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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22:59
럼로우는 목에 뭔가가 닿는 감각에 잠에서 깼다. 천천히 눈을 떠 보았지만 천장의 조명이 너무 눈부시게 느껴져서 곧 다시 감게 되었다. 주변이 인지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약기운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인지 감각도 정신도 멍해서, 제 주변의 부산스러움이 의료진들이고, 그들이 제 목의 튜브를 제거하고 있는 거라는 걸 깨닫는데에 시간이 걸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려하자, 누군가가 제 관자놀이를 살짝 붙들어 다시 머리를 바르게 했다. 목에 느껴지는 감각이 아픔은 아니었지만 뭔가 팽팽하게 살갗을 당기는 게 약하게 느껴졌다. 소독약 냄새가 갑작스럽게 코를 찌르고, 기관절개 튜브가 있던 목 가운데 부근을 차가운 액체를 머금은 솜이 빠르게 훑고 지나간 뒤 누군가의 손길이 제 목에 밴드를 붙였다. 이미 한참동안 잤던 것 같은데, 그래도 왠지 모르게 계속 피곤해서 그대로 그냥 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손길들이 양 옆에서 팔을 붙들어 일어나 앉게 했다. 옆에서 의료진인 것 같은 누군가가 말을 걸었지만, 정신이 너무 멍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웅웅대는 말소리가 방안을 채우더니, 곧이어 삑삑거리는 기계음이 울렸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안개가 걷히듯이 멍함은 옅어져갔지만 대신 목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의식이 좀 더 또렷해지자 목의 통증은 약한 정도고 실제로는 숨을 쉴 적마다 속이 에이듯 아픈 게 느껴졌다. 힘 없는 팔을 들어 목 부근을 어색하게 더듬자 산소 튜브가 꽃혀있던 자리에 밴드가 붙어있는 게 만져졌다. 대신 산소줄은 이제 코에 끼워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숨을 쉬는 건 쉽지 않았다.

"길게 호흡해보세요."

럼로우는 그제야 제 등에 닿아있는 게 의료진의 손이 아니라, 청진기의 차가운 금속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픈 건 둘째치고 너무나 피곤해서 그냥 진통제 투약량을 다시 높여달라고 하고 잠들고 싶었지만 말을 할 힘도 없을 뿐더러, 제가 바로 앉아 있을 수 있도록 양 옆에서 붙들고 있는 손들이 그 말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럼로우는 폐에 느껴지는 쓰라림을 무시하려 애쓰며 될 수 있는대로 그들의 지시에 따랐다. 의사는 한동안 그렇게 그의 호흡소리를 진찰하더니, 다른 의료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4mg 더 넣어."

제 오른편에 서 있던 의료진이 IV 라인에 주사 바늘을 찔러넣는 동안, 럼로우는 그의 의료 카트에 놓인 빈 앰플의 라벨지를 보고 그들이 자신에게 주고 있는 게 형질 안정제라는 걸 알았다. 의도치 않게 엿들었던 의료진의 대화가 떠올랐다. 희석 혈청과 형질 안정제를 번갈아 투약하는 꼴이 될 거라던 얘기가. 그래도 아직은 안정제가 잘 듣는 단계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 쉬는 게 그렇게 아프진 않게 되었다. 의료진은 몇 번 더 그의 호흡소리를 확인하더니 마침내 다시 침대에 눕게 해주고는 병실 불을 어둡게 낮추고 나갔다. 럼로우는 왼쪽 얼굴이 열감과 건조함에 따갑다고 느끼면서도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피곤에 그냥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에 잠에서 깼을 때에는 한밤중인게 확실했다. 병실 조명은 완전히 꺼져 있었고, 창문 한가득 달빛이 비쳐 푸르스름했다. 시원한 초가을의 밤 바람에 반쯤 비치는 엷은 색의 커튼이 살랑이고 있었다. 왜 창문이 열려있는 걸까? 화장실의 거울까지 급하게 아크릴 거울로 바꿔 달아 놓았으면서. 실제로는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들은 자신이 자살하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 건가? 아니면 어차피 완전히 열리는 창문이 아닐테니 뛰어내릴 수 없다고 생각한 건가? 아니면 설마 침대에 수갑이라도 채워 놓은 건 아니겠지. 럼로우는 제가 침대에 묶여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양 팔과 다리를 움직여보았지만, 몸에 힘이 없는 게 문제일 뿐 움직임은 자유로웠다.

"럼로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야 병실에 자신이 혼자 있던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1인용 소파에 캡틴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병실의 불은 전부 꺼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잠든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보였다. 왜 캡틴이 여기에 있는 걸까? 럼로우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발치에 놓여있는 짐가방으로 향했다. 아. 그렇지. 짐을 캡틴이 가져다줬다고 했었지. 하지만 왜 그가 병실에 머무르고 있는 걸까? 심지어 이런 한밤중인데. 게다가 그는 유니폼 차림이었다. 익숙한 별 문양이 반듯하게 새겨진 유니폼은 팔목과 어깨 부근에 표면이 깊게 긁힌 흔적이 있었고, 왼쪽 정강이 부근은 까맣게 쓸린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소파 왼편에 기대어져 빼꼼히 보이는 둥근 실루엣은 그의 방패인 게 분명했다. 마치 임무지에서 돌아오자마자 곧장 이 병실로 오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것 말고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야, 이전에 간호사가 분명 캡틴이 제 짐을 가져다줬을 뿐만 아니라 줄곧 곁에 있었다고도 했었지만... 어벤져스 일로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이고 계속 있었다고. 하지만 왜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 시간에, 멀쩡한 본딩 파트너가 있는 사람이 집에도 가지 않고. 자신이 이런 상황인 건 어떻게 안 걸까? 쉴드 사람들에게 들었나? 아니면 설마 퓨리가? 그렇게 말이 안 되는 얘기도 아니었다. 퓨리는 자신이 죽으려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고, 그런 허튼 생각을 다시 하지 못하게 할 방편으로 캡틴을 보낸 건 지도 몰랐다. 굳이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신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수면제를 그렇게 먹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고의였는지 사고였는지 기억이 없으니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잭과 윈터를 두고 그런 식으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굳이 캡틴을 이 병실에 밀어넣고 붙어있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약기운인지 아니면 단순히 먹은 게 없어서인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로 어설프게 일어나 앉자, 캡틴이 곁에 다가와 물을 따라주었다. 목은 물론이고 입안도 바싹 메마른게 느껴졌지만, 입에 뭔가를 넣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서 그냥 입술에 물이 살짝 닿을 정도로만 컵을 기울였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다행히 캡틴은 가벼운 플라스틱 잔에 반도 담기지 않았던 물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걸 보고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왼쪽 얼굴이 건조하다 못해 쓰라린게 느껴져서 늘 하던대로 임시방편으로 손바닥으로 지긋이 누르려 했지만 손바닥에 닿는 건 까슬하게 일어난 화상 자국이 아니라 매끈하고, 전류의 미세한 진동과 열감이 느껴지는 생체 마스크의 표면이었다. 아. 그렇지. 이걸 쓰고 있었지 하는 기억이 이제야 떠올라 손을 내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스크를 이렇게 오랫동안 쓰고 있어본 적은 처음이지 싶었다. 방 안에 시계 같은 건 없었기에 시선은 자연스럽게 캡틴의 손목에 채워진 디지털 시계로 향했다. 캡틴은 자신을 부축해주느라 충분히 가까이 와 있었지만, 왼쪽 눈의 흐릿함이 나아지지 않았는지 작은 글자가 잘 읽히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왼손의 약지와 소지의 감각도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두 가지는 희석 혈청으로도 낫지 않을 모양이었다.

"금요일 밤이야. 곧 자정이 될 거야."

럼로우는 캡틴의 말을 곱씹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잭이 이르면 토요일에 돌아올 예정이었고, 윈터는 그 다음주 초에나 올 거였다. 일정이 아직도 그대로이고 운이 좋으면 그들이 이번 일을 모르고 넘어갈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캡틴은 임무지에서 병실로 곧장 온 게 더더욱 분명해보였다. 대체 언제 임무가 끝나 돌아온 건진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가 여기에 이렇게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조 박사는 이걸 알고 있을까? 모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도 쉴드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알고 있겠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일부러 수고를 들여가며 자신에게 아이의 사진을 가져다 주는 친절을 베풀었는데. 자신의 본딩 알파가 이 병실에 이렇게 매여 있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닐 거였다. 럼로우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늦었네요. 들어가 보셔야죠."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까슬하게 마른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 잠기고 갈라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캡틴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떠날 채비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쉴드가 시켰든 어쨌든 간에... 짐을 가져다주고 병실에 붙어있었다는 사람을 재차 내쫓는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한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그와 할만한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 럼로우는 어색하게 제 손만 내려다보았다. 지금 가장 알고 싶은 건 쉴드가 재판 때까지 자신을 여기에 가둬둘 건지 어떤지였지만 캡틴에게는 그런 걸 물을 수 없었으니까. 얼굴은 물론이고 등과 어깨의 화상 자국도 아플정도로 건조한 게 느껴졌지만 그것도 캡틴 앞에서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냥 그가 떠나면 마스크를 벗고 차가운 물에 적신 타올을 얼굴에 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때마침 두 명의 의료진이 들어온 덕에 어색한 침묵이 끊겼다. 그들은 럼로우의 바이탈과 여러 수치를 점검하더니 그에게 인지 능력을 확인하는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다시금 그의 호흡 소리를 청진했다. 럼로우는 그들이 조금 더 병실에 머물러줘서 캡틴과 단 둘이 있지 않아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과 그들이 제발 자신에게 숨을 길게 쉬어 보라는 소리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한데 뒤엉킨 채였지만 그래도 지시에 고분고분히 따랐다. 어쨌든 수갑이 채워지거나 해서 침대에 묶여있는 건 아니니까, 협조적으로 굴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지난 주에 잭과 윈터를 본 게 그들과의 마지막은 아니었으면 했다.

"숨 쉴 때 통증은 어느 정도에요? 10점 척도로."

"...5 정도 입니다."

사실은 7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집으로 보내주지 않을까봐 낮춰 말했다. 물론 더 낮춰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약한 것이라도 진통제를 줬으면 해서 아주 낮춰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응답이 만족스러웠던지 의료진은 아무런 약도 추가로 주지 않았고, 럼로우는 차라리 조금 더 아프더라도 집에 갈 수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그럭저럭 만족했다. 꼭 보내준다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의료진 중 한 명이 손목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늦은 시간이긴 한데, 그래도 식사 하는게 중요하니까 곧 올려 보낼게요."

뭔가를 입에 넣거나 삼키는 건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럼로우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의료진이 나간 뒤 아무래도 캡틴이 여기 계속 있게 하는 건 안 될 일인 것 같아서 다시 말을 건네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대로였다.

"...여기 안 계셔도 됩니다."

"알아."

거기에 대고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럼로우는 다시 물끄러미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의료진이 이것저것 확인하며 소매를 걷어올린터라 왼팔 안쪽에 더 이상 검은색의 봉합 실 흔적이 없는 게 훤히 보였다. 희석 혈청 덕인지 상처는 아물어 있었지만, 그래도 흉터들은 자잘한 흰 선이 되어 남아있었다. 화상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아서 어쩌면 캡틴은 모를 것도 같았다. 그가 상황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이면 그냥 상태가 나빠진 정도로만 알았으면 좋겠지 싶었다. 물론 병실에 계속 있으려는 걸로 봐서는 아닌 것 같지만.

간호사인지 아니면 그냥 병동 직원인지 모를 누군가가 가져다 준 식사는 아주 작은 건더기가 조금만 들어있는 치킨 수프였다. 따뜻한 편에 더 가까운 미지근한 온도였지만 럼로우는 자신이 그걸 먹을 수 없을 거란 걸 잘 알았다. 사실은 쟁반째 그냥 옆으로 치워두고 다시 잠이나 들고 싶었지만 캡틴이 보고 있는 데서 그럴 수는 없었다. 어차피 누가 봐도 자신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단 건 뻔히 보이는 일일테지만, 그래도 식사를 전혀 하지 않는 걸 보이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거기에 대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으니까.

그래서 억지로 스푼을 들고, 거의 입술에 대기만 하는 수준으로 몇 번 입에 가져가봤지만 곧장 원치 않는 기억들이 떠올라서 실제로는 조금도 먹을 수 없었다. 뭔가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려서 제 주의를 돌려볼까도 싶었지만, 떠오르는 거라곤 오두막에서의 날들 뿐이었고, 역으로 그 기억들에 부정적인 감정이 달라붙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기다리며 지내게 될 때 자신을 버티게 해줄 건 그때의 기억들 뿐일 테니까. 그것 마저 없으면 그 시간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럼로우는 몇 번 형식적으로 먹는 척만 하다가 스푼을 완전히 내려놓고 형편 없는 변명과 함께 쟁반을 밀어냈다.

"별로 배가 안 고파서요."

차라리 캡틴이 안 된다거나, 좀 더 먹어야 한다거나, 제대로 먹어야 한다는 말을 했으면 더 나았을텐데. 그가 별말 없이 쟁반을 치워주자 도리어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상태가 나빠진 걸로 알고 있는 게 아닌 게 분명했다. 어쩌다가 캡틴이 이 상황을 알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자신이 죽을 생각으로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스스로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고, 고의였는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캡틴이 이 일을 알았다는 게 제일 마음에 걸렸다.

"캡틴-"

"럼로우-"

둘이 동시에 서로를 부르는 게 겹치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다시 이어졌다.

"먼저 얘기해."

럼로우는 자신이 여기에 갇힌 건지 아니면 며칠 내로 퇴원할 수 있는 상태인 건지를 가장 알고 싶었지만, 캡틴에게는 그렇게 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질문을 했다.

"...잭은 임무에서 돌아왔습니까?"

예정대로라면 잭은 빨라야 내일 돌아온다는 건 잘 알고 있었고, 그저 자신이 어떤 형식으로든 쉴드에게 제약을 받는 상황인지 알아보기 위해 한 질문이었다. 자신이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든, 혹은 면회가 제한되는 것이든 제약이 있는 거라면 잭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설명이 자연스럽게 붙을 테니까. 설사 캡틴이 쉴드의 지시가 있었거나, 혹은 정말로 모르고 있어서 그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잭의 임무가 일정대로 끝날 건지는 알 수 있을 거였다. 물론 윈터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 때문에 둘의 사이가 서먹해져있으니 그나마 잭에 대해 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캡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걸 보니 잘못 선택한 질문인 것 같았다. 럼로우는 다급하게 그냥 못 들은 걸로 해달라고 덧붙이려 했지만 스티브의 대답이 더 빨랐다.

"아니, 아직. 클린트도 후발대로 합류했는데, 내일 늦게나 월요일 새벽에 올 거라고 들었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럼로우를 보면서 스티브는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사실은... 앙상하게 마른 럼로우의 팔을 보니 예전에 팔목에 금이 가게 했던 게 기억나서 그걸 사과하려 했던 건데. 아니, 사실은 금 가게 한 것 보다도 그가 자신을 두고 다른 알파들을 만나고 다녔다고 오해했던 걸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럼로우는 정작 롤린스가 어디에 있는지만 생각하고 있다는 게 울컥하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해서 분위기는 금세 굳어버렸다. 럼로우가 제일 먼저 찾는 게 그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롤린스라는 게 싫었다. 자신의 기억 속의 럼로우는 언제나... 스트라이크 알파팀 사령관 브록 럼로우는 늘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작은 바람에도 사그라질 것처럼 약해져 있는 모습을 보자 화가 났다. 스티브는 그 감정의 대부분은 사실상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와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라는 걸 잘 알았지만, 그래도 분노의 무게는 대체로 롤린스를 향해 넘어갔다. 그 모든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롤린스는 대체 곁에서 뭘 한 거지? 그가 이렇게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걸 정말로 몰랐나? 그가 자해를 하고 수면제를 남용하고 있는 걸 정말로 몰랐던 건가?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그 아파트에서 자신을 내쫓아 놓고, 토니의 약혼 피로연장에서도 럼로우가 제 것인 양 굴어놓고, 그래놓고 왜 정작 럼로우를 돌보지 않은 건지 화가 났다.

하지만 곧 럼로우가 제 기분을 살피고 있는 게 느껴져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럼로우는 늘 자신의 표정을 살폈던 것 같았다.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분도 곧잘 알아채곤 했었다. 그 때에는 그게 단순히 그가 다른 사람들을 잘 신경쓰는 다정한 사람이어서라고만 생각했었지만, 토니의 워크샵에서 럼로우의 서류를 본 뒤로는 어쩌면 그건 그가 어릴 적부터 살아남기 위해 터득해야만 했던 기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반응을 보면 그 짐작이 맞았던 것 같았다. 스티브는 일부러 어깨에 힘을 빼고 차분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팔 다치게 했던 거 미안해. 다른 알파들이 있다고 오해했던 것도."

럼로우는 여전히 자기 손만 내려다본 채 가만히 있을 뿐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제대로 듣고 있는 건 분명했다. 스티브는 걷어진 소매 아래로 화상 자국이 드러난 럼로우의 팔목을 바라보았다. 인사이트 날 건물 붕괴에 휩쓸려 생긴 화상이었다. 건물이 무너질 때 같은 곳에 있었던 샘도 화상을 입었지만, 그는 그래도 윙 슈트를 입고 있었던 덕에 날개가 뜯겨나간 오른쪽 어깨의 작은 부위에만 약한 화상을 입은 게 다였다. 하지만 평범한 스트라이크 유니폼만, 그것도 제대로 무장하지 않고 평복만 입고 있었던 럼로우에게는 상황이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러 왔던 거였는데. 그에게 이용당했다는 배신감에 그를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샘에게 그를 쫓아가게 했었다. 그 때 하다못해 그를 그냥 무시하기만 했더라면, 차라리 럼로우는 무사히 도망쳐서 잘 지냈을 텐데.

"...난 정말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럼로우가 살아 있을 거라는 롤린스의 주장은 가능성이 매우 낮긴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0이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걸 주장한 게 롤린스라서 더 고집스럽게 무시했던 걸지도 몰랐다. 그 때에라도 그를 찾으려 했다면, 그래서 하루라도 더 빨리 하이드라로부터 그를 구했더라면. 그의 몸이 지금보단 나은 상태일 거였다. 의료진들이 근본적인 치료 방법은 없고 그냥 증상에 대응하는 게 고작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게 벌써 여러 번이었다. 게다가 럼로우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어서 저체중 상태에 영양실조까지 있었다. 대체 롤린스는 왜 그가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둔 걸까? 마음 같아선 롤린스를 저만치 치워버리고 자신이 직접 그를 돌보기라도 하고 싶었다. 어벤져스 일이고 뭐고 전부 상관 없었다. 정작 중요한 한 사람을 구할 수 없다면 세계를 구한다거나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헬렌과 본딩한 상태였고, 그녀가 아무리 많은 걸 이해해준다 하더라도 자신이 럼로우를 돌보는 것까지 받아들여줄 수는 없을 거였다. 물론 자신이 부탁한다면 받아들여주겠지만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애초에 그런걸 요구해선 안 되었다.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새이디라도 보러 와줬으면 좋겠어. 내가 없을 때라도."

이제는 왜 럼로우가 진작에 자신에게 스스로가 오메가라는 거나 임신했다는 걸 말해주지 않았는지는 상관 없었다. 왜 하이드라 얘기를 자신에게 해주지 않았는지도. 그의 몸이 바람에 쓸려나가는 모래처럼 천천히 부서져가고 있는 마당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더 이상 자신과 전혀 엮이고 싶지 않아한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가 의료진이든 누구로부터든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아 건강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했고, 새이디를 만났으면 했다. 럼로우는 아이에게 관심이 없다고 두어번 말했었지만, 닥터 타우르에게 들었던 얘기에 따르면 그건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을 때 자신에게 새이디의 세션에 오겠다고 답장했던 게, 그게 본심이었지 않았을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럼로우가 시선을 피한 채 준 답은 명백한 거절 뿐이었다. 그게 자신에 대한 거절의 의사인지, 아니면 헬렌을 의식한 대답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둘 다 일지도 몰랐다. 스티브는 쓰린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알려줘."

스티브는 병실을 떠나려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이 자신이 챙겨왔던 럼로우의 짐가방에서 그의 휴대폰과 충전기를 꺼냈다. 휴대폰은 여전히 배터리가 방전되어 꺼져 있었다. 진작에 어딘가에 충전기를 꽂아두려했지만 (이 방에는 별다른 시계가 없으니 더더욱) 혈액 투석기나 다른 기계들 때문에 남아있는 콘센트가 없어서 미루고 있던 거였다. 그는 럼로우가 늘 하던 대로 그의 왼편 테이블에 충전선이 연결된 휴대폰을 두고는 다시 일어났다.

"피곤할텐데 쉬어. 내일 다시 올게."

럼로우는 분명 듣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스티브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방의 조명을 어둡게 낮춰주고는 병실을 나섰다. 럼로우는 한동안 노란 불빛이 약한 병실에 혼자 앉아있다가 불을 끄고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생체 마스크 때문에 왼쪽 얼굴이 쓰라렸지만 차가운 물로 살갗을 진정시키거나, 하다못해 마스크를 벗는 것조차 너무나 복잡하고 힘든 일처럼 느껴져서 그냥 그대로 눈을 감았다.







럼로우텀 스팁럼로우 버키럼로우 롤린스럼로우

읽어줘서 다들 너무너무 고맙다!
어쩌다가 나도 1편 다시 들춰봤는데 그게 벌써 1년 반 쯤 전이더라고...
중간에 설정오류도 많았고 여러모로 부족한데 그래도 재밌게 봐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함... 원작은 오래 전에 떡밥 끝난 커플링인데 같이 재밌어해줘서 고마워!
2024.04.22 23:2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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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센세!!!!!!!!!!!!!!!!!!!!!!!!!!!!!!!!!!!!!!!!!!!!!!!!!!!!!!
[Code: a555]
2024.04.22 23:2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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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ㅠㅠㅠㅠ아 시바 럼로우 저렇게 암것도 못먹어서 어떻게 살아요 ㅠㅠㅠㅠㅠㅠㅠㅠ누가 제발 심리상담가 좀 붙여줘ㅠㅠㅠㅠㅠ 거지같은 서류 날조용 변호사 말고 진짜 제대로 된 전문상담가랑 정신과 의사 좀 불러주세요 ㅠㅠㅠ아니 진심 스팁이랑 이지경으로 꼬여서 대체 언제 푸냐 ...풀 수는 있는 걸까 그렇다고 버키나 롤린스같은 다른 애들이랑 행복할 수ㅠ있는 것도 아니고 ㅠ하 퓨리를 족쳐야 ㅠ
[Code: af9b]
2024.04.23 00:3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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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왔다!!!!!!!!!!!!!
[Code: 14e2]
2024.04.23 00: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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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다아아앜!!!!!!!!!!!
[Code: 7289]
2024.04.23 00: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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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넘궁금해서 타임워프 진심으로 하고 싶다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7289]
2024.04.23 00: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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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왜인지 필이 왔어 그래서 어나더가 떡하니 있는게 놀랍지 않아 어나더가 놀랍지 않다고!! ㅠㅠㅠㅠㅠㅠㅜㅜㅜㅜㅜㅠㅠㅠㅠㅜ
[Code: 2935]
2024.04.23 01:0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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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좋았던 기억이 양쪽 다 한테 도망치던 시절의 오두막이라니 그걸 망칠 수 없어 힘들 때 떠올릴 수조차 없다니 ㅠㅠㅠ
[Code: a6e5]
2024.04.23 02:5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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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늘 고마워요. 이번편도 재미있게 잘 봤어요
[Code: 9cb3]
2024.04.23 04:43
ㅇㅇ
고의였는지 사고였는지 기억이 없으니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잭과 윈터를 두고 그런 식으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굳이 캡틴을 이 병실에 밀어넣고 붙어있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 가슴 찢어진다ㅠ 이제 다 기억났구나 자기가 이렇게 죽을만큼 아픈데도 잭이랑 윈터 먼저 생각하는 럼로ㅠㅠㅠ 그리고 조 박사까지 생각해주는거 진짜 가슴 먹먹해서 눈 터질꺼같아짐 ㅠㅠ 스티브 저 와중에도 럼로 탓하고 화내는거 진짜.. 사람이 왜이렇게 어리고 단편적일까 이래서 캡틴아메리카인건가.. 럼로가 스티브를 좋아했던게 너무나 너무나 슬퍼져요 센세ㅠ 스티브도 잘맞는 다른 사람과 있었으면 정말 완벽한 파트너였을텐데 럼로와는 너무나 안맞아ㅠㅠ 계속 롤린스 탓만하면서 롤린스없으면 자기가 뭐라도 해줄수있을것처럼 착각하는게 정말 크게 때려주고싶어요ㅠㅠ
[Code: f1f0]
2024.04.23 04:51
ㅇㅇ
그치만 스티브도 매력적이예요! 그냥 럼로가 너무 힘들고 아파보여서 자꾸 스티브한테 나쁜말하게되지만ㅠ 그래도 센세가 써주는 모든 글이 다 좋아요ㅠㅠ 센세 고마워잉
[Code: f1f0]
2024.04.23 08:1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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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매번 재밌는 글 써줘서 고마워 오늘도 순식간에 읽었다ㅠㅠㅠㅠ 럼로우 너무 안타까워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b255]
2024.04.23 14:2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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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체 마스크에 대한 서로의 오해는 대체 언제 풀리는 걸까
[Code: d341]
2024.04.23 15: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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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몸이 바람에 쓸려나가는 모래처럼 천천히 부서져가고 있는 마당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스팁은 항상 럼로우에게 배신감과 분노?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것 같은데, 위태로운 럼로우의 상태 앞에선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고 하는거... 이 부분 너무 좋아서 여러번 읽었음 ㅠㅠㅠㅠㅠ
[Code: c985]
2024.04.23 16:1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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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럼로우가 자신과 앞으로 얽히고 싶지 않아한다고 해도 이해한다는 부분에서 스팁이 사사로운 감정을 뛰어넘어서 럼로우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느꼈음... ㅠㅠㅠㅠ 근데 럼로우는 스팁이 쉴드의 지시를 받고 자기를 감시하러 온줄알고 ㅠㅠㅠ 스팁하고 단둘이 있는 것 자체를 어색해하고 ㅠㅠㅠㅠㅠㅠㅠ
[Code: 03cd]
2024.04.23 20: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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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미치겠다 진짜 개존잼
[Code: 133f]
2024.04.24 00: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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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사랑해사랑해사랑해 드디어 스팁이 럼로우에 대해 미안하다고 했네ㅠㅠㅠㅠㅠㅅㅂ장족의 발전이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2dcd]
2024.04.24 01: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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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Code: 03ba]
2024.04.24 01:3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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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럼로우 밥 못멕이고 잇는거 진짜 미치겠어요 아무나 제발 럼로한테 뜨끈든든한 영양 가득 밥 한끼를 줘 …. 흑흑 스팁이 이제 의심하지 않고 럼로 생각해주는거 너무 기쁜데 럼로는 못받아들이는거 속상ㅜㅜㅜㅜㅜㅜ
[Code: 03ba]
2024.04.24 19:5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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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흐흐흑 럼로우 해감시켜주고싶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1d34]
2024.04.24 22:0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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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미친 센세...센세...센세.. 부르다죽어버릴것같은 그 이름 센세..
[Code: 56b5]
2024.04.24 22: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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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미친 럼로ㅠㅠㅠㅠㅠㅠㅜㅠㅠㅜㅜㅠ 7/10 척도로 아픈데 아무말도 못하고 그냥 잭이랑 윈터랑 이대로 영영 못 볼까봐 참는거 시발ㅠㅠㅠㅜ세상이 럼로한테 너무함 진짜 개너무함 어떻게 이렇게 너무할수가 있냐ㅠㅠㅠ 넘 좋닿ㅎㅎ
[Code: 56b5]
2024.04.24 22:0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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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아니 스팁 너무 이기적이야.. 스팁은 나름대로 사과하고 하지만 되돌릴수없고 그렇다고 럼로한테 다시갈수도 없으니까 속타는거 알겠는데 그래도 럼로가 다른 알파만나는 것 같고 하이드라(오해였지만)라고 생각해서 모든 불행의 시작점이 자신이면서 계속 롤린스만 탓하고 있고ㅠㅠㅠㅠ
[Code: 56b5]
2024.04.24 22: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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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로우 입원했는데도 스프도 심지어는 물도 못마시면서 점점 말라가는거 좋다... 나중에 스팁이 후회하고 럼로우 돌보면서 뼈저리게 후회하는거 기대되요 센세
[Code: 56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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