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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가 결국 감기에 걸렸고, 회의하는 내내 콜록거렸어. 뺑글이 안경을 쓰고 마스크를 쓴 채 뽈뽈거리며 극장을 돌아다니는 건 마이크가 제일 좋아하는 모습이었고, 허니가 한때는 제일 보여주기 싫어하던 모습이었지. 지금은 킬킬거리는 마이크를 째려보며 작작 웃고 안경이나 닦아주라고 내밀지만 말이야.
둘이 친구이고 마이크가 여자친구가 있던 그 시절, 허니는 마음고생이 심했고 쓰는 작품마다 주인공에 제 자신을 투영하는 바람에 허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파다한 사실이었어. 마이크가 백날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았고, 제일 친한 저에게 알려주지 않아서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나중에 알고서는 저가 얼마나 허니에게 잔인했는지 깨달았어. 그리고 조금 후회했지.
"그렇게 입만 살아있을 거면 네가 직접 해, 연기."
"... 뭐?"
"어제도 네 입장 대변하다가 A랑 싸웠어. 중간역할 하는 것도 질렸으니까 네가 직접 하던지 하라고. 뭐 얼마나 더 절절해야 하는데?"
"절절은 바라지도 않아. 그걸 걔가 어떻게 구현해? 대사라도 제대로 외우는 성의를 보이라고 한 건데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들으니까 연출인 네가 말해달라고 하는 거잖아. 내가 말하면 연기지도 해달라고 밖에서 만나자고나 한다고."
"... 연기지도를 밖에서 해달라고 한다고. 개수작 같은데."
"... 뭐야. 표정 이상해. 나한테 딱 꼬라지 부리려고 하는 거 같은데 뭐가 됐던 내 탓 아니다, 어? 난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
"그게 누군데. 네가 내 여자친구 좋아해서 일부러 따로 만나려고 연기 지적하는 건지 어떻게 알아."
"... 너 진심이야? 내가 그정도라고 생각해?"
"제일 친한 친구한테 누구 좋아하는지 말도 안해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 아냐? 내가 널 어떻게 믿어?"
"... 나는 너 좋아한다고, 이 멍청아."
허니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도망가던 게 기억이 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이크가 뒤쫓아가려고 했지만 달리기가 어찌나 빠른지 보이지도 않았지. 연락만 안 받았나, 허니는 기숙사에 찾아가도 만나주지도 않았고, 수업 때도 구석에 앉아서 숨어있다가 호다닥 뛰어나갔어.
A에게 너 허니한테 플러팅했다며, 하자 술술 불었어. 걔 귀엽더라. 로 시작해서 자기는 쓰리썸도 괜찮다는 말에 둘은 개같이 싸우고 헤어졌어. 그리고선 허니가 극장에 뭘 찾으러 갈거라는 허니의 룸메이트의 말에 겁도 많으면서 혼자 떨면서 극장에 오고 있을 허니를 위해, 혹은 끝장을 보려고 허니가 물건을 종종 두는 극장 구석에서 한참이나 기다렸어.
"나 언제까지 피해다닐 건데?"
"... 아, 깜짝아!! 너 진짜 미쳤어?"
"나 헤어졌어. 애인도 없고 친구도 없는 건 너무하지 않아?"
"... 어쩌라고. 내가 헤어지라 했냐? 지가 성격 이상해서 애인만 잃을 거 친구도 잃어놓고 지랄이야, 나한테. 읍..!"
어두운 극장 구석에서 허니에게 오랫동안 몇번이나 입맞추고 나서야 제 마음을 깨달던 거 같아. A를 만나면서도 허니한테 자꾸 신경쓰이던 것도, 허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계속 궁금했던 것도, A가 허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기분이 나빴던 이유도 모조리 한꺼번에 깨닫게 된 거지. 둘이 사귀고 나서도 허니는 꽤나 오래 적응을 못했고, 첫키스는 얼떨결에 당하는 바람에 했지만 그 뒤로 스킨십 진도 나가는 건 좀 어려웠던 거 같아. 허니가 마이크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잘 못 믿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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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찔찔아. 여기 있으면서 작업실에 바이러스만 채우지 말고 집에 가자, 어?"
"킁, 가봤자 집에 아무도 없어. 안 갈 거야."
"... 우리집 가자. 너 좋아하는 스파이크도 있잖아."
"너 왜 나 꼬셔? 나 남자친구 있어."
"코 훌쩍거리고 캘록거리는 데다가 뺑글이 안경까지 쓴 애가 음흉한 생각까지 하네... 그리고 꼬시는 거 알면 빨리 헤어져."
"말도 안되는 소리 한다, 진짜..."
"자기야, 이별이 빠를 수록 우리한테는 좋아. 그리고 스파이크 어제 미용도 했다. 곰돌이컷인데 진짜 보러 안 갈 거야? 스파이크 요즘 엄마 못봐서 엄청 우울해하는데."
스파이크는 둘이 같이 키우던 사모예드야. 매번 헤어질 때도 당연히 산책은 번갈아가면서 시켰다. 말도 안되지만 개는 죄가 없다는 게 둘의 결론이었어. 곰돌이컷도 했다는 말에 요근래 스파이크를 못 본 허니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어. 좀만 더 하면 넘어올 텐데.
"진짜 안 가? ... 뭐, 어쩔 수 없지. 피터스에서 페퍼로니피자랑 핫윙 사갈 건데, 나 혼자 다 먹고 스파이크랑 산책도 하고, 모던패밀리도 봐야겠다."
"... 너 진짜 치사하고 못됐다."
"치사하고 못돼서 나 싫어? 나 진짜 너무 슬프다."
"... 나 손님방에서 잘 거야."
"알았어. 난방 틀어줄게."
만나는 사람이 있을 때도 허니가 조금만 미련이 남아보이면 넘어가던 마이크와 달리, 허니는 공식적으로 관계를 끝내기 전까지는 마이크가 어떻게 꼬셔도 절대 친구의 선을 넘지 않았어. 그래서 더 좋았던 거 같아. 저보다 올곧은 사람이라서. 그런데 이럴 때마다 마이크는 다시는 허니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렵기도 해. 자기는 그게 허니면 무조건 돌아갔는데, 허니는 아무리 마이크여도 돌아오지 않을까봐.
파이스트너붕붕
너무 좋다 센세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