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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5 21:24
(다이루크 1인칭임)

천사의 몫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것은 케이아가 어떤 남성과 대화를 하고 있는 이상한 장면이었다. 기병대장이 술집에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것 자체는 자주 있는 일이다. 이상한 것은 대화 상대인 '어떤 남성' 쪽이었다. 바텐더로 고용된 적도 없을 터인 그는 어째서인지 카운터 안쪽에서 케이아에게 칵테일을 만들어 주고 있었고, 케이아는 그것을 경계심도 없이 넙죽 받아마시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자가 의심스러운 이유는 그의 용모가 다이루크 라겐펜더—나 자신과, 클립스 라겐펜더를 반반 섞은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 다이루크, 왔어?"

한 손에 칵테일 잔을 든 채 케이아가 손을 흔들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눈꺼풀만 살짝 들어올려 힐끔 보더니 케이아의 옆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 동작은 거의 거울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카운터를 향해 걸음을 내딛자 저절로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일단은 그들의 말을 들어 보자. 사정을 들은 뒤에도 수상하면 그 때 무력을 꺼내도 늦지 않다.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하려 길게 숨을 내쉬었지만 실은 어떻게 봐도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버지에게 형제나 친척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그럼 눈앞의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아무렇지 않게 케이아에게 오후의 죽음을 만들어 주고, 익숙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저 남자의 정체는 무엇이지? 하지만 질문을 입 밖에 내려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너는...아니, 나는 당연히 포도 주스를 마시겠지."

'나'라고, 똑똑히 말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낭랑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아하하, 이거 흥미로운 그림이 됐네. 현재의 다이루크 어르신과 미래의 다이루크 어르신이 한 자리에 있다니."

술기운에 얼굴이 기분 좋게 펴진 케이아가 활짝 웃고 있었다. 미래의 다이루크라고 불린 남자는 재미있어하는 케이아를 보며 피식 웃더니, 포도 주스를 따른 잔을 내게 건넸다. 연륜이 묻어나는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세월의 깊이가 언뜻 보이는 눈빛 때문인지 그의 웃음은 가을 볕처럼 온화했다. 나와 아주 닮은 얼굴로 케이아에게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기분이 여러모로 복잡했다. 

"...설명을 들어야겠군."
"케이아가 방금 말한 대로야. 난 다른 시간선에서 왔어."
"목적은?"
"경계하는 이유는 알겠지만, 더 설명할 건 없어. 나에게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니까."

그는 여전히 평화로운 얼굴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그다지 썩 내키는 설명은 아니었지만, 그를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느껴진 소름끼칠 정도로 기묘한 동질감이 설득력을 더했다. 그는 내가 납득하건 말건 괘념치 않는 눈치로 다시 케이아와 대화를 이어갔다. 케이아가 '출장'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저번에 다녀왔던 수메르 출장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사단의 동료들부터 다운 와이너리 사람들 것까지, 선물을 다 가져오는 것도 고생이었다고. 다들 기쁘게 받아 줘서 다행이지."
"여행을 자주 다녀 본 사람으로서 조언하자면, 짐은 최대한 늘리지 않는 게 상책이야."
"하지만 기념품을 사 오지 않을 거면 출장을 왜 가?"

케이아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남은 술을 홀랑 마셨다. 기념품 쇼핑을 위해 출장을 간다니 케이아다운 소리였다. 전부 가져오느라 고생했다고 불평은 하지만 오르모스 항구에서 선물을 일일이 고르고 포장하는 것도 녀석에겐 나름의 재미였겠지.

"그런데 말이야...그거 혹시 미래에도 계속 갖고 있어?"
"네가 줬던 수메르의 탁상등 말인가? 그거라면 여전히 내 서재의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어."
"잘 보이는 곳 말이지..."

케이아는 그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눈을 가늘게 접었다. 술기운으로 상기된 뺨이 꽃잎처럼 은은하게 붉었다. 아무리 미래의 나라고 하지만 정체가 불분명한 상대인데, 너무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주는게 아닌가? 고개를 휙 돌리며 포도 주스를 들이키려는데 괜히 퉁명스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게 어딨는지 궁금하다면 다운 와이너리에 자주 오지 그래?"

 케이아는 말문이 막히는지 조용해졌다.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은 생각까진 없었기에 약간의 후회가 들기 시작할 때쯤, '미래의 나'가 대신 중재에 나섰다.

"그 말이 맞아. 케이아, 그냥 쉬는 기분으로 다운 와이너리에 와도 좋아. 거긴 네 집이니까."
"집..."

케이아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한 치의 쑥스럼도 없는 것처럼 다정한 소리를 줄줄 뱉어내는 미래의 나를 보니 낯이 뜨거웠다.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에 저렇게 된 걸까. 무엇보다도 낯간지러운 것은 그가 케이아를 바라보는 눈빛이다. 아까 전부터 케이아를 한없이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저 눈빛... 보통 사람들이 봤다면 따뜻한 눈빛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의 감상은 다르다. 나 자신을 아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눈빛 뒤에는 한 꺼풀의 얇은 집착이 감춰져 있었다. 

'수상하군...'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는 새 칵테일을 만들어 케이아의 앞으로 밀었다. 맑은 풀빛을 띠는 오후의 죽음과 완전히 똑같은 색깔이었지만 전통적인 레시피에는 없는 레몬 조각이 장식되어 있었다.

"오, 또 오후의 죽음이야?"
"이건 새로운 버전의 오후의 죽음이야. 레몬 껍질과 나만의 비법을 추가했지. 고심해서 만들었어."
"미래에는 어르신이 이런 특제 칵테일도 만들어 준다고? 하하, 늘상 주스만 주는 누구랑은 다르네."
"그런 것보다 주스가 더 맛있어."
"현재의 다이루크 어르신, 혹시 질투해?"

케이아는 놀리는 의도가 다분한 말투로 웃었다. 부정할 가치까지도 느끼지 못하고 '흥' 소리를 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냥 흘려들을 것이 아니었다. 그가 케이아를 향해 따스한 눈빛을 보내고 숨김없이 다정하게 굴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서 느껴지던 이상야릇한 거북함. 그것을 질투라고 부른다고 해도 아예 틀린 소리는 아닐 것이다. 나 자신에게 질투를 느끼다니, 답도 없는 짓이었다.


*

"다음으로는 뭘 하고 싶어?"

미래의 다이루크 라겐펜더가 천사의 몫을 나서며 케이아에게 물었다. 케이아는 오늘 그와의 데이트에 하루 꼬박 어울려 줄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분명 나이 든 모습의 나를 보고 흥미가 돋아 관찰하고 싶은 마음에 그런 약속을 덜컥 해버린 거겠지. 재미있는 일이라면 금세 어린 시절처럼 신나하는 녀석이니까. 그리고 그 데이트는 이제 나까지 포함한 세 명의 합동 데이트가 되어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미래의 나'라는 수상한 사람 곁에 케이아 혼자만 달랑 붙여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 

"글쎄, 오랜만에 바다라도 보러 갈까?"
"그러지."

케이아가 가볍게 던진 제안을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언뜻 보면 케이아가 그에게 어울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케이아의 하고 싶은 일에 맞춰 주는 모양새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모처럼 과거로 온 것일 텐데, 딱히 하고 싶은 일은 없는 건가.

'만약 내가 과거의 평화로운 날들 중 어느 하루로 돌아가게 된다면...'

머릿속에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다운 와이너리가 떠올랐다. 마당에는 새하얀 이불이 나부끼고 있었고, 그 뒤에서 어린 케이아의 수줍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하고 손을 뻗은 순간, 점심을 먹자며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날로 되돌아간다면... 딱히 더 하고 싶은 일은 없을 지도.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니 그의 심리가 이해될 것 같아 나는 잠자코 해변까지 따라 걸었다.    

바다를 보기만 할 것처럼 말했던 케이아는 어느새 뽀얗게 물거품을 몰고 달려오는 얕은 파도에 발을 첨벙 담갔다. 저러다 곧 쫄딱 젖어 나올 것이 뻔했기에 몸을 데울 수 있는 장작불용 나무를 좀 주워 오려고 하는데, 미래의 모습을 한 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같은 다이루크인 것을 확인하듯 동시에 똑같은 생각에 다다른 것이었다.

"나무는 내가 주워올 테니 당신은 케이아랑 있어.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잖아?"
"...고맙군."

그는 눈을 크게 뜨더니 옅은 미소로 대답했다.



잠시 후 그는 케이아의 물장난에 잔뜩 당해 모래사장으로 나와 겉옷을 벗고 있었다. 마른 가지에 불을 피우며 힐긋 본 그의 몸은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탄탄했지만 흉터가 늘어 있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아버지의 뒷모습이 겹쳐 보이는 실루엣이었다. 
 
'내가 저렇게 늙어간다니...'
"나를 보면서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과거의 나."

그가 팔짱을 끼고 말하자 무의식중에 빤히 쳐다보고 있었음을 자각하고 헛기침을 했다. 사실 저런 모습으로 나이가 든다면 영 싫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 그가 정말 미래의 나라면, 궁금한 것이 있었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이미 겪은 입장에서 과거의 자신...그러니까 지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는 없는 건가. 후회 되는 일이라든가."

예를 들면, '성인식 날을 조심해라.'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충고는 소용이 없을 거야. 나와 만났다는 변수가 생겼으니까, 앞으로 자잘한 것들이 변하겠지. 작은 변화는 큰 변화로 이어질 거고."
"나비 효과...라는 건가. 이해했어."
"하지만 개인적으로 충고해주고 싶은 거라면, 하나쯤은 있어."
"어떤 충고지?"
"네가 몸을 사리지 않는다는 건 내가 잘 알지만..."

그는 나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목덜미부터 어깨를 완전히 뒤덮고 날개뼈까지 이어진 흉터를 가리켰다. 이 정도 상처를 입었었다면 어깨 관절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뼈들이 모조리 재조립된 수준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되도록이면 이런 상처는 입지 않도록 해. 비가 올 때마다 오른쪽 어깨가 쑤셔서 고생하기 싫으면."
"흠...주의하도록 하지."
"됐어. 나라면 방금 대충 흘려 들었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흥."

같은 다이루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그와의 대화는 어쩐지 편했다. 장작불이 안정적으로 타들어가고, 야트막한 언덕 쪽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오늘따라 바다의 물결은 잔잔했다. 그는 한동안 멀리서 조개를 줍는 케이아를 눈으로 좇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건 꼭 가슴에 새겨줬으면 좋겠군."

자상하지만 진중함이 더해져 어딘가 거절하기 힘든 목소리였다. 연하게 물들기 시작한 노을이 그의 눈에 투명하게 차올랐다. 새벽이라는 이름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황혼의 모습을 닮아가게 되는 걸까.

"케이아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도록 해. 서로에 대해 깊이 알고 감정의 응어리를 푸는 건 너에게도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야. 하나 뿐인 가족이잖아?"
"..."
"그리고 언젠가 그게 운명을 바꿀 지도 모르지."

그의 말을 곱씹는 사이 케이아가 젖은 모래를 밟으며 다가왔다. 역시나 머리카락 꼬랑지까지 소금물에 적셔 온 녀석은 장작불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여름은 아니었기에 해가 기울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꽤나 쌀랑했다. 양 팔을 끌어안고 문지르며 몸을 데운 케이아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다이루크, 손 내밀어 봐."

두 명의 다이루크가 동시에 손을 내밀자 케이아는 배를 잡고 바닥을 구를 기세로 한바탕 웃었다. 케이아가 부른 것은 내가 아닌 미래의 다이루크였는지, 그의 손바닥 위에 소라 껍데기가 올려졌다. 둥그렇고 곱게 마모되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소라 껍데기는 가만히 놓여 있는 것만으로 예쁜 장식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자인 어르신에게는 별 거 아니겠지만, 과거의 바다에서 주운 거라면 특별하겠지."

그는 손바닥 위의 소라 껍데기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고마워, 케이아. 돌아가서도 소중히 간직하지."

솔직한 감사 인사에 케이아는 멋쩍은 웃음으로 답했다. 이러면 내밀었던 내 손만 썰렁하지.

"내 거는?"
"알았어, 너한테도 주면 되잖아. 자."

케이아는 손에 남은 두 개의 조개 껍데기 중에서 고민하더니, 어느 하나를 골랐다. 그 둘의 차이는 잘 모르겠지만 무늬가 조금 더 선명한 쪽을 준 것 아닌가 하고 예측할 뿐이었다.

"...고마워." 

연달아 두 다이루크에게서 감사 인사를 듣자 케이아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사실 저 녀석, 처음부터 사람 수대로 껍데기를 주워 온 것이 아닐까?

불을 쬐며 옷을 어느정도 말린 뒤 우리는 함께 일어섰다. 그 전까진 알아채지 못했는데, 나란히 서 있으니 미래의 다이루크가 나와 케이아보다 키가 약간 더 큰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케이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아직 분발해야겠어, 다이루크.'같은 소리를 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는지 미래의 자신에 대해 물었다.

"어르신이 온 곳에서 나는 어떤 모습이야? 설마 몰라보게 변해 있는 건 아니겠지..."

구체적인 말은 없었지만 점점 흐려지는 말투에서 케이아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혹시나 자신이 혈통 문제로 외모나 신념이 변해버린 것은 아닌지 돌려 묻고 있는 것이었다. 눈치를 보니 미래의 다이루크 역시 케이아의 걱정을 짚어낸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들어올리더니 눈을 가린 케이아의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겼다.

"케이아는 먼 미래에도 계속 변함없는 모습이니까, 걱정 마."
 
그 말의 진위 여부를 내가 감히 판단할 수는 없었다.



바다에서 에너지를 쓰고 나니 배가 고파져 우리는 다음 행선지를 디어 헌터로 정했다. 몬드성에 도착했을 무렵, 하늘은 완연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성문에서는 보초를 서는 기사들이 교대를 하고 있었고, 상인들은 가판대를 정리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거리의 활기는 줄어든 대신 창문마다 아늑한 빛이 흘러나오는 이 시간대에 낮보다 조금 더 북적거리는 곳이라면 술집이나 레스토랑 정도였다. 

"디어 헌터 레스토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몇 분이세요?"

종업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야외 테이블의 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모처럼이니 나와 케이아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며 메뉴를 따로 시키지 않고, 종업원에게 충분한 팁을 건넨 뒤 몇 가지 식재료와 바깥에 있는 조리대를 빌렸다. 여행자가 종종 하는 것처럼 말이다. 편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지만 케이아는 요리하는 다이루크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슬그머니 자리에서 엉덩이를 일으켰다.

"귀찮게 굴러 갈 셈인가."
"왜, 질투나?"

케이아는 짐짓 얄미운 척을 하며 눈을 찡긋거리더니 요리를 하는 다이루크에게 총총 가버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케이아가 귀찮게 굴어줄 때 내심 기분이 좋다는 것을 본인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나는 굳이 케이아를 막지 않았다. 케이아는 그의 등에 찰싹 붙어 섬세한 요리 실력을 구경하다 가끔 재료 손질을 돕거나 잡담을 걸었다. 미래에서 온 다이루크는 손이 바쁜 와중에도 한 번도 케이아의 말을 놓치지 않고 받아주었다. 분위기만 보면 오히려 저 둘의 모습이 어릴 때의 우리와 닮아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지금껏 지나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 관계도 조금씩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마음이 놓였다.

잠시 후 케이아는 그와 함께 음식을 날라왔다. 나는 대충 그가 제일 자신 있어 할 터인 몬드의 스테이크 종류를 만들었겠거니 짐작했지만, 테이블에 차려진 식사는 상당히 호화로웠다. 높이 쌓기부터 연꽃 파이, 피시 앤 칩스, 과일 트리오까지 다양한 국가의 음식이 저마다 먹기 좋은 때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치 이국의 요리를 따로 배우기라도 한 것 같은 솜씨였다.

"다이루크 어르신은 나이가 들면 만능이 되는구나. 이거 앞으로 잘 보여야겠는걸?"

케이아는 그렇게 말하며 괜히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언제쯤 이런 요리들을 배워올 지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수상하리만치 요리 실력이 좋은 미래의 다이루크는 미소를 지으며 케이아의 앞접시를 가져가 먹음직스러운 생선 튀김을 듬뿍 덜어주었다.

"당신은 케이아를 너무 애 취급하는 것 아닌가?"
"하하, 그런가. 하지만 맛있는 온도일 때 빨리 먹어줬으면 해서."
"또 미래의 자신에게 질투하는 거야? 다이루크도 참, 몸만 큰 어린애라니까."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하는 식사는 참 오랜만이었다. 예전에는 나와 케이아, 그리고 아버지가 함께 했던 자리에, 지금은 아버지 대신 '미래의 나'가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예상컨데 이 기분은 케이아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다이루크, 근데 넌 나랑 다르게 생선을 싫어하지 않아? 어떻게 생선 요리를 이렇게 맛있게 했어?"

케이아의 말대로 나는 생선 요리를 즐기지 않는다. 높이 쌓기를 다 먹는 동안 피쉬 앤 칩스에는 손이 가지 않았을 정도로.

"흘호어 구이는 여전히 별로지만, 이렇게 튀기면 먹을 만하더라고."

하지만 미래의 내가 하는 말이니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나는 생선 튀김을 접시로 조금 덜어가 맛을 보았다. 선호하는 맛은 아니었지만 못 먹을 정도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튀김의 완성도가 뛰어나서 잘 만든 요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디저트인 과일 트리오는 모두의 입맛에 맞았다. 머랭 층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와 혀 끝에서 터지는 풍선귤의 상큼함, 잘 구워진 타르트의 고소함과 마지막에 남는 은은한 꽃향기까지, 식사의 마지막으로 손색이 없는 디저트였다. 


*

어느덧 하늘의 색은 어둠으로 짙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정처 없이 성내를 산책하던 우리는 빙빙 돌아 다시 천사의 몫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가로등의 불이 팟- 켜지고,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던 케이아는 마침 그를 바라보고 있던 미래의 다이루크와 눈이 마주쳤다. 
 
"어르신?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윽..."
"무슨 일이야!"

별안간 그는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깊게 숨을 몰아쉬느라 등이 크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케이아는 그를 부축했고, 나는 의자를 빼어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적당히 숨을 돌린 그는 방금 전의 일에 대해 설명했다.

"내 몸이 원래 있던 시간선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는 거야. 처음에 여기로 왔을 때도 그랬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그는 손을 뻗어 걱정스레 쳐다보는 케이아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굳은살이 잡힌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칼이 스쳤다. 그가 언젠가 돌아갈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고작 한나절만에 돌아갈 줄은 몰랐기에 나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한 세계에 다이루크가 둘이라니 말도 안 되는 것은 알지만, 그가 함께한 순간에는 오랫동안 비어있었던 마음 속 한 부분이 채워지는 기분이었기에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물어야 하는 아버지의 빈 자리였지,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에게 그 자리를 대신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케이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의 옷자락만 꽉 쥐었다. 그의 앞에서 우리 둘은 어린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대답해줘, 케이아. 오늘 하루는 어땠어?"
"...즐거웠어."

슬픔을 꾹 눌러 참은 목소리로 대답한 케이아는 평정심을 조금 되찾고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네가 만들어 준 특제 오후의 죽음은 내가 마셔본 술 중에 최고였어."
"그거 고마운 칭찬이네. 평생 기억하도록 하지."

그는 뿌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케이아의 머리를 크게 쓰다듬었다.

"바다에 갔을 때는 같이 옷이 젖는데도 내 장난을 전부 받아 줬어."
"나도 오랜만에 옛날처럼 놀아서 좋았어. 무뚝뚝한 지금의 다이루크도 사실은 그렇게 놀고 싶을 걸."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곁눈질했다. 그의 짓궂음에 헛웃음이 터져나왔지만 딱히 부정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요리 실력도 엄청 늘었더라. 어르신이 해 주는 요리를 먹으러 미래로 가고 싶을 정도야."
"맛있게 먹어줘서 나도 고마웠어."

다시 한 번 격통이 오는지 가슴을 부여잡은 그는, 호흡을 가다듬은 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케이아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예감했다.

"마지막으로...안아봐도 될까."

미래의 다이루크가 케이아를 향해 팔을 뻗었다. 케이아가 나를 등지고 있었기에, 두 사람이 끌어안자 그의 시선은 케이아의 어깨 너머에 있는 나를 향했다. 그 순간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로등에 비친 그의 눈시울이 숨길 수 없이 붉었다. ​그렇게 시선을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 자신이기도 하니까,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온 시간선에서는 더이상 케이아가 없다는 것을. 케이아가 먼 미래에도 계속 변함없는 모습이라고 말했던 건 그런 의미겠지. 죽은 자는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만 살아가기에, 변치 않는다. 그는 아마 마셔줄 사람이 없는 오후의 죽음 레시피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생선을 맛있게 요리하기 위해 이국의 요리를 배웠을 것이다.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생선을 즐겨 먹지도 않으면서, 더이상 만날 수 없는 상대가 좋아할만한 것들을 하나둘씩 만들며 길고 긴 시간을 보냈겠지. 오늘 하루 케이아에게 칵테일을 원없이 만들어 주며, 함께 바다에 가며, 직접 요리한 음식을 먹여 주며 한없이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눈빛의 근원은 바로...
가슴을 에는 그리움.

"가 버렸어."

가로등 불빛 아래서 케이아가 조금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포옹을 끝내자 그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 언제 있었냐는 것처럼 아무런 전조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케이아와 함께 보낼 수 있어 행복했을까. 
허전한 마음에 축 늘어진 케이아의 어깨를 감싸며 나는 말했다.

"오늘 밤에는 다운 와이너리로 가자."

그가 충고했던 것처럼 앞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자. 그리고 가능하면 그가 겪은 미래를 피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 




그가 원래의 시간선으로 돌아간 후, 케이아는 며칠 내내 특제 칵테일의 비법을 궁금해했다. 당연히 나도 그 특별한 오후의 죽음을 재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이아에게 그것을 마시게 한 그의 심리는 헤아릴 수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시간선의 다이루크로서 케이아의 기억에 남고 싶었던, 약간의 욕심이었겠지. 다이루크 라겐펜더라는 사람의 깊은 곳에 그런 집착이 있는 것 쯤은 스스로도 인정한다. 그래도 계속 그에게 지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의 특제 오후의 죽음을 넘어서는 레시피를 개발해 케이아에게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다. 



다이케이
 
2024.04.25 22:28
ㅇㅇ
모바일
눈에서 땀나...
[Code: b60b]
2024.04.28 16:33
ㅇㅇ
모바일
다른 시간선에선 케이아가 없구나ㅜㅜㅜㅜㅜ 지금의 다이루크쪽는 나비효과로 둘다 살았으면 좋겠네 자꾸 미래 다이루크가 마음에 걸려서 슬프다
[Code: 44f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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