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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4 22:05
1.

"선물."

커크가 방싯거리는 얼굴로 스팍에게 내민 것은 새파란 손수건을 구겨서 만든 것처럼 거대한, 꽃 한 송이였다.
꽃잎 한장 한장이 손바닥만 한 덕에 아름답다기보다는 차라리 웅장한 그 모양새에서 로맨틱한 분위기는 티끌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것이 함교의 모든 대원들에게 나눠주고 난 뒤 남은 한 송이를 선심 쓰듯 건네는 것이라면 더더욱.

"…당연히 검역절차는 밟고 난 뒤 반입한 것이리라 믿습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꽃의 검사 여부부터 묻는 스팍의 말에 커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연하지.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함장님은 이행성 꽃가루 알러지 때문에 결막염으로 실명할 뻔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분명히 검역절차를 거쳤을 것이라 믿고 한 이야기였습니다."
"잠깐! 그때 그건 어디까지나 사고로 헬멧 틈이 벌어진 거였고 내 실수가 아니었다고. 더군다나 넌 그걸 마시고도 멀쩡했잖아. 순전히 내 체질 때문에 나만 재수없게 당한 일이었어."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믿는다’고 말씀 드렸던 것뿐입니다만."

커다란 꽃 한 송이를 사이에 두고 날선 소리로 투닥거리는 동안 함교의 크루들이 위기감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스팍에게 뭔가를 해줘봤자 감사나 칭찬보다는 잔소리가 돌아올 확률이 더 높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부함장을 이런 저런 일에 끌어들이는 함장을 보고, 어리석다거나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없었다. 단지 다들 평소처럼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캡틴. 항로 확정 되었습니다. 워프 팩터 2로 설정 되었습니다."
"알았어, 술루. 그대로 스탠바이. 예정대로 1시간 후에 출발할거야."
"Aye, Sir."
"좋아 그럼 한 시간 후에 다시 모이는 걸로 하고. 스팍, 업데이트한 보고서를 한번 더 보낼테니까 회의 전까지 숙지해두고 와."
"알겠습니다."

사소하게 아웅다웅거리고 나서는 화제 전환도 빨랐다. 커크는 한 송이만으로도 마치 꽃다발 같은 존재감을 뽐내는 외계의 꽃을 들고 있는 스팍을 뒤로 하고 터보리프트로 걸음을 옮겼다. 

"……."

리프트의 문이 닫히자마자 커크의 안색이 바뀌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오히려 더 표정을 숨기려는 듯 입술로 굳게 일자를 그리고 시선을 허공으로 이리저리 내던졌다. 그리고 괜시리 한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꾹꾹 눌러 긁어대던 커크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흐아…."

또 다시 그에게 꽃을 선물했다. 
무성한 화초는 특별한 유리 정원에서나 볼 수 있는 사막출신 외계인이, 먹지도 유용하게 쓰지도 못할 풀쪼가리의 생식기관을 선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까. 
아마도 알긴 하겠지. 지구인의 소위 '로맨틱'하다는 풍습, 일종의 구애 행위로서. 
하지만 스팍은 아까 그것이 커크가 ‘그러한 지구인의 풍습’으로서 선물한 꽃이라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아는 쪽이 더 이상하다고, 커크는 생각했다. 화려하게 포장된 꽃도 아니고 낭만적인 꽃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꽃을 주고 싶었다. 

‘순전한 자기만족으로.’ 

전에도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에게 밖에서 가져온 꽃 화분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여러 색깔의 꽃 중에서 파란 꽃은 단 한송이 밖에 없었고 그 정도의 사소한 의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스팍에게 그 특별한 한 송이를 건네주었다. 어차피 절친한 동료이자 마음이 잘맞는 상관과 부하 관계에서 이런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만약 천만분의 하나로 어딘가의 평행세계에서 스팍과 커크가 연인이 된다 하더라도, 그쪽의 스팍 또한 꽃다발 선물을 반가워할 것 같진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머슥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뺨을 더 긁어대던 커크는 승강기 문이 열릴 즈음에 개구진 표정으로 혼자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나 정도면 훌륭한 함장이지. 개인적인 감정으로 부하직원과의 관계를 망치지 않는 선에서 이 정도로 혼자 망상하고 만족하고 마는 정도면.’
저도 모르게 내내 긁어대던 뺨이 아주 조금 아려왔다. 

✳✳✳

 
본즈는 스팍이 두꺼운 종이책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모습을 발견했다. 촉감과 향이 좋다며 굳이 종이책을 끼고 사는 제임스 커크의 취향은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데 하물며 저 합리주의 초록피 외계인이 아날로그 책자라니. 

"무슨 필요에 의해서 종이책을 구해서 볼 생각을 한 거지, 미스터 스팍?"
"닥터 맥코이."

당연하게도 본즈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책의 제목이었다. 

"…임상면역학 원리와 실례 모음집? 나한테는 못물어볼 질문이라도 있었나? 아니, 굳이 나하고 상담하지 않더라도 DB 검색이 훨씬 빠르고 편할텐데 왜? 몸 상태가 많이 안좋아진 거야?"
"적당한 두께의 책을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왜…? 방에서 얼굴만 한 크기의 거미라도 출몰해? 그거라면 방역팀에 얘기를 했어야지."
"벌레를 잡는 용도로 책을 쓸 생각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대여를 한 책을 그런 식으로 써선 안됩니다."
"정말로 그 책을 읽으려고 구했다고? PADD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을? "
"살충 용도로 쓸 생각은 아니지만, 종이책 자체의 물리적인 특성을 이용할 목적인 건 맞습니다."

어쩐지 그답지 않게 에두르는 답변에 본즈의 호기심은 점점 자라났지만, 스팍이 대답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은 이상 원하는 답을 얻긴 힘들 거란 생각에 곧 모든 대화를 포기했다. 

"…그래, 뭔진 모르겠지만 잘 써보라고."


그리고 일주일 후, 본즈는 도서 데이터베이스 사서창구 앞에서 우연히 스팍을 다시 만났다. 
스팍은 책 반납구 앞에서 급하게 수백장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고 본즈는 그가 반납일에 임박해 책의 내용을 속독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을 했다. 그런 것치곤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가 너무 빨랐지만. 
그리고 잠시 후 넙적한 하트 모양의 파란색 꽃잎이 책 사이 어디선가 팔랑거리며 떨어지자마자, 스팍의 굳은 표정이 눈에 띄게 풀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한장의 마른 꽃잎을 조심스럽게 챙기던 스팍은 고개를 들다 본즈와 눈이 마주쳤다. 본즈는 아주 잠시 동안 생각이 빠져나가 영혼이 없는 듯 굳어버린 스팍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커크는 식사 도중 어깨 너머로 엔터프라이즈의 메디컬치프가 스팍 부함장의 등짝을 후들겨 팼다는 목격담을 듣게 되었다. 물론 커크는 그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았고 헛소문의 근원인 크루들 사이에 끼어들 생각도 않았다. 그는 그저 본즈에게 등짝을 맞는, 말도 안되는 스팍의 모습을 상상하며 피식 웃고는 혼자 식사를 계속 했을 뿐이었다. 



2. 

"자."

본즈는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얇고 투명한 멸균 실리콘으로 코팅된 꽃잎을 스팍에게 건네주었다. 스팍은 고개를 까닥이며 감사를 표했고 본즈는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나원참.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부함장이 이런 식으로 같은 실수를 또 할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닥터 맥코이. 분명히 짐은 그 꽃들을 가지고 들어올 때 충분한 검역과정을 거쳤고…"
"그 전에 가져온 풀들도 그 빌어먹을 검역절차를 다 밟았다고. 꼼꼼하고 집요하게 검사했던 식물들이었어."

본즈는 마치 스팍의 손에 들린 꽃잎에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닥터야말로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이렇게 밀봉을 해봤자 전 이미 이 식물에 여러번 접촉했고, 만약 이번에도 벌칸에게 치명적인 물질이 섞여 있었다고 해도 제게는 더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본즈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구, 그래. 퍽이나 좋겠다. 어차피 죽을 거니까 벌칸 에이즈에 걸려 죽으나 알러지로 기도가 부어 숨막혀 죽으나 상관없다 이거지?"
"목소리 낮춰주십시오, 닥터."
"……."

말을 멈춘 본즈는 스팍의 시선을 따라 문 앞쪽에 누군가가 없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고선 나즈막하게, 그러나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서? 짐한텐 언제 얘기할 셈이야?"
"…얘기하지 않을 생각이라 닥터, 당신에게 협조를 구했던겁니다만."
"언제까지 짐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닥터 맥코이가 끝까지 비밀을 지켜주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망할.”

본즈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노리를 짓눌렀다. 
스팍은 앞으로 오래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된 이유는 굉장히 사소했다. 하프 벌칸인 그의 면역체계를 심각하게 무너뜨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병인이, 커크에게 선물 받은 꽃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엔터프라이즈의 검역절차는 합리적이고 완벽에 가까웠다. 그러나 시스템은 최근 승무원들에게 해가 될 만한 요소를 ‘대부분’ 잡아내고선 새로 발견된, 하프 벌칸에게 치명적인 물질 한 가지를 잡아내질 못했다.

"짐도 애가 아냐, 고작 그런 이유로 자괴하고 무너질 사람이 아니라고."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함장님의 마음에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다면 엄청나게 화를 낼 거야. 차라리 그러길 바라나?"
"아니요, 짐은 끝까지 모를 겁니다. 제가 죽었다는 사실도 모를테니까요."
"그게 무슨…,"
"지상직으로 보직변경을 신청했습니다."
"뭐? 누구 맘대로? 짐이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 그땐 뭐라고 할 셈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겁니다. 저의 부재가 벌칸의 은밀한 풍습이나 비밀스러운 임무와 관계 있을 거라고 짐이 멋대로 짐작하길 바랄 뿐입니다."
"네 폰파 때처럼? 그러다가 또 네 손에 죽을 각오하고 널 따라갈 거란 생각은 안들어?"
"그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본즈는 한숨을 내쉬고 화를 내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했다. 
감정 없이 구는 모습이 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에 빠진 벌칸이란 더더욱 짜증나고 구제불능의 존재라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말았다. 
 
✳✳✳
그로부터 한달 후 역시나 스팍의 보직 이동 신청서를 발견하자마자 커크는 길길이 날뛰었고 입을 꾹 다문 스팍 때문에 그 이유를 온갖 군데서 찾아 헤매다가 결국은 본즈에게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본즈 역시 커크가 그 마음에 상처입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실수 아닌 실수로 스팍이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끝까지 하지 않았다. 커크를 위한 스팍의 마음까지도 함께 침묵 속에 묻어 버렸다. 
하지만 커크는 그렇게 쉽게 스팍을 마음 한 켠에 기억 속 존재로 묻어버리지 않았다. 



3. 

"엔터프라이즈의 이번 임무는 에렐드 지구였습니까?"

퇴근길에 갑자기 길을 막아선 커크를 발견하고 스팍이 처음 던진 질문이었다. 놀란 표정도 짓지 않고 마치 며칠 만에 다시 만난 듯 평온하게 말을 거는 그 모습에 커크가 쓰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스팍. 6개월 동안 소식 한번 없길래 죽었나 싶어서 확인차 들렀어."
"5년 탐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휴가를 받을 타이밍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음. 그거야 새로운 함장이 알아서 잘 하겠지."
"……."
"스타플릿을 그만 뒀거든."

그제서야 스팍의 한쪽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네가 이쪽으로 온 거 보니, 여기 뭐 좋은 게 있나 싶어서.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별로 재미있어 보이는 건 없네."

스팍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또 이상한 짐승을 덥석덥석 만져대고 외계 바이러스에 감염돼서 지능이 떨어지기라도 한 겁니까?"
"나도 내가 한 짓이 좀 이해가 안될 때가 있긴 한데,"
"그 정도라면 이해의 레벨이 아니라, 지능이 현저히 떨어진 수준이군요."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말이 좀 심한걸. 뭐야, 오늘 상사한테 엉뚱한 구박이라도 받았던 거야?"
"캡틴…, 아니, 미스터 커크."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스팍이 근무하고 있는 연구실 근처였다. 그를 알고 있는 몇몇 사람이 금발의 낯선 사내와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있는 스팍을 흘끗 쳐다보며 옆을 지나쳐 갔다. 

"전 당신 밑에서 일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
"늘 비효율적인 계획만 앞세우고, 논리가 결여된 과정으로, 요행이 아니면 건지기 힘든 결과물을 얻으려는 그 모습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피해서 이곳으로 온 제게 다시 다가오는 겁니까. 책임과 의무를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진작 이 얘기를 할 걸 그랬군요. "

커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러나 스팍은 그렇게 뻔히 드러나는 그의 감정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체중은 6개월 전과 비교해 엄청나게 줄어있었는데 그것이 티가 날까봐 신경 쓰였다. 조금 더 창백해진 낯빛이 유난히 녹색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닥터 맥코이는 과연 커크에게 끝까지 비밀을 지켰을까, 지금 스타플릿을 그만 뒀다는 저 사람의 말이 휴가 중에 들렀다 건넨 농담일 가능성은 얼마인 걸까. 
스팍은 두려웠다. 그리고 사실은 스스로가 근거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신체에 상해를 입을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만에 하나 감정적으로 변한 커크가 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해도 상관 없었다. 현재 일하고 있는 곳에서의 그의 평판이나 직위는 상관 없다, 어차피 몇 개월 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리였다. 그런데도 그는 두려웠다. 
무엇보다 지금 그의 가방 안에 들어있는, 누군가가 막무가내로 헤집어 바닥에 집어던지지 않는 이상 밖으로 드러날 리 없는, 크고 파란 꽃잎 책갈피를 그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스팍은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날, 스팍의 독설에 말이 없던 커크는 결국 마지막에 허탈하게 한번 웃고 마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곤 돌아섰다. 커크는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며 화내지도 않았고,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며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도 조용히 재회를 마친 그날, 집에 돌아온 스팍은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간까지 헛구역질을 해댔다. 
 
 
✵✵✵
다음날 출근길에 또 다시 커크와 만나는 게 아닐까  조금 걱정했지만 스팍의 예상은 들어맞지 않았다. 하루 종일 그 사람과 비슷한 뒷모습만 보고 착각하기를 수차례, 정작 커크가 스팍 앞에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고 그렇게 그는 에렐드를 떠난 듯 했다. 닥터 맥코이의 연락을 받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오랜만입니다. 닥터 맥코이. 그간 잘 지내셨나요."
"지미, 거기 있지?"
"…짐이라면 지난 주에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지금은 없을 겁니다."

수화기 너머로 작게 '젠장'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냐. 짐은 거기 있을 거야. 미안, 스팍. 내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내가 이번 연구 주제를 ‘그 병’으로 정하고 논문을 쓰고 있었어."
"……."
"그런데 의학논문 같은 데 관심도 없던 녀석이, 그걸 알아본 모양이야."
"…제가 병에 걸렸다는 얘길 했습니까?"
"아니. 하지만 나한테 논문에 대해서 몇 가지를 물어보더니 그 후에 보직변경 신청을 냈어. 눈치도 빠른 녀석. 당연히 신청은 반려가 됐는데, 어제 저녁에 나한테 다시 와서 그 병을 치료할 가능성이 있냐고 묻더군."
"아직 없다고 대답했더니 이번엔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거군요."
"그래. 미안하게 됐어."

커크가 정말로 스타플릿을 그만 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스팍은 잠시 안도했고 동시에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임스 커크는 그가 건네준 꽃이 병의 원인이었다는 걸 알고 죄책감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을 찾아와서 뭘 어떻게 하려고 했던 걸까. 왜 그날 알고 있던 걸 말하지 않고 그냥 돌아간걸까. 그리고 지금 짐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 중 몇 가지는 곧바로 그날 저녁에 밝혀졌다. 그리고 스팍은 본즈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는 사실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 

"스팍."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서 커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야근과 잔업을 몰아서 하고 나온 탓에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늦은 시간이었다. 싸늘한 에랜드 지구의 공기는 커크가 숨을 쉴 때마다 그의 입과 코 앞에 몽글몽글 하얀 수증기를 만들어냈다. 만약 그가 정시 퇴근 시간부터 지금까지 스팍을 기다린 것이 맞다면 지금 그의 빨간 코끝과 손끝은 보는 것보다도 더 차갑게 식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스팍은 그를 만나게 된다면 하려고 했던 이야기들을 모두 잊고 말았다. 

"어째서 그렇게 본인을 돌보지 않는 겁니까."

하지만 커크의 대답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심지어 음성조차 아니었다. 그대로 얼굴을 들이밀고 스팍에게 키스를 한 것이었다. 

“…….”

스팍은 가만히 있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커크는 스팍의 입술을 온전히 빨아들이고 그의 입 안으로 한껏 혀를 디밀어 넣었다. 뺨을 굳히는 찬공기를 뚫고 들어온 체온은 뜨거웠다. 
한참 후에야 질척이는 키스가 끝나고 머뭇거리듯 천천히 몸이 멀어졌다. 입을 먼저 연 것은 커크였다. 

"접촉 감염이었지?"

주어가 없어도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갑자기 키스를 해온 이유는 알 지 못했다. 

"맥코이 박사의 보고서를 읽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접촉감염, 경피감염, 경구감염 모든 경로로의 감염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었지."

커크는 또 다시 스팍의 멱살을 잡고 입술을 그와 맞부딪히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스팍이 그를 제지했다. 

"…전염되길 원하는 겁니까? 논문을 제대로 읽었다면 그 바이러스가 인간이 아닌 벌칸의 유전자에만 병변을 일으킨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텐데요."
"변이를 일으켰을 수도 있잖아. 넌 벌칸과 인간 혼혈이니까, 네 몸에 들어간 바이러스가 반쪽짜리 인간 유전자에도 적응해서 이젠 지구인도 죽일 수있을지도 몰라."
"일리가 있군요. 그렇다면 저는 이 곳에 거주하는 모든 지구인들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 보균자일 가능성이 있으니 격리조치를 취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피격리 대상엔 짐 당신도 포함됩니다."

스팍이 가만히 커크의 가슴팍을 밀어내자 그가 벌컥 소리질렀다. 

"이 멍청아!"
"어째서 죽으려고 합니까, 짐."
"네가 죽을테니까. 내가 널 죽였으니까!"

스팍을 노려보는 커크의 눈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왜 말 안했어. 왜 나한테 한 번도 티내지 않았어?"
"짐의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스스로를 원망하는 모습을 보일 거라 예상했습니다. 지금처럼요."
"…왜 한 번도 안돌아봤어.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을 때, 한번이라도 눈 마주쳐줬으면, 우연인 척 한번이라도 내 손을 만지고 잡아줬으면. 그랬으면 내가 알았을텐데. 왜 내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의미없이 마음 졸이게 만들었던 거야!"

그제야 스팍은 본즈가 자신에게 미안해 한 이유가 한가지 더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커크는 이제 스팍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덕분에 스팍 또한 동시에 그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냥 얼른 죽어버려."

미움을 산 듯 한 그의 말투가 차라리 반가운 스팍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 눈 앞에서 죽는 걸 봐야 나도 편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제발. 날 더이상 괴롭게 하지 말고 죽어."
"……."

스팍의 멱살을 붙잡고 있던 커크의 몸이 무너지면서 그의 마음도 함께 무너졌다.

“내 눈 앞에서 죽는 걸 봐야 나도 편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제발. 날 더이상 괴롭게 하지 말고 죽어.”
-제임스 커크는 지금 내가 죽고 나면 자신도 죽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스팍은 무너지듯 주저앉는 커크를 붙잡으며 그가 한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마음의 목소리는 스스로 던진 질문에 negative란 답변을 선뜻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왜?’

 스팍은 커크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지금 이 상황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임스 커크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피가 말라붙어 딱지 투성이인, 질기고 튼튼한 껍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라나는 새 살 같은 예민함과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넘치는 생명력으로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웃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항상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팍은 아니었다. 자신은 제임스 커크가 아니다. 사랑스러운 구석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짐은 마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마치 자신 때문에 죽을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래선 안되었다.

“닥터 맥코이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전 당신을 경멸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지난번 만남에서 충분히 얘기한 걸로 믿습니다. 그런데 당신과 닥터 맥코이가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제가 당신을 보고 웃어주거나 그 손을 잡아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 제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에까지 당신이 관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스팍을 올려다보는 커크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그의 마음 안에 있는 고통의 주머니를 스팍이 제대로 터뜨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스팍은 자신에게까지 절절하게 전달해오는 그 쓰고 아린 느낌을 참아내며, 커크라면 충분히 이것을 이겨내고 다시 그의 빛나는 삶을 끌어안을 것이라 믿었다. 

“하… 하하, 그래…? 본즈가… 날 놀리려고 그렇게 말한 건 아니었을 거고. 그래, 뭐, 본즈가… 오해했을 수도 있지. 그랬구나. 미안, 미안해…. 내가 엄청 당황스럽게 만들었겠네. …안그래도 심란할텐데.”

 커크가 주섬주섬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팍은 찬바람으로 차디차게 식었을 그의 뺨을 두 손으로 문질러 닦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죽음에 커크를 끌어들일 수 없었다. 
커크는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스팍을 잠시 동안 쳐다보다가, 곧 무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엔터프라이즈로 복귀합니까?”

 커크는 대답이 없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영혼이 빠져나간 듯 한 분위기라 스팍은 걱정이 됐다. 매몰차게 뿌리쳐야 더 이상 다른 생각을 않을 거라 생각한 스팍은 다음 순간, 커크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는 순간 그에게 달려들 수 밖에 없었다. 작지만 분명히 붉은 빛을 발하는 램프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시끄러운 소리는 없었지만 요란한 모양새로 두 사람의 몸뚱이가 얽혔고, 커크는 스팍과 함께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고 말았다.

"젠장, 스팍!!"
"스타플릿 형법 74조, 총기를 휴대하고 임무 중 이탈 시, 불법영득의 의사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무장 탈영에 준하는 처벌을 받습니다. UNA78을 제외한 ND 시리즈 이후의 페이져건은 살상모드로 직접 조작한 로그가 확인되는 경우, 범죄의 중대성이 인정되어…"

커크는 손에 들고 있던 페이져를 떨어뜨렸고 스팍은 그것을 먼 곳으로 쳐내며 기억 속에 있던 스타플릿의 법규를 읊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련 조항을 외우던 스팍은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

그의 말문을 막은 것은 커크의 절규도 아니었고 갑자기 복부로 치밀어 오른, 병으로 인한 고통도 아니었다. 그것이 그저 허황된 협박이었을지라도 자기 머리에 무기를 겨누던 커크가, 사랑하던 사람에게 그만한 상처를 줘야하는 상황이, 자신을 향한 사랑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나야하는 운명이,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스팍에게 왈칵 밀려들어 그의 목구멍을 틀어 막아버렸다. 그의 마음은 결국 단 두 마디를 만들어내고 말 뿐이었다. 

"…짐. 제발…."

잠시 동안 비처럼 굵은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맞고 누워있던 커크는 그제야 손을 들어 스팍의 머리와 그의 귀 끝, 뺨을 더듬었다. 가슴에 꽉 들어찬 무엇 때문에 스팍은 숨을 쉴 수 없었고 그것이 결국 청각까지 마비시킨 듯 했다. 커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모양은 또렷하게 알아 볼 수 있었다.

-벌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스팍.

그의 입모양이 그려내는 대로 그의 목소리가 스팍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정말로 나를 경멸해?

스팍은 고개를 저었다. 

“사랑합니다.”

기분 좋은 듯 호선을 그리는 커크의 입술이 또 다시 그 움직임으로 스팍의 머릿속에 목소리를 재생해내고 있었다.

-나도.
"……."
-나도 사랑해, 스팍.



4.

커크는 스팍과 함께 하기로 했다. 다행히 스타플릿에서 제임스 커크의 장기 휴가는 받아들여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하는 시간은 어디까지나 한정되고 제한된 짧은 순간이 될 것임을 두 사람 모두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커크는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겨 스팍의 집으로 들어왔다. 스팍이 출근하고 귀가하고 저녁에 잠들 때까지 소소한 집안일들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짐이 간소하군요.”
“그러게. 다행이야, 내 짐이 네 살림보다 많을까봐 걱정했거든.”

커크는 스팍의 조촐한 집안 풍경을 둘러보며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투로 대답하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뭘 하지?”
“…그냥 평범하게 지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직까진 제 증상이 일상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니까요. 지금은 식사를 먼저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커크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스팍을 따라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이곳에서의 생활은 생활보조인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스팍의 식단도 의사에게 처방 받은 대로 레플리케이터에 전부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사 준비에 따로 신경을 쓸 필요도 없어보였다. 스팍의 몫은 약간의 샐러드와 되직한 스프였고, 제대로 된 고형식이 없는 스팍의 식단을 훑어본 커크는 제 몫의 오므라이스를 먹는 동안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난 후엔 조금 달랐다. 커크는 식사 시간 내내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웃으며 말을 걸었다. 

“손 잡아도 돼?”

스팍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두 사람이 며칠 전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짧은 찰나 굳어 있던 스팍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어지자 커크는 그것을 허락의 의미라 생각했는지 천천히 그에게 다가섰다. 스팍이 손을 조금 들어 올리자 커크가 검지와 중지를 펴 그의 손가락에 살며시 가져다댔다. 차가운 손끝에 옅은 온기가 아슬아슬하게 와 닿았다. 스팍은 조금 의외란 표정으로 손을 내려다봤다가 커크를 바라보았다. 벌칸식 손키스였다. 스팍이 응답하듯 커크처럼 맞닿은 손으로 두개의 손가락을 펼치자 커크가 씩 웃었다.

“이게 벌칸의 방식이지?”

커크는 다른 한 손으로 스팍의 뺨을 감싸며 그 볼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이건 지구식.”

이번에도 맞닿아 있던 것은 잠시, 커크는 금방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천천히 가자고, 천천히.”
“짐.”

스팍은 손가락을 맞대고 있던 손을 펴 커크를 붙잡았다. 그리고서 커크가 했던 것처럼 스팍도 그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커크의 체온이 그새 스팍의 입술에 번졌다. 커크의 표정은 조금 장난스러워 보였지만 그 귀끝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처음 발병 사실을 알고 이곳으로 이주를 결정할 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에 스팍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커크의 마지막 말에, 병과 함께 고삐가 풀려버린 감정이 먹먹한 가슴을 다시 시커멓게 물들인다. 

‘천천히.’

남은 시간은 그것을 온전히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
아직 병세가 위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팍은 매일 연구소로 출근했다. 스팍이 커크에게 연구소의 임시직을 제안해보기도 했으나 그는 별다른 이유를 말하지 않고 거절했다. 결국 스팍의 생활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했다. 


“어서와. 오늘도 수고했어.”
“요리를 하고 있었습니까?”

초록색을 떠올리게 만드는 풀비린내가 주방에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글쎄… 이걸 요리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타이밍은 잘 맞췄네. 자.”

오른 손으로 벌칸 키스를 나누면서 커크는 다른 한 손으로 투명한 유리컵에 가득 든 녹색 액체를 내밀었다. 스팍은 잔을 받아들자마자 곧바로 주스를 들이켰다. 커크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거야?”

단숨에 잔을 비운 스팍은 입가를 닦아내며 대답했다.

“목이 마르던 참이었습니다.”
“어, 그래. 그랬구나… 그런데 내가 뭔가 이상한 걸 줬을 거란 생각은 안했어?”

스팍은 대답 대신 그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커크는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또 실수했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좋아서 선물한 꽃이었지만 그게 너한테 독이었던 것처럼.”

스팍의 커크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방금 자신의 행동이 커크가 원하던 답이 아니라는 사실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사과를 받으려고 한 말이 아냐.”

스팍은 커크의 의도를 더더욱 알 수 없게 됐다. 이것은 일종의 시험인걸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듯 가만히 서있자 커크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배회하다가 다시 스팍을 향했다. 

“…….”
“짐?”
“사과는 내가 해야지.”
“…짐.”
“내가 부주의했어. 너한테 그런 걸 줘버렸어. 사실 이딴 사과를 백번 해봤자 네가 낫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미안해. 널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해. 널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미안해.”

스팍은 미약한 흉통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느껴지는 이 감각이 지금 하려는 대답에 감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사과를 받아들입니다, 짐. 그리고 저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
“그러니 더이상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아이러니하게도 스팍이 그 말을 끝내자마자 커크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스팍은 아주 잠깐, 커크에게도 어떤 병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곧 그것이 무지한 판단이었음을 깨닫는다. 

“미안, 미안해… 괴로운 건 넌데 내가 울어서. 잠깐만… 아주 잠깐만 울게 해 줘.”

커크가 고개를 떨궜다. 스팍은 그 마음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아마도 그의 함장이 방사선을 뒤집어쓰고 죽어가던 그 순간 자신이 느꼈던 것과 같은. 
허락을 구했음에도 커크의 울음은 아직까지 그의 잇새에 갇혀 버거운 숨소리만 만들어내고 있었다. 스팍은 커크의 어깨를 감싸고 그를 끌어안았다. 무지근한 가슴의 통증이 사라지질 않는다. 어차피 사라지고 말 자신의 위로는 효용성이 떨어진다. 스팍은 가능성이 희박한 미래-자신의 병이 낫게 될 거라던가-를 암시하며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테란의 방식을 시도해보려다 이내 그만 둔다. 대신 객관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자신이 죽고 난 후의 일을.  
제임스 커크는 이겨낼 것이다. 더 이상 스팍이 없는 세상에서, 다시 우주로 돌아가 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훌륭히 해낼 것이다. 한 때는 무모하고 충동적인 그의 행동패턴에 불쾌감을 느낌 적도 있지만 그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금은 커크가 충분히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판단을 내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지금 품 안에서 흘러넘치는 이 울음소리조차 훗날 그가 다시 굳건하게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데 중요한 양분이 될 것이다.  

“…….”

스팍은 커크에 대해 걱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명치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 격통은 아마도 벌칸답지 않은 감정의 신체반응이 아니라 그저 사용연한이 다되어가는 신체기관들의 부작용일 것이라 생각하며 스팍은 억지로 안도했다. 

십여분을 울고 난 후, 눈물을 닦아낸 커크는 무의미한 사과의 말을 건냈고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스팍에게 웃어보였다. 

“오자마자 정신없게 만들었네. 미안. 피곤하지? 연구소에선 별 일 없었고?”

스팍은 커크가 원하는 대로 화제전환에 협조해주기로 했다.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짐은 계속 집에 있었습니까?”
“아니. 그냥 이 근처에서 여기저기 구경 다녔어.”
“얘기가 듣고 싶군요.”
“어? 그냥 이 근처를 배회한 것 뿐인데. 자료보관소도  가봤고, 세블럭 너머에 꽃집에 있길래 거기서 꽃들도 구경 하고.”
“그럼 혹시 제가 마신 게…”

커크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세상에, 날 믿고 있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그렇지도 않았군 그래, 미스터 스팍? 내가 카펠란꽃을 사와서 꽃은 다 따버리고 잎사귀랑 줄기만 갈아서 줬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분위기가 밝아지자 스팍의 가슴을 옥죄어오던 뭔가가 느슨해졌다. 

“그러면 꽃은 사오지 않았습니까?”
“응. 꽃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그렇군요. 무료한 시간을 보낸 것 같진 않아 다행입니다.”
“여기서도 할 일은 많으니까. 나 아직 스타플릿 연구소에서 레크리에이션룸도 쓸 수 있던데? 완전히 밉보여서 휴가 기간 중엔 권한을 전부 다 박탈 당했을 줄 알았는데 말야.”
“짐은 스타플릿에 있어서 놓쳐선 안될 인재니까요.”
“글쎄. 그 속내는 과연 어떨라나?”

커크는 쓴 웃음을 지었다.

“…어, 그런데 너무 내 얘기만 하고 있는 거 아냐?”
“이야기를 듣는 쪽이 좋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활동이 좋은 자극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

커크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스팍이 어떤 생활을 했을지 상상해버린 것이다. 그의 성정에 걸맞는 간소한 살림이라고만 생각했던 집안 풍경이 그제서야 무척이나 건조하고 황량하게 다가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스팍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한마디 말없이 홀로 식사를 했을 것이다. 명상과 일상이 구분되지 않을 침묵 속에서 어둠을 부르고 매일 밤 혼자 잠들었을 거라 생각하니 커크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았다. 하지만 커크는 스팍 앞에서 또다시 우울한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안아봐도 돼?”
“네.”

아까부터 번번히 커크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실패한 스팍은 그저 덤덤히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뿐이었다. 
어설프게 미묘한 거리를 두고 닿는 조금 서늘한 체온에 커크는 이 사람을 다시 먼 곳으로는 보내지 않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5. 

스팍은 평소와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그러나 여느 때와 다르게 방문 밖에서 부산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제부터 이 집의 식구가 한 명 더 늘었다는 사실을 쉽게 기억해날 수 있었다.  

“…….”

어쩌면 이건 일종의 위기이기도 했다. 
그는 죽음을 앞둔 벌칸으로서, 감정적인 동요를 원치 않았다. 동정도 관심도, 자기연민도 필요 없었기에 홀로 이 외딴 별에 자리 잡았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상대에게 거추장스러운 기억의 이물자국으로 남지 않으려고 한 사람을 향한 연심도 기꺼이 버렸다. 그렇게 모든 것을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챙-

얇은 유리가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커크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

이 모든 것이 싫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의 이기심을 맹렬히 비난할 것이다. 그의 부친 사렉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분명히 호되게 힐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팍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를 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동거를 제안하고 쌍방이 가진 유사한 감정을 기반으로 연애와 유사한 정서교류를 요청한 것이 바로 ‘제임스 커크’였기 때문에…

“…….”
‘아버지,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병증의 일부로 배외측전전두피질의 일부가 손상되어 이성적인 사고에 다소간의 장애를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지금의 이 모든 일들을 오로지 ‘제임스 커크의 의지’였다는 이유만으로 허락한 사실을 은밀히 고해한 스팍은 마지막 양심으로 기나긴 아침 명상에 들어갔다. 


“굿모닝, 스팍!”

스팍이 침실 밖으로 나서자 주방에 서 있던 커크가 어쩐지 수상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아침인사를 건넸다. 깨뜨린 식기는 이미 흔적도 없이 다 치워져 있었고 스팍도  딱히 물을 생각이 없었는데 결국은 커크가 먼저 고백해 왔다. 

“음. 아침에 내가 잔을 하나 깨뜨려버렸어. 미안.”
“식기는 레플리케이터로 다시 만들면 그만입니다. 다친 곳은 없었습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자, 이거 마셔.”

커크는 어제 스팍이 퇴근하자마자 내밀었던 것과 같은 향의 녹즙을 내밀었다. 커크가 권하는 것이기에 스팍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말없이 잔을 받아드는데 문득 식탁 위에 놓인 커크의 PADD가 눈에 들어왔다. 화면에는 면역력과 각종 질병에 대한 개인적인 수기들의 목록이 띄워져 있었다. 스팍은 주스를 마시기 전에 가만히 커크를 불렀다.  

“짐.”
“응, 왜?”
“…혹시 당신이 여기 와 있는 이유는, 저를 살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까?”
“…….”

커크의 대답은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스팍은 진득이 그를 기다렸다. 

“그러길 바라고 있지. 하지만 100% 가능할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렇다면 일말의 가능성은 있을 거라 믿고 있는 거군요. 예를 들면 이런 보조식품의 뜻밖의 효과 같은 걸로 말이죠.”

어느 시대에나 대체요법이나 종교를 통한 치유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나 절박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일수록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근거가 확실치 않은 각종방식에 오히려 열광하곤 했다. 물론 그의 옛 함장이 그런 미신적인 수단에 혹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짐. 현재까지 개발되어 있는 의학기술에 따르면 제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습니다. 부적절한 처치로 운좋게 제 수명이 연장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커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불필요한 희망으로 당신이 더 고통 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헛된 꿈’이라고 말해주지 않아서 퍽이나 고맙네.”

사실 크게 다르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했으나 스팍은 굳이 첨언하는 대신 묵묵히 화가 난 커크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럼 나보고 여기서 네가 죽는 걸 얌전히 앉아서 지켜보라고? 내가 대체 여길 왜 왔는데!”
“…….”

스팍은 커크에게 왜 여길 왔느냐고 묻고 싶었다. 사실은 그가 짐을 챙겨오겠다고 했을 때 진작 던졌어야 할 질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스팍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결정을 철회할까봐 불합리한 두려움으로 침묵했다. 그리고 이제는 드디어 커크가 뒤늦은 질문을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말해봐, 스팍. 너는 내가 왜 여길 왔다고 생각해?”
“정말로 제 병을 치료할 생각이었습니까?”
“왜? 그러면 안돼?!”

어느 시점부터 병은 스팍의 수많은 능력 중에서 논리를 갉아먹었다. 분명히 지금은 커크의 말에 반박하는 것이 수순이었다. 제임스 커크는 의료지식을 가진 전문인이 아니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 병에 대해 연구할 기반 지식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차례였지만, 

“…제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확신한다면, 당신은 다시 떠날 건가요?”

커크는 할 말을 잃었다. 스팍답지 않게 갑자기 맥락을 잃고 되물어오는 질문 때문이 아니었다. 

“…….”

그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갑작스러웠던 분노조차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커크는 몇 번이나 할 말을 찾아 입술을 달싹였지만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커크는 결국 눈 앞에 서 있는 벌칸을 끌어안고 말았다. 

“젠장, 스팍….”

마주 안을 생각도 않고 목석처럼 서있는 이 사내는,  감정을 죽여 없애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삶을 지양하는 벌칸이었다. 그들의 사회는 스팍이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팍 스스로도  의도치 않았을, 억눌러둔 감정이 새어나와 속절없이 슬픔에 이염 되버린 낯빛. 

“아냐, 스팍. 그게 아냐.”
“…….”
“이 감정은 전부 내 몫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실망하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전부 다. 이게 너 때문이긴 하지만 네 책임은 아니야.”
“저는 그저,”
“난 널 떠나지 않아.”

마른 몸이 미약하게 움찔-하고 흔들렸다. 그렇게 동요한 주제에 입으로 또다시 하찮은 반박의 말을 내뱉는다.

“…짐의 캐리어를 생각하면 어리석은 결정입니다. 지금이라도 스타플릿으로 돌아가는 게 당신에게 더 도움이 될테고,”
“그리고 평생 후회하게 되겠지.”
“지금 이 일도…”
“후회 안해.”

커크는 스팍을 안은 팔에 더 세게 힘을 주어 그를 끌어안았다. 마르고 단단한 어깨가 품안에서 덜그럭거리며 부딪혔다.

“만약 내가 여기서 그저 네가 죽어가는 과정을 바라보기만 하는 걸로 모든 일이 끝난다고 해도, 나는 후회 안해. 그리고 너도 후회하지 않게 해줄 거야.”
“짐.”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내 말 들어, 스팍.”

커크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먼저 날 안아.”

스팍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커크의 허리와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서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천천히 팔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커크의 밝은 색 머리카락이 뺨에 와 닿았고 스팍은 조심스럽게 그 감촉을 느꼈다. 햇볕 냄새가 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금발에선 가볍고 달콤한 향이 났다. 

“잘했어, 스팍. 그리고 이제…”
“…….”
“저 주스를 마셔.”

스팍은 순순히 그의 말을 들었다.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팔이 풀리고 몸이 떨어졌다. 다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만약 스팍이 인간이었다면 조금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벌칸이었고 덤덤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녹색 즙을 들어 천천히 그러나 한 번에 모두 들이켰다. 맛은 다르지만 그 색깔 때문에 마치 자신의 피를 마시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잘했어.”

커크는 아이를 칭찬하듯, 금방이라도 벌칸의 검은 머리카락을 쑤석일 것처럼 뿌듯한 표정을 지었고 스팍은 그제서야 작게 안도했다. 


그날 아침, 스팍은 만약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연락해야 할 사람의 목록에 주치의 외에 제임스 커크를 추가했다. 그는 여전히 커크가 자신을 살리려는 헛된 희망으로 인해 고통 받지 않길 원했지만 오늘은 더이상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스팍이 연구소로 향하기 직전에 커크가 다시 스팍을 불러 세웠다. 

“스팍.”

커크가 스팍의 입술에 키스했다. 가볍고 짧은 키스였지만 성공적으로 스팍의 허를 찌른 듯 했다. 커크는 멈춰있는 스팍을 보며 다시 한번 짓궂게 웃었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첫키스도 아니면서.”
“아뇨, 이건 분명히,”
“우리 키스는 며칠 전에도 했잖아.”

스팍은 이곳에서 그와 두번째 만났을 때, 애증을 담아 부딪혀왔던 그 날의 키스를 그제야 떠올렸다. 그것이 커크와의 첫키스였다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스팍은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고 한 손으로 커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뒷덜미를 감쌌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말랑한 입술이 먼저 닿아왔다. 다물린 입술은 조금 놀란 듯 멈춰 있다가 이내 그 틈을 천천히 벌렸다. 벌칸의 체온엔 뜨겁게 느껴지는 혀가 입술 안쪽의 점막을 훑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커크의 콧날이 광대를 스쳤고 가느다란 숨결이 스팍의 뺨을 간지럽혔다. 입안에 들어온 말랑한 살덩이를 빨아들였다. 그것은 무척이나 달콤했고 묘한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스팍은 조금 더 깊은 안에 닿으려 애썼다. 결국엔 커크가 깊은 키스에 제대로 숨을 내뱉지 못하고 가슴을 들썩였을 때가 되서야 스팍은 아쉬운 듯 천천히 입술을 뗐다. 커크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후아…, 알겠어. 이걸 우리 첫키스로 해달란 말이지?”

커크는 여전히 말 한마디 지지 않았지만 얼굴엔 열이 올라 눈이 조금 흐려져 있었다. 스팍은 연구소로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굴곡 없는 일상을 유지할 정도의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는 그저 커크의 뺨을 한번 더 어루만지고 바닥에 놓인 가방을 집어 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응. 오늘은 레플리케이터 대신 직접 만든 식사를 준비할테니까 기대 해.”
“주스도 함께입니까?”
“응. 어제보다 업그레이드된 걸로.”

커크가 윙크했고 스팍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건네는 커크를 뒤로 하고 나온 스팍은, 오늘따라 햇빛 아래서 느끼는 현기증이 견딜만 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것들이 변해버렸다. 



6. 

“태어나서 처음 키스해보는 것도 아닌데 진짜 그 순간엔 정신이 나가서 숨 쉴 생각도 못한 거 있지.”

통신기 너머로 비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제임스 커크! 집어치워! 나는 네 사적인 연애생활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트리블 속눈썹 털만큼도 없다고! 기껏 연락하자마자 꺼낸 얘기가 흡고블린 혀 빠는 실력이야?!

커크는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근심걱정이 가득한 친구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시도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 같았다. 

“왜, 귀엽잖아. 세상에 우리 부함장님이 다른 것도 아니고 첫키스에 집착하다니.”
-그게 귀여워? 미쳤군. 설마 너도 거기서 이상한 뇌질환에 걸린 건 아니지?
“하하하. 굳이 따지자면 병이라기보단, 앗! 뜨거!”
-짐?

본즈와 통신기로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손은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물이 끓기 시작해서 야채 스톡을 한 알 집어넣는데 그만 뜨거운 물이 튀어 버렸다. 커크는 찬 물에 손을 식히면서 대답했다.

“냄비에 뭘 좀 집어던졌더니 물이 튀네.”
-요리 하고 있는 거야?
“응. 그러고 보니 본즈는 내가 만든 요리 먹어본 적 있던가, 생도 시절에?”
-그랬지. 스팍에게 애도를 표해야겠구만.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이번엔 레시피대로 제대로 개량하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것 봐, 역시 제멋대로 넣었으니 요리가 그 모양이었던 거야. 젠장. 

대화를 나누면서 기분이 나아진 건 커크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주키니를 닮은 야채를 썰다 말고 크게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잠시 후 아까보다 조금 더 풀어진 본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뾰족귀가 아직 식사는 잘 하고 있나봐. 다행이네. 다른 건 좀 어때? 
“글쎄, 잘 모르겠어. 스팍 담당의한테 얘기했는데 개인 정보라고 알려줄 수가 없대. 이따가 스팍하고 얘기 해봐야할 것 같아.”
-그게 뭐야.
“그리고 스팍이 내 앞에서 일부러 아픈 티를 안내는 것 같아서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지금은 나보다 네가 더 스팍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스팍 의료 기록이 너한테도 간다며?”
-어. 논문자료로 쓰겠다고 스팍한테 허락 맡았어. 

커크는 믹스블랜더를 꺼내려다가 도로 보관함 문을 닫았다. 그리고선 주방에서 나와 작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럼 이제 얼마나 남은 거야?”
-뭐가?
“수명.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스팍이 알고 있어도 나한테 알려줄 것 같지가 않아서.”
-나보고 의료인 윤리지침을 어기라는 거야, 지금?

그러나 본즈의 대답은 그저 잠시 시간을 벌려는 목적일 뿐이라는 것을 커크는 잘 알고 있었다.

“본즈. 내가 스팍의 병세로 어떤 이득을 얻으려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넌 스팍의 주치의도 아니고. 이건 그냥 친구로서 물어보는 거야. 네 친구 스팍의 안부를 묻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커크는 고개를 젖혀 소파에 기댄 채 진득하게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본즈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몰라.
“그래…?”
-지금까지 선례가 없었으니까.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려고 해도 자료가 너무 없어. 하물며 하프 벌칸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는 더 빈약하지. 
“그래도 반은 인간이잖아. 과거에 지구에 있었던 비슷한 질병들에 관한 자료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나머지 반은 벌칸이지. 사실 스팍의 몸은 인간보다 벌칸에 가까워. 그래서 벌칸의 연구기관 쪽으로 컨택 해보기도 했는데… 그쪽은 별로 소득이 없었어. 
“하긴. 그런 거라면 이미 네가 다 확인해봤겠지.”

커크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사실 본즈는 스팍의 질병에 대한 공동연구를 벌칸 측에 제안해보기도 했지만, ‘존재 자체가 드문 하프벌칸’에게만 발병하는 희귀한 병에 대한 투자는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답변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물론 대놓고 그리 말한 것은 아니고 그들 특유의 냉랭함으로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런 얘기를 커크에게 할 수는 없었다.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그가 커크에게 건넬 말은 충분히 절망스러운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커크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놔둘 수는 없었다. 

-…길면 3년.
“…….”
-지금 증상이 같은 속도로 진행된다면 그 정도야.
“그러면 진행속도에 따라 더 짧아질 수도 있는 거네?”
-그렇겠…지.

커크의 머릿속에 고바야시마루 테스트가 떠올랐다. 
커크는 자기 때문에 동료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겪어 봤고, 아버지와 같은 존재의 죽음도 접했으며 심지어 직접 죽어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직 끝나지 않은 고바야시마루 테스트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집 안에 들어선 스팍은 평소보다 습윤한 온기가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어서와, 스팍.”
“다녀왔습니다. 요리 중이었습니까?”
“응. 오기 전까지 다 해놓으려고 했는데 조금 늦어버렸네. 쉬면서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 배 많이 고파?”

지금까지 집안의 온도는 벌칸에 최적화된 온도였지만 커크가 온 뒤로는 그것보다 조금 더 낮춰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스팍은 지금의 실내 공기가 여느 때보다 안락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천천히 진행하십시오.”

그러고보니 실내에선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클래식인가요?”
“응.”
“짐의 새로운 취향을 알게 됐군요.”
“나라고 항상 소리 지르고 뚜들기는 음악만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잔잔한 재즈가 흐르는 동안 스팍은 식탁에 앉아 커크가 나머지 요리를 하는 걸 지켜보았다. 제법 착실하게 앞치마까지 매고서 냄비를 휘젓고 있는 뒷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과연 이 행복을 인생이 허락해준 마지막 선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물론 인생은 의지를 가진 지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의도란 것이 있을 수 없으며 사실 모든 것은 스팍의 선택에 따른 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 결과를 ‘불가해한 우연과 필연이 섞여 만들어진 뜻밖의 행복’으로 치환하고,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외면하고 싶었다. 

“다 됐어.”

어느새 테이블을 세팅한 커크가 비관적인 상념에 빠질 뻔 한 스팍을 불렀다. 식탁 위엔 여느 때보다 싱싱하고 풍성해 보이는 샐러드와 선명한 빛깔의 벌칸 스프가 놓여 있었다. 

“아.”

스팍이 그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 가방이 걸린 곳으로 가서 큰 종이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이게 뭐야, 스팍.”
“짐이 식사를 준비한다고 해서 저도 뭔가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사봤습니다.” 

스팍이 꺼낸 것은 푸른 색 툴라베리 와인이었다. 커크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 난 그냥 평소랑 똑같은 메뉴를 준비했을 뿐인데. 이러면 꼭 촛불이랑 꽃을 준비해야 할 것 같잖아.”
“어차피 알코올은 저에겐 의미가 없으니 굳이 분위기를 조성해서 함께 마실 필요는 없습니다. 짐을 위해 가져왔으니 짐이 원할 때 마시면 됩니다.”
“고마워, 스팍.”

커크가 스팍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스팍은 커크가 키스를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그를 붙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감정은 사치이고 무의미하며 혼란을 가져올 뿐이지만, 스팍은 지금 느껴지는 이 고양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한 손으로 커크의 손을 붙잡아 깍지를 끼고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손목을 살며시 문질렀다. 

“읏…”

커크의 어깨가 움찔하고 흔들렸다. 

“잠깐, 잠깐, 스팍!”

커크가 스팍의 가슴을 조심스럽게 밀어냈고 스팍은 조금 뒤로 물러나면서도 깍지 낀 손을 놓지 않았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 그래도 넌 환자잖아. 영양공급은 제때 꼬박꼬박해야 하니까.”

커크가 이 행위에 거부감을 느껴 핑계를 대는 것 같지 않았다. 그가 댄 근거는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스팍은 마지못한 듯 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겨우 손깍지를 풀고 식탁 앞에 앉았다. 

“레플리케이터로 만든 것보단 맛있을 거야. 많이 먹어. 아, 위장에 주스 들어갈 자리는 남겨두고.”

스팍은 커크가 준비해 준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제임스 커크와 함께 있으면 병증이 완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고작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병이 나을 리는 없겠지만 진행속도가 더뎌지는 듯 한 착각에 빠지기엔 충분한 감각이었다. 그래서, 희미해져가던 의지가 되살아나고 눈 앞이 조금 더 밝아지는 기분에 잠시 활력이 돌아 저지른 실수였다. 과도한 애정 표현으로 그를 밀어붙여서는 안됐다. 식사를 마친 후엔 커크와 함께 있기보단 방으로 들어가 잔업을 처리하는 쪽이 낫겠다고 판단한 스팍이었다.
그날 저녁도 스팍의 명상시간은 여느 때보다 길었다. 

 

7.

감정을 절제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커크는 요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고 스팍이 방에서 나왔을 때는 익숙한 빛깔의 주스부터 내밀었다. 스팍 또한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고 곧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

그러나 그날의 아침은 평소와 달랐다.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명치에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스팍?!”
“쿨럭!”

기침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허리가 접힐 정도로 격한 기침이 터져 나왔고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녹색 액체가 터져 나왔다. 토혈이었다. 스팍은 자리에 주저앉아 떫은 향이 나는 체액을 토해내다가 한참 후에 겨우 진정했다. 떨군 고개의 시선 끝에 커크의 발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미, 미안해, 스팍. 오늘은 씀바귀를 더 넣었는데 말을 안했어. 그렇게 썼어? 미안.”

커크의 목소리는 곤란한 기색을 띄고 있었으나 피를 본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황망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스팍은 커크가 녹색 주스와 그의 피 색깔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팍은 애써 숨을 고르며 허리를 폈다. 

“괜찮습니다. 그저, 예상치 못했던 자극이라 몸이 놀란 것 같군요.”
‘내가 지금까지 무슨 착각을 한 거지.’

스팍은 갑작스럽게 무리가 가해져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들키지 않으려고, 잠시 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커크가 미안한 표정을 하고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스팍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이것보다 더한 표정을 지을 제임스 커크를 보고 버틸 수 있을까.’

그를 다시 만난 날,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던 커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도 그저 그 모습이 싫어서 이 집으로 들어오겠다는 그의 요청을 수락해버렸는데. 
뱃속이 타는 것 같았다. 몸이 진정되길 바랐지만 이제 경련은 턱까지 타고 올라왔다.  

“…스팍?”

그제야 뭔가 잘못 된 것을 깨달은 커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스팍의 어깨를 붙들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잠시,”

시야가 빙글 돈다. 뭔가가 그의 내장을 움켜잡고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기분이었다. 스팍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짐, 진정… 하세요. 전, 괜찮,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침착하고…,”
“진정 못하고 있는 건 너잖아. 젠장, 의사를 부를게.”

스팍은 정신을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애를 썼다.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스팍은 과거 누클리어 챔버 안에서 커크가 느꼈을 고통을 떠올려본다. 스팍 대사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한다. 허상에 공포에 짓눌리면 안된다. 정신을 가다듬고. 정신을 가다듬고. 정신을 가다듬고. 정신을…
그리고 스팍은 의식을 잃었다. 
 
✳✳✳
 
스팍이 다시 눈을 뜬 곳은 스타플릿 연구소 부속 메디컬 센터였다. 낯선 천장이 보이고 낯선 공기가 느껴졌다. 얼굴에 매달려있는 호흡기를 매만져 본 스팍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쪽 간이침대 위에서 커크가 웅크려 자고 있었다. 

“…….”

스팍은 커크를 부르지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스팍의 손끝에 달린 생체감지기가 자동으로 담당 의료진에게 그의 각성을 알렸고 잠시 후 병실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 와중에 커크도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어났다. 

“스팍.”
“짐.”

의료진들이 한바탕 스팍의 상태를 점검하고 나간 뒤에 커크가 부은 눈을 하고 스팍에게 다가왔다. 

“기분은 좀 어때?”
“컨디션은 정상적인 범주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미안해.”

커크는 또 다시 사과를 하고 있었다. 쓰게 웃고 있었지만 스팍에게 우울한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것 뿐이었다.

“피인지 음료인지도 구분 못하는 보호자라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한심하다. 그치?”
“짐이 끝까지 모르길 바라면서 제가 거짓말을 했으니까요.”
“…내가 널 챙겨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독이 되는 걸 줬나봐, 이번에도.”

스팍은 커크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짐.”
“응.”
“저를 포기하십시오.”

스팍이 나를 살리기 위해 여기 온 거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와는 달리 커크는 이번엔 화내지 않았다. 하지만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지도 않았다.

“난 포기 같은 거 안 해.”
“짐이 이제부터 어떤 일을 해도 제 상황이 나아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앞으로 당신이 했던 모든 일들이 저를 망쳤다고 믿고 일일이 자책하게 될 겁니다.”

스팍이 피를 토하고 쓰러진 것도 커크의 주스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는 분명히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스팍의 말에 정곡을 찔린 커크는 말이 없었다.

“당신게 제 마음을 알리고, 당신의 감정을 알게 된 걸로 끝내야 했습니다. 제 어리석은 판단으로 많은 걸 망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돌아가십시오, 짐.”
“네가 죽으면 돌아갈거야.”
“당신이 스타플릿으로 돌아간 후에라도 저는 알아서 죽습니다.”
“말했잖아! 난 네가 죽는 걸 지켜볼 거라고!”
“죽음은 언제나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지금 짐이 생각하고 있는 미래를 확신하지 마십시오.”

커크는 이를 악물었다. 

“나보고 지금 당장 돌아가라고? 그럼 네가 지금 당장 죽으면 되겠네.”

커크의 떨리는 손이 스팍의 목덜미를 향해 왔다. 축축하게 젖어있는 두 손이 스팍의 목을 감싼다.  
스팍은 과연 산소가 없이 얼마나 의식을 유지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지구인이라면 3-4분 정도를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벌칸은 그것보다 더 긴 시간 동안 가사 상태를 유지해 뇌세포의 파괴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스팍이 생각한 것은 자신의 목숨 보전 따위가 아니었다.
손가락이 조여 올수록 경동맥의 욱신거림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마 커크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 

자신이 죽고 나면 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성취와 명예가 주어진 함장 자리를 내치고 온 그가 구원받지 못할 자신에게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커크의 눈을 보면서, 목을 조른 그 손을 끝까지 붙잡지 않고 기다렸다. 스팍이 처음 그의 마음을 외면했을 때, 제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던 모습이 생각났다. 설마 그런 충동적인 행위를 또 다시 시도하진 않겠지. 그러다 또 다른 생각이 든다. 커크의 지금 이 행동도 지극히 감정적이며 즉흥적이지 않은가. 만약 자신이 지금 죽는다면 의사들은 그의 목에 남은 교살흔적과 결막의 점상출혈로 그가 살해당했음을 쉽게 알아챌 것이고 커크는 곧바로 범인으로 지목될 것이다. 스팍은 뒤늦게 그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크의 손으로 마지막을 맞이하는 건 상관없지만 지금 이곳에서 안된다. 
그러나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눈길만으로도 곧 커크는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알아서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의 마지막 외침이 스팍의 가슴에 너무나도 사무쳤다.

 “그만해. 대체 언제까지 날 괴롭게 할 거야!”

스팍은 괴로웠다. 그가 자신과 함께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 뜻밖의 동질감. 부조리한 감정임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날 저녁 의사는 절대안정을 빌미로 커크를 병실에서 내쫓았다. 아무래도 스팍의 요청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커크로선 별 수가 없었다. 커크는 혼자 스팍의 집으로 돌아왔다. 

“…….”

낮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스팍보다 먼저 집에 들어오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다른 기분이었다. 

‘네가 혼자 있는 동안 느낀 게 이런 감정이었겠지.’

커크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스팍에게 받았던 와인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쓰린 가슴 때문에 알코올이 간절히 생각나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다지 도수가 높은 술은 아니었지만 한꺼번에 들이키니 제법 속이 홧홧해졌다. 

‘속을 알 수 없는 변덕쟁이 벌칸 같으니라고.’

자신을 자꾸만 밀어내려 하는 스팍이 얄미웠다. 조금만, 조금만 더 미웠으면 좋았을텐데. 그럼 커크도 미련 갖지 않고 이곳을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커크는 가슴이 답답해 결국 레플리케이터로 알콜을 만들어 맛도 없는 화학물질을 목구멍으로  더 들이부었다. 
한참 후 커크는 둔해진 머리 덕분에 고통에 조금 둔감해져 있었다. 

“그래, 뭐. 유산은 법대로 해결하고, 결국 이 집도 네 장례식도 전부 내 손으로 처리해 줄건데. 다시 말하면 여기 있는 것들 결국은 다 내 손으로 꺼내서 버려야 한다는 거잖아.”

커크는 집안의 서랍들을 전부 열어 제끼기 시작했다. 홧김에, 그리고 술김에 저지른 일이었다. 그러나 뭔가 특별한 물건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스팍은 정말로 어느날 갑자기 찾아올 마지막 날을 준비하기로 한 듯, 최소한의 살림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맥이 빠진 커크는 조금 시무룩해져 거실의 소파에 몸을 묻고 앉아버렸다. 아직 뒤져보지 않은 스팍의 가방이 눈에 띄었다. 어차피 여기에도 별 것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커크는 가방을 열고 아예 거꾸로 흔들었다. 
휴대용 하이포와 약물캡슐, PADD와 얆은 종이책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커크는 그 중에서도 종이책이 신경 쓰여 집어 들었다. 우주 희곡 해설집이었다. 

“정신줄 놨을 때도 셰익스피어를 읊던 벌칸답네.”

커크가 아련하게 웃으며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기 시작한 그 순간, 메모지 같은 것이 사이에서 떨어졌다. 

“……?”

커크가 집어 들고 살펴본 그것은 메모지가 아닌 책갈피였다. 하지만 책갈피 치곤 너무 크기가 컸다. 얇고 파란 무언가. 

“…….”

그가 마지막으로 선물 했던 꽃. 
멍청하게 크기만 했던 꽃잎을 알아보는 데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젠장, 스팍.”

이런 게 무슨 논리정연하고 냉철한 벌칸이야. 거짓말 만 하고 결국 아까도 나한테 마음에 없는 소리만 해댄 거잖아. 
커크는 또 다시 무너졌고 스팍이 사무치게 그리워 또 다시 울고 말았다. 



8.

“본즈. 스팍이 입원했어.”
-응, 연락 받았어.
“다시 퇴원 못할지도 모른대.”
-그래.
“스팍이 나보고 자꾸 엔터프라이즈로 돌아가라더라.”
-그것도 괜찮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통신기 너머로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본즈의 목소리는 피곤한 듯 조금 갈라져 있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뭐 어쩔건데? 진짜로 올 것도 아니잖아. 애초에 네가 거기로 간다고 했을 때도 바보에 멍청이에 얼간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예 말 안한 것도,
“지금 말하고 있는데요, 미스터 센서티브. 본심이 막 줄줄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이것 봐, 어차피 내가 말하는 건 신경도 안쓰잖아. 결국은 네가 부딪히고 겪어봐야 직성이 풀리겠지.
“응, 그렇지. 역시 넌 날 잘 알아.”

커크는 비어버린 술잔을 의미 없이 흔들어보다가 다시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스팍은 괜찮지 않은 게 뻔히 보이는데도 나한테 거짓말을 해. 지난번엔 내가 없는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더라. 이젠 영양도 수액으로 공급해야 할 것 같은데 나한테 괜찮은 척 하느라 억지로 식사를 하고 있어. 그러다가 또 토하고, 질리지도 않나봐. 벌칸 주제에 맨날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길래, 나도 이젠 같이 거짓말을 해주고 있어. 너 죽고 나면 나도 뒷정리 마치고 따라 죽을 거라고.”
-짐.
“거짓말이라고 했잖아. 내가 왜 죽어. 그냥, 괜히 스팍 하는 짓이 괘씸해서. 조금이나마 더 연명할 의지라도 가지라고 하는 소리지. 이 지경이 되서도 도무지 본인 몸을 돌볼 생각을 안한다니까.”
-그래.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 우리 지미가 아니지.
“오늘도 오지 말라고 했지만, 저녁에 가서 또 괴롭혀 줘야지.”

술김에 뒤집어 엎어놓았던 집안 풍경은 다시 깨끗이 정돈된 상태였다. 다만, 커다란 꽃잎 한 장 만이 커크가 앉아있는 소파 앞 테이블에 올라와 있을 뿐이었다. 

-짐. 

본즈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말해, 본즈.”
-어차피 모든 걸 감당하는 건 살아남은 사람들 몫이야. 아직 네가 겪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항상 나중 일을 생각해. 그때가 되서 쓰러지지 않게.

그 순간이 왔을 때,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커크는 막연하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비참하게 쓰러지고 고통스럽게 울고 난 뒤에 다시 일어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것도 별로 자신은 없지만. 

-네 건강까지 상하지 않게 조심하고. 계속 스팍한테만 매달리지마. 어차피 너도 알고 있는 뻔한 소리겠지만, 네가 잘 버텨야 스팍도 버틸 수 있어. 나도 아직 확실히 말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버텨봐. 
“응, 고마워.”

커크는 진심을 담아 본즈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집에서 조금 휴식하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을 땐 스팍의 몸에 달린 줄이 하나가 더 늘어나 있었다. 결국 경구섭식을 중단하고 가는 선 하나로 영양을 공급받게 되었다고 했다. 스팍의 입술은 갈라지고 암녹색을 띄고 있었다. 커크는 애써 활기차게 웃으며 스팍을 자극했다. 

“이제 밥도 못먹는다며? 음. 올 때 보니까 날씨 좋더라. 죽기 좋은 날이야.”

말하면서도 커크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과연 이것은 생존을 유지하게 만드는 적절한 자극일까, 흔들리고 꺼져가는 생명에 입김을 부는 것일까. 
본즈와 스팍은 둘 다, 그가 이제부터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결국 후회와 자괴감만 남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나중엔 그것대로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뭘 하든 모든 일이 거기서 거기 아닌가. 

“아, 물론 너보다 먼저 죽진 않을 거야. 네가 먼저 죽어야 따라 죽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럼 죽질 말던가.”
“불가능합니다.”
“안돼, 타협은 없어. 죽지마.”
“불가능합니다.”
“그래, 그럼 할 수 없네. 나도 죽어야지.”

스팍의 입장에선 혼란스럽기만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당장 죽으라고 목을 조르던 이가 이제는 막무가내로 살 것을 명령한다. 스팍은 끊이지 않는 이명으로 어지러운 머릿속 혼란을 다잡으며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적절한 대안을 생각해내려 했다. 그리고 결국 나온 제안은 이것이었다. 

“짐, 당신이 저로 인해 심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압니다.”
“그래.” 
“하지만 제가 죽고 나면 그 고통은 분명히 끝이 납니다. 감정은 무뎌지고 사라집니다. 당신의 삶을 중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 겪고 있는 스트레스가 후일을 도모하는데 영향을 끼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제 결론은 당신의 괴로움이 장시간 지속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며,”

스팍은 말하기가 힘이 드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괴로움은 저를 지켜보는 행위에서 기인한 것이겠지요. 제가 죽고 난 후에 스타플릿으로 복귀해 정상적인 임무 수행을 하겠다고 저와 약속한다면, 짐. 언제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편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커크의 한쪽 눈썹이 언제가 본적 있는 모습으로 슬몃 일그러졌다.  

“당신 앞에서든, 이 세상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저를 지켜보는 당신의 고통을 지금 바로 끝내드릴 수 있습니다.”

스팍은 확답을 받고 싶었다. 커크라면 분명히 그의 제안을 신중하게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최소한의 고통으로 이 상황을 끝내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것이 논리적인 수순이었다. 하지만 커크의 눈빛은 수상했다. 불길하다. 몇 번이나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이 멍청아. 내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니었어!”

스팍의 고개가 갸웃하고 기울어진다. 커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손 둘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허공을 두 손으로 몇 번이나 움켜쥐었다가 곧 털썩 소리가 나도록 어깨를 떨궜다. 그리고 병실 한 쪽에 있는 의자를 끌고 와 스팍의 침대 바로 앞에 앉았다. 스팍은 그가 화가 난 것이라 생각했지만, 커크는 스팍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슬며시 깍지를 끼자 부쩍 마른 손가락들이 딱딱하게 부딪혀 왔다.  

“됐어, 그냥 하던 대로 거짓말이나 해줘.”
“짐. 벌칸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날 경멸한다며.”
“…….”
“논리적이지도 않고 수작이나 부리고 머리도 나빠서 싫어한다고 했잖아. 아니, 환멸난다고 했던가. 그거 진담이었어?”
“…아닙니다.”
“거 봐.”

커크는 이제 스팍의 무릎에 머리를 얹었다. 

“거짓말 해봐.”
“제가 어떤 거짓말을 하길 바랍니까?”

병실 안엔 기계가 돌아가는 미약한 소리와 두 사람의 목소리 뿐이었다.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서로에게 똑똑히 들렸다.

“안 아프다고 말해.”
“아프지 않습니다.”
“사실은 사우리안 브랜디를 좋아하지? 취미가 밤에 혼자 술 마시는 거고?”
“…그렇습니다. 가끔은 기분이 좋아져서 몰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커크가 키득거리고 웃었다. 스팍은 그가 웃는 모습을 보고 잠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커크는 그에게 그다지 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죽지 마.”
“…….”
“얼른 대답해, 스팍.”
“그건 제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짐.”

커크는 깍지 끼고 있던 손가락에 꾸욱 힘을 줬다. 

“의지? 애초에 그럴 의지가 있긴 해? 악마가 나타나서 병을 낫게 해 줄 테니 네 영혼을 달라고 제안하면 흔쾌히 수락할 수 있냐고.”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오, 나도 알아, 그거. 하늘에다, 톱니바퀴 잔뜩 달린 수레에 신을 태워서 끈으로 내려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그거 말이지? 그거 좋네.”

그러나 이번에도 한껏 비꼬는 말 끝에 결국엔 사과가 따라왔다. 

“미안해, 스팍. 사실은 네가 제일 힘들텐데.”
“사과를 청할 거라면, 나중에 엔터프라이즈로 돌아갈 거란 약조도 함께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런 기회주의자.”
“뭐라고 부르셔도 제 본질이 변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커크는 대답 대신 스팍의 차가워진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직 둘이서 할 것이 많이 남아있는데. 시간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천사가, 아니, 신이 나타났다. 



9. 

-치료제를 개발했어.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의료진들이 스팍의 병실에 들이닥쳤고 그와 동시에 메세지를 보낸 본즈는, 그날로부터 그들의 신이 되었다. 
모든 일은 갑작스럽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닥터 맥코이의 논문에 기반 해 만들어진 치료제는 초기임상실험만을 거치고 곧바로 스팍에게 투여되었다. 사실상 다음단계의 임상실험을 스팍의 몸으로 시행하는 것과 다름없었지만 그들에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스팍은 오랜 기간 격리실에 반강제로 감금되었고 커크가 그 방에 들어가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했던 것 같지만 그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스팍의 몸은 점점 나아졌다. 섭식장애가 나아져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균형 감각을 되찾기 시작했다. 구역질이 그치고, 가만히 걷다가 풀썩 쓰러지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더디게 호전되었으나 차차 병은 사라져 갔고, 한 달이 되던 날 스팍은 직접 병원을 찾아온 본즈에게 완쾌를 선고 받았다.
 
✳✳✳
“…스팍?”

본즈가 스팍을 데리고 커크가 기다리고 있는 집까지 찾아갔을 때, 커크는 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본즈가 중간중간 스팍의 경과를 알려주긴 했으나 오늘의 퇴원은, 커크를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알리지 않은 탓이었다. 커크는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스팍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신을 반길 경황은 없을 거라 예상했으면서도 생각보다 더 얼빠진 커크의 반응에 본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홀로그램 아니니까 정신차려.”
“진짜 스팍이야? 정말로 괜찮은 거야, 이제?”

커크는 반신반의하듯 물었다. 스팍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이제 짐도 약속대로 함장으로 복귀할 차례입니다.”
“스팍 맞나보네.”

 커크의 표정에 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본즈를 와락 끌어안았다. 

“본즈! 넌 진짜 우주에서 제일의 명의야, 천재야! 신!”
“으앗, 놔! 숨막혀 죽겠어, 지미! 그만!”

문 앞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진정이 되는데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본즈는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었고 스팍과 관련해 내야 할 보고서가 많았기 때문에, 두 사람과는 곧 엔터프라이즈에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며 돌아갔다. 나중에 치료를 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나 경과 보고에 관한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방 안에 두 사람만 남았을 때 분위기는 꽤나 머슥해졌다. 아니, 어쩐지 어색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커크 뿐이었다. 스팍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방바닥을 하릴없이 노려보고 있던 커크를 돌아보았다. 

“묻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조금 여윈 모습이었지만 예전과 다르게 머리카락에 윤기도 돌고 이제 혈색을 완전히 되찾은 스팍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왜 저를 좋아한다고 판단했습니까?”
“어?”
“갑작스러웠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동안 답을 듣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질문들을 이제는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그래?” 

커크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잘 모르겠어. 널 좋아한 이유… 그냥, 처음엔 네가 내 사람처럼 느껴졌어.”

스팍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커크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대답인 듯, 짧게 한숨을 쉬고 나선 곧 쉼 없이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그게 네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나도 처음엔 외면했던 건데, 네가 내 부함장으로 있는 동안 너한테서 느꼈던 신뢰감, 안정감 이런 것들이 정신차리고 보니 이미 업무상 편의의 수준을 넘었더라고. 단순히 나에게 없는 면에 대한 동경이나 일 잘하는 동료에 대한 호감 정도로 생각했는데 점점 그게 커졌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네가 없으면 나는 어떡하나 진심으로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는 날 발견했어. 그런데 그게 현실이 돼버렸지. 네가 보직변경신청을 하고서 내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을 때 말야, 처음으로 우주가 무섭다고 느껴졌어. 그게 뜻하는 건 말이지,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이 다시 없어져 버린다는 거야.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넌 알까? 아냐, 사실은 나도 모르겠어. 아무리 내가 도망을 잘 치는 인간이라고 해도 말야…”

갑자기 커크가 상념에 빠졌고, 스팍은 걱정스러운 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깨달은 커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아냐. 그러니까 이게 아냐. 이런, 대체 지금 이게 무슨 소리지?”

길게 주절거리던 커크는 결국 말미엔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아마도 그가 말하지 않은 부분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것 같았지만, 이젠 그것들을 ‘천천히’ 알아나갈 수 있다고 스팍은 생각헀다. 그런데 이번엔 커크가 갑자기 정색하며 말했다.

 “그럼 너는? 아직도 날 좋아해? 나 때문에 죽을 뻔 한데다 내가 널 그렇게 괴롭혔는데 원망스럽진 않았어?”

스팍의 대답도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내용이었기에 말들은 쉽게 입술 밖으로 밀려나왔다.

“당신은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짐. 여린 꽃처럼 예민하고 순수하지만 질긴 덩굴처럼 강인하고 집요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넘치는 생명을 동경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겁니다. 당신은 늘 쉬지 않고 뛰어다녔고 항상 무언가를 성취해냈습니다. 그 모습은 늘 빛이 났습니다.”
“…….”
“어떤 때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당신 머리 뒤에서 빛이 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어, 음. 스팍? 아직 아픈 게 덜 나았어? 치료 도중에 뇌 손상이 온 건 아니지?”

갑작스레 늘어놓는 장황하고 간지러운 고백에 커크가 되레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벌칸은 본래 문학을, 예술을 사랑하는 종족입니다. 딱히 제 몸에 어딘가가 잘못돼서 이상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생각해왔던 것들이지만 당신이 이 말을 들으면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동안엔 말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마저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면 이제 이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러나 스팍은 뜻하지 않게 말로 그를 농락하는 대신, 행동으로 표현 하기로 했다. 스팍은 커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다 그의 목덜미 쯤에서 손을 멈추고 그에게 키스했다. 커크도 그의 얼굴이 다가오는 순간 그와 함께 눈을 감았다. 스팍에겐 언제나 뜨겁기만 했던 커크의 입술이 지금은 안락한 온기로 느껴졌다. 호흡을 나누는 동안 온 몸에 포근한 평화가 넓고 깊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커크는 지금 느낄 수 있는 감각들을 그런 몽글몽글하고 보드라운 영역에만 한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짐?”
“정말로 다 나은 거 맞지?”

스팍의 손을 붙잡은 커크가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을 천천히 간질였다.  

“나도 그 동안 네 몸을 위한 거라고 생각해서 자제했던 일들을 이제 포기하지 않으려고.”
“…….”

그리고 그 직후, 커크는 벌칸이 지구인의 세배가 되는 체력을 되찾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몇 가지 먼저 알게 되었다. 가벼운 인형처럼 그의 몸이 번쩍 들렸고 어느샌가 벽 쪽으로 몰아붙여진 채로 숨막히는 키스가 쏟아지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스팍의 침대 위였고, 그 다음엔…

아직도 커크의 휴가는 많이 남아있었고 그들은 처음으로 그 시간들을 천천히, 행복한 일들로 채워나갈 수 있게 되었다.  




10.

제임스 T. 커크는 오랜 휴가를 마치고 엔터프라이즈로 복귀했고, 스팍 또한 약간의 재활 기간을 걸친 뒤 다시 함선에 올랐다. 
되돌아온 함장과 부함장이 연인 사이가 됐다는 사실은 크루들 사이에선 그다지 유난스러울 것 없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커크는 이렇게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것 같았으면 자기가 그동안 그 마음고생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댔다. 사실 그가 겪었던 심적인 문제의 원인은 그게 아니었지만 스팍은 모른 척하고,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한 커크의 괜한 너스레를 받아주었다. 
스팍은 먼 훗날 닥터 맥코이의 도움을 받아 벌칸과 이종족의 혼혈을 위한 의료재단 설립 하는 것을 인생의 새로운 목표에 추가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푸른 잎으로 만들어진 책갈피를 가지고 다녔으며 그의 새로운 연인에게 언제나 먼저 꽃을 선물하는 로맨티스트가 되었다.   

두 사람은 그 후로 오래도록 함께 했고. 수많은 별들의 땅을 함께 밟았다. 



-Fin.
 
2024.02.14 23: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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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한 스팍커크 무순을…!!! 센세 재업은 사랑이야ㅠㅠ
[Code: a68f]
2024.02.14 23:4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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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악 못 본 글인데 센세가 재업해 준 덕분에 읽을 수 있었어 무한감사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끝의 끝에서 스팍의 병이 나았네 다행이다... 스팍커크 행쇼하고 본즈는 신이에요ㅠㅠㅠㅠㅠㅠ
[Code: 3a3f]
2024.02.15 02: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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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센세 재업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이런 작품이 우리 우주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마지막에 스팍이 죽는 건 아닐까하는 마음이 들어서 몰입해서 보는 와중에도 조마조마했는데 이렇게 해피엔딩을 보여주시다니.ㅜㅡ 게다가 스팍, 커크, 본즈 전부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이 원작의 캐릭터를 떠올리게해서 더 좋았어요.
이 우주의 원작은 이 작품이예요, 센세.ㅜㅡ
[Code: 24d5]
2024.04.02 11: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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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행복해 센세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7f7b]
2024.05.04 00:4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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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ㅠㅠㅠㅠㅠㅠ
[Code: e577]
2024.05.04 17: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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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ㅜㅜㅜㅜ 센세 고마워요ㅠㅠㅠㅠ 코맙읍니다ㅜㅜㅜㅜㅜ
[Code: 09f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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