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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 제독은 커크에게 통신을 걸어서, 칸과 크루들 그리고 자기 딸을 당장 내놓으라고 요구했음. 자신에게 씌워진 모든 혐의는 칸이 꾸며낸 거짓말이고, 자신은 언제나 스타플릿을 위해 일했을 뿐이라고 설득하면서. 커크는 딱 잘라 거부한 채 통신을 끊었음.

 - 젠장, 칸! 네 말대로야! 날 회유하려고 했어.

 - 그대가 거부했으니, 이제 이 함선을 공격하겠군.

 - 뭐? 설마, 그래도 자기 딸이 타고 있는데...

커크는 곁에 있는 캐롤을 바라보며 몸서리를 쳤음. 설마, 아무리 악당이라도, 하나뿐인 딸을 향해 발포해서 죽이려 할까. 칸은 고개를 저었음.

 - 그러지는 않을 거다. 다만, 캐롤만 빔업시켜서 빼낸 후 이 함선을 폭격하겠지.

마커스 제독이 엔티호 전체를 스캔하면서 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은 커크도 느낄 수 있었음. 이대로라면 캐롤을 찾아내는 것은 시간 문제겠지. 커크는 함장으로서 고민에 빠졌음. 차라리 맞서 싸워볼까? 하지만 칸의 정보에 따르면 벤젠스호는 전투에만 특화된 전함이라서 엔티호 따위는 상대도 안 될 거라고 했음. 그럼 워프해서 도망칠까? 하지만 칸에 따르면 벤젠스호는 워프 도중에도 발포가 가능하니까 도망쳐도 소용없을 거라고 했음.

그 때 캐롤이 자원했음.

 - 함장님, 어차피 아버지가 저를 데려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걸 이용하는 건 어떨까요?

 - 뭐? 어떻게?

 - 제가 트로이의 목마가 될게요. 아버지가 저를 데려가면, 거기서 제가 여러분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거예요.

 - 하지만 그런 위험한 일을 혼자...

커크가 만류하려는데, 칸이 낮은 음성으로 끼어들었음.

 - 할 수 있겠나, 캐롤.

 - 우리 둘이 손잡고 아버지를 엿먹인 게 하루이틀 일이야? 나한테 맡겨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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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과 캐롤이 서로 눈짓하며 사악한 미소를 주고받는 모습에, 커크는 소름이 오소소 돋으면서 깨달았음. 저 커플은 단순한 연인 관계가 아니라 전장을 헤쳐온 동지라는 것을. 그들은 추락하는 우주선에서 단 둘이 살아남았고, 미개척 행성에서 생존했고, 스타플릿 수장의 눈을 피해서 72명의 크루들을 빼돌려 탈출하기까지 했음. 이렇게 손발을 맞추어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두 사람에게 익숙한 일이었음.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각본을 짜기 시작했음. 벤젠스호의 설계자인 칸은 캐롤에게 벤젠스호의 구조와 지리를 들려주면서 앞으로의 전략을 설명했고, 스코티는 캐롤의 몸에 숨길 수 있는 통신기를 부착해 주었음.

마침내 모두의 숨죽인 응원 하에, 캐롤이 벤젠스호와의 통신을 연결했음. 혼신의 연기력을 발휘할 시간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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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캐롤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아버지에게 깊이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음. 칸과 도망친 이후로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면서, 칸은 자기 크루들을 되찾기 위해 캐롤을 이용한 것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했음. 다시는 아버지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말도 했음. 마커스 제독이 흡족하게 여길 만큼 눈물을 쏟으며 애원한 뒤, 마침내 새하얀 빛에 감싸이는 캐롤을 보면서, 칸과 커크는 작전 1단계가 성공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

그리고 캐롤이 빔업되어 사라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벤젠스호가 발포하기 시작했음.

 - 으아악! 술루, 밟아!!

엔티호는 즉시 워프해서 지구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벤젠스호도 워프해서 따라오면서 폭격을 퍼부었음. 함선이 무섭게 요동치면서 굉음과 비명이 울려퍼졌음.

 - 함장님, 무기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 함장님, 격벽이 손상되고 선체가 파손되었습니다!

 - 젠장, 캐롤! 제발 서둘러 줘!!!

커크는 미친 듯이 흔들리는 함선을 지휘하면서 하늘을 향해 빌었음. 그 동안에도 칸은 희한할 정도로 냉정을 유지하면서, 통신기를 붙잡고 뭐라고 계속 외치고 있었음.

 - 캐롤, 시스템의 수동 제어기를 찾아야 한다.

「잠깐만 있어 봐! 아버지 몰래 브릿지를 빠져나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지금 겨우 기관실 도착했어.」

 - 제어기를 찾아서 리셋시켜라. 검은색 선과 파란 선의...

「잠깐, 잠깐, 이거 맞지?」

공격이 멈추었음.

비처럼 쏟아지던 광자 어뢰와 페이저가 갑자기 뚝 그쳤고, 사방에 가득하던 굉음이 사라졌음. 흔들리던 엔티호가 중심을 되찾았음. 갑자기 찾아든 정적 속에서, 칸이 우뚝 서서 한 손에 통신기를 든 채 보고했음.

 - 캡틴, 캐롤이 시스템을 리셋시키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기 위해 격납고로 이동 중이다.

커크는 어질어질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음. 스팍에게 함장석을 맡기고 즉시 출동 준비를 시작했음.

 - 좋아, 칸, 그럼 준비됐어?

함께 우주를 날아갈 시간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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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 제독은 홧병이 날 지경이었음.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음. 엔티호를 미행해서 칸과 캐롤을 추적하는 데 성공했고, 반항하던 딸아이는 엎드려 용서를 빌면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지. 이제 남은 것은 엔티호에 공격을 퍼부어서 재로 만들어버리는 것뿐이었음. 칸도 크루들도 모두 죽고, 커크와 엔티호까지 싸그리 없애버리고 나면, 그의 범행에 대한 모든 증거는 인멸될 테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엔티호를 공격하던 도중 갑자기 시스템이 다운되더니 무기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음. 그래서 황급히 시스템을 복구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또 함선 내에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경보가 울렸음. 부하들이 침입자에 대응하기 위해 몰려갔지만 모두들 당해버렸는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음.

 - 캐롤...! 내 딸은 어디 있나?

마커스 제독은 바보가 아니었음. 이렇게 연쇄적으로 차질이 발생할 때에는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음. 그가 이 함선에 태운 사람들 중에서 칸을 도우려고 할 만한 인간은 하나뿐이었음. 예를 들면 지금 수상쩍게도 어딜 갔는지 안 보이는 그의 딸이라던가.

 - 내 딸을 찾아와라. 당장!!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즉시 페이저로 무장하고 출동한 부하들이, 얼마 후 매우 화가 난 캐롤을 좌우에서 포위하여 이끌고 돌아왔음.

 - 너... 네가 그런 거냐? 네가 애비를 배신하고 이 모든 짓을 벌인 거냐는 말이다!

치를 떨면서 호통을 쳤지만, 캐롤은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음. 오히려 아버지보다도 더 분노한 태도로 쏘아붙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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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했잖아. 나는 당신 딸이라는 게 수치스럽다고!

 - 이... 이....!!

마커스 제독은 분노로 눈이 시뻘개진 채, 딸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음.



커크는 헐떡거리며 벤젠스호의 어두컴컴한 복도를 달렸음. 칸이 가공할 전투력으로 마커스 제독의 부하들을 때려눕히고 날려버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대체 300년 전에는 저 인간이 어떻게 패배한 건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음.

 - 거의 다 왔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브릿지에...

문득 커크의 귓가에 요란한 소리들이 날아와 꽂혔음. 브릿지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음. 마커스 제독의 고함 소리와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 걷어차는 소리, 그리고 캐롤의 날카로운 목소리.

(이런 망할...!)

모든 것을 잃게 된 마커스 제독이, 기어이 폭발해서 자기 딸에게 폭력을 퍼붓고 있는 것이었음. 커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음. 마커스 제독은 왕년에 백병전에서 무적으로 이름이 높은 용사였는데. 그런 백전노장 아버지에게 두들겨맞으면 캐롤은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데.

 - 칸, 당장 가야 해! 캐롤이 위험하단 말이야!!

 - 괜찮을 거다, 캡틴.

뜻밖에도 덤덤한 칸의 반응에, 커크는 조바심이 났음. 아니, 사랑하는 사이 아니었어? 지금 네 애인이 위험에 처해 있단 말이다! 커크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브릿지로 달렸음.

그런데 브릿지에서 커크가 보게 된 풍경은 뜻밖이었음.

마커스 제독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딸을 공격하고 있는 것까지는 예상과 같았음. 뜻밖인 것은 캐롤이 대등하게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음. 아니, 오히려 아버지 쪽이 딸에게 밀리고 있는 느낌이었음. 커크는 한때 그 자신도 아카데미에서 상급 백병전 조교였던 입장에서, 캐롤의 비열하고 거침없는 몸놀림이 스타플릿에서 가르치던 동작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보았음. 오히려 조금 전에 목격했던 칸의 움직임과 매우 닮아 있었음.

 - 그녀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친 것은 나다, 캡틴.

어느 틈에 곁에 와 있던 칸이, 은근한 자부심을 감추지 못하는 음성으로 말했음.

 - 그러니 내가 괜찮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그녀가 이보다 더한 외계 짐승들을 쓰러뜨리는 것도 보았다.

퍼억! 그 순간 마침내 마커스 제독이 캐롤의 돌려차기에 얻어맞고 나가떨어졌음. 그제야 브릿지에 커크와 칸이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보였음.

 - 가, 가까이 오지 마!!

칸이 차가운 눈빛으로 한 걸음 다가서자, 마커스 제독은 흉하게 팔다리를 휘저으며 뒷걸음질을 쳤음. 칸이 멈추지 않자 이번에는 애처롭게 캐롤을 향해 도움을 청했음.

 - 딸아, 정말 이럴 생각이냐? 저 강화인간 놈이 나를 죽이게 내버려 둘...!

 - 걱정 마라, 제독. 죽이지 않을 테니.

칸은 얼음장처럼 속삭이면서 한 걸음 더 다가섰음.

 - 내게서 크루들을 앗아가고, 나를 1년간 지옥에서 살게 했지만, 그 대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선사했다. 캐롤 마커스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지. 그러니 죽이지는 않겠다. 단지 내가 맛본 고통의 일부라도 맛보기를 바란다.

 - 흐아아아악!!!

칸이 두 손으로 두개골을 힘껏 움켜쥐는 순간, 마커스 제독은 사지를 뒤틀며 고통스럽게 발작한 후 축 늘어졌음. 헐레벌떡 달려간 커크는 기절한 제독에게 수갑을 채웠음.

 - 알렉산더 마커스,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으며,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커크가 줄줄 읊는 동안, 칸과 캐롤은 서로를 끌어안았음.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지구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마커스 제독은 정식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제독 지위에서 파면되었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중형을 선고받은 가장 큰 이유는, 원래 기소된 죄였던 횡령이나 무기 개발이 아니라, 그 죄를 덮기 위해 저지른 다른 죄 때문이었음. 엔티호를 공격해서 그 안에 타고 있던 크루들 400여명을 전부 죽이려 했으니까. 이로 인해 칸과 캐롤뿐 아니라 커크와 엔티호 전체가 분노에 불타면서 앞다투어 증언하겠다고 나섰음.

그렇게 더 이상 제독이 아니게 된 자연인 마커스는 먼 유형지로 끌려갔음. 사령부의 임시 수장이었던 파이크 제독은 "임시" 라는 말머리를 떼어버리고 정식 수장이 되었음.

 - 자네 부친은 내가 오랫동안 존경했던 선배였다네.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파이크 제독은 자기 집무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캐롤을 침통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음.

 - 그리고 미스터 존 해리슨... 본명은 칸이라고 했던가? 내 전임자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파이크 제독이 사과하고 나선 것은 그의 양심적인 성품 때문만은 아니었음. 이 사태가 끼친 파장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칸과 캐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음. 스타플릿 사령부의 현직 수장이 중범죄를 저질러 수감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스캔들이었고, 졸지에 후임자가 된 파이크 제독은 이 사건으로 스타플릿 전체의 이미지가 추락하지 않도록 어떻게든 바로잡아야 할 책임을 떠맡았음.

그 사실을 칸도 잘 알고 있었음. 그렇기에 그는 매우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기 조건들을 제시했음.

 - 우선 내 크루들을 내게 돌려주고, 그들을 세티 알파 V 행성으로 옮겨 해동시키는 작업을 전부 스타플릿의 비용으로 원조해라. 그리고...

그렇게 협정이 체결되었음. 칸은 그 미개척 행성의 영유권과 벤젠스호의 소유권을 양도받고, 캐롤은 스타플릿의 과학장교 지위를 유지한 상태에서 연구비 지원까지 받으며 그 행성의 생태계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음. 그 대가로 칸과 캐롤은 언론에 출연해서 스타플릿이 베풀어 준 것들을 널리 알리며 이미지 개선에 일조하기로 했음.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고, 지구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두 사람은 런던에 있는 캐롤의 집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곧 가게 될 행성을 찾았음. 밤바람은 차가웠고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났음.

 - 내가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은 것은 단 두 번이었다.

칸은 아련한 음성으로 옛날 이야기를 꺼냈음.

 - 첫번째는 열다섯 살 때. 나를 창조한 과학자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나와 내 형제자매들을 놓아달라고. 그는 내 애원을 듣지 않았고 우리를 노예로 팔아버리려 했기에, 나는 결국 반란을 일으켜 그를 살해했다.

캐롤은 속이 쓰렸음. 칸이 무릎을 꿇은 두 번째 상대는 누구였을지 벌써부터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음.

 - 두번째는, 캐롤, 바로 그대의 부친에게였다. 제발 나와 내 크루들을 풀어달라고 빌었지만, 그는 내 애원을 듣지 않았고... 그 뒷일은 그대도 잘 알고 있다.

 - 칸,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 내가 이제까지 무릎을 꿇은 것은 모두 내 크루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나 자신의 소원을 위해 무릎을 꿇으려 한다.

캐롤의 앞에, 칸이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음.

 - 내 아내가 되어 주겠나, 캐롤 마커스?

 - 칸...!

 - 나와 결혼해서, 내 가족이 되어 주겠나? 이것이 내게 얼마나 무거운 요청인지는 그대도 알 것이다. 내게 가족이 지닌 의미가 어떤 것인지.

캐롤은 잘 알고 있었음. 칸은 가족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았고,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무자비한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었음. 칸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었음.

 - ...칸, 내가 가족에 대해 가진 경험은 당신과 많이 달라. 아버지가 바로 내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그걸 스스로 끊어 버렸어.

칸이 불안한 표정으로 흠칫하자, 캐롤은 손을 내밀어 칸의 손을 쥐었음.

 - 난 이제 가족이 없어. 그러니까 당신이 새로운 가족이 되어줘. 당신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첫 가족이야.

그것이 승낙임을 깨달은 칸의 표정이 환해졌음. 절대로, 절대로 후회하게 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속삭이면서, 칸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에 입맞추었음. 그렇게 캐롤 마커스는, 칸 누니엔 싱이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유일한 사람이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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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제임스 커크 제독은 부하들을 이끌고 세티 알파 V 행성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음.

강화인간들이 그 행성에 정착한 지 1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음. 주변의 정교한 건물이며 탁자에 진열된 음식들, 흥겹게 연주되는 악기들을 둘러보면, 과연 여기가 그 척박했던 무인도 행성이 맞는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음. 아무리 스타플릿의 지속적인 물자 원조가 있었더라도, 겨우 10년 사이에 이런 문명을 건설한 것은 놀라운 업적이라고 생각되었음. 과연 강화인간들이란...

 - 파티는 무사히 즐기고 계신가요, 제독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커크는 당황했음. 우아한 드레스 차림의 금발 여인이 미소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음.

 - 앗, 네. 감사합니다. 왕비님. 아니 여사님.

스타플릿 내의 직급이라면 제독인 커크가 훨씬 더 높았지만, 상대는 칸의 아내이자 이 행성의 안주인이었음. 함부로 말을 낮출 수는 없는 일이었음. 캐롤은 너그럽게 웃었음.

 - 그냥 닥터 마커스로 충분해요, 제독님.

 - 아, 그렇죠. 닥터 마커스.

캐롤은 칸과 결혼한 뒤에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았고, 칸이 선사하려 하는 모든 영예와 칭호도 거부하면서, 끝까지 "닥터 마커스" 로만 남았음. 자신은 칸의 아내이기 이전에 과학자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면서. 그리고 이 행성의 생태계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 업적을 쌓아가면서, 강화인간들에게도 칸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과학자 캐롤 마커스로서의 존경과 신뢰를 얻어나갔음.

그리고 캐롤이 이 행성에 선사한 선물은 그뿐이 아니었음.

 - 아가야, 커크 제독님께 인사드리렴.

 - 아, 이분이 바로 그 꼬마 공주님이신가요?

커크가 허리를 굽혀 소녀에게 인사하자, 소녀는 나이답지 않게 완벽한 동작으로 응답했음. 어린 캐롤 누니엔 싱의 머리색은 칸을 닮아 새카만 흑발이었지만, 눈동자는 엄마를 닮아 푸른색과 초록색의 오드아이였음. 부모 양쪽에서 물려받은 천재성과 오만한 자존심이 배어나오는 인상이었음. 캐롤이 살며시 쓰다듬으며 놓아 보내자, 소녀는 당차게 달려가 다른 강화인간 아이들 틈에 섞여들었음.

 - ...똑똑해 보이네요.

 - 아이가 야망이 있어서, 벌써부터 우주에 관심을 갖더라고요. 나중에 크면 스타플릿에 지원할지도 모르겠어요.

커크는 푸학 웃음을 터뜨렸음. 칸 누니엔 싱의 딸이 스타플릿 아카데미에 지원하다니, 그 얼마나 장관일까.

 - 그거 대단하겠는데요. 칸이 과연 허락할까요?

 - 제가 허락하게 할 거예요. 아이가 원한다면.

캐롤이 단호하게 선언했음. 한때 그 자신도 최고 권력자의 딸로 살아왔던 캐롤은, 이 행성에서 최고 권력자의 딸로 태어난 아이를 키우면서, 그 아이만은 자신과 똑같이 자라지 않도록 각별히 애썼음. 지나치게 위대한 아버지에게 언제나 복종하며 통제받아야 했던 자신과 달리, 이 아이는 아버지에게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다행히 칸은 그 모든 것을 허락했음. 칸은 사랑하는 아내가 낳은 딸을 보배처럼 아꼈고, 딸에게 진심으로 잘 보이고 싶어했음. 칸이 그 커다란 손으로 나무에 딸이 탈 그네를 매달고, 딸과 함께 숲길에서 도토리를 줍는 모습에, 캐롤은 자신이 한때 아버지와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부녀관계를 목격했음. 심지어 캐롤은 칸을 설득한 끝에, 만약 딸이 원치 않을 경우 후계자 지위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하게 했음. 딸이 장차 이 행성의 여왕이 되기보다는 다른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설명을 들은 커크는 휘파람을 불었음.

 - 정말 대단하네요. 혹시 언젠가 따님이 스타플릿에 온다고 한다면, 꼭 제가 추천서를...

 - 내 아내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커크 제독?

칸이 엄격한 표정으로 등장하자, 커크는 어, 아냐 아냐! 하고 너털웃음과 함께 사라져갔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스타플릿 최강의 매력남에 플레이보이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 제임스 커크 제독의 뒷모습을 칸은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았음. 하지만 캐롤이 우아하게 다가서자 칸의 얼굴에도 금세 미소가 담겼음.

 - 우리 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 칸. 나중에 혹시 스타플릿에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 저 아이를 우주 밖으로 보낸다고? 경호원이라도 필요하지 않겠나?

경호원이라는 말에 캐롤이 웃음을 터뜨리며 칸의 가슴팍을 때렸음.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계기가 바로 칸이 그녀의 경호원이 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부부 사이의 농담거리일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는 로맨스였음.

 - 아니, 우리 딸은 경호원이 필요 없을 거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두 부부는 서로에게 기대면서, 어린 딸이 다른 강화인간 아이들을 몰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보았음. 이 행성에서는 앞으로도 더 많은 생명들이 태어날 것이고, 그들이 일구어낸 이 땅에서 자라나겠지.

 - 칸! 이리 와서 한 말씀 하십시오!

크루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음. 커크도 곁에서 함께 잔을 치켜들고 있었음. 단상에 올라 10주년 기념 건배사를 할 타임이었음.

크루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칸은 꿈결 같은 행복감으로 가득해졌음. 한때는 평생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크루들은 마음껏 살아가고 있었고, 그 아이들이 뭉쳐다니며 웃고 있었고, 지금 그의 팔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안겨 있었음. 그가 아끼는 가족들이 모두 여기 있었음.

 - 그래. 함께 가지, 캐롤.

칸과 캐롤은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단상에 올랐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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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티 알파 V는 토스에서 칸과 크루들이 유배된 미개척 행성의 이름임. 칸이라면 그런 척박한 곳에서도 충분히 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 거라며, 과연 100년 후 어떻게 될지 흥미롭겠다는 대사도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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