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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00:02
ㅈㅇㅁㅇ
ㅋㅂㅁㅇ



1.

점호가 끝나고 하나둘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눕는다. 허니는 주의를 살피고 베개 맡에 숨겨놓은 편지를 꺼냈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허니의 눈동자만이 반짝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는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며 편지를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만을 원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원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_밀란 쿤테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허니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명언이니, 시니, 문학이니, 애초에 그것들은 허니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살면서 그런 것에 깊게 생각해본 적도, 감명받아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 편지에 쓰여있는 글은 달랐다. 그 글은 허니를 여운에 잠기게 했다.



2.

편지를 받기 시작한 건 입대하고 한 달이 지나서였다.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아무렇게 퍼질러 누운 동기들 사이로 허니는 사물함 앞에 섰다. 바로 씻게? 물어보는 동기에게 허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갈아입을 옷을 꺼내기 위해 서랍을 열었다.


툭, 발 밑으로 무언가 떨어졌다.

 
B에게


정갈한 글씨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편지? 편지를 보낼 사람은 없었다. 오래 전에 연락이 끊긴 가족들과 이제 와서 안부를 묻기엔 어색한 친구들. 게다가 그 흔한 우표도, 발신 주소도, 수신 주소도 없었다. 그 말은 부대 내 누군가가 허니에게 썼다는 뜻이었다. 허니는 누가 볼 새라 다급히 편지를 주워 락커에 넣었다.


먼저 씻고 온 허니는 숙소에 혼자 남겨질 때까지 기다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락커를 열면 편지는 아까 허니가 두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B에게.
오귀스트 콩트가 말했습니다.
사리 분별이 있는 사랑을 하려는 따위의 남자는,
사랑에 대하여 손톱만큼도 알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다.
당신에게 쓰는 첫 번째 편지를 제 어리석음의 증거로 남깁니다.


오귀스트 콩트? 그게 누군데. 가방끈이 짧은 허니가 이해하기에 편지의 내용은 다소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언짢거나 불쾌하진 않았다. 단지 궁금할 뿐이었다. 누가 나에게 이런 교양 있는 말로 편지를 보냈을까. 허니는 편지 속 내용이 고귀하게 느껴져서 차마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편지를 곱게 접어 침대 아래 숨겨놓은 철제함에 넣었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전의 편지 속 '첫 번째'라는 단어가 존재감을 드러내듯 그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허니의 락커에는 편지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훈련을 마친 허니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락커를 열어 편지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게 되어버렸다. 씻고 돌아와서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도 못한 채 편지에 몰두하곤 했다.


어느 날은 길었고, 어느 날은 짧았다. 대부분 시나 소설, 유명한 사람이 했다는 말들이 적혀있었다.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으나 허니는 편지를 꽤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한 달이 흘렀다.



3.


그 날의 편지는 평소와 달리 그 어떤 인용문도 없었다.

 
B에게.
몇 번을 망설이다 씁니다.
훈련소 정문에 핀 겹벚꽃 아래 선 당신을 보고 마음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습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편지를 읽는 허니의 눈이 커졌다. 살면서 이렇게 적나라한 고백을 받아본 적 없었다. 아니, 바란 적도 없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


"비! 오늘 불침번 너지?"


혼란도 잠시, 허니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까먹고 있었다. 아까 저녁을 먹으면서 빌리가 불침번을 바꿔달라고 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게 기억났다. 아씨, 허니는 서둘러 편지를 숨기고 밖으로 나갔다.


누굴까. 익명의 편지 뒤에 숨어서 나에게 고백한 이는. 허니는 순찰하는 동안 부대 내 사람들을 한 명씩 떠올렸다. 일단 유부남들은 제외하고, 현재 애인 있는 사람들도 빼면.. 남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 중에서도 딱히 의심 가는 사람이 없었다. 착잡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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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딴 생각하고 있는 건가?"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면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진동이 정수리로 전해지면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아닙니다!"


젠장할, 빌리 린. 물론 빌리가 오늘 다임 하사님이 함께 순찰한다는 사실을 알고 바꾸자고 했을 리는 없겠지만 허니는 애꿎은 빌리의 이름을 욕과 함께 읊조렸다. 동시에 물음표도 피어올랐다. 그러고보니 다임도 후보에 있었다. 허니가 멍하니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느껴졌는지 다임이 돌아섰다. 다임은 아주 잠깐 말없이 허니를 바라보았다. 다임의 푸른 눈이 온전히 허니만을 담아냈다.


생각해보니까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다임은 쉬는 시간에 항상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다임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빌리에 의하면 다임이 읽고 있는 책들과 편지는 그의 누나가 보낸 것이라고 했다. 빌리는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다임보다 똑똑한 사람은 없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단순히 지능이 뛰어나다는 게 아니라 아는 것이 많아서 그만큼 사람을 잘 파악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어쩌면 허니가 받은 편지의 내용 대부분을 아니, 전부를 다임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허니는 순간 자신이 일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망각하고 상관에게 고개만 내젓는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평소라면 상관과 단 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벌벌 떨었을 허니였지만 머릿속이 복잡한 나머지 그런 걸 따질 수 없었다. 정말 다임 하사님일까?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임이 뭐가 아쉬워서 저를. 군대가 아니었다면 서로 만날 일도 없을 만큼 다임과 허니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게다가 그 잘나신 도련님께서 가족들에게 버림 받아 갈 곳이 없어 입대한 여자애를 왜? 아무리 생각해도 다임이 자신을 좋아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물꼬를 튼 의문은 허니가 다임을 의식하게 만들었다. 아니라고 확신하면서도 마음의 저울은 계속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다가 알게 된 사실 한 가지. 평소 저에게 관심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다임은 자신을 꽤나 주시한다는 점이었다.


마을 정찰을 돌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동네 꼬마들이 유일한 여자 병사인 허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꽃송이들을 엮어 만든 화관을 허니의 헬멧 위에 얹어주며 꺄르르 웃어대는 여자애들 사이에서 허니도 따라 웃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 모습을 보던 다임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무심코 마주친 그 미소에 허니의 호흡이 멎었다. 하사님도 저렇게 웃을 수 있구나. 매번 한쪽 입꼬리만 비릿하게 올리던 웃음만 봐왔던 허니는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귀끝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감추는 것도 잊은 채.



4.

허니는 시계를 한 번 바라보고 입을 쩍 벌려 하품했다. 오늘은 불침번 서는 날이다. 잠든 동료들을 보며 조용히 기지개를 켜던 허니는 문 밖으로 보이는 기다란 그림자에 저절로 발걸음이 향했다. 다임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다임을 올려보자 다임은 여전히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 불침은 내가 서지."
"...네?"
"어제, 오늘 정찰하느라 고생했네."


허니가 붙잡을 새도 없이 훌쩍 사라진다. 허니는 다임이 있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다임은 정찰을 안 한 줄 알겠다. 같이 돌았으면서. 아랫입술을 물고 고민한다. 그냥 뒤쫓아가서 물어볼까? 편지도, 그 때 그 웃음도, 지금 이 뜻모를 배려도. 다임을 따라가던 허니의 발걸음이 멈췄다.


역시 그만 두는 게 낫겠어. 안그래도 어려운 사람인데 이상한 질문을 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해지고 싶지 않았다. 허니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락커 앞에 섰다. 언제 넣은 건지 락커에는 편지가 있었다. 그제야 허니는 오늘 편지가 없었다는 걸 깨닫고 편지를 꺼냈다. B에게. 제 의지와 상관 없이 다임의 목소리로 편지의 내용이 읽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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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를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봤자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열렬히 사모하고 사랑하는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_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5.

다툼이 있었다. 누군가 허니의 불우한 과거를 함부로 짓껄인 게 문제였다. 허니는 그 재수 없는 입을 틀어막기 위해 냅다 주먹을 날렸고, 상대는 코가 부러졌다고 한다. 다임은 그 소식을 일러주며 허니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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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귀하를 그렇게 가르쳤나?"
"아닙니다!"


허니는 다임의 구령에 맞춰 팔굽혀펴기를 했다. 땡볕 아래서 눈 앞이 핑 돌았지만 허니는 멈추지 않았다. 명백한 오기였다. 분명 전후 사정을 다 알 텐데, 저를 질책하는 다임에게 괜한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허니의 손에는 까진 상처가 눈에 띄었다. 다임일 리가 없다. 저가 착각해도 단단히 잘못 짚은 듯 했다. 아랫입술을 너무 세게 문 탓일까. 허니의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다.


하필 의무실에 아무도 없을 게 뭐람. 허니가 다리를 절뚝이며 락커 앞에 섰다. 일단 씻자. 락커를 열고 수건을 챙기려는데 허니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언제나 그랬듯 락커에 편지가 있었다. 그 옆에 반창고와 약, 파스도 함께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허니는 파스를 손에 쥐고 주위를 살폈다.


"빌리."


마침 지나가던 빌리를 불러세웠다. 빌리는 허니와 파스를 번갈아보며 묻는다.


"너 어디 다쳤어?"


빌리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허니는 한 손에 편지를, 다른 한 손에는 파스를 들고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더듬어 아까 운동장을 돌던 때를 떠올렸다. 그 곳에는 분명히 다임과 저 밖에 없었다. 허니가 동기와 싸운 것도 당사자들 외에는 모르는 눈치였다.

 
'세상에는 모든 행운을 두루 갖춘 경쟁자를 만났을 때
그 즉시 상대방의 장점을 모두 외면하고
단점만을 보려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그 행복한 경쟁자에게서
무엇보다 그에게 승리를 안겨 준 장점들을 발견하려 하고
가슴이 저리도록 아픈데도
그에게서 좋은 점만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_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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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익숙한 이름이 들려와 고개를 들자 창 밖에 다임의 우직한 뒷모습이 보였다. 코 끝이 시큰거려왔다. 방금 죽도록 다임을 미워한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견디지 못할 만큼 부끄러웠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뻐근한 곳에 파스를 뿌렸다. 알싸한 약의 기운이 상처와 근육을 아리게 만들었지만 이상하게 그 고통이 달게만 느껴졌다. 너무 달아서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6.

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허니는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다임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잠든 다임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 가지런한 콧대, 얇은 입술. 다임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그 때, 다임의 미간이 움찔거렸고 그 미세한 움직임에 허니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


다임이 허니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등을 감쌌다. 마치 계속 옆에 있어달라는 것처럼. 다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허니는 이대로 다임을 바라보기엔 감정이 벅차올라서 고개를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 손등으로 다임의 체온이 전해졌다. 땀이 많아서 열도 많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손은 차가웠다. 덕분에 널뛰는 심장을 빠르게 진정시킬 수 있었다.


허니는 눈을 감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다임의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굵은 손마디가 가득 차는 걸 느끼면서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손아귀에 힘을 더 실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 마주잡은 손은 서로의 체온에 서서히 스며들어갔다.






다임너붕붕
가렛너붕붕
2024.05.07 00:0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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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이라니 센세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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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00:1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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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너무 좋다 센세ㅠㅠㅠㅠ
[Code: 1ad2]
2024.05.07 00:1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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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Code: 5049]
2024.05.07 00:2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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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아니냐고
[Code: 354f]
2024.05.07 00:5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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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Code: 9bc6]
2024.05.07 01:1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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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진짜 달달하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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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01: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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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글이 달고 따뜻하다... 너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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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01: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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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센세༼;´༎ຶ۝༎ຶ༽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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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01: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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ㅜㅠㅜㅠㅠㅠ재업의꽃말은 어나더인데 센세 우리에겐 완결이란건 없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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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02:0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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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할 수 없음ㅠㅠㅠㅠㅠ 센세 재업은 사랑이야!!!!
[Code: 44fb]
2024.05.07 03:0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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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03:0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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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완결은 없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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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07:5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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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나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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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08:0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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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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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09:2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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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학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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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11:3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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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11: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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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붕생 여한없다 사랑해센세 그래도
완결의 꽃말은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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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21:5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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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이렇게 끝나는 여운도 좋지만 더 보고싶다면 내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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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22: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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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문학이네... 너무 아름다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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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8 03:5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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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2024 최고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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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1 14: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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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보고 싶다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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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2 01:2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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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츠 하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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