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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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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는 이를 바득 갈면서 생텀 건물 밖으로 나섰다. 잔뜩 인상을 구긴 채 거리를 걷는 허니에게 이따금 사람들의 시선이 닿았지만, 그건 지금 허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하던 걸음은 허벅지 부근에서 웅웅 울리는 진동에 멈추었다. ‘웡' 이라는 글자에 허니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마음을 가다듬지 않고 전화를 받으면 이 불편한 감정이 목소리로 고스란히 전해질 것 같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댄 허니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여보세요?”
 

“아, 허니. 주변이 꽤 시끄럽군. 돌아가는 중인가?”


“네, 생텀 들렀다가 이제 가려고요.”


“물건은 잘 챙겼고? 내가 진작에 챙겼어야 했는데.”





 

허니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문 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방만 둘러봤을 뿐, 제가 지내던 방은 발조차 들이지 않았다. 결혼식 전날 모든 짐을 다 가지고 나왔으니 남아있을 물건은 없겠지.

결혼식. 그때까지만 해도 다정했던 구 남편(이자 쓰레기)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오른 탓에 허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니?”
 

“아,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중요한 건 저번에 다 챙겨 나와서 없을 건데, 혹시 발견하시더라도 그냥 버려주세요.”


“그래. 마음 잘 추스르길 바라겠네.”


“네, 웡ㄷ….”





 

허니의 대답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어떤 힘으로 인해 손에서 빠져나간 핸드폰이 거칠게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고, 커진 눈으로 그 모양새를 바라보던 허니가 고개를 휙 돌렸다.

도시에 내려앉은 안개보다 뿌옇고, 흐리멍텅한 눈동자를 잘 안다. 다음에 이어질 행동도.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덥썩 붙잡힌 손목이 붉어지고, 아려왔다. 손을 빼내려 할수록 남자가 더더욱 세게 붙잡고 비트는 탓에 쓸리는 살갗이 따가웠다. 어느 날의 밤처럼 혹은 낮처럼 남자는 술에 잔뜩 취한 채였다. 코끝을 찌르는 알코올 냄새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붉은 얼굴에 허니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래?”


“이거 놔. 다 끝났잖아.”


“나 없이 네가 퍽이나 잘 살겠다, 어?”


“왜 이래, 진짜!”





 

지나가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두 사람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흘끔거렸다. 다시 마주칠 일 없는 그런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허니는 바닥에 내던져진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문양으로 깨진 액정이 여전히 발신자 표시 ‘웡' 을 띄운 채 흘러가는 시간을 띄우고 있었다.

3분 31초, 32초, 33초…. 꺼지지 않고 여전히 빛을 쏘아대는 그 화면이 무서웠다.

웡은 좋은 사람이었고, 수련생들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비참하게 사는 이 삶을 알게 될까 봐, 실망할까 봐. 허니는 그게 제일 두려웠다.

허니의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남자가 헛웃음을 짓더니 비틀거리는 몸을 옮겨 보란 듯 핸드폰 액정을 짓밟았다. 한 번으로는 부족한 지 두 번, 세 번을 짓밟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다시 제게로 다가오는 걸음에 허니는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가 무어라고 또 고함을 치려는 순간,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타난 건장한 경찰 두 명이 양쪽에서 남자의 팔을 하나씩 잡고는 경찰차가 있는 방향으로 끌고 갔다.

그들에게 끌려가는 중에도 남자는 허니를 향해 소리쳤다. 너는 도망갈 수 없다, 내가 다시 찾아갈 것이다. 술이 깨고 나면 기억하지도 못할 말들을 허니에게 내던졌다.

남자를 실은 경찰차가 점점 멀어져갔다. 상황이 종료되자 금세 흥미를 잃고 흩어지는 사람들, 희미해지는 사이렌 소리 속에서 허니는 핸드폰을 주워 들어 조심스레 유리 조각들을 털어냈다.

툭 꺼진 검은 화면. 전화가 끊어져서 다행이었다.


 

-


 

하루 사이에 기분이 몇 번이나 바뀌었나. 슬펐다가, 추억에 잠겨 반가웠다가, 화났다가, 우울하게 마무리하는 하루라니.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운 허니는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파도를 온몸으로 맞은 것 같았다. 머리가 무거웠다. 가만히 두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허니는 등에서 울리는 진동에 화들짝 놀라 경련하듯 몸을 일으켰다. 처참하게 깨진 액정에서 발신자 ‘웡' 의 이름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생명력 진짜 끝내주네. 핸드폰의 내구성에 작게 감탄하던 허니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으로 바꾸었다. 통화가 원활하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여보세요?”


“허니. 자네 괜찮은 건가? 갑자기 전화가 끊어져서 말이야.”





 

그가 물은 건 핸드폰의 상태일까, 나의 상태일까. 허니는 무어라 대답할지 잠시 고민하다 적당한 말을 골랐다.





 

“음, 뭐… 괜찮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다른 게 아니고 내일 청소하기 전에 먼저 잠깐 생텀에 들렀는데….”





 

허니는 머뭇거리며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웡의 목소리에 무언가를 떠올렸다. 생텀을 뛰쳐나오기 전 바닥에 내팽개친 그의 일기장. 그걸 발견했을까?





 

“자네, 혹시… 스트레인지의 일기장을 봤나?”





 

뭐라 대답해야 할까. 웡이 일기장을 먼저 들먹인다는 건, 보지 않았다고 둘러대기엔 이미 늦은 거겠지. 허니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침대 시트 위에 고개를 푹 묻었다.





 

“죄송해요, 너무 궁금해서 그만…. 다는 안 봤어요. 진짜예요.”
 

“그렇다면 더욱 봐야겠는걸.”


“네?”


“스트레인지, 그리고 자네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도 읽었거든. 아, 물론 이게 바닥에 펼쳐져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읽게 된 거야. 오해는 하지 말게.”





 

웡이 변명하듯 주저리주저리 말을 길게 늘어놓는 걸 들으며 허니는 피식 웃었다. 스티븐 스트레인지와 웡, 그리고 저 셋이 아주 사소한 일을 두고 이건 네 잘못이네, 이건 네 탓이라 하며 서로에게 변명과 책임을 늘어놓던 지난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한테 변명하실 필요는 없어요. 제 일기장도 아닌걸요.”


“언젠가 저세상에 간다면 스트레인지에게 싹싹 빌어야겠네. 하지만 그 전에, 여기에 적힌 이름의 대부분이 허니 자네인데.”





 

허니는 다시금 일기장의 내용을 떠올렸다. ‘아, 이런.’ 그 짧은 감탄사 세 글자가 뇌리에 깊게 박혀버려 수많은 날의 내용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또다시 스멀스멀 밀려오는 두통에 허니는 미간을 찌푸린 채 퉁명스레 대답했다.





 

“예, 뭐. 그렇긴 한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 무슨 육아일기 같던데요.”


“자네 이걸 다 읽진 않았다고 했지? 글쎄, 내가 보기엔 이건….”


“괜찮아요, 웡. 그건 그냥 알아서 처분해 주세요.”


“흐음….”





 

어찌해야 하나 머뭇거리는 웡의 음성을 들으며, 허니는 다시 천장을 향해 보고 누웠다. 토독토독.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와 푹신한 매트리스 덕에 이대로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잠들 것 같았다. 오늘은 너무 피곤한 하루였으니까.

노곤한 기분에 허니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웡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실거렸다.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기 전, 현관 너머 퉁 하는 우편함 소리와 함께 아무래도 이건 자네가 읽어야 할 것 같다며 부드럽게 권유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바깥은 여전히 어두웠고, 빗소리는 조금 더 거세어졌다. 밤인 걸까, 아니면 하루가 지난 걸까. 아직 잠에서 덜 깨 몽롱한 탓에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몇 시인지 확인하려 핸드폰 액정을 건드렸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가버렸구나, 너도. 습기를 머금어 눅눅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하던 허니의 시선은 강한 바람에 요란한 소리를 내는 현관문으로 향했다.

아, 맞다.

허니는 그제야 생각난 듯 우산을 집어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밖으로 튕겨 나가듯 뛰쳐나갔다. 우편함 끄트머리에 삐죽 나와 있는 노트 하나. 웡이 결국 그의 일기장을 제게 주고 간 모양이었다.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면 슬리퍼 속으로 들어온 구정물이 발을 적셨다. 찝찝한 느낌에 우편함에서 노트를 쏙 빼내어 와서는 현관에서 일기장을 탈탈 털었다.

그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산 새 정장이 젖은 것보다, 오랜만에 미용실에 가 새로 한 머리가 엉망이 된 것보다, 그의 일기장이 축축하게 젖어버린 게 더 속상했다.

 

글씨가 다 번지진 않았을까, 펼치다 종이가 찢어지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드라이기로 따뜻한 바람을 충분히 쐬어주며 말리니 생각보다 훼손이 심하진 않았다.

웡이 직접 가져다주기까지 했는데 안 읽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남의 일기장을 읽는 것 자체가 예의는 아니지만….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지만 허니는 쭈글쭈글해진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2018년 4월 1일.

어제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제대로 된 기록도 하지 못했군. 허니 기분도 풀어줄 겸 오랜만에 둘이 외식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별이 많이 떴다며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길래 높은 건물 옥상으로 가 함께 별을 봤다. 애초에 기분을 풀어주려 나간 것이었는데, 언제 뚱했냐는 듯 기분 좋아 보였으니 성공적인 일정이었다. 그래, 정말 완벽한 하루였다. 그 작은 입에서 예상 못한 고백이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어린 마음에 품은 동경 같은 것일 테지. 십 대 때는 저보다 나이 많은 어른에게 품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착각을 많이 하니. 진짜 사랑이라고 해도, 짧게 지나가는 감정일 테다. 어찌 됐든 곤란하게 됐네, 이거.

 




 

그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할 하루일 것이다. 그에게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평생을 품고 갈 하루였다.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눈 대화를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저… 닥터. 할 말이 있는데요.”


“뭔데? 편히 말해도 괜찮아.”





 

긴장 가득한 제 모습에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건지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말을 건네던 그 목소리도 기억한다.





 

“닥터는… 저를 어떻게 생각해요?”
 

“흠…. 가끔 속을 알 수 없긴 한데, 아,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잘하고 있어, 허니. 네가 좋은 아이라는 건 나도 잘 알아. 열심히 하는 것도 알고.”


“…제가 좋아하는 것도요?”


“그럼, 알지. 밤마다 창문으로 하늘을 자주 올려다 보던데, 저 별들을 좋아하는 거겠지. 마법 배우고 싶어서 수련 시간에 얼쩡거리는 것도 아는데, 그러다 또 다치니까 조심해라.”


“닥터도 좋아해요.”





 

장난인 줄 알았던 건지, 그냥 챙겨주니 고마운 마음에 뱉는 말인 줄 알았던 건지 피식 웃던 그 미소도, 한껏 붉어진 얼굴로 입술만 꾹 깨물고 있던 제 모습에 ‘좋아한다' 는 게 당신이 생각하는 ‘좋아한다'의 의미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는 당혹스러움으로 살짝 벌어지던 그 입술도 기억한다.





 

“닥터는요?”





 

아무 말 없는 그 얼굴을 보고 알았다.
예상했으나 마주하고 싶진 않았던 대답이었다.






닥스너붕붕


 

2024.05.06 00: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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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센세 너무 좋아 근데 센세 너무 끊기 장인 아니야 뒤에 어떻게될지 너무 궁금한데ㅠㅠㅠ 일기장에 어떤 내용이 써 있길래ㅠㅠㅠ
[Code: 3666]
2024.05.06 01:10
ㅇㅇ
모바일
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닥터 일기장 죄다 허니였녀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27aa]
2024.05.06 01: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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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거아니냐 선생님 필력은 문학세계전집에 등록되어야 할 대작가의 숨결이 느껴져요. 선생님 어나더 와줘서너무 고맙고 행복하고 사랑하고 그렇습니다... 진짜 가슴 먹먹하게 센세의 무순을 사랑해요. 읽고 또 읽을게요. 사랑하는 센세
[Code: 13a5]
2024.05.06 11: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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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사랑해요
[Code: 02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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