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음악은 몇 없는 손님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잔잔함으로 테이블 사이를 돌았다. 유리컵에 가득 담긴 얼음이 녹아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 대는 소리를 낼 때까지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잠시간의 침묵 정도야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는데. 케니는 컵 표면에 맺히기 시작한 물을 이리저리 쓸어 올렸다. 주머니에서 얕은 진동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잔뜩 흥분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작은 금발의 머리통이 눈에 선했다.
"잘 지냈어?"
이 진동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해야 했다. 결국 뱉어낸 게 전 애인을 마주쳤을 때 절대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 대사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들법한 말이었다. 말을 뱉음과 동시에 후회되기 시작했다. 적어도 케니는 테리 먼로 앞에서는 더 이상 덜 자란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우, 멘트 구리다 자기야. 금방이라도 그렇게 대답할 것 같았던 테리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정말 그럴 리는 없지만 케니의 눈치라도 보는 듯 굴었다. 그때부터 이상한 반항심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안부나 주고받고 헤어질 생각이었다. 앞으로 꾸준히 얼굴 보게 생긴 만큼 괜히 불편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자꾸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케니로써도 방법이 없었다. 당장 내일부터 결혼식 준비의 시작이었다. 케니의 형 네이트와 테리의 동생 브랫의 결혼식이.
전애인을 마주치기에 가장 최악의 장소가 어딘 것 같아?
한창 무르익은 술자리에서 그런 질문이 나왔을 때, 다들 본인의 경험을 빗대어 피를 토하듯 성토하던 곳들이 있었다. 집 앞 분리수거장, 둘이 자주 가던 다이너, 수영장, 술집 화장실... 그때까지만 해도 연애 경험이 전무했던 케니는 그저 이야기에 몰입해 같이 표정을 찡그려가며 웃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케니는 누구보다도 큰 목소리로 외칠 수 있었다. 인생을 덜 살아봤구나 애송이들아, 그건 바로 형의 상견례 자리란다.
브랫과 네이트가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싶다고 알려왔을 때, 형제들은 당연히 찬성이었다. 벌써 한 집에 몸 붙이고 산 지가 1년이 넘어가고 있었는데도 나름 긴장했는지 브랫의 큰 손이 희게 질려있었다. 랜스는 그 꼴을 보고 아니 결혼 10년 차처럼 살아놓고 뭘 떨어, 하며 퉁명스럽게 굴었다. 네이트의 전역과 동시에 형제들의 삶에 녹아들기 시작한 브랫은 어느새 집안의 대소사까지 큰형과 함께 해결하며 집안의 어른 역할을 한지가 한참이었다.
반동거 비슷하던 연애는 3개월을 넘김과 동시에 브랫이 커다란 더플백에 짐을 싸서 쳐들어옴으로써 사실혼 비슷한 연애가 되었다. 그 사이 브랫에게도 형이 여럿 있다는 건 알게 되었지만 자주 만나던 레오를 제외하고 나머지의 얼굴을 보는 건 그 정식 상견례 자리가 처음이었다.
브랫만 봤을 때는 네이트 보다도 크고 나이가 많으니 마냥 어른 같았는데 그의 큰형이라는 버논과 레오 사이에 있으니 정말 막냇동생 다웠다. 새삼스러운 감상에 빠진 동안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오는 중이라는 셋째 형을 기다리는 동안 랜스는 레오와 착 붙어 얘기를 나누고 버드는 무섭지도 않은지 버논의 무릎을 타고 올라가 종알거리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였음에도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그건 네이트를 안심하게 만들었고, 케니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이고, 차가 막혀서 늦었습니다."
포근했던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문을 열고 나타난 브랫의 셋째 형이 30분을 늦어놓고도 방정스런 말투로 말해서도 아니었고, 큰 덩치를 구기고 건들대며 걸어서도 아니었다.
"...먼로?"
그 이름에 네이트, 랜스는 물론 브랫까지 휙 고개를 돌렸다. 케니는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때의 제 주둥이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아주 오랜만에, 아주 예외의 장소에서 마주친 전 애인을 테리? 라고 다정스레 부르기 싫었을 뿐이었지만 먼로라는 이름이 그의 집에서는 어떤 버튼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먼로. 3개월의 싸움과 썸, 1년의 연애, 이별 후 또 3개월.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케니의 입에서 저주와 함께 쏟아져 나왔던 이름이다. 가족들은 케니가 그 '먼로'때문에 얼마나 슬퍼했는지를 모두 알고 있었다.
"...케니?"
그 후로는 아수라장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브랫이 테리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케니는 맹세코, 브랫과 함께 사는 동안 그가 그렇게 흥분한 얼굴로 큰 목소리를 내는 걸 처음 들어보았다. 버논은 브랫이 떨치며 일어난 순간 무언가를 직감한 듯 버드의 작은 귀를 두손으로 막았다.
네가 왜 먼로야 테리 콜버트 이 개자식아!!!!!!!!
테리는 막냇동생이 자기를 너라고 부르든 개자식이라고 부르든 관심도 없는지 살짝 커진 눈을 오직 케니에게만 고정하고 있었다. 내가 일할 때 쓰는 이름이야, 테리 먼로. 브랫은 그걸 듣고 티비쇼에 나오는 사람처럼 뒷목을 잡았다. 티비에서 볼 때는 완전 과장된 행동인 것 같았는데 실제로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정말 곧 뒤로 넘어가 죽어버릴 사람 같았다. 랜스는 아니 그럼 그씨발새끼가우리레오동생이자형부의형이었다고?미친또보는눈은다똑같아가지고한집안고추를다털어먹었구나! 라고 외쳤고 콜버트 형제들을 훈훈하게 바라보던 네이트의 눈은 대번에 뾰족해졌다.
우리 나가서 얘기 좀 하자.
그리고 테리 먼로는, 테리 콜버트는 그딴건 다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케니의 손목을 끌고 그 지옥을 벗어났다. 패기 넘치게 끌고 나온 거 치고 어색하게 커피 주문을 마친 후로는 또 말이 없었지만.
"할 말이 뭔데."
그래서 케니는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이제 와 과거는 잊고 새 출발 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적어도 픽 가문에서 테리와 케니의 연애는 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피곤한 대화를 끝내도 집으로 돌아가면 또 피곤한 대화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게 힘들었다. 케니는 더 이상 피곤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왜 헤어진 거야?"
망설이듯 웅얼거리며 뱉은 말에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진심이야? 우리 헤어진 지 반년도 넘은 거 알지?"
신경질적으로 되받아친 말에 대답은 않고 정장 바지에 큰 손을 벅벅 문질러대는 꼴에 짜증이 치솟았다. 언제나 여유롭던 테리 먼로, 언제나 케니보다 세발은 앞서가던 테리 먼로, 언제나 능글능글 속을 긁어대던 테리 먼로, 한 번만 좀 진지해져 볼 수 없냐는 말을 죽어도 들어주지 않던, 너무 미운 테리 먼로.
그 테리 먼로가 기가 팍 죽어 조용히 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 너무 아니꼬웠다. 때려죽인대도 자기 뜻을 굽히지는 않던 남자인데. 그런 남자를 지난 반년간 변화시킨 누군가가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케니는 1년을 넘도록 매달려도 해내지 못했던걸 너무 간단히 해낸 사람이 있다면. 그럼 그 사람이 테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고, 테리와 케니가 한 건 아무 것도 아닌 소꿉장난이 되는 거니까.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저 놈이 딱 그짝이었다고. 더 이상 테리 탓을 하지도 못하게 되니까.
"이래서 헤어진 거야. 너는 아직도 우리가 왜 헤어진 건지 모르는 사람이라서. 그걸 반년이나 지나서야 물어보는 사람이라."
아까부터 굽어있던 어깨가 더 굽어들어 갔다. 케니는 속이 아팠다. 이러고 싶지 않아서 노력한 시간이 아주 긴데도 불구하고 결국 남 탓을 하고 있었다. 오롯이 케니 픽으로 서기 위해 노력했는데 여전히 테리의 케니인것처럼 굴었다. 다시 작게 심호흡을 했다.
"미안. 괜히 못되게 말해서. 널 탓하고 싶었던 건 아니야. 그냥... 너무 다르잖아. 나란히 평행선을 달릴 수도 있고 길을 좁힐 수도 있는 건데 우린 그게 안 됐어. 멀어질 땐 한도 끝도 없이 멀어지고, 가까워질 땐 서로 들쳐업으려고 했어. 테리, 우린 그래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어. 더 이상 너도나도 아프지 않았으면 했어."
노래가 끝나고 다음 노래로 넘어가기까지의 정적이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이제서야 완전히 이별하는 기분이었다.
슼탘 테리케니 약브랫네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