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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5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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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금요일]

김철수 님 귀하

이렇게 편지를 쓰려니 어색하네요.
우선 저에 대한 지원에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첫 편지니까요. 저는 오늘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꽃다발 보내주신 거 잘 받았어요. 태어나서 그렇게 큰 꽃다발은 처음 받아보았습니다. 저는 꽃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무슨 꽃인지 몰랐는데 프리지어와 데이지라고 친구가 가르쳐줬어요. 별 거창한 친구는 아니고 어릴 때부터 같이 고아원에서 자란 아인데 꽃을 좋아해서 정원에 직접 꽃을 심고 가꾸던 애였어요. 꽃에는 꽃말이 있다면서요? 저에게 새로운 출발을 축하한다는 의미를 담은 꽃을 보내주셨다고 이 친구가 알려줬습니다. 꽃마다 의미가 있다니 참 신기해요. 남자답지 못하게 꽃이나 좋아한다고 타박받던 아이였지만 덕분에 험한 일이 아닌 화훼시장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 아이의 앞으로의 거취가 궁금하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같이 지낸 친구라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는 만날 일도 연락할 일도 없겠지요.
저도 이제 적은 짐을 정리하고 떠나야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저의 흔적이 남아있는 방과 책상에서 쓰는 마지막 글이 되겠네요. 다행히도 저는 대학 기숙사의 입사까지는 지내도 좋다고 원장 선생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들어왔는데 제일 늦게 나가게 되었어요. 이곳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웠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집처럼 느껴지는 공간을 영영 떠나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대학에 가는 것을 축하해주었습니다. 그보다 더한 행운과 축복은 없다고요. 보내주신 편지지는 허투루 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어른들이 상당한 고급 종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셨어요. 아마 김철수 씨가 아니었다면 제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물건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입학선물로 주신 만년필도 소중히 하겠습니다. 지금도 그 만년필로 써보고 있는데 아직은 낯설어 손에 공연히 힘이 들어가고 글자가 불안합니다. 게다가 제 작문에 대해 칭찬하셨다는 말을 들어 부담이 가중되네요.
여기는 또 눈이 내렸습니다. 겨울이 되면 눈이 너무 자주 내리기 때문에 저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춥기도 하구요. 항상 창문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눈이 내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저를 후원하시겠다며 찾아온 크리스마스에도 눈이 내렸는데 기억하시나요? 일주일에 한 번씩은 대청소를 했는데 겨울이면 저는 늘 복도 청소를 도맡았어요. 구두에 붙은 눈 때문에 복도가 평소보다 더러워지는데 제가 그 청소를 제일 깔끔하게 한다며 저에게 일임하더군요. 그날은 여느 날보다 몇 배로 더러워서 제가 볼멘소리를 하며 청소했던 기억이 납니다. 복도를 청소하는 저의 모습을 보셨을지 모르겠어요. 경기를 뛰는 것을 보셨으니 제 얼굴을 아시지만, 저는 김철수 씨의 얼굴을 모르잖아요. 그 날은 어긋나서 마주치지 못했다고 하던데 사실 복도 끝에서 그림자는 보았답니다. 원장 선생님과 직원분들 중에 그렇게 키가 큰 사람은 없거든요. 겨울에 그림자가 더 길게 지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키는 유난히 커서 저는 한동안 눈에 익지 않은 기다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할 일이 있었기에 그리 오래 보지는 못했지만요. 아시다시피 저는 농구를 좋아하고 경기도 뛰는데 농구 선수에게 신장은 대단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키가 그리 크지 않아 당신처럼 긴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약간은 부러움을 느낍니다. 그렇다고 질투나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고요. 저는 저 나름의 방식이 있습니다.
아무튼 당신이 계신 곳에는 이렇게 춥고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여전히 사람들이 눈을 왜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눈이 내린다는 것은 날이 무척 춥다는 말이잖아요. 추우면 몸이 움츠러들고 지낼 곳이 없는 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그 혹독한 시간을 견뎌야 하니까요. 겨울은 참 가혹한 계절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당신과 같은 봄이 찾아왔으니 언젠가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기 마련인가 봅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졸업하고 이곳을 나가게 되면 다시는 농구를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새벽에 나가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운동할 틈이 있을까요? 그렇게 보면 확실히 저는 대단한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납니다. 항상 감사하고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저에게 학업 성적은 중하지 않으니 대학 생활을 즐기라고 말씀을하셨다던데, 제가 도움을 받아 공부하게 된 입장에서 성적에 대해 완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네요. 바라시는 대로 열심히 즐기되 제 본분 또한 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추신. 솔직히 김철수라는 이름은 너무 뻔한 가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나마 홍길동보다 현실성이 있는 이름이긴 합니다. 저에게 신분을 노출하고 싶지 않으신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고마우신 분이니 제 나름의 애정을 담아 키다리 아저씨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송태섭 올림







[3월 4일 토요일]

고마운 김철수 님께

아직 첫 편지도 제 손에 있는데 또 편지를 쓰네요. 종이를 아낀다고 했는데 바로 다짐을 어기게 되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도 입학하면 한 달은 정신이 없다고 하니 여유가 있을 때 편지를 써두려 합니다. 만약 이번 달에 제가 제대로 된 편지를 쓰지 못한다면 이 편지로 미리 썼다고 생각해 주세요.
저는 오늘 기숙사에 들어왔어요. 기숙사는 두 명이 한방을 쓰는 거 아셨나요? 입학처에서 이 학교 출신이라고 들었으니 아실 것 같네요. 재학생은 모두 기숙사에 들어온다고 들었어요. 어떤 방을 쓰셨을지 문득 궁금해져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저는 꼭대기 층의 중간 방에서 지내게 되었어요. 높은 층에서 캠퍼스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무척 새롭습니다. 살면서 고아원의 풍경만 보아온 탓이겠지요. 이 낯선 풍경이 저를 들뜨고 즐겁게 하는 것이 나쁘지 않아요. 저택처럼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정원마저 고아원과는 당연하게도 비교가 되지 않더군요. 공원이나 숲처럼 나무와 길이 정비된 것을 보니 동화책의 삽화를 실제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 속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어릴 때 읽던 동화책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나면 항상 그 길을 걸어볼 생각입니다.
게다가 같은 방을 쓰게 된 아이가 같은 과의 동급생이라 더욱 좋아요. 룸메이트는 원래 동급생을 배정해 주나요? 저는 이 학교에 아는 선배나 연고가 없어 물어볼 곳이 없습니다. 강아지처럼 귀엽게 생겼는데 저에게 먼저 수줍게 인사를 해주었어요. 이름도 이달재라고 한대요. 마치 본인처럼 귀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월요일이 되면 달재와 같이 수업을 들으러 갈 거예요. 저와 듣는 수업이 거의 똑같더라구요.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요? 1학년 때는 아직 전공 수업을 듣지 않아 같은 과라도 수업이 거의 겹치지 않는다는데 참 신기한 노릇입니다.
제 방에 입학 선물로 보내주신 옷도 잘 받았습니다. 달재와 함께 쓰는 공동거실에 있는 테이블 위에 수많은 상자가 놓여있어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입학을 축하한다는 글귀가 적힌 카드도 서랍에 잘 챙겨두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옷을 가지게 된 건 처음이에요. 고아원에서는 기부받은 옷을 주로 아이들에게 입혔기 때문에 얼마 있지도 않은 옷들이 크기가 맞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 몸에 맞는지 궁금해 옷을 전부 한 번씩은 입어보았는데 맞춘 듯이 딱 맞았습니다. 요즈음엔 맞추지 않아도 기성복이 잘 나오나 봐요.
만약 이 편지에 답장을 주신다면 선배로서 근처에 대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이 없으리란 말을 전달받지 않았냐고 의문이 드시겠죠? 벌써 이리 부탁을 하는 게 어이없으실 수도 있지만 말씀대로 대학교를 제대로 즐겨보려는 것이니까요. 내일은 달재가 알아둔 식당에 가보려 합니다. 필요한 것들을 사라고 부쳐주신 용돈으로 책을 사러 서점에도 갈 예정입니다. 용돈이 과하게 넉넉해 다음 달에는 주지 않으셔도 돼요. 수업마다 어떠한 책을 사용하는지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한 교양 수업의 교재를 달재가 알고 있다고 해서 미리 사려고 합니다. 참! 달재도 저와 같은 농구부래요. 같은 과에 같은 시간표, 같은 운동부라니. 그 수많은 학생 중에 어떻게 이런 아이와 같은 방에서 지내게 되었는지. 당신께서 저에게 주는 후원처럼 누군가가 저에게 큰 축복을 내려주는 것 같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송태섭 올림







[4월 8일 토요일]

존경스러운 선배 김철수 님

대학은 정말 정신이 없네요. 어떻게 다니셨나요. 아니면 상류층이 다니는 학교는 고등학교도 이렇게 일정이 힘든 건가요? 저를 제외한 다른 학우들은 비교적 멀쩡해 보였습니다. 용돈을 전하며 편지를 받아 가시던 비서님도 깜짝 놀랐을 정도로 제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합니다. 아직 제 편지를 보지 못하셨으니 이번 달에도 저에게 용돈을 주신 것이겠지요. 만약 제가 보낸 편지를 제대로 보셨다면 다음 달에는 저에게 용돈을 주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지난달에 주신 걸 아직 반도 쓰지 못했어요.
지금은 달재와 점심을 먹고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입학 후에 처음으로 학교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무척 상쾌해요. 햇빛과 바람이 이렇게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지 몰랐습니다. 혹여 달재가 제가 쓰고 있는 걸 읽고 있지는 않는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맞은 편에서 책을 읽느라 제가 앞에서 무얼 하든 전혀 관심이 없거든요. 달재도 입학한 이후로 처음으로 여유롭게 책을 읽는다며 좋아했습니다. 심신이 피곤하니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해야겠다고 하는데 실낙원을 읽고 있어요. 대단한 아이인 것 같아요. 저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 읽다가 도중에 포기한 책이었는데. 저는 휴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가벼운 내용의 책을 읽지 싶습니다. 머리를 비우고 읽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론 제 기준입니다. 달재도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인 이상 저와 배경과 가치관에서 차이가 있겠지요.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농구부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당신이 저의 농구를 좋게 봐주신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니까요. 대학 농구부 중에 가장 크고 유명한 곳답게 사람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농구부원만 해도 제가 살던 고아원의 아이들 수를 훌쩍 뛰어넘는 듯합니다. 그래도 고아나 촌놈 티를 내지 않으려 부단히도 애쓰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여러 아이가 섞여 있는 편이었는데 아시다시피 남자애들은 무리를 짓고 서열질을 좋아하잖아요. 저처럼 키와 덩치가 그리 크지 않은 고아는 표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얌전히 당하고 살 위인은 못 되어 저도 크게 한 방 먹여주었더니 그 뒤로는 건들지 않더군요. 오히려 약자들의 세계에서 약육강식의 논리가 더 강하게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드러내봤자 좋을 것이 없는 부분이기에 감출 수 있다면 감추는 게 좋잖아요. 제가 아직 이 학교의 학생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한 달 동안 느끼기로는 확실히 다르긴 합니다. 저 같은 고아나 가난한 이들을 시궁쥐처럼 더럽게 여길지언정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시혜적인 태도를 보이니까요. 그들과 아직은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 제가 당신의 후원을 받아 이 학교에 들어온 고아인 것을 모르지만,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바뀔지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일전에 제가 기숙사에 들어오고 달재와 나간 거 기억하시나요. 그때 바버샵에도 가서 머리를 잘라 정리했습니다. 고아원에서는 가위로 대충 잘라내기만 해서 덥수룩하고 부스스했거든요. 머리를 어떻게 정리하고 넘기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시는 친절한 분이셨어요. 저는 그런 이발소에 처음 가보아서 적정 가격을 모르는데 달재가 합리적인 가격이라며 좋아하는 것을 보니 괜찮은 곳인 것 같아 앞으로 그곳에 다니려고 합니다. 그래도 제 입장에서는 제법 큰 돈을 주고 이발하는 것이라 낯선 문화처럼 느껴져요. 마치 외국에 온 것 같습니다.
농구부에는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많아 신기했습니다. 대부분은 체육대학에 다니는 사람들이긴 했어요. 특이한 선배가 한 분 계셨는데 법학대학에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농구부에 들어오려면 농구도 제법 하는 사람일 텐데 법대에 다니기까지 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몸이 두 개라도 되나 봐요.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 안경도 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게다가 친절한 성격까지. 세상에 문무와 성품까지 겸비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역시 세상은 불공평한 것 같아요. 하지만 어쩌겠나요. 아무리 불평을 늘어놓아도 그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을. 달재와 안면이 있는지 저희에게 와 말을 걸어주고 인사를 나누었어요. 저희가 듣는 수업에 대해 듣고는 어떤 교수님이 까다로운지 어떤 것을 주의하면 좋을지도 알려주고, 다음 학기에 들으면 좋은 수업들도 알려주었어요. 추천해 준 수업 중에 철학 수업 하나가 제법 흥미로웠는데 나중에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달재도 같은 말을 하지 않겠어요? 다음 학기에는 그 수업을 같이 들어보기로 했어요. 죽이 잘 맞는 친구를 만나게 되어 참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은 그 많은 농구부원 중 하나에 신입생이라 특별한 건 없고 주로 체력단련이나 서로 일대일로 훈련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적어놓기만 하면 별 대단한 것을 하는 것도 아닌데 절대적인 훈련량과 시간이 엄청나서 기숙사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면 바로 기절하듯 잠에 들곤 합니다. 그것도 한 달이 넘어가니 이제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말에 이렇게 밖에 나올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신입생이라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니 경기를 보러 오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응원만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거니와 보고 싶지도 않으시겠죠. 시간이 지나 저도 상급생이 되어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되면 저를 후원하기로 하셨던 모습보다 훨씬 성장해 있을 거란 것은 자신할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거나 잠이 들기 전에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신자가 된 것처럼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너무 부담을 느끼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종교인들처럼 깊은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 한다는 건 아니니까요. 그저 잊지 않고 짧게 스쳐 가는 생각이나마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추운 날도 완전히 끝나갑니다. 겨울이 물러가고 완연한 봄이 찾아오는 것이 느껴져요. 바쁘신 나날일 텐데 밖에 핀 꽃이라도 보고 마음에 작은 여유를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송태섭 올림







[4월 23일 일요일]

고집스럽고 다정한 키다리 아저씨

답장을 받을 줄은 생각하지 않고 쓴 편지였는데 긴 답장을 해주어서 정말 기뻤어요. 감사합니다. 제가 무례하게 정한 호칭까지 흔쾌히 허락해 주기도 하시고. 사실 김철수 씨라고 부르는 것이 아무개 씨라고 하는 느낌이었기에 아저씨가 조금이나마 친밀하고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또 용돈을 보내주셨더군요. 편지를 읽으셨으면서도 어찌 그러시나요. 큰돈을 이렇게 계속 쌓아두는 것도 불안하니 가르쳐주신 식당에 달재나 다른 사람을 데려가 대접이라도 해야겠습니다. 아저씨가 가실만한 식당은 분명 비싼 식당일 것 같거든요. 제가 왜 돈을 이렇게 안 쓰는지 의아해하시죠? 제 씀씀이가 그리 크지 않은 것도 있지만 얼마 전에 사귀게 된 친구가 돈을 쓰는 경우가 많았어요. 같은 농구부인데 농구를 좋아하시니까 이 아이도 잘 아실 것 같네요. 정우성이라고 신입생인데도 벌써 주전으로 뽑힐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요. 달재와 훈련하고 있는데 와서 말을 걸더라고요. 수많은 동급생 중 왜 저희에게 접근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작고 수수해 보이는 아이들이라 휘두르기 쉬울 거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 녀석은 집안도 무척 부유하고 상류층에다가 잘 나가는 무리에 속하니까요. 상류층에 대한 편견을 강화시켜 주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하면 이해하시려나요.
하여튼 저와 달재가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거나 카페, 식당에 있으면 어느새 나타나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대화에 끼어들고 자기가 계산까지 하는데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제 몫의 값을 올려주려고 하면 한사코 사양했고요. 오히려 친구 비용이라는 해괴한 말을 쓰기에 그 뒤로 체육관에 가면 정우성을 관찰했어요. 늘 보던 무리와 섞여 있는 것은 여전한데 딱 하나 표정이 저희와 있을 때와 다르더라고요. 그걸 보고 문득 정우성이란 사람은 항상 저렇게 냉한 얼굴이라 다들 접근하기를 어려워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그런 정우성이 왜 우리에게는 아이처럼 웃으며 벽을 허물고 다가오는지 의문도 생겼어요.
시험공부를 위해 도서관에 가는 것까지 따라와서 정말 놀랐습니다. 기숙사 방문을 두드리더니 책을 챙겨 나가는 저희를 보고 어디 가느냐고 묻고는 자기도 가겠다며 헐레벌떡 방에 들어가서 책을 챙겨 나오더라고요. 제가 알기로 체육학 전공에 그동안 수업 시간에도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것을 보면 겹치는 수업도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굳이 같이하겠다며 꾸역꾸역 따라오더니 맞은편에 앉아서 혼자 끙끙거리기나 하고. 결국 참지 못한 달재가 옆으로 자리를 옮겨 공부를 도와주었어요. 저는 제 공부를 하는 것도 겨우 하는 거라 도저히 남을 봐줄 수가 없거든요. 아시다시피 제가 원래 학업 성적이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지 않습니까. 쌓여있는 토대가 남들보다 조금 모자라니 쌓아 올리는 것도 더 힘들고 큰 노력이 들어가네요. 그래도 달재와 전에 말한 법대에 다닌다는 선배의 도움 덕에 이번 시험을 잘 치른 것 같습니다.
저를 후원하시는 것을 보면 농구에도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이 선배에 대해 아시려나 모르겠어요. 권준호라고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그 선배는 발이 되게 넓으신 분이라 같은 학교 후배기도 하니까 어쩌면 아저씨도 알 것 같았어요. 게다가 법대에 다니시는 걸 보면 제 기준에서는 높거나 돈이 많으신 분들에 가까운데 그러면 그들 사회에서 아저씨와도 마주친 적이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저는 그쪽을 잘 모르니까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같은 지역의 고아면 서로 다 아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는 무례하고 폭력적인 시선일 수도 있겠습니다. 편견을 가지지 않고 열린 시선으로 늘 생각하려고 노력하는데 요즘은 그게 잘 안 됩니다. 말했다시피 편견을 자꾸 강화시켜 주는 누구 때문에요.
시험도 끝났고 다음 학기에는 준호 선배가 추천한 철학 수업을 듣기로 했기 때문에 조만간 달재가 읽던 철학책 중 몇 가지를 읽어보려고 해요. 이제는 대학 농구부의 훈련에도 제법 익숙해져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드는 일이 없으니, 무언가 다른 일을 하려고 합니다. 농구도 성실히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드리블만큼은 적어도 동급생 중에서는 제일 뛰어난 수준이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렇다고 벌써 주전으로 뛰는 정우성과 비교하지는 마세요. 그 아이는 특별하니까요. 그래도 PG로 대결하면 제가 이길 자신이 있어요. 오만하다고 하실 건가요? 5월 초에 1학년끼리 팀을 만들어서 연습 삼아 경기하는데 보러 오시면 좋겠어요. 신분을 노출하는 걸 싫어하시니 참석 여부는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실제로 오지 않더라도 괜찮아요. 어딘가에서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추신. 다음에는 정말 용돈을 건너뛰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태섭







[5월 16일 화요일]

저를 늘 놀라게 하시는 아저씨께

법대에 다니는 농구부원이라는 것만 보고 권준호 선배인 줄은 어떻게 바로 아셨나요? 답장을 읽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의자를 밀치고 소란스럽게 한 탓에 달재까지 놀라게 만들고 말았어요. 순간 저희 학교 농구부의 오랜 팬인가 싶었는데 아저씨도 이 학교 출신이시잖아요. 어쩌면 농구부 출신이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게도 농구부 선배가 되겠네요.
3일에 1학년 연습 경기가 있었는데 보셨을까요. 저는 편지에도 말했다시피 아저씨가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진짜 경기인 것처럼 열심히 했습니다. 농구부가 유명한 학교다 보니 연습 경기임에도 외부인이 관객으로 입장할 수 있게 하더라고요. 실제로 많이들 왔고요. 참 신기했습니다. 팀은 제비뽑기로 뽑았는데 정우성과 한 팀이 되었어요. 1학년임에도 주전으로 뛰는 선수답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말 뛰어났습니다. 덕분에 경기도 이겼고요.
비서님께 앞으로 편지는 기숙사에 우편으로 보내진다는 말을 전달받았어요. 저로서는 아저씨의 답장을 빠르게 받을 수 있어서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 달에도 용돈을 줄이지도 않고 주셨더군요. 저도 한 고집하는데 아저씨도 만만치 않다는 건방진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남는 용돈을 모아 나중에 제가 자립할 때 보태서 쓰라는 말이 무척이나 다정해서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아저씨가 그렇게 다정하신 분이니 저에게 이런 큰 도움을 주시는 것이겠지요.
제가 정우성에 대해 며칠 전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전에 보낸 편지에 언급했다시피 저는 그 아이가 쉽게 남을 휘두르며 부하처럼 부릴만한 사람으로 저와 달재를 골라 물밑 작업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그렇게 펑펑 써댔다고 생각했어요. 재력을 과시하며 위압감을 주는 거죠.
제가 퉁명스럽게 굴면서 네 하인 노릇은 할 생각이 없으니 이제 돈 낭비는 그만하고 꺼지라고 말했더니 그 커다랗고 동그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살면서 제가 그렇게 당황한 적은 없을 거예요. 달재가 저에게 왜 그런 말을 하냐며 나무라고 우성이를 안고 달래는데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하지만 실제로 저와 달재가 우성이의 시중을 들다시피 한 적이 꽤 많았단 말이에요. 달재는 너무 착해서 그저 서투른 애를 도와준다고 생각했나 본데 전 알아요. 자기가 직접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평생 사람을 부리며 사소한 뒤치다꺼리를 시키는 게 자기도 모르게 습관처럼 들어있는 것임을. 그게 당연한 줄 아는 거예요. 자기한테 싫은 소리 했다고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그 순수한 눈물도 짜증 나요. 자기 딴에는 정말 억울하고 슬픈 일이라는 게 더 화나게 만들어요.
너무 사람 뒷담을 늘어놓은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어요. 우성이는 저희를 학교에서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엉엉 울었어요. 무얼 잘못해서 저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는지 모르겠다며 미안하다고 하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요.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의 그 차가운 표정은 그저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대꾸하고 어울려주기만 할 뿐이어서 그랬나 봐요. 여전히 왜 저와 달재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에게는 친구로 지내고 싶어서 다가온 것이었더군요. 시커먼 속내가 있을 것이라 넘겨짚었던 게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 대해 사과했어요. 우성이는 콧물까지 흘리며 하인처럼 생각한 것이 정말 아니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저와 달재의 손을 꽉 잡았어요. 대학생이라기에는 참 순수한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번 크게 싸우면 그 뒤로는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가 된다는 말을 아세요?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제가 그걸 그대로 겪을 줄은 몰랐어요. 그 뒤로는 셋이 항상 같이 다니게 되어서 수업 시간이 맞지 않는데도 저와 달재가 등교하는 시간에 맞춰서 같이 나오기까지 해요. 사람의 배경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친구를 깊게 사귀게 된다는 건 참 기적 같은 일인 것 같아요. 다투게 된 그날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제가 원래 고아에 어떤 자상한 신사의 도움으로 대학에 다니게 되었다는 말까지 했거든요. 둘 다 착한 아이들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아저씨도 그렇고 달재와 우성이도 그렇고 저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 뒤에 아저씨의 생일이라고 들었어요. 비서님을 너무 혼내지는 마세요. 제가 이번에 만나서 편지와 용돈을 전달받을 때 떼를 쓴 것이니까요. 제가 달리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생일이라도 진심을 담아 축하해주고 싶어서 생일이 언제인지 물어봤습니다. 항상 아저씨에게 행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사랑을 담아 태섭







[6월 26일 월요일]

가진 것이 많은 아저씨께

비꼬는 거 아니니까 놀라지 마세요. 아는 것이 많으시다는 것에 대한 저의 순수한 감탄의 표현일 뿐이에요. 달재가 가지고 있던 책 외에도 아저씨가 추천해 주신 철학책들을 서점에서 구입해 읽어보았어요. 아직 철학책을 어려워하는 저도 읽고 이해하기 쉬운 책들이라 좋았습니다. 이번 달에 있는 시험은 너무 어렵고 힘들었어요. 수업과 농구부 훈련을 제외하고는 거의 도서관에 사는 수준이었어요. 달재와 준호 선배가 아니었다면 낙제점을 받았을지도 몰라요. 제가 이렇게 머리가 나쁜 사람이었나 자책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저번 주말부터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어요. 이제 학교 수업이 없으니 농구부 훈련 강도가 더 세졌습니다. 그동안 대학리그 경기도 꾸준히 치렀고 결승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저와 달재도 매번 경기장에 찾아가 우성이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간혹 우성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활약이 저조해서 경기가 끝난 뒤에 울면 달래주기도 하고요. 분명 셋이 같은 나이임에도 우성이는 한참 어린 막냇동생 같아요. 다음 학기 때 교양수업도 저희를 따라 듣겠다고 하는 거예요. 좋게 말하면 어리광쟁이에 애교가 많은데 나쁘게 말하면 철이 없는 것 같아요. 저와 달재가 듣는 수업들은 체육과인 우성이에게 들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거든요. 실제로 수업에 체육 전공인 학생들을 한 명도 본 적이 없어요.
방학에는 기숙사를 잠시 나가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대부분은 나가서 본가로 가거나 별장, 휴양지로 가는 것 같더라고요. 저를 배려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어차피 방학이어도 체육관에 거의 매일 가야 하므로 달재와 우성이는 기숙사에 남기로 했습니다. 대신 리그가 다 끝나면 남은 방학 동안 학교 주변의 모든 식당에 들러서 모든 메뉴를 먹어보기로 했어요. 늦잠도 실컷 자보고요. 아마 일주일도 못 갈 것 같긴 합니다. 매번 나가서 외식하기도 힘들 것 같고 저는 평생 새벽에 일어나던 사람이라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본 적이 없어서 자꾸 눈이 떠져요. 아무도 일어나지 않아 고요한 새벽이면 조용히 기숙사를 빠져나와 아저씨가 말한 학교 뒤뜰을 산책하곤 했어요. 여름이라 나무에 잎이 풍성해 그늘도 많고 사람들이 활동할 시간대가 되어도 인적이 드물어 조용히 산책하기 너무 좋은 곳이었어요. 간격이 길긴 했지만, 벤치도 있던데 거기 앉아있으니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새삼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 학기를 무사히 마친 제가 대견하기도 했어요. 아저씨도 학업에 그다지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고 하시니 이곳에 앉아있을 아저씨를 생각하며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뒤뜰에 소풍처럼 음식을 싸 들고 쉬러 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늦었지만 5월에 1학년 경기 때 보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많은 관중 속에 아저씨가 있었다니 그날 경기에서 이긴 것이 참 다행이에요. 지는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까요. 저를 후원할 마음이 드신 경기가 중학생 때 경기라고 하셨잖아요. 그 이후의 경기도 보러 오셨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에 보았을 때보다 제가 성장한 것 같았나요? 아니면 등번호를 말하지 않아 제가 누구인지 찾지 못하셨나요. 머리 모양을 바꾸고 다니니 이전의 저와 헷갈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요. 심지어 같은 고아원 출신인 친구도 저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예요. 그렇게까지 인상에 차이가 나는 걸까요? 달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아저씨는 다정하신 분이니 인상도 좋으시겠죠? 제 머릿속에는 키가 크고 말쑥한, 다정한 인상의 신사거든요.
하고픈 말이 아직 많은데 밤이 늦어 이만 줄이겠습니다. 늘 당신에게 행운과 행복이 함께하길 빕니다. 저는 지금도 매일 눈을 뜨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저씨께 감사를 드리고 있어요. 물론 너무 힘들고 피곤한 날에는 깜빡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늘 당신의 안녕을 비는 태섭







[7월 20일 목요일]

먼 곳에 계신 아저씨께

농구부의 소식을 들으셨을까요? 저희 학교가 이번에 대학리그에서 우승했습니다. 결승전에서 후반에 투입된 우성이의 활약이 대단했어요. 우성이가 아니었다면 준우승에 그쳤을 정도라고 하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감이 오시나요? 그 뒤로 농구부에는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거의 나흘 동안 파티가 이어졌어요. 우성이는 주위에서 주는 술을 가리지 않고 신나게 마시다가 결국 홀 한가운데에서 토를 폭포처럼 쏟아내고는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습니다. 우승의 주역이 제 한 몸을 바쳐 웃음거리까지 제공해 주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정말 대단한 아이예요. 아마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되어서도 오르내릴 일화가 될 것 같아요. 다음 날이 되어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머리가 아프다, 속이 쓰리다, 메스꺼워서 토할 것 같다는 말만 중얼거리더군요. 안색이 파랗게 질려서 앓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어요. 하지만 간병할 시간이 되지 않아 물을 충분히 마시라는 말과 함께 옆에 커다란 물통을 두고 나오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리그가 끝나 남은 한 달은 일정이 비었는데 왜 숙취에 시달리는 사람 하나 돌볼 시간이 나지 않냐면, 준호 선배의 도움으로 형편이 어려운 가정이나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봉사를 다니게 되었거든요. 물론 달재도 함께 갑니다. 제가 선배에게 요청하거나 선배가 먼저 저에게 알려준 것은 아닙니다. 선배가 이전부터 계속하던 것이었는데 내년에는 마지막 학년이라 사법시험을 비롯해 준비할 것이 많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고 아이들을 그대로 두기 마음에 걸리셨는지 뒤를 이을 사람을 찾은 거였어요. 사실 그 후계자는 달재고 저는 들러리긴 합니다. 덤으로 따라가는 거예요. 제가 같은 처지의 아이들에게 동병상련을 느껴 도와줄 것을 알고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해 주더군요. 달재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심 고마웠어요. 나중에 달재가 혼자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서운했을 거예요. 제가 저 봉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최대한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베풀어주신 선의를 제가 다른 사람에게도 돌려주는 선순환이 이루어졌으면 해서요.
이 일에 대해 우성이가 아직 몰라서 매번 자기만 두고 어디를 가냐고 자꾸 보채는 바람에 조만간 우성이에게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성이는 농구를 가르쳐주겠다고 나설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우성이는 언어에 별 재능이 없거든요. 한 번은 저랑 달재가 듣는 고전문학 수업이 궁금하다며 같이 들어와서 도강했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울상을 지었어요. 외국어를 보는 것 같다나요.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이니 외국어로 볼 수도 있겠지만요. 그러면서도 저희와 같은 수업을 들으려고 하다니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번 달부터 두 달 동안 여름휴가를 가신다고 하셨죠. 보통 높으신 분들은 멀리 외국으로 휴가를 가니까 비서님께서 여기까지 오시려면 수고스럽겠어요.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셨죠? 하지만 저는 아저씨보다는 비서님과 더 가까운 사람이니 그분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아저씨가 어디서 어떤 휴가를 보내는가도 궁금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공부만 하며 보낼 예정이거든요. 저에게는 별장이나 영지가 있는 친척이 없고 제 고향은 서로만이 친구이자 가족인 아이들이 부모가 되어줄 사람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곳이잖아요.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작은 욕심을 부리는 겁니다. 알려주지 않으신다면 우성이에게라도 들을 생각이에요. 사흘 뒤에 우성이가 2주 동안 가족 모임으로 휴가를 간대요. 바다가 있는 열대지방으로 간다던데 책에서나 보던 야자수를 볼 수 있는 걸까요? 약간 부럽기도 해요.
참! 말하신 대로 교내 신문에 에세이와 칼럼을 투고해 보았어요. 방학이라 신문이 평소보다 적은 페이지와 부수라서 제 글을 싣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대신 9월에 짧은 에세이가 하나 실릴 예정이에요. 그때 편지와 함께 교내 신문 한 부를 동봉해서 보내겠습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비밀이에요. 신문에 실린 것으로 확인해 주세요.

재미없는 방학을 보내게 된 태섭







[8월 26일 토요일]

끝나가는 휴가가 아쉬우실 아저씨께

아저씨도 바다로 가신 걸 보면 역시 높으신 분들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나 봐요. 바다를 실제로 보면 어떨지 너무 궁금해요. 정말로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나요? 그 먼 곳까지 가서 운동하시다니 신기해요. 어떤 운동인지 알려주지 않으신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자세히 알려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달재는 젠트리라 아저씨의 일상을 짐작해 보기에는 실제의 그것과 거리가 있다 보니 우성이의 취미로 어림짐작해 보고 있어요. 아저씨를 자세히 캐보겠다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려 했다면 제가 탐정을 고용했을 테니까요.
묘사해 주신 바다의 풍경이 너무 자세해서 제가 실제로 바다를 보는 느낌이었어요. 바다에서 지내시는 아저씨를 생각하며 도서관에서 바다를 다루거나 바다 위가 배경인 소설들을 읽어보았는데 어릴 때 이후로 책에 실린 삽화를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는 건 처음이었을 거예요. 펜으로 거칠게 선이 그어진 삽화일 뿐이지만 제가 접해보지 못한 바닷바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바다의 비리고 물기 어린 바람이란 어떤 것일까요. 달콤한 맛이 나는 외국의 과일들도 실제로 맛을 보면 어떨지 궁금해요.
어떤 휴가를 보내시는지 가르쳐주지 않으시면 우성이에게 물어본다고 했었죠. 사실 간접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싶어 대답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물어보려고 했답니다. 실제로 물어보기도 했어요. 침대처럼 누울 수 있는 긴 의자에서 일광욕을 즐겼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피부가 벌겋게 익어서 왔더라고요. 주로 밤에 해변을 산책하시던 아저씨와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휴가를 보낸 것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강한 햇살 아래에서는 나이 드신 분들은 어지러워 쓰러지기도 하시니까요. 현명하신 아저씨께서 당신의 몸을 잘 챙기신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곳의 풍경이 수려하게 그려진 엽서도 잘 받았어요.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서 도저히 쓰지 못할 것 같아요. 제가 책상에 앉아서 고개를 들면 바로 보이는 위치에 붙여놓고 들여다보며 저도 바다에 간 상상을 합니다.
예상하신 대로 우성이는 정말로 다음 학기의 모든 교양 수업을 저희와 같은 걸로 신청했어요. 정말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여전히 내용은 어렵지만 자기만 쏙 빼놓고 저희가 대화하며 공부하는 모습이 마치 따돌려지는 기분이라 싫었대요. 꼭 형이나 누나가 친구들과 노는데 끼려는 동생 같아서 고아원에 있을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리그에 출전하려면 성적관리도 해야 하는데 무슨 배짱인지 그만큼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건지…. 봉사를 갈 게 아니고 우성이 공부를 도와줘야 하게 생겼어요. 덕분에 내년 리그를 대비해 들어간 훈련이 끝나면 우성이와 도서관에 들러 짧은 시간이나마 폐관 시간까지 공부하곤 합니다. 그리고 매번은 아니어도 가끔 저와 달재를 따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가는데,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치니 감독이 된 기분이라며 상당히 들떠있어요. 감독이나 코치의 목소리나 말투, 버릇을 과장되게 따라 하며 혼자 웃기도 한다니까요. 그 유머에 같이 웃어줄 사람은 두 명밖에 없는데도. 이해를 못 해도 웃으며 반응해 주는 아이들이 몇 명 있어서 괜히 어깨를 으쓱이고 콧대가 높아지는가 봐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정우성을 위해 만들어진 말 같아요. 달재가 그 모습이 귀엽다고 웃으며 그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 같다고 속삭인 말도 그렇고요. 가르쳐주는 선생의 입장이 아니라 영락없이 친구나 형이 놀아주는 꼴이랍니다. 하지만 꼭 무언가를 가르칠 필요는 없으니, 그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세상과 인식이 넓어지는 경험은 소중하잖아요.
아직도 더위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물을 충분히 마시면서 너무 햇빛 아래에 오래 계시지 마시고 남은 휴가도 큰 탈 없이 무사히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제 선물해 주신 만년필이 손에 완전히 익어 글을 잘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소에도 글을 쓸 때 애용하고 있어요. 덕분에 같이 주신 잉크를 진작 다 사용해 추가로 구매했답니다. 다만 아저씨께서 주신 잉크는 너무 고가여서 제 수준에 감당할 수 있는 것을 샀습니다. 어차피 그런 것을 보는 눈이 없어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도 하니 이만하면 적당한 것 같아요.

방학의 끝자락에서 태섭








[9월 17일 월요일]

다정함이 넘쳐흐르는 아저씨께

말씀드린 대로 이번 교내 신문을 한 부 동봉해 드려요. 제 글에 칭찬해 주신 만큼의 자신은 없지만 보내드리겠다 먼저 말을 하기도 했고, 아저씨께 평가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객관적인 평을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잉크 얘기는 괜히 했나 봐요. 이렇게 잉크를 많이 보내주실 줄 알았다면 절대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결코 구걸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용돈을 제가 마음껏 쓰고 싶은 곳에 쓰되 필요한 물건은 말하라 하셨지만, 이것도 제가 쓰고 싶은 곳에 용돈을 사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잉크라는 것이 필수품도 아니고요. 제가 돈을 아끼려고 했다면 만년필이 아닌 연필을 사용했을 겁니다. 달재가 아저씨께서 호의를 베풀어 저에게 필요한 물품을 준 것이 아니냐는 것에 대고 감히 말하지는 못했지만, 아저씨께는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이건 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정말 좋은 뜻으로 행하신 것은 알지만 필요한 물건을 사는 비용까지 포함한 용돈을 주고 그에 대한 자유를 주셨잖아요. 저에게 주신 자유를 왜 직접 침해하시나요.
건방지게 후원을 받는 입장에서 자존심을 세운다고 하시겠죠. 제가 열 살짜리 꼬맹이였다면 그러한 호의에 장난감을 선물 받은 것처럼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을 테지요. 그러나 저는 열아홉 대학생인걸요. 원래라면 선원이 되었거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 사람이에요. 저는 아저씨의 호의에 너무 기대어 물러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며 살고 있어요. 학교를 졸업하면 지원도 끝날 텐데 그 이후에 제가 그 달콤함에 젖어 헤어 나오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아저씨를 타박하거나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분에 넘치는 행운을 누리고 있어요. 그저 속상함에 투정을 부려보았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가장 친근한 어른이라 부모에게 투정 부리는 아이 같은 마음인지도 모르겠어요. 저의 후원자이자 보호자이신 분이니까요.
아저씨의 기분이 상할 얘기는 이제 제쳐두고 다른 얘기를 해볼까 해요. 조금 우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교내에 저와 달재, 우성이에 대한 말이 도는 것이 제 귀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같은 농구부에 나이도 같지만 그다지 말을 섞어본 적 없는 애가 길을 가던 저에게 말을 걸더라고요. 농구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니 이 애가 누군지 아실 것 같아요. 우성이와 더불어 고등학교 때 실력이 출중해 유명했거든요. 윤대협이라고 부드러운 인상에 머리를 세우고 있는데 아실까요?
하여간 저에게 오늘은 왜 혼자 다니냐고 묻기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더니 저희 셋을 가리켜 고목나무와 매미 두 마리라고 다들 입을 모아 부른다고 알려주었어요. 누가 나무인지 묻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었지요. 제가 매미라니….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우성이에게 매달려 다니지도 않았는데 단지 키가 작단 이유로 그러한 말이 돌았다는 것이 이상한 기분을 들게 했습니다. 화가 나는 것만이 아니고 여러 감정이 들었어요. 그때 아마 저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물론 윤대협은 항상 웃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 별 반응은 없었지만요. 혹시 농구부에서만 그렇게 우리를 부르냐고 물어봤더니 아니래요. 아마 우성이가 농구부답게 키가 크다 보니 눈에 띄어서 그런가 봐요.
나중에 이 말을 전달했더니 우성이는 오히려 제가 고목나무고 자기는 매미라는 헛소리를 늘어놓았고요. 우성이가 이번 학기에는 두 과목 정도만 제외하면 전부 같은 수업을 들어서 큰일이에요. 어제는 교수님까지 나란히 앉은 저희를 보고 그 말을 했을 정도라면 얼마나 이 말이 퍼졌는지 짐작이 가시나요? 달자는 당화에서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 부들부들 떨며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우성이만 멋쩍게 목덜미를 긁으며 자기가 매미라고 괜한 말을 덧붙일 땐 정말 어디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남은 학기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걱정이 들어요. 하지만 아저씨께서는 이 또한 재밌는 추억이 될 거라고 하실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일화가 편지를 읽는 아저씨에게도 웃음을 드렸으면 좋겠어요.

뜻하지 않게 유명 인사가 된 태섭







[10월 22일 일요일]

가을이 깊어지며 바빠지신 아저씨께

지난달에는 답장을 주시지 않으셔서 내심 저에게 화가 많이 나신 것인지 걱정했습니다. 비서님께서 자세하게는 말할 수 없지만 일이 많아져 도저히 시간을 내지 못했다고 전해주셨어요. 미안하다는 말도 같이 전하셨던데 사실 아저씨의 답장은 필수가 아니잖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원래 조건은 제가 아저씨를 향해 독백하듯이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시간을 내어 제가 보내드린 신문을 읽고 제 에세이에 좋은 말을 해주셨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언제나 그렇게 칭찬만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저는 이번 학기의 중간시험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아저씨가 추천해 주신 책들을 읽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기어이 저와 달재를 따라 읽지도 못하는 고전문학을 듣는 우성이도 잘 이끌어냈어요. 제법 괜찮은 성적을 받은 것 같습니다.
어제는 교내에 웬 남자가 어슬렁거리는 수상한 모습을 목격했어요. 주말이라 수업이 없어 사람도 없는 오전이었는데 조깅하던 제가 딱 발견한 거죠. 간혹 여학우들을 쫓아다니는 이상한 남자들이 교내에서 잡히는 경우가 있어서 조심스레 접근했는데 생각보다 멀끔하고 잘생긴 남자였어요. 그 유명한 정우성이 다니는 학교라 구경하러 왔다는데 그 얼굴로 스토커라는 게 아까울 정도였죠. 제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자 사실 한 학기도 다니지 않고 학교를 그만두어 지리가 익숙지 않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더라고요. 농구를 좋아해서 모교의 농구부를 구경하고 싶다나요. 어쨌든 우리는 운동하는 사람이고 이상한 사람이면 저희가 제압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미심쩍은 걸 알면서도 안내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러한 위험한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너무 화내지 마세요. 고맙다고 저에게 인사를 하는데 씩 웃는 얼굴과 목소리에서 다정함이 느껴져 아저씨가 젊은 모습이라면 딱 이렇지 않을까 상상했어요. 아저씨의 얼굴도 모르면서 우습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차마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요.
그 남자의 운동부냐는 질문에 아직 의심을 거두지 않은 터라 농구부가 아닌 육상부라고 거짓말을 했어요. 아주 날랜 사람 같다며 칭찬하고는 농구는 해본 적이 있냐고도 묻기에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야외 농구장으로 끌고 가 저에게 농구를 가르치려고 했어요. 참 우습죠? 저는 내년에 주전으로 뛰게 되는 사람인데 말이에요. 키가 작아서 농구선수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나 본데 약간 괘씸한 기분도 들었어요. 몇 번 어울려주니 그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혹시 체육대에 다니는지 그럼 우성이와 아는지를 저에게 물었어요. 거기서 저는 또 모른다고 잡아떼야 하나 고민했답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고 하잖아요. 이미 농구부는 아니라고 했기에 전공은 솔직하게 털어놓았어요. 어울리지 않는다며 요란하게 배를 잡고 구르며 웃는 모습을 보고 후회했지만. 어느새 시간이 점심때가 되어 저는 그 사람을 적당히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해 학교 밖의 식당으로 데려갔어요. 아저씨가 추천해 주신 곳으로 갔더니 그곳을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음식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좋은 식당을 알고 있다고 칭찬한 것도 그렇고 상당히 익숙해 보였어요.
식사가 끝나고도 계속 우성이를 만나려 해서 결국 체육관으로 데려갔는데 마침 안에서 연습하고 있어 결국 만나게 해준 꼴이 되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그 사람이 우성이의 당숙이라는 거예요! 늦둥이라 오히려 사촌보다 조카인 우성이와 나이가 더 가까워 제법 친하다고 하더군요. 겉으로 티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얼마나 당황했는지. 처음부터 당숙이라고 말했으면 그렇게 밖으로 돌리지 않았을 텐데!
그 사람도 우성이가 저를 부르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던데 아마 우성이에게 저와 달재에 대한 말을 듣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자연스레 제 거짓말도 들켰어요. 거짓말을 당사자 앞에서 들키는 기분이란 정말 끔찍했어요. 두 사람이 대화하는데 자꾸 저를 힐끔거려서 더욱 양심에 찔렸고요. 다행히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저에게 만나서 반가웠다고 악수를 먼저 청한 모습에 염치없게도 안도를 느꼈습니다.
나중에 우성이에게 듣기로 늦둥이인 것과는 별개로 상당히 재미있는 사람이라 집 안에서도 괴짜로 통하는 사람이래요. 하지만 그 괴짜 덕분에 우성이가 체육대학에 오고 농구를 하게 되었다고 하니 고마운 사람임은 틀림없습니다. 형제가 없는 우성이가 그 사람을 가리켜 형처럼 좋아하고 의지하는 친척 어른이라고 말하며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요. 주변에 좋은 어른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저에게 아저씨가 있듯 우성이에게 그분이 있는 거겠죠.
이제 날씨가 제법 서늘해져 오히려 산책하기에는 좋은 날이 되었어요. 알려주신 뒤뜰을 산책할 때면 가만히 서서 바람을 느끼며 아저씨를 생각하곤 합니다. 겨울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져요. 예전에는 겨울이 참 싫었는데 올해는 처음으로 기다려집니다. 아저씨에게 대학이라는 첫 선물을 받은 계절이기도 하고 학교에서 크리스마스에 파티를 엄청나게 크게 하는 것이 기대되기도 하거든요. 제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공중에서 잡아 잘 말려둔 단풍잎을 같이 보냅니다. 책갈피로 사용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색이 아주 빨갛고 모양도 예쁜 단풍잎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 아저씨도 그 기분을 느끼셨으면 해서 보내드려요.

가을을 즐기고 있는 태섭







[11월 15일 수요일]

가을을 즐길 새가 없던 아저씨께

이전에 제가 소문에 대해 저희에게 알려준 윤대협에 대해 말한 거 기억하시는지요. 그 이후로 저를 부를 때 항상 '고목나무야' 라고 불러서 창피해 얼굴을 들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제가 왜 그러는지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어리둥절한 반응만 보여 면박을 주기도 미안해 내버려뒀더니 이젠 농구부 동기들이 저를 송고목나무라고 부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 그 소문을 잡았어야 했던 걸까요. 저의 신장과 모순적인 별명이라 몇몇은 놀리는 의미로 쓰기도 해요. 한 번은 질이 좋지 않은 놈과 시비가 붙기도 했습니다. 걱정은 마세요. 징계를 먹지 않도록 인적이 드문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만 골라 때려줬으니까요.
중간시험 성적을 받은 우성이는 아주 기세가 등등해져 으스대며 다니는데 표정도 은근하게 짓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지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요. 저가 잘 따라온 것도 있지만 다 달재가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주었기 때문인데 말이에요. 정작 달재는 아이에게 칭찬만 해주는 엄마처럼 대단하다는 말만 해줘요. 그래서 더 으스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제로 낸 보고서도 저랑 달재가 읽어보아도 그럴듯하게 잘 써서 그에 대한 상으로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나들이를 갈 예정입니다. 근처를 조깅하다 호수를 발견했는데 들어가는 숲길도 운치가 좋고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닌지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음식을 싸 들고 놀러 온 사람들이 제법 있었어요. 그곳에 대해 알려주니 두 사람도 무척 기뻐해서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지금 가면 호수에 이불처럼 덮여있는 낙엽이 참 예쁠 것 같아요.
올해 추수감사절에는 달재네 집에에 가기로 했어요. 달재가 저를 집에 초대하기 위해 제 가족들이 전부 외국에 있어 혼자 보내야 한다고 둘러댔다고 하는 데 그 마음이 기특하고 고마웠습니다. 달재네 집에집에 들고 갈 작은 선물을 사러 나가려고 해요. 이런 명절에 친구의 집에 가본 적이 없으니 어떤 선물을 사면 좋을지 고민이 됩니다. 명절이나 행사와 관계없이 먹을 수 있는 와인도 괜찮을 것 같아 내일은 수업이 없는 시간에 와이너리를 들러볼까 해요. 대협이가 와인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아 같이 데려가서 추천받으면 썩 괜찮은 선물을 고를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아저씨는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보내실 건가요? 통 가족이나 친지에 대해 말하지 않으셔서, 아 물론 일부러 말하지 않으신 것도 있겠지만요. 하여간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 혹여 친척이 없이 홀로 지내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 적도 있어요. 명절에 혼자 보내는 것은 외로운 것 일이잖아요. 저는 아저씨의 사진이나 초상화도 본 적이 없고 실제로 만난 적도 없지만 언제나 제가 곁에 있다고 생각하시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저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신문부에서 칼럼의 연재를 제의받았어요. 9월 신문에 실린 에세이의 관점에 대해 제법 반응이 좋았다고 하더군요. 제 글을 그렇게 전시하고 평가받은 것이 쑥스러워서 바로 대답하지 않았는데, 저에게 좋은 밑거름이 될 것 같아서 수락하려고 합니다. 농구부 활동을 하는 저를 배려해서 매달 써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지 않게 비정기 연재에 주제도 정해지지 않아 마음대로 해도 되니 제법 괜찮은 조건 아닌가요? 아마 내년 봄학기부터 연재할 것 같은데 첫 글은 저와 아저씨에 대해 쓰려고 해요. 신상에 대해 노출하는 건 아니니 너무 놀라지 마세요. 저희의 관계처럼 재능을 펼칠 기회가 없는 사람에게 후원을 통해 그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하며 사회에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는지 쓸 거예요. 법적으로 어떠한 개선이 이루어지면 좋을지도 준호선배에게 조언을 듣기로 했어요. 저만해도 꿈에도 생각지 못한 기회와 경험을 가지게 되었으니 감히 한 사람의 세계를 바꾸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저씨가 저에게 그런 존재예요.

칼럼니스트가 된 태섭







[12월 22일 금요일]

저에게 꿈만 같은 1년을 선물해 주신 아저씨께

고아원을 찾아와 저를 후원하시고 대학에 보내주시기로 하신 지 1년이 되는 것이 믿어지세요? 길지 않은 제 인생에 이렇게 바쁘고 행복한 해는 처음이었어요. 첫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날이 생각나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었어요. 가만히 눈을 감고 얼굴에 내리는 눈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서 있으니 달재가 감기에 걸리겠다며 걱정해 주는데 제가 워낙 건강해서 감기 한 번 제대로 걸린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나 봐요. 게다가 추운 겨울에 저의 건강을 걱정해 아저씨께서 선물로 보내주신 목도리까지 하고 있는데 감기에 걸릴 틈이 없지요.
이번 성탄절은 농구부에서 파티를 열기로 했습니다. 올해 리그에서 우승을 거두었고 내년이 되면 졸업하게 되는 선배들이 있으니, 우승을 이룬 해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모여 자리를 즐기기로 했거든요. 다 같이 음식도 준비해 가기로 했는데 기대와 함께 걱정도 들어요. 제가 준비한 음식이 이 학교의 학생들에게 낯설고 천박한 음식이면 어쩌죠. 아는 한 최대한 때깔과 맛이 좋은 음식을 준비할 텐데 제 최대치가 애들의 최저치에도 못 미칠 테니까요. 사실 술을 마시며 즐기느라 누가 무슨 음식을 가져온 것인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아마도요.
성탄절 이후에는 달재와 함께 연말을 우성이네 별장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제 내년이 되면 우성이가 저희와 듣는 수업이 적어져 조금이라도 더 같이 놀고 싶다나요. 우성이는 내년부터 아예 스타팅 멤버로 발탁되었어요. 정말 대단하죠. 지금 농구부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 정우성과 윤대협 이렇게 두 명일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뒤처지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상위권에 든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일단 주전인걸요.
그리고 저는 이번 달까지만 쉬고 1월이 되면 도서관과 서점을 자주 들르게 될 것 같아요. 막상 칼럼을 쓰려고 하니 아무 지식이나 자료가 없이 무작정 써 내려갈 수가 없더라고요. 연습 삼아 써보는데 말문이 막히듯 손이 멈추기도 해요. 그럴 때면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거나 뛰며 생각을 정리하곤 했는데 그걸로는 부족한 것 같아요. 다른 지식을 머리에 넣지 않으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순간이 온 듯합니다. 그래도 내 생각을 정리하며 글로 옮기는 일을 계속하니 더 정제되어 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제법 괜찮은 느낌이에요. 아저씨는 이런 것을 아시고 저에게 글을 칭찬하고 글을 써보라고 권유하신 거겠죠? 안목이 참 대단하세요. 저에게 주신 편지도 언제나 저에게 용기와 힘을 준답니다. 항상 제가 받은 것을 조금이라도 돌려드리고 싶은데 제가 드린 책갈피를 잘 쓰고 있다고 하시니 조금이나마 아저씨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드린 것 같아 기분이 좋아요.
아저씨가 계신 곳에도 눈이 내리고 있다면 항상 눈길을 조심히 걸으세요. 학교에도 벌써 빙판길에 미끄러져 뼈가 부러진 사람이 둘이나 된답니다. 하늘에서 흰 눈이 내려오면 항상 아저씨와 처음 인연이 닿게 된 날을 떠올립니다. 저에게도 눈이 반가운 손님이 되었어요.

존경과 사랑을 담아 태섭







[1월 30일 화요일]

변함없이 다정한 아저씨께

연말 잘 보내셨나요? 저의 걱정 때문에 몇 년 동안 참석하지 않았던 가족 모임에 참석하셨다는 말이 저에게 얼마나 웃음을 자아내게 했는지요. 그래도 성탄절과 연말을 가족과 보내니 좋지 않으시던가요? 가시방석이었다고 쓰신 말을 보고도 뻔뻔하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어이없으실 지도 모르지만 만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건 좋은 거잖아요.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며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대리만족한다고 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저는 예정보다 우성이네 별장에서 더 오래 머물렀어요. 거의 1월 중순까지 있었습니다. 우성이 아버님이 유쾌하시고 농구를 무척 좋아하시는 분이라 별장에 찾아오셔서 넷이서 농구를 하는 날이 많았어요. 별장에 농구장까지 만들어놓은 것을 보면 농구에 대한 부자의 열정과 애정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부자사이가 부럽기도 했고요. 거의 방학 내내 있을 뻔한 걸 농구부 훈련 덕분에 겨우 중순까지만 있다 돌아오게 되었어요. 우성이 아버님이 이전에 학교에 찾아온 당숙에 대해 듣고는 그 사람도 농구를 제법 좋아해서 최근까지 즐겼다고 하더군요. 학교를 다니다 금방 그만두었다는 말이 사실이었어요. 자세히 들려주시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문제가 있어 농구부를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 모양이에요.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까요. 그럼에도 당시 저에게 다가와 농구를 같이 하자고 하고 농구의 재미를 알려주려한 것을 보면 여전히 농구를 사랑하는 사람일텐데.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넸다 더 상처받게 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이제 리그가 얼마 남지 않아서 훈련이 더 거세졌어요. 남은 방학은 전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이 들기 전까지 훈련으로만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예요. 이런 일정에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열심히 하고싶다는 생각, 제 신장의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 연구를 하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겠어요. 최근에는 늘 취약했던 중장거리 슛을 연습하고 있어요. 누군가 자세히 봐주면 좋을텐데 정우성이나 윤대협은 본디 재능이 뛰어난 놈들이라 그들의 조언은 영 도움이 되지 않아요. 본능에 가까운 감각을 어쭙잖은 단어로 지리멸렬하게 나열하는 것을 저같은 범인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어요.
훈련이 바빠진 탓에 달재와 늘 가던 봉사를 이번 달에는 한 번도 가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요. 달재의 괘념치 마라며 혼자 기숙사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고된 훈련에 지친 몸이 그보다도 무거워 뒤를 따라간 적이 없어요. 다음 휴일에는 몸을 움직여 아이들에게 선물로 줄 간식이라도 사들고 가려고 합니다. 학교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가게에 파는 쿠키가 그렇게 맛있대요. 카라멜 시럽이 듬뿍 발라져있는데 그 위에 피칸과 약간의 소금이 뿌려져있어 달콤짭짤하면서도 피칸의 고소하고 씁쓸한 맛의 조화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는데 카라멜 위에 소금이 뿌려져있는 맛이 상상이 가지 않아요. 왜 달달한 것 위에 소금을 뿌리는 걸까요? 아저씨는 달콤한 디저트들을 좋아하시나요? 좋아하신다면 다음에 제가 비서님편으로 보내드릴게요.

처음으로 침대에서 편지를 쓰는 태섭







[2월 25일 일요일]

저에게 겨울의 기적인 아저씨께

제가 가끔 윤대협이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요? 얼마 전에는 체육관에 갔더니 연습하지 않고 코트에 엎드려 책에 연필로 무언가를 쓰고 있기에 다가가서 보니 퍼즐을 풀고 있더군요. 아마 그 일로 감독님에게도 여러 번 혼난 모양인데 자기는 꼭 그 퍼즐을 다 풀어야겠대요. 왜 기숙사에서 하지 않고 굳이 체육관에서 하는 걸까요. 감독님이나 선배들이 모이기 전에 저도 옆에 자리하고 앉아 같이 풀어주었어요. 그놈의 퍼즐을 다 해결해야 흥미가 떨어져 그만두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근데 다른 퍼즐이 실린 책이나 신문을 또 들고 오는 모습을 보곤 도와주기를 포기했습니다. 조만간 새 학기와 리그가 시작되기도 하니 저도 긴장되어서 퍼즐 따위를 같이 들여다볼 여력이 없어요. 여전히 저를 고목나무야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자기만의 세계가 확실한 녀석이에요.
봄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이 작년과는 약간 달라졌어요. 작년에는 기대에 부응하여 대학 생활을 즐기는 것과 더불어 성적도 챙겨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거든요. 저에게 즐기라고 하셨지만, 당시의 저에게는 그것이 잘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올해부터는 진심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년의 성적이 제법 괜찮아서 자신감이 붙기도 했고, 농구부에서도 주전이 되어 경기를 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초조하던 때와는 마음가짐이 확실히 달라져요. 사람이 참 간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추운 날 감기에 걸리지 않고 몸 잘 챙기셨나요? 저는 지난날의 말이 무색하게도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았습니다. 아직 겨울이라 날이 추운데도 뒤뜰에 나가 책을 읽었더니 결국 감기에 걸렸어요. 리그를 앞두고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어리석다 말하시겠지요. 하지만 그곳은 아시다시피 인적이 드물다 보니 저에게는 도피처와 같은 편안한 공간이었어요. 세상의 모든 것과 멀어져서 조용히 쉬고 싶을 때 그곳에 가는 게 버릇이 되어 이젠 그렇지 않을 때도 자주 찾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감기에 걸리고 말았지만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보통 다들 일주일은 앓는다는데 저는 사흘 만에 멀쩡해졌거든요. 그곳을 찾는 게 우울함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저만의 공간이 없는 곳에서 부대끼며 살았으니 그런 고요함이 늘 간절하고 그리워서 찾았을 뿐이에요. 아저씨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으실까요? 저택에서 혼자 지내신다니 저처럼 혼자만의 공간은 필요 없으시겠죠. 오히려 반대로 사람을 찾으실지도 모르겠네요. 저나 달재는 가끔 조용히 혼자 쉬는 시간을 갖는 걸 좋아하는데 우성이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분명 혼자 쉬기도 하는 것 같은데 사람을 좋아해서 느끼는 외로움이 더 큰가 봐요.
저는 여전히 이 생활에 풍경처럼 제가 섞이고 녹아들어 가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아요. 그럴 때면 보내주신 엽서의 그림을 보며 그 바다에 제가 가게 되는 일도 언젠가 생길지 모른다고 상상하곤 합니다. 저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났으니 그 바다에 가서 아저씨와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요? 적어도 제가 학교를 졸업하는 날에는 오시리라 믿어요. 그때는 저에게 직접 꽃다발을 전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같이 보내드릴 쿠키도 맛있게 드셨으면 해요. 너무 단맛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셔서 다른 종류를 골라 담아보았어요. 다른 것들도 아주 맛있더라고요. 제가 말한 캐러멜이 올려진 쿠키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도 무척 좋았고요. 나중에 셋이 차와 다른 디저트를 먹어보기도 했답니다. 혹여 근처에 오실 일이 있다면 한 번 들러보세요. 저는 잘 몰라 아무거나 마셨는데 저에게는 이름도 낯선 것들을 고른 달재와 우성이가 마셔본 뒤 찻잎이 괜찮다고했으니,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늘 당신의 행복을 바라는 태섭


슬램덩크
2024.01.25 04:37
ㅇㅇ
모바일
태섭이가 너무 귀엽고 다정하고 사랑스럽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baf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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