들어서자 복도끝에서 태감과 근위대장인 피닉스가 제이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음.

귀비 마마, 오셨습니까.
폐하께서 어찌 여즉 침전에 계시지? 어디 편찮으시기라도 한건가?

예를 갖추는 태감과 피닉스에게 제이크는 시선도 주지 않은채 곧은 자세로 앞만 보고 걸으며 물었음. 피닉스가 얼른 지나치는 제이크의 뒤를 따랐음. 후궁전 나인들이 뒤를 따라가려하자 태감이 나인들을 저지하며 밖으로 나가있으라 했음. 나인들은 하는 수 없이 인사를 하고 뒷걸음질하여 문밖으로 나가 대기했음. 의복과 다과들도 있으니 기다리다보면 곧 부르시겠거니 할 따름이었음. 태감은 제이크를 뒤따르며 답했음.

마마, 그것이 현재 폐하의 옥체가.. 
잠도 거의 주무시지 않고 정무를 보셨다지.
예. 그러하옵니다.
가장 가까이 폐하의 곁을 지키는 태감은 폐하의 옥체가 상하지 않게 보필하지 않고 무얼 한것인가.
송구합니다, 마마.
폐하께서 아무리 강건하다 하시어도 결국은 먹고 자야 회복되는 사람이거늘. 내 언젠가 이리 될 줄 알았지.

진짜 해뜨는 거 알리는 수탉이야 뭐야. 왜 잠을 안 자. 잔뜩 미간을 찌푸린 제이크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자 태감과 피닉스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음.

마마.

피닉스가 제이크를 불렀음. 제이크는 피닉스를 힐끔 쳐다보더니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은채 물었음.

태의는 들렀는가?
예. 마마.
언제?
어제 들렸사옵니다. 저, 마마-
약은 드셨겠지?
예. 침전으로 탕약을 올렸습니다. 하온데 마마-
거참, 똥 마려운 강아지도 아니고 근위대장은 왜 자꾸 날 불러싸는지 모르겠네?

어느새 복도 끝에 다다랐음. 태감을 통해 아프다는 것을 확답듣고 나니 마음이 급해져 기다릴 새도 없이 제이크가 직접 문을 열어버렸음. 안으로 들어서자 빗장이 걸린 문이 드러났음. 황제의 침전에 빗장이 걸려있었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 황제의 침전이 잠겨있을 이유가 무엇일까. 제이크는 잠긴 문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물었음.

폐하께선.. 정확히 어디가 편찮으신것이냐.
마마.
어디가 아픈거냐고.

제이크는 짜증이 일었음. 자꾸만 두 번씩 말하게 만드는 것도, 무언가 제 눈치를 보며 쩔쩔매는 태도들도,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까지 전부. 피닉스는 결국 오지 않길 바랬던 상황이 와버린 것을 속으로 탄식하며 고했음.

러트가 오셨습니다.

러트라니. 매버릭에 따르면 황궁으로 온 이후 러트는 단 한번도 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갑자기 왜..

언제부터?
어제 신시쯤부터입니다.

제이크의 잇새로 하,하고 헛웃음이 흘러나왔음. 흰 치아가 드러나게 활짝 웃은 제이크가 피닉스를 돌아보았음.

근데 나는 그걸 왜 이제서야 알았을까?

보조개가 패이게 활짝 올라간 입꼬리와는 반대로 미간사이가 잔뜩 좁아져 누가 봐도 노기가 서려있음을 알 수 있었음.

어찌하여 아무도 내게 폐하께서 러트인걸 고하지 않은거냐고.

제이크는 기가 막혔음.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이렇게 지척에 있는데. 이 황궁안에, 적어도 대전에서 일하는 자라면 모두가 제이크가 오메가임을 알고 있었음. 러트 온 알파에게 오메가가 필요한 건 천치가 아닌 이상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들고 물어봐도 다 아는 사실이었음. 그러니 혹여라도 갑작스런 황제 폐하의 러트에 경황이 없어 부를 생각을 아무도 못했다 변명하지 않기를 바랬음. 어불성설이었으므로. 오랜 황궁생활로 눈치는 곧 생존과 직결되어 지금 함부로 잘못 입을 놀리며 혀가 잘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태감은 입이 바짝바짝 말라 잇틀에 혀가 붙을 것만 같았음. 태감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뗴었음.

송구하옵니다, 마마.

할 수 있는 말이 이것 뿐이었음. 아무 말도 못하고 선 태감과 피닉스의 창백한 낯빛에서 제이크는 그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음. 너구나. 루스터 네가 내게 알리지 말라고 한거야. 알파가 본딩 맺은 제 오메가를 놔두고 홀로 러트를 보낸다는 것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었고 가능할 리 없었음. 수마가 몰려오는 것처럼, 허기가 지는 것처럼 불가결한 것이었음. 그런데도 러트가 왔는데 하루가 지나도록 날 찾지 않았단 말이지. 정말이지... 넌 날 끊임없이 놀래키는구나.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참 대단하시네. 제이크는 아랫입술을 윗니로 꾹 말아 물며 잠긴 문을 노려봤음.

폐하를 뵈어야겠다.

제이크는 당장이라도 문을 열듯 빗장을 손으로 붙들었음. 문틈새로 흘러나오는 본딩알파의 페로몬에 솜털이 곤두서고 사타구니 안쪽에서부터 아랫배 깊숙히 찌릿한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제이크가 숨을 들이키고 멈칫한 사이 피닉스가 문과 제이크 사이를 검집으로 막아서며 말했음.

마마, 폐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나야? 비켜.
송구합니다만 불가합니다.
근위대장, 두 번 말하게 하지마.
저도 정말 열어드리고 싶지만, 마마 아시잖습니까. 전 폐하의 명만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폐하께서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제이크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 결코 피닉스와 전우애 넘치는 사이좋은 동료였다고는 할 수는 없었으나 피닉스는 사적으로 저를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 피닉스는 그저 근위대장으로서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고 있는 것이었음. 오히려 그 피닉스가 안타까운 눈으로 제이크를 바라보고 있었음. 열어드리고 싶다는 것은 피닉스의 진심이었음. 여기서 더 싸워봤자 제이크 자신만 더 초라해지고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었음. 황후도 아니고 일개 후궁은 황제가 찾지 않으면 평생 황제의 옷자락도 볼 수 없는 신세였음. 하여 황제의 눈길 한 번이라도 더 제게 머무르게 하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아야 하는 그것이 후궁이었음. 그것이 현재 제 위치였음.

마마.

제이크는 알파가 홀로 러트를 보내는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어 알고 있었음. 집안에서 언제부턴가 몰락한 귀족 출신인 노비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었음. 귀족출신이라 그런지 노비답지않게 단정하고 품위가 있었는데 알파였던건지 하루는 그 노비에게 러트가 찾아왔었음. 그러나 재산이나 다름없는 노비에게 발정기 보내라고 친절하게 오메가를 붙여주는 집은 어느 곳에도 없었음. 하물며 콧대높은 세러신은 말 할 것도 없었음. 그래서 그 알파는 헛간에서 홀로 고통속에 러트를 견뎌야만 했었음. 제이크의 방이 그 헛간과 가까워 짐승처럼 헐떡이던 소리를 계속 들었어야 했었음. 한숨도 자지 못한 제이크가 동이 트기 전 그 헛간으로 갔었음.

네놈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 날이 밝으면 오메가를 구하든 어쩌든 어떻게든 도와줄테니 돼지멱따는 소리 내지말고 사내답게 좀 견뎌보아라.
하아..도련,님..본딩맺은 제 반려 외에 다른, 다른 오메가는 소용없습니다. 

그 알파의 말에 따르면 본딩을 맺은 오메가가 없으면 다른 오메가로는 러트가 달래지지 않고 이 해소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기갈은 죽을 때까지 주기적으로 반복될 것이라고 했음. 해소할 수 없는 욕정은 고문이나 다름없었음.

그럼 네 반려를 데려올테니 어딨는지 말해.

그러나 그 노비는 이 제안마저 거절했었음. 노비는 본딩오메가를 데려오는 대신 다른 것을 부탁했었음.

도련님께서 절 도울 수 있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도련님은 누군가를 마음에 두신 적이 있으십니까? 있으시다면 저 좀 측은히 여겨주십시오.

제이크는 러트로 완전히 이성을 잃었던 브래들리를 떠올렸었음. 그래서 제이크는 며칠 전 제임스 세러신에게 처음으로 받은 진검으로 그 노비의 목을 뚫어 죽음이라는 안식을 선사해주었었음. 제이크의 첫번째 살인이었음. 노비 하나 죽인다고 세러신가의 도련님에게 무어라 할 수 있는 이는 없었음. 노비란 그런것이었음. 그런데 브래들리는 황제이면서 태자를 주겠다는 저와의 약속 때문에 본딩을 맺어 이 고통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었음. 내가 아니었어도 네가 러트를 혼자 보냈을까? 천하가 손안에 있는 황제인 네가?

마마.

본딩알파도 찾지 않는 남자오메가. 비참함과 모멸감, 수치심이 일어 훅 목덜미와 귓가가 뜨뜻해질 정도로 열이 올랐음. 초록빛 눈동자가 휘몰아치는 감정으로 파도처럼 넘실거렸음. 센 자존심을 구겨가며 힘겹게 마음을 다잡고 쌓아 올리면 브래들리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모든 걸 허물고 부스러뜨렸음. 제이크를 멀리하는 것으로 너무도 쉽게. 빗장을 움켜쥔 제이크의 손에 힘이 들어가 힘줄이 도드라졌음. 
​ 
귀비 마마!

피닉스의 외치는 목소리에 결국 제이크는 빗장에서 손을 떼어냈음. 어찌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 손가락 마디가 순간 저릿할 정도였음. 제이크는 제 손을 내려다봤음. 아무리 잡으려 움켜쥐어도 잡히지가 않아. 때가 되면 스러져 밟히는 꽃잎처럼 지금 열리지 않는 문앞에 서있는 자신이 하는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만 느껴졌음. 그만할까. 제이크는 문에서 한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음. 다 내 욕심이잖아. 이렇게 거부하는데. 싫다는데. 제이크는 한 발자국 더 문으로부터, 브래들리로부터 걸음을 물렸음.




괴로운 진실에 하늘이 무너지고 마음이 부서져내려도 본능은 브래들리의 사정을 살펴주지 않았음. 이러한 슬픔마저 같잖다는 듯 그제 제 욕구만을 강요하며 끊임없이 고개를 들어올렸음. 죄책감이 목이 메이게끔 옥죄어와도 한켠에서는 난생 처음 맛보았던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오르는 쾌락의 기쁨이 헐떡이며 갈증을 해소해달라 몸부림을 쳐댔음. 제이의 앳된 흐느낌과 행맨의 신음이 시끄럽게 머릿속을 공명했음. 브래들리는 제 안의 열기를 다스리려 질끈 눈을 감았음. 덜컹!하는 문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어느새 브래들리는 문을 붙들고 열려고 하고 있었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을 놓아버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했다는 사실에 브래들리는 온 몸의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을 받았음. 이 문을 열고 나갔다면 어디로 발길을 향했을 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음. 후궁전으로 가 이성을 잃고 행맨을 무자비하게 범할 것이었음. 그때처럼. 제이에게 했던 것처럼. 대전에서 첫정사 후 기절하여 늘어지던 행맨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음. 행맨을 떠올린 순간 브래들리는 끔찍한 환상을 보았음. 펄떡펄떡 뛰던 행맨의 맥박은 더이상 뛰지 않고 자신있게 저를 긁어대던 붉은 입술은 미동도 없이 푸른빛으로 물들어 갔음. 청량하게 반짝이던 눈동자는 덮힌 눈꺼풀에 가려져 뜨이질 않고 뜨겁던 체온은 품안에서 차게 식었음. 이성을 잃은 저에 의해서 흔들거리기만 할 뿐 시체처럼 움직임이 없는 행맨의 모습은 그 어떤 것 보다도 공포스러웠음.

안돼..!

제이를 잃고 행맨마저 잃을 수는 없었음. 절대 정신을 놓으면 안돼. 브래들리는 뒤를 돌아 문을 등졌음. 탕약이 담겼던 그릇이 눈에 들어오자 그대로 달려가 그릇을 깨 깨진조각을 왼손에 움켜쥐었음. 투둑하고 손바닥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음. 브래들리는 어느새 벗어던진 상의 중 하나를 찢어 풀리지 않도록 왼손에 단단히 감았음. 조각이 손을 더욱 아프게 파고들 수 있도록. 저릿하고 쓰라린 살이 찢긴 통증과 피가 흘러나와 천을 적시는 감각이 뚜렷하게 느껴졌음. 브래들리는 왼손을 더욱 힘껏 주먹쥐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음. 제게서 나오는 더운 숨이, 뚝뚝 떨어져내리는 땀방울이 버거워도. 타오르는 욕정이 오메가를 내놓으라 속에서 비명같은 아우성을 쳐도. 그래도 과오를 번복할 수는 없었음. 그래서는 안됐음.

귀비 마마!

피닉스의 목소리에 브래들리는 숨을 들이키며 감았던 눈커풀을 들었음. 방출해내야 하는 열기가 나가질 못하고 몸안에 갇혀 있으니 열감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가 겨우 또렷해졌음. 굳게 닫힌 문이 보이고 그 문을 본 순간 브래들리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음. 지금 저 문 앞에 내 오메가, 행맨이 있다는 사실을. 네가 왜 여기에.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 왼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음. 문에서 멀어지려 오른손을 뒤로 집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제가 움직이기 전 행맨이 먼저 움직였음. 오메가를 갈구하는 러트가 온 예민한 알파의 본성은 온 신경을 제 오메가에게 세우고 있었고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민하게 오메가의 상태를 느낄 수 있었음. 떠나려는, 달아나려는 오메가를. 쭈뼛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서며 동공이 팽창했음. 둥둥둥 심장소리가 북소리처럼 울리며 하아하아 거친 숨소리가 터져나올 때 본능이 소리쳤음.

‘멍청한 새끼야. 잡아.’




제이크가 몸을 돌려 걸어나가려 고개를 돌리는 그순간 우지끈하는 무언가 부숴지는 소리가 났음. 자리에 있는 세 사람 모두가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향했음. 안에서 창호지와 나무창살로 된 문을 뚫고 나온 손이 스스로 문을 걸어놓은 빗장을 들어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음. 다시 문안으로 들어간 손의 주인은 그대로 문을 열어 모습을 드러냈음. 태감과 피닉스는 놀란 와중에도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고 오직 제이크만이 눈 돌리지 않고 브래들리를 응시하고 있었음. 브래들리의 동공이 풀려있었음. 그때처럼. 제이크의 눈속에 브래들리의 손가락 끝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선명하게 박혀들어왔음.

폐하, 피가...

제이크가 입을 뗀 순간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브래들리는 그대로 문에서 튀어나왔음. 브래들리는 제이크의 멱살을 제쪽으로 잡아당겼고 제이크의 입술에 브래들리의 뜨거운 입술이 맞닿고 혀가 얽혀들어왔음. 러트가 온 본딩 알파의 퍼붓는 페로몬에 제이크의 정신보다도 몸이 먼저 반응했음. 제이크의 페로몬이 훅 터져나오며 뱃속이 간질거리기 시작했음. 달큰한 복숭아향이 퍼져나가자 브래들리는 입술을 떼어냈음.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제이크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강하게 빨아들였음. 들숨과 함께 폐부 깊숙히 채워지는 복숭아향에 그제야 갈증이 좀 가시는 것 같아 브래들리의 입꼬리가 올라갔음. 멱살이 풀리고 잡아당겨져 자연스레 벌어진 제이크의 앞섬 속으로 브래들리의 손이 들어가 가슴을 지분거렸음. 어느새 꼿꼿해져 비단 위로 도드라진 제이크의 유두를 브래들리는 손끝으로 쓸고 굴렸음. 비음이 섞인 소리가 제이크의 날숨사이로 새어나왔음. 제이크의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브래들리는 알파의 소유욕을 충족시키려 본능대로 제이크의 목덜미를 콱 깨물었음. 그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들어 제이크의 탄탄한 둔부를 쥐었음. 본딩오메가에게 자신의 것이라는 표식을 남겨 러트로 인한 정신적 욕구불만이 아주 잠깐 해소됨과 동시에 왼손을 타고 올라오는 살과 신경을 찢는 통증에 브래들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음.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란 브래들리가 제이크에게서 떨어졌음. 갑작스럽게 브래들리가 저에게서 떨어져 나가자 제이크는 굳어서 그대로 브래들리를 쳐다봤음. 어느덧 침전 문앞에는 둘 밖에 남아있지 않았음. 브래들리의 눈앞에 제이크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음. 흐트러진 앞섬과 페로몬에 영향을 받아 발긋해진 귓가와 눈가 그리고 제가 만들어낸 목덜미의 열꽃까지. 본딩맺은 오메가가 눈앞에서 달큰한 복숭아향을 풍겨대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달려들고 만 것이었음. 쾅쾅 질주하는 심장소리가 제 고막을 때려대고 행맨의 향에 피가 빠르게 돌아 어지러울 지경이 된 브래들리는 소용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제 입과 코를 막았음.

폐하..?
네가 왜 여기.. 아냐, 명령이다. 지금 당장 여길 나가.

브래들리의 동공이 원래대로 돌아와있었음. 그러니까 입맞추고 달려들었던건 러트로 인해 정신을 놓았을 뿐이었고 제정신인 지금은 축객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었음. 제정신에는 널 안고싶지 않다 거부하는 브래들리를 보며 제이크가 말했음.

제가 그리 싫으십니까.
..뭐?

브래들리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똑바로 제이크의 얼굴을 마주봤음.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오만한 행맨이었는데 지금은 톡 건들면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 같은 모래성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음. 그제야 브래들리는 제가 제이크에게 얼마나 큰 모욕을 주었는지 깨달았음.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제이크의 입장에서는 대놓고 치욕을 안겨 준 것이었음. 브래들리는 심장이 철렁하고 발끝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음.

본딩을 맺은 알파는 의지로 러트를 홀로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알았는데..
...
이렇게까지 하실 정도로 저를 안는 것이 고역이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제이크는 차마 브래들리는 계속 보고있을 수 없어 시선을 떨궜음. 발가벗겨진 수모를 당한 듯 수치심이 일었음.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 이렇게 수치스러운 와중에도 페로몬에 반응해 하체는 축축하게 속곳을 적시고 있었음. 젖어들기 시작하는 하체에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음. 제이크가 몸을 돌리자 브래들리가 제이크의 어깨를 다급히 꽉 붙들었음.

행맨, 아니야!

움찔 손의 통증으로 브래들리의 콧잔등이 찌푸려지고 왼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음. 제이크의 왼쪽 어깨가 브래들리의 피로 젖어들어가기 시작했음. 가라더니 왜 붙들어. 나보고 어쩌라는거야. 제이크는 브래들리를 노려봤음. 브래들리는 저를 향한 분노와 원망, 질책이 가득한 생기넘치는 초록빛을 오롯이 눈에 담았음. 결코 잃을 수 없는 지켜야 하는 그의 눈빛을.

뭐가요? 폐하께서 자의로 절 안은게 아니라는 사실은 폐하도 저도 압니다. 제가 빌어먹을 폐하의 탑건 가면을 내밀며 요구한 약조때문이지요.
귀비, 난- 
러트에 문까지 단단히 걸어잠그고 방금전에도 제게 축객령도 내리셨습니다. 도대체 뭐가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 절 안으시는 것이 이렇게 혼자 러트를 보내실 정도로 끔찍한 것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씀이십니까!
행맨!
.....첫사랑 때문에 그러십니까?

제이크의 말을 들은 브래들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음. 제이크는 뜨거워지는 눈가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음. 상황이 정말 개같이 꼬이고 있었음. 내가 어떡해야 해. 과거의 나때문에 현재의 날 밀어내는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제이라 밝힌들 이렇게 끔직해하는데 네가 믿기나 하겠어? 씨발 빌어먹을 러트. 그때나 지금이나.. 좆같아. 제이크는 제 어깨를 잡은 브래들리의 손을 쳐냈음. 그리고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만지며 말했음.

그놈의 첫사랑 찾기놀이는 아직도 진행중인 모양입니다.

제이크의 비아냥거림에 브래들리의 눈빛이 싸늘해졌음.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그러나 제이크는 멈추지 않았음.

차라리 저와의 본딩을 끊으시지요. 그리고 그 첫사랑 닮은 다른 오메가를 들여 러트를 해결하시면 되겠네요. 본딩 안 맺는다고 애가 안 생기는 것도 아니니 약조를 어기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 참 그 첫사랑 얼굴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셨나요?
내 앞에서 위악 떨지마!

브래들리가 제이크를 문으로 밀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음. 위협적인 페로몬이 순간적으로 폭팔하듯 뿜어져 나왔음. 제이크의 피부가 따끔거리고 손발이 저릿해져오는 와중에도 제이크는 브래들리의 눈을 피하지 않았음. 얼마전 연회장에서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던 것처럼 지금도 변함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눈빛과 말들을 내뱉고 있었음. 왜 너와는 항상 이렇게 어그러질까.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상처주고. 탑건에서도 황궁에서 만난 이후로도 줄곧 지금까지.. 언제나. 하지만 내겐 마음 한톨없는 너는 다른 오메가와 러트를 보내라고 하는구나.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걸까.

행맨, 넌… 아무것도 몰라.

브래들리는 핏발이 선 눈으로 제이크를 노려보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르렁거리듯 말했음.

내가 어떤 심정으로 참고있는지. 내가 지금, 널,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지 넌 아무것도 모른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브래들리는 머릿속에서 행맨을 범하고 또 범하고 있다는 것을 제이크는 알지 못했음. 형형한 행맨의 눈빛이 애처로운 눈물로 얼룩지고 애원하고 비명을 질러댈수록 루스터는 희열을 느끼며 행맨을 탐했음. 울어도 빌어도 피흘려도 아무 소용없어. 널 남김없이 먹어치울거야. 네 안을 나로 가득 채울거야. 네 마지막 물 한방울까지도 남김없이 바닥까지 전부 다. 널 내 안에 채울거야. 내 오메가. 내 오메가. 내 오메가.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었음.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었음. 그러고 싶지 않았음. 제이크는 브래들리의 번뇌에 찬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음.
 
아무것도 모르는건 너야. ...루스터.

내가 모르긴 왜 몰라. 그날 너와 함께 있었는데. 안된다는 날 범하며 웃던 널 어떻게 몰라. 그건 네가 아니었다는거, 본능에 완전히 점령당해 내가 알던 브래들리는 없었다는 걸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도대체 횟대에서 언제 내려오실겁니까. 평생 그러고 계실건가요? 전 폐하의 비입니다. 폐하께서 러트 중에도 홀로 참으실 연유가 대체 뭐란 말씀이십니까!

브래들리는 왼손으로 제이크 옆의 문을 내리쳤음.

내가! 제이를 죽였어.

왼손에서 터져나온 피가 브래들리의 왼쪽 눈동자에 고였음.

늘 잡고 다니던 그 손을 가벼이 뿌리치고 범했다고, 내가.

브래들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음. 그 눈물의 빛깔은 피처럼 붉은 색이었음. 피눈물을 흘리는 브래들리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제이크는 그대로 얼어버릴 수 밖에 없었음. 동굴에서의 일을 브래들리가 기억해내고야 말아버렸음.

안된다는 걸 페로몬으로 억지로 열뜨게 만들어 짐승처럼 게걸스럽고 탐욕스럽게 내 욕정 하나 풀기 바빴다고. 근데 제일 역겨운 게 뭔지 알아? 좋았다는 거야. 태어나서 경험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감각 새로운 열락이었지. 그게 난..진절머리치게 끔찍해. 할 수만 있다면 내 손으로 그순간의 날 죽여버리고 싶을정도로. 그날 죽었어야 하는건 그애가 아니라 바로 나였어.

브래들리는 말 그대로 피를 철철 흘리며 스스로를 벌하고 있는 것이었음. 브래들리는 제 손을 문에서 떼어내고 제 몸을 제이크에게서 물렸음.

미련스럽다해도 어쩔 수 없어. 널 그런식으로,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난 그저.. 너에게도 같은 과오를 저지르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러니까 행맨.. 가, 제발.

문앞에서는 브래들리가 원망스럽고 미웠었음. 자신을 찾지 않는 것도. 러트를 알리지 않은 것도. 혼자서 감내하는 미련한 고집까지 모두 다. 그런데 눈앞에서 직접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음. 나만큼 너도 아프길 바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음. 하지만 이런걸 바란게 아니었는데.. 우린 왜 아직도 그 동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걸까.

태자를 주겠다는 약조는 반드시 지킬것이다. 다만 오늘은 아니야. 그러니 귀비 그대는 후궁전으로 돌아가도록 해.

브래들리는 비틀거리며 제이크에게서 등을 돌렸음. 제이크는 제 옷깃을 꾹 쥐었다가 놓았음. 목걸이가 자리했던 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쇄골뼈만 자리할 뿐이었음. 아프기만 했던것은 아닌데 좋았던 기억도 많은데. 결국은 너에게 스스로를 혐오스럽게 여길 정도로 아픈 과거라면 역시 버리는 것이, 묻어두는 것이 맞아. 그렇지, 루스터? 제이크는 상처받은 짐승같은 브래들리의 너른 등을 바라봤음.

폐하, 제가 누구입니까.

제이크의 목소리에 브래들리의 걸음이 멈추었음. 제이크는 문에서 등을 떼어내고 브래들리에게 한 걸음 다가갔음.

폐하를 구한 게 누구입니까.

그날 벼랑 끝에서 적군의 손에서 폐하를 구한 자가 누구입니까.

브래들리는 지금 이게 대체 뭐하자는건지 알 수 없었음. 또 무슨 말로 나를 들쑤시려 그러는가 고통스러움에 제 손에 얼굴을 묻었음.

행맨…. 행맨, 너야.

제이크는 브래들리의 팔을 잡아 조심스러운 손길로 브래들리를 제쪽으로 돌렸음. 그리고는 얼굴을 가린 브래들리의 손을 잡아 내렸음.

그래, 나 행맨이야. 그런데 지금 대체 누가 누굴 해칠까 두려워하고 있는거야?

브래들리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신음하며 제이크를 바라봤음. 제이크는 브래들리에게로 가까이 다가갔음.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며 코끝이 살짝 맞닿았음.

약조할게. 난 네 손에 절대 죽지 않을거야. 네가 날 해치려 든다면 행맨답게 네 목을 따주지. 어때, 무섭지?

브래들리는 감히 황제의 목을 따겠다 잘도 반역스럽고 발칙한 소리를 내뱉는 제 후궁의 말에 응어리져있던 두려움이 맥이 풀리듯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음. 브래들리는 이것이 행맨식 위로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 그렇게 애틋해하던 첫사랑을 제 손으로 죽였다는 말에 행맨은 그럼 난 강하니 네 손에 나는 죽지 않아주마라고 약조하며 먼저 제게 다가와주었음. 제이크는 입술끝을 살짝 브래들리에게 대며 속삭였음.

그러니까 루스터, 두려워 말고 나를 안아.

아, 이런 너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적군의 목을 베어내는 행맨의 강함이 사랑스러워 심장이 저릿해져왔음. 넌 또다시 나를 구원해내는구나. 행맨, 거부할 수 없는 금빛, 나의 구원자. 브래들리는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그대로 제이크를 껴안고 입을 맞췄음.

‘괜찮아 브래들리. 네 잘못이 아니야’

제이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스치듯 귓가를 훑고 지나갔음. 브래들리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긴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음.






루스터행맨 루행 텔러파월

1.현재 5월이고 풍년기원제는 봄에 함. 앞서 소년 루스터가 제이의 평안을 바라며 풍등을 날리고 제이미를 처음 만나게 된 건 여름축제로 풍년기원제가 아님.
2.본딩을 맺으면 본딩알파와 본딩오메가 서로에게만 러트와 히트를 해소할 수 있음. 제이크가 본딩 끊으라 했지만 홧김에 한 소리고 본딩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끊어짐. 본딩 안 맺으면 일반적으로 알파,오메가 서로 상대만 있으면 러트나 히트 해소가능. 루스터가 본딩맺은 이유는 행맨 좋아해서 짝사랑중인 줄 알고 소유욕+본딩맺으면 임신확률이 엄청 뛰기 때문.

혐생사느라 늦었조..크리스마스 전에 오려고 했는데 개같이 실패하고 새해전에는 꼭 오려고 하다보니 좆노잼에 뇌절파티네. 미안하다! ˚‧º·(˚ ˃̣̣̥᷄⌓˂̣̣̥᷅ )‧º·˚ 러트 하나 가지고 이 무슨 난리법석인지.. 분명 머릿속에선 재밌었는데 흑흑 이게 고자손의 한계다.(;´༎ຶٹ༎ຶ`) 설정충뇌절파티노잼글 잊지 않고 봐주고 댓글 달아주고 기다려줘서 고맙다. 다음껀 빨리올게 완결 보고싶으니까 늦어도 꼭 올게! 새해 복 많이 받아 (◍ᐡ₃ᐡ◍)💕
2024.01.08 03:0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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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롤이 긴데도 아쉽다 나는ㅠㅠㅠ 팔만대장경길이였음 좋겠어ㅠㅠㅠㅠ 센세 항상 사랑해
[Code: 8b2c]
2024.01.18 22:22
ㅇㅇ
모바일
강한 행맨에게서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루스터ㅠㅠㅠㅠ 둘이 영사해라
[Code: 24de]
2024.01.23 16:5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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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억 내 센세가 13편을 주셨으니 다시 읽으러 왓읍니자
[Code: c7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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