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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9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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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향수병이로구나.”

이름도 모르는 피부색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들은 이야기에 코웃음을 쳤더랬다. 향수병은 무슨. 그런 건 노인들 이야기 아니야? 하지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가 정의한 말이 그날부터 그림자처럼 나오토에게 들러붙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살기 위해 도망친 곳이었다. 숨통이라도 트여야지. 본국에 있다가는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아 도피하듯 오른 유학길. 확실히 자기 고향보다야 자유로웠다. 있는 힘껏 가슴을 부풀려 숨을 쉬어봐도 답답했던 숨길이 간신히 트이는 기분. 마음껏 공부하고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스며들었다고 생각했던 저는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커리어를 앞세워 유화되었다고 여겼을 때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섞여들지 못한 저는, 어느새 또 둥둥 떠 있었나 보다.

본국보다 자유스러웠을지는 몰라도 그들에게 자기는 그저. 머리칼이 까맣고 조그마한,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온 어린 남자일 뿐이었다. 탈색을 두어 번, 금발로 물들인 머리카락을 가지고도 발버둥 쳐야 한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서른을 넘겼을 때쯤 지독히도 자기를 괴롭히던 모친의 연락도 뜸해졌다. 이쯤 되자 액정에 뜬 엄마라는 단어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던 자기가 과거의 어느 날 같았다. 핑곗거리라도 있어야 발을 들일 텐데. 낮에는 일을 붙들고 일정을 소화하느라 떨칠 수 있었던 생각이 밤만 되면 발목을 붙잡았다. 원체 술에 의존적이긴 했지만, 이제는 술이 없으면 잠도 들지 못할 정도로 의지 간 데가 되었다. 

커다란 윙체어에 몸을 구겨 앉아 넘칠 것같이 가득 부은 와인잔을 꽉 붙들었다. 넘실거리는 잔은 떨리는 손 때문인지, 흔들리는 시야 때문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한 병을 모두 비우고도 모자라 새 것을 열어 넘치게 따른 와인이 색이 옅은 의자에 얼룩을 남겼고, 어느 틈인지도 모르게 잔을 놓치고 잠이 들어버리는 날들의 연속.

“누구야..”

한참 달게 자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들리는 소음은 알람이 아니었다. 도어벨을 계속해서 누르는 소리에 나오토는 구겨졌던 몸을 폈다. 좁은 곳에 옹송그리고 잠이 들었지만, 몸보다 머리가 더 아팠다. 숙취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한참, 그럼에도 여전 벨은 울렸고 나오토는 대충 걸쳐놓았던 로브의 허리끈을 질끈 묶고 문을 열었다. 

배달원은 산뜻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며 우편물을 전달했고, 나오토는 인수란에 대강 사인을 하고 문을 걸어 잠갔다. 어질러진 테이블 위에 대충 던져놓고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침대를 찾은 나오토가 본국에서 온 우편물을 찾은 건 다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레터 나이프를 어디에다 뒀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은 나오토가 택한 건 힘이었다. 어지간히도 단단히 여몄네. 나오토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가득 찬 와인잔을 밀어놓고 담배를 찾았다. 열리지 않는 봉투에 짜증을 조금. 신경질적인 얼굴로 담배를 몇 번 빨았을 때 전화가 울렸다. 

“...엄마.”

긴 숨과 함께 연기를 뱉은 나오토가 받기를 망설였고, 전화는 이내 끊어졌다. 받을 걸 그랬나. 그 아쉬움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다시 전화가 울렸고 나오토는 담배를 비벼 끈 뒤 스피커 폰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우아한 목소리는 어디에다 두셨대, 우리 엄마. 다짜고짜 큰소리부터 내기 시작한 엄마의 잔소리에 대강대강 답을 했다. 우편물 받았지? 날이 선 목소리에 보고 있어-가위를 찾으며 이야기했다. 

-잔소리 그만해. 안 들어간대도.

들어오라는 소리에 부러 강짜를 놓자, 엄마 역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대로 연 끊고 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잔뜩 화를 돋운 후에 전화를 끊은 나오토는 단숨에 벌컥벌컥 잔을 비웠다. 이만하면 명분이 생겼잖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올 때는 언제고, 자존심을 굽히고 향수병이라는 알량한 이유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는데. 나이가 이만큼이나 먹어서도 부모님과 기싸움이라니. 나오토는 술에 취해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가위를 들어 봉투를 오렸다. 삐뚤빼뚤하게 잘린 종이 끝이 자기 마음 같았다. 어른거리는 눈동자에 힘을 주고 내용물에 집중했다. 이제는 글씨가 아니라 그림처럼 보이는 본국의 글자였다. 

“코바...코바야시.”

아직 쓸만하잖아. 나오토는 윙체어 옆에 놓인 잔을 들었다가 곧 내려놓고 테이블 위를 더듬거렸다. 그리고 손에 잡힌, 아직도 묵직한 와인병에 입을 대고 꼴깍 삼켰다. 비어있는 잔을 채울만한 에너지가 없다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본국의 암호 같은 글자를 해독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다시 한번 두 눈에 힘을 꾹 준 나오토였다. 

“코바야시 나오...이건 나랑 같네. 그러니까 코바야시 나오미.”

간신히 읽어낸 이름과 나이에 헛웃음이 터졌다. 아무리 여기보다 고리타분하다지만 가문과 가문이 엮여 결혼하는 게 21세기에 가당키나 한 말인가. 게다가 고등학생?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집인 거야. 코바야시가는. 아무리 알파라지만 성인도 되지 않은 여고생을 서른을 넘긴 자기와 결혼시키겠다고? 아서라, 아서. 

나오토는 봉투 안의 내용물을 마저 꺼내 보지도 않고 바닥으로 떨어뜨리고는 커다란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화려한 네온과 아름다운 야경. 사랑해 마지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저는 늘 외로웠던 모양이다. 나오토는 한껏 무릎을 끌어안고 머리를 기댔다. 색이 다른 이방인은 사교적인 성격으로 무리와 섞이는 데 어려움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중 속에서 저는 늘 쓸쓸했다. 더욱더 시끄럽고 화려한 파티에 참여할수록 가슴 한켠을 썩 썰어낸 것처럼 서늘하고 막막해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 날인가 술에 취해 잔소리하는 엄마에게 넋두리했던 모양이다. 늘 싫은 소리를 하던 엄마가 얼른 돌아와서 결혼하고 자리를 잡으라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했다. 사이클이나 페로몬이 안정되면 괜찮아질 거라며 다독이는 엄마의 목소리가 꿈 같았다. 

날 때부터 형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대다수인데 저는 아니었다. 베타가 어디가 어때서? 집안의 막내로 골치깨나 썩이는 저를 예뻐하는 부모님이었다. 터울이 지는 형들 모두 형질인으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정략결혼 상대가 있었고, 자기는 어린 마음에도 그게 끔찍해서 베타로 태어난 게 제일 잘 한 일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스스로 이룬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누가 알았을까. 만에 하나 있다는 후천적인 발현이 자기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뱃속에서 결정되었을 형질이 다 커버린 몸에서 결정되느라 내내 앓아야 했다. 학교는커녕, 침대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침대에서 털고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내내 앓았던 발현열은 겨울이 끝나갈 무렵 그치었다. 

나오토는 핸드폰을 집어 들어 충동적으로 본국행 편도 티켓을 끊었다. 짐을 꾸리고, 이것저것 생각하기엔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가자, 가서 파투를 놓더라도 우선 가야지. 나오토는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아니, 이쪽이 아니라 저쪽에서 그만두자고 할지도 모르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들도 모두 자기와는 달랐다. 사이클도 없는 열성 오메가. 그런 것과 누가 정략결혼을 시키고 싶어 해. 나오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흔들리듯 떨렸다.

술에 잡아먹히듯 나오토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거기 몇 신데 전화니? 애써 반가운 기색을 숨기는 목소리에 새삼 불효하고 있었구나,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나오토는 부은 눈을 숨기느라 썼던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밀어 올리고 잔뜩 흐려 우중충한 본국의 하늘을 만끽했다. 듣고 있니? 아, 나 통화 중이었지. 나오토는 그제야 전화에 집중하고 자기가 돌아온 목적 달성을 하기로 했다. 

-나 여기 공항. 소리 지르지 마. 작게 말해도 들려. 이따 들러, 들를 테니까 우선 엄마가 날 불러들인 것부터 해결하자. 코바야시가 꼬맹이. 내가 주소 찍어 보낼 테니까 그쪽으로 보내줘.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참견하지 마. 나 다시 비행기 타? 도로 가냐고.

한참이나 실랑이하느라 진이 다 빠졌다. 전화를 끊고 기내에서 검색한 음식점의 주소를 엄마에게 보냈다. 여고생들은 뭘 좋아하지? 하지만 이쪽이 급해서. 예의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거절을 위한 만남 장소로는 적당한 것 같았다. 허기진 뱃속에 본국의 음식을 오랜만에 넣어주고 싶은 욕심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흐린 하늘. 볕 한점 없는 공항 바깥에서 나오토는 도로 선글라스를 내렸다. 택시 정류장에 늘어선 택시 중 하나를 잡아타고, 엄마에게 보냈던 주소를 기사에게 이야기했다. 기사는 오랜만에 온거냐며 아는 체를 했다. 그제야 모국어로 가족이 아닌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잔뜩 세웠던 가시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친절한 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많이 변했구나. 물들인 머리, 화려한 외양을 하고도 변하지 않은 건 자기뿐인가 싶었다. 

왁자한 가게 앞에서 웨이팅을 조금. 짐가방을 꾸려오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각 테이블마다 놓인 불판과 그 위에 얹어지는 고기로 연기가 가게 바깥까지 자욱했다. 기다림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자리를 안내받고 입고 있던 셔츠를 대강 걷어 올렸다. 가게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차림에 시선을 조금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오토는 선글라스로 머리카락을 밀어 올리고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렸다. 손목 가득한 장신구가 조금 거추장스러웠다. 술부터 시켜놓고 입부터 적셨다. 아직 익지도 않는 고기에 뱃속이 요란했다. 초조하게 구워지는 고기를 쳐다보고 입에 넣었을 때야 만족스러움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급하게 몇 점 더 불판에 고기를 얹었는데 테이블 앞에 사람이 다가와 섰다. 종업원인가 싶어 기다렸는데 비킬 생각을 하지 않는 이에 고개를 들었더니 키가 껑충한 학생이 자기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섰다. 나오토는 주변을 둘러보고, 가게 바깥도 잠시 쳐다보고 나서야 아-자기가 다인용 식탁을 차지하고 앉을 걸 눈치챘다. 곧 자기도 손님이 올 예정이긴 했지만 이런 가게에서 혼자만 테이블을 독식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긴 했다. 여기 불판 하나 더 놓을 수 있긴 한가. 나오토는 가만히 턱짓으로 앉으라는 의사를 밝혔다. 언제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보다 손님 하나를 더 받는 편이 가게에도 이득일 테지. 

시끄럽고 연기가 뿌연 가게 안. 교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학생은 주문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자리에 앉아서도 자기보다 커다란 남학생의 얼굴을 쳐다보던 나오토의 눈동자가 천천히 떨어졌다. 단추를 꼭 잠근 셔츠와 졸라맨 교복의 타이. 그리고 명찰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느릿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던 눈꺼풀이 커다랗게 떠지는 나오토의 눈매를 유심히 쳐다보던 것은 앞에 앉은 이었다.

“...코바야시, 나오미?”

코바야시 나오미라고 불린 쪽이 잠시 미간을 모았다가 정정했다. 

“나오키요.”

나오토는 얼른 입가를 틀어막았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까진 막을 수 없었다. 어깨까지 들썩거려가며 한참을 웃은 나오토가 손가락으로 눈가를 찍어 누르며 미안-얼른 사과했다. 

“사람 앞에 앉혀놓고 이게 무슨 실례야. 미안해. 내 모국어 수준이 이 정도로 처참한 줄은 몰랐지. 당연히 나오미라 생각했어. 미안. 들어서 알겠지만 난 카타오카 나오토. 코바야시군이라고 부르면 될까?”
“네, 나오토상.”

나오토는 잠시 눈썹을 올렸다 내려놓았을 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오랜 외국 생활에도 저렇게 바로 이름을 불러오는 게 예의가 아닌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긴 뭐 저도 처음 보는 사이면서 나이로 깔고 반말부터 하는 중이니까. 

“먹자. 우선 먹으면서 얘기해. 나 오래 비행기 타고 오느라 배가 고파서.”

나오토는 나오키의 앞에 접시 하나를 더 달라 종업원에게 청하고 구워진 고기를 놓아주었다. 나오키는 마른 팔에 매달린 장신구가 무거워 보이는 나오토에게 집게를 건네 들었다. 의외의 행동이라고 생각했는지 느리게 올라가는 눈매가 기억 속에 어렴풋이 잡힐 것 같았다. 

“배고프다면서요, 제가 할 테니까 드세요.”
“그래도 돼? 응, 그럼 부탁 좀 할게.”

배가 고프다는 나오토는 음식보다 술에 손을 더 많이 가져갔다. 귀찮은 기색으로 내려놓은 선글라스가 받치고 있던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렸고, 나오토는 연신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긴 속눈썹이 만드는 그늘 아래로 보이는 얼굴이 고단해 보였다.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술을 비우던 나오토가 턱을 괴고 나오키와 눈을 맞추었다. 

“처음 선보는 자리치곤 별로지? 미안, 고등학생들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부러 고른 것 치곤 괜찮았어요.”

정곡을 찔린 모양인지 나오토는 입을 다물었다. 이쪽도 학교에 있다가 불려 나온 참이었다. 집에서 급하게 온 연락에 먼저, 그리고 그 약속 장소에 두 번째로 놀랐다가 픽 웃고 말았다. 집안과 집안. 정략혼의 상대가 정해져 있다는 것 자체에 반항하는 쪽은 아니었던 나오키였다. 물론 상대를 알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 상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머리가 커 그런 사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에도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던 이었다. 그런 사람이 부러 연락해서 만나자는 장소가 고작 이곳이라. 굳이 묻지 않아도 거절을 위한 자리라는 것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맹하진 않았다. 다만 조금 서운한 것도 사실. 자기가 보고 싶지도 않았나보다, 이 사람은. 아니 어쩜 기억에조차 남아있지 않는지도 모르지. 결혼하자고 할땐 언제고.

“이것저것 설명할 필요 없이 빨리 이야기 끝낼 수 있겠네. 일부러 고른 것도 알았으니까.”

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나오토보다 먼저 입을 뗀 건 나오키였다. 

“거절을 위한 자린 줄 알지만 나왔어요. 난 거절할 생각이 없어서.”

나오토는 생각보다 강경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나오키에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렸다. 요즘 애들은 원래 이런가. 

“아직 학생이라 뭘 몰라서 그러나 본데 당사자들끼리 정한 것도 아니고 요즘 같은 세상에 집안끼리 정한 약속 같은 거 지킬 필요 없어. 지켜야 할 이유도 없고. 그리고 당장 나에 대해 이름말고 뭘 얼마나 안다고 결혼이야, 결혼이.”
“이름 카타오카 나오토. 나이는 서른 하나. 카타오카가 삼남이고, s브랜드 대표. 거주하는 곳은..”
“잠깐, 잠깐만.”

자기에 대해 줄줄 읊을 생각인 나오키의 입을 멈추는 게 우선이었다. 골치야. 쉬이 넘어갈 줄 알았더니 의외로 고집불통이네. 나오토는 번듯하게 생긴 나오키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맛있게 느껴지는 냄새가 이제는 역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데 가서 얘기해도 괜찮을까, 나 좀 속이..”

군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계산서를 집어 든다. 학생이 무슨, 말리려던 나오토는 그냥 두기로 했다. 있는 집 자제인 거야 자기나 저 애나 매한가지니까. 이런 식으로 점수를 잃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였다. 먼저 가게 밖으로 나온 나오토가 걷어 올렸던 셔츠를 몇 번 탁탁 두들겼고, 담배를 빼 물었다. 라이터를 꺼내던 나오토는 나오키를, 정확히는 나오키가 입은 교복을 보고 도로 라이터를 집어넣었다. 

이 끝으로 필터를 잘근잘근 씹은 나오토가 좀 걸을까?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나오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답 대신 먼저 걷길 시작하는 나오키의 등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나이도 어리고, 훤칠한데다 집안도 훌륭해. 더 좋은 선택지라는 게 있다는 걸 왜 모를까. 나오토는 길가에 있는 쓰레기통에 태우지도 않은 채 물고 있던 담배를 버렸다. 이곳은 잘 모르니까 이끌리듯 그 아이가 택한 곳은 한적한 공원이었다.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벤치에 앉아서도 한참 한곳을 쳐다보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학에 갈거고...그럼 연애해봐. 지금도 좋지만, 나이 들면 더 멋있어 질테고. 좋은 선택지가 많은데 왜 정해진 길을 가려고 해.”
“아까 대답했어요. 거절하지 않는다고.”
“고집 센 편이네. 아니면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어린이?”
“성인은 아니지만, 어린애도 아니에요.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예요.”

발끈하는 모양새가 어린애 맞구만. 나오토는 입에 올리기 싫은 이야기마저 꺼내야 하나, 그게 이쪽에는 들어 먹힐 약인가를 고민했다. 

“그럼 이건 어때? 이런 것까지 우리 집에서 알려줬을 리는 없을 것 같아서. 나, 열성오메가에 사이클도 없어. 나이나 적어? 서른이 넘었거든. 아이는커녕, 임신도 힘들걸? 정략혼이라는 거 뻔하잖아. 결혼해서 아이 낳는 거. 그런 뻔한 거 못한다고, 나는.”

자존심이 상한 모양인지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이렇게 바닥까지 보였는데도 네가 날 놓지 않는다고? 무슨 이유로.

“상관없어요. 난 그냥 당신이 좋아요.”

술이 바짝 깨는 기분이었다. 날 것 같은 고백에 설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고백에 흔들릴 만큼 적은 나이도 아니어서. 나오토는 평소라면 마시지도 않을 캔 커피를 반쯤 비웠다. 씁쓸하고 끈적거리는 단맛이 혀끝에 남았다. 이곳에 돌아오면 괜찮을 줄 알았지. 외로움이라던가, 공허함. 사라질 것 같았던 쓸쓸함도 역시나 여전했다. 그 감정들은 한기를 느끼게 하기 충분해서 나오토는 팔을 조금 문질러야 했다. 

“미안, 시차 때문에 피곤하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데려다줄게요.”

나오토는 일어서려던 걸 멈추고 웃었다. 자기가 댓 살이라도 어리다면. 아님, 제 앞에 키만 껑충한 나오키가 고등학생만 아니라면 그려봄직도 한데. 도대체 상상이 안 가는 조합에 웃음이 났다. 예의도 바르고 충분히 멋지고. 괜찮은 알파가 될테니까,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나오토는 읏차-무릎에 손을 얹고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오랜 비행도, 시차도, 내리자마자 마신 술도 모두 무리가 된 모양인지 다리에 힘이 탄탄하게 들어가질 않았다. 휘청이는 몸에 놀라기도 전에 강하게, 그렇지만 안정감 있게 붙든 커다란 손에 눈이 커다래졌다. 

“데려다줄게요.”

나오토는 가만히 자기를 붙든 손을 밀어냈다. 너무 외로웠던 모양이다. 너무 쓸쓸했지, 오래도록. 그래서 그런가 봐. 나오토는 고향 땅에서 만난 정략결혼의 상대, 그러니까 자기보다 한참 아래인 고등학생 아이가 저를 흔드는 것만 같아 두려워졌다. 상대가 한걸음 다가온다면 얼른 두 걸음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거니까. 능숙하게 감정을 숨기는 것. 

“그럼 택시 타는 곳까지만 부탁할까.”

이번에는 나오토가 앞서 걸었다. 어딘지 길은 잘 모르지만, 대로변을 향해 나가보면 택시 정류장 하나쯤은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당장 차부터 사야겠네, 나오토는 편도행 티켓을 끊었을 때부터 오래도록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었던 자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 당황할 틈도 없었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은 나오키가 전화번호를 누르더니 자기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액정에는 나오토의 번호가 떠 있었다. 

“도착하면 연락해줘요.”

손에 도로 핸드폰을 쥐어주며 택시를 탄 나오토에게 이야기했다. 대답도, 그렇다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는 나오토를 태운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나오키는 한참이나 길가에 서 있었다. 나오키는 가만히 손을 펴보았다. 손에 닿았던 그의 몸은 생각보다도 훨씬 가늘었다. 목을 한참이나 젖혀 올려다보던 상대는 어느새 자기가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 분명한 건 조금도 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나오키는 조금 초조해졌다. 이제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사람이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올려다봐야 했던 상대였다. 저보다 먼저 어른이 된 그가, 자기와는 다르게 여유 있어 뵈는 나오토가 불안했다. 

이따금 자기가 있던 곳에 머물러 오던 엄마였지만 몇 년 만에 본 얼굴이 반갑지 않을 리가 있나. 잔소리부터 쏟아내는 그녀를 꽉 안았다. 아니 안긴다는 편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집안을 통틀어 자기가 제일 작은 편이었으니까. 엄마는 당황하면서도 자기를 꽉 안아주는 걸 잊지 않았다. 누구라도 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는데. 다행히도 안정감이 들었다. 부드럽고 그립던 냄새. 따뜻한 손. 막막한 기분은 여전했지만 어딘지 발 디딜 곳이 생긴 것 같기도 했다. 

너무 피곤하다고 우는 소리로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아직도 그대로인 제 방에 누운 건 한참이나 욕조에 잠겨있다가. 몇 건 쌓인 부재중의 전화는 키가 커다란 고등학생. 침대에 누워 다시 진동하기 시작하는 전화기 액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끈질기게 울리던 진동이 멈추고 대신 메시지가 도착한다. 잘 도착했어요? 나오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린 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 남자를 걱정하는 고등학생이라. 가슴 어딘가가 찌릿했다. 생각은 자꾸 꼬리를 물었고, 그 끝엔 그 아이가 있었다. 

“...말자. 그만두려고 들어와 놓고.”

억지로 생각의 허리를 끊어내고 잠을 청해보려 애를 썼다. 어릴 때와 똑같은 방안에 아쉬운 거라고는 술뿐이었다. 

+

“차? 지금 바로 안 나와.”
“그래?”

밥을 먹으라고 몇 번이나 권한 엄마에게 손을 내젓고 물을 반병쯤 비우며 눈을 끔벅였다. 시차, 피로 등의 이유로 며칠을 방문 바깥으로 두문불출. 침대에 누워 시간을 죽이는 동안에도 아이는 전화와 메시지 보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열 번쯤 걸으면 한 번쯤 전화에 응해주기도 하면서 변덕스러운 자기 마음에 혀를 찼다. 전화 건너 중저음의 음성은 어른의 것과 비슷해서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들게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키가 훌쩍 커다란 고등학생의 전화를 기다린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침대를 박차고 일어섰다. 

“노는 차 써. 그리고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계약 걸어두고.”
“...응.”
“길도 모르면서 어딜 가려고.”
“그냥 답답해서.”

나오토는 길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바깥을 쳐다봤다. 날씨 좋네. 이동성을 핑계로 차를 사야겠다는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더 이곳에 있을 구실을 만들고 있다는 걸.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엄마는 모른 체 한 걸 후에야 알았다. 막내아들을 여기에 잡아두고 싶었던 마음이 컸으리라. 

“걔 있잖아.”
“응, 누구?”

나오토는 코웃음을 쳤다. 다 알아들었으면서 모르는 척은. 내가 여기에 아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엄마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겹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코바야시.”
“아아, 나오키군?”
“응. 걔 말이야. 어느 학교라고 했지?”

순전히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었으면서도 나오토는 반쯤 그 탓을 나오키에게 돌렸다.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내내 전화를 걸어서는 밥을 사달라던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던가 하고 자기를 꾀었으니까. 

익숙지 않은 주행에 동네를 몇 번. 그리고 엄마에게 물은 나오키의 학교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벌써 끝나는 시간인지 삼삼오오 교복을 입은 무리가 길에 보였다. 주정차가 가능한 곳에 차를 세우고 나와 서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교복 입은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중학교 입학 무렵에는 교복이 싫어 자율화 학교를 찾아갔더랬다. 그랬다가 고등학교에 갈 즈음에는 교복이 입고 싶었는데 하필 발현이 그때였지, 아마. 

감상에 젖어 울적해진 기분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을 때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다란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뭐, 굳이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는 건 좋네. 나오키를 부르려던 나오토가 그러길 그만둔 건 순간이었다. 멀리서도 기분 좋을 정도로 웃고 있는 얼굴이 보기 좋았는데 그 이유가 곁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인 걸 알았으니까. 

그래, 저 나이엔 또래가 제일이지. 순간 주책맞을 정도로 기대했던 자신에게 낮게 혀를 찬 나오토는 차에 올랐다. 고향이 돌아오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외려 더 고립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 없는 곳에서 만난 유일한 마음붙이라 생각했지. 당신이 좋아요-깜짝 고백에 잠시나마 계산적이질 못하고 설렜던 게 바보 같았다. 흔들리지 않겠다며.

“....깜짝이야.”

나오토는 조수석 창문에서 난 큰소리에 어깨부터 움츠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인 얼굴이 반가웠다. 이래서야. 나오키는 커다란 양손을 조수석 창문에 댄 채였다. 곧 그는 검지를 들어 위아래로 흔들었다. 창문을 열란 소리다. 나오토는 그 얼굴을, 그 행동을 잠시 바라보다 조수석의 창문을 내렸다. 

“나 보러온 거 아니었어요?”

직설적이기는.

“맞아.”
“근데 왜 아는 척도 않고 가요?”
“친구들이랑 재미있어 보이길래.”

창문을 붙잡고 허리를 구부리고 섰던 나오키가 이제 문을 열어주길 청하였다. 이왕 변덕을 부리기로 한 거. 나오토는 쉬이 조수석 쪽 문을 열었고, 나오키는 의자에 앉아 좌석을 조금 조절했다. 커다랗네. 

“전화는 잘 받아주지도 않았으면서 이렇게 와서 그냥 갔으면 서운할 뻔 했어요.”

볼멘소리도 할 줄 알고. 커다란 거랑 다르게 제법 귀여운 구석도 있구나-나오토는 픽 웃음이 터지는 걸 숨기지 않았다. 

“왜 웃어요?”
“벨트 매. 바람쐬러 가자. 혹시 학원이나 이런 거..”
“가요.”

벨트를 늘리는 나오키의 손이 성급했다. 길도 모르면서 정처 없이 차를 몰았다. 조용한 차 안이 답답할까, 나오키에게 음악 듣고 싶으면 틀어도 돼 권했는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한적한 국도. 풍광이 괜찮아 보이는 곳에 차를 멈추었다. 오랜만의 운전에 긴장한 탓인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지개를 켜야 했다. 이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의 초입이라 해가 벌써 내려앉기 시작했고, 나오토는 겉옷을 챙기지 못한 걸 후회하며 춥네-양팔을 끌어당겨 안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제 옆에 선 아이가 서슴없이 교복 재킷을 벗는 걸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들으라고 한 소리 아닌데?”
“누가 봐도 들으라고 한 소리 같았어요.”
“넌 어쩌자고 이걸 벗어줘. 추우면 차에 들어가면 되는데.”
“추위 잘 안 타요.”

나오토는 어깨를 으쓱, 가볍게 고맙다는 인사 정도로 재킷을 여몄다. 향수, 아니면 페로몬? 흐릿하게 남은 향기가 기분을 묘하게 했다. 게다가 자기 옷보다 두세 치수는 커다래서 재킷에 담긴 것 같은 기분이 잠시. 이름이 새겨진 교복을 걸치고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교복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기분이 이상하네.”

그 말을 꺼낸 나오토보다 훨씬 더 이상한 기분인 쪽은 나오키였다. 원체 어려 보이는 낯도 그랬지만, 교복이 주는 상징성 때문인지 이제 나오토는 어른이라기보다 학생 같아 보였다. 귀걸이를 몇 개,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인 불량 학생 쪽에 가까웠지만, 이상한 기분은 나오키도 매한가지였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이젠 본격적으로 소매에 팔까지 끼워 넣고 기다란 소매 끝에 달랑달랑 손가락만 내보이며 웃는 얼굴이 그날 같아서 나오키는 충동적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한참을 수그려야만 닿을 수 있는 입술에 입술을 누르고서야 질끈 두 눈을 감았다. 한 대 얻어맞는대도 감수해야지. 정말로 추웠던 모양인지 차갑고 말랑한 입술의 질감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도둑키스를 감행하고 고개를 떼어냈을 때 나오토는 조금 놀란 얼굴이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손을 들어 올리진 않았다. 붉어 보이는 뺨은 자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는 저녁노을 때문일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요란해 귀가 웅웅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고등학생이 이런 거 해도 돼?”

말간 웃음의 끝이 느긋해 보여서 나오키는 조금 심통이 솟았다. 어른이다 이거지. 

“나오토상이 몰라서 그러는데.”
“응?”
“요즘 학생들은 더한 것도 해요.”

일부러 힘주어 말하는 나오키가 귀여웠다. 나오토는 슬며시 웃으며 그래? 나직하게 읊조리고 나오키의 교복 타이를 붙들었다. 예상 밖의 행동이었는지 서늘하게 그린 것 같던 눈매가 커다래졌다. 나오토는 조금 더 장난을 치고 싶어 힘을 주어 타이를 당겼고,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이런 거?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더 놀리면 안 될 것 같아 잔뜩 잡아당겼던 타이를 놓는 순간 허리가 붙들린다. 뭐 하는 거냐고 물으려 벌어진 입술에 다시 한번 나오키의 입술이 닿았다. 어떡하지, 놀라는 중에도 재킷에 묻었던 게 페로몬이라는 걸 안기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파고드는 성급함과는 달리 허리를 안은 손의 단단함과 뒤통수를 감싼 커다란 손은 따뜻해서. 밀어내야 한다 생각은 하면서도 섣불리 몸이 움직이질 아니했다. 조급했던 아이의 입술과 혀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나오토는 헐떡이는 숨을 숨기려 간신히 나오키의 배를 밀어내보았다. 하지만 조금 더 밀착해오며 끌어안는 아이의 힘에 허리가 무너진다. 나 이 애랑 이래도 되는 걸까? 아직 고등학생, 어린애인데. 그제야 나오키가 교복 차림이라는 게 떠올랐다. 비스듬히 겹쳤던 고개를 비트느라 생긴 틈 사이로 코바야시, 간신히 소릴 냈다. 불에 덴 것처럼 나오키의 행동이 멎었고 천천히 잔뜩 구부린 채 입을 맞추던 나오키가 허릴 폈다. 당황함에 어수선한 얼굴. 능숙하게 키스하던 남자는 어디 가고 고등학생이 서 있을까. 

“너 교복 입고 이래도 돼?”

나오키는 입맞춤보다 교복을 입은 자기를 걱정하는 나오토가 싫었다. 어른의 여유를 가진 그가 미운 것 같기도 했다. 손을 뻗어 아랫입술을 문질러 닦아주며 여상스레 입을 열었다. 실은 심장이 떨려서, 긴장으로 손이 다 차가우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교복은 내가 아니라 나오토상이 입고 있으면서.”

아. 나오토는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둬 자기 차림을 살폈다. 나오키의 교복 재킷. 나오토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나오키를 올려다보았다. 하얀 교복 셔츠에 학생 타이긴 했지만 얼핏 보아선 누가 봐도 학생으로 보지 않을 체격이긴 했다. 그리고 나오키의 젖은 입술을 보고 나서 그제서야. 이 애와 자기가 막 입을 맞춘 후라는 사실이 머릴 후려쳤다. 부끄러워할 틈도, 창피해할 새도 지나버린 후라 나오토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가 천천히 얼얼한 입술을 열었다. 

“좀...쉬었다가 갈까?”

나오키는 잠시 미간을 모았다가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굉장히 야한 말인데, 그거. 외국 생활이 오래라더니 그 말이 가지는 묘한 뉘앙스를 모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운전했더니 긴장했나 봐.”
“그래요.”

운전석에 옆으로 기댄 나오토가 히터를 높이더니 눈을 감았다. 쉬었다가 가자는 말은 정말 말 그대로 몸이 고단해서 한 말이었나 보다. 숨 막힐 것 같은 입맞춤 뒤에 태평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 정신줄이 부럽기도, 얄밉기도 해서 나오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게 왜 한숨이야.”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나오토가 나직한 목소리로 핀잔을 준다. 

“얼른 어른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이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나오토가 눈을 떴다.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가 진심이라 장난으로 대할 수가 없어져 버린다. 

“...왜? 이미 충분히 다 큰 거 같은데.”
“나오토상이 너무 어른이라 따라잡으려면 한참일 거 같아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여유로운 나오토상이 싫어요. 어른인 당신이 싫다고. 난 조급해 죽겠는데 느긋하게 웃는 나오토상이 미워.”

뭐라고 대꾸를 해줘야 하나. 그저 정략결혼의 상대인 저에게 목매는 어린 애에게. 나도 너만큼이나 여유 있지 않다고? 외로워 견디지 못할 정도라 한참이나 어린, 그것도 성인도 되지 않은 고등학생에게 흔들린다고? 나오토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아이는 자랄 테고, 그렇게 되면 곧 자기 같은 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여유가 생길 테니까. 나오토는 나오키의 교복 재킷을 덮은 채로 손을 뻗었다. 커다랗고 커다래서 몸을 조금 앞으로 뻗고 나서야 나오키의 뺨에 손이 닿았다. 

“금방일 거야. 초조해할 필요 하나 없어.”

이쪽이야말로 외로움이나 쓸쓸함, 기우는 감정을 숨기느라 급급해서 에너지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나오토는 속수무책으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곤 보았다. 열댓 살 무렵의 자기를. 열여섯? 열일곱일까. 아니면 열다섯? 

손님이 가득 방문했던 날이었다. 소란스러움이 싫어 집의 뒤뜰로 걸음을 옮겨서야 한숨 돌리던 어린 시절의 저. 그리고 그곳에 발을 들인 손님은 저뿐이 아니었다. 시치고산마이리를 마치고 돌아온건지 전통복을 깜찍하게 차려입은 어린 객에게 다가갔다. 예뻐라-나오토는 꼬맹이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구부렸다. 피곤한 모양인지 옷이 불편한지 잔뜩 골이 난 어린애의 볼이 심술로 퉁퉁했다. 

“왜 골이 났을까, 꼬마야.”

대답도 않는 어린애가 예뻐 나오토가 머리를 살살 쓰다듬자 그 조그만 게 싫은 기색을 하길래 소리 내 웃어버리고 말았다. 

“언제 크나. 이렇게 조그만데."

골이 난 어린애가 귀여워 자꾸만 장난이 짓궂어졌다.

“다 크면 형아하고 결혼할까?”

아이는 답이 없었다. 왜 싫어? 웃으며 묻자 똑바로 눈을 마주쳐온다. 새까맣게 그린 듯 예쁜 눈매. 나오토는 다시 한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결혼하는 게 싫으면, 이름이 뭐야? 알려줄 수 있어?”

아이가 천천히 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렸다. 

“나오..”

나오토는 숨을 바짝 몰아쉬며 눈을 떴다. 쿵쿵 울리는 심장. 나오키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답게 조수석에서 한참 핸드폰 게임에 빠져있었다. 우뚝한 콧날. 자기에게 입 맞추던 입술. 서늘하게 그린 것 같은 눈매만이 어릴 적과 똑같았다. 아아. 그리고 그날이었나 보다. 형질이 바뀌느라 열에 들떠 침대 바깥으로도 나오지 못하던 날의 시작. 정략결혼의 상대라더니. 첫 만남부터 자기를 뒤흔들어 놓았구나. 조그마한 꼬맹이 알파가. 그래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나보다. 좋아한다고. 먼저 알아보고,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한 나오키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여유 있어 보인다고, 내가? 좋은 패를 쥐고 여유 있었던 쪽은 너 아니었나, 코바야시군?

“...우리.”
“깼어요? 잠깐만, 나 이것만 마저 잡을게요.”

잠시 눈을 마주친 나오키가 웃으며 핸드폰을 쥔 손을 서둘렀다. 나오토는 만난 적 있지 않아? 하고 물으려던 말을 삼켰다. 채근하지 않아도 나오키는 곧 어른이 될 테고, 그럼 이런 얕은수쯤은 쉬이 읽어내게 될 테다. 여유 있어 보인다고? 그렇담 아직은 속을 내보일 필요는 없지. 우위는 내가 잡고 싶으니까. 그게 언제까지일지는 몰라도.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전전긍긍해줘. 난 조금 더 여유 있는 어른인 척 느긋하게 굴 테니까.

“다 잡았어요.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요?”
“그만 돌아가자고.”
“여기까지 와 놓고 정말요? 저녁도 안 사줘요?”

어린애 같은 투정을 늘어놓는 커다란 나오키가 귀여웠다. 나오토는 흘러내린 나오키의 재킷을 끌어당겨 올리며 작게 웃었다. 정말로 기대어도 될까.

“그래, 먹고 가자.”
“겨우 저녁만요?”
“또 뭐가 더 있어?”
“아이스크림도 사주세요.”

나오토의 웃음소리가 조금 커졌다. 

“어련하시겠어. 벨트 매. 출발할게.”
“네. 졸업하면 면허부터 딸게요. 나오토상 덜 피곤하게.”
“그래. 말이라도 고맙네.”
“그러니까 그때까지도 거절하면 안 돼요.”

나오토는 신호에 걸린 참에 잠시 조수석에 앉은 나오키와 눈을 마주쳤다. 누가 누구보고 여유 있다고 하는 걸까. 속은 시커먼 어린애 같으니. 대답을 종용하는 나오키가 원하는 답을 해주진 않았다. 결국 나오키가 느긋한 어른은 싫다고 툴툴거리고 나서야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나오토였다. 
















나오키나오토
팦파고 같은거 돌리면 나오키 이름이 나오미로 번역되는거 보고 ㅃ생각이 나버렷조 여고생장 나오미ㅋ
 
2023.03.29 02:3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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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감자물 나오나오 존맛도리잖아ㅠㅠㅠㅠ 나오키 직진 꼬맹이 귀엽고 나오토는 까칠한게 섹시 그자체 아니냐고
[Code: 0880]
2023.03.29 08:1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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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나오 너무 귀엽다ㅠㅠㅠㅠ 나오키 애기때부터 기다리고ㅎㅎ 나오토 결국에 기억한거 개좋다ㅠㅠ 나오나오 결혼해ㅠㅠ
[Code: 9626]
2023.03.29 09:4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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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 분위기... 글에서 나른하고 외롭고 쓸쓸한 오토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음ㅠㅠ 오토 어뜩해 발현이 자기 의지가 아니었던 만큼 타지도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었을 거 아냐 거기서 아무리 자유롭게 살았어도 진짜 깊은 친구 하나 만들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워 죽겠다ㅠㅠ 와중에 나오키 너무너무 좋았음 이걸 뭐라고하지 이 글의 나오키가 진짜 고등학생처럼 느껴짐ㅠㅠㅠ 조금 직설적이고 당돌하고 솔직하고 근데 오토가 너무 어른같아보이는 어리숙함까지ㅠ 제일 좋았던 부분 폰게임 하면서 잠든 오토 기다리는 부분이었음.. 하 어떡하냐 이 몸만 큰 애기ㅠㅠ 오토 고등학생한테 곁 주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게 맘대로 되는 게 아니지 그것도 이렇게 직구로 들이대는 타입에게는ㅠㅠ 오키가 아무래도 어려서 오토한테 상처받는 일도 생길 것 같은데 그것까지 이겨내고 나오토가 인정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지도 기대됨ㅠ 오키야 오래 기다렸으니까 오토랑 예쁜 사랑 하자ㅠㅠ 센세 다음편 올 때까지 숨참는다앜ㅠㅠ
[Code: 3987]
2023.03.29 15: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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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챠 우리 끝까지 가보는거다ㅠㅠㅠㅠㅠ센세ㅠㅠㅠ또와줘야해ㅠㅠㅠ
[Code: 5a7e]
2023.03.29 16:17
ㅇㅇ
대작의 시작.......
[Code: 77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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