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93132525
view 487
2024.05.06 19:25
“조로야…… 조로……!!”

젊은 왕이 한발 뒤로 물러나며 보인 조로의 모습에 로우는 귀곡도 버려두고 달려갔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이었다. 휘청이며 뛰어간 몸이 조로의 앞에서 무너질 때는 곧 죽을 것처럼 힘이 없었고. 돌바닥과 무릎이 크게 마찰하는 소리가 들림에 찡그린 얼굴을 향한 조로는 무엇을 봤던 걸까. 그는 진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잊고 말았다. 정작 상처투성이인 건 그였는데. 조로는 목에 졸린 자국이 선명했고 널브러진 왼팔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에 반해 로우는 털끝 하나 다친 데가 없지 않던가. 그럼에도 이곳에서 당장에라도 죽어버릴 듯 위태로운 사람은 로우였다. 이는 크로커다일의 손에서 귀곡을 거침없이 떼어내던 젊은 왕조차 놀람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너, 이리 와.”
“조로야…….”
“얼른 이리 오기나 해!”

아파서 뒤지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던 조로가 멀쩡한 오른팔을 뻗었다. 그리고는 로우의 머리를 끌어당겨 제 어깨에 묻는 것이다. 희미하게 조로를 부르는 음성이 고막에 박혀들어왔다. 엄마를 찾는 듯한 매달림에 조로는 얄쌍하게 빠진 귓바퀴가 빨개졌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담. 어린 비비도 보여준 적 없는 나약한 얼굴이라니. 창백하게 핏기 잃은 로우의 얼굴은 입김 한번에 꺼질 촛불처럼 위태롭기 짝이없었다. 이는 일국의 왕자가 함부로 보여서는 안 될 얼굴이지 않던가. 그래서 조로는 아픔보다 로우의 얼굴을 감추기 급급했다. 자존심 센 녀석이니 이런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할 거란 생각도 들었고. 하지만 몇걸음 떨어진 곳에서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하는 왕을 보는 건 통쾌한 게 사실이었다. 그 이유가 평정심이 완전히 무너진 로우 때문이라는 건 씁쓸했지만.

“상황이 이러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폐하.”

조로가 목이 졸려 쉬어버린 음성으로 말했다. 좀 전까지 말을 반동가리 냈으면서 잘도 경어를 써대는 녀석에 젊은 왕의 미간 주름이 꿈틀했다. 팔 하나 빠진 놈이 뭘 믿고 으스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동시에 밀려드는 패배감은 젊은 왕의 배알이 꼬이게 만들었다. 로우는 조로의 옷깃을 움켜쥐며 그 이름을 희미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때 조로가 로우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이니 두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텅빈 공간을 향해 젊은 왕이 귀곡을 집어던지는 소리만이 요란할 뿐이었다. 방금까지 터질듯한 긴장감이 팽배했던 지하 선착장에는 이제 기묘한 정적만 맴돌았다. 그들 모두의 뇌리에는 방금 전 애타게 조로를 부르던 로우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나 매의 눈 사인 갖고 싶어.”

로우가 무심코 이동한 곳은 왕자궁 집무실이었다. 그곳 소파에 조로를 앉히고 룸을 펼친 로우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환부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이다. 매우 깔끔하게 관절만 탈구시킨 상태를 보자면 역시 도피답다고 해야 할까. 일찍이 땅 위의 지옥이라 불리던 라프텔 지역에서 온갖 괴수들을 상대하며 힘을 키운 사내였다. 처음으로 괴수를 죽였을 때가 열살도 안 돼서였다고 했으니. 왕위에 오른 직후 천명의 가솔을 죽여 천야차라는 이명을 얻었지만 그 전에는 살인귀라는 소리도 심심찮게 듣던 이 아니던가, 도플라밍고는. 하니 이렇듯 깨끗하게 탈구된 팔은 자비를 베풀었음이 분명하다. 또다시 조로를 다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변함없을지라도. 그로 인해 죽을상을 하고 있던 걸 로우 본인은 모르는 걸까. 통각을 완전히 차단시킨 덕에 아픔이 느껴지지 않던 조로는 제 어깨뼈를 맞추는 것도 몰랐으면서 로우의 표정만큼은 확실히 알아봤다. 이를 타개하듯 나온 말에 죽을상이 똥 씹은 얼굴로 바뀌는 걸 보면서는 입꼬리를 올리기도 했고.

“직접 사인 부탁도 해봤는데 본인은 그런 거 안 한다잖아. 근데 네 부하들은 다 받았다며. 역시 네가 부탁해서 그런 거겠지?”
“…내 사인은 안 받고 싶냐?”
“엑! 네 사인을 어디다 써? 자기애가 과하다, 너.”

로우는 하필 이 타이밍에 말을 꺼내는 조로 때문에 만가지 감정이 들었다. 진심으로 질겁하는 태도는 상처도 됐고. 이제 로우는 늘어난 어깨 인대를 바로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자신이 정말 싫지만 그럼에도 결국 하고 만 건 어쩔 수 없음이다.

“너 이럴 줄 알고 내가 사인 받아놨어.”
“진짜?!”
“움직이지 마! 치료 중이니까 이따 봐, 인마!!!”

로우의 손짓에 오늘 새벽, 미호크에게 받아둔 사인이 두루말린 채 나타났다. 조로는 리본끈이 곱게 묶인 종이가 테이블 위로 등장하기 무섭게 움찔댔고 말이다. 그런 녀석을 윽박질러서 멈추게 한 로우는 미호크의 사인을 받는 순간에 또 작게 킬킬대던 샹크스가 떠올랐다. 와중에도 로우는 품안의 조로가 깨지 않도록 소리를 줄이던 붉은머리에게 안도하는 자신으로 인해 배알이 뒤틀리기도 했다. 미호크의 사인은 이러한 고난을 겪고 얻어낸 것이다.

“치료 끝. 움직여도 되지만 격한 행동은, 야!!!”
“오ㅡ! 이거 진짜야? 진짜 매의 눈 사인인 거지? 내 이름도 있어!!”

조로는 로우가 말하기 무섭게 움직였다. 방금 치료한 팔을 뻗어 두루마리를 낚아채는 녀석에 식겁한 건 로우였고. 하지만 8절지 크기의 종이를 펼쳐본 조로는 시원하고 깔끔한 필체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친애하는 조로에게… 너와 함께해 즐거웠다……. 그것도 쓰란 거냐?’
‘무리하는 거 알지만 부탁할게. 저녀석 당신을 정말 흠모하니까.’

미호크가 아는 로우는 부탁이라는 걸 하는 녀석이 아니었다. 항상 필사적으로 혼자 다 끌어안으려 들었으니까. 그런 아이가 처음 미호크에게 부탁이라는 걸 해온 게 작년이었다. 이곳에 대심판관으로 온 미호크를 본 왕실 호위대 몇몇이 팬심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미호크의 기백에 눌려 감히 곁에 가지는 못하고 발을 구르는 녀석들을 보다 못한 로우가 나섰으니 그때도 종이 한묶음 들고 왔다지. 그리고는 사인해달라는 말로 미호크를 당황케 했었다. 그는 평생 누구에게도 사인같은 걸 해준 적 없었다. 번잡스러운 걸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했으니. 그러나 로우가 동료를 위해 부탁하는 모습에는 미호크도 어쩔 수 없음이었다. 뿌듯한 얼굴로 사인지를 갖고 돌아가는 걸 보면서는 더더욱 그러했고. 때문에 그는 샹크스가 매의 눈의 사인을 구경하겠다며 침대에서 일어나는 걸 알면서도 펜을 들었음이다. 로우가 말한 문구도 모두 적어넣었고. 이 모든 일의 결과가 여기 있음이니 로우는 목이 졸린 손자국을 달고서 활짝 웃는 잔디머리를 보며 허탈한 미소나마 머금고 만다. 죽을 것 같이 절망적이더라도 녀석만 곁에 있다면 웃을 수 있다. 이를 깨달은 순간이 하필 저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조로를 눈앞에 두고서라는 사실은 로우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이렇게 녀석을 사랑하게 됐을까.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답에 로우가 눈가를 가렸다. 저를 향해 웃어주던 녀석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침이 됐을 때 로우의 팔은 신기할만큼 붓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약초는 레오의 말처럼 붓기와 멍을 빼는데 특효인 듯했다. 레오는 샹크스가 침을 담뿍 뱉어준 덕분이라 칭찬했지만. 덕분에 붕대를 푼 로우의 팔은 색이 옅어진 멍자국만 남아 있었다. 마치 물에 번진 물감처럼. 때문에 조로는 젊은 왕이 저를 공격한 걸 다행으로 여겼다. 제가 그를 대신해 다친 것에 대해. 레오의 말처럼 적극 협력해준 샹크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기도 했고. 실로 지난밤 미호크와 조로는 전혀 도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붓기가 가라앉도록 한 일등공신은 샹크스랄 수 있었지만 로우는 이번에 정말 화가 난 듯했다. 로우가 조로에게 미호크의 사인을 건내준 이후의 일이었다.

‘음? 야, 이거 봐.’
‘뭘 보라고… 빌어먹을 붉은머리!!’
‘으하하하!’
‘웃지 마, 조로야!!’

‘잘 부탁해.’ 이것은 미호크의 사인이 크게 적힌 종이 하단에 적혀 있었다. 굵직하면서 거침없이 뻗은 필체마저 잘생겼다 감탄하던 조로는 하단에 단정한 정자체로 적힌 글씨가 의외라 생각했을 뿐이다. 전혀 다른 글씨체 덕에 누가 이 글을 썼는지는 뻔한 얘기고. 무엇보다 로우 몰래 글을 적어놓을 인물이 샹크스 말고 누가 있으랴. 이런 이유로 옥의 티를 발견했던 로우는 빨갛게 물든 얼굴로 당장 사라질 듯 굴었다. 그런 녀석의 옷자락을 붙잡은 건 조로였고.

‘지금 가서 뭐하려고. 이미 바다 한가운데일 텐데 잡을 수나 있냐?’
‘그 인간이 무슨 짓할까 봐 철통같이 감시했는데 언제 이런 걸 적은 거야 대체!!’
‘아무튼 고맙다. 사인 안 받아줄 것저럼 그렇게 튕기더니. 소중히 간직할게.’

그동안 로우는 조로에게 은근히 선물을 많이 했다. 산해진미에 비싼 보석, 예쁜 장신구, 좋은 옷감 등등. 이것들을 받아놓고도 조로는 고맙단 말 한번이 없었다. 그저 쓸데없이 낭비하지 말라는 말을 했을 뿐. 그런데 고작 사인 한장에 진심어린 인사를 받았다. 정말 기뻐하는 얼굴도 함께. 그래서 로우는 녀석이 소중히 손에 쥐고 있던 미호크의 사인을 뺏어버리고픈 마음을 필사적으로 눌러야 했다. 그는 조로의 제일 처음이 되고 싶었으니까.

“그건 뭐지?”
“매의 눈 사인이요.”

그날 오후였다. 크로커다일이 직접 조로를 찾아온 것은. 그는 오늘 하루 절대 안정을 거듭 당부하던 로우에 모처럼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덕분에 왼쪽 어깨에 밴드 형태의 보호대를 차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검은색 보호대는 왼쪽 어깨와 팔을 감싸고 반대쪽 겨드랑이에 걸치는 띠 형태였다.

“근데 왜 손에 쥐고 있나?”
“어… 그건…….”

크로커다일이 들어오는 소리에 몸을 일으키던 조로는 한 손에 두루말린 종이를 소중히 쥐고 있었다. 이를 의아하게 보던 크로커다일에 조로가 드물게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로우 걔가 나한테 줘놓고 탐내지 뭡니까? 걔가 매의 눈 사인 받는 건 일도 아닐텐데.”
“로우가?”
“예! 아까 나한테 이거 줘놓고 뚫어져라 노려보더라니까요.”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조로가 너무 확신하는 통에 크로커다일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미호크 사인만 아니었다면 너 하라고 돌려줬을 조로도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음이었고. 그래서 어디 숨길 데 없나 싶던 조로에게 크로커다일의 등장은 묘수처럼 보였다. 알라바스타에 다녀온 뒤의 크로커다일은 많이 수척해졌을지나 조로는 그를 믿었다.

“설마 이걸 나한테 맡기려고?”
“네, 크로커다일경. 믿을 데라고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매의 눈의 열렬한 팬이랬던가. 크로커다일은 로우가 푸념처럼 했던 말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 소중한 걸 맡아달라니. 제 뭘 보고 믿는다는 건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는 도피가 조로를 헤치도록 돕지 않았나. 이녀석은 그로 인한 상처를 어깨에 고스란히 달고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크로커다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조로는 크로커다일이 두루말린 종이를 받아줄 때까지 긴장한 얼굴이었고. 이어 그는 한줄기 모래바람이 종이를 낚아채더니 크로커다일의 재킷 안쪽으로 스며들 때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책임지고 잘 맡아두마.”
“감사합니다, 크로커다일경. 그러고 보니 손은 다 나은 모양이네요? 로우가 치료해준 거죠?”
“그래.”

대답과 함께 크로커다일은 손에 들고 온 검을 침대에 던졌다. 그건 오늘 아침 젊은 왕의 오른팔에 박힌 검이었다. 순백의 도파(검 손잡이)를 자랑하는 이것읏 조로가 가장 아끼는 검이었다. 어린 시절의 깊은 우정이 담긴. 때문에 그는 크로커다일이 직접 돌려주러 온 검을 반기듯 몸을 기울였다.

“이거 돌려주러 직접 온 겁니까? 몸도 안 좋으신 양반이.”
“그래.”

침대 옆에 선 크로커다일에게서 뻗어나온 모래가 화도문일자의 도초(검집)를 날렸다. 그것을 가뿐히 받아든 조로가 도초에 검을 돌려놓으니 한 몸인 양 꼭 맞아들어가는 감각이 손끝을 울렸다. 조로는 검술 연습을 하고픈 마음이 솟는 걸 느꼈다.

“마음은 알겠다만 오늘은 자중해라. 로우를 생각해서라도.”
“경은 진짜 로우를 아끼시네요.”
“…그래보이나?”
“예, 그래서 경이 있으면 폐하께서 난동을 부려도 안심입니다. 참, 폐하 상처도 로우가 치료해줬습니까?”

조로의 물음에 크로커다일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속이 후련한 듯 한심함이 담긴 미소는 오묘했다.

“웬일로 로우는 치료해주려고 했는데 도피가 거절했다.”

지금까지 비슷한 경우에 나타난 양상은 로우가 도피의 얼굴도 안 보려고 하는 거였다. 도피는 그런 녀석을 개의치 않았고. 한데 오늘 처음으로 반대 상황이 됐다. 무려 로우가 먼저 치료해주겠다 나섰으니까. 이를 거절한 건 도피로 그는 궁정의의 치료를 선택했다.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 수리를 마친 북궁에서 크로커다일은 도피의 답지 않은 행동에 혀를 찼더랬다. 로우는 한번 거절에 마른 숨을 쉬더니 일하러 가버렸고 말이다. 이로써 또다시 도피는 별볼일 없는 오메가한테 지고 만 꼴이라, 로우가 사라진 뒤 크로커다일은 모처럼 크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도피는 궁정의에게 치료받은 뒤 역모를 꾀한 귀족들을 가둔 지하감옥으로 향했다. 지금쯤 거기서 화풀이를 하고 있으리라.




로우는 이번에도 외부 일정에 베르고와 펭귄만 데리고 갔다. 당연했다. 새로이 동의 최고 귀족이 된 자의 축하연에 참석해야 했고 오늘 북쪽 제도에서는 준공식이 있었다. 둘 다 왕실 인사가 자리를 비춰야 했는데 인원이 적어야 로우가 능력을 쓰기도 좋지 않겠는가. 때문에 수행원으로 단둘만 데리고 간 로우로 인해 시종장은 오늘도 버려진 신세가 됐다. 더욱이 오늘부터는 그린비트에서 몸을 추스리던 왕세자비까지 와있으니 늙은이의 마음이 영 좌불안석이다. 이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왕세자비에게 바로 접근하자니 지은 죄가 있어 조심스러웠던 영감이 선택한 건 조로의 먼 친척이라는 아기씨였다. 그런고로 슈거는 현재 기분이 매우 좋지 못하다.

“뭐야, 영감.”
“예?”
“왜 따라다녀? 죽고 싶어?”
“그럴리가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저는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요! 저는 혹시 애기씨 필요한 건 없으신가 해서 그런 겁니다!”
“없으니까 가.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자든가. 가자, 나귀야!”
“아야! 아픕리다, 슈거랜드! 채찍 좀 그만 휘두르세요! 그리고 영감님한테 수레를 끌어달라고 하면 안 됩리까? 나는 조로랜드한테 가고 싶뜹니다.”
“아니, 수레를 끌기에 난 너무 늙었지! 아이고야… 무릎이며 허리며 안 쑤신 곳이 없네.”

아침에는 목숨의 위협을 받고 오후 늦게까지 슈거의 나귀 노릇을 한 워커는 불만이 많았다. 근 한달만에 보는 조로와 얘기도 제대로 못한데다 별궁이 다 지어진 마당에 슈거는 돌아가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왕자궁이 더 재밌다며 이곳에 눌러앉겠다 고집을 부리던 그녀에 로우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여줬다. 하비하비 열매의 특성상 나이를 먹지 않는 점에서는 차차 갖다붙일 이유를 생각키로 하고 말이다.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조로가 알면 펄쩍 뛸 일이지만 로우는 슈거에게 무른 데가 있었다.

“다들 여기서 뭐해?”
“조로랜드!!!”
“아앗! 너 내가 포도도 나눠줬는데 이리 안 와?!”

왕자궁 앞뜰에서 투닥대던 세명에게 다가온 건 조로였다. 검은색 어깨보호대를 찬 모습에 워커는 눈물바람으로 달려갔고. 덕분에 크게 요동친 어린이용 수레 위에서 겨우 중심을 잡은 슈거의 고함이 이어졌다. 제일 뒤에 서있던 영감은 작고 마른 몸을 더 움츠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도 조로 덕분에 제 목숨을 부지했음은 알고 있었다.

“조로랜드, 몸은 괜찮습리까? 근데 왜 여기 있습리까? 방에 있는 거 아니었습리까?”
“갑갑해서 산책이나 좀 할까 했지.”
“산책이요? 길을 잃은 건 아니고요?”
“내가 바보냐? 이제 왕자궁 정도는 혼자 오갈 수 있다고.”

왕자궁은 별궁 다음으로 작았다. 때문에 길을 외우고 말고 할 것도 없건만 이곳에 온 지 반년이 훌쩍 넘어서야 혼자 앞뜰까지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자랑이 분명한 목소리에 슈거가 똥 씹은 얼굴을 할 때도 워커는 장하다며 발치에서 방방 뛰어댔지만 말이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던 영감은 저로 말미암아 상처 입은 조로를 보며 송구스런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일국의 왕세자비가 한쪽 눈이 없는 흉한 몰골이라는 것에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걸리기도 했고. 이는 오로지 로우 왕자에게만은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짝을 지어주고픈 욕심 때문이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애지중지 키운 왕자 아니던가. 환난의 시대, 영감이 돈키호테 형제를 필사로 탈출시킨 죄로 모진 옥고를 견뎌온 건 궁 밖에서 더 고생스러울 왕자들을 보필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드디어 탈출을 감행했으나 영감에게 돌아온 건 형제 모두가 생사불명이라는 소식이었다. 고아인 그를 거둔 양부가 내린 가르침이라고는 오로지 두 왕자를 모시는 것뿐이었는데. 선대 폐하와 왕비께서도 그에게 마지막으로 두 아이를 부탁하지 않으셨던가. 한데 종의 걸음이 늦어 두 주인을 모두 잃었으니 살아서 무엇하랴. 그렇게 술에 절은 길바닥 거렁뱅이로 죽을 날만 기다리던 생을 다시 거둬준 것 또한 지금의 젊은 왕이었다. 이후 술독에 빠져 산 대가로 만성 간질환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뒀을 때는 열여섯의 로우 왕자가 살려주었고.

‘죽지 마, 영감. 내가 꼭 살려줄게.’

변성기로 인해 한층 걸한 음성에는 다정함이 넘쳐났었다. 이맘때의 왕자는 여전히 앳된 얼굴이나 일이년새 삼십센티를 훌쩍 커서 매일밤 성장통에 끙끙댔었다. 당시는 그런 왕자를 매일밤 찜질해주며 보살핀 것이 엊그제 같기만 한 영감이었다. 어린 왕자님께 돌봄받는 처지가 죄스럽기도 했고. 그럼에도 죽지 말라는 왕자의 말이 기꺼워 악착같이 살아남은 몸 아니던가. 왕자님의 신통한 능력으로 죽음이 확정됐던 만성 간질환도 싹 나을 수 있었고. 그 이후로는 로우 왕자의 말을 따라 술을 완전히 끊은 영감이었다. 로시난테의 죽음 이후 슬픔을 잊으려 다시 술독에 빠졌던 인사였건만. 그는 치료 직후 로우 왕자가 지나가듯 술 먹지말라고 한 한마디를 지금도 철썩같이 받들고 있었다. 이러니 로우 왕자의 후손을 보는 일이 영감에게 얼마나 중대한 일이겠는가. 그래서 지난날 베르고와 로우의 대화를 엿들은 뒤 영감은 초조함을 느꼈다고 했다. 이는 조로가 그린비트에 있던 한달 사이, 로우에게 무생물만 못한 취급을 받던 이가 안쓰러워 펭귄이 슬쩍 말을 걸자 영감이 눈물 찍어가며 한 소리였다.

‘왕자님께서 조로님 말고는 아무도 곁에 두지 않으시겠다하니까 애가 타지 않겠나… 그런 차에 조로님은 억제제를 가져다 달라시니 내 그만 삿된 욕심이 나서…….’

여기서 펭귄은 섣부르게 영감을 위로하는 얘기는 않았다. 그저 말을 들어줬을 뿐이나 로우에게 없는 취급 당하면서 열심히 쫓아다녔던 영감은 제 얘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한결 풀린 듯했다. 더 힘내서 로우를 쫓아다닌 것도 이 덕분이고. 하지만 오늘처럼 로우의 얼굴을 멀리서라도 볼 수 없는 경우라면 우울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허전함을 달래려 로우가 제일 많이 머무는 집무실이라도 하염없이 쓸고 닦을까. 오늘도 그러던 차에 앞뜰에서 노는 슈거와 워커를 발견한 거였다.

“영감은 염라를 왜 그렇게 봐? 눈빛이 불손한데?”
“아닙니다요, 그럴리가!”
“그 눈빛 안 고치다 큰코 다친다, 영감. …그러다 나한테 오면 진짜 죽는 수가 있고.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 그 무슨 섬뜩한 소리를……!”

열살 남짓해 보이는 청록색 단발머리의 여자아이가 슬며시 다가와 하는 소리에 영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영감 역시 백오십을 조금 넘은 덕에 두 사람의 높낮이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눈에 보이는 대로의 나이차를 고려하자면 말이다. 그래서 더 슈거의 복화술같은 협박이 위협적으로 느껴진 영감은 속마음을 들켰나 싶어 뜨끔했다. 저희 왕자님 곁에 완벽하고 흠결 없는 베필이 서기를 바라는 마음을 말이다. 조금 떨어져 있던 조로는 워커와 얘기하느라 이쪽 사정을 전혀 몰랐다지만. 그러나 무심코 마주친 시선에 조로는 먼저 활짝 웃으며 인사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영감이 사고를 친 이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이어 왕자궁 내에서도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일행이 앞뜰로 모습을 보이니 로우에게 지시를 받은 베르고가 젊은 왕을 찾아 훌쩍 나섰다. 그 뒤로 로우가 조로를 향해 뛰느라 영감을 스치듯 지나갈 때 슈거는 긴 다리로 느긋하게 걸음하던 펭귄에게 손짓했다.

“이리와 봐, 펭귄. 영감이 이상해. 아직 정신 못 차렸나 봐.”
“영감님, 또 사고친 건 아니죠?”
“아, 아닐세! 하늘에 맹세코 절대 아니야! 다신 절대로 왕자님께 누가 될 짓은 안 할 거라네, 나는!”

슈거의 말에 한량같던 이가 뛰듯이 다가와 속살댔다. 로우가 듣기라도 할까 심히 눈치를 보는 목소리였다. 영감 역시 목을 바짝 움츠리며 한달새 더 자글자글해진 얼굴이 어두워진다. 과하게 로우의 눈치를 보는 모양새가 안쓰러운 건 사실이었다. 조로 역시 이를 느꼈음인지 왜 나와 있느냐 잔소리하던 로우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너 왜 영감님 무시하냐?”
“뭐? 말 돌리지 마라, 조로야. 왜 나와있냐니까? 그리고 시종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내 마음이다.”
“누가 잘 지내래? 평소대로 하라는 거지.”

불쌍할 정도로 이쪽 눈치를 보는 영감님의 마음은 로우의 발등에라도 입술을 찍어대고픈 심정이었다. 평소의 그는 로우에게 밟히는 것조차 행복해했으니까. 그런 영감이 함부로 로우 옆에 다가오지도 못했으니 이는 심각한 문제 아닌가. 아마 병풍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으리라. 이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낸 조로는 해질녘의 보는 눈 많은 곳에서 로우에게 통할만 한 묘수를 생각해내야 했다. 그는 로우 곁에 녀석을 위하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기를 원했다. 이어 조로는 로우의 팔뚝을 움켜쥐며 까치발을 들고 귓가에 입술을 갖다댔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인 로우가 조로의 옆구리를 받치듯 잡아줬다.

“오빠…….”

이어진 말에 로우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오른다. 영감 얘기를 꺼내자 사납게 치떴던 눈꼬리가 내려가는 것이 순하기 짝이없었고. 이때 둘의 발치에서 유일하게 얘기를 듣던 워커만이 점점 낯빛이 썪어들어갔으니 그는 조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슈거 쪽으로 달려왔다.

“너 왜 이리 오냐?”
“이쪽이 더 낫겠뜹니다.”

슈거의 빈정거림에 워커는 나귀를 자처하듯 수레 앞으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정말이지? 혹시 나중에 무를 생각 마라.”
“남아일언중천금이다.”

역시 저쪽의 두 사람도 짧은 대화를 주고 받으니 조로의 확언을 끝으로 로우가 돌아섰다. 내키지 않는 얼굴이나마 저를 향한 시선에 영감은 감격한 얼굴이었다. 그런 영감을 향해 로우는 어릴적과 꼭 같은 뚱한 표정으로 말하는 거였다.

“다녀왔어, 영감.”
“예… 예… 왕자님, 무사히 다녀오셔서 다행입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사이로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니 마디가 뭉툭하고 거친 손으로 이를 급히 훔쳐내던 영감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저희 왕자께서 왜 저 이를 베필로 점찍었는지 그도 알았음이다. 마음이 저리 곱고 넓은 분인데 어리석은 놈이 이를 몰라봤음 아니던가. 끝내 버릴 수 없던 못난 마음도 로우의 인사 한번에 거품처럼 사르르 사라져버린 영감은 다시금 다짐했다. 남은 생을 바쳐 두 주인내외를 섬기자고 말이다. 이제야 다행이라며 초라한 어깨를 토닥여주는 펭귄의 목소리와 함께 붉은 노을이 진 하늘너머로 달님이 고개 내미는 저녁은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한조각
2024.05.06 19:27
ㅇㅇ
모바일
센세오셔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Code: 1f63]
2024.05.06 19:44
ㅇㅇ
영감 계속 못마땅했는데.. 조로가 생각하는게 맞지ㅠ 근데! 10주년 탈출계획 아직 버리지도 못했으면서 로우 곁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기를 원한다니 그게뭐야ㅠㅠ 니가 있어주면 돼잖아!!ㅠ 조로 다치니까 로우 이제 평정심 유지도 안되고 완전히 무너지는거 좋은데.. 좋은데 큰일이야 진짜 큰일이네 다음에 조로 다치거나 납치되기라도하면 로우는 진짜 세상 다 부숴버리고 자기도 부셔버리겠는걸 ㅠㅠ
[Code: 1f63]
2024.05.06 23:41
ㅇㅇ
모바일
드디어 미호크 사인까지 겟!!ㅋㅋ 근데 샹크스 잘부탁해 언제 썼어 역시 재간동이ㅋㅋㅋ 그나저나 워커 뭔 얘기를 들었길래 자발적 나귀가 된다는 리액션이었을까아아??(ФωФ) 또 무슨 야한 얘기 한거야 무지렁이 조로야??? 응??
[Code: 8b2a]
2024.05.06 23:50
ㅇㅇ
조로덕에 살았는데도 '일국의 왕세자비가 한쪽 눈이 없는 흉한 몰골이라는 것에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걸리기도 했고.' ㅇㅈㄹ 쒸익쒸익!!!!!!!! 개빡치는데 하.. 그래도 조로가 오빠오빠하면서 로우한테 뭐해줄지 궁금하니까 영감님은 거기서 계속 충성하고계세요 로우가 처음부터 영감에게 조로를 나 대하듯 하라고 제대로 한마디해뒀으면 좋았을껄.. 하는 생각이 이제서야 들긴하지만ㅠ 그 덕분(?)에 로우의 조로의존증은 심연으로 떨어진거같아서ㅎ.. 앞으로가 아주아주 걱정되고 기대되서 나죽어요 센세.. 알러뷰!!
[Code: 58f5]
2024.05.07 09:03
ㅇㅇ
모바일
후 너무 좋은걸 보면 방금 뭘 했는지도 까먹고 보고 또 보고 한 말 또하고 한다는데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후 너무 좋은걸 보면 방금 뭘 했는지도 까먹고 보고 또 보고 한 말 또하고 한다는데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후 너무 좋은걸 보면 방금 뭘 했는지도 까먹고 보고 또 보고 한 말 또하고 한다는데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Code: 9842]
2024.05.07 11:34
ㅇㅇ
젊은왕이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할 정도로 당장 죽어버릴 듯 위태로운 얼굴의 로우라니ㅠㅠ 어떡하냐 조로야 너 이제 로우 못떠나.. 떠나지말어ㅠㅠ 탈출계획같은거 갖다버리라고ㅠㅠ 평생 누구에게도 사인같은 거 해준적없는 미호크도 로우가 부탁하면 들어주는데.. 조로는 눈알이 빠지고 얼굴, 가슴에 커다란 흉터 달고선 목 졸린 손자국에 이제 막 탈골된 팔까지 맞춰놓고 그저 로우가 받아준 8절지 싸인 보고 좋아죽는다ㅠㅠ 로우는 이미 한번 죽어가는 조로를 눈에 담아버려서 이젠 정말 조로가 없으면 같이 죽어버릴꺼같은데 아니 이미 한번 같이 죽은거나 마찬가지아냐?ㅠㅠ
[Code: 2876]
2024.05.07 11:35
ㅇㅇ
크로커다일도, 사실은 젊은 왕도 모두 로우를 이렇게 아끼는데 로우는 이제 조로만을 위해 죽고 살 거 아냐.. ㅋ ㅑ.. 대존맛! 그러든지 저러든지 아파서 누워있어도 소중한 미호크 사인 손에 들고 누워있는 조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 또 그걸 대뜸 크로커다일에게 맡기는 조로ㅠㅠㅠㅠ 이제 로우는 조로없으면 주변 사람들까지 다 떨어져나가겠는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우가 도피 치료해주러간건 역시 조로가 말해서일까? 로우가 벌써 거기까지 조로를 위해 생각하게된거???? '마음이 저리 곱고 넓은 분인데 어리석은 놈이 이를 몰라봤음 아니던가.' 영감도 정신차려서 다행이야ㅠㅠ 도피가 영감 살아있어서 조로 살려준 것도 진짜 와... 인생지사 새옹지마가 이런거구나ㅠㅠ 내마음도 따뜻해ㅠㅠㅠㅠ 센세 사랑해ㅠㅠ
[Code: 2876]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
글쓰기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