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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3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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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런던의 밤거리.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인영이 소리치고 있었다.


"왜 다들 내 말을 안 믿는 분위긴데, 씨발!"


 그 뒤를 따르는 세 사람 중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틀거리며 소리 지르던 홀쭉한 남자는 제 분을 못 이겨 담벼락을 걷어찼다.


"우리애가 또 취했네."


 반쯤은 질린다는 듯, 또 반쯤은 재미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닥쳐. 안 취했으니까."

"취했어, 확실히."

"형 자꾸 네가 모든 걸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난 뎡신이 매우 매우 말땽하다고."

"차라리 성경이 진짜라고 해라."

"맞아, 사실 취했어. 취한 것도 사실이고, 내 말이 맞다는 것도 사실이지. 나 정말 존 레논을 본 것 같아. 씨발, 진짜라니까?"

"우리 애, 네가 본 건 그냥 맨날 하는 지랄맞은 엑스터시 환각이고."

"아." 


 뒤돌아서서 낄낄대며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린 술 취한 사내의 목소리는 거칠었으나 얼굴은 소년처럼 해맑았다.
 퉁명하게 답하는 듯하던 그의 형제조차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며 그 해사함에 마주 웃음 짓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내 말을 믿어봐. 엿 처먹은 광신도 놈들이 먼저 발견하는 것보다 내가 찾아서 유니언잭을 들고 존 레논을 환영하는 게 더 죽여죽지 않겠어?"

"외계인은 믿지도 않는 놈이 지랄한다. 오늘 씨발 무섭다고 혼자 잠들지 못하겠다고 전화나 쳐 해봐. 진짜 가만 안 둘 테니까."

"나는 외계인을 보면 썩 꺼지라고 할 거야. 어느 행성에서 왔던 거기에는 존 레논도 없고, 비틀즈도 없고, 오아시스도 없잖아? 그 거지 같은 곳으로 당장 꺼져버려 이 망할 놈들아! 하면서-"


 앞장서 걸어가며 혀 꼬인 소리로 중얼거리던 길쭉한 남자가 웃으며 담벼락을 걷어차는 시늉을 하는 순간, 골목 끝에 작은 인영이 나타났다.
 어딘가 불쾌하리만큼 아주, 아주 익숙한 걸음걸이와 형체를 하고 말이다.
 우뚝 멈춰 선 그가 살짝 뒤돌아보니 일행들은 여전히 뒤처져있었다.

 가로등 불빛도 제대로 비추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하얗게 둥둥 뜬 얼굴이 겁먹은 표정을 하고 술 취한 채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도망갈지 고민하고 있는 듯, 아니면 그마저도 못할 정도로 두려움에 질린 듯한 표정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너."


 남자의 하얀 입김이 공중에서 부서졌다.


"다, 다가오지 마세요."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씨발, 환각인가? 그 정도로 약 빨지는 않은 것 같은데."


 비틀비틀 손을 뻗고 자신보다 작은 소녀에게 다가가는 남자의 목소리가 날이 서 있었다.
 그것이 뭐가 되었든 취한 것이 분명한 사내에게서 피하려 뒷걸음질 치는 소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남자는 몇 걸음만에 바로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를 움켜쥐었다.


"너 진짜야? 씨발, 진짜냐고!"

"이거 놔요!"

"노엘이 아니라 내가 맛이 가서 다행이야. 취한 사람이 노엘이었다면- 그래서 널 보는 사람이 걔였다면 난리가 났을 텐데."

"이거 놓으라니까요!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겁에 질린 소녀의 목소리는 한가로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만담을 나누던 일행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젠장, 우리 애가 또 시작이네.
 어둠 속에 묻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그들은 싸움- 혹은 추행을 말리고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리암- 그만해. 여자잖아."

"본헤드, 저리 비켜 봐. 노엘- 내가 누구를 찾았는지 알아?"

"이 똥 덩어리야, 빨리 이쪽으로 안…"

"봐! 허니 비하고 똑같이 생겼잖아!"


 술 취한 사내- 리암 갤러거의 외침에 모든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완벽한 정적 속에 반항을 하던 소녀조차도 그 안으로 침잠하였다.

 뻣뻣해진 고개를 억지로 돌려 리암에게 억세게 어깨를 붙잡혀 있는 소녀를 바라보는 노엘의 눈빛만이 어둠 속에 도깨비불처럼 파랗게 빛났다.
 그리고 수 초가 흐르고 나서야 그 소녀- 허니가 퍼석하게 마른 입으로 용케 알아 본 그의 이름을 입 밖에 꺼내놓았다.


"노엘 갤러거…?"

"허니."


 마음대로 나타났다 마음대로 사라지는 괴물.
 아니, 구원자.
 겨우 이름을 부르는 행위 하나에 무수한 감정이 목 끝까지 울렁대는 바람에 노엘이 이를 물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간 그가 잠시 두 눈을 내리감자 그의 푸른 안광이 만들어내던 마법 같은 순간이 깨어진 것처럼 리암이 허니의 어깨를 놓았다.


"어. 시발. 그러니까-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니었나보네. 너 진짜 허니 비-"


 정적을 깨고 횡설수설하던 리암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우웩!"


 펍에서 대충 집어먹었던 감자튀김이 섞인- 그리고 대다수가 위액과 섞여 정체불명의 불쾌한 칵테일이 되어버린 토사물이 허니의 가슴팍을 물들였다.


"맙소사."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은 소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힘겨웠다.
 갑작스레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꿈이 아니라는 것이 확 느껴진 것이다. 꿈이라 치부하기에는 추위가 살을 에는 듯했고, 구토물의 악취 또한 심각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쥐고 인형처럼 흔들어대는 취객이며, 비행기에서 조우했을 때 보다 젊어진 노엘 갤러거조차도 도저히 자신의 상상력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묘사할 수 있는 단어는 한 가지.
 현실.
 그녀는 과거의 시간대로 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가만히 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노엘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 소녀의 어깨에 둘렀다.
 하고 싶은 말도 너무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너무도 많았지만 그 모든 상념을 정리하고 서 있기에는 허니가 입은 옷이 너무도 얇아 보였다.


"정말 마음에 드는 재킷이었거든."


 한숨처럼 내뱉은 목소리는 의외로 태연했다.


"형-"

"정말, 정말, 빌어먹게 마음에 들었었다고. 가격도 꽤나 비쌌고. 내 마음에 들 만한 새로운 걸 사서 옷장에 넣어줘야 할 거다, 우리 애. 기껏 부자 놈들이 너한테 베푼 술을 쓰레기 형태로 분출하고, 내 옷도 망친 대신에 말이야."


 몇 년을 기다려온 재회에 대한 소감치고는 시시했다.
 무너져내린 채 미동 없는 소녀를 억지로 제 등에 업은 노엘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씨발, 안 따라와? 나도 토하게 만들고 싶어? 택시를 잡아줘야 할 것 아니야!"


 벙 찐 채 모두가-리암은 그새 다른 쪽에 대고 나머지를 게워내느라 정신이 없고- 바라보고만 있자 다섯 걸음쯤 겨우 옮긴 노엘이 성질을 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본헤드와 귁시가 허둥대며 달려가 잡은 택시에 그녀를 먼저 태우고 따라 올라탄 노엘이 창문을 열어 리암을 노려보았다.
 불퉁한 표정으로 입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서 있는 제 동생은 평생 그래왔듯 감정을 숨기는 일에 영 능하지 못했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는 이미 그간 애써 눌러 놓았던 그리움과 원망으로 점철된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있었다.


"너. 씨발. 환각하고 실제도 구분 못할 거면 다시는 약 하지 마. 아니면 아무도 없는 곳에 틀어박혀 하던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그를 자극하는 일을 피하려 애써 비난을-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참아 낸 노엘이 나지막이 말하자 리암이 눈이 풀린 채로 코웃음 쳤다.


"걔 그냥 버리고 가는 걸 추천할게. 분명 또 떠날 테니까."

"…택시비도 청구야. 현금으로 가져다 놔. 헛소리하는 꼴 더 보기 싫으니까 직접 가져다 놓지 말고 누구 시켜. 정신 차리고 얘기해. 가라앉히라고."


 그 말을 끝으로 택시는 출발했다.
 거리에 남겨진 빌어먹게 솔직하고 똑똑한 리암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두 멤버를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았다. 내 말이 틀리냐고, D'you know what I mean? 표정에서 보이는 말에 본헤드가 장난스레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너 인마. 그렇게 좋아하는 네 형에, 네 세상 제일 든든한 편이 드디어 돌아왔는데 왜 지랄이냐, 지랄은."

"사실인걸. 가끔 보면 노엘도 존나 바보라니까."

"괜히 노엘 자극하지 마. 갤러거 형제 치고받고 싸우는 데 중간에 끼어있는 거 지겨워서 내가 밴드를 나가버릴 거니까. 나 나갈 때 귁시도 데리고 나갈 거야. 농담 아니다. 정신 건강에 해로워. 돈 벌면 뭐 하냐, 시발. 네놈들 옆에 있다가 심리치료하는데 그 돈 다 쓸 텐데."

"놔 둬, 본헤드. 저 새끼도 오죽 놀랐으면 정신이 멀쩡해지겠냐고. 술이며 약이며 다 들이부었는데."


 인상을 찌푸리며 곱슬머리를 헝클어 낸 귁시가 리암을 위로하듯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래. 난 놀란 거야, 씨발. …반가울 리가."

"병신."


 결국은 두 멤버 모두 웃음을 터뜨리자 기운을 차린 리암이 한결 명랑하고 다시 조금 더 불분명 해진 억양으로 외쳤다.


"허니 비가 돌아온 기념으로 술 더 조질 사람?"




"토사물이 시트에 묻거나 다시 토하는 경우에는 손해 비용을 청구할 거요."


 토사물 냄새에 잔뜩 인상을 구긴 택시 기사가 투덜거리자 아무 말 없이 앉아 반대편의 허니만을 바라보던 노엘이 인상을 확 구겼다.


"자, 이거 다 줄 테니까 제발 입 좀 닫아요 기사 양반. 그리고 토한 놈은 거리에다 토하라고 버려두고 왔으니 걱정 그만하고. 그렇지 않아도 머리 아픈데 별, 시발…."


 주머니에 남아있던 모든 현금을 모아 틈 사이로 기사에게 건넨 그가 비집어 나오려는 욕설을 삼키지 못하고 결국 내뱉고야 말았다.
 겁에 질린 햄스터처럼 앉아있는 허니를 의식해 줄어든 목소리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다녀간 것은 삼 년 전이었다. 허니는 매번 예고도 없이 나타나고 사라지곤 했다. 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살 수 있지만, 햇볕을 맛본 사람은 그 없이 살 수 없는 법인데. 노엘의 인생에 빛을 던져 놓고 그녀 자신은 사라져버리던 그의 구원자이자 심판자.
 언젠가 분명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재회를 고대하며 버텼으나, 이번 만남은 노엘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방금 전 그녀의 눈빛은 분명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에겐 이번이 첫 시간 여행인 것이리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허니는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좋았다. 빌어먹게 좋았다.
 알아보지 못하면 어때. 곁에 돌아왔는데.
 서운하고 비참한 마음과 별개로 심장이 마구 뛰며 그녀를 반겨대는 꼴이 마치 집 지키던 개가 된 기분이라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억지로 껴안고 연한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킁킁대는 짐승이 될 것 같아 노엘은 애써 자신을 달래보았다.


"날 아는 거죠?"


 한참을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던 허니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응."

"…내가- 그전에도 왔었어요?"


 과거로?
 차마 그 말을 덧붙이지 못하였지만 노엘은 알아들은 것이 분명했다.


"응."

"날 처음 본 게 언제예요?"

"1985년."


 간결한 만큼 확신에 찬 대답이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예상이 맞았으니까. 허니는 과거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왜? 노엘 갤러거 때문에? 비행기에서 만났으니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자 문득 비약적인 원망이 치밀었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 노엘을 외면하듯 허니의 고개가 창쪽으로 홱 돌아갔다. 이유도, 과정도, 그 끝도 알 수 없는 이 기묘한 여행에 원망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낸 이기적인 마음이 나약한 정신을 순간적으로 좀먹는 듯했다.


"날 봐. 씨발, 날 보라고 허니. 제발- 부탁이야. 널 겁먹게 만들려는 게 아니야…!"


 감각적으로 그녀의 외면을 눈치챈 노엘이 거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빌어먹을 1985년부터 나는 네가 다녀가기만을 기다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나는 아는 게 없어요. 1985년에 당신을 만난 적 없다고요."

"내가 널 알아. 내가 우리를 안다고. 내가 다 기억해. 그러니까 너는 몰라도 괜찮아.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 거야. 적응할 수 있게 도을 수 있도록 옆에 있을 수 있게 해주겠어?"

"… …"

"부탁이야. 나 이런 말 잘 안 해. 그런데 진심이야. 나는 원래 겁내지 않아. 나는…누군가에게 부탁이야 따위 말 쓰지 않는다고. 간절하게 남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어. 그런데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그러니까 제발 나를 봐. 내가 널 알아. 걱정하지 마."


 그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때, 1985년의 여름 허니가 했던 말이었다. 기억 속 그녀는 분명 웃으며 이야기했는데, 그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자신의 천사가 그를 바라봐 주지 않는데.
 질식할 것만 같은 공황에 노엘이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생각할 때쯤, 허니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얗고, 앳된 얼굴.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다 조금은 통통한 듯한 모습.
 그제야 날숨이 새어나가며 숨이 쉬어졌다.


"미안해요. 기분 상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무서워서…. 두려워서 그래요. 이게…정상은 아니잖아요. 내가 미쳐버린 줄 알았어요."

"절대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비겁한 생각을 했어요. 한순간의 생각이라도 노엘을 원망한 것, 사과할게요. 사과하고 싶어요."


 올곧은 모습이 너무나도 허니다워 노엘이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 네가 잘못한 것 없으니까. 우선…우선 어서 집에 가자. 가서 조금 쉬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고. 씨발,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지금 엿같이 피곤해서. 이성적으로 널 안심시키면서 얘기하려면 나한테도 시간이 필요해."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노엘은 허니의 시선을 붙든 채였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며 어색하게 공중으로 흘러가 버리려 할 때면 그는 주문처럼 반복해서 속삭였다.

 날 봐, 허니. 날 보라고. 내가 널 알아. 나는 다 기억해.
 널 기다리고 있었어. 십 년 넘게 말이야. 하나도 잊지 않았어. 내 음악에 너를 담으며.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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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가 노엘을 처음 만났던 '현재' 속 타임라인 =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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