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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9 22:32





 

 

 

스티븐 스트레인지. 그의 장례식에는 낯익은 얼굴들과 낯선 얼굴들이 뒤섞여있었다.

카마르 타지의 수련생들, 그가 의사 시절 함께 했던 옛 동료들, 웡과 크리스틴까지.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이따금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그와 가까웠던 사람 중 하나인 허니는 울지 않았다.

그가 이마나 팔뚝, 허리 어딘가에서 피를 흘리며 포탈을 넘어오는 모습을 보았던 게 두 손으로 꼽지 못할 정도였다. 보통 사람들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만큼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예상했기 때문일까? 허니는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다.

남들보다 상처 회복이 빠른 사람이었다. 뉴스에서 그가 지구를 구하기 위해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금방 아물 상처와 함께 돌아올 거라 생각했지만, 정작 마주한 건 심장이 꿰뚫린 채 차갑게 식은 몸이었다.

두 손을 맞잡은 채로 그와 함께 했던 지난날을 곱씹던 허니의 옆으로 익숙한 그림자가 졌다. 슬쩍 고개를 들면 카마르 타지에 갈 때마다 저를 늘 반갑게 맞이해주던 얼굴이 있었다.





 

“오랜만이네, 허니. 그동안 잘 지냈나?”





 

언제부터였을까. 타인이 건네는 평범한 안부인사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허니는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리고 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었다. 왜 남편과 함께 오지 않았냐고 묻지 않길, 화장으로도 채 다 가려지지 않은 눈 아래의 옅은 멍 자국을 알아채지 못하길.





 

“전 잘 지내요. 다른 사람들은요?”


“여전하지. 다음에 시간 되면 카마르 타지로 놀러 와. 자네를 보면 다들 반가워 할 거야.”





 

고민과 걱정, 어떤 다툼도 없이 배려와 사랑이 넘치던 곳. 그리고 사람들. 그날들이 그리웠지만, 다시 찾기 어려운 일상이었다.

지난 일들을 모두 털어놓으면 날 어떻게 볼까. 행복하게 잘 살겠다며 밝게 웃으며 떠난 사람이 사랑하던 남자에게서 처참하게 짓밟히며 살았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을까.

점차 어두워지는 허니의 낯빛을 내려다 보던 웡이 잠시 침묵하다 먼저 입을 떼었다.  





 

“오늘 생텀에 한번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네. 내일 수련생들과 대청소 한번 할까 하는데, 그전에 자네 짐은 직접 챙겨 가는 게 나을 듯싶어서.”


“저번에 다 챙겨왔어요. 남은 건 없을 텐데….”






웡은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슬링링을 낀 손을 들어 포탈을 만들어냈다. 포탈 너머 익숙한 생텀의 계단과 웡을 번갈아 보던 허니가 머뭇거리다 포탈 너머를 향해 걸음을 뗐다. 몇 걸음을 더 옮기고도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자, 허니가 뒤를 돌았다.

웡은 그 자리에서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멀리서 관망하듯 허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정리 잘하고 돌아가길 바라네.”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포탈은 붉은 불꽃 일부만을 남기며 눈앞에서 그대로 소멸했다.

허니는 어딘가 서늘한 기분마저 드는 생텀 로비를 둘러보았다. 바깥은 따스한 기운이 내려앉은 봄인데, 이곳 주인 잃은 생텀 안은 어쩐지 한기가 돌았다.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가며 손끝으로 난간을 훑어내자, 뽀얀 먼지가 묻어나왔다.

이곳은 얼마나 비어있었던 걸까.

어쩐지 마음 한쪽이 욱신거릴 때쯤 어딘가에서 훅 불어오는 바람에 허니의 고개가 그곳을 향했다.

복도 끝 그의 방. 삐걱거리며 열렸다, 닫혔다 하는 문 뒤로 버건디 색의 커튼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그 커튼의 움직임은 꼭 자신을 부르는 손짓처럼 보이기도 했다.

허니는 홀린 듯이 그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방에 가까워질수록,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선명해졌다. 3월에 서리가 낀 창문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묘한 기분을 끌어안은 채 창문을 닫고 나서야 요란하게 춤추던 커튼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허니는 그제야 방 안을 둘러보았다.

기다란 테이블 위에 온갖 디저트와 차를 두고 맛 평가를 하던 그 즐거운 시간, 소파 위에 눕지 말고 앉으라며 잔소리하던 목소리. 틱틱대는 말투와는 다르게 다정한 시선이 흐르던 눈동자. 그 순간들을 떠올리면 방 안에서 온기가 다시금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먼지가 조금 쌓인 것만 제외하면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각 잡혀있고 늘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던 그의 방에서 사람 냄새가 날 법한 공간은 그의 책상 위 하나였다. 너른 책상 위에 어지러이 널린 두툼한 책들. 지구를 떠나기 직전까지도 그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흔적이었다.

허니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과 글자가 가득한 책을 하나씩 덮으며 책상 한 편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렇게 책을 대여섯 권쯤 치워내고 나니, 남은 건 얇디 얇은 노트였다. 허니의 시선은 깔끔한 단색의 표지 한 가운데에 누군가가 날려쓴 글자로 옮겨갔다.

이 노트를 발견한다면 그 어느 누구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단어 하나.



 

‘Diary’



 

그의 일기장이었다.


 

-


 

타인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이 옳은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것에 손을 대도 될지 이제 허락을 구할 수 없는 이의 일기장이라면 더더욱.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는데도, 허니의 손가락은 표지 끄트머리를 자꾸만 만지작댔다. 손끝으로 그 끝을 살짝 들었다가, 이내 다시 놓고. 무의미한 머뭇거림만 몇 번이고 이어졌다.

표지만 들춰보는 거야. 빈 노트일지도 모르잖아.

누구의 인기척도 없는 방 안을 괜스레 한 번 둘러본 허니가 가죽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금기시되는 어떤 책을 펼치는 것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괜스레 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한 번 축이고는 매끈한 일기장의 표지를 들췄다.





 

'2018년 1월 3일.

그 아이의 이름은 허니 비라고 했다.'





 

표지만 열어보겠다던 다짐은 수 년 전에 쓰여진 그 짧은 문장 하나에 금세 흐물거리며 녹아버렸다. 이래서야 한 줄만 읽고 덮을 수 있을 리가.

죄송해요, 닥터. 한 번만요. 제 이름이 쓰여있는데 어떻게 안 읽고 덮을 수 있겠어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기도하듯 중얼거리던 허니가 실눈을 뜨고는 그 아래로 이어진 삐뚤빼뚤한 글자들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에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인 줄로만 알았다. 비가 내릴 때면 생텀 문 앞에서 울어대는 가냘픈 소리는 늘 있었으니. 예민한 청각을 지닌 것은 괴롭다. 오늘따라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앓는 소리에 대충 먹이를 주고 보내려 참치캔을 들고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건 고양이가 아닌 여자아이였다. 몸을 웅크리고 굶주린 배를 붙잡고 앓는 아이가. 비에 홀딱 젖어 바들거리며 올려다보는 눈이 고양이와 비슷한 것도 같았다. 매정하게 보낼 수도 없어 일단 오늘 밤은 재워주겠다고 했지만, 어쩐지 조금 더 오래 있을 것만 같다.'





 

허니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벌컥 문이 열리고 문 앞에 쭈그려 앉은 저를 발견하자마자 짜증으로 가득 찬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스러움으로 물들던 그 얼굴.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지만 내어준 담요도, 코코아도, 벽난로 앞 열기도, 그 모든 것을 기꺼이 준 그 마음도 따뜻했던 날.

부모님은 어디 있냐고, 왜 여기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게 한가득하였을 텐데도 그는 묻지 않았다. 다친 덴 없냐며 더 필요한 건 없냐며 제 몸을 더 살피던 그날을 떠올리며 허니는 옅게 웃었다.

일기장을 후루룩 넘기자, 페이지들마다 길고 짧은 글들이 가득했다. 얼마나 오래 일기를 써왔던 걸까.

이 모든 페이지들마다 내 이름이 적혀져 있을까. 혹은 없을까.

허니는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날짜가 다음 날로 이어지지 않는 걸 보니 매일 쓴 건 아닌 모양이었다.





 

'2018년 1월 7일.

이젠 조금 괜찮아 보여 조심스레 아는 사람이나, 갈 곳은 있냐 물었더니 허니 비는 대답 대신 고개만 절레 저었다. 며칠을 생텀에서 먹이고 재우긴 했다만, 이대로 지낼 수 없는 노릇이다. 웡에게 부탁을 좀 해야겠다.
 

+) 남는 방이 없다며 거절당했다. 거 되게 빡빡하게 구네.'

 




 

'2018년 1월 9일.

웡과 긴 대화 끝에, 내가 생텀을 비운 시간에는 허니 비가 카마르 타지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합의를 봤다. 생텀은 홀로 지내기엔 너무 적막하고, 외로운 곳이니까. 적어도 수련생들끼리 싸우는 일은 없을 테니 나 없는 생텀보단 훨씬 낫겠지.'




 

'2018년 1월 15일.

애들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더니, 그게 10대 청소년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나? 오후에 생텀으로 돌아오니 허니 비의 말랑한 볼과 하얀 무릎이 붉은 생채기로 가득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수련 시간에 옆에서 구경하다 채찍으로 된 유물에 얻어맞았다고 했다. 생텀에 구비된 약을 꺼내 발라주면서 크게 다칠 수 있으니 수련할 때는 주변에서 얼쩡거리지 말라고 이야기하는데, 반성하기는커녕 허니 비는 싱글싱글 웃었다. 혼나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그 웃는 얼굴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허니는 그날을 떠올렸다. 잊을 수 없는 날 중 하나였으니까.

그냥 좋았다. 짐짓 엄한 얼굴과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 잔소리가 좋았다. 그는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가득 묻어나왔으니까.

아마 그날이었을 것이다. 첫 만남부터 꾸준히 보여준 그의 다정함으로, 결국 그에게 마음을 품게 된 날이.

 




 

'2018년 1월 20일.

요즘 허니가 좀처럼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한다. 바닥만 내려다보며 두 손을 맞잡은 채 꼼지락거리는 행동이 늘었다. 왜지? 이유를 가늠해 보려 해도 도통 알 수가 없다. 생텀에 있는 물건 중 뭔가를 깨트렸나? 내가 준 용돈을 잃어버렸나? 뭔가 잘못한 게 틀림없는데. 아니면 숨기고 있다거나.'




 

 

'2018년 3월 25일.

정신이 없어서 두 달간 생텀으로 돌아오자마자 눕기에 바빴다. 두 달 전에 허니가 내 눈을 좀처럼 쳐다보지 못한다고 적었는데, 요즘은 또 나를 휙 째려보기 시작한다. 이 이유는 알겠다. 요즘 바쁜 탓에 영 신경을 못 써준 탓이겠지. 조만간 바람이라도 함께 쐬러 나가야겠군.'




 

'2018년 3월 31일.

오, 이런.'



 

 

‘오, 이런.’? 이게 다야? 3월 31일이 얼마나 중요한 날이었는데 그날에 대한 감상이 겨우 이 세 글자가 다라고?

허니는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니의 몸에서 튕겨 나간 의자가 빙글빙글 돌며 책장에 부딪혔다가 힘없이 멈췄다. 동시에 일기장에 대한 호기심도 한순간에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뒤에 이어질 일기의 내용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알 것 같으니.

알고는 있었지만, 그 사람에게 난 그저 곤란한 애였던 거지. 허니는 분을 못이겨 씩씩대다 일기장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큰 보폭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2018년 3월 31일.
 

십 대 끝자락에 서 있던 어린 허니 비가, 스티븐 스트레인지에게 고백한 날이었다.








닥스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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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대신 일기장만 남았지만... 어쨌든 닥스너붕붕임 ᵕ᷄≀ ̠˘᷅
 

2024.04.30 00: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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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일기 뭔가 더 적혀있을거 같다 닥스가 다른 사람은 못보게 마법 걸어놓은거 아냐? 센세 진짜 재밌어요ㅠㅜㅠㅠㅠ어나더 기다릴게요!!
[Code: b443]
2024.04.30 01:4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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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궁금하게만 만들어놓고 가지마!!!!ㅠㅠㅠ무슨일이 있었던거야 닥스는 왜ㅠㅠㅠㅠㅜ어쩌다 이렇게 된거야ㅠㅠ
[Code: 1f25]
2024.04.30 03:0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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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가슴이 미어져요 어떻게 이런 대작을 상상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들을 재밌게 배열하신거에요... 진짜 문장만으로 고요하고 외로운 생텀이 제 눈 앞에 나타나서 글의 깊이에 깜짝 놀랐어요.. ㅜㅜㅜㅜ 선생님 억나더 주셔야 해요. 나 지금 진심으로 심장께가 부르르르 떨려요
[Code: 0745]
2024.04.30 10:56
ㅇㅇ
모바일
센세 날 여기서 이렇게 쓰러지게 하고 가면 안돼ㅠㅠㅠㅠㅠㅠ
[Code: 1a47]
2024.04.30 15:57
ㅇㅇ
모바일
센세 제발 돌아와줘 억나더까지 함께 달려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bb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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