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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8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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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에 한번 못이 박히면 오뉴월에 시퍼런 서리가 내린다거나, 죽기 전에도 떠오르는 것은 사랑하는 님이 아니라 죽도록 미웠던 자의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저주와 같은 부의 감정은, 죽고 나서도 잊지 못해 구천을 떠돌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나, 뭐라나.


그런 부정한 기분에 대해서는 별로 깊이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해 준 장본인은 적어도 미츠이보다는 더 다방면으로 열정적이고 화려한 사람이었다. 비슷하게 불꽃 같기는 했어도 연륜은 무시 못해서 손이 덜 가기도 했고, 도움을 받았으면 받았을까. 그런 어른스러운 점이 확실히 편한 사람이었다.


시원하게도 차이기 전에, 그녀에게는 이런저런 심도 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영화 관련 분야를 전공해서 신나게 관련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에너지가 차고도 넘치던 사람이라,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어쩐지 사귀는 사이보다는 스승과 제자… 혹은 멘토링, 아니면 아가씨와 보디가드, 아니면 주인과 멍멍이 아니면… 그 주변 어딘가의 조금은 더 건설적인 조력 관계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고백도 아니고 간택… 느낌이었지, 그거. 그래도 많이 안아 줬었는데, 외국에서 살다 왔다고 그랬나. 머리도 자주 쓰다듬어 주고. 그러면서 나를 보는 눈은 확실히… 그녀가 키우던 '세레니티쨩'을 보던 눈빛과 비슷하기는 했구나. 어질리티 대회의 대상을 탔을 때의 '장하다, 장해' 와 같은……. 그러나 과히 활달한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는 것 이상으로 반응을 해줄 수 없던 것이 미안해질 무렵에는 점점 말하는 수도 빈도도 줄어 갔다.


처음에는 이런 나도 반드시 바꿔 보이겠다고 선전포고를 날리던 당찬 사람이었는데……. 하기야 그런 나도 나이기는 했다. 그러고 보면. 옛날부터 대략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워낙 사방에서 공략 대상이 되고는 했더랬지. 나란 녀석.


에휴……. 인기인은 고달프다지만 이건 인기도 뭣도 아니고, 그저 때려 뿌수어야 하는 적군의 수장으로만 여겨져 왔으니, 어찌 스스로 애석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누군가 이렇게 가엾은 나를 아껴 줄 사람은 어디에 없을까나. 작게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드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직 그대로 말이 없어진 나를 빤히 보고 있는 진지한 얼굴.


흠흠, 그래서 각설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류의 해피앤딩도 좋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헤어지고 만 연인들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더 마음에 남는 법이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가 갔다.


나는 그다지 그를 구속하려는 마음은 없으니까. 그가 언제고 내 곁을 떠나 훨훨 날아가고 싶다고 하면, 진정으로 갈 길을 정한 이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차마 대못은 아니더라도, 내가 첫 번째라는 그에게 점 하나 정도는 찍어 보낼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사라져 준다거나… 하는. 그러면, 얼마 전에 본 영화에서처럼 그의 최후의 순간 떠오르는 것은 적어도 나이기를.


오, 이런. 결국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치졸한 감정마저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니, 이를 어쩐담. 훠이, 훠이. 눈앞에서는 당장이라도 '야, 이 비겁한 후카츠 카즈나리! 네 놈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버럭, 손가락질까지 하며 극 대로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러니까, 나도 만약의 이야기였어, 만약의…….


그렇게 놓고 보면, 과연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가슴 속 깊이 진한 흔적을 남기는 강렬한 감정은 좋은 것보다는 부정적인 종류에 수반되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말은 대체로 맞는 이야기인가 싶기도 했다. 예컨대,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이가 부들부들 떨리거나, 주먹을 불끈 쥐며 이불을 차게 되는 경우는 보통 상대에게 좋은 말을 들었을 때보다 안 좋은 말을 들었을 때가 많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불같은 종류의 감정도 그녀의 말대로 꼭 나쁘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런 파괴적인 기분은 적절히 '활용'만 잘 한다면 순간적으로 대단한 폭발력과 투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눈앞의 인물도 그런 경우에 속하여 결국 나와 내 모교를 거꾸러뜨렸고, 반대로 이용하는 것도 가능해서 상대를 자멸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일종의 승화—라고 보면 좋을까.


그러는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불도 좋지만 굳이 말하자면 얼음, 그보다는 물이 좋을까. 물은 상처 입히거나 입지 않으니까. 모든 것이 정화되고 치유되는 기분이 들어서 그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면 느껴지는 고요함을 좋아했다. 상성이 좋다고 해야 하나.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번잡한 마음을 식히기 위해서는 그만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고요함을 좋아했지만, 아닌 사람에게는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요는, 모든 것에는 상대성이 따른다는 진리의 문제였다.



*          *          *



  “아아, 숨막혀. 질식해 버릴 것 같아—. 너무 무겁다구, 후카츠군은.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뜨거워지기는 하지만. 역시 흔들리지는 않는 거네.”


언제나 적당히 뿌려져 은은하게 흘러 나오는 향수의 향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별 말 없이 빈 잔에 와인을 따라 주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후 또 무슨 말을 하시려나 옆눈길로 쳐다보고만 있는데, 테이블 위에 고개를 옆으로 놓아 두고 검고 붉은 계열로 스모키하게 칠해진 눈매로 지그시 나를 올려다 보던 그녀는 혼자서 익숙하게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후후,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어. 진짜로 잡아먹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생일도 지나지 않은 아이에겐 손대지 않아.”

  “…….”


그래도 내가 아무런 미동도 없자, 그대로 한숨을 한 번 크게 쉬고는 옆으로 나를 보고 있던 눈이 천장을 향했다.


  “그 눈. 눈이 좋았어. 나 안목은 상당히 높은 편이니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 하지만, 실은 알고 싶어 죽겠는 거잖아. 나랑 마찬가지로. 탐미에, 탐욕스럽기까지.”



탐미는 그렇다 치고, 탐욕까지 들켰었나, 흠. 뭐, 그것은 다름이 아닌 지식에 관한 것이었고, 알고 있는 정보는 되도록 많을수록 좋기는 했다. 살아가는데 무기가 되니까. 그래도, 들어본 적 없는 프라이빗 브랜드로 온몸을 휘감고 다니는 그녀의 눈은 높다 못해 아예 하늘을 찌르는 것이어서, 그런 사람에게 인정 받은 것 같아 속으로 조금 으쓱하고 있는데, 곧바로 이어지는 말은 뜨끔하게 만들고도 남는 것이었다.


  “콧대 높은 운동부 녀석들 눈 좀 돌아가라고 단체 미팅에는 퀸카로 소문난 애들만 데리고 갔었는데, 저~기 구석에서 이쪽은 하나 관심도 없다는 듯이, 그 건방진 눈빛이란. 후훗, 분명 머릿수나 채워달라고 해서 나왔을 거라고, 너.”


  정확하십니다.


이제 갓 대학물을 먹기 시작하여 눈만 껌뻑이던 신입생에게, 제발, 이번 한번만 참석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던 직속 선배의 말은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번 한번이 두번이 되고, 두번이 세번쯤 됐을 때 그녀를 처음 보았다. 멀리서 보기에도 호화롭기 그지없는 차림새에 저절로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언변은 더욱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후카츠군은 말야, 내가 딱히 조언은 안 해줘도 되겠지만. 진짜 선수들은 아군마저 완벽히 속여 넘겨야 하는 법이잖아. 그건 가식하고는 달라서……. 때론 혼자서 좀 더 많은 것을 감내해야 하는 고독이 필요하기도 하더라고. 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화려한 메이크업이 입혀진 아래로 보이는 쓸쓸한 눈길의 사연은 당사자가 먼저 꺼내지 않는 이상, 보통 묻지 않는 것이 경험상 좋았다. 그리고 그 사연이란 굳이 묻지 않아도 어딘가 익숙한 모종의 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이라 나 역시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그렇게 집어서 고독이라고 알아 주는 사람이 있어서 어딘가 위안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순수한 아이라고 생각했어. 그 순수도 의도된 것이라고 하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후후, 적어도 넌 나를 속인 적은 없으니까. 그 전 놈들하고는 달리. 눈에 다 보이는 거짓말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을, 쯔읏—. 존재가 한없이 가볍고 얄팍한 놈들은 질려서 이번에는 다른 길을 택했더니, 이것도 저것도 쉽지는 않네. 아~아,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아, 땡큐."


이전 애인들 얘기가 나오자 조금 과격해지려고 하는 인상과 말투를 보건대, 이럴 때는 눈치껏 굴어야 한다는 그간의 교훈으로 금방 비워지는 와인잔에 얼른 마지막 남은 와인을 마저 털어 드렸다.


  “저기, 있잖아. 만약 내가 후카츠 군을 차게 되면……, 그럼 난 네 인생에서 너를 차 버린 유일한 사람이 될 거야. 일단은, 그걸로 만족하기로 할까.”


여자라서…… 예리한 것이 아니라, 그냥 두려운 사람이었다. 혼자서 고급 포도주 한 병을 다 비우고도 무서우리만치 날카로워지는 시각과 발언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흔들리기는커녕 위기감이라는 안테나만 더 바짝 서게 하는 것이었다.


  “좀 더 요구해도 좋을 텐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로 표현해 줘야지, 안 그럼 모르는 척 해버릴 거다? 평소에는 스토익한 주제에 플레이 할 때는 강압적이라… 또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래서 더 좋아하긴 하지만. 하하핫, 역시 이 재밌는 녀석.”


등판 하나는 널찍해서 좋다니깐, 쓸데없이— 갑자기 무슨 기운이라도 솟아난 듯 매서운 주먹으로 내 등을 퍽퍽 쳐 가면서 무엇이 그렇게 재밌는지 까르르 웃으며 하는 말에는 그날 따라 뼈가 한가득 쏟아졌다. 그런 모습에서조차 동족의 분위기가 느껴져서 흠칫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지만, 나른하게 중얼거리면서도 흐트러짐 없어 보이는 사고는 그런 게 바로 어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절대 깨질 리 없는 아름다운 연인 사이일수록, 어떻게든 부수고 찢어 놓아야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 거라며, 큰 눈을 부릅뜨고 웃던 악동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통쾌란, 카타르시스란 그런 거라고 아리스토쨩…이 그랬다나. 영화감독 지망생답게 사람의 여러 감정과 관계에 대하여 흥미가 많던 그녀는 이것은 어떠하냐 저것은 어떠하냐, 내놓는 발상마다 조금 독창적일 때가 많아서, 가끔은 나마저 히익– 그건 좀… 하게 만드는 때가 있었다.


  “하지만, 상상해 봐. 카즈나리. 사랑해서 영원히 함께하는 것만이 해피앤드가 아니야. 사랑해서 영원히 함께하지 못한다 해도 분노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세상의 끝과 끝에서 마음으로 그리워 하며 사는 것이 어쩜, 사랑의 최종적인 버전이 아닐까. 그렇게 윤회를 거듭해 가는 순정이야말로 세상을 영원히 구하는 거야— 근데, 그런 것도 모르고, 우리 아버진 거장이라는 사람이… 단 몇 장, 펼쳐 보지도, 않고, 내, 시나리오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지, 뭐니, 하아…….”


  아, 오늘 이 무시무시한 살풀이 현장은 다 그것 때문이었나.


아니, 그전에 그거 99프로 흥행불가라니까요……. 그런 초마이너한 감성에 열광하는 극히 드문 부류 빼놓고는. 하고 내 무덤을 파는 말은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지만, 왠지 묘하게 설득이 갔더랬다.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테이블 아래로 고꾸라지던 그녀를 침실에 옮겨 두고 문단속을 마치고 고급맨션을 나오면서도, 그날의 대화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 티끌하나 없는 어떤 초월에 이른 경지야말로 사랑의 궁극의 형태라는 열변을 토하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며칠 밤낮을 새우며 써내려 가던 시나리오를 완성한 후 초췌해진 얼굴에 돌던 생기는 혹,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어서……. 그러고 보니 둘이서 왠지 닮은 구석이 적지 않았던 것은 왜, 지금에 와서 더 생각이 나는 걸까.


하지만 나는 그다지 위대하고 숭고하기까지 한 그런 고차원적인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어떨지 몰라도. 사람은 어쨌거나, 우물만 하든, 하늘만 하든, 자기가 아는 세상만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저변을 넓히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다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그녀는 나에게 여러 세계를 보여 주었다. 덕분에 졸업반이라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그녀에게는 실외 데이트 대신, 그때까지 살아 온 동안에 본 것보다 더 많은 영화를 시청당..해야 했다.


영화는 드라마보다 인간의 삶을 응축해 놓은 것이라고, 단 몇 시간 만에 얼마든지 지구 반대편은 물론 인간이 살아보지 못할 공상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또렷이 빛내던 눈동자마저, 눈앞의 사람과 닮았다는 것을 거듭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그런 가공의 세상이 아니라, 내 눈앞에 닥친 실제 세계였다. 그런 방대한 세계는 상상이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면 되는 것이고, 감정조차, 어떤 것도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까지만 동조 가능한 것이기에, 나는 그저 보면 반갑고, 들으면 감미롭고, 만지면 부드럽고, 맡으면 향긋하고, 먹으면 달콤 쌉싸름할 것 같은 사람과, 지금을 사는 동안 즐겁고 싶을 뿐이었다.


아무튼.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봤어도, 역시 난, 죽기 전에도, 자기 전에도, 눈을 감을 때 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평안하고 싶다구요…….


다음의 다음 번 생까지는 먼나라 얘기였고, 일생일세, 한번의 생애에 한 사람 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그것만으로 충분히 벅차다.


그래서 있잖아, 미츠이. 나는, 이번 생은, 아마도 평생…….



*          *          *



  “첫사랑.”

  “……?”

  “얘기 해준다고뿅.”

  “어어, 그랬지. 첫…사랑.”


순간 눈썹이 꿈틀하고, 입이 삐죽하고, 처음 궁금해하며 물었을 때와는 달리, 금방 시무룩해지는 반응은 마치 글라스 캣피쉬……. 뼈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어느 투명한 물고기처럼, 어쩜 숨길 생각이 없는 걸까. 너는.


그런 네게, 이보다 더 깊이 빠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심장이 조금 더 뻐근거리면서, 동시에 입꼬리에 넌지시 걸쳐져 있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결국, 이것이 바로 나였다. 속은 어찌됐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넘기는 나라서. 내가 그라면, 상대가 누가 됐든 어떤 생각도 들지 못하게 그대로 흘려 넘겼을 것을. 그것은 내가 반드시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나의 본질이었다. 혹은 본능.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그건 바로 너이겠지.


물론, 완전히 감정을 숨기고 사는 미츠이와 속이 훤히 들여다 비치는 나는 어떻게 보아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기는 했다. 어떤 자극에도 꿈쩍도 않는 부동심의 그와 일일이 펄쩍 뛰는 나라니……. 소울 체인지라도 되지 않는 이상, 잠깐만 생각해도 거의 도시 전설급 공포감이 스쳤다.


  자, 그럼. 아직 뭐가 마음에 안드는지, 살짝 굳어져 있는 이 가여운 얼굴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어디, 내 이야기를 끝까지 한 번 들어봐 줄래. 그러면, 아마, 너도 좋아하게 될 거야.


  “고교시절, 한눈에 내 눈을 사로잡은 녀석이 있었다.”

  “음.”

  “분명, 만만치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처음 봤을 때부터 무리 중에서도 눈에 띄었고, 예상대로 보통 까다로운 놈이 아니었다뿅.”

  “으응.”

  “머리에서 발끝까지 새까매서, '쿠로가네군'이라고 이름도 붙여 줬어.”

  “으음, 그렇게, 까맸냐.”

  “응, 머리 위에 벼슬부터 발톱까지. 심지어 눈마저 까매서, 꼭 지옥에서 올라온 생명체인 줄 알았다뿅.”

  “엉, 벼슬… 발톱…이라니, 너, 설마 그거…….”

  “학교에서 키우던 닭 이야기. 스쿨 미션으로 뭔가 하나, 졸업 할때까지 맡아서 길러야 했거든. 덕분에 헤어져야 할 때는 조금 슬펐다뿅.”

  “…그게, 첫사랑이라고?”

  “응.”

  “장…난하지 마라, 또 나 놀리는 거지?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괜히 손해봤네, 췟.”

  “장난하는 것도, 놀리는 것도 아니다뿅. 진짜로 멋있는 녀석이었어. 아얌 세마니라는 엄청 희귀한 종이었는데. 왠지 있다뿅. 학교 관계자 중에서도 그런 거 수집하기 좋아하는 오타쿠. 나, 그런 거 잘 기를 거 같다고, 거의 반 강제적으로 맡겨졌다니까.”


아~아, 이치노랑 얌전히 토마토나 기르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녀석, 손 많이 갈 것 같은 건…….


  “아, 그러냐. 그러게, 닭 벼슬부터 눈까지 까만 닭은 들어 본 적이 없네.”

  “그것만이 아니다뿅. 혈액 빼놓고는, 속살은 물론 입안까지 칠흑같이 까맸다뿅. 이름하여, 가금류계의 람보르기니라 불리는 초럭셔리 품좀뿅.”

  “헤, 그건 좀 신기한데.”


듣다가 손해봤다며 실망하던 기색은 사라지고, 어느새 쿠로가네군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한 눈치였다. 훗, 그럴 줄 알았다니까.


  “호기심도… 왕성하고, 운동 신경도 좋고, 위기 관리도 장난 아니었다뿅. 성질도 보통이 아닌 데다, 유달리 머리도 좋아서 꽤나 애를 먹었지. 조류 주제에. 인간들 골탕 먹일 줄도 알고, 위험하다 싶으면 집단으로 행동해서 타개할 줄도 알고.”

  “오호, 거 참, 똑똑한 놈이고만. 네가 공들일 만한데?"


 ——흐음, 그렇지…….


  “또 입맛은 한참 고급에, 한창 클 때는 신선한 먹이들 공수하느라 전날부터 밤잠 설치게 만들고, 깔끔은 어떻게 떠는지 우리가 조금만 더러워져도 들어갈 생각은 안 해서 눈치싸움 엄청 해야 했고… 아무튼 강적이었는데, 그런데도 내 손길 말고는 다른 사람 손은 타지도 않는 약은 놈이었다뿅.”

  “푸하, 알겠다. 알겠어. 나라도 그랬겠다. 너 뭔가 돌보는 거 엄청 잘 할 거 같으니까.”

  “……그래서, 어때.”

  “음, 뭐가?”


  “듣고 있자니, 꼭, 누군가씨 생각나거나 하지 않아.”

  “누군가씨, 라니 누구……”

  “…….”

  “……그거, 설마 내 얘기였냐?”

아무 말도 않고, 눈에서 눈으로 의미심장이라는 이름의 레이저를 쏘고 있자, 그제서야 감이 왔다는 듯,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르키며 묻는 살짝 얼이 빠진 표정은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을 만큼 먹음직스러운 것이었다.


쿠로가네군은 당연히 식용이 아니었지만, 원래는 먹으면 마술같은 힘을 안겨다 주는 새라고도 하던데, 눈 앞에 이건…… 흠, 언제쯤 시험해 보기로 하고. 그러니까, 내 취향의 근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거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돌보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꽤 좋아하는 편이라고도.



*      *      *



  “저게, 소문의 그 미츠이군이네. 듣던대로, 외관은 보기 좋은 걸. 옥석이란, 저런 걸 두고 말하는 거겠지. 여기서 보기에도 눈이 부셔.”


소위, 존재하는 것으로 빛이 나는 부류. 그것이, 그녀가 그를 처음 본 감상이었다.


외부에서도 나름 명성이 나 있던 농구부의 연습시합이 있는 날이면 종종 구경을 하러 오던 그녀는 찾아올 때마다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평소에 구경도 못하는 고급 디저트류의 사식은 나로 하여금 선배들에게 그녀가 체육관을 더 자주 찾도록 종용당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교내외 사교계의 최상위층에 있다시피 한 그녀는 나라고 딱히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귀에도 들어가기 딱 좋은 그의 소문은 듣는 사람의 구미를 당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불릿 슈터— 라고 불린다며, 그. 시야도 넓고, 센스도 좋아 보이고, 직접 눈으로 보니까……, 음, 나쁘지 않은 플레이어야.”


무심한 것인가, 유심한 것인가. 특기인 외곽에서부터 패스를 받자마자 클린 하게 3P를 만들어내는 빠른 드라이브슛을 가볍게 성공시키는 그를 보면서, 나지막이 읊조리는 평가에는 별다른 어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한쪽 팔짱을 낀 위로 손등을 턱에 받친 채 보석이라도 품평하듯 그에게 고정되어 있는 눈만은 조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치만,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영혼, 나한테도…… 역시 무리. 아야짱은 그래서 단단히 반한 듯하지만, 어쩐지 나랑은 상극이겠어. 후훗. 귀엽기는 한데 말야, 난 돌보는 건 좀, 젬병이잖아.”


  상극이라, 그러게요. 같은 극끼리는 서로 밀어낸다고도 하니까…….


어딘가 찔리기라도 한 것인지, 이쪽을 돌아보고 동의를 구하듯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어쩐지 미워지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그보다는 돌보는 것이 젬병이라는 말에는 더욱 동감이 갔다. 조금도 아니고, 그제도 비싸게 주고 산 화분을 대신 내다 버려야 했다. 외국산 야자에 속하던 커다란 나무였는데, 그 아무리 건강한 식물도 그녀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말라죽거나, 물을 너무 많이 먹거나, 햇볕에 타거나, 너무 못 보거나… 해서 아무튼 살아남기란 힘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열대어 수족관을 들이고 싶다는 말도 — 간신히, 뜯어 — 말리느라 애를 썼다.


당연하지만, 생명을 가진 무언가를 돌보고 기를 때에는 온 정성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법. 그러지 못할 거라면, 처음부터 들이지 않은 편이 서로에게 참극을 만들어 내지 않기에는 좋았다. 내가 쿠로가네군을 처음 맡았을 때는 일반적인 닭의 습성 이외에도, 워낙 별스러운 녀석이었기에, 기타 복합적인 특성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고되고, 인내심을 시험하는 나날의 연속이었음에도— 하루가 다르게 늠름해지는 녀석의 위용에, 그간의 고생은 눈 녹듯 사라지고 어느 날부터는 보람이라는 낙도 끝내는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꼭, 동식물에게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헤, 쿠로가네군 깃털, 날이 갈수록 윤기가 흐르네. 아직도 너 아니면 손도 못 대게 한다며. 비결이 뭐야, 후카츠?”

  “흐응—, 사랑의 힘베시.”


의기양양하게 대답을 한 후 이치노가 길러 온 토마토를 한입 가득 크게 베어 물자 그대로 입안에서 물크러지며 새콤달콤하게 적셔오는 맛과 향이 가히 일품이었다.


  “이치노의 토마토도 맛 좋다베시.”

  “응, 이번에는 햇볕이 유독 좋았으니까. 수확이 잘 됐어.


그리고 인자하게 짓는 미소만큼이나 애정과 끈기로 길러진 이치노의 토마토는 또한 외견상으로도 훌륭해서, 그 붉은 색깔과 광택은 탐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명헌대만 후카미츠
2024.05.09 07: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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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닭이라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후카츠답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런데 자기 닮았다고 해서 발끈해놓고 점점 호기심 갖는 대만이 귀여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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