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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4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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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가면 어느 정도 감시를 당할 거라고 예상은 했었어. 하지만 허니가 그것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경호원이나 사용인의 감시는 이미 겪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보수적인 부모님은 대학생이 되어도 허니에게 통금 시간을 정해뒀었거든. 그래서 통금 시간이 지나면 집을 나가지 못하도록 사용인과 경호원에게 감시를 하라고 했어. 그렇다고 시키는 대로 가만히 집에 있을 위인이 아니었기에 허니는 감시를 피하는 데는 도가 텄어. 그래서 바로 삼촌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허니의 속을 썩였어. 8년 만에 재회한 빌은 허니의 기억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어. 빌은 정말 하루 종일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허니와 함께 있었어. 어릴 적 남매는 결코 이런 사이가 아니었어. 삼촌 집에서 지내다가 갑자기 부모님과 살게 된 허니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벅찼어. 부모님과 가까워지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는 어떻겠어. 사정은 빌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둘은 넓은 저택을 잘 활용해서 식사 시간은 제외하고는 거의 마주치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사용인이 해도 될 법한 것을 빌이 손수 하고 있었어. 첫날 토한 걸 닦아주거나 세수를 시켜준 건 뭐 그럴 수 있다고 쳐. 그런데 욕실에서 나와 서랍에서 옷을 꺼내더니 자기가 갈아입혀주겠다는 거야. 당황한 허니가 자기도 모르게 싫다고 소리쳤는데 그 말을 들은 빌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어.



"싫어? 왜."



가라앉은 녹안과 눈이 마주친 순간 허니는 알았어. 빌은 내가 불쌍해서나 사람이 변해서 챙겨주는 게 아니야. 내가 연기를 하는 건지 의심하고 있는 거야. 빌은 매일 간호사가 허니의 옷을 갈아입혀줬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러니 시험해보려고 거지. 허니는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지 머리를 굴렸어.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없을지 찾던 중 서랍 위에 놓여있던 공주님 인형이 떠올랐어. 그거다! 좋은 생각이 난 허니는 바로 부루퉁한 표정을 만들었어. 그리고 빌이 들고 있던 옷을 세게 던져버렸어



"이 옷 싫어. 공주님 옷."

"공주님 옷?"



빌이 되묻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허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랍 위에 놓인 공주님 인형을 가지고 왔어. 그리고 빌에게 그것을 쑥 내밀었어



"나도 공주님 옷 입을래."

"지금은 없으니까 다른 거 입어."

"싫어! 다른 거 안 입어!"



떼를 쓰는 내내 빌의 표정이 좋지 않아 강제로 옷을 벗길까봐 걱정됐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별말 없이 물러서는 빌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허니는 두 팔을 팔랑거리며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 위로 올라가 기린 인형에게 귓속말로 자신의 승리 소식을 전했어. 허니가 혼자 노는 동안 빌은 인형이 입은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어. 1시간 후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어. 줄지어 계단을 올라온 사용인들이 방안에 쇼핑백을 가득 두고 나갔어. 빌은 침대에 앉아있는 허니에게 고갯짓을 했어. 꺼내봐.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침대에서 내려온 허니가 가까이 있는 쇼핑백 하나를 쏟아봤어. 그리고 그 안에서는 아이들이 입을 법한 유치한 공주님 드레스가 나왔어.



"와…와아…."



아무래도 빌이 전화로 사오라고 시켰나봐. 이런 게 어른 사이즈도 있구나…. 손에 든 드레스를 살피며 허니는 순수하게 감탄했어. 하지만 이걸 자신이 입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어.



"마음에 들어?"

"으, 응!"



허니는 구겨진 표정을 숨기기 위해 드레스에 얼굴을 파묻고 신이 난 척을 했어. 결국 허니는 빌이 벗기는 대로 옷을 벗고 드레스로 갈아입게 됐어. 위아래 겉옷을 벗고 속옷 차림이 된 몸을 위에서 아래로 느릿하게 훑는 게 느껴졌어. 발끝까지 내려간 시선이 다시 올라와 허니와 눈을 마주쳤어. 빌은 허니의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어. 불쾌해하거나 부끄러워하면 그걸 걸고 넘어지려는 거겠지. 그 수에 넘어갈 줄 알고. 허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빨리 입혀달라고 폴짝거리며 빌을 재촉했어.



"옷 다 입었으니까 놀자."

"뭐하고?"

"숨바꼭질. 빌이 술래야."



스물까지 세고 찾아! 빌에게 채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허니는 곧장 방문을 열고 달리기 시작했어. 집안팎을 쏘다니며 잠시라도 빌과 떨어져서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지려고 한 거야. 그게 지금 허니가 벽장에 숨어있는 이유였어. 어둡고 좁은 벽장 안에서 허니는 어떻게 해야 빌에게 들키지 않고 삼촌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지 궁리했어. 사실은 집에 온 첫날 밤에 연락을 하려고 했었어. 그래서 빌이 방에서 나가기를 기다렸는데 나가기는커녕 잠까지 같은 침대에서 자겠다는 거야.



'나 혼자 잘래.'

'안 돼. 밤에 나쁜 사람이 몰래 들어올수도 있어.'



지가 나쁜 새끼면서 뭐래는 거야. 기가 막혀서 턱끝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삼키고 싫다고 우겨봤지만 통하지 않았어. 마지막에는 같이 자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냐고 묻는데 할 말이 없잖아. 결국 허니는 집에 와서 매일 빌과 한 침대에서 잤어.



"어떡하지…."



일단 연락을 하려면 침대 밑에 숨겨둔 물건을 꺼내야 했어. 장난감을 굴려서 꺼내는 척 해보는 것도 생각해 봤어. 하지만 빌이 자기가 꺼내주겠다고 나서면 큰일이잖아. 안이하게 시도할수는 없었어. 대체 빌이 원하는 게 뭘까? 왜 나를 살려두는 걸까? 이렇게 된 거 차리리 빌에게 원하는 게 뭔지 물어보려고까지 해봤어. 하지만 그러면 제정신이라는 것을 들키게 될 테고 그 일을 기억한다는 것도 알게 되겠지. 그럼 설령 원하는 것을 주더라도 살려두지 않을 거야. 걸음은 신중하게 내디뎌야 했어. 가장 우선시 해야하는 것은 목숨이야. 그리고 허니가 생각하는 안전한 방향은 삼촌이 있는 쪽이었어. 살아남는 것만, 들키지 않는 것만 생각하는 거야. 빌이 부모님을 왜 죽였는지, 나에게 원하는 게 뭔지, 그런 건 삼촌을 만난 다음에….



"허니."



생각에 빠져있던 허니는 벽장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어. 그러고 보니 숨바꼭질 중이었지. 허니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안에 없는 척을 했어. 이대로 조용히 있으면 다른 곳을 찾으러 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소용 없는 짓인 것 같아. 밖에서 치맛자락을 잡아 당기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보니 벽장 문틈으로 빛과 함께 드레스가 덜 들어온 게 보였어. 이놈의 드레스 때문에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숨어도 다 들켜. 속으로 짜증을 내며 허니는 내일부터 드레스 말고 다른 걸 입기로 했어. 정확히는 빌에게 입혀달라고 말하기로. 불만스러운 얼굴로 벽장에서 나온 허니는 앞에 서있는 빌을 째려봤어.



"빨리 찾으면 재미없어."

"네가 못 숨는 걸 어떡해."

"한 번 더 할래!"

"내일. 이제 저녁 먹어야 돼."



허니는 입술을 삐죽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빌의 손을 잡고 다이닝룸으로 걸어갔어. 옆에서 빌이 하는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허니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웠어. 빈틈이 없다면 아예 정면돌파를 해보는 거야. 허니는 빌에게 직접 삼촌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해보기로 했어. 빌도 허니가 삼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잘 알아. 이런 상황에 의지할 상대를 찾는 건 당연하잖아. 그러니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서 타이밍을 노리던 허니는 빌이 칼질을 할 때에 맞추어서 말을 꺼냈어.



"나 전화."

"전화?"

"삼촌이랑 얘기할래. 전화해줘."



허니의 입에서 삼촌 얘기가 나온 순간 빌의 눈썹이 꿈틀거렸어. 하지만 바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어.



"삼촌 바빠서 전화 못 받아."

"아니야. 내가 하면 꼭 받는다구 했어."

"지금은 안 돼. 나중에."

"나중에 언제?"



빌은 대답하지 않고 식사를 이어갔어. 두루뭉술한 말로 달래기만 하고 결국은 안 해주겠다는 뜻인 거지. 뻔뻔한 자식. 빌의 태도에 열이 받은 허니는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어린이용 포크를 세게 쥐었어



"삼촌도 죽였어?"



맞은편에서 들린 목소리에 칼질을 하던 빌의 손이 멈췄어. 마주보고 있는 식탁은 싸늘했어. 썰다 만 고기를 내려다보며 빌은 방금 허니의 말투가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느리지도 어수룩하지도 않은, 평범한 성인 여성의 그것과 같다고. 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허니는 여전히 몸만 큰 어린아이였어. 입가에 소스를 묻힌 채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빌을 바라보고 있었어



"나쁜 사람들이 삼촌도 죽였어?"



재차 묻는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발음이 뭉개지고 파르르 떨렸어. 빌이 대답해주지 않자 허니는 긍정으로 받아들인건지 포크를 집어던지고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어. 사용인이 바로 달려와 허니를 달랬지만 그럴수록 울음소리는 더 커지기만 했어. 묘한 표정으로 허니를 응시하던 빌의 입에서 삼촌은 죽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어. 그제야 허니는 훌쩍거리면서 울음을 그쳤어



"삼촌이 안 바빠지면 그때 전화해보자. 알았지?"



건네는 말은 다정했지만 눈빛은 강압적이었어. 더는 이 얘기를 꺼내지 말라는 명백한 경고였어. 그 눈빛을 피하듯 허니는 얼굴을 닦아주는 사용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 이후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식탁에서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았어. 정면돌파는 실패로 끝이 났어.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온 허니는 속으로 빌의 욕을 하며 주방놀이 세트를 가지고 놀고 있었어. 빌은 의자에 앉아서 서류를 읽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한번씩 곁눈질로 허니가 노는 모습을 관찰했어. 그러고 있으니 밖에서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났어. 사용인이 욕조 준비가 됐다고 알리러 온 거였어. 빌은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두고 그 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어. 감정 변화가 적은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졌어. 목욕 때마다 허니는 하기 싫다고 생떼를 부리고 소리를 질렀어. 매일 욕실에 들어가는 것만해도 족히 30분은 걸렸기 때문에 벌써부터 미간에 주름이 잡힌 거야.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맡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 빌은 허벅지를 한번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니의 옆에 가서 쪼그려 앉았어.



"허니 목욕하러 가자."

"목욕 어제 했어."

"오늘도 많이 뛰어다녔잖아. 해야돼."



빌은 허니가 도망가면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팔을 자유롭게 뒀어. 장난감 찻잔을 손에 든 허니는 고민하는 것 같았어. 평소였으면 벌써 싫다고 소리를 빽 질렀을 텐데 오늘은 웬일로 얌전히 일어났어. 앞서 걷는 허니를 보며 빌은 속으로 안도하고 따라 걸었어. 욕실로 걸어가며 허니는 집에 와서 처음 목욕한 날을 떠올렸어. 욕실 앞에서 얼마나 실랑이를 벌였는지 몰라. 허니가 아무리 혼자 할 수 있다고 해도 빌은 다칠 수 있으니 자기가 도와줘야한다고 우겼어. 빌의 수작은 뻔했어. 싫으면 연기를 그만하라는 거지. 여기서 잘못된 판단을 하면 모든 게 들통날 가능성이 있었어. 결국 허니는 남자친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알몸을 오빠에게 보여주기로 결심했어. 욕조 안에서 허니는 정말 혼신의 연기를 했어. 거품과 장난감에만 관심을 쏟고 빌에게는 절대 눈길을 주지 않았어. 크고 두꺼운 손이 몸을 스칠 때마다 허니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어. 그날의 민망함과 수치심은 아마 십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거야. 물론 그때까지 살아있다면이겠지만.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매일같이 빌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하다보니 생각보다 금방 적응이 됐어. 이제 허니는 빌에게 물총을 쏘며 장난을 칠 정도로 여유가 생겼어. 하지만 역시 빌의 손이 몸에 닿을 때만큼은 조심해야했어. 샤워볼을 들고 있다고 해도 가슴을 훑거나 허벅지 사이로 손이 들어올 때는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거든. 그럴 때는 간지럽다면서 웃는 것으로 위기를 넘기고는 했어.

목욕을 끝낸 후 빌은 허니의 몸에 바디로션을 발라줬어. 상큼한 과일향이 허니를 기분 좋게 만들어줬어. 발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온 빌이 팔에 로션을 발라주자 허니는 자기 팔을 얼굴로 가져가 킁킁거렸어.



"냄새 좋아."

"좋아?"

"응."



빌은 팔에 얼굴을 부비는 허니를 가만히 바라봤어. 젖은 머리와 보기 좋게 굴곡진 몸이 묘한 충동을 불러일으켰어. 빌의 손이 허니의 어깨를 덮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어. 어쩐지 그 손길이 낯설게 느껴져 허니가 팔을 내리고 빌을 올려다보려고 했어. 그런데 그보다 먼저 빌이 상반신을 숙여 허니의 하얀 목덜미에 바짝 다가갔어. 귀 가까이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자 허니의 척추를 타고 소름이 돋았어. 냄새 좋네. 가볍게 말하고 떨어진 빌은 잠옷과 드라이어를 가지러 갔어. 빌이 바로 뒤를 돌아서 망정이지 바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하마터면 들통날 뻔했어. 지금 뭘한거지? 이것도 시험한 건가? 알몸까지 보여준 마당에 더는 부끄러울 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방금 빌의 그 행동은 허니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어.

따뜻한 드라이어 바람을 맞으며 허니는 연신 하품을 하며 꾸벅꾸벅 졸았어. 머리를 다 말렸는지 드라이어 소리가 멈췄어. 빌은 화장대에 있는 브러쉬로 헝클어진 허니의 머리카락을 빗겨주며 물었어.



"오늘은 일찍 잘까?"

"응…."



이미 눈이 감긴 허니가 잠에 취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어. 거울 너머로 졸고 있는 동생을 지켜보는 빌의 입꼬리가 보일듯 말듯 움직였어. 머리 정돈이 끝나고 둘은 바로 침대로 올라갔어. 따뜻한 스탠드 불빛이 방안을 채웠어. 침대에 앉아서 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하던 빌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어. 허니는 이미 깊게 잠이 든 것 같았어. 허니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리해준 빌은 옆에 누워서 스탠드 불을 끄고 잠들었어.

저택 안은 쥐죽은듯 조용했어. 새벽 2시가 지났기 때문에 지금 깨어있는 건 저택 밖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 뿐이었어. 캄캄한 방 안에서 허니는 눈을 떴어. 잠시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귀를 기울여봤어. 옆에서 일정한 숨소리가 들려. 빌은 잠이 든 게 확실했어. 허니는 목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어. 착하게 목욕도 하고 일찍 자려고 졸린 척을 한 것도 다 이 순간을 위해서였어. 침대 밑에 있는 물건을 꺼낼 기회가 없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되는 거야. 빌에게 한 번 까였다고 포기할 허니가 아니었어. 암흑 속에서 허니의 눈이 반짝였어. 목표는 협탁에 놓여있는 빌의 폰이었어. 들킬까봐 숨까지 참고 허니는 빌의 몸 너머로 신중하게 팔을 뻗었어. 평생 지낸 방이니 협탁 위치는 보이지 않아도 찾을 수 있었어. 예상대로 손끝에 딱딱한 것이 만져졌어. 협탁이야. 심장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귀가 아렸어.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허니는 빌에게 제 심장 소리가 들릴까봐 걱정됐어. 손가락으로 협탁을 더듬으며 위로 올라갔어. 그러자 네모나고 긴 익숙한 형태가 만져졌어. 폰이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 안 살을 깨물고 손가락으로 폰을 감싸쥐었어. 그리고 그것을 살며시 들어올리던 그때였어.



"너 뭐해."



어둠을 가르고 빌의 저음이 들렸어. 사람은 너무 놀라면 소리도 낼 수가 없고 몸도 움직이지 않나봐. 허니는 손을 뻗은 채로 눈도 깜빡이지 못했어. 침대를 짚은 손에서 진동이 전해졌어. 빌이 몸을 일으키는 것 같았어. 그것에 반응하듯 퍼뜩 정신을 차린 허니는 재빨리 폰을 놓고 더 뒤쪽으로 손을 뻗었어



"나, 나 물…."

"깨우지 그랬어."



빌이 스탠드 버튼을 눌렀는지 주변에 은은한 빛이 퍼졌어. 빌의 폰 뒤에는 핑크색 텀블러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허니의 손끝은 그 텀블러에 살짝 닿아있었어. 빌이 몸을 일으키는 게 보이자 허니는 팔을 거두었어.



"자."



빌이 건네준 텀블러를 두손으로 받자마자 허니는 빨대를 입으로 가져갔어. 침대 헤드에 기댄 빌이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렸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쉴 틈도 없이 물을 마셨어. 그러자 요동치던 눈동자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어. 허니는 빌에게 텅 빈 텀블러를 넘겨주며 졸린 표정을 지었어. 그리고 옆으로 돌아눕고 눈을 감았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었지만 내심 빌이 무슨 말을 할까봐 조마조마했어. 스탠드 불이 꺼지고 등 뒤에서 빌이 눕는 게 느껴졌어. 무사히 넘어갔나보다. 바짝 긴장했던 허니의 몸에 힘이 풀렸어. 마음이 놓이니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아 바로 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았어.



"허니."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음성에 허니의 몸이 단번에 뻣뻣해졌어. 망했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초조함이 엄습해 이불을 꽉 쥔 허니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했어. 빌이 추궁을 해서 위험해질 것 같으면 창문으로 도망치는 거야. 다치기야 하겠지만 총 맞는 것보다는 낫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허니는 빌의 다음 말을 기다렸어.



"삼촌 너무 믿지 마."



그런데 빌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말에 당황한 나머지 허니가 들은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몇 초 정도 시간이 걸렸어. 삼촌을 믿지 말라고? 무슨 소리지? 연기를 하는 것도 잊고 허니는 빌 쪽으로 몸을 돌렸어.



"왜?"

"삼촌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야."



묘하게 뼈가 있는 말이었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보이지 않는 빌의 얼굴을 좇으며 그의 의중을 파악해보려고 했지만 역시 무리가 있었어. 허니는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누웠어. 멍하니 까만 방안을 응시하고 있으니 구석에서 느리게 점멸하는 초록색 점이 보였어. 아마 끄는 걸 잊은 장난감일 거야. 그 불빛이 허니를 어릴 적 기억 속으로 데려가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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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삼촌이 장난감 다 가지고 놀면 끄라고 했지.'



새벽에 갑자기 움직여서 놀란다니까? 찰리는 제법 엄한 목소리를 내며 카펫에 앉아있는 허니를 한팔로 안아들었어. 그리고 소파에 걸터 앉으면서 허니를 제 무릎에 내려줬어. 허니가 짧게 난 찰리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찰리는 밑에서 움직이던 강아지 장난감을 집어들었어



'봐. 여기 버튼 있지? 다 가지고 놀았으면 이걸 눌러서 끄는 거야.'



찰리는 제 턱을 만지던 작은 손을 가져가서 버튼을 눌렀어. 그러자 달려나갈 것처럼 움직이던 장난감이 멈췄어. 허니는 다리를 달랑거리며 보들보들한 인형을 쓰다듬었어. 사실 가르쳐주지 않아도 허니는 장난감 끄는 법을 알고 있었어. 그냥 찰리를 놀래키는 게 재밌어서 끄지 않은 것뿐이야. 그래서 그저 배시시 웃으며 딴짓을 했어.



'왜 대답을 안 할까? 삼촌이 말하면 네 해야지.'

'어흥.'

'어흥 아니고 네. 그리고 강아지는 멍멍 한다고 했잖아.'

'어흥!'



4살 허니는 도무지 삼촌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어. 저를 올려다보며 조막만한 손으로 손톱까지 세워서 호랑이 울음소리를 내는데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찰리는 하던 말도 잊고 웃음을 터뜨리며 허니를 꽉 끌어안았어.



'공주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지?'

'삼촌!'

'그렇지. 누가 물어보면 꼭 그렇게 대답해야 돼.'



매일 한번은 꼭 하는 질문을 끝내고 나면 찰리는 허니를 번쩍 들어 목마를 태워줬어.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허니의 가슴에는 온기가 퍼지고 절로 웃음이 났어. 그런 자상한 삼촌이 나쁜 사람일 리가 없잖아. 추억에 젖어 장난감 불빛을 바라보던 허니는 이제 그만 눈을 감기로 했어. 삼촌 꿈 꾸고 싶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허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들었어.








빌슼너붕붕
훈남너붕붕
2024.04.24 08:3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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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야 고생이 많다..ㅋㅋㅋㅋㅋ
[Code: c94c]
2024.04.24 08:4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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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과 방패 싸움이네 둘 다 머리 잘 굴린다..
[Code: 8bff]
2024.04.24 09:2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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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개맛도리....
[Code: 3131]
2024.04.24 10: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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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존맛... 허니 폰 들킬까봐 내가 다 조마조마ㅠㅠㅠㅠㅠㅠㅠ
[Code: ce71]
2024.04.24 11: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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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ㅜ내가 다 조마조마하네진짜
[Code: 9b52]
2024.04.24 13:5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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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대작이네 어나더
[Code: e13f]
2024.04.24 14:2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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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겠다 그래서 누가 착한놈이고 누가 허니편이야 ㅠㅠㅠㅠ 센세 진짜 재밌어요 어나더
[Code: 36f9]
2024.04.24 14:5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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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머나..
[Code: 6efe]
2024.04.24 22: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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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찰리삼촌이 뭘했길래 나쁜놈이라는거지????억나더로 풀어줄거지 센세 ??
[Code: 6b76]
2024.04.25 00:1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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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재밌어ㅠㅜㅜㅠ
[Code: c9bf]
2024.04.27 05:3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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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 너무 힘들거같아ㅠㅠㅠ하지만 힘들수록 결과는 달콤하겠지! 삼촌 정체 나오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었어요 선생님 어떻게 제마음을 아신거죠 역시 지하실로 납치해야겠어
[Code: c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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