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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9 23:14




 

03. 백야

 

 

 

 

 

To Maverick.

 

 

 

Hi, my jerk ass. 네가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길 바라지만, 인생이란 게 종종 뜻대로 안 풀릴 때가 있잖아? 너도 분명 내게 쓰고 있을 테고. 그러니 주고받은 거라고 치자.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굳이 말해줄 필요 없어. 아마 그때쯤이면 나도 유령이 돼서 알고 있을 테니까. 아마, 분명히 존나 개쩌는 죽음이었겠지. 동료를 구한다거나, 아니면 망할 러시아 놈들에게 한 방 먹인 후라거나. 어쨌든, 중요한건 그게 아니지. 물론 나한텐 자존심의 문제지만.

 

혹시나, 만약에, 아주 좇같은 경우로 내가 죽을 경우, 물론 내가 굳이 이렇게 부탁할 필요도 없이 너는 분명 이미 내 가족들을 돌봐줄 거지만. 캐롤과 브래들리를, 내 가족을 부탁할게. 그들이 너무 많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가족이 되어줘. I Know. 내가 굳이 부탁할 필요도 없다는 거. 이미 넌 우리 브래드쇼 가족의 일원이야. Fuck! 내가 대체 뭔 소릴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Well, 난 죽을 생각도 없는데 이 유언장을 쓰는 것부터가 큰 실수인지도 모르지. 어쨌든 프로토콜이 이렇다니 따라야 하지만.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알아? 오만상을 다 쓰며 유언장을 끼적이는 널 보고 있어. 맙소사, 매버릭! 유언장을 컨닝하는 인간은 온 세상 통틀어 너밖에 없을 거다! 불쌍한 아이스맨..

 

쓰다 보니 이거 일기나 다름없잖아? 아니면 메모거나. Fuck! 항상 이렇다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파일럿이지 소설가는 아니잖아? 우리에게 펜을 들어 작문을 하라고 시킨 게 잘못이라니까. 차라리 녹음을 시키던가!

 

anyway, brother. 네가 전투기를 탈 때 얼마나 신나는지는 아는데. 너도 알지? 너에게도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거. 우리 브래드쇼가, 네가 돌아갈 곳이라는 거 말이야.

 

그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캐롤과 브래들리에게 내가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줘. 저 위에서 언제나 지켜보고 있겠다고.

 

 

 

From Goose.

 

 

 

뻣뻣한 종이에 얼굴을 묻으며 매버릭은 조용히 흐느꼈다. 창문 밖으로 한낮의 태양이 온 세상을 새하얗게 내리쬐고 있었다.7월의 어느 날이었다.

 

 

 

 

 

-

 

 

 

 

 

그는 추위가 싫었다. 건조하고 메마른 계절은 모든 생을 무위로 만들어 놓는다. 앙상한 나뭇가지, 얼어붙은 호수, 생명이 꺾인 대지 위로 새하얀 눈만이 베일처럼 그 모든 것을 덮었다. 온통 백색으로 물든 세상은 어둠에 물든 세상과 다를 바 없었다. 춥고, 적막했다.

 

 

 

그래, 마치 죽음처럼.

내가 죽은 걸까.

 

 

 

정신이 들자 떠오른 생각이 의문이었던 건 그래서였다. 손끝에 와 닿는 눈의 감촉이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다. 매끈한 땅 표면을 긁으며 그는 땅바닥에 뺨을 대곤 잠시간 누워 있었다.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모호한 경계의 시간이었다.

 

 

 

입을 벌려 한숨을 내쉬자 새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퍼져가는 흰 줄기를 보자 그제야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짧은 깨달음 후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웠다. 어그러진 시야 사이로 백색의 세상이 펼쳐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근처엔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짧게 안도의 한숨을 쉰 매버릭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세우며 인근의 숲을 향해 걸었다. 한 걸음 떼어낼 때마다 발목에 묵직하게 달라붙는 눈 더미들이 늪처럼 그의 걸음을 삼켰다.

 

 

 

모두 무사히 돌아갔을까?

 

 

 

물꼬를 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온갖 잡념들이 텅 빈 머리를 차곡차곡 채워 넣는다. 루스터는 무사할까.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돌아갈 수 있긴 할까?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거지? 루스터는. 브래들리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콜록, .”

 

 

 

시야가 어지럽고 머릿속이 깨질 것처럼 아파온다. , 역시. 고도가 너무 낮았다. 떨어질 때 머리를 부딪친 걸까? 매버릭은 새하얀 눈밭에 힘없이 무릎을 꿇곤 숨이 끊어질 것처럼 기침을 토해냈다. 가까스로 기침이 멎었을 땐, 귓가에 블랙호크의 매서운 프로펠러 회전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지친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든 일이다. 이번에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어떤 직감과도 같은 예감을 느꼈었다. 그 치곤 퍽 비관적인 생각이었지만 덕분에 그를 아껴주는 몇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는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미련은 없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는데..

 

 

 

, 할 말이 있어요.’

 

 

 

매버릭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우고 뒷덜미를 잡아챌 정도로 가까워진 블랙호크를 피해 앞으로 뛰었다. 눈앞에 쓰러진 나무가 보였다.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그 나무 뒤로 몸을 던지듯 숨겼다. 폐가 찢기듯 고통스러웠다.

 

 

 

살고 싶다. 그 어느 때보다 생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피어올랐다. 매버릭은 이를 악물고 어느새 그의 앞까지 쫓아온 블랙호크를 노려보았다. 성인 몸통보다 큰 기관총이 매버릭을 향했다. 꼴사납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에게는 들어야하는 말이 있었다.

 

 

 

그가 막아버리고 외면해버리고 도망쳐버린, 그래서 세상 밖으론 나오지 못한 채 그 아이의 가슴 속에서 새까맣게 타오르던. 그 꺼지지 않는 화염 같은 감정을 마주해야 했다. 더는 도망치지도 말고, 막아버리지도 말고, 외면하지 않은 채, 그 애의 두 눈을 마주보며 그 또한 답해야 했다.

 

 

 

그러니 매버릭은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브래들리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

 

 

 

 

 

엊그제부터 먹구름을 잔뜩 머금은 하늘이 기어이 빗줄기를 한 두 방울씩 쏟아내기 시작했다. 흙바닥을 두드리는 빗방울들의 단조로운 소리가 엄숙한 장례식의 말미를 장식했다. 매버릭은 모여든 사람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방금 흙바닥에 묻힌 오랜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아마 그녀는, 지금쯤 저 하늘 위에서 그녀가 평생토록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구스와 재회했을 터다. 그녀의 마지막 유언대로 그렇게 생각하며 너무 많이 슬퍼하진 않기로 했다.

 

 

장례식이 파하고 검은 장우산을 쓴 사람들이 하나둘씩 비석을 떠나기 시작했다. 끝내 한 사람만이 남았다. 멀리 있어도, 우산으로 상체 대부분이 가려졌어도 매버릭은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

 

 

 

브래들리다.

 

 

 

자각과 동시에 심장은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4년만의 만남이었다. 도망치기로 결심한 이후, 그는 자신의 격납고를 정리했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가장 길고 먼 장소로 파병을 갔고, 돌아온 이후에는 브래들리가 사는 지역은 스치듯 지나가지 조차 않았다. 일방적으로 끊긴 연락에 브래들리가 많이 힘들어하고 걱정한다는 소식을 캐롤을 통해 들었지만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토록 비겁하고 나약한 어른이었다, 자신은.

 

 

 

브래들리는 십여분간 조용히 서 있더니 이내 몸을 돌려 떠났다. 담벼락 너머,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매버릭은 브래들리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쯤 캐롤의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빗방울이 튀는 비석은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치 그녀의 웃음처럼 새하얗다.

 

 

 

캐롤..’

 

 

 

그녀는 오래 버텼다. 그녀도, 자신도 놀랄 만큼. 하지만 병마는 끈덕지게 캐롤의 뒷켠에 자리 잡고선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수척한 얼굴과 푹 페인 뺨, 생기라고는 돌지 않는 얼굴로 고요히 웃던 그녀가 매버릭의 손을 다독이며 웃는 게 그가 기억하는 캐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울지 말자고, 슬퍼하지 말자고 되뇌어 봤지만 끝내 떨어지는 슬픔의 조각들은 발치 아래로 무심히 흘러내렸다.

 

 

 

어떻게 많이 슬퍼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구스를 놓지 못한 매버릭에게 그녀의 유언은 지킬 수 없는 약속과도 같았다. 하얗게 부서지는 햇볕 아래, 교정을 거닐며 함께 웃고 떠들던 모든 나날을 기억하는데. 그 눈부신 여름날의 기억이 아직도 이토록 생생한데.

 

 

 

매브.’

 

 

 

매버릭은 허탈하게 웃었다. 브래들리는 고집이 셌다. 기어코 원하는 걸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도 했다. 등 뒤로 성큼 다가온 뜨거운 체온이 매버릭의 팔을 붙잡고 돌려 세웠다. 우산을 쓰지 않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은 그를 내려다보는 브래들리의 시선이 제법 사납다. 그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매버릭은 웃었다. 웃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그 애를 붙잡고 울 것만 같아서.

 

 

 

우리, 이야기 좀 해요.’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그새 굵어진 빗방울들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온몸을 적셨다.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몸의 떨림도, 소란스럽게 요동치는 마음도 모두 이 빗소리에 묻을 수 있을 테니. 팔을 잡은 손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일견 절박해 보이는 그 손길에 이끌려 매버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모든 것을 매듭지을 순간이었다.

 

 

 

 

 

-

 

 

 

 

 

이후의 기억은 흐릿하다. 해사 입학 반려 건으로 인해 브래들리는 화를 냈고, 자신은.. 이 관계에 기어이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다신 보지 말자고 했던가, 찾아오지 말라고 했던가. 모든 게 물에 탄 듯 흐려진 가운데 뚜렷이 기억나는 건 오직 그 눈동자. 상처받은 브래들리의 눈동자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

 

 

 

방 안은 불을 켜지 않았음에도 바깥의 가로등에 의해 희뿌옇게나마 식별이 가능했다. 매버릭은 자신의 침대 앞에 주저앉은 채 양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어린 브래들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양 뺨이 사랑스럽게 물든 그 아이는 오묘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캐롤의 장례식 이후, 매버릭은 지상에 있을 때마다 자신을 반겨주는 어린 브래들리의 환영을 봤다. 대체로 그 아인 기억속의 그 모습처럼 매버릭을 졸졸 쫓아다니며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하곤 했지만, 때론 그가 외면해버린 브래들리의 속마음을 하나둘씩 꺼내보이곤 했다.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되잖아.’

‘....’

난 가끔 당신이 보고 싶어서 이 곳에 찾아오곤 하는데..’

‘....’

알고 있잖아? 그 익숙한 발걸음 소리를 꿈에서라도 잊은 적 없을 테니까.’

‘...그만해.’

 

 

 

브래들리가 없는 삶을 버티기가 너무 힘들었다. 매일 밤을 꼬박 새웠고, 작은 기척에도 혹시나 그 아이일까,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일쑤였다. 퀭한 눈과 창백한 얼굴에 아이스맨의 손길에 이끌려 병원으로 끌려가 검사를 받기도 여러 번, 결국 장기 휴가를 억지로 받아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려니 더 숨이 막혔다. 어디에 눈을 둬도 그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4년 동안은 그나마 괜찮은 척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다시는. 다시는 못 본다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심장이 뜯길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는 아이의 목소리를 감당하기가 힘들어 매버릭은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이를 악물며 버텨보았지만 무릎에 떨어지는 눈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외로움과 그리움은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잠식되어 잊을라치면 불쑥 솟아올라 그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브래들리에게 뛰어가 그 발치에 매달리며 애원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다신 안 그럴 테니까 얼굴만이라도 보고 살면 안 되겠냐고.

 

 

 

하지만 그래선 안 되었기에.

 

 

 

당신은 정말 바보야.’

 

 

 

매버릭은 엉망이 된 얼굴을 두 손으로 흩어 내리며 지친 얼굴을 들었다. 어느 새 어린 브래들리의 환영은 사라진 후였다. 텅 빈 허공만이 밤의 어둠에 묻혀 그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매버릭은 눈을 깜빡여 눈물을 털어낸 뒤,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브래들리가 없는 삶은 고통스러웠다. 그 외의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못할 만큼.

 

 

 

숨이, 막혔다.

 

 

 

 

 

-

 

 

 

 

 

하늘은 그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브래들리와 같은 하늘 아래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전투기에 타서 하늘을 나는 것만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매버릭은 점점 더 과감해졌다. 더 공격적이게 되었고, 위험한 작전에 망설임 없이 지원하기도 했다. 더 오랜 시간 하늘 위를 날기 위해 진급마저 거부했다. 하늘마저 잃으면 정말로 어느 순간 제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을 것 같았기에. 위태로운 그의 상태를 알아차린 아이스맨은 매버릭의 진급거부와 여러 사건사고들을 눈 감아 주었다.

 

 

 

오랜 시간 하늘을 날다가 지상에 내려설 때면 때때로 낯선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곳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귀신같이 어린 브래들리가 그의 발치 아래 매달려 칭얼거렸다. 이곳에 있으라고. 이곳이 당신이 존재할 곳이라고 말하는 듯이.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던가. 매버릭은 점점 브래들리가 없는 삶에 익숙해져 갔다. 종종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고, 아이스맨의 초대에 응해 그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때론 상관에게 된통 깨지기도 했다. 뒤틀린 삶의 궤도가 점점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브래들리의 환영과 환청을 보는 일이 줄어들다가 끝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걸 깨달은 날에는 명치끝이 죄이듯 아파왔지만 환영은 다신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그는 괜찮을 거라는 걸 알았는지.

 

 

 

그래. 이젠 괜찮다. 괜찮을 거다.

 

매버릭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세뇌하듯 그 문장을 되뇌었다.

 

이젠, 괜찮을 거라고.

 

 

 

 

 

-

 

 

 

 

 

하지만 10년 만에 화면속의 너의 모습을 본 순간, 깨달았다.

 

지난 10년간 자신은 결코 괜찮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단 한순간도, 제대로 숨을 쉬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

 

 

 

 

 

하드덱에서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너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우습게도 분노였다. 너무나 평범한 그 모습이, 그 표정과 웃음들이 화가 났다. 자신이 없어도 보란 듯이 삶을 영위하는 그 애가,

 

 

 

내가 모르는 너의 시간이, 너의 모습이, 너의 성장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

 

 

 

 

 

피아노를 치며 웃는 브래들리의 모습은 그 옛날의 구스와 쏙 빼닮아 있었다. 매버릭은 하드덱의 창문 너머 동료들과 웃으며 노래 부르는 그의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종종 상상해본 적은 있었다. 다신 볼 생각도 없었으면서, 혹여나 어떤 일로 인해 재회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모습일지. 어떻게 대화할지. 수천 번 곱씹어 너덜거리는 재회의 장면은 언제나 그의 사과로 끝났다. 매버릭에게 있어 브래들리는 언제나 죄책감을 형상화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드는 감정은 미안함과 책임감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은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매버릭은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며 브래들리를 바라보았다. 저 앤 알고 있을까? 자신이 탑건에 발령된 교관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는 걸까.

 

 

 

오히려 잘된 일인걸 수도 있다. 브래들리가 더는 자신에게 어떠한 감정을 못 느낀다는 건, 그들 사이가 아주 오래전, 갈등이 없었던 때로 회복될 일말의 가능성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분명 그럴 텐데. 아주 잘된 일일 텐데. 매버릭은 손바닥을 파고드는 아릿함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꽉 움켜쥔 주먹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차마 막을 새도 없이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아놓은 원망과 그리움이 해일처럼 그를 덮쳤다.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자각은 한순간이었다. 매버릭은 두 눈을 크게 뜨며 허탈한 얼굴로 힘없이 몸을 돌렸다. 등 뒤로 하드덱의 소란스러움이 밀려왔다. 그 소음을 원동력 삼아 겨우 걸음을 내딛었다. 떨리는 눈동자가 밤하늘을 정처 없이 헤맸다.

 

 

 

내가,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10년이나 늦은, 바보 같은 깨달음이었다.

 

 

 

 

 

-

 

 

 

 

 

숱한 여자들을 만났다. 짧은 시간 만난 여자들도 있었고, 꽤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여자들도 있었다. 매버릭은 그녀들을 만날 때 언제나 최선을 다했지만, 유감스럽게도 함께할 시간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현저히 적은, 군인이라는 직업은 애인을 만들기에 적합한 직업군은 아니었다. 물론 예외야 존재하지만 그 예외에 자신은 포함되지 않는지, 꽤 여러 번 차이기도 했다.

 

 

 

성의의 문제야. 아님 감정의 문제일지도 모르고.’

그게 뭔 소리야? 내가 제시한테 얼마나 진심을 다했는데!’

 

 

 

4번째로 여자친구에게 뻥 차이던 날, 하소연하는 그에게 구스는 냉정하게 문제를 진단했다. 매버릭이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관물대의 문을 닫자, 진작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관물대에 몸을 기댄 구스가 팔짱을 낀 채로 매버릭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넌 사랑을 몰라.’

무슨 헛소리야?’

 

 

 

지금 저게 방금 실연한 친구에게 할 법한 말인가. 매버릭이 인상을 찌푸리며 옆을 돌아보자 구스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거 같다. 내 모든 걸 버려서라도 이 사람 곁에 있고 싶다, 뭐 그런 마음 드는 사람 있었어?’

뭔 개소리야..’

아니면, 이 사람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다, 이 사람이 없는 삶을 살아갈 바에야 죽고 싶다. 뭐 이런 마음 드는 사람이라도?’

드라마 좀 그만 봐, 구스. 그런 사랑이 어딨어?’

여기 있지. 나랑 캐롤을 봐.’

 

 

 

아주 염병도 이런 염병이 없었다. 매버릭은 짜게 식은 눈으로 구스를 위아래로 흩어보다가 몸을 돌려 탈의실을 빠져나갔다. 구스가 실실 쪼개며 매버릭의 한쪽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며 발걸음을 맞췄다.

 

 

 

어어, 삐지지 마.’

‘...이번엔 진심이었거든?’

 

 

 

매버릭이 입을 삐죽 내밀며 한껏 투정 어린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기념일도 꼬박꼬박 챙기고, 자잘한 선물도 꾸준히 해줬다.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꽝. 아무리 긍정적인 매버릭이라도 다소 기가 죽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이번엔 심지어 1주년 기념 선물도 까먹지 않고 준비했었단 말야!’

그러니까, 그게 문제야. 넌 모든 연애에 언제나 의무감만으로 임해. 의무감, 혹은 책임감.’

그게 어때서? 네가 이상한 거지 원래 모든 연애는 감정이 점점 식기 마련이거든? 권태기라는 말이 괜히 있는 줄 아냐?’

 

 

 

얄밉게 입을 나불거리는 구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으면서 매버릭이 툴툴댔다. 구스가 아픈 척 하며 제 옆구리를 잡는 동안 매버릭은 잰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속상한 마음에 더 격하게 반응한 것도 있는 것 같아, 속된 말로 좀 쪽팔리기도 했다.

 

 

 

, 같이 가!’

 

 

 

그래봐야 구스의 한마디에 덜컥, 멈출 걸음이었지만. 어느새 매버릭의 뒤까지 쫓아온 구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너무 낙담하지 마. 언젠간 그런 사랑이 너에게도 찾아올지 모르잖아.’

 

 

 

여전히 속 뒤집어지는 말만 하는 친구를 뒤로 두고, 매버릭은 다시 빠르게 바깥으로 향했다. 구스가 죽기 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

 

 

 

 

 

어떡하지, 구스. 네 말이 맞았나봐.

 

그런 사랑이, 정말 있었나봐.

 

 

 

 

 

-

 

 

 

 

 

브래들리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깨달았어도 바뀌는 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첫 수업이 끝난 날 브래들리를 뒤쫓아 무작정 그 앨 불러 세웠지만, 멈춰선 그 애 앞에서 바보같이 굳어있었기만 할 뿐, 무엇하나 해결되는 건 없었다.

 

 

 

그래도 조금쯤은 반겨줄 거라고, 그런 헛된 기대를 품었나 보다. 이전이라면 바보같이 말을 잇는 그의 모습에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했을 아이는, 10년이란 세월이 절실하게 느껴질 만큼 단단한 어른의 눈을 한 채 자신에게 선을 그었다.

 

 

 

그 선이, 경계가. 뾰족하게 튀어 오른 덫처럼 매버릭의 혀끝을 묶었다. 10년이다. 브래들리의 마음이 변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긴 세월이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그 간격을 뛰어넘어 아이에게 다가가기엔 매버릭 또한 막 자각한 자신의 감정이 벅찼다. 힘들고 무서웠다. 비수처럼 꽂히는 아이의 말에 눈시울을 붉힌 건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새로이 관계를 정립할 수도,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매몰차게 등을 돌리는 브래들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매버릭은 익숙한 체념을 느꼈다.

 

 

 

그들 사이에 남은 건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

 

 

 

 

 

사랑에 매몰된 이의 마지막을 알아서일까. 매버릭은 언제나 연인과의 관계가 어려웠다. 사랑을 속삭이되 너무 깊이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었고. 이를 기민하게 눈치 챈 이들은 모두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막연한 두려움에 눈이 멀어 끝내 외면했기에. 어쩌면 그래서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실이 두려웠고, 너무 깊이 사랑해버려 그 사람을 잃으면 자신 또한 통제되지 않는 감정 속에 홀로 남겨질까 무서웠다. 숱한 이별 끝에 반쯤은 포기해 버린 것도 있었다. 아마 자신은 구스와 같은 사랑을 하지 못할 거라는, 섣부른 체념이었다.

 

 

 

자신도 어머니처럼 될까봐.

자신도 아버지처럼 멋대로 죽어 버릴까봐.

 

 

 

그래서 몰랐었다. 죽음만이 이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

 

 

 

 

 

복잡한 마음을 애써 누른 채 매버릭은 자신이 현재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됐든, 당장 급한 건 브래들리와 아이들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매버릭은 개인적인 감정은 모두 내려놓고 한결 냉정하게 그들을 관찰했다. 비행 습관, 판단력, 조종 실력, 결단력, 팀워크 등등.. 모두 종합적으로 확인 후 그들 중 임무에 투입될 인원을 골라야 했다. 아이들의 사진을 펼쳐놓은 책상을 내려다보며 매버릭은 착잡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차라리 내가 갈 수 있으면 좋으려만.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피로한 눈으로 사진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이번 작전을 짠 건 자신이지만, 그들 중 과연 몇이나 돌아올 수 있을지.. 만약 하늘 위에서 적기를 마주한다면 전원 무사귀환은 꿈의 일이 될 것이다.

 

 

 

“....”

 

 

 

그 중 브래들리가 있다면? 매버릭은 가정만으로도 막막한 두려움에 휩싸여 손끝을 잘게 떨었다. 일에 집중해야하는 순간마다 불쑥 모난 돌처럼 튀어나오는 그 아이의 모습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캐롤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럼에도 함께 하늘을 날 때 느꼈던 그 해방감과 황홀함. 온갖 감정이 뒤섞여 그 앨 어떻게 대해야하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매버릭은 수그렸던 허리를 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창문 너머로 새까만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그 막연한 어둠이 자신의 미래처럼 그려져 매버릭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감당하기 힘들었다. 현재의 상황도, 자신의 감정도.

 

 

 

 

 

-

 

 

 

 

 

시일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지는 마음은 아무리 억눌러도 억눌러지지 않았다. 매버릭은 냉정을 가장하며 그들을 몰아붙였다. 평소 그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입이 바싹 마르고 신경은 예민해졌다.

 

 

 

그들은 힘든 훈련을 어떻게든 따라왔지만 여전히 매버릭이 세운 기준에는 한참 미달이었다. 그 날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매버릭이 정한 시간 내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지상으로 내려섰다. 아직 갈 길이 멀었는데 벌써부터 나가떨어지는 그 모습에 매버릭 또한 거진 이성을 잃었다. 필요 이상으로 날카롭게 말이 나간 건 아마 그래서일 터다.

 

 

 

10년 전의 그날처럼, 상처받아 요동치는 그 눈동자를 마주하고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걸 어떤 심정으로 브래들리가 받아들였는지, 그제서야 깨달았다. 스스로의 말에 놀라 얼음처럼 굳어버린 몸이 때마침 브래들리에게 시비를 거는 행맨으로 인해 가까스로 움직였다.

 

 

 

항상 이렇다. 언제나 실수하고 상처 주는 건 자신이었다. 일련의 소동이 끝나고 바깥으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브래들리의 뒤를 쫓은 건 그래서였다. 그 앤,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더는 상처받아선 안 되었다. 그렇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 사이가 더는 예전 같을 순 없어도, 적어도 일적으로 얽힌 관계마저 망칠 순 없었다.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더는 홀로 꽁꽁 담아두지 말고, 왜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10년 전에 왜 무작정 떠나야만 했는지. 말하고, 사과를 할 생각이었다. 전부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기적처럼 이전의 관계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적어도 조금은. 조금쯤은.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 희망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서.

 

 

 

루스터!”

 

 

 

뛰듯이 쫓아감에도 도저히 간격이 좁혀지지 않아, 매버릭은 큰 소리로 브래들리를 불렀다. 그토록 화가 났는데도 매버릭의 부름에 응한 브래들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금방이라도 그를 뒤에 두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것만 같아 매버릭의 목소리가 절로 절실해졌다.

 

 

 

잠깐만! 잠깐 이야기 좀,”

씨발! 제발 그만 좀!”

 

 

 

성큼 다가가던 매버릭의 다리가 일순 굳는다. 매버릭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 마치 그 옛날의 아이처럼 절박한 표정의 브래들리가 서 있었다. 구스의 무덤에서 자신의 손을 부여잡은 아이의 표정이, 해사 입학 건으로 자신의 양 어깨를 부여잡고 애원하던 브래들리의 표정이, 마치 지금과 같아서.

 

 

 

제발 이야기 좀 그만해요, 우리.”

 

 

 

울 것만 같은 그 아이의 표정에.

 

 

 

알았어. 알았으니까..”

“....”

“....나중에. 너 괜찮아지면. 네가 이야기 하고 싶어지면.”

“....”

그때 이야기하자.”

 

 

 

매버릭은 자신의 모든 말을 삼킨 채로 등을 돌렸다. 이제와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으므로.

 

 

 

 

 

-

 

 

 

 

 

브래들리에게서 한참을 멀어지고 나서야,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매버릭은 힘없이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한낮임에도 밤처럼 시야에 닿는 모든 게 새까맣게 물들었다.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 그 혼자만 겨울의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몹시도 추웠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

 

 

 

 

 

안 좋은 일은 언제나 몰아서 오곤 했다. 마치 이래도 아직까지 버틸 수 있느냐 묻는 것처럼. 끝내 무릎이 꺾이고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휘몰아치곤 했다. 그래서 매버릭은 언제나 자신 앞에 들이닥치는 하나의 불행이 긴 비극의 서막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그 모든 불행이 온전히 자신에게만 온 것이라면 힘들더라도 감당할 순 있을 텐데. 폭풍처럼 몰려온 불행은 언제나 매버릭의 주변만을 향했다. 그가 사랑하고 지키려한 소중한 것들을 모조리 삼킨 채 지나갔다. 그러니 어쩌면 매버릭은 예상했어야 했다. 그에게 남은 소중한 인연은 이제 몇 남지 않았으므로.

 

 

 

“Hey.”

 

 

 

문 틈 사이로 작게 쿨럭이던 소리가 부름과 함께 멈췄다. 매버릭은 애써 평정을 가장하곤 아이스맨의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검은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가 마치 얼마 남지 않는 그의 시간을 삼키는 시계 초침처럼 불길하게만 보였다.

 

 

 

[왔어? 오늘 일은 들었어. 괜찮아?]

“...내가 교관 일엔 적성이 맞지 않나봐. 알잖아. 나 가르치는 거 잘 못하는 거.”

 

 

 

어깨를 늘어뜨리며 매버릭이 장난스레 웃었다. 괜찮은 척 웃고는 있지만 속은 꽤 쓰릴 거라는 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아차린 아이스맨이 매버릭의 얼굴을 짧게 응시하곤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 일엔 네가 적임자야.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냥 내가 직접 가면 안 돼? 그렇게 할 수 있잖아.”

[내가 그 부탁 들어주지 않을 걸 알잖아.]

제발, ? 부탁이야. 아직 어린 애들을 사지로 몰고 싶진 않아.”

[매브. 나 또한 널 사지로 몰고 싶지 않아. 이기적이지만, 마음이 그래. 넌 할 만큼 했어. 이젠 놓아줘야 할 때야.]

 

 

 

입안이 바싹 말라 건조해져 간다. 매버릭은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간절히 아이스맨을 응시했다. 내가 그럴 수 없단 걸 알잖아. 침묵으로써 답하는 그에게 아이스맨은 짧게 한숨을 쉬며 주제를 돌린다.

 

 

 

[브래들리를 만나보니 어때?]

“...그걸 지금 왜 물어봐?”

[10년만의 재회잖아. 그 애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 여상한 질문에 울컥, 가슴에서부터 솟구친 설움이 끝끝내 매버릭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아이스맨은 더 닦달하지 않은 채 매버릭이 입을 열기까지 침묵 속에서 기다렸다.

 

 

 

나랑 이야기 안 해. 눈도 잘 안 맞추려 하고. 그냥..이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거 같아.”

“....”

예상했던 일이었어. 아무리 그 앨 위해서라고 하지만 4년을 허송세월 보내게 한 거잖아. 그리고 먼저 연락까지 끊었지..그런데 이제 와서 알은 채 하는 것도 웃기고..”

 

 

 

애써 봐도 말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끝내 고개를 떨군 그는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끝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시엔 어쩔 수 없었다고, 그 앨 위해서라면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는데 이제와선 모두 자신을 위한 결정이었던 것만 같았다.

 

 

 

미첼.”

 

 

 

긴 정적을 깨뜨린 건 아이스맨의 갈라진 목소리였다. 잔뜩 쉰 목소리로 매버릭의 이름을 부른 아이스맨은 여전히 7월의 한복판에 붙잡혀 있는 친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부름에 매버릭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이스맨은 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애써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글로 쓸 순 없는 진심들이 매버릭의 귓가에 내리 꽂혔다.

 

 

 

네 마음이 가는대로 살아.”

“....”

인생은 짧고, 우리는 항상 실수를 하지.”

“....”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시도조차 안 해보고 포기해 버린다면 그 실수가 돌이킬 수 있는 건지, 돌이킬 수 없는 건지 영영 알지 못해.”

하지만 나는, 그 앤..알잖아. 구스의..구스의 아들이야.”

 

 

 

마지막 말은 목이 졸린 사람처럼 속삭이듯 작게 나왔다. 바보같이, 아이스맨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을 리 없을 텐데.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하지만 답답함에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아서. 그래서 말했는데, 처음으로 입 밖에 낸 그 소리가 자신의 숨통을 죄였다. 그래, 구스의 아들이었다. 캐롤과 구스의, 그들 사이의 자식이었다. 매버릭은 자신이 간직한 그 감정이 남들이 볼 때 얼마나 구역질날지, 그제야 깨달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가 입술을 바르르 떨며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 같은 그 얼굴에 아이스맨은 가느다란 한숨을 폭 내쉬며 매버릭의 한 쪽 어깨를 잡았다.

 

 

 

미첼. 넌 대부분의 경우 용감하지만, 결정적인 일 앞에선 항상 망설이다 도망치지. 이젠 그 도망을 멈춰야 할 때야.”

“....”

다른 사람들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세상에 너랑 그 애만 남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

 

 

 

고개를 숙인 매버릭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오래 전, 캐롤 또한 같은 소리로 그를 위로했다. 매버릭이 떨리는 눈을 들어 올려 친구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이전과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매버릭의 어깨를 다독였다.

 

 

 

감정이라는 건,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어떻게 알았어?”

 

 

 

그 질문에 아이스맨은 한결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너는 언제나 그 아이에게로 돌아갔으니까.”

 

 

 

 

 

-

 

 

 

 

 

아이스맨과의 대화 이후, 마음은 한결 안정을 되찾아갔다. 더는 초조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아이스맨의 모습이 각오했던 것보다 괜찮아 보여서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전에도 병마를 이겨냈으니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떠나는 그를 붙잡고 다음에 다시 보자며 웃는 그 선량한 얼굴에선, 이번에도 살아남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매버릭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미리 겁을 집어먹고 상황을 가정할 필요는 없었다. 괜찮을 것이다. 매일 아침 세뇌처럼 되새기던 그 말처럼.

 

 

 

막연한 희망이 가슴을 채우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미래가 조금씩 그려졌다. 더는 도망치지도, 외면하지도, 막아버리지도 않고. 브래들리가 들을 준비가 되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모두가 무사히 귀환해야 할 테지만. 깨지기 직전인 팀워크도 되살릴 필요가 있었다.

 

 

 

풋볼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들을 끈끈하게 묶어줬다. 젊은 혈기란 본래 그렇다. 전날 개처럼 싸웠더라도 다음 날 같은 팀이 되어 함께 땀을 흘리면 갈등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 아래 밝게 웃고 떠드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자신이 젊은 날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간만에 한껏 웃으며 아이들과 함께 뛰어 놀았다.

 

 

 

그 다음 훈련 또한 수월하게 진행됐다. 더는 날을 세워 충고하지 않는 매버릭에게서, 그들은 조언을 듣고 매버릭의 지시에 따라 훈련을 따라왔다. 아직 매버릭이 세운 기준을 넘은 사람은 없었지만, 이대로만 간다면 곧 기준에 다다를 터였다.

 

 

 

그러니까, 모든 게 괜찮았다. 하늘은 맑았고, 태양은 눈부시게 빛났으며, 브래들리 또한 더는 자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진.

 

 

 

 

 

-

 

 

 

 

 

사고에 사고가 겹친 날이었다. 코요테가 고도에서 정신을 잃고 추락하였고, 간신히 그를 깨웠을 땐, 피닉스와 밥이 버드 스트라이크를 당했다. 엔진을 잃고 추락하는 그들에게 당장 탈출하라 지시했지만, 피닉스와 밥은 수칙대로 침착하게 대응한 후 탈출했다. 그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매버릭은 입술이 터질 정도로 이를 사려 물며 어떻게든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다행히 아무 부상 없이 탈출한 그들을 혹시 몰라 병원에 이송한 후, 매버릭은 지친 발걸음으로 빈 강의실을 향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 앉아 잠시간 아무런 생각도 안하고 쉬고 싶었다. 그렇게 문을 열었을 때, 매버릭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브래들리를 마주했다.

 

 

 

밥과 피닉스는 무사하다고, 너도 많이 놀랐을 테니 가서 쉬라고 말했던가. 전반적인 대화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브래들리는 해사 입학 반려 건으로 그를 비난하고 있었고, 매버릭은 방어적으로 소리치고 있었을 뿐이다.

 

 

 

, 준비가, 되지, 않았어.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매버릭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막고 싶었다, 아니다, 막고 싶지 않았다. 흥분으로 인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쿵쿵 울렸다. 그는 울고 싶었고, 도리어 웃고 싶었다. 결국 여기가 그의 종착지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언제나 브래들리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에게서 도망쳤고, 그를 외면했고, 그의 입을 막는다.

 

 

 

매버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브래들리의 눈빛이 바뀐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눈빛이었다.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그는 매섭게 매버릭을 비난했다. 아버지는 당신을 믿었죠. 비수와 같은 그 말이 그의 심장을 찢는다. 매버릭은 새하얗게 물든 세상을 목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만 말해.

 

 

 

전 아버지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겁니다.

 

 

 

눈이 보였다. 물기가 가득한, 상처받은 눈이. 끝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브래들리, 넌 눈이 참 예뻐. 그 어린 날, 자신을 반짝이는 눈으로 올려다보곤 하는 아이를 안아 올리며 매버릭은 종종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면 아이는 매버릭의 품에 파고들며 쑥스럽게 웃곤 했다. 그 웃는 얼굴이, 자신이 우는지 조차 모르는 눈앞의 얼굴에 덧씌워진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

 

 

 

온갖 감정이 소요를 일으킨다. 범람하는 제 마음도, 감정도, 갈무리되지 못한 채 그저 썩어 고여 있기만 할 뿐이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새하얀 어둠이 찾아온다. 브래들리의 눈물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질 때마다, 매버릭은 절실히 자신의 존재가 아이에게 독이 된다는 걸 실감한다. 말이, 행동이, 과거의 선택이 모두 후회된다.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었다. 언제나 웃는 모습이 가장 예뻤던 너를, 언제나 울게 하는 내가. 그런 내가, 어떻게,

 

 

 

“....넌 지금. 흥분했어, 루스터. 나중에, 나중에 다시..”

 

 

 

매버릭은 주춤, 뒤로 물러선다. 도망치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자신의 존재가 브래들리의 기억과 마음속에서 영영 잊혀 지길 바랬다. 그 편이 브래들리에게 훨씬 좋았다. 목구멍까지 치닫는 고통에 신음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매버릭은 브래들리에게서 멀어지려 가진 애를 다 썼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그에게서 멀어졌다. 이대로 뒤 돌아서, 그래서,

 

 

 

나중 언제요?”

루스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그를 붙잡은 우악스런 손길이 이내 겨우 멀어진 거리 사이를 순식간에 좁힌다. 매버릭의 양 어깨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매버릭은 겨우 눈만 돌려 그게 브래들리의 양 손이라는 걸 확인한다. 여전히 눈물만 뚝뚝 흘리는 그를, 매버릭은 홀린 듯 바라보았다.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을 만지고 싶었다. 그 감촉만이라도, 그 온기를, 그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매버릭은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끊임없이 양 뺨을 적시는 눈물을, 브래들리를 대신해 훔쳤다.

 

 

 

울지 마.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말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주 오래도록 간직한 사죄였다. 그를 처음 본 그날, 그 하드덱에서 말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전. 꼬마 브래들리가 어울리지도 않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자신의 아버지를 땅 속에 묻었던 그 날부터, 그때부터 간직한 사죄였다.

 

 

 

내가 전부 미안해. 널 떠나선 안 됐는데..그런 말도 해선 안 됐는데..”

 

 

 

울컥, 치받는 감정을 삼키며 매버릭은 말을 이었다. 모두 털어버리고 싶었다. 간직한 마음이 무겁고 벅차서, 더는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비겁한 어른은 끝끝내 마지막까지 비겁한 짓을 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때까지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듣던 브래들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말에 매버릭은 간절하게 반박했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어야 했다.

 

 

 

아냐! 내 잘못이야. 너는 잘못 없..”

하하..이게 어떻게 당신 잘못이야.”

 

 

 

성큼, 어느새 물러선 거리보다 더 가까이 다가온 브래들리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꺾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매버릭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브래들리를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만 보았다.

 

 

 

이윽고, 부드러운 온기가 그의 입술을 두드렸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창문 밖으로 비가, 세상을 지울 듯이 내리고 있었다.

 

 

 

 

 

-

 

 

 

 

 

그저, 입술이 맞닿았을 뿐이다. 키스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짧은 부딪힘이었다. 두 사람은 짧게 닿았고 그보다 더 오래 서로를 바라보았다. 텅 빈, 그러나 그 속에 하염없이 범람하는 감정들을 마주했다.

 

 

 

침묵이, 정적이, 바깥에서 끊임없이 내리며 귓가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입술에 잠깐 와 닿았던 온기가,

 

 

 

매버릭.”

 

 

 

믿기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노크 소리와 함께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매버릭은 고개를 돌려 불쑥 난입한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워록이 침통한 표정으로 아이스맨의 부고 소식을 전했다.

 

 

 

아이스맨이, 죽었다.

그의 윙맨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지워졌다.

 

차라리 너와 함께 닿아있을 때, 시간이 멈췄으면 좋았을 텐데.

 

 

 

 

 

-

 

 

 

 

 

장례식이 모두 파한 후였다. 모여든 사람들이 돌아가고, 그의 가족들 또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났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를 벗어난 매버릭은 잠시 망설이다 다시 아이스맨이 묻힌 장소로 돌아갔다. 그의 손에는 아이스맨이 그에게 남긴 유언장이 있었다. 그 새하얀 종이는 사용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뻣뻣했고, 무엇보다 가벼웠다. 그 가벼운 종이가 꾸겨질까, 매버릭은 가진 애를 쓰며 손에서 힘을 뺐다. 떨리는 주먹이 금방이라도 그 종이를 사정없이 뭉갤 것 같았다.

 

 

 

친구를 묻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매버릭은 언제나 처음처럼 감당하기 어려웠다. 머리 속이 새하얗게 물들어 어떤 생각도, 실감도 나지 않았다. 다시 보자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는데.

 

 

 

발목에 추를 단 듯, 늪지대를 걷는 것처럼 걸음이 느려졌다. 그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마음이 조각나 부서졌다. 마음이 유리 조각과도 같았다면, 한 번 산산이 깨지면 영원토록 그 기능을 멈췄을 텐데.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았을 텐데.

 

 

 

느린 걸음도 걸음이기에. 매버릭은 이윽고 그의 친구가 묻힌 장소에 도달했다. 땅거미가 진 시간이기에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제법 선선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이스맨은 그 별명이 무색하게 태양처럼 밝고 따뜻한 사람이었으니, 이토록 맑은 날씨에 장례식을 치르는 게 어울렸다.

 

 

 

너는 마지막까지 내 걱정만 하다 갔겠구나.

 

 

 

매버릭의 손끝이 회색빛 비석을 어루만졌다. 차갑고, 딱딱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의 품에서 식어가던 구스의 몸 또한 이러했다. 차갑고, 딱딱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 영영 보지 못한다는 걸. 그의 가족들은 모두 땅 밑에 묻혀 잠들었다. 구스, 캐롤, 아이스맨..

 

 

 

매버릭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손아래 구겨지는 새하얀 종이봉투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읽어 내리기엔, 매버릭은 너무 지쳤다. 너무 지쳐서 이젠 전부 내려놓고만 싶었다.

 

 

 

미안해, 아이스. 내가 나중에. 나중에 읽어볼게. 그리고, 그거 알아? 나도 유언장 있어. 너한테 쓴 것도 있고, 구스한테 쓴 것도 있고,”

 

 

 

떨리는 손으로 구겨진 종이봉투를 피며 매버릭은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아이스맨의 비석 아래는 그를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남긴 꽃다발과 그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매버릭은 다 펴진 종이봉투를 아이스맨의 액자 뒤에 내려놓았다.

 

 

 

캐롤한테 쓴 것도 있어. 내가 먼저 죽을 줄 알았지. 너도 알다시피, 내 운전 솜씨가 꽤 멋지잖아? 근데 나만, 왜 나만 남았지..”

 

 

 

말끝을 흐린 매버릭은 텅 빈 동공으로 액자 속 아이스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떤 생기도 남지 않은 그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한여름임에도 한기가 느껴졌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매버릭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차라리 비라도 왔으면, 차라리 그랬다면.

 

 

 

왜 당신만 살아남았는지, 잘 알고 있잖아?’

 

 

 

귓가에 꽂히는 브래들리의 익숙한 목소리에 매버릭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영원히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어린 브래들리가 앳된 미소를 지으며 비석 위에서 앉아 발을 까닥이고 있었다.

 

 

 

브래들리..”

 

 

 

넋이 나간 그 얼굴을 마주하며 브래들리는 허리를 수그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아이는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 특유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창백한 그 얼굴은 마치 새하얀 죽음처럼 보였다. 아이는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날 구해야지, 피트.’

..?”

약속했잖아.’

 

 

 

브래들리가 매버릭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날 구해줘, .’

 

 

 

 

 

-

 

 

 

 

 

모든 것을 잃어도, 모든 게 불안정하고 나 자신 또한 혼란스럽더라도.

이 길의 끝이 어떻게 변할지, 너와의 관계가 어떤 변화를 맞이할지 몰라도.

한가지, 영원토록 변치 않는 것이 있다.

 

 

 

나는 반드시 너를 지킬 것이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미래도, 삶도, 하늘조차도. 워록의 도움을 받아 전투기에 탑승한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건 달리 바꿔 말하자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거였으니까.

 

 

 

매버릭은 절박했고, 절박한 사람은 무슨 짓이든 하는 법이다. 그게 설령 군법을 어기고 그의 동료를 곤란에 처하게 하는 일일지라도.

 

매버릭은, 어떻게든 브래들리를 구해야 했으므로.

 

 

 

 

 

-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매버릭은 자신의 뒤통수에 와 닿는 끈질긴 시선을 느꼈지만, 끝내 외면했다. 이번 작전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브래들리에게 다시 누군갈 잃게 하는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

 

 

 

작전 당일이었다. 세세한 브리핑 이후, 정비공들이 바쁘게 배 위를 뛰어다니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용케 그를 찾은 브래들리는 매버릭을 붙잡고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매버릭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엔 이 표정이, 이 얼굴이, 원망과 분노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천히, 더는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자 그 안의 감정이 넘치도록 느껴졌다.

 

 

 

그건 애정이었다. 존경이었고, 친애였으며,

 

 

 

. 할 말이 있어요.”

 

 

 

숨길 수 없는 사랑이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너의 시선 끝엔 언제나 나만이 있었는데.

 

 

 

답이 없는 그에게 다가서려는 브래들리를 손짓으로 저지하며 매버릭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중을 기약하는 목소리가 덧없이 들려졌다. 우리에게 나중이 있을까. 씁쓰레한 자조를 삼키며 매버릭은 평소처럼 웃어보였다. 브래들리에게 더없이 익숙한 미소를, 그래서 그 아이가 조금의 불안도 느끼지 못하도록. 그에게서 등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도록.

 

 

 

 

 

-

 

 

 

 

 

하지만 만약, 아주 만약에, 그가 살아날 수 있다면,

그와 브래들리가 모두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그땐 너와 시선을 맞추고, 모두 말할게. 전부. 숨기는 것 없이.

그래서 이 새하얀 어둠이, 어둠이 아닌 빛으로 바뀔 수 있도록.

 

너와 함께 살아갈게.

 

 

 

 

 

-

 

 

 

 

 

브래들리를 대신해 격추당한 매버릭은 웃으며 생각했다.

 

 

 

, 역시.

 

그대로 눈을 감고 그에게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나중을 기약하며 아쉬워하는 너의 눈동자가,

다가오려다 제지당해 멈춰선 너의 발걸음이,

짧은 입맞춤 후 잔뜩 겁먹은 얼굴로 그를 응시하던 그 창백한 얼굴이,

날 선 비난을 쏟아 붇곤 스스로의 말에 상처받은 듯 울던 그 표정이,

 

차마 더는 외면할 수 없어서, 그래서.

 

 

 

넌 언제나 날 살게 해, 꼬마야.

 

 

 

매버릭은 추락하는 전투기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낙하산을 펼쳤다. 고도가 낮은 탓에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이 칼날처럼 매서웠다. 새하얀 지상으로 낙하하며 정신을 잃기전, 매버릭은 브래들리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자 불안과 공포가 일순 잠잠해지며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암전이었다.

 

 

 

 

 

-

 

 

 

 

 

너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있어.

듣고, 너에게 답해야 하는 말이 있어.

10년이나 늦었지만, 그래도 말해줄래?

끝까지 이기적이고 비겁해서 미안해.

하지만 난, 네가 말해줘야 내 마음을 고백할 용기가 생길 것 같아.

 

브래들리, 나는 널..

오직, 너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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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버릭 루스터매브 재업

2023.12.19 23: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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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 윽박씬에서 둘이 키스한게 맞았잖아....!!!!!!!!!! 최소 키스 최대 앵섹의 텐션이었는데 센세가 이렇게 개쩌는 문학으로 말아주니까 그저 눈물만 남ㅠㅠㅠㅠㅠㅠㅠ하.. 나의 저렴한 어휘력을 용서해 센세.... 그치만 센세의 문학은 개쩔고....... 개쩐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그것이 개쩌는거니까
[Code: 1997]
2023.12.19 23: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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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씬에서 추락하고 브래들리에게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 어느때보다 더 삶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피어오르는 매버릭 언제 질릴까... 너무 좋아ㅠㅠㅠㅠㅠㅠㅠㅠ 결국 브래들리는 매버릭의 중력이 될 운명이었던거지ㅠㅠㅠㅠㅠㅠ 하ㅜㅠㅠㅠㅠㅠㅠ
[Code: 1997]
2023.12.19 23: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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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센세 나 지금 너무 행복하다 아껴가면서 읽어야지 너무 소중해 ㅠㅠㅠ
[Code: 5728]
2023.12.20 01: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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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직업셀털 이렇게 해도 되는거야? 이건 탑건 원작 소설
인데? 루스터와 매버릭 사이에 흐르는 그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너무 잘 보여서 심장이 쥐어짜이는 기분이야 ㅈㄴ 짜릿하고 애틋하고 절절해 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58ae]
2023.12.20 07:3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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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유언장부터 눈물 줄줄 난다ㅠㅠㅠㅠㅠㅠㅠㅠ 왜 나만 남았지?? 하는데 오열ㅠㅠㅠㅠㅠ 브래들리가 있잖아ㅠㅠㅠㅠㅠ
[Code: 9692]
2023.12.20 23: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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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가 매버릭이지? 루스터지? 구스이기도 캐롤이기도 한거지? 루스터와 매버릭의 과거와 현재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것처럼 아니 직접 그 감정을 겪은 것처럼 너무나 생생하고 설득력있게 다가와서 정신없이 몰입해서 읽었어 센세 진짜 정체가 뭐야 어쩌면 이런 심리묘사를 할 수가 있지? ㅠㅠㅠㅠㅠㅠ
[Code: eb09]
2023.12.20 23: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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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덱에서 재회후 브래들리가 없는 사막같은 삶을 위태롭게 살아온 자신과는 달리 매버릭이 없는 삶이었어도 아무 문제없이 동료들과 웃고 떠들며 피아노를 연주하는게 익숙해 보이는 브래들리에게 견딜 수 없이 화가 나는 진짜 이유를 깨닫는 부분 정말 감탄했어 매버릭도 몰랐던 자신의 감정 브래들리를 사랑한다는 진실을 깨닫는 순간이 너무 설득력있어 이게 탑건 원작이 아니고 뭐겠어 ㅌㅌㅌㅌㅌㅌㅌㅌ
[Code: eb09]
2023.12.20 23:5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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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미션을 나가기전 루스터의 말을 막은 이유도 알겠어 혹시 자신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루스터의 마음에 답해주는게 더 큰 상처가 되고 루스터의 삶을 망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둘다 살아온다면 그때는 루스터의 고백을 듣고 자신의 마음도 솔직하게 고백하겠다는 매버릭이잖아 상상으로만 채워왔던 둘 사이의 감정을 이렇게 섬세하게 아름다운 글로 채워줘서 너무 고마워 그리고 행복하다 ㅠㅠㅠㅠㅠ
[Code: eb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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