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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5 23:23






연애는 눈치싸움이다. 





" 우성씨, 자꾸 고개 돌리면 안 돼요. "

" 아, 죄송해요 쌤. "


 

분장팀의 주의에 다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정면의 거울을 바라보면서도 우성의 온 신경은 극장 복도 쪽으로 쏠려있다. 아무렇지 않은척하며 영혼 없이 카톡 친구 목록만 죽죽 내리던 우성은 복도를 울리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에 숨을 멈추고 신경을 집중한다. 그러면서도 행여 누군가 제 행동을 이상하게 볼까 봐 괜스레 핸드폰을 분장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눈치를 본다. 정작 주변 사람들은 각자 제 할 일에 바빠 우성이 지금 어디에 정신이 팔렸는지 관심도 없다. 우성은 집중하는 척하며 분장대 거울로 비치는 출입문에 시선을 둔다. 마침 자그마한 뒷모습 하나가 분장실 앞 복도를 지나 상수 쪽 출입구로 향하는 게 보인다. 우성은 속으로 가만히 초를 센다. 


 

1....2.....3....


 

저거 봐. 10초 뒤 역시나 익숙한 뒷모습 하나가 정확히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게 보인다. 벌써 오늘 제가 본 것만 두 번째다. 오늘뿐만이 아니다. 이번 주에 극장 들어와서 제가 기억하는 것만 벌써 세 번이 넘는다. 처음 극장 들어온 날도 그랬고, 드레스 리허설 날 오후에도 그랬고. 혼자 손가락까지 꼽으며 되짚어 보다 그만둔다. 이러니까 제가 무슨 미친 스토커 같다. 마음 같아선 당장 자리를 박차고 쫓아가고 싶은데 심증만 있으니 누굴 붙잡고 하소연할 수도 없고 그야말로 정우성 혼자 지옥 불이다. 그런데 정우성 본인이 쉴 새 없이 땔감을 채워 넣고 있으니 속에 난 천 불이 꺼질 생각은커녕 활활 잘도 타오른다. 

누구는 정우성 보고 과민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고 누구는 별것도 아닌 걸로 혼자 소설을 쓴다고 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정우성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덤블링까지 하고 있다는 거다. 심지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저를 바라볼 현철이 형의 표정은 안 봐도 비디오다.      

하지만 사람이 인생을 살다 보면 '육감'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힘이 생겨날 때가 있다. 누구는 사지에 몰리거나 목숨이 걸린 급박한 순간에 발휘된다고 하는데, 아니다. 굳이 목숨을 걸지 않아도 온몸의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 신내림이라도 받은 듯 춤을 추는 순간이 온다. 그게 대체 언제냐고?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나. 그게 바로 '연애의 촉'이란 거다. 자기 전에 아무 생각 없이 인스타를 둘러보다 홀린 듯 생전 처음 보는 아이디가 유독 눈에 박힐 때, 단체 사진에서 유독 이름도 모르는 얼굴 하나가 시선을 잡아챌 때. 짝사랑 상대의 시선 처리 하나만으로도 누굴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촉'. 
 

그리고 단순히 같은 극장 복도를 지나가는 두 남녀의 모습만 봐도 쎄한 느낌이 뒷덜미를 타고 흐르는 지금 같은 순간 말이다. 한번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면 그게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라든가 그딴 말 어떤 새끼가 생각해낸 건지 만나면 죽여 버릴 거다.      


 

상수 쪽 무대 백스테이지 제일 안쪽의 비상문을 열고 나가면 큰 발코니가 있다. 일단 극장으로 들어오면 밥 먹을 때 말고는 극장 밖으로 나가는 게 마땅치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극장 내부엔 흡연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덕분에 극장 내 배우며, 스태프며 모든 흡연자들은 한곳으로 모인다. 셋업 다 하면 한 번 나가고, 밥 먹고 한 번 나가고, 공연 중엔 인터미션 때 한 번 나가고, 공연 끝나고 퇴근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나가고. 더구나 극장 감독님, 컴퍼니 사람들까지 왔다 갔다 하면 공연 중일 때를 제외하면 이 흡연실에 사람이 없는 때는 거의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백번 양보해서 정말 쓸데없이 촉각이 곤두선 정우성의 착각일 수도 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같은 흡연자들끼리 우연히 담타가 겹칠 수도 있지. 어디 흡연자가 한 둘이야? 사람들 쉬는 시간이 다 거기서 거긴데 우연히 텔레파시가 좀 통할 수도 있지. 우성은 지금에서야 - 물론,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제가 어째서 담배 피울 생각을 요만큼도 하지 않은 건지 후회한다. 그때 선배들이 권할 때 목 상한다고 빼지 말 걸. 흡연자들에겐 저들만의 시그널이란 게 있는 걸까. 옛날 무슨 광고처럼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같은 거? 


 

씨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당장 이명헌 핸드폰을 뒤져볼 수도 없고.    


 

" 명헌이 형이랑 서연누나, 뭐 있는 거 같지 않아요? " 


 

결국 못 참고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다.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그래 이참에 차라리 다른 사람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느끼는지 물어보자. 분명 이상함을 느끼는 게 저 혼자만은 아닐 거다. 우성은 최대한 눈을 내리깔고 별 관심 없는, 하지만 궁금함에 대한 동의를 구하듯이 가벼운 어투로 보이기 위해 있는 힘껏 연기력을 끌어모은다. 맹세코 첫 오디션 때도 이렇게 긴장하고 연기한 적이 없다. 그나마 배우라 다행이다. 분명히 지금 정우성 심박수를 재보면 150은 훌쩍 넘게 나올 텐데도 두꺼운 메이크업으로 뒤덮인 제 얼굴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런 우성의 마음과는 다르게 분장 쌤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우성 씨. 명헌 조연출님이랑 서연 씨가? "

" 뭐야, 뭔데? 우성 씨 뭐 들은 거 있어요? 나 궁금해! "


 

옆자리에 있던 보라쌤이 몸까지 돌려 관심을 표한다. 


 

" 아니, 조연출님 욕하는 건 아닌데. 서연 언니가 좀 아깝지 않아요? "

" 에이, 그건 선배가 몰라서 그래요. 조연출님 저번 공연에서도 인기 엄청 많았었대요. 여배우들 중에서 고백했다던 사람도 꽤 있었다고 하던데? "

" 나도 조연출님 좋던데. 일하실 때 진짜 멋있잖아요. 말투가 좀 깨긴 하지만. "

" 그게 매력 포인트 아니에요? "

" 그게 매력이라고? 뭐야, 나만 이상해? "

" 그래서 우성 씨, 뭔데. 그 얘기 왜 꺼낸 건데. 뭐 아는 거 있어요? "

" 아, 아뇨. 저도 뭐..그냥 해 본 말이에요 요즘 둘이 자주 담배 피러 가길래 하하.. "

" 에이, 난 또 뭐라고. 여기 담배 피는 사람이 한 둘인가. "

" 난 극장에서 둘이 있는 거 잘 못 본 거 같은데. "

" 근데 두 사람 다 만나는 사람은 없지 않아요? 그럼 뭐. 서연 언니도 예쁘고 조연출님도 멋있긴 하니까. 나름, 괜찮은 거 같기도? " 

" 서연 씨는 확실히 솔로라 그랬고...글쎄. 조연출님은 모르겠네. 사생활인데 물어보기도 좀 그렇잖아? "


 

정우성의 얄팍한 인내심이 결국 화제의 중심으로 사람들이 전혀 관심도 없던 두 사람을 끌어다 앉힌다. 결단코 악의는 없지만(심지어 쌤들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두 사람에 관해 쏟아지는 얘기, 단어 하나하나가 정우성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제가 판 구덩이에 손수 수의까지 마련해서 누운 꼴이다. 


 

" 우성 씨는 몰라요? 조연출님이랑 저번 공연도 같이 했었잖아요. 만나는 사람 없대요? " 

" 하하, 저 생각보다 조연출님이랑 그렇게 친하지 않아서... 쌤, 저 끝났죠? 수고하셨습니다- "


 

대충 얼버무리고 도망치듯 분장실을 나와 대기실로 올라간다. 한 걸음씩 계단을 밟을 때마다 온몸이 진동하듯 울린다. 안돼. 방금 메이크업 끝냈는데 바로 수정해 달라고 하면 분명 쌤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다행히 다른 형들은 무대 위에서 스트레칭하고 있을 시간이니 아마 대기실엔 아무도 없을 거다. 조연출님 지금 만나는 사람 없대요? 천진하게 묻던 보라쌤의 목소리가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그러게요, 쌤. 이명헌이 지금 썸 타는 사람이 누굴까요. 이 극장 전체 통틀어 아마 정우성이 제일 궁금할 거다. 우성은 시간 차를 두고 걷던 두 명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다 아니라고 하지만 우성은 다시금 확신한다. 정우성은 지금 작두라도 탈 자신이 있다. 분명히, 뭔가 있다. 그런데 고작 뒷모습 하나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그게 전 남친의 '촉'이란 거다. 

이것보다 확실한 건 없거든.

 

 

 

_

 

 

 

" 하아.... " 


 

우성은 대학로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며 한숨을 쉰다.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이 무겁다.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그런 불길한 꿈을. 꿈자리가 뒤숭숭해서인지 기상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시지 않는 여운에 그대로 누워 멍을 때리다 하마터면 제시간에 못 나올 뻔했다. 분명히 시계를 보고 몇 번 눈만 깜빡인 거 같은데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늘이 이번 작품의 첫 상견례 자리인데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다. 이제야 좀 괜찮아졌다 싶었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우성이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던 과거를 다시 재생해 주는 건 무슨 심본가. 심지어 너무 디테일해서 벌써 몇 달이나 지난 일인데 어제 겪었던 것처럼 쓸데없이 생생했다. 그때의 엿 같던 기억, 기분 전부 다. 뭐든 처음 시작이 중요한 건데 지금 정우성의 기분은 대학로 길거리를 굴러다니는 공연 홍보 전단지만큼이나 엉망이다. 미신 조금 더 보태서 이 공연, 느낌이 좋지 않다. 그래도 첫인사 자리니 늦으면 안 되겠지. 다운된 기분을 끌어올리려면 당 충전만 한 게 없다. 연습실 들어가기 전에 근처 편의점에 들르기 위해 발걸음을 틀었다. 정신 차리자, 정우성.  


 

" 네! 소연 씨! 그럼요, 벌써 와 있죠. 제가 누굽니까! 하하하! " 


 

뭐야, 목소리 되게 크네. 길거리 자기가 전세 냈나. 그런데 편의점 출입문 근처에서 어떤 남자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통화를 하고 있다. 지금 누구보다 심사가 꼬인 정우성은 괜히 속으로 투덜댄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으며 통화하는 남자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실 편의점으로 오는 골목 끝에서부터 남자가 눈에 띄었었다. 정우성도 일반인보다 키가 큰 편인데 남자 역시 우성만큼이나 키나 덩치가 컸다. 농구 선수라도 믿겠다. 심지어 신발도 조던이야. 머리색이랑 맞춘 건지 신발도 새빨갛다. 아님, 저 사람도 배운가. 인상이 강렬해서 오디션장이든 어디선가 마주쳤다면 모를 리 없을 텐데 처음 보는 얼굴이다. 뭐, 대학로 바닥에 배우가 몇인데 다 알 수도 없고. 우성은 별생각 없이 남자의 옆을 지나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아침부터 빈속에 커피는 좀 그렇고 탄산은 원래 안 좋아하고. 아, 그냥 삼다수나 살까 하다가 당 충전 때문에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마지못해 눈앞에 있던 바나나우유를 집는다. 바나나우유는 뚱바지. 원래 한 가지 맛이었던 거 같은데 요즘엔 메론 맛, 딸기 맛 뭐 종류도 다양하다. 그래도 오리지널만 한 게 없지. 


 

삑- 


 

" 손님 이거 1+1 행사 상품이라 하나 더 가져오세요. " 

" 아, 그래요? " 


 

편의점 직원의 말에 우성이 진열대 위에 있던 마지막 바나나우유를 집어 계산대로 향한다. 카드를 꽂고 결제하는데 그제야 통화를 마친 건지 문 앞에 있던 빨간 머리 남자가 들어와 우성의 뒤를 지나쳐 간다. 아, 원래 평소에 바나나우유 잘 먹진 않는데 남은 하나는 어떡하지. 얼결에 계산해 버리고는 그냥 딴 거 살 걸 그랬나 싶다.


 

" 죄송한데, 여기 빨대는.. "

" 눗?! "


 

그런데 직원도 우성도 별안간 냉장 코너에서 들리는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빨간 머리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방금 우성이 지나간 선반을 가리킨다. 뭔가 찾는 게 없나 보다. 


 

" 바나나우유 오리지널 다 팔렸나...요? "

" 아.... "


 

남자의 물음에 직원의 눈길이 우성의 손에 들린 우유를 한 번 우성의 얼굴을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빨간 머리 남자에게 향한다. 대답은 짧고 간결하다. 


 

" 네. 거기 없으면 다 팔린 거예요. "


 

아니, 저렇게 실망한다고? 직원의 말에 빨간 머리의 남자의 얼굴에 절망감이 덮친다. 분명 내 돈 주고 당당하게 사 먹은 건데 괜히 죄책감이 드는 기분에 우성은 얼른 편의점을 나왔다. 곧이어 남자도 바로 나오는 듯 문소리가 들리고 정우성의 뒤쪽으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하, 당 충전이고 나발이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우유 맛이 하나도 안 느껴진다. 됐어, 정우성. 뒤돌아 보지 마. 내 알 바 아니야.    


 

" 저기요. "

" 응? "

" 저 이거 하나 더 받아서 그런데 그쪽 드실래요? "

" 왁, 진짜?! 그래도 괜찮아? "


 

우성의 말에 실망한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까 편의점 앞에서 여자친구(겠지, 아무래도)와 통화할 때처럼 금세 싱글벙글이다. 한걸음에 성큼 다가온 남자에게 따로 챙긴 빨대까지 쥐여주며 우성이 어색하게 한 걸음 물러선다.  에, 뭐. 어차피 남는 거라. 그래, 기분도 뒤숭숭한데 인류애 챙기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자 싶다. 내 기분 그렇다고 각박해질 필요까진 없잖아. 어차피 연습실에서 만나는 누구라도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적당히 인사하고 각자 갈 길 가면 되는 건데 야무지게 빨대 꽂은 우유를 빨면서 남자가 우성의 옆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 진짜 고마워. 실은 내가 오늘 첫 출근 날 이거든. 근데 첫날에는 꼭 이 바나나우유를 먹어야 되는데.. "


 

궁금하지 않다. 남자는 우성이 별로 듣고 싶지 않은 tmi까지 난발하며 우성과 계속 발을 맞춰 걷는다. 그래, 뭐 가는 길이 비슷할 수도 있지. 근데 이제 그만 가 줬으면 좋겠다. 이제 두 남자의 앞엔 건물 하나만 남아있다. 오늘 우성이 전달받은 상견례 자리인 대학로 연습실이다. 그런데 남자도 우성과 같이 출입구 앞에 선다. 뭐야. 왜 자꾸 따라와. 인류애고 나발이고 그냥 우유 주지 말 걸. 사실 이상한 사람 아냐?! 우성이 의심의 눈초리로 제 옆에 선 남자를 쳐다보는데 웬걸 남자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우성을 쳐다보고 있다. 


 

" 어? " 

" 눗?! "

" 혹시 여기 지하 연습실 가세요? "


 

어, 너두? 야, 나두. 

 

 




 

" 롤란드 역을 맡은 정우성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자리에서 일어난 우성이 부채꼴 모양으로 나란히 앉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우성을 시작으로 옆으로 옮겨가며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한다. 


 

" 마리안 역의 이한나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 


 

2인 극 연극이라 배우들 소개는 단출하다. 우성은 제 옆자리에 다시 앉는 이한나에게 눈인사를 한다. 곱슬거리는 머리에 시원한 인상의 미인이다. 그녀가 자리에 앉을 때 유독 컴퍼니 한쪽의 박수 소리가 크게 들린 건 기분 탓인가 싶다. 배우 소개가 끝나고 주요 스태프들의 소개가 이어진다. 컴퍼니 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덥수룩한 스타일의 남자가 건들거리며 일어난다. 


 

" 제작 PD 정대만입니다. 아니, 뭐 어차피 거의 다 아는 사람들이고만 새삼 뭔 소개를. "


 

구시렁대는 정대만의 옆구리를 치며 눈치껏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일어난다. 곱슬 대는 머리카락을 왁스로 한껏 멋을 내어 올린 헤어와 캐주얼한 스타일이 웬만한 배우보다 눈에 띈다. 이한나의 자기소개 때 컴퍼니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박수를 친 장본인이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정우성이 아는 얼굴이었다. 


 

" 컴퍼니 매니저 송태섭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와, 태섭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송태섭과는 예전 대학로에서 알바하던 소극장에서 같이 일했었다. 숫기 없는 정우성과는 다르게 싹싹하게 호객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매회 공연 티켓을 매진시켜 티켓 부스의 전설로 통했었다. 회사 들어갔다더니 여기였구나. 가뜩이나 북산 컴퍼니와 일하는 건 처음인데 낯까지 가리는 우성은 아직까진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사실 하나 더. 


 

" 어. 강백호임다. "


 

우성과 정 반대쪽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빨간 머리의 남자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으며 일어난다. 아, 이름을 들으니 기억이 날 것도 같다. 좀 전까지만 해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연습 기간까지 몇 달간 함께 지낼 팀원이었다니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든다. 입봉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실력이 좋아서 조만간 감독 자리 하나 맡을 거라고 했던가. 반년 전인가 공연계 사람들이랑 술자리에서 얼핏 들었던 거 같다. 그게 이 공연인가 보다. 송태섭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강백호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최대한 작게 속삭인다.


 

" 감독님, 소개, 소개. "

" 아! 맞다. 무대 감독입니다. 잘 부탁함다. "


 

강백호의 실수에 어색하던 공기가 풀어지고 한두 곳에서 킥킥- 웃음이 터진다. 접이식 의자에 늘어지듯 앉아있던 정대만 피디 역시 대놓고 강백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낄낄댄다. 


 

" 강백호 저거, 낙하산인 거 티 내는 거 봐라. 야, 송태섭 안 되겠다 당장 채치수 감독한테 연락해. "

" 씁! 시끄러 만만쓰! 천재에게 낙하산이라니, 부정탄다! "

" 아이고- 그럼 오늘은 이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연습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고요, 배우분들 자세한 스케줄은 따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역시나 송태섭이 재빠르게 아사리판이 되려는 상황을 정리한다. 주로 대학로 중, 소극장용 공연을 진행하는 북산 컴퍼니는 실험적인 극과 좋은 배우들을 발굴해 내는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 이번 공연도 주요 스태프며 배우들이며 새로운 얼굴들 위주로 캐스팅했다고 들었다.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긴 하지만 그래서 우성에게도 첫 주연작이다. 스태프들도 다 비슷해 보여서 그런지 대학교 졸전 준비 같은 느낌도 든다.  

우성은 연습실을 나오며 대본을 다시 한번 뒤적인다. 연극 '별무리' 이미 해외에선 최우수 연극상을 받으며 호평받은 작품이라고 하던데 한국에선 초연이다. 평행우주의 두 남녀 이야기를 다루는 연극은 같은 장면을 매번 조금씩 다르게 연기해야 한다. 초연이라는 건 설레면서도 배우로서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다. 배우의 연기에 따라 대중에게 극의 이미지가 결정될 수도 있으니까. 


 

평행우주라.

만약, 그때 똑같은 상황이라면 다른 우주의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

 

그날따라 극장으로 출근하는 정우성은 유독 기분이 좋았다. 거의 몇 주만의 일이다. 파란 하늘은 온도와 습도가 적절해서 집에서 역까지 걸어가는 내내 상쾌했고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버스 환승까지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극장까지 평소보다 15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공연과 함께하는 사람들 모두 좋지만 차마 말 못 할 제 개인적인 연애사로 괴로운 이 시간도 이제 막공까지 3주 정도만 남았다. 그래 조금만 버티자 정우성. 이명헌 얼굴 볼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니 정우성은 그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달력에 X자를 그었다.    

 

그런데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이미 출근해 있던 분장팀이 분장실 앞 복도에 모여 웅성대고 있는 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다. 뭐지. 쌤들 표정이 묘하게 들떠 있는 게 심각한 일은 아닌 거 같긴 한데. 


 

" 뭐예요, 쌤들. 무슨 얘기 해요? "


 

때론 호기심이 개구리를 죽인다. 뭐, 어차피 나중에 바로 알게 될 사실이긴 했다만 정우성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만 대기실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분장실로 직진하고 말았다.


 

" 어머! 우성 씨 마침 잘 왔어요. 세상에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 그때 뭐 들었던 거죠? "

" 선배님은! 제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요. 둘이 분위기가 이상했다니까. "

" 무슨 소리야. 다른 배우들도 다 몰랐다는데 조연출님이 우성 씨한테만 얘기했던 거 아니에요? "


 

정우성의 심장이 불시에 바닥으로 쿵 떨어진다. 어쩐지 오늘 괴상하게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우성이 겨우 입을 떼고 묻는다. 목구멍에 가시가 꽉 걸린 거 같다. 이미 듣지 않아도 대답을 들은 거 같다.  


 

" 무슨 말이에요? 조연출님이 왜요? "

" 이명헌 조연출님이랑 서연 씨랑 진짜 사귄대요! " 



 

 

하, 씨발.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명헌우성
백호우성

2024.05.05 23:4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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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대작의 시작에서 센세를 뵙습니다....
[Code: 276e]
2024.05.06 19:32
ㅇㅇ
모바일
ㅁㅊ 대작의! 시작! 존나마히다 개마히다 헉헉
[Code: 50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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